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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9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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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휘영청 밝았다.
작게 열린 창 사이로 절묘하게 비쳐든 달빛이 강징의 얼굴을 비추었다.
더불어 서늘한 바람이 밀려왔지만, 깨울세라 겉옷을 끌어다가 덮어주기만 했다.
남희신의 다리를 베고 누운 강징은 작은 고양이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머리채를 흩트리고 일그러진 입술이 촉촉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고 잠결에도 눈물이 스며나오는 듯 흐린 빛이 반사되었다.
힘없이 늘어져 보이는 목덜미와 어깨를. 남희신은 차마 닿지 못하고 공기 너머로 형체만 쓰다듬는 듯 손으로 더듬으며 가슴이 아팠다.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깊은 상처를 쑤시게 될 줄은 몰랐다.
자꾸만 싹트는 이기심과 싸우고, 싸워 이겨 보려다가 무리한 방법을 선택하게 된 것이 잘못이었을지.




문제의 ‘치료’를 시작한지 두 계절이 훌쩍 지났다.
표면적으로 강징이 숙면을 하게 된 것 외에는 별 진전이 없었다. 대신 그와의 사이는 제법 가까워진 것 같았으나.
사실, 강종주가 누구에게도 이만한 친밀감을 표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스스로를 칭찬해도 좋았지만, 아무튼 반각성 상태는 여전했다.
어느날 금린대에서의 모임 후. 두 사람은 난릉이지만 중앙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산속에 있었다.
물 맑은 곁에 지어진 별장은 수수했지만 큼직했고 정갈해 보였다.
“이렇게 맘대로 들어와도 됩니까?”
강징은 사람도 없는데 제 집처럼 썩 들어가는 남희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문간에 선 채 기웃거렸다.
“가끔씩 내키는대로 들렀다 가곤 합니다. 이리저리 희귀한 약초를 캐러 다니는 사람이라서, 지금쯤은 다른 지역에 있을 겁니다.”
“그래도...”
“이따금씩 이렇게 와서. 선물을 놓고 가면 좋아하지요.”
그렇게 말하며 슥 꺼낸 몇 병의 술병을 탁자 위에 놓자, 강징은 고소 남씨 사람이 저렇게 술을 들고 다녀도 되는 건가 하고 의심스러워했다.
고소 남씨 규율의 매운맛은 수학 시절에 톡톡히 보았지만, 그 우두머리인 남희신은 바깥에서 보면 오히려 풍류를 아는 활협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미적거리던 강징이 마침내 들어와 앉는데, 남희신이 늘어놓은 술병 옆에 이상한 물건이 보였다.
“이것도 선물입니까?”
동물인지 요괴인지, 괴상하게 생긴 장식품을 가리키며 강징이 물었다.
“그것은... 우리가 쓸 겁니다.”
“우리? 이게 뭔데요?”
“향로입니다.”
그러고 보니 짐승의 형체처럼 생긴 가운데 향을 피울 수 있는 공간이 보였고, 강징은 드디어 그가 약을 쓰려는가 보다고 심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향로를 가지고 온 남희신의 속은 그렇게 편하지도 간단하지도 않았다.
남망기와 위무선이 가져다가 요긴(?)하게 쓰고 있던 향로의 존재를 남희신은 우연히 알게 되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 장난스러운 웃음이 떠나지 않았지만, 위공자는 이 향로가 사람이 원하는 것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이제껏 남희신은 지긋하게 강징을 관찰했고 캐묻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위무선에 대해 응어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가족들과 허심탄회하게 지내지 못했다는 사실 말고는 더 알아낸 것이 없었다.
그 때 문득 향로를 떠올린 남희신은 거의 지푸라기를 잡는 듯한 심정이었다.
“이 향로는 인접한 사람이 꿈을 꾸게 하며, 그가 원하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강종주, 당신의 내면에 본인도 모르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희신의 설명을 들으며 강징은 눈빛이 탐탁치 않게 변해갔다. 
하긴, 남이 제 속을 들여다보겠다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희신도 강징이 거절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강징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글쎄요... 그런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 택무군께서도 아시다시피, 여태 제가 가장 힘을 기울였던 일은 가문의 존속이었습니다. 그 일이 너무 힘들어서 다른 소원은 가질 틈도 없었던 것 같군요. 그 외에 바라는 거라고 해야... 금릉이 무사히 자라서 가문을 물려받길 바랬었는데 그것도 지금은 크게 신경쓸 일이 아니게 됐고요.”
두런두런 말을 이어가며 강징은 혼잣속으로 생각했다.
혹은 내가 후계자를 안고 있는 모습이라도 나오려나.
하지만 최근의 강징은 그 생각도 별반 하지 않게 되었다. 때만 되면 남희신을 만나서 보낼 한가로운 시간들을 기대했고, 이따금씩이라도 즐거운 일이 생겨서인지 우울한 기분도 많이 가신 것 같았다. 
애초에 후계자를 갖고 싶다던 생각도 병적인 고독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절실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아무래도 나의 반각성은 풀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공연한 헛수고는 그만 하라고 이 편에서 말해야 하는지. 하지만 스스로도 자존심이 강한 강징은 상대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하기 저어했다. 
그리고 또 하나. 씁쓸한 생각이긴 하지만. 치료가 무산되면 어거지로 이어지고 있는 지금이 친분이 사라져버릴 것도 두려웠다.
그래서 남희신의 우려와 다르게, 강징은 선선하게 향로의 사용에 동의했다.


