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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6 08:21
*ㅅㅈ 주의, 주화입마된 사파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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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편.
환영육화술을 쓰는 동안의 감각은 꿈을 꿀 때의 그것과 비슷했다. 환체를 통해 경험하는 것도 눈으로 보는 일은 선명한데 그 외의 감각이 희미하여 완전히 적응하기 전까지는 몽롱하기 마련이었다. 원거리로 환영을 보낼수록 감각이 흐렸기에 대개 환영육화술은 누군가의 앞에 나타나 말 몇마디를 하거나 염탐하는 목적으로 쓰였다. 그럼에도 현야가 환체를 인간에게 '맞아서 상처가 날' 정도로 생생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환영육화술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요력을 쏟아 부을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현야의 요력이 아무리 강해도 환체로부터 오는 감각은 실제의 반도 안되어 몸을 제 맘대로 가누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온전한 것은 시각 뿐이라 현야는 열심으로 제 어미를 쳐다보는 갓태어난 새끼 짐승처럼 눈으로 계속 이연화를 좇았다.
이연화는 모한이 보통 사람과 달리 어딘가가 어색하다는 것을 금새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맞은 몸이 아파서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마치 걸음이 처음인 아이처럼 몸 가누기를 어려워하는 듯 했다.
"혹시 몸이 불편하여 발 딛기가 어렵습니까?"
이연화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휘청이는 모한의 팔을 붙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한은 힘이 풀린 듯 다시 주저 앉았다. 실상은 모한의 팔로 이연화의 감촉을 전해 받고 집중력이 흐트러진 현야가 균형을 잃은 것이었으나, 이연화는 잡배에게 걷어차인 곳이 아픈가보다 할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서요."
모한이 힘겹게 답했다. 이연화가 손을 내밀자 모한은 침을 삼키고는 이연화의 팔에 의지해 일어섰다. 현야가 별것 아닌 이 동작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이연화는 알지 못했다. 그저 남자가 자기보다 한 뼘이나 크고 저를 상반신으로 다 가릴만큼 근골이 훌륭한데 잡배에 당하는 것이 이상하다고만 여길 뿐이었다. 모한이 비틀대자 이연화는 본능적으로 그의 등에 팔을 둘러 부축했다. 흐릿한 감각이었지만 이연화와 닿은 팔과 등에 온기와 밀착된 압박감이 현야의 몸에 퍼졌다. 현야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수천 년의 요력을 쌓은 천마왕에게 육화한 환영을 다루는 일이 그리 어려울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현야는 도무지가 여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인간 세상에 보내놓은 제 분신이 이상이를 지척에 두고 그의 손길을 받을 때마다 평정심을 잃었다. 현야는 심법으로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신세를 졌으니 대접을 하고 싶습니다."
모한이 정중하게 청했다.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이연화는 잠시 망설였지만 창백한 얼굴로 비척대는 이를 두고가기가 뭣해 남은 반 시진을 모한에게 쓰기로 했다.
"모공자, 저는 일이 있어 오래 있지 못하니 차 한 잔으로 족합니다."
"차라도 대접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한이 손을 모아 들어 인사를 했다. 이연화는 답배를 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객잔에 들어간 모한은 주인에게 은자를 내밀며 가장 좋은 방을 요구했다. 과한 금액에 놀란 주인장은 며칠 묵을테니 알아서 대접하라는 말에 연신 굽신대며 모한과 이연화를 윗 층의 특실로 안내했다.
이연화는 모한이 하는대로 따라가면서 남자를 관찰했다. 풍채는 당당하나 몸이 불편하고, 악력이 별로 없다시피 해도 손의 모양이 고운 일만 한 손은 아니었다. 종업원을 대하는 것을 보아 아랫사람을 부리는 일에 익숙해 보였다. 눈에 띄는 미남자에 두건 안으로 언뜻 보이는 백발 또한 특이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았다. 강호에 이런 자가 있었나? 이연화는 사내가 제법 괴이쩍다고 생각했다.
객실 창가에는 바깥을 보며 차를 즐길 수 있도록 다기가 구비된 너른 탁자와 비단 방석이 있었다. 이연화는 모한이 부자연스럽게 몸을 지탱해가며 자리에 앉는 모습을 주시하며 맞은 편에 앉았다. 모한이 망토를 벗자 회백색의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백모증일지도 몰랐다. 머리색마저 희니 얼굴이 더 창백해보였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입니다. 이럴게 아니라 휴식을 취하는게 어떠신지요?"
이연화의 제안에 모한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이연화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진귀한 보물을 감상하기라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연화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모공자, 혹시 저를 아십니까?"
세상 천지에 제 것을 모르는 사내가 있겠느냐.
