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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7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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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들으러 갈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 앞에서 나이키 운동화 끈을 묶고 있던 우성이는 앉은 상태 그대로 고개를 돌려서 정대만을 바라보았음. 그리고는 말없이 일어서서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음.
야.
대만이가 다시 한 번 불렀음.
사람이 묻잖아. 태섭이랑 무슨 사이냐고.
방금 일어나서 머리 다 뻗친 상태로 목소리 깔아봤자 하나도 안 무섭거든. 우성이는 정대만을 향해 돌아서면서 생각했음.
글쎄요. 제가 그걸 말해드려야 할 의무가 있나요?
대만이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음. 안그래도 띵한 머리가 더 아파지는 것 같았음.
뭐, 굳이 말하자면...지금 형하고 태섭이보단 가까운 사이라고나 할까요?
우성이는 정대만을 똑바로 응시하며 손만 뻗어 현관문 옆에 걸려있는 열쇠를 빼냈음.
아, 그리고 드신 거 설거지는 바로 부탁드릴게요. 설거지거리 쌓아두는 거, 태섭이가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정우성은 산왕의 형들이 '잘생겼지만 재수없다'고 평했던 표정으로 정대만을 향해 미소짓고 문을 닫았음. 끝까지 힘주어 잡아주지 않으면 닫힐 때 복도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나는 현관문이었지만 일부러 잡지 않고 내버려두었음. 좀 유치했나. 하지만 이 정도라도 되돌려주지 않으면 우성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음. 우성이는 어제부터, 정확히는 어제 건물 앞에서 정대만에게 손목을 잡힌 송태섭의 표정을 봤을 때부터 이미 자신의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음. 자신도 모르는 곳에서 뭔가 시작도 되기 전에 끝나버린 느낌이었음. 이게 농구였다면 죽이되든 밥이되든 끝까지 해봤을 테지만 이건 농구가 아니었음. 태섭이는 오늘 오전 연습만 있을테니까 점심 때가 좀 지나서 집으로 돌아올 것 같았음. 우성이는 오후 수업이라 끝나면 저녁 때 쯤이었음. 하지만 우성이는 최대한 밖에서 나돌다가 들어갈 예정이었음. 어제 못 먹었던 피자나 먹으러 갈까. 다 먹고 나선 아이스크림도 먹어야겠어. 우성이는 생각했음.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태섭이는 현관문을 잡고 고민했음. 이 문 너머에는 정대만이 있었음. 어제는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얘기하자고 넘겼지만, 오늘은 어떻게 미룰 핑계가 없었음. 태섭이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음. 대만이는 여전히 소파에 누워있었음. 아직까지 잔다고? 시차적응이 덜 됐나...태섭이는 가방을 내려놓고 가까이 다가갔음. 정대만은...식은땀을 흘리면서 누워있었음. 전체적인 안색은 창백한데 뺨은 붉었음. 머리에 손바닥을 대보고 태섭이는 깜짝 놀랐음. 맞닿은 피부는 원래 열이 많은 태섭이의 손보다도 훨씬 뜨거웠음.
왔냐...?
태섭이의 손길에 정신을 차린 대만이의 입에서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음. 대만이는 몸을 일으키려 했음.
누워 있어요. 열이 장난 아니니까.
태섭이는 대만이를 다시 눕혔음.
코트만 입고 추운데 밖에 몇 시간씩 서 있으니까 감기에 걸리는 거 아니에요.
걱정되는 마음과는 달리 말이 뾰족하게 나갔음.
어쩔 수 없잖아, ....고 싶었으니까.
뭐라고요?
대만이의 마지막 말은 잘 들리지 않아서 태섭이는 되물었음.
멋있게...보이고 싶었다고.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대만이는 두 손을 들어서 얼굴을 감쌌음.
아 ㅡ 다 망했어...
태섭이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음.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음. 하지만 티내지 않는 데 성공했음.
