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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2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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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화는 막막했어. 

아이라니, 언제? 어떻게? 누구의? 앞의 두 질문의 답은 쉬웠어. 형질이 변한 열성이지만 어쨌든 음인이 되버렸고 색사도 했으니까. 마지막 질문만이 머리속에 꼬리에 꼬리를 물었어. 단고도의 수하중 하나일까? 방다병? 아님 적비성? 양인의 기질로서만 본다면 우성인 방다병이나 적비성일수도 있었어. 하지만 양적으로 단고도의 수하들에게 몇번이고 당했으니 확률로 보면 이쪽이 더 가능성이 있나?


의원 노릇하기 위해서 읽었던 의서를 곱씹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건 없었어. 


각인조차 없는 열성음인이 임신이 가능한진 모르겠지만 뱃속의 미약한 태동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으니 이연화는 그저 한숨만을 내쉬었어. 아이의 아비가 단고도의 수하여도 문제이고 적비성이나 방다병이면 더 큰 문제였어. 단고도의 수하들은 거의 죽었거나 백천원에 잡혔을테니 그냥 하룻밤 실수인셈치면 되지만 만약 적비성이나 방다병의 아이라면? 원치않은 관계에 출신에 문제 있는 어미에게서 나온 혹이라니. 둘의 장래에 큰 걸림돌이 될게 자명했지. 


금원맹주와 전 사고문 문주의 아이라, 그게 가당키나 한가? 강호에 또다른 불화를 일으킬 재앙이 될수도 있고 적비성에게 불필요한 적을 만들수도 있어. 사파인 금원맹은 앞으로 새롭게 강호에 자리 잡아야 하는데 이런 시기에 전 사고문주에 얽힌다면 되려 백천원을 장악하려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수도 있어. 적비성 성격에 오해를 받는다고 해명할리도 없고. 그리고 적비성이 가정을 이루는것에 별다른 생각이 없다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은원 관계가 깨끗하고 온화하고 사려깊은 반려가 어울리지 않겠나. 금원맹의 안주인은 무뚝뚝한 적비성을 잘 감싸고 금원맹도 휘어잡을수 있어야 해. 자기처럼 온갖 이해관계가 얽혀 병들어 죽어가는 음인은 말도 않되지.


천기산장의 후계자와 남윤 황실 혈육의 아이라, 그게 가당키나 한가? 방상서와 천기산당이 아무리 조정에 충성한다 한들 역적의 자식인 방다병이라 여전히 조심해야해. 그런데 여기에 남윤의 핏줄을 더해? 죽여달라고 목을 빼내는것과 다를바가 없지. 작금의 황제는 아둔하지 않지만 불필요한 파란은 언제 어떻게 불똥이 튈지 모르니 경계해야해. 출신이 깨끗하고 성격이 잘 맞는 반려가 제일 좋지, 가령 소령 공주라던가. 둘은 정말 잘 어울리고 황실의 인척이 되면 안전까지 보장받으니 이만한 사람도 없어. 게다가 방다병은 아직 젊고 창창해, 자기처럼 죽어가는 늙은 음인이 얼토당토하지도 않지. 


자신은 두 사람의 앞날에 방해만 될뿐 절대로 어떤 사이가 될수 없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너무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어. 적비성과 방다병의 목숨이 지척에 달렸으니 선택권이 없었지만 어쨌든 원치 않은 관계를 강요해버린거잖아. 그것도 깨끗하지도 않은 몸으로. 이연화야 이연화야 어쩌자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걸림돌이 되어버렸나, 자신을 탓했어. 하지만 어차피 죽을 몸이니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갈수 있지. 이연화는 그것만큼은 천만다행이라 안도했어. 



***


어차피 떠날 계획이었기에 이연화는 더욱 미련없이 길을 떠났지. 정처없이 헤매다가 도성 근처에 정착하기로 했어. 사람은 의외로 바로 자기 코 밑을 못보는 법이거든. 한적하고 조용한 곳의 이방인은 바로 티가 나지만 늘 새로운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도성은 낯선 얼굴도 신경을 안쓰지. 그렇다고 북적이는 도성 한가운데서 살기는 돈도 없고 시끄럽기도 하고 그냥 발 닿는데로 가다보니 찾은 곳이 다 쓰러져가는 버려진 농가였어. 버려진지 오래인듯 먼지가 가득해 기침이 쿨럭쿨럭 튀어나왔어. 몇개 없는 가구는 간신히 버티듯 서 있고 차가운 아궁이엔 거미줄만 가득했지. 


며칠 안남은 목숨이라지만 그래도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싶었기때문에 다행이다 싶었어. 구멍이 뚫린 벽이나 떨어져가는 기와라도 머리위로 지붕이 있으니 이만하면 살만했지. 소매를 걷어붙이고 쓸고 닦으니 조금은 나아졌지만 남루함은 감출수 없었어. 꼭 자기같아서 이연화는 그저 피식 웃고 말았어.


