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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8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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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ㅅㅈ 주의, 주화입마 사파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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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편.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 나비가 막 이연화의 손 끝을 떠났다. 나비는 홍매화의 잔가지를 스치듯 지나 도성 서쪽의 저잣거리를 향해 날아갔다. 이연화와 모한이 만났던 객잔의 간판 앞을 빙 돈 나비는 윗층 객실의 빼꼼히 열린 들창 틈새를 찾아 들어갔다. 나비는 목적한 이를 찾으려는 듯 방 안을 부산스레 맴돌았다.
비술이 작동하여 주홍 빛이 나비 날개에서 똑 떨어져 나와 작은 회오리를 그리려던 찰나, 어디선가 붉은 날개를 가진 나비가 나타나 검은 나비를 막아섰다. 붉은 나비는 저보다 더 작은 검은 나비를 희롱하듯 가려는 길마다 날개로 막아서며 팔랑댔다.

제 시호의 눈으로 모한을 염탐하려 했던 이연화는 천자락같은 무언가가 펄럭대는 광경만 머리 속에 떠오르는 통에 인상을 썼다. 침상을 가린 천에 시호가 걸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두 나비가 실갱이를 벌이는 사이로 모한이 다가왔다. 그는 검은 나비가 이상이가 보낸 시호임을 진즉에 알아챘다. 모한은 작게 웃으며 시호를 손에 감으며 희롱했다. 제 주인과 같은 요력을 느낀 시호는 낯선 이의 유희에 맞추어 손가락 끝을 톡톡 치며 휘돌았다. 검은 나비와 붉은 나비가 한쌍의 무희가 된 듯 모한의 손 끝에서 윤무를 추는 모양새가 퍽 우아했다.

"가거라."

모한이 창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 한 쌍이 된 나비 두 마리가 퍽 정겹게 포로롱 날아 올라 창을 빠져 나갔다.

이연화는 시호가 돌아온 기척을 느끼고 눈을 들었다. 조금 있으면 사고문에 다녀온 적비성과 방다병이 들어올 터라 신경이 쓰여 얼른 돌려보낼 작정이었다. 마음이 급해 손부터 올린 이연화는 제 시호의 뒤를 따라 붉은 나비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둘이 어찌나 포로롱 유희를 떠는지 재잘대는 암수 한쌍으로 보였다.
이연화는 모한이 저를 궤뚫은 것을 넘어서 무슨 의중이 있어 나비를 딸려 보냈는지 짐작하기 어려워 미간을 찌푸렸다. 마침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손을 튕겨 서둘러 흔적을 지우느라 이연화의 머리 속 의문도 같이 사그라들었다. 붉은 나비도 그의 손짓에 얌전히 사라지는 것이 더 기이했다.

방다병과 적비성이 안으로 들자 이연화는 표정을 바꾸며 태연히 자세를 세워 앉았다.

"사고문의 보옥은 무사한지요?"

"보옥은 사고문에 있다. 다만."

적비성의 무덤덤한 말에 방다병과 이연화가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대개 적비성은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법이 없었다. 그가 부연을 한다면 그 뒤에 제법 복잡한 사정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칠곡산 결계가 깨질 때의 비책을 아는 원로 하나가 정신이 나가 말이 통하질 않는다는군. 이상이가 아니면 말하지 않겠다고 수십년을 버티더니 미쳐버린 모양이다."

이연화의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설마, 그녀가 살아있었나. 동요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이연화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기침을 하는 척을 했다. 방다병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고문에 원로라면 교원로? 이상이를 기억하는 몇 안되는 사고문 사람이라 들었어. 몸이 좋지 않아 은둔하며 살았다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니 어찌된 일이지?"

"노망이다."

야속하리만치 짧게 정리해버린 적비성의 말에 방다병은 더 말을 보태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연화는 탁자 아래로 내린 손을 꽉 쥐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마음을 눌러야 했다.

"천마왕을 막을 방법을 알려면 교원로의 입을 열어야 하는거군요. 일시적으로 머리를 맑게 하는 탕이 있으니 제가 만나 봐야겠습니다."

"네가 교원로를 만나겠다고?"

방다병과 적비성이 동시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연화를 돌아보았다. 이연화는 뭐 문제 있냐는 듯 눈썹을 올렸다.