잠깐 일어나서 어깨에 팔 좀 걸쳐봐요. 침대에 가서 눕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태섭이는 정대만을 부축해서 침실로 데려가 자기 침대에 눕혔음.
누워 있어요. 약먹기 전에 뭐라도 먹어야 할 테니까.
가지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만이는 다시 눈이 가물가물 감기기 시작했음. 아, 이렇게 앓으면서 날려 보낼 시간이 아닌데...그건 그렇고 정우성이랑 침대는 따로 쓰는구나...그 생각을 끝으로 정대만의 의식은 끊겼음.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이 얹히는 감각에 대만이는 다시 눈을 떴음.
아, 일어났어요? 앉을 수 있겠어요?
태섭이는 나가더니 작은 그릇과 물컵을 들고 왔음. 컵에는 물이, 김이 오르는 그릇에는 죽처럼 보이는 희끄무레한 뭔가가 담겨있었음.
맛없어도 조금이라도 먹어봐요. 약 먹으려면 조금이라도 먹어야 하니까...
대만이는 그냥 사라지고 싶었음. 태섭이한테 간병이나 시키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직접 만든 게 분명한 죽은 신기할 정도로 아무 맛도 안 났지만 뜨거운 뭔가를 넘기는 것 만으로도 훨씬 나아지는 기분이었음. 죽 한 그릇을 다 비우고 태섭이가 건넨 타이레놀까지 삼키고 나니까 기분 탓이겠지만 훨씬 가뿐해진 느낌이 들었음.
이제 다시 누워서 좀 쉬어요. 아까 자면서 땀을 많이 흘려서 갈아입을 옷 가져다 줄게요.
다시 나가려는 태섭이를 대만이가 붙잡았음. 지금이 아니면 이렇게 단둘이 얘기할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몰랐음. 그리고 태섭이 성격에 아픈 사람한테는 모진 말을 못 할 것 같았음.
기회를...주면 안 될까?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생각했던 멋진 말들은 다 날아가버리고, 막상 입에서 나온 건 단순하고 절박한 한 마디였음.
태섭이는 침대 옆 의자에 다시 앉았음.
...우리 일 년 동안 해 봤잖아요. 그때도 잘 안됐던 걸 장거리로 한다고 잘 될리가 없잖아요.
태섭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음.
형은...그냥 포기를 모르는 성격이라 그런 거에요. 그건...
태섭이는 말을 고르느라 잠시 말을 멈추었음. 그건 맞는 단어가 없어서라기보단 특정 단어를 피하고 싶어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음.
그건...사랑이 아니에요.
태섭이는 결국 포기하고 그 단어를 내뱉었음.
형은 저랑 손잡고, 키스하고...그 이상의 것들도 할 수 있어요?
대만이도 충분히 고민했던 것들이었음.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었음.
응. 할 수 있을 것 같아.
태섭이는 고개를 들었음. 태섭이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음.
형, 그런 건...할 수 있어서,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더 닿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그래서 하는 거에요.
대만이는 말문이 막혔음. 분명 자신의 기분은 '하고 싶다' 보다는 '할 수도 있을 것 같다'에 가까웠음.
여기까지 와 준 거 고마워요. 어제 그렇게 하긴 했지만 기뻤어요. 몸 좀 낫고 시간 좀 있으면 우리 학교 구경이나 하고 가면 좋을 텐데. 가는 비행기는 언제에요?