"아주 잘 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바라 보았습니다."
모한이 조용히 웃었다. 이연화는 예상 밖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모한은 아까보다 여유를 찾았는지 표정을 한결 부드럽게 풀었다. 그리고는 소매를 살짝 걷어 팔목을 내밀었다.
"의원이신데다 병색도 바로 알아보시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모한이 팔을 내민 채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진맥을 청하는 것이 의외인데다 다소 당돌하기까지 하여 이연화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는 소매자락을 살짝 올려 오른손을 길게 빼었다. 그리고 모한의 팔목에 검지와 중지를 얹었다.
모한의 맥을 짚을 때 한순간 그가 떠는 듯이 보였다. 왜 이러나 살필 짬도 없이 이연화는 손에 갑작스레 휘어감기는 뜨끔한 감각에 헉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모한에게서 짧은 순간 전해져온 저릿한 기운이 순식간에 이연화의 등줄기에서 두 갈래로 갈려 각각 상단전과 하단전으로 흘러 들었다. 몸 안에서 칼을 긋는듯한 뜨거운 느낌이 몰아쳐 이연화는 탁자 모서리를 부여잡고 괴롭게 눈을 감았다. 탁자를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그 고통을 짐작케 했다. 이연화의 요력이 제 편을 만나 기세등등해진 병사들마냥 아우성을 쳐댔다. 들끓는 느낌이 가라앉지 않아 이연화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사물을 보러 애썼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빛이 돌았다. 이연화는 가까스로 팔을 들어 스스로 혈을 짚었다. 막혔던 숨이 터지며 붉었던 눈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당신도 반인반요군요."
모한이 차분하게 말했다. 이연화는 숨을 몰아쉬며 모한을 쳐다보았다. 모한은 잡배에게 맞았을 때의 유약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먹잇감을 내려다보는 맹수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이연화를 눈으로 훑어내렸다.
"요력을 담은 몸만이 요력을 감지할 수 있지요. 아까 의원님이 부축해 줄 때 알았습니다. 당신도 나와 같다는 것을요. 벽차지독에 당해 요력을 주입 당하지 않았습니까?"
이연화는 간신히 몸을 바로 세웠다. 자신이 어떻게 반인반요의 몸이 되었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천마왕에 꽂았던 소사검을 뽑아 제 몸에 찔러 넣고 진을 연 이후는 기억이 없었다. 어렴풋이 색과 향 등의 잔상은 남았으나 어느 것 하나 명징하지 않았고, 그 이후의 기억은 중원 숲 어딘가에서 찬 새벽 이슬을 맞고 깨어나면서 본 산새의 날갯짓에서 시작되었다.
모한은 반인반요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 혹시 이 자가 잊어버린 기억을 기워 붙이고 지난 70년을 해명할 열쇠를 쥐고 있을까? 이연화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모한을 바라보았다.
"아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모공자는 방금 나와 같다 하였습니까?"
동질감과 의구심이 저울 위에서 널뛰는 것을 느끼며 이연화가 물었다. 모한이 엷게 웃었고 현야는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본디 술법을 수련하는 자로 중원에서 요마와 싸우는 중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만나보지 못한 강한 요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거기가 제 죽을 자리인 줄로 알았지요. 헌데 요마가 초죽음이 된 저에게 독약을 먹이더니 요력을 넣었습니다. 요마 세계에서는-"
모한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제 말을 듣고 있는 이연화의 눈을 반듯하게 들여다보며 단어 하나하나를 씹어 물려주고 삼키게 하겠다는 듯이, 말을 끌어 올려 뱉었다.
"요마 세계에서는, 인간처럼 상대를 위해 내력을 주는 일이 없습니다. 요력은 빼앗거나 넣는 것입니다. 요력을 넣는 것은 소유의 표식입니다."
"소유?"
이연화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지막 교전 때 천마왕의 눈에 흐른 정욕에 패를 건 기억이 떠올랐다. 천마왕은 분명히 자신을 두고 '가지겠다'고 했다. 제 몸에 흐르는 요력이 천마왕의 것인가 싶었지만 증거는 없었다. 지난 칠십여년 간 이연화는 천마왕과 아무 관련없이 살아왔다. 머리 속에 궁금증이 수가지 일었지만 이연화는 말을 아꼈다. 무엇이 진실인지, 모한을 신뢰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받아들이기 어렵겠지요.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오십시오. 저는 나흘간 머무르겠습니다."
모한이 다시 순한 눈빛을 하고 말했다. 이연화는 도망치듯 목례를 하고 일어섰다. 자신이 반인반요임을 알아본 사내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기조차도 잊으려 애썼지만 강산이 변해도 그대로인 스스로에 무감해지려 애쓴 세월이 길었다. 갑작스레 찌르고 들어오는 진실에 이연화는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선생."