"천마왕이 보옥을 가져갔으니 결계 깨는건 시간 문제고, 결계가 깨지면 세상이 흉흉해질텐데 응당 막아야지. 나는 의원이고 망령증을 좀 알아. 안타깝게도 치료는 안되지만 집중해서 기혈을 보하고 반짝 정신을 맑게 할 수는 있어. 결계가 깨지면 무슨 수를 써야하는지 교원로만 안다는데 누가 만나는지가 중요해?"

"그야 그렇지만, 교원로는 수십 년을 은둔해왔어. 아무리 의원이라도 이제 와서 누굴 만나줄지는... 사실 어머니도 교원로를 만나지 못하셨거든."

방다병이 말끝을 흐렸다. 천마곡에 결계를 치러 간 이상이는 자신이 잘못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믿을 수 있는 이에게 서찰을 남겼다고 했다. 그가 교완만이었고, 거기에는 만에 하나 실패하거나 결계가 깨졌을 시에 다음 계책이 적혀 있었다. 교완만은 이상이와 애틋한 사이였고, 서찰을 받은 후에나 이상이가 죽으러 떠난 것임을 알고 오열을 했다. 역시나 이상이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시신과 소사검을 찾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고집스레 선언했다.

이연화도 그녀의 소문을 들었으나 반인반요의 몸으로 그녀 앞에 나설 수는 없었다. 십여년이 지나 교완만이 소자금과 혼인을 한다 했을 때 이연화는 중원 숲 깊이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후 소식이 들려오는 것이 없고 이연화도 굳이 알려하지 않아 가슴 깊이 묻어만 두고 있던 터였다. 이상하게도 후사 소식이 없었고 소자금은 수군대는 소리를 뒤로 하고 받았던 문주 자리를 결국 내놓아 교완만의 조카가 이어 받았다고 했다. 사고문은 과거의 영광과 이상이의 이름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이연화는 과거의 꿈처럼 여기기로 했고 저를 아는 이들이 거의 세상에 남지 않게 될 무렵에는 교완만이 제 가족의 품에서 편히 잠들었으리라 믿었다.

교완만은 나를 기다렸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연화는 온 생을 걸고 그녀에게 사죄해야 했다. 그녀의 마음을 더 무겁게 여기지 못한 자신을 벌해야했다. 이연화의 마음이 바닥까지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급한 일이니 가릴게 없다. 탕약을 만들어서 내일 출발하지."

이연화는 적비성의 시원스러운 말에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교완만에게 서찰을 남긴 것은 맞으나 더 알아야할 것이 있었다. 이상이 사후에 만들어졌을 비검에 대해서는 그녀가 알 것이었다.

*

사고문은 겉으로는 더 화려해졌다. 낡았던 현판과 기둥, 기와는 잘 가공한 물품으로 교체하여 번듯했다. 모든 건물마다 이상이의 초상이 걸려 있었고 향과 꽃이 가득했다. 이상이가 목숨을 바쳐 천마왕을 가둔 이후 각계각층의 유명한 가문은 물론 황제까지도 꾸준히 예를 표하며 귀한 물품과 은자를 보내왔다. 사고문은 이상이로 먹고 산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후로 그렇다할 걸출한 인재가 나오지도 않았고, 소자금이나 핵심 간부들이 아무리 애써도 이상이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뭇사람들에게 상대적인 아쉬움만 샀다. 사고문은 실상 명맥만 유지하는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이연화는 입이 쓰게 말라오는 것을 느끼며 한때 익숙했던 대문을 지나 뜰에 발을 디뎠다.

"적맹주, 방소협."

사고문의 현 문주인 허성륭이 공수를 했다.

"이 분이 이신의시군요."

공손히 인사를 해오는 허문주에 이연화도 답배를 했다. 허문주의 얼굴을 보자 교완만과 닮은 동그란 눈에 절로 시선이 가, 이연화는 예를 차리는 척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교원로께 올릴 탕약을 맡겨 놓았습니다. 천마왕이 보옥을 훔쳐가 결계를 깨려하니 사안이 중합니다. 허문주, 그간 정말 아무 것도 듣지 못하셨습니까?"

방다병이 공손히 묻자 허문주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모님은 20년 전까지도 이상이가 돌아오면 직접 밝힐거라고 고집을 피우셨습니다. 저희 모두 초조했지만 워낙 완고하셔서 말릴 수가 없었지요. 그러다 어느날 낙상으로 크게 앓고 나신 후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말수를 잃으셨습니다. 저..이신의, 사고문은 이제 더는 잃을 것이 없습니다. 이모님이 중대한 비밀을 안고 저리 입을 안 여시니 일이 잘못되면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부디 비책을 찾도록 도와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문주."

