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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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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ㅈ주의, 주화입마 사파 주의.






19편.


적비성은 휘영청 밝은 달이 뜬 숲에서 눈을 떴다. 풀벌레 소리가 낭낭하고 뺨에 묻은 밤이슬이 찼다. 적비성은 주변을 둘러보며 괴이쩍은 점을 찾으려 했다. 구미호를 상대한 적이 있는 그는 경박한 요마의 환영술이 사람을 홀려 색에 취하게 하는게 목적인만큼 환영 어딘가에서 허술한 점을 찾아 공격하면 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여우는 이연화의 말대로 예는 모를지언정 이백년은 날로 먹지 않았는지 환영이 방대하고 정교했다.

주위를 둘러본 적비성의 눈에 낮은 바위에 걸터 앉는 이연화가 들어왔다. 그날 밤, 그러니까 눈물을 흘린 이연화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그를 어깨에 둔 날과 비슷했다. 몸이 감응하여 불편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동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낮추라 했었다. 적비성은 그가 삵을 만난 밤 달뜬 이연화에 반응해 어쩔 수 없이 그를 껴안은 날로 돌아갈 줄 알았다. 어쨌거나 그의 양물이 섰으니까. 하지만 이 여우는 제법 마음을 볼 줄 아는 모양이었다.

"왔어?"

이연화가 술병을 들고 흔들어 보였다. 환영인 것을 알았기에 적비성은 더 다가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격하지도 않았다. 제 마음이 어떤지 오히려 더 보고 싶었다. 솔직히 이연화에게 욕정한 이유는 연형제로서 경맥이 요동쳐서가 아닌가. 인간적으로도 아끼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욕정의 대상으로 삼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사실 적비성에게 욕정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사내이니 벗은 여인이 달려들면 몸이야 동하겠지만 그보다 야렵을 나가 요마를 처치하는 쪽을 택할 적비성이었다.

"넌 한발짝도 오질 않네."

이연화가 웃으며 적비성의 앞까지 왔다. 마실래? 그가 술병을 내밀었다.

"무슨 수작이야."

"무슨 수작이긴. 기회를 주는거지."

적비성이 침묵을 지키자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나는 아직 각인을 안 했어. 너와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이연화가 적비성의 몸 주변을 스치듯이 돌았다. 그 모습이 마치 제 주인을 꼬리로 훑으며 주변을 도는 여우같이 애교스러웠다.

"사실은, 방다병보다 너와 더 잘 맞는 것 같아. 상처를 나눠 가지기도 무섭고... 뭣보다."

환영임을 알면서도 뒷말이 궁금해지는 적비성이었다. 만일 진짜로 이연화가 다시 연형제를 선택한다면 어떻게 될까.

"네 내력이 파고들 때 기분이 좋아. 강하게 뚫고 들어오거든."

미묘한 어감에 적비성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너는 나와 같잖아. 말 못할 과거로 마음을 닫았지. 나만이 널 이해할 수 있어. 마음이 통한다면 몸이 왜 안 통하겠어. 난 널 최고로 만들어줄 수 있을거야. 방다병이 날 다치게 하기 전에 네가 날 가져."

이연화가 눈을 천천히 뜨며 적비성의 앞에 서서 몸을 기대왔다. 그리고는 적비성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응?"

이연화의 눈이 적비성을 졸랐다. 적비성은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울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돌렸다. 환영의 균열을 찾아야했다. 가장 괴이한 부분은-

적비성은 다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유혹적인 자태로 몸을 문대오는 이연화가 입술을 열고 있었다. 자신을 취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적비성은 이연화가 자기와 방다병때문에 몸이 달아오르면서도 성질을 내며 내력을 넣어주던 일을 떠올렸다.

가장 이상한 것은, 너다.

적비성은 바로 장을 날려 이연화를 수 장 밖으로 밀어냈다. 이연화가 날아가 허공 어딘가에서 멈추더니 충격을 받은 듯 몸을 튕기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변의 밤풍경이 산산히 깨어지며 돌벽에 부딪혀 정신을 놓은 구미호의 분신이 보였다. 힘을 잃은 분신이 곧 연기처럼 흩어졌다. 아쉬우리만치 쉽게 끝났지만, 적비성은 이연화가 자신을 먼저 만났더라면 어땠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두 사내의 정기를 빼먹는 일에 실패한 구미호는 분이 풀리지 않아 눈을 부라렸다. 이번에는 신중을 기하리라 생각하며 예를 운운한 마지막 사내에게는 우아하게 대하리라 마음 먹었다. 구미호는 이연화의 의식 어딘가에서 정념을 읽으려 애썼다. 하지만 곧 당황하고 말았다.

