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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0:00
정우성이랑 기싸움밖에 더하겠나


- 차를 내온 자가 황비의 시종이라고?
- 오래전부터 근무하던 자라 합니다. 

우성은 생각에 잠김. 독의 후유증인지 황비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음. 처음에는 의관인 줄 알았으니 말 다 했지. 그 사실을 부관에게 털어놓자 그는 당황했다가 창백해졌다가 혼란한 기색이었음. 평소 사이가 어땠냐고 묻자 퍽 좋지는 않았다고 대답함. 우성이 자주 찾아가곤 했다는데 황비쪽에서 항상 냉랭한 편이었다고. 

그렇다면 황비를 의심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황비의 처소에 갔다가 독을 마셨다고 하니. 
우성은 부관을 대동하고 황비의 처소로 향함. 명헌은 서류에 파묻혀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 맞았음. 차를 내오려는 듯 시비를 불렀지만 우성은 됐다는 듯 손을 휘젓고 그의 앞에 앉았지. 

- 독에 대한 소명을 들으러 왔다
- 소명 말씀이십니까.

명헌은 차분히 그를 따라 자리에 앉았음. 당황한 기색이라곤 없는 고요한 기색이었음. 과연 황비가 범인일까. 그렇다기엔 너무 태연한 모양인데, 우성은 대답해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고 명헌은 그에 따름

- 독을 나른 자는 자결했습니다. 전하의 찻잔에 들었던 독을 치사량만큼 복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독의 유통과 행적에 대해 추적하는 중입니다

- 황비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믿어야하지. 
- … 시간을 주신다면 결백을 증명하겠습니다. 
- 내게 독을 먹이려고 했나?
- 아닙니다. 

- 애초에 내가 왜 황비의 처소에 있던 것이지?
- 국정을 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내 집무실이 아니라?

어쩐지 취조가 되어가는 분위기. 날이 선 우성의 태도에도 명헌은 침착했고 부관만 옆에서 안절부절 못함. 명헌은 할 말을 찾듯 느릇하게 눈을 굴리다 우성을 똑바로 바라봄. 우성은 어쩐지 그 눈빛에 꿰뚫리기라도 한 듯 움직일 수 없었음

-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말을 끝으로 명헌은 입을 다물었음.
우성은 할말을 찾기위해 입술을 달싹거림. 아마 지난 밤의 일로 황비는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눈치챘을 터인데, 저렇게 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음. 범인을 잡기위한 상황을 통제하려 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빠져나가기 위함인지... 기억을 잃었으니 알고있는 대로 말하라 추궁할 수도 있었지만 우성은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음.

- ...이만 가보겠다.

우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남. 명헌은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예를 표할 뿐 그를 배웅하지도 않았음. 대체 어느 황비가 황제를 이리 박대하는가. 우성은 치미는 부아를 누르며 자리를 떠남.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우성은 여전히 의문스러웠음. 내가 저 사람을 황비로 맞았다고? 가문과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음 명헌의 가문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면 가문의 다른 여식과 혼인해도 되었고, 국정을 논하기 위함이라면 이전처럼 스승으로 두면 되었음. 연모같은 감정을 갖기엔… 황비는 외모가 빼어난 편도 아니었고 나이도 일곱살이나 많았음. 저보다야 작지만 평균을 웃도는 키에 떡 벌어진 골격은, 잠자리에서도 호위가 필요하여 들인건가 의심이 갈 지경임

물론 품위가 넘치는 태도나 절제되어 있는 행동거지는 손색이 없으며 쇳소리가 섞였지만 강단있는 목소리는 쉽게 듣는이의 주의를 끌어오곤 했음. 치장하지 않았지만 보기좋게 단정한 차림새는 귀감이 될 법 하고.
미색은 아니어도 자꾸만 시선을 끄는 도톰한 입술에, 고요한 눈매 아래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눈동자, 곧게 떨어지는 골격과 그 사이를 채우며 곡선을 만드는 근육이 퍽 보기좋은…

아니, 아니지. 우성은 머리를 휘휘 저어 생각을 쫒아냄. 결정적으로 황제인 저를 이렇게 무심하게 대하는데… 대체 어느 부분 때문에 황비로 들인건지 전혀 감이 오지않았음

우성은 발을 멈춤. 저도 모르게 명헌에 대해 곱씹다 명헌이 머무는 후원까지 와버림. 명헌은 일과시간치곤 드물게 후원에 나와 햇볕을 쬐고 있었는데, 우성을 발견하고 가볍게 예를 차린 뒤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음. 우성의 표정이 더욱 굳어짐. 저것만 봐도, 대체 좋게 봐줄 부분이 어디가 있다고….