이연화는 비통한 심정을 감추며 대답했다. 무력해보이는 문주와 겉만 번지르르한 사고문 건물이 문파의 몰락을 예견하는 듯 했다. 강호의 유명 문파로 정의를 실현하고 요마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자며 뭉쳤던 옛 사고문의 동료들이 꿈결의 장면처럼 아련하기만 했다.

"제가 혼자 들어가봐도 되겠습니까?"

이연화의 청에 허문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교원로의 방으로 안내했다. 방다병과 적비성은 그런 이연화의 뒷모습을 보며 다과가 차려진 탁자 앞에 앉았다. 말없이 앉은 적비성을 흘끔 본 방다병이 퉁명스레 말했다.

"큰 소리 치고 가더니 결국 이연화까지 동원했네."

"제 조카한테도 입을 안 여는 노인이다. 겁박으로 됐다면 벌써 했어."

"노인을 겁박할 생각을 하다니 성품이 왜 그래?"

방다병이 눈을 부라렸다. 안 그래도 이연화의 다른 연형제라 마음에 안 드는데 하는 짓마저 밉상이었다. 명색이 명문 문파라면서 도적떼같은 말이나 해대는 것이 방다병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그 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드는지 연형제라 마음에 안 드는지 방다병도 헷갈렸다. 어쨌거나 마음에 안 들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왜 이연화랑 같이 가겠다 우기는거야? 경맥을 통하지 않고 곁에 두면 괴로울 뿐이야. 경맥은 두 사람과 통할 수 없다고. 그리 하게 두지도 않겠지만."

"네가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네가 별볼일 없으면 나한테 오겠지."

"뭐? 너!"

눈 하나 깜짝 않고 툭 던지는 적비성의 말에 방다병이 벌떡 일어나 성을 냈다.

"너 설마 어떻게 해 볼 작정으로 따라오라고 한거야? 됐어! 너 혼자 다녀! 괴롭거나 말거나! 속이 아주 시커멓군!"

"시끄럽군. 이연화는 네가 어떻게 하고 자시고 할 대상이 아니란 뜻이다. 애송이가 알 리가 없지만."

"걸핏하면 겁박이네 죽이네 하는 주제에 남의 의중을 생각해주는 척 하다니 언어도단이야."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차를 마시고 동시에 딱 소리가 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누가 보면 죽이 아주 잘 맞는 줄 알 모양새였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남은 보옥을 천기당에서 보관한다. 지금의 사고문은 믿음직스럽지 않아. 사고문 문주가 그리 청했다."

"금원맹도 못 지켰으면서. 오히려 한 군데에 두면 더 위험한게 아니야?"

"천기당은 기관에 능하니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해서 모두 동의했다."

하긴 지금의 사고문이나 보옥을 뺏긴 금원맹보다는 천기당이 더 나을지 몰랐다. 천기당은 며칠 전부터 기관을 재정비하고 경계를 강화하느라 천사들을 더 배치하기 시작했다. 방다병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앞으로 적맹주와 이연화, 그리고 자신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만이 이해가 안 갈 뿐이었다.



*


교완만의 방에서 은은한 쑥향이 났다. 머리를 맑게 한다며 가져온 약재를 섞어 향을 태운 탓이었다. 방에 들어선 이연화는 풍경을 보자마자 주저 앉지 않기 위해 애써야했다. 70년 전 교완만과 담소를 나누던 방이 몇몇 소품을 제외하고는 달라진 것이 없이 그대로였다. 마치 그 때로 돌아간 착각이 들만큼 똑같아 쑥향이 코를 찌름에도 이연화에게는 그 시절 교완만을 찾을 때마다 맡았던 목련향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연화는 가슴이 죄어오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교원로, 들어가겠습니다."

교완만이 앉은 의자는 창을 향해 있어 앞모습을 볼 수 없었다. 경치를 보라고 배려해둔 것 같았다. 등받이가 있는 의자라 교완만의 하얗게 센 뒷머리만이 보였다. 열일곱 그녀의 흑비단같이 부드러웠던 머리카락은 거친 백발이 되어 틀어올려져 있었다. 한 쪽의 머리장식에 시선이 닿자 이연화는 주먹을 말아쥘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빛이 바랜 매화 모양의 머리 장식이었다.

[이게 뭐에요?]

[지나가다가 눈에 띄어 샀어. 네가 하면 어울릴 것 같아서.]

