- 해연갤 - 일본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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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1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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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속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것이다.
잊지 않는 것.
잊지 않게 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 * * * *
하늘은 깊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녁 노을의 잔여물은 수평선에 남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그 햇살은 이미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공기는 서늘해지고, 주변의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리어 다양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저택의 입구에 다다르자,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내부는 조명이 어둡고,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이며 마치 그의 귀환을 환영하듯 했다.
"도련님, 또 묘지에 다녀오셨습니까."
마치다가 대저택으로 복귀했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기운 후였다.
"답답해서 바깥바람 좀 쐬었을 뿐이다."
"이 날씨에 가시면 건강을 해치기 쉽습니다."
현관에 들어서자 1층 중앙 홀 곳곳에서 고용인들이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른 소란스러운 공기에 마치다는 집사에게 코트를 건네며 물었다.
"아버지는?"
"주인님은 황실이 주최하는 연회에 가 계십니다."
"그 빌어먹을 황태자 앞에서 재롱이라도 떠시나 보군."
머리칼보다 조금 더 짙은 색 눈썹이 슬쩍 움직였다. 마치다의 불경한 표현을 집사는 애써 모르는 척 했다. 그리곤 적나라한 비아냥에 혹여 누가 들을까 황급히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 명하신대로 감시자는 잘 붙여두었습니다만."
"다음부턴 내가 직접 동행하겠다고 아버지께 전해."
"하지만 직접 나서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눈들이 많으니까요."
빳빳한 셔츠 깃을 세우던 마치다의 손길이 멈췄다. 단호한 집사의 말에 결국 마치다의 얼굴이 짜증으로 와락 일그러지고 말았다.
"의심이라니? 그 자가 누구이기에?"
"8황자측에서 신원이 불분명한 자의 원조는 일체받을수 없다며, 비밀리에 접선 요청을 하셨습니다."
"하! 이젠 제 아군도 믿질 못한다고?"
집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황실에서 돌아가는 상황이 조금 긴박하긴 합니다. 애초에 8황자측의 입지는 견고하질 못하니, 정체를 숨긴 자가 내미는 불분명한 호의에 대해 쉽게 예민해지고 의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8황자는 황태자를 '처단'할수 있는 '명분'을 가진 유일한 자다.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그가 황실에서 숨어 산지 수년이 흘렀다. 공식석상에서 한번도 자신을 드러낸적 없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매우 병약하고 어리숙한 인물이라고.
그래서 되려 승산 있는 싸움이라 생각했다.
마치다는 황태자를 지지하는 제 가문의 원로들도, 아버지의 뜻도 모두 저버리고, 8황자의 첩자를 자청했다. 뒷세계에서 끌어모은 자신의 자금과 인재를 8황자의 세력으로 흡수시켜, 그가 하루 빨리 황태자를 처단하길 원했다.
그러나 쉽게 조정 할수 있을거라 여겼던 꼭두각시가 제 예상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그는 조끼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는 손길 또한 몹시 거칠었다.
"골치 아프게됐군. 고작해야 세상물정 모르는 애송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꽤 영리한건지, 아니면 겁이 많은 건지."
"8황자측의 요청을 어찌 처리하시겠습니까."
"내 대역을 적당히 꾸려서 은밀히 독대하도록해. 50대 후반의 상인으로 너무 가볍지도, 고상하지도 않은 자가 좋겠군. 이번 광산 투자로 얻은 수익의 전부를 원조할 생각이야."
"하지만, 도련님. 그 정도의 엄청난 대금은 신중히 고려해 보심이..."
"지금 내겐 주저할 시간조차 없어."
황태자를 대신 죽여줄수 있다면 악마에게 내 영혼이라도 바치고 싶으니까.
마치다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린 노부유키의 시신이 지하 감옥에서 사라진 이후, 처리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대충 정리했다곤 해도 머리에서 정리되지 못한 집념이 곳곳에 묻어 있을 터다.
아직도 노부유키는 제 품에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 빨리 황태자를 처단하고, 빈 무덤이 있는 그 자리에 평안을 안겨주어야 한다.
"하아...."
