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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8 08:35
양음인+수인 설정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남희신도 당황스러웠다.
몸체가 연기처럼 사라지며 폭삭 내려앉은 자줏빛 장포가 한참동안 꼬물거렸다. 
마침내 탈출구를 찾은 머리가 소매자락 밖으로 쏘옥 튀어나왔다.
머리만 내민 채, 밖으로 나오는 것을 겁내는 듯 쳐다보는 눈과 마주치자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반각성 상태라 하니 새끼 상태의 동물일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작을 거라곤 생각치 못했다.
마침내 결심한 듯, 작은 발로 바닥을 박박 긁으며 완전히 빠져나오는 손바닥보다도 작은 고양이를, 남희신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중모종이라 쑥쑥하게 보이는 털가죽 사이로 커다랗게 빛나는 눈동자도 남희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애써 꿋꿋한 체, 다리를 모으고 의젓하게 앉은 모습이 너무나도 강종주의 모습인 동시에 귀여워서, 남희신은 실례를 하지 않기 위해 근질근질한 가슴 속 감정을 거의 짓밟는 듯한 느낌으로 눌러 참았다.
  

잠시 나갔다 들어오니 도로 옷을 차려 입은 강징이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럼 어...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남희신은 부끄러움을 서투르게 감추는 강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대로 보내면,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
“내친 김이니.”
흥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그렇다고 무감하게 보이지는 않도록 노력하는 목소리가 스스로 들어도 어색했다.
“바로 시작하지요.”



***


삼독성수가 음인이자 수인이라는 사실은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수선인은 기를 다스려 몸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에 수인인 사실은 별다르게 취급되지 않았다.
음인인 강징이 운몽 강씨의 주인이 되었을 때에는 위태로운 상태라도 번듯한 가문의 이름에 혼담이 줄을 이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강징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매몰차다 싶을 정도로 혼담을 거절했고, 점점 세력이 자라나 냉철해지고 사나워지는 그를 세상이 다 알게 되자 혼담은 차차 줄어들다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관음묘 사건이 지나고, 3년이 흐르자 어딘지 나사가 빠진 것 같았던 택무군도 평정심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징이 찾아왔다.
강징은 고소 남씨의 누구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다. 굳이 누군가가 있다면, 사건 후로는 일부러 내외하는 것처럼 서로를 찾지 않는 위무선 뿐.
그런데 운심부지처를 방문한 강징은 곧장 남희신과의 면담을 청했다.


“반각성... 이라고 하셨습니까?”
강징은 두 번 말하기 싫다는 듯 찻잔을 들어 입술에 눌렀다.
“당신이?”
남희신은 강징이 거북해할 것을 알면서도 캐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각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음인이나 양인으로 발현하는 것, 혹은 수인이 성체가 되는 것.
그리고 반각성은 후자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단어였다.
즉, 본체는 성체가 됐어도 수인 상태는 아직 어린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었다.
남희신이 불혹이 다 되어가는 나이였으니, 강종주도 아마 삼십대 중반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태 반각성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믿기지 않는 얘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끈질기게 혼담을 거절했던 것이 말이 되었다.
수인은 본체가 성인이어도 수인이 각성하지 못하면 수태가 되지 않는다. 즉, 씨를 심거나 임신을 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강징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하는 남희신의 시선을 애써 참았다.
이런 치부는 누구에게도 알릴 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혼인도 포기했던 거였다. 양친의 사후부터 앞만 보고 내달리다 보니 혼인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관음묘 사건을 겪은 후, 몇 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심경의 변화가 왔다.
뭔가를 놓아버린 듯도, 뭔가가 사라져버린 듯도 하고.
그래서인지 허전하고 더 쓸쓸해진 것도 같은.
위무선을 원망하는 마음과, 내내 맺혀 있던 마음 속의 응어리는 다 버렸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연화오를 찾지 않는 그가 조금 야속하긴 하지만, 예전처럼 온 가슴속을 다 태워대는 문제는 아니니까.
어쩌면 문제가 다 사라져버렸다는게 문제일지 모르겠다 싶었다.
일생 동안 크고 버거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만 달려온 인생이었으니.
쓸쓸하다고 느끼자마자 혼인할 생각이 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자가 있는 상태로 혼인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실, 강징은 혼인보다는 아이가 가지고 싶었다.
처음에는 거대한 가문을 떠맡아 잘해갈까 걱정스러웠던 금여란이 생각 외로 해가 갈수록 불쑥불쑥 커가며 성장하니, 그 또한 쓸쓸함을 부채질했는지도 모른다.
운몽 강씨 역시 주인이 당장 사라져도 굴러갈 정도로 굳건해졌다.
수진계는 평화롭다.
위무선은 함광군이 지켜줄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섭회상도 요 몇년간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대신 청하 지역을 단단하게 휘어잡아가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강징이 혼자 일어서야 했던 시절과 비슷한 상황이리라고, 강징은 차라리 무거운 짐을 진 그의 처지도 부러웠다.
처음에는 운몽에서 가장 훌륭한 의원을 물색해 보려고 했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야 할 것이고, 솜씨가 얼마만할지도 의심스럽고.
고민하는 내내 강징은 가장 입이 무거우며, 가장 뛰어난 의원인 한 사람을 무의식중에 두고 좀체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결국에는 좋은 의원을 찾아 보려는 노력도 그를 피해보려는 노력으로 변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별 수 없이 그를 생각하면, 관음묘에서 흥분했던 자신을 언뜻 말리던 손길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면서 어느덧 강징은 위무선과 나누던 대화보다, 금광요와 얽혀 생사를 오가던 남희신의 모습을 더 많이 떠올리고 있었다.
천천히, 그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마음이 기울었다.
표면적으로 알려진 그의 모습, 그의 평판 때문이 아니었다.
나중에 가서는 그의 의술도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남희신은 자신과 완전히 결이 다른 사람이지만.
어쩐지 그라면 이해해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마침내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건만, 역시 부끄럽고 어색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비스듬히 외면한 채.
강제로 반각성을 넘기는 약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고소 남씨의 약이 가장 잘 들을 것 같아서 염치불고하고 찾아왔노라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물론 값은 치르겠습니다.”
긴장한 상태에서 끝까지 말해버린 뒤, 강징은 무던히도 기다렸다.
남희신이 너무 오랫동안 답을 주지 않아서였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 주십시오.”
한참 후, 그가 내놓은 답에 강징은 의아했다. 
이게 생각까지 해봐야 하는 일인지. -어쩌면 그 약에 굉장히 귀한 약재가 들어가는 것인가? 혹은 약의 조제법이 알려질까 꺼려하는 건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지만, 이까지 오는 데만도 긴장감이 너무 심했던 강징은 그만 거북한 대담을 끝내고 싶어서 알았다고 대답했다.





희신강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