수줍지만 기뻐 어쩔 줄 몰라하는 제 여인의 미소에 이상이는 가슴이 뻐근해졌더랬다. 내가 꽂아줄게, 턱 아래로 동그마하게 보이는 제 여인의 머리가 귀여워 이상이는 살풋 웃었다. 풍성한 머리카락에 장식을 찔러 넣자니 손이 떨려서인지 경험이 없어서인지 영 서툴렀다. 아야, 교완만이 움찔하다가 웃었다. 아, 미안! 아팠어? 허둥대는 저를 보고 해사하게 웃는 여인이 예뻐 또 바보같이 웃었다.

[삐뚤어졌네.]

어찌 해도 바로 꽂기가 어려워 쩔쩔 매는 이상이에게 교완만이 마주 웃어 보였다.

[무공보다 머리 장식 꽂기가 어렵다니 어찌된 일이에요.]

[혼인하면 내가 매일 꽂아줄게. 매일을 일 년 연습하면 열 개도 꽂을 수 있을거야.]

[그리 많이 꽂으라고요?]

네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머리장식도 장신구도 다 해줄 수 있어.

함께 홍매화를 바라보며 속살댄 자리에서, 고령이 된 교완만이 홀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70년의 세월을 머금은 머리 장식이 흰 머리카락을 단단히 모아 쥐고 있었다. 마치 지난 시간을 잊지 않겠다는 듯이 고집스레 다른 것을 허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터였다. 이연화는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은, 옛 연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팔걸이에 걸친 손이, 언뜻 비친 뺨이 세월의 흔적을 새기고 있었다.

"교완만."

고요한 음성에 교완만의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연화는 교완만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이연화, 아니 이상이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무너져 버렸다.

주름이 깊게 패인 얼굴에 생기라곤 보이지 않았다. 백옥같던 피부는 노인의 그것이 되어 주름과 검버섯으로 뒤덮여 있었다. 맑게 빛나던 눈동자도 흐려져 있었고 그나마도 처진 눈꺼풀 뒤로 숨어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이연화는 떨리는 손으로 교완만의 손을 잡았다.

"...완만."

교완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이름을 부르는 젊은이를 쳐다보았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멍한 얼굴에 이연화의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연화의 코가 발개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완만. 미안해."

교완만의 손을 잡은 이연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떨구는 이연화의 머리에 교완만이 손을 얹었다. 누군지 알지 못해도 위로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연화는 일어나 소사검을 뽑아 들었다. 검의 손잡이를 교완만의 눈 앞에 들이밀자 교완만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곱은 동작으로 양손을 들어 손잡이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가 곧 떨림으로 변했다. 교완만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상..이."

이연화는 검을 떨구고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교완만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와 마음 속 굳은 상처를 녹여내는 것 같았다. 둘은 잠시간 그대로 있었다.

교완만은 명징한 정신도, 총기 넘치던 말도 잊어버렸다. 자신이 어느 시간에 사는지도 분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눈 앞의 남자가 이상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노망난 노인의 아이같은 믿음이라 해도 좋았다. 그녀는 소사검과 이상이를 만난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어쩌면 자기가 날 좋은 봄 어느 시간인가에 의자에 앉은 채 죽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아무래도 좋았다.

교완만은 이상이에게 무엇을 내어주어야 할지 알았다. 가끔 제 옷이 어디있는지 몰라 침의를 입고 나서고 시녀의 신발을 제 것이라 우겨 빼앗아 신기 일쑤였지만, 지금만큼은 이상이의 버팀목이자 조력자였던 열일곱의 교완만이었다. 교완만은 침대 밑 비밀공간을 뒤져 꺼낸 기다란 목함을 꺼내었다. 그 안에는 서찰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이를 이연화에게 건네주고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울지 말아요.

이연화는 제 뺨 위에 얹은 교완만의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나는 또 가야해."

교완만의 눈이 커지더니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순식간에 고였다.

"천마왕이 결계를 깨려고 해. 내가 여지껏 산 건 한 번 더 마무리를 지으라는 하늘의 뜻인가봐. 비검은 어디에 있어?"

이번에도 죽으러 갈 것임을 알아서였을까, 교완만이 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연화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단호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내가 지킨 것들을 내가 놔버리면 내 지난 생이 뭐가 돼. 너도 못 보고 지킨 세상인데. 모질고 못난 짓이라도 끝까지 하게 해 줘."