모한이 이연화를 불러 세웠다.
"제가 필요할겁니다."
이연화는 반쯤 몸을 돌려 다시 고개로 인사를 한 후 돌아서 방을 나섰다. 등으로 시선이 따라 붙어 편치가 않았다.
현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잇새에서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꿈에서 깨어난 이처럼 나른해진 현야는 한 손을 들어 이상이가 닿은 팔목을 쓸었다. 팔목을 따라 흐른 손가락이 얇고 긴 흉터에 닿았다. 가늘게 튀어나온 선을 만지는 현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70년 전, 죽어가는 이상이를 살리기 위해 요력의 8할을 소모한 현야는 천마곡의 한 동굴에서 보름간 깊은 잠에 빠졌다. 요력을 회복하고 나온 현야는 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실소를 지었다. 동굴 앞에는 갈갈이 찢기고 터져나간 요마의 시체 몇 조각이 뒹굴고 있었다. 현야가 잠든 틈을 타 죽이러 온 다른 요마들이었다. 그것도 칠곡산의 5대 요마가 셋이나 섞여 있었다. 거미줄에 걸려 죽은 파리 새끼들마냥 요마들은 현야의 진에 걸려 몸이 터져 죽었다.
"제 주제를 이리도 모르다니."
현야는 경멸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널린 고깃덩이들 사이를 지나갔다. 손가락을 튕기자 시체 조각에 푸른 불꽃이 일었다. 다른 요마들이 먹어치워 요력을 취하지 못하도록 태우기 위해서였다. 일렁이는 푸른 불을 뒤로 하고 현야가 날아올랐다. 죽은 요마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현야의 머리 속은 이상이로 가득 차있었다.
천마곡의 물이 흐르는 계곡 사이 야트막하게 경사가 진 곳에 작은 통나무집이 있었다. 인간은 요마와 달리 추위에 약해 서늘한 계곡에서 삼칠일을 나려면 벽과 창이 있는 집이 필요했다. 요마들이 엉성하게 세워 비뚜룸한 집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현야가 나타나자 순식간에 주변에서 다른 요기가 사라졌다. 현야의 요기를 감당하지 못하는 하급 요마들이 급히 도망친 탓이었다. 현야는 요력으로 문을 열어제꼈다. 따스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화롯불이 잘 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하들이 이상이를 제법 잘 보살핀 것 같았다. 현야는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이상이의 곁으로 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늦지 않았군."
현야는 이상이의 옆에 앉았다. 이상이의 몸뚱이가 그간 시달려온 고열로 뜨거웠으나 의식이 없어 겉보기에는 시체처럼 미동 하나 없었다. 본래의 내력과 요력이 맹렬히 충돌하고 있을 터였다.벽차지독마저 혈을 타고 올라와 검붉은 흔적을 여기저기 새기고 있었다. 현야는 이상이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만 날뛰어. 내 것을 괴롭히지 마라."
주인에 감응한 요력이 이상이의 몸에서 잠잠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이의 얼굴에 점차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현야는 이상이의 가슴팍에 댄 손을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이상이의 탄탄한 상체가 만져졌다. 심장이 고동치는 맥동이 현야의 손바닥을 두드렸다.
"괴로웠느냐."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아니, 현야 자신도 들은 적이 없었을 음성이 튀어나왔다. 아픔, 통증은 패배의 증거 혹은 살육의 결과였다. 현야는 결코 남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고통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신 적은 있을지 몰라도 다른 존재의 고통을 없애고 싶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이상이의 얼굴에서 그늘을 지워내고 싶었다. 현야는 조용히 이상이의 얼굴을 손등으로 쓸었다. 그리고는 들창 사이로 보이는 보름달을 쳐다보았다.만월의 밤, 요마가 깨어날 터였다.
현야는 수천년 전 자신이 보름달이 뜬 날 어떻게 요마가 되었는지를 기억해냈다. 이전의 기억은 없다시피 했으나 다른 요마의 피를 마신 기억은 생생했다. 선대 두목이었던 귀왕의 심장을 쥐고 피를 마시며 각성한 그날 이후로 현야는 칠곡산의 모든 요마를 지배했다. 상급 요마라면 누구나 다른 요마의 피를 취하고 나서야 온전히 각성하여 독립된 개체로 살아갈 수 있었다. 반인반요도 다르지 않아 다른 요마의 피를 마셔야 요력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어떤 피를 마시느냐에 따라 회복되는 정도와 요력의 질이 달라졌다. 그리고 현야는 이상이가 잡스러운 것들의 