여지는 바늘구멍만큼도 보이지 않는 태섭이의 말에 대만이는 눈앞이 깜깜해졌음. 가는 비행기. 돌아간다...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 채. 지난 몇 개월간 대만이의 일상은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너무나 공허했음. 송태섭이라는 존재 하나 빼고는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었지만 그렇게 느껴졌음. 어차피 졸업 후엔 매일같이 보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웃기는 일이었음. 태섭이의 부재는 대만이의 안에서 점점 몸을 키웠음. 그 밖의 것들은 빠른 속도로 색을 잃었음. 농구를 할 때도 생각나고, 농구를 하지 않을 때도 생각났음. 오히려 농구를 할 때 태섭이의 부재가 더 선명하게 느껴져서 힘들었음. 부재가 선명해진다해서 기억까지 선명해지는 건 아니어서 그게 대만이를 미치게 했음. 시간이 지날수록 그애에 대해 많은 것들이 흐릿해졌음. 대만이는 깨달았음. 그나마 자신을 버티게 했던 건 돈을 모아 미국으로 태섭이를 만나러 갈 것이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평일에는 이자카야에서, 주말엔 이삿짐센터에서 미친듯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힘든지 몰랐음. 오히려 일할땐 공허함이 잠시 흐려져서 좋을 정도였음. 똑같은 이유로 태섭이도 먼 나라에서 미친듯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걸 알 리 없었지만 그랬음. 어쨌든, 대만이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음. 태섭의 부재가 흐려지기만을 기다리는 삶은 끔찍했음. 태섭이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아직 정확히 정의할 순 없었지만 이건 확실했음. 태섭이가 없는 자신의 삶은 너무나 불행했음.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주면 안 될까...
대만이는 고장난 로봇처럼 다시 똑같은 대사를 되풀이했음.
우리 이 얘기는 그만 해요. 옷 가져다 줄 테니까...
태섭이는 빈 그릇과 컵을 챙기며 이야기하다 대만이 쪽을 바라보았고 그대로 멈추었음. 대만이는 누운 채 울고 있었음.
네가 없으면...
대만이가 팔을 들어서 눈을 가렸음. 하지만 옆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베갯잇을 적시는 눈물방울까지는 가려지지 않았음.
네가 없으면...농구까지 싫어질 것 같단 말야...
대만이에게 농구가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아는 태섭이는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음. 태섭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음. 대만이가 아니라 본인이 한심해서 나오는 한숨이었음.
다시 친구부터 해봐요, 그럼.
대만이는 놀라서 팔을 치우고 태섭이를 바라보았음.
이제 전화, 안 끊을거야...?
울음기가 가시지 않아 멍청한 말투였지만 대만이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음.
못 받을 순 있지만 끊지는 않을게요.
태섭이는 조금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음.
아, 겨우 약 먹여놨더니 다시 열 오르게 생겼잖아요.
고마워...고마워...태섭아...
네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이제 제발 입 다물고 쉬어요.
어디 가지 마...나 잘때까지만이라도 옆에 있어줘...
이제 작정하고 어리광을 부리려는 듯한 대만이를 보며 태섭이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어. 내가 이 형을 어떻게 이기겠어.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태섭이는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음. 한때의 변덕일지도 모른다고 들뜨려는 본인을 타일렀음. 어떤 희망은 절망을 살찌우는 먹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태섭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음.
우성이가 혼자만의 피자파티를 벌이고 후식 아이스크림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까지 마시고 돌아온 시간은, 밤이라 부르기에도 어색하지 않은 아주 늦은 저녁이었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음. 설마. 우성이는 어제 밤처럼 조심스럽게 침실 안쪽을 엿보았음. 태섭이의 침대에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 정대만이 잠들어 있고, 침대 옆 간이의자에 앉은 태섭이가 상체만 침대쪽으로 엎어져 잠들어 있었음. 컨디션 안 좋아 보이더니 나 나가고 나서 앓아 누웠나. 가지가지 하는구만. 우성이는 생각했음. 우성이는 조심스럽게 태섭이를 일으켜 자신의 침대에 눕혔음. 그냥 확 내 침대에서 둘이 딱 붙어서 자버릴까. 그럼 내일 아침에 정대만 표정이 볼 만할 텐데.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우성이는 한숨을 쉬며 태섭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났음. 잠옷을 챙겨 소파가 있는 거실로 나가며 생각했음. 오늘도 푹 자기는 글렀네.