누가 알아볼지 모르는 집이나 선부가 아니면, 바깥바람을 쐬는 두 사람은 서두르지 않았다.
우선 바닥 아래로 물이 흐르는 정자에서 밥을 먹고 차도 마시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 해가 저물어갔다.
안으로 들어온 강징이 방을 정리하는 동안 남희신은 일반 향로에 벌레 쫓는 향을 붙여 여기저기에 놓았다.
이윽고 낮은 다탁에 동물 모양의 향로를 놓은 다음, 그들은 가까이 방석을 놓고 마주앉아 운기조식을 하는 것처럼 가부좌를 틀었다.
“그럼 불을 붙이겠습니다.”
강징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남희신은 향로에 불을 붙인 다음 고요하게 앉은 강징을 바라보았다.
향로가 강징이 진정 원하는 것을 보여줄지 모른다.
...혹은, 강징을 무의식으로부터 괴롭히는 다른 이유를 알려 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 남희신은 강징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제법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과거의 어떤 부분들은 분명 말하기를 꺼린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결정적인 열쇠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독특한 향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남희신은 눈을 감았다.
이후에 무엇을 보아도 절대 동요해서는 안 된다고, 다시금 스스로의 의원된 입장을 다지면서.






그 자신도 전쟁을 겪었고, 가족을 잃었고, 세상을 다니며 비참하거나 처절한 꼴을 많이 보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남희신의 오산은, 꿈 속의 주인공이 강만음이라는 사실이었다.
낯선 시장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풍경 속에서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염양열염포가 등장하자 남희신은 저도 모르게 주춤하며 발걸음을 물리는 자신을 느꼈다.
시장의 풍경이며, 움직이는 스스로의 육체적인 감각. 그리고 실재할 리 없는 기산 온씨의 수사들까지 너무나도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었다.
바로 곁을 스쳐 지나가는 지게꾼의 얼굴에서 흘러 떨어지는 땀방울까지,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의식에는 무서울 정도로 현실보다 더 현실같았다.
그런 가운데 어린 얼굴의 강징이 있는 것을 보자 충격에 후끈했던 가슴이 곧장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저도 모르게 달려나가 강징을 구하려고 낚아채는 손길이 환상처럼 훅, 그의 몸을 통과했다.
“강종주...!”
저도 모르게 외친 소리는 강징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분명 저와 같이 적들을 알아보고 새파래진 강징이, 애가 타게 바라는대로 도망을 치는 대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 때 비로소 남희신은 저 멀리 등을 보이고 있는 다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검은 옷, 붉은 머리띠. 그리고 잔망스레 고개를 흔드는 버릇은 남희신에게도 무척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심장이 활활 불타는 동시에 얼음처럼 굳어져 쪼개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현실이 아니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악귀들에게 잡히고 끌려가며 유린당하는 모습.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단지 환각일 뿐이라 해도 미칠 것만 같았다.
제발 그까지만 하고 멈추었으면 좋았을 것을,
남희신은 이제 강징의 감정을 지나치게 잘 읽을 수 있었다.
위무선이 잡혀가지 않도록 허겁지겁 스스로를 던지는 강징의 눈에서, 그리고 의도한 대로 잡혀가며 일부러 위무선을 피해 떨구는 시선에서. 복잡한 두려움이 읽혀졌다.
자신이 지켜주는데 성공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애가 타고, 간절한 눈을 할 수 있을까.
도리어 그가 자신을 지켜주길 바라는 것처럼.
처절한 마음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안돼, 위무선.
잡혀가면. 나를 떠나가면.
차라리, 차라리...
......내가 갈게...!!




