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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00:47
비아냥거리는 말투였을까.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온 말은 꼭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이질적으로 들렸다. 자신이 이런 조롱 섞인 억양을 내뱉을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몰랐다. 이혼이라니. 그 빌어먹을 문장을 처음 귀로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었지. 행복했나? 슬프진 않았다. 그저 웃겼다. 이혼이라니. 결국 그렇게 끝낼 결혼생활이었으면서 왜 내 프로포즈는 거절했었는지 묻고 싶다.

여섯 달만 미국에서 지내도 모국어를 잊어버린다고들 한다. 열다섯 시간 비행기를 타고, 떨리는 주먹을 꾹 쥐고 낯선 기숙사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운 첫날 이불 속에서 눈물을 찔끔 닦았던 열일곱 소년은 어느덧 눈을 쉽게 웃지 않는 서른두 살의 능란한 청년이 되었다. 그동안 저보다 서른 살 더 많은 사람들에게도 브래드, 조지 해가며 이름 툭툭 부르고 지내왔는데 고작 한 살 위인(1년도 아니고 달수로 따지면 고작 일곱 달 더 살았을 뿐이다) 남자한테 형 호칭을 붙이는 것도 이상하다. 하물며...

우리가 연락을 끊은 지 얼마나 되었지. 정우성은 손가락을 하나 둘 접어 보다 코웃음을 치며 그만두었다. 이명헌의 결혼을 알았을 때부터였다고 그는 생각했다. 정우성은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축의금만 신현철을 통해 현금으로 보냈다. 이명헌의 결혼 상대가 누구인지, 연애를 얼마나 했는지, 어떻게 만났는지 하나도 궁금하지가 않았다. 불같은 연정과 숨막히는 정욕을 품었던 그이를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 것보다 더 확실한 복수가 어디 있을까? 정우성은, 실은,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 본질은 지극히 차가운 남자였다. 실연을 당한 뒤로 미련을 끊어내는 것은 쉬웠다. 가슴 아픈 사랑의 고통 따위 신경을 쓰기엔 모국어 한 마디 들리지 않는 땅에서의 삶은 매일매일이 새로웠고 벅찼다.



신경 안 쓰면 물어보지도 않았겠지.



신현철의 빈정 섞인 말에 정우성은 별달리 반박하지 않고 술잔을 비웠다.



신경 쓰는게 아니라 그냥 웃겨서 그래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요란하게 결혼해놓고 십 년도 못 채워서 이혼을 해요?
너는 결혼식에도 안 왔으면서 걔가 요란하게 결혼했는지 안 했는지는 어떻게 아냐?
나한테까지 들렸으면 요란한 거지. 형같으면 전여친한테 결혼 소식 전할거에요?
그게 명헌이가 전한 거냐? 애들이 그냥 생각한답시고 너한테 멋대로 전한 거라고.
어쨌든 내가 소식 들었다는 거 이명헌이 알았으면 어떻게든 나한테 말은 하지 않았을까? 나 축의금도 냈는데. 
이 새끼, 마인드가 아메리칸 다 돼서. 형 자 안붙이냐?
형한텐 붙여주잖아요. 현철이 형.
이명헌이 니 친구 아니다.
당연하죠. 나랑 이명헌이 왜 친구에요?



유부남 된 전 애인이지. 정우성은 그 말은 더 하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애도 있지 않아요? 그 둘.
어... 야. 정우성. 너 명헌이랑 연락 끊었다더니 얘기 다 듣고 있었냐?
인스타에 딸 사진을 올리지를 말아야지.
차단을 왜 안하는데?
그 새끼가 나 차단 안하니까.
야. 듣기 싫다. 형 화나게 하지 마라.
네. 선 넘었어요. 죄송해요.



신현철은 언제나 의외로 차분했다. 어리고 철없던 시절 정우성의 건방진 기어오름에 레슬링 기술을 걸었던 것은 신현철 나름대로 불편하지 않게 선후배 관계를 정리하는 호방한 아이스 브레이킹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굳이 그런 육체적 언어를 쓸 필요 없는 상황에서는 그저 차분히 목소리로 경고를 준다. 서른 살이 넘은 어른들의 관계에서 선을 넘는다는 것은 고작 암바 한 번 걸려서 해결될 일이 아님을 험악한 판에서 구르고 구른 정우성도 잘 알았다. 



우성아. 나도 명헌이가 왜 너랑 결혼 안했는지 솔직히 잘 모르지만. 니네 일을 내가 어떻게 다 알겠냐? 그치?
네.
나는 니가 명헌이랑 진짜 다 정리를 하고 싶었으면 그런 뭐 SNS 같은 것들 다 끊었어야 됐다고 생각한다.
근데 왜 이명헌은 나를 차단을 안 하는데요?
내가 명헌이가 아닌데 걔 속마음을 어떻게 아냐. 걔는 너랑 좋은 선후배 사이로 지내고 싶었을 수도 있지.
난 싫어요.
...뭐 그거야 네 감정이니까.
난 이명헌이랑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거나 아니면 아예 모르는 사이였으면 좋겠어.



그 자기고백은 생각보다 쉽게 흘러나왔다. 정우성은 신현철 앞에서 그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본질적으로 차가운 남자였기에 이명헌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 못할 바에야 모르는 사이가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수많은 헐리우드 연예인들을 팔로잉하며 어지러워진 인스타그램 타임라인에서 이명헌과 그의 어린 딸 사진을 발견하면서도 단 한 번도 문자메시지나 이메일을 남긴 적 없지 않았던가? 정우성은 그 딸의 이름도 궁금하지 않았고 그 딸을 낳은 어머니의 얼굴도 궁금하지 않았다.



명헌이가 이혼하고 나서도 같은 마음이냐?



정우성이 움찔했다.



나도 술 먹어서 하는 말이다만 명헌이 결혼생활 안 좋았다.
그랬어요?
진짜.. 별로 안 좋았어. 나나 다른 애들 다 솔직히 이렇게 이혼할 줄 알았어.
어떻게 안 좋았는데요?
하..... 내가 너한테 그걸 어떻게 말하겠냐?



신현철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제 이야기가 아닌 것을 털어놓는 데 선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정우성은 오래도록 덮어 묻어두었던 어떤 궁금증이 다시 스멀스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사랑은 아니고, 그냥 인간의 호기심.



딸은 누가 데려가는데요?
명헌이가.



오우. 진짜 안 좋았나 보군. 정우성이 술잔을 한번 더 비웠다.



웬만하면 엄마한테 가는데 아빠랑 가는거 보면 진짜 안 좋긴 했나보네. 이명헌 사실 결혼하면 가정에 충실할 것 같았는데.
엄마?



신현철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정우성은 왜 그러냐는 듯 신현철을 쳐다보았다.



내가 사람 잘못 봤을 수도 있겠지만 이명헌이 결혼생활 중에 바람피우고 그럴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서요. '자기 현재 파트너'한테는 충실한 사람이었을 것 같은데. 애가 엄마한테 안 가는 게 그 가정 파탄 사유가 엄마한테 있다는 거 아니에요?
명헌이가 엄마야.








우성명헌
모브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