대만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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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들으러 갈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 앞에서 나이키 운동화 끈을 묶고 있던 우성이는 앉은 상태 그대로 고개를 돌려서 정대만을 바라보았음. 그리고는 말없이 일어서서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음.
야.
대만이가 다시 한 번 불렀음.
사람이 묻잖아. 태섭이랑 무슨 사이냐고.
방금 일어나서 머리 다 뻗친 상태로 목소리 깔아봤자 하나도 안 무섭거든. 우성이는 정대만을 향해 돌아서면서 생각했음.
글쎄요. 제가 그걸 말해드려야 할 의무가 있나요?
대만이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음. 안그래도 띵한 머리가 더 아파지는 것 같았음.
뭐, 굳이 말하자면...지금 형하고 태섭이보단 가까운 사이라고나 할까요?
우성이는 정대만을 똑바로 응시하며 손만 뻗어 현관문 옆에 걸려있는 열쇠를 빼냈음.
아, 그리고 드신 거 설거지는 바로 부탁드릴게요. 설거지거리 쌓아두는 거, 태섭이가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정우성은 산왕의 형들이 '잘생겼지만 재수없다'고 평했던 표정으로 정대만을 향해 미소짓고 문을 닫았음. 끝까지 힘주어 잡아주지 않으면 닫힐 때 복도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나는 현관문이었지만 일부러 잡지 않고 내버려두었음. 좀 유치했나. 하지만 이 정도라도 되돌려주지 않으면 우성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음. 우성이는 어제부터, 정확히는 어제 건물 앞에서 정대만에게 손목을 잡힌 송태섭의 표정을 봤을 때부터 이미 자신의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음. 자신도 모르는 곳에서 뭔가 시작도 되기 전에 끝나버린 느낌이었음. 이게 농구였다면 죽이되든 밥이되든 끝까지 해봤을 테지만 이건 농구가 아니었음. 태섭이는 오늘 오전 연습만 있을테니까 점심 때가 좀 지나서 집으로 돌아올 것 같았음. 우성이는 오후 수업이라 끝나면 저녁 때 쯤이었음. 하지만 우성이는 최대한 밖에서 나돌다가 들어갈 예정이었음. 어제 못 먹었던 피자나 먹으러 갈까. 다 먹고 나선 아이스크림도 먹어야겠어. 우성이는 생각했음.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태섭이는 현관문을 잡고 고민했음. 이 문 너머에는 정대만이 있었음. 어제는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얘기하자고 넘겼지만, 오늘은 어떻게 미룰 핑계가 없었음. 태섭이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음. 대만이는 여전히 소파에 누워있었음. 아직까지 잔다고? 시차적응이 덜 됐나...태섭이는 가방을 내려놓고 가까이 다가갔음. 정대만은...식은땀을 흘리면서 누워있었음. 전체적인 안색은 창백한데 뺨은 붉었음. 머리에 손바닥을 대보고 태섭이는 깜짝 놀랐음. 맞닿은 피부는 원래 열이 많은 태섭이의 손보다도 훨씬 뜨거웠음.
왔냐...?
태섭이의 손길에 정신을 차린 대만이의 입에서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음. 대만이는 몸을 일으키려 했음.
누워 있어요. 열이 장난 아니니까.
태섭이는 대만이를 다시 눕혔음.
코트만 입고 추운데 밖에 몇 시간씩 서 있으니까 감기에 걸리는 거 아니에요.
걱정되는 마음과는 달리 말이 뾰족하게 나갔음.
어쩔 수 없잖아, ....고 싶었으니까.
뭐라고요?
대만이의 마지막 말은 잘 들리지 않아서 태섭이는 되물었음.
멋있게...보이고 싶었다고.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대만이는 두 손을 들어서 얼굴을 감쌌음.
아 ㅡ 다 망했어...
태섭이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음.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음. 하지만 티내지 않는 데 성공했음.