발갛게 부어 눈물이 찬 이연화의 눈을 본 교완만은 입술을 깨물며 아프게 웃어보였다. 열일곱의 교완만이 말하는 것만 같았다. 상이, 당신은 정말 말릴 수가 없어요-
이연화는 교완만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괜찮은 척 하던 얼굴이 고통과 폭발하는 그리움으로 일그러졌다. 칠십 년 만의 그리운 품이었다.

"편히 지내다가 훗날 저 세상에서 만나."

나 역시 이 생을 끝낼테니. 이연화는 이번 생에서 자신의 유일한 여인이었던 사람을 마지막으로 꽉 안았다.

교원로의 방에서 나온 이연화의 손에 들린 목함을 보고 허문주와 방다병, 적비성을 비롯한 사고문 몇 사람들이 모두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문주가 역시 이신의라며 감탄했다. 이연화는 목함을 방다병에게 건네고 말없이 사람들을 지나쳐 문을 빠져 나갔다. 사람들이 뒤에서 웅성대며 비책을 연구하자고 목소리를 높여댔다. 문지방을 넘는 순간 과거를 뒤로 하리라 마음 먹은 이연화의 표정만이 결연했다.



*


중원 초입에 세운 연화루 앞에 두 남자가 무공으로 땔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봄철이라 밥 짓고 물을 끓일만큼의 장작과 불쏘시개만 있으면 되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겨울철 땔감을 얻는 것마냥 수북히 쌓여 있었다. 연화루의 주인은 두 객을 위해 점심밥을 짓고 채소를 썰고 있었다. 신이 난 한 사람과 무표정하지만 전투적일만치 성실하게 구는 한 사람이 경쟁적으로 장작을 패고 있었다.

"둘이 대련이라도 하는.."

밖이 요란하여 고개를 쭉 뺀 이연화의 말이 뚝 끊겼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이걸로 됐나."

방다병과 적비성의 말이 겹쳤다. 방다병이 적비성을 흘끗 보고는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비성은 여느 때처럼 표정은 그대로였으나 어쩐지 장작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연화는 기가 찼다.

"잘됐네. 마침 혼자 살던 곳에 객식구가 둘이나 늘어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그걸로 옆에 한 채 더 지으면 좋겠네. 밥 먹고 기운내서 하나 더 지어주면 안될까."

이연화가 쏙 들어가자 방다병은 엣-소리와 함께 호다닥 연화루로 따라 들어갔다. 적비성은 장작더미를 보고 제 손을 털고 뒤를 따랐다. 식탁 위에는 흰 밥과 채소탕, 죽순 볶음과 육전에 몇 가지 채소무침이 있었다. 우와, 방다병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밖에서 사내들이 대충 챙겨먹을 끼니치고는 훌륭했다.

"첫 날이라 신경 쓴거야. 늘 이렇게 먹을 순 없어."

신나서 찻물을 올리던 방다병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지도는 언제 받으러 가기로 했어?"

"이틀을 달라 했으니 내일 가보아야지."

"그 지도가 비술로 잠겨 있어서 암호를 해독하려고 도성 내 내로라하는 비술사들이 다 모였어. 대체 무슨 지도이길래."

이연화는 제가 썼던 내용이 아닌 양 말을 골랐다.

"이상이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천마왕이 보옥을 찾아 다시 요력을 방출시키면 결계가 파괴돼. 당시 연합군은 결계를 칠 생각만 했지 뒷 일은 고려하지 못했어. 보옥은 당시 천마왕의 요력을 흡수해서 그 힘으로 결계를 친거나 다름없어. 요력이 한 번 방출되면 막을 방도도 없고. 그래서 비술사들이 모여 만든게 현월도야."

이연화가 잠시 숨을 골랐다. 잠자코 듣고 있던 적비성이 말을 얹었다.

"현월도는 단검이다. 천마왕에게 꽂으면 보옥이 방출한 요력이 결계를 깨는게 아니라 요력의 주인에게 들어가게 되어 있어. 현월도는 요력을 수 배 증폭시켜 요마의 경맥을 끊어버리지."

방다병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요력이 되려 독이 되는거네. 만에 하나 천마왕이 보옥을 다 모은다면 믿을건 현월도밖에 없겠어. 그럼 저 지도는..."

"현월도가 있는 곳의 위치야. 현월도가 가장 중요하니 저리 복잡하게 숨겨두었겠지."

셋은 잠시 말이 없었다. 결국 보옥을 지키는 일과 만에 하나 보옥을 모아 결계를 깨는 것을 대비해 현월도로 천마왕을 찌르는 일 모두가 필요했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자신들이 현월도를 찾아 천마왕에게 검을 꽂아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월도와 지도를 만든 원로 비술사는 이미 세상을 뜬지 오래야. 후대 비술사들이 그만큼 실력이 있으면 좋겠군."