연화루에서 십여년정도 살면서 차곡차곡 세간살이를 장만하고 적지만 돈도 조금 벌고 해서 한몸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이젠 아무것도 없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춥고 배 고프고 몸도 아프고 불여우조차 없어 이제는 정말로 혼자인. 


인생은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빈손으로 간다는 부처님 말씀이 문득 떠올랐어. 이상이는 많은걸 가졌으나 잃었고 이연화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홀가분하지. 



***


산 입에 거미줄 치라는 법은 없다더니 그 말이 맞는것 같았어. 뒷뜰은 보니 아무도 돌보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지만 텃밭에 채소가 여전히 자라고 있었거든. 너무 자라 억세긴했지만 먹을만 했어. 억센 채소중에 그나마 나은걸 골라 장터로 가져가 팔기도 하고 물물 교환도 했어. 사람이 먹긴 좀 그래도 닭이나 돼지 모이로 쓰려고 사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거든. 동전 몇푼이 생기면 그걸로 먹을것만 샀어.  마른 전병 몇개 사면 남는 돈도 없거니와 오래 못살거니까 굳히 물건을 사진 않았지. 


그렇게 한번씩 도성에 갔지만 대부분은 홀로 지냈어. 낡은 집을 청소하고 텃밭을 돌봐주며 하루하루 조용히 죽을날을 기다렸어. 문주고 신의고 찾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히 달을 감상하는 하루. 이연화는 겨우 찾은 평온함을 최선을 다해 누리려고 했어.  그러다 이제는 수시로 독이 발작하는데 그럴때마나 내장이 뒤집히는 고통을 끌어안으며 드디어 죽나 안녕을 고했어. 하지만 땅에 처박혀 있다 눈을 뜨길 몇차례 하면서도 예정된 한달이 훌쩍 넘었어. 


이연화는 의아했어. 지금쯤이면 이미 죽고 말았어야 하는데 어째서 끈질기게 숨이 붙어있는지. 각혈해서 피투성이가 된 옷을 내려다보다 배로 시선이 갔어. 이연화는 마른배를 쓸어봤어. 아이를 지울까 끊임없이 고민했어. 허락되지 않은 생명이기도 했고 어차피 어미는 죽을건데 계속 품고 있는게 의미가 있나.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점 때문에 낙태를 하지 않았어. 어미 목숨이 오늘 내일하니 어차피 같이 죽게 되는데 굳이 아이를 제 손으로 먼저 끊어야 하나 싶었던거지.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할 아이가 어미 손으로 쳐내기까지 하면 얼마나 가여워. 게다가 한독때문에 추위에 바들바들 떨며 고작 낡은 이불만 감싸고 견디고 있을때면 희미하게 느껴지는 태동이 적잔히 위로가 됬어. 그때문에 눈꼽만큼 남아있는 내력을 돌려 태아를 감싸느라 몸은 더 괴롭고 힘들었지만 마음은 되려 편안했어. 


이연화는 자기가 참 이기적이구나, 입술을 깨물었어. 아이야 미안하다 하지만 혼자 외롭게 가지 않을테니 조금만 참아. 내세에는 나같은 사람 말고 평범하고 좋은 부모를 만나 평온무사한 삶을 보내렴. 저녁노을 사이로 희미한 달그림자가 드러났어. 



****



두달이 지나고 석달이 지났어. 이연화는 아직도 평평한 배를 내려다봤어. 겉모습으로만 봐서는 전혀 아이를 가졌다는 티가 나지 않았어. 자기 몸상태도 안좋은데 먹는것도 변변차서 그런건가. 단지 미각을 잃어서뿐만이 아니라 이연화는 정말 입맛이 없는데다 가볍게 입덧도 있어 더더욱 먹는게 껄끄러웠지.  뼈가 앙상히 드러나는 몸은 가끔 도성에서 마주친 다른 윤기나는 산모와 완전히 반대된 상태였어. 헐렁한 옷을 몇겹이나 겹쳐입어도 그저 막대기에 거죽만 걸쳐놓은 형상이었지.


게다가 각인하지 않은 음인은 임신했을때 모체에 더욱 부담이 되어 이연화는 하루의 절반은 기절한 상태로 지내곤 했어. 몸에 아직도 피가 남이있나 싶을 정도로 피를 토했고 세걸음만 걸어도 숨이 딸렸어. 자주 어지럽고 몸에 기운이 없어 넘어지기 일수라 무릎에 멍이 가실날이 없었어. 그럴때마다 음인의 몸은 있지도 않은 양인의 존재를 갈구했어. 쥐어짜는 아픔은 양인의 향기를 내놓으라고 괴롭혀댔지만 이연화는 머리속에 떠오르려는 이들을 꾹꾹 눌러담았어. 둘은 아이의 아버지가 아닐거야, 그럴수 없어, 그래서도 안돼. 홀로 덜덜 떨면서 이연화는 입속을 잘근잘근 씹었어. 아릿한 통증이 입안에 퍼지니 그제야 조금 숨을 돌릴수가 있었어.