잠깐 일어나서 어깨에 팔 좀 걸쳐봐요. 침대에 가서 눕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태섭이는 정대만을 부축해서 침실로 데려가 자기 침대에 눕혔음.
누워 있어요. 약먹기 전에 뭐라도 먹어야 할 테니까.
가지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만이는 다시 눈이 가물가물 감기기 시작했음. 아, 이렇게 앓으면서 날려 보낼 시간이 아닌데...그건 그렇고 정우성이랑 침대는 따로 쓰는구나...그 생각을 끝으로 정대만의 의식은 끊겼음.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이 얹히는 감각에 대만이는 다시 눈을 떴음.
아, 일어났어요? 앉을 수 있겠어요?
태섭이는 나가더니 작은 그릇과 물컵을 들고 왔음. 컵에는 물이, 김이 오르는 그릇에는 죽처럼 보이는 희끄무레한 뭔가가 담겨있었음.
맛없어도 조금이라도 먹어봐요. 약 먹으려면 조금이라도 먹어야 하니까...
대만이는 그냥 사라지고 싶었음. 태섭이한테 간병이나 시키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직접 만든 게 분명한 죽은 신기할 정도로 아무 맛도 안 났지만 뜨거운 뭔가를 넘기는 것 만으로도 훨씬 나아지는 기분이었음. 죽 한 그릇을 다 비우고 태섭이가 건넨 타이레놀까지 삼키고 나니까 기분 탓이겠지만 훨씬 가뿐해진 느낌이 들었음.
이제 다시 누워서 좀 쉬어요. 아까 자면서 땀을 많이 흘려서 갈아입을 옷 가져다 줄게요.
다시 나가려는 태섭이를 대만이가 붙잡았음. 지금이 아니면 이렇게 단둘이 얘기할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몰랐음. 그리고 태섭이 성격에 아픈 사람한테는 모진 말을 못 할 것 같았음.
기회를...주면 안 될까?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생각했던 멋진 말들은 다 날아가버리고, 막상 입에서 나온 건 단순하고 절박한 한 마디였음.
태섭이는 침대 옆 의자에 다시 앉았음.
...우리 일 년 동안 해 봤잖아요. 그때도 잘 안됐던 걸 장거리로 한다고 잘 될리가 없잖아요.
태섭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음.
형은...그냥 포기를 모르는 성격이라 그런 거에요. 그건...
태섭이는 말을 고르느라 잠시 말을 멈추었음. 그건 맞는 단어가 없어서라기보단 특정 단어를 피하고 싶어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음.
그건...사랑이 아니에요.
태섭이는 결국 포기하고 그 단어를 내뱉었음.
형은 저랑 손잡고, 키스하고...그 이상의 것들도 할 수 있어요?
대만이도 충분히 고민했던 것들이었음.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었음.
응. 할 수 있을 것 같아.
태섭이는 고개를 들었음. 태섭이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음.
형, 그런 건...할 수 있어서,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더 닿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그래서 하는 거에요.
대만이는 말문이 막혔음. 분명 자신의 기분은 '하고 싶다' 보다는 '할 수도 있을 것 같다'에 가까웠음.
여기까지 와 준 거 고마워요. 어제 그렇게 하긴 했지만 기뻤어요. 몸 좀 낫고 시간 좀 있으면 우리 학교 구경이나 하고 가면 좋을 텐데. 가는 비행기는 언제에요?