왕!!

왕? 우성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봄. 하얀 개 한마리가 우성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음. 우성이 인상을 구기자 왕왕대면서 명헌의 발치로 쏙 숨음. 그걸 보고 명헌이 희미하게 웃자 우성의 속은 더 뒤틀렸음. 

우성이 허락도 없이 개를 키우는 것이냐고 묻자 명헌은 키우는 건 아니고 몇번 밥을 챙겨주다보니 그리 되었다고 대답함. 그러면서 현란한 손길로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음

- 아무튼 허락 없이 후원에 개를 들이지 않았는가?
- 허락이 필요합니까?

평온하게 되묻는 명헌, 그 와중에 개는 또 정우성 말투가 위압적이 되니까 왕왕 짖기 시작함

- 전하께선 후원에 날아오는 새 한마리에도 허락을 원하십니까?
- 왕!!! 왕!!!
- 새와 개가 같나?
- 왕왕!!!!
- 다를 바가… 우성, 조용히. 
- 뭐?

명헌의 말에 하얀 개가 조용해졌고 우성은 기가 차서 헛숨을 내뱉음

- 지금 저 개한테 내 이름을 붙인 건가?
- …사용한 자와 뜻이 다릅니다.
- 글자가 달라도 발음은 같지 않나! 능멸에도 정도가 있지!

명헌은 제 실수를 깨달은건지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었음. 

- …황비,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건가?
- …
- 저건 내가 데려가겠소
- …전하. 

명헌이 뒤늦게 우성을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시종 두셋이 달려와 낑낑대는 하얀 개를 끌고 사라졌음. 
화가 사그라들지 않은 우성은 명헌에게 그자리에서 금족령을 내렸지만, 개가 끌려간 쪽만 바라보고 있는 명헌에겐 와닿지 않는 듯 했음



- 이 개는 뭡니까?
- 돌보아라. 

우성은 당황하는 부관에게 개 목줄을 들려줌. 기가 잔뜩 죽은 개는 아까처럼 짖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면서 시무룩하게 부관의 뒤로 숨었음. 

- 어디서 온 겁니까?
- 황비에게 압류했다 
- 네?
- 이름 같은 건 없으니 절대 붙이지도 말고


그 뒤로 사흘쯤 지났나, 명헌의 금족령이 풀렸으나 얼굴 비치는 일이 없음. 독에 대한 조사가 서면으로 올라올 뿐임. 보고를 건성으로 넘기는 우성의 머릿속은 온통 명헌에 대한 생각뿐이었음. 

- ...그 미물에 대한 말은 없더냐?
- 아, 그 강아지 말씀입니까?

부관의 얼굴이 밝아지더니 품안을 뒤져 서신을 한장 꺼냄

- 이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우성이 뺏듯이 펼친 서신 안에는 명헌의 유려한 필체가 깔끔하게 적혀있었음

-
황궁에  스치는 바람 한 줌 햇볕 한 가닥까지 전부 전하의 것이오니,
거두신 하찮은 목숨 자애로 돌보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나이다.
-

우성은 발칵 성을 내며 종이를 접어버림.

- 지금 저 개를 나한테 떠넘기겠다는 것인가? 와서 간청을 해도 모자를 판에!!
   괘씸하기 짝이 없군! 저 개를 당장 끌고가서 황비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돌보거라!
   밥도 제대로 챙겨주고 산책도 시켜라! 저 미물이 황비 따위 잊어버리게!

부관은 개목줄을 쥐고 터덜터덜 나섰음. 보아하니 독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으신 것 같은데 돌아오시면 어쩌려고 이러시나... 부관의 허망한 넋두리는 간만에 산책을 해서 신난 하얀 개에게만 닿을 뿐임.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