몸이 이지경까지에 이르렀는데 아직 살아있는것도 이상했어. 이연화는 당황스러웠어. 설마 이대로 아이를 낳을때까지 살아있게 된다면? 하지만 그리고 자신은 죽게된다면? 아이는 그럼 어떻게 하지?  새로운 걱정에 머리속이 몹시 복잡했지만 어쨌든 일단 뭘 좀 먹기로 했어. 자기가 입맛이 없다고 아이를 굶길수도 없지 않은가. 낳을수 없는 아이이지만 뱃속에 있는 만큼은 잘 챙겨주고 싶었어. 요즘은 정말 아이때문에 음식을 먹는거지 아니면 먹을 생각조차 안들었을거야. 혹시 아이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건가.


먹을거라고 해봤자 오래된 전병과 팔고 남은 채소가 다 이지만. 오히려 미각을 잃은게 다행인가. 입을 벌리려다 따끔한 통증에 앗, 움찔했어. 간만에 장터에 갔다가 시비가 붙었었지. 그치는 도성에 처음 왔을때 마주쳤던 건달이었어. 그저 길 가다가 부딫혔을뿐인데 성격이 거칠어 이연화에게 먼저 주먹을 휘둘렀어. 별생각없이 주먹을 피했는데 그 건달이 그게 더 약이 올랐는지 계속 이연화에게 싸움을 거는거야. 시정잡배 하나 처리하는거야 일도 아니었지만 장터에 몰려든 구경꾼을 보고 아차했어. 건장한 건달을 젓가락 하나도 못들것 같은 비리한 서생이 재압한다? 너무 눈에 띄는 일이었지. 아무리 사람이 넘쳐나는 곳이라지만 특이한것은 사람의 시선을 모으기 마련이거든. 조용히 은거할 생각으로 온건데 평범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인식에 남아버게되지. 처음에 피한건 우연이였다는 듯 이연화는 몇번 맞아줬고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흩어졌어. 무뢰한에게 당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런데 그 건달은 처음에 이연화가 피했을때 적잔히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는지 마주칠때마다 시비를 걸지 뭐야. 그래서 한동안 안마주치려고 조심조심 다녔는데 하필 또 오늘 만날줄이야. 몇대 맞는건 별로 상관없었어. 좀 아프긴한데 강호에서 수없이 다쳐도 봤고 벽차치독에 걸려 생사를 왔다갔다도 하는데 외상 좀 입은게 별 대수야. 다만 아이에게 해가 갈까봐 그것만 걱정했지. 부은 뺨을 쓰다듬다가 내력을 돌려보니 맞는 와중에 배는 잘 보호하고 있어서 별탈은 없는것 같아. 


이연화는 배를 살살 만져봤어. 지금의 상황이 몹시 모순적이라 우습기도 했어. 기만이지... 씁쓰레한 감정이 솟구쳤지만 그렇다고 어쩌겠어. 자신은 살아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고 아이 또한 마찬가지인데. 


한숨을 내쉬는데 급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튀어나오는 이게 기겁했어. 이연화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뒷문으로 향했지만 거기에 있는 또다른 인영에 그만 숨이 턱 막힐것만 같았어. 앞뒤로 저를 철저하게 막고있는 두 사람. 익숙하고 그립고 또 동시에 가장 보고싶지 않은 얼굴들. 


***

이연화는 머리속이 터져나갈것 같았어. 떠날때 나를 찾지 마라 편지를 남겼지만 두 사람의 성정은 잘 알고 있었어. 자신을 찾겠다고 사방팔방 다 찾아다녔겠지. 하지만 짧은 기간동안 잘 숨어있고 그 사이에 죽는다면 둘 다 포기할거라 생각했어. 둘은 여전히 앞날이 창창하고 세월은 흘러가기 마련이니까. 


문제는 생각보다 자신의 생명줄이 끈질겼다는 것, 그래서 결국 들키고 말았다는 것. 차라리 깊은 산속에서 은둔했어야 했나 이연화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마음을 가다듬었어. 형형한 두 사람의 눈빛은 보니 엄청나게 화가 났구나 뭐 그런 쓸때없는 생각을 하다가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곧잘 연화루로 쳐들어오던 두 사람이 문득 떠올랐어. 지금도 여전히 제멋대로 찾아오는구나. 그런점은 변함이 없다고 이연화는 속으로 조금 웃고 말았어. 


이연화는 적비성과 방다병을 향해 미소 지었어.

- 오랫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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