여지는 바늘구멍만큼도 보이지 않는 태섭이의 말에 대만이는 눈앞이 깜깜해졌음. 가는 비행기. 돌아간다...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 채. 지난 몇 개월간 대만이의 일상은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너무나 공허했음. 송태섭이라는 존재 하나 빼고는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었지만 그렇게 느껴졌음. 어차피 졸업 후엔 매일같이 보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웃기는 일이었음. 태섭이의 부재는 대만이의 안에서 점점 몸을 키웠음. 그 밖의 것들은 빠른 속도로 색을 잃었음. 농구를 할 때도 생각나고, 농구를 하지 않을 때도 생각났음. 오히려 농구를 할 때 태섭이의 부재가 더 선명하게 느껴져서 힘들었음. 부재가 선명해진다해서 기억까지 선명해지는 건 아니어서 그게 대만이를 미치게 했음. 시간이 지날수록 그애에 대해 많은 것들이 흐릿해졌음. 대만이는 깨달았음. 그나마 자신을 버티게 했던 건 돈을 모아 미국으로 태섭이를 만나러 갈 것이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평일에는 이자카야에서, 주말엔 이삿짐센터에서 미친듯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힘든지 몰랐음. 오히려 일할땐 공허함이 잠시 흐려져서 좋을 정도였음. 똑같은 이유로 태섭이도 먼 나라에서 미친듯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걸 알 리 없었지만 그랬음. 어쨌든, 대만이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음. 태섭의 부재가 흐려지기만을 기다리는 삶은 끔찍했음. 태섭이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아직 정확히 정의할 순 없었지만 이건 확실했음. 태섭이가 없는 자신의 삶은 너무나 불행했음.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주면 안 될까...
대만이는 고장난 로봇처럼 다시 똑같은 대사를 되풀이했음.
우리 이 얘기는 그만 해요. 옷 가져다 줄 테니까...
태섭이는 빈 그릇과 컵을 챙기며 이야기하다 대만이 쪽을 바라보았고 그대로 멈추었음. 대만이는 누운 채 울고 있었음.
네가 없으면...
대만이가 팔을 들어서 눈을 가렸음. 하지만 옆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베갯잇을 적시는 눈물방울까지는 가려지지 않았음.
네가 없으면...농구까지 싫어질 것 같단 말야...
대만이에게 농구가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아는 태섭이는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음. 태섭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음. 대만이가 아니라 본인이 한심해서 나오는 한숨이었음.
다시 친구부터 해봐요, 그럼.
대만이는 놀라서 팔을 치우고 태섭이를 바라보았음.
이제 전화, 안 끊을거야...?
울음기가 가시지 않아 멍청한 말투였지만 대만이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음.
못 받을 순 있지만 끊지는 않을게요.
태섭이는 조금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음.
아, 겨우 약 먹여놨더니 다시 열 오르게 생겼잖아요.
고마워...고마워...태섭아...
네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이제 제발 입 다물고 쉬어요.
어디 가지 마...나 잘때까지만이라도 옆에 있어줘...
이제 작정하고 어리광을 부리려는 듯한 대만이를 보며 태섭이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어. 내가 이 형을 어떻게 이기겠어.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태섭이는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음. 한때의 변덕일지도 모른다고 들뜨려는 본인을 타일렀음. 어떤 희망은 절망을 살찌우는 먹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태섭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음.
우성이가 혼자만의 피자파티를 벌이고 후식 아이스크림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까지 마시고 돌아온 시간은, 밤이라 부르기에도 어색하지 않은 아주 늦은 저녁이었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음. 설마. 우성이는 어제 밤처럼 조심스럽게 침실 안쪽을 엿보았음. 태섭이의 침대에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 정대만이 잠들어 있고, 침대 옆 간이의자에 앉은 태섭이가 상체만 침대쪽으로 엎어져 잠들어 있었음. 컨디션 안 좋아 보이더니 나 나가고 나서 앓아 누웠나. 가지가지 하는구만. 우성이는 생각했음. 우성이는 조심스럽게 태섭이를 일으켜 자신의 침대에 눕혔음. 그냥 확 내 침대에서 둘이 딱 붙어서 자버릴까. 그럼 내일 아침에 정대만 표정이 볼 만할 텐데.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우성이는 한숨을 쉬며 태섭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났음. 잠옷을 챙겨 소파가 있는 거실로 나가며 생각했음. 오늘도 푹 자기는 글렀네.
대만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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