"뭐지?"

여인이 있는데, 잘 잡히지가 않았다. 아주 오랜 기억처럼 희미하고 정욕보다 다른 감정이 짙어 쉽사리 끄집어내지지가 않았다. 대체 어떤 여인이냐- 요마가 정신을 집중해 모습을 그려냈다. 눈썹과 이마가 고운 단정한 여인이 나타났다. 옳거니. 저 두 놈이 좋다고 달려든 이 남자는 정작 여인을 좋아했군.

이연화는 주변에서 목련향이 나는 것을 느끼고 여우가 한 짓을 금새 알아차렸다. 주변이 습자지에 먹이 스미듯이 서서히 교완만의 방으로 바뀌었다. 제 등뒤에 여린 손이 느껴졌다. 자그마한 교완만이 저를 뒤에서 안으려 하고 있었다. 마음 한 켠이 욱씬대고 아팠지만, 지금의 이연화에게 교완만은 욕정의 대상이 아니라 깊은 슬픔이 묻은 그리운 존재였다. 한 생을 다해 자신을 그리워한 여인에게 음심 따위는 자리잡지 못했다. 이연화는 몸을 돌려 교완만의 환영을 바라보았다. 눈빛부터가 달랐다. 교완만은 세상에 없었다. 지금 여기에도 당연히 없다. 이연화는 조용히 교완만의 눈을 가렸다.

"내 여인은 죽었어. 여기서 더하면 가만 두지 않겠어."

이상이로서, 그가 말했다. 동시에 요력을 풀어 여우를 위협했다. 교완만의 몸이 흠칫 떨렸다.

"상이?"

"그 목소리로 한마디만 더 하면 죽여버리겠다."

여우가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낮게 깔린 이연화의 음성에 적잖이 당황했으나 여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반인반요였구나! 게다가 제 것보다 강한 요력을 가진게 분명했다. 이 요력까지 취하면 몸을 회복하는 것은 금방일터였다.

구미호는 있는 힘을 다해 이연화의 의식 속을 휘저었다. 옆의 두 사내에게 몸이 반응해 곤란한 순간이 있었지만 잠시 뿐이었고 욕정이라 하기 어려웠다. 이 놈은 정욕이란게 없나!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구미호는 입에서 구슬을 뱉었다. 보통의 인간에게는 쓸 일이 거의 없는 제 요력의 결정체였다. 무의식에 접근하려면 구슬의 힘이 필요했다. 구미호가 요력을 모아 이연화의 의식 너머로 들어갔다.


이연화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제 것이 아닌 것 같운 기억이 밀려 들어와 두통이 일었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전신을 쓸고 지나가는 격통이었다.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할만큼 거센 통증이 지나가 이연화는 곧 정신을 놓고 말았다. 하지만 누군가 억지로 문을 열어 제껴 비를 들게 하는 것처럼 조각난 장면이 이연화에게로 밀려들어왔다.

칠흑같은 밤, 피비린내, 붉은 빛.
무엇 하나 생소하지 않은게 없었다.

이연화는 어딘가로 기어가고 있었다. 털썩 엎어져 무릎에 질퍽한 진흙이 묻었다. 손아귀에 축축한 땅이 닿았다. 풀벌레 소리는 비명처럼 크게 들려와 귀를 때렸고, 몸 안에서부터 나는 듯한 피비린내가 달게 느껴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갑자기 눈 앞이 휙 돌더니 제 얼굴이 보였다. 물에 비친 모습인지 제 모습이 일렁이며 잔물결을 그렸다. 눈에 붉은 빛이 어려 고개를 휘저을 때마다 잔상을 남겼다. 이연화는 곧 토악질을 했다.

요마가 된 날의 기억인가?

이연화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이 모든게 환영일 뿐이다. 요마가 만들어낸 가짜일 터였다. 이연화는 제 허벅지에 손톱을 세워 강하게 꼬집었다. 뜨끔한 통증이 일어 정신이 드는 듯 했다.

장면이 또 바뀌었다. 아무래도 구미호에게는 이 무의식을 제대로 써먹을 힘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드문드문 환영에 끼워넣는 일에는 성공하여, 이연화는 제 기억에도 없는 장면을 마주해야 했다.

피. 피를 원해.