집사가 나간뒤, 마치다는 익숙한 손길로 술잔에 술을 따라 연거푸 들이마셨다. 명민한 눈이 흐릿하게 풀어지고 불안정하게 펄떡이던 심장 박동도 안정을 찾았다. 그는 자꾸만 늘어지는 몸을 의자에 기대고선 고민을 이어 갔다.
어떤 식으로건 끝을 내야 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황태자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를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그 무엇이건.
"제기랄."
속삭임을 닮은 욕설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마치다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대위에 쓰러졌다. 주위는 완연하게 깔린 어둠으로 고요했다. 풀 소리인지 벌레 소린지 구분할 수 없는 밤 소음이 꿈같은 감각을 거들었다.
* * * * *
이런 연회였다면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역겨운 버러지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홀 밖으로 향하는 마치다의 걸음은 고고하면서도 거침없다.
"얘야, 누가 볼까 무서우니 그 험악한 미간 좀 펴라."
마치다는 옆에 선 자신의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대공작은 제게 조금의 존중도 보이지 않는 아들, 마치다 케이타에게 혀를 한 번 차곤 가벼운 경고를 날렸다.
"곧 황태자 전하께서 오실 게야. 그분 앞에서 그따위 표정은 짓지 말거라."
마치다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아버지를 무시했다. 옆에서 그가 씨근덕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이곳은 제 아버지와 같은 더러운 작자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드는 편이 더 많은 정보를 입수할수 있지.'
마치다는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빛이 적은 테라스에서 어둠이 드리워진 얼굴로 싸늘히 웃는 그는 이 진흙탕 소굴에서 가장 크고 앞선 자 같았다. 하지만 실상은 이 흉측스럽고 도색적인 무리에서 섞이지 못한 이방인 같은 존재였다.
"황제가 죽고 아직 즉위식도 치러지지 않은 상황에서 연회부터 먼저 벌이다니, 황태자의 속이 너무 빤하지 않습니까."
"그 입...!"
"그 작자가 황제가 되고 나서 제국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치다는 웃음기 하나 없이 차갑게 비아냥거렸다. 그가 내는 목소리의 온도가 내려갈수록 대공작의 얼굴은 붉게 일그러졌다. 어리석고 멍청한 아버지다. 마치다는 그가 경멸스럽고 또 증오스러웠다.
"이, 이놈! 혼자 고고한 척 맹랑하게 굴지말거라!"
대공작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달려들었지만, 마치다는 제 멱살을 잡으려드는 아버지를 가볍게 밀쳤다. 검술과 훈련으로 단련된 몸은 저 각다귀 같은 아버지의 몸과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까아아악!"
그때였다.
그의 고함과 함께 홀 안에서 비명이 터진 것은.
마치다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연회홀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고함이 터졌다. 펄럭이며 걷어진 커튼 뒤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화, 황궁 기사단에서 이 무슨 행패인가! 곧 황태자 전하께서 오실 걸세. 대체 무엇을 믿고 이리 방만하게 구는지 모르겠군!"
공작새처럼 한껏 치장한 귀족들이 검을 든 기사들에게 호통쳤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그들은 사냥을 시작한 사냥꾼처럼 혹은 먹이를 구석에 충분히 몰아넣은 맹수처럼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피가 지워진 자국 위로 다시 피가 묻고 흐른 자국이 선명한 회색 갑옷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위협이 되었다.
"자, 그대들의 황태자는 여기 있다."
툭, 철퍽-!
피 냄새가 분노하듯 풍겼다. 이후 진흙 덩어리가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피로 붉게 물든 머리칼, 반쯤 뜨인 눈동자는 분명 그들이 지금까지 목숨 걸고 모시던 황태자의 머리였다.
"황태자는 황제 암살 죄와 황족 살인 미수죄로 처분하였다."
황금 투구속 눈이 날카로운 칼처럼 주변의 인물들을 훑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황제 폐하의 암살에 가담했다는 심증이 충분한 바! 제국의 태양을 지게 만든 죄가 크니 이 자리에서 즉결 처단한다!"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무죄를 호소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넘쳤으나 회색 갑옷의 기사들은 마치 연약한 짐승들을 몰듯 그들을 낚아채어 무릎 꿇리기 시작했다.