두 사람은 동시에 숨을 들이키며 꿈에서 깨어났다.
1척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두고 맞대어 앉은 자세 그대로,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무섭도록 창백한 얼굴은 꿈 속과 동일했다.
남희신 못지 않게 충격을 받은 얼굴은 아직도 온가의 수사들에게 끌려가던 충격과 공포심을 다 벗지 못한 듯했다.
거기에 새로운 공포심이 피어나며, 그가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 아니에요. 이건 사실이 아니라...”
하지만 금방 남희신이 보고 들은 일이 얼마나 사실인지는 강징의 처절한 눈빛과 행색이 다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렸다.
고통에 휘감겨 숨통이 조이는 듯한 얼굴이 이내 흐려지며 어린애같은 울음이 터져나왔다.
남희신은 자신의 앞에 엎드리며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고. 제발 말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강징을 내려다보며 손끝도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은 윙윙 바람 소리를 내는 듯 어지럽고, 가슴은 강징의 울음소리가 저미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켠에서는 얄밉도록 냉철하게 작용하는 이성이 찬찬히 고찰하고 있었다.
상상도 못한 사실을 알았음에도, 결국 특별히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라는 것.
그저, 본디 반각성을 유래하는 그 원인, 그것뿐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유리된 외로움 그 자체.
그는 너무나도 외로웠다.
너무 외로워서, 가까운 누군가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통 스스로를 투신할 정도로.
“......”
고장이라도 난 듯 굳어서 삐걱대는 손을 들어 간신히 강징의 머릿속에 얹었지만, 첫 번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목을 가다듬은 다음 남희신은 말했다.
말하지 않을게요. 절대로. 
...그러니 울지 말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십몇년 동안 꾸어오던 악몽이었건만. 요 근래에는 잠잠해졌기에 잊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다 괜찮아진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인화도 제대로 성장시키지 못하는 이 정신은, 도리가 없나보다 싶었다.
깜깜하게 밤이 내린 방 안은 벌레 쫓는 은은한 향냄새만 가득했다.
밖에서도 호젓한 가을 벌레 소리만 들려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남희신에게 뭐라고 했는지, 그가 대답을 했던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속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머리를 베고 누운 몸만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지친 듯 숨소리만 색색거리고 있는 그 머리를 남희신이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지만, 메말라 갈라지고 터진 바위 사이로 이슬 한 방울을 떨구는만큼의 위로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택무군.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갑자기 가냘프게 들려온 목소리에 얼핏 놀란 남희신이 고개를 저으려 하자, 강징이 막았다.
“당신은 물론 아니라고 위로하시겠지요.”
“......”
“참 잘난 녀석이죠.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 하고. 약자는 무조건 도와야 하고. 그 녀석은 항상 그랬어요.”
강징은 눈을 감고 마치 실제의 상처가 도진 듯이 고통스럽게 찡그렸다.
“나도, 나도 너를 구했었는데. 저는 소인배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 화가 났어요. 똑같이 은혜를 입었으면, 더 가까운 나를 도와야 하는게 아니냐고.”
“그럼 왜 그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가만히 듣기만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참을 수 없이 궁금해진 남희신이 물었다.
“하.”
강징이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말하기 싫었어요. 그럼 마음대로 하라구요. 네가 나를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하면 그 뻔뻔한 얼굴에 죄책감이 떠오르겠지. 어쩌면 돌아올지도 몰라. 하지만 싫어요. 그런 건 싫어. 그따위 얕은 죄책감은 원치 않아요, 저는.”
다시 뜨거운 눈물이 넘친 강징이 흐느끼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때요! 어차피 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던 걸. 십년이 넘는 시간을 미워하고 원망했던 것이 죄다... 뿌리부터 틀린 거였어.”
강징은 절로 움직여 가는 손으로 배를 끌어안았다.
얼마나 많은 밤을 이런 식으로, 남몰래 제 배를 만져보며 괴로워했는지.
“그 녀석은 이미 갚을 대로 다 갚고 떠난 거였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비로소 깨달았어요.
그 녀석은 그냥 마음 내키는대로 살아가는게 아니라는 걸.
어떤 일이 닥칠 때, 그 녀석은 절대 먼 곳을 보지 않아요. 코 앞의 부당함과 고통만 봐요. 그리고는 바로 그 일에 덤벼들지요. 그 순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반드시 하고, 또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진. 그런 인간이에요. 위무선은...”
마침내 그 이름을 입술에 담은 강징은 그것이 그리도 고통일지 몰랐다.
“택무군. 저는 부끄러워요. ...저 자신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눈앞을 가리듯 두 손을 들어올리며 강징이 울기 시작하자, 남희신은 저야말로 어쩔 도리를 모르는 스스로가 부끄러워 애가 타는 것 같았다.
“제가... 어떻게든 반각성을 풀어드릴게요.”
뭐라고 해야 할지, 뭘 해줘야 할지. 뭘 할 수 있을지. 그저 암흑 뿐이었다.
다만 말할 수 없이 아픈 심정으로 장담도 못할 약속만 중얼거릴 뿐.
머뭇거리고 떨리면서 뻗어간 손을 강징이 잡아채듯 잡아서 뺨에 대자, 남희신은 마치 그 부분을 불 속에 던져진 것처럼 느꼈다.
강징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어떻게든 그에게 맺힌 족쇄를 풀어주겠다고.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든. 설사 죄를 짓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니까, 하고 남희신은 굳은 결심 속에 음울한 죄악을 숨겼다.
그는 위무선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강징을 그토록 아프게 한, 아프게 할 수 있었던 위무선이.
이윽고 죄책감마저 얼려버릴 듯 비정한 냉기가 검은 눈동자 속에서 일어났다.
머리와 가슴에서 시작된 냉기가 마침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자, 남희신은 고개를 숙여 울고 있는 강징의 머리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그리고 뜨거운 강징의 손을 꼬옥 쥐어주며 마지막 남은 나약함도 다 털어버리고자 했다.