강렬한 욕구가 일어 이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제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욕망이 휘몰아쳐 뱃 속을 휘저었다. 저항할수록 경맥이 고통스럽게 뒤틀렸다. 정신줄을 놓으려는 찰나, 꿈에서 장면이 전환되듯 또 다른 장면으로 바뀌었다. 물가에 있던 자신이 그보다 몇 발자욱 뒤에 있는 바닥에 웅크린 채 엎어져 있었고, 검은 장포 자락이 펄럭이며 시야를 가린다 싶었을 때 몸의 격통이 사그라들었다. 이연화는 밭은 숨을 쉬며 찾아온 평안에 잔뜩 굳었던 몸을 늘어뜨렸다. 이대로라면 진흙에 코를 박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연화는 누군가의 강인한 팔이 자신을 꽉 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등에 닿은 이의 가슴이 저를 다 품어 안는 것 같았다. 서늘한 기운 안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기가 섞여있어 눈이 절로 감겼다.
이연화는 고개를 들어 저를 안은 상대를 보려고 했지만 볼 수가 없었다. 제 앞에 들이밀어진 힘줄이 불거진 팔에 탐스럽기 그지 없는 선혈이 흘렀다. 피를 본 순간 그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제 여인이 발가벗고 앞에 서있을 때 사내의 눈에 흐를 법한 욕정 어린 탐심이 놀랍게도 피를 본 이연화의 뱃 속에서 꿈틀댔다. 이연화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 환영에 낄 수 없는 것은 구미호만이 아닌 듯 했다. 방금 전 교완만의 환영과는 달리, 출처도 정체도 알 수 없는 이 장면에서 이연화는 제 의지대로 무얼 해볼 수가 없었다. 그저 생생하게 제 몸으로 기억을 재생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무슨....!

이연화는 낯선 이의 팔에 얼굴을 묻고 게걸스레 피를 마시는 스스로를 마주하고는 기절할 듯 놀랐다. 벗은 몸을 탐하는 사내처럼, 여인의 희고 부드러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흥건한 것을 탐닉하는 사내처럼, 이연화는 정신을 놓고 피를 탐했다. 의식의 한 켠에서 이를 지켜보는 이연화는 당혹감과 희열감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 자는 대체 누구이길래 구미호가 손을 쓴 환영에 등장한단 말인가.

곧 다른 손이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이연화의 눈썹이 찡그러졌다. 손길이 다급하고 여유가 없어 손의 주인이 얼마나 정욕에 불타 제 몸을 찾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에 이연화는 인상을 쓰며 기억을 더듬으려 애썼다. 하지만 피를 찾는 제 욕망이 너무도 커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한 쪽은 피를 마시고, 한 쪽은 상체를 더듬을 뿐인데, 어찌 보면 그것 뿐인데, 마치 격렬한 정사를 나누는 것처럼 숨이 가쁘고 몸이 떨려왔다. 상대가 저와 같은 사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열망과 감각만이 존재했다.

살갗에서 예민한 감각이 치받고 올라와 뜨거운 손이 저를 만져댈 때마다 목덜미에 소름이 일었다. 곧 뜨거운 숨이 목에 닿았고 축축한 혀와 이가 느껴졌다. 이연화는 차라리 이 자가 제 목을 물고 씹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질나서 견딜 수 없는 감각이 몸을 간질여, 이연화는 조르듯이 입에 문 살을 빨아들였다. 저를 안은 이에게서 낮지만 정욕에 가득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이연화의 정신도 아득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연화의 목이 뒤로 제껴졌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이연화를 조심스레 받치고 피가 흐르는 팔을 들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 것이 먹을만 하더냐."

작게 웃은 사내가 이연화의 입술을 핥고 혀를 밀어 넣었다. 이연화는 몽롱한 가운데 사내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진짜 제 기억인지 여우의 환영인지 알 수도 없었다. 곧 기억이 끊기며 환영이 깨어져 나갔다.

분한 듯한 여우가 씩씩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아무런 개입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우의 환영이 아니라 제 잊어버린 기억이 분명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이연화는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기억 속 자신이 피를 마시며 욕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단지 피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세 사람의 환영이 모두 깨지자 주변에 걸어두었던 요마의 결계도 힘을 다했다. 셋은 침상에서 일어나 험악한 표정으로 구미호를 노려보았다. 이연화는 방금 전 환영 속의 극치감으로 가빠온 숨을 가리기 위해 심법을 가벼이 돌리고 다시 태연한 평소의 얼굴로 돌아갔다. 여우는 세 사내가 멀쩡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곱고 커드란 눈망울에 원망을 담고 망연자실하여 바닥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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