이연화가 그만 먹자는 뜻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방다병과 적비성도 어깨의 무거운 짐은 잠시 잊고 식사를 시작했다. 장작을 패다 와서인지 두 사람 모두 육전부터 집어 올렸다. 기대로 가득 찬 눈을 하고 육전을 한입에 넣은 방다병과, 반절 가량을 베어문 적비성이 순간 눈을 마주쳤다.

잠깐, 이거 맛이 왜 이래?

방다병이 씹던 것을 멈추고 커드란 눈으로 적비성을 쳐다보고 괜찮냐 물었다. 적비성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지 턱을 움직이지 않은 채로 드물게 동의한다는 눈짓을 해왔다. 이연화만이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방다병이 눈을 데룩 굴리며 말했다.

"아, 내 정신 좀 봐. 장작 패고 손을 안 씻었어. 적비성 너도 안 씻었잖아."

적비성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이연화는 애같긴,하는 눈으로 호들갑을 떠는 방다병을 흘끔 보았다. 씻고 올게! 방다병이 일어서서 적비성에게 손짓을 했다.

"둘이 언제 그렇게 사이가 좋아졌어? 손도 같이 씻으러 가게."

의아하다는 듯한 이연화의 물음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근처 호숫가로 가 전을 뱉고 흙으로 덮었다.

"이를 어쩌지?"

방다병이 심각하게 물었다. 적비성은 호수를 노려보다시피 하며 말했다.

"먹을 물이 많이 필요하니 정수를 해둬야겠다."

"물이랑 다 먹으려고?"

괜한 경쟁심이 든 방다병이 놀라며 물었다.

"너처럼 반찬 투정하는 애가 아니니까."

"허세 부리긴. 득달같이 튀어나왔으면서."

둘은 양보 않고 팽팽히 맞섰다. 너무 오래 있으면 이연화가 이상하게 여길텐데. 방다병은 적비성을 흘끔 쳐다보았다.

"내가 요리를 좀 하거든. 내가 요리를 맡을테니 이연화를 방해하는건 네가 해. 어때?"

"그러지."

적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답하자 방다병이 거드름을 피웠다.

"고맙다는 말은 안해도 돼. 대신 이연화는 넘보지 마."

"유치하군."

적비성은 그대로 몸을 돌려 연화루로 돌아갔다. 답하지 않으시겠다? 방다병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달갑지 않은 동거인의 뒤통수를 노려 보았다.

많은 밥과 물로 반찬을 넘긴 식사 시간이 지나고 방다병과 적비성에게는 평화로운 오후 시간이 찾아왔다. 뜰에서 검 초식을 펴며 몸을 풀던 방다병에게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왔다. 연화루를 찾게 훈련 받은 전서구였다. 비둘기 다리에 말린 서찰을 펴본 방다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침 바구니와 호미를 옆에 낀 이연화가 밖으로 나와 그 모습을 보았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어?"

방다병은 도성 쪽을 향해 공수로 예를 표했다.

"교원로가 세상을 떴어. 놀랍게도 재회를 바란다는 글을 남겼다는군. 앗, 괜찮아?"

방다병이 화들짝 놀라 비틀대는 이연화를 부축했다.

"옷자락이 감겼나 봐. 교원로도 무거운 짐을 벗은 기분이었겠지. ....나는 나물을 좀 캐러 갈테니 여기 있어."

"여긴 중원이야. 깊이 들어가지 말고 근처에 있어."

이연화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휘 저었다.

"천기당 소당주에 금원맹 맹주가 있는데 뭘 걱정을 해?"

이연화는 몸을 돌렸다. 돌리자마자 눈 앞이 부옇게 흐려져 눈을 깜빡이며 바닥만 쳐다보았다. 사람들에게서 보이지 않을만큼 멀어졌을 때, 이연화는 나물을 캐는 모양새로 쪼그려 앉아 바구니를 옆에 내렸다. 보드라운 땅에 호미를 내리 찍자 흙이 튀었다. 이연화는 한 자리에 계속해서 호미를 내리 찍었다. 흙이 뺨에 튀어 무심하게 손등으로 얼굴을 문대었다. 눈물이 묻어나와 손등을 적셨다. 그제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연화는 참지 못하고 털썩 주저 앉아 양손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기억 속의 매화 장식이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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