***


남희신과 마주친 남망기는 향로를 보자마자 우뚝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위, 위영이...”
“그래. 위공자에게 돌려주거라.” 
남망기는 그가 재촉을 해도 좀체 손을 뻗지 않으려 하더니 갑작스레 소매를 휘둘러 향로를 감추었다. 
남희신이 말했다.
“분명한 기능은 모르겠다만, 아무튼 그의 말대로 사기가 느껴지진 않더구나. 잘 썼다고 전해주렴.”
‘잘 썼다’는 말에 한결 새파래진 남망기가 제 형을 쳐다보았지만 남희신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평소보다 무거워 보인다는 사실이 타인의 감정에 무딘 남망기에게도 전해져 왔다.
“그런데 너희들이 사용할 때에는 어떤 양상을 보이더냐? 과거의 일이 엮여 나올 때가 많았느냐?”
남망기는 남희신이 거듭 말을 이어가자 경계심을 놓지 않는 채로, 그래도 대답만은 성실하게 했다. ...하려고 애를 썼다.
“...과거일 때도 있고. 상상이... 섞일 때가 많습니다. 과거에 깃들 때에는 그 시점에 맞춰 현실의 기억을 망각하기도 하지요. 우리가 객처럼 과거를 볼 때도 있고, 서로가 다른 시간대의 정신인 채 마주할 때도...” 
“잠깐, 우리라니...?”
“?”
“위공자와 너는, 서로를 인식할 수 있더냐?”
“네.”
“그래...”
한숨을 쉬는 남희신의 표정이 너무 무거워 보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장, 저희가 무어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남희신은 대답 대신 남망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단지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라고, 저희라고 서슴없이 칭하는 말에 대해.
이윽고 남희신은 굳었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언제나처럼의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곧게 선 어깨를 정답게 두드린 뒤 걸어가버렸다.





희신강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