마치다는 혼란의 도가니 가운데에서 현실감 없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강하게 들어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방심했다. 8황자 측에서 먼저 움직였을 줄은...'
이윽고 두 명의 기사가 뒤로 다가와 마치다의 팔을 낚아챘다. 마치다는 그대로 끌려가 곧바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 옆엔 방금까지 살아 숨쉬던 자들의 피가 쏟아져 적시고 있었다. 시체라는 것이 도무지 말이 아니었다. 온통 난도질을 해 놓은 것 같았다.
마치다는 이를 악물었다.
'패권을 둘러싼 피의 선풍이 이토록 다급하게 황실에 불어닥치다니.'
베일에 가려진 8황자는 육체적으론 심약했다지만 결코 머리가 나쁜 자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이 판도를 뒤집을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 끝엔 자신의 가문을 이대로 유지할 수도, 목숨 또한 부지할 수도 없을 거라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제 모든것이 끝났군. 그래도, 미련은 없다.'
잠시 닿았다 떨어지는 칼날의 감촉, 그럼에도 목숨을 구걸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허무한 감상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최후도 나쁘지 않았다.
마치다는 이미 충분히 지쳐있었고, 하루 빨리 편안해 지고 싶었으니까.
"멈춰."
그때, 단호한 목소리가 내리쳤다.
마치다는 시선을 들어 제 옆을 바라보았다. 아까 황태자의 목을 가져오던 황금 갑옷의 기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다는 그 낯선 목소리를 들으며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살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임에도 어딘가 익숙했다.
투구의 얇은 틈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이 자꾸만 마치다의 불안감을 들쑤셨다. 목에 칼날이 대어졌을 때도 조용했던 심장이 쿵, 쿵, 울리기 시작했다.
"저것은 건드리지마."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그가 황금 투구를 벗었다.
그 순간 마치다는 터질 듯 울리던 심장이 한순간 저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물건처럼 넘겨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시리게 벼려진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잠시간 세상이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순간 상대의 미간이 불쾌함을 표하며 움푹 패는 것을 보고 나서야 손발에 저릿하니 감각이 돌아왔다. 단단한 눈매와 형형히 빛나는 그 눈에 담긴 감정은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마치 여러 물감을 푼 물처럼 설명할 수 없는 흐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기사들이 들이댄 칼날보다도 날카로워 마치다는 잠시 숨을 멈췄다. 역겨운 꼬리들의 연회와 그들을 사냥하는 갑옷의 물결에도 명확히 느껴지지 않았던 현실감이 스멀스멀 마치다의 머릿속을 차지해 가고 있었다.
말도 안된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다시 살아 돌아오다니.
그것도 가장 고귀한 황실의 핏줄로-.
스즈키 노부유키는 엉클어진 머리칼을 넘기며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그 동작을 따라 마치다의 시선도 천천히 움직였다. 기묘할 정도로 짙은 눈동자가 조용히 마치다를 응시했다.
"마치다 케이타."
"..........."
"이것은 내가 왕위를 찬탈하여 얻은, 가장 값진 전리품이 될것이다."
그가 짓는 웃음은 누가 보아도 명백히 불쾌한,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은 미소였다. 그리고 너무도 명료한 말투였다. 뇌리에 울리는 낮고 또렷한 음성이었다.
불신과 적의를 자연히 익히게 된 얼굴. 노골적인 증오가 담긴 눈길을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속에는 자신을 원망하는 가시가 들어 있었다.
경멸은 진심이었다.
혐오 또한 진실이었다.
마치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기도를 태우는 착각마저 일었다. 무슨 말이라도, 무슨 변명이라도해야 했다. 그러나 떠오르는 생각들이 무색하게 현실은 얼간이처럼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노부...
차마, 감히. 15년 만에 만난 이름을 발음하지 못하고, 마치다는 고작 입 모양으로만 그 이름을 속삭였다.
오래도록 붙잡고 있던 끈을 완벽히 놓는 순간이었다.
노부마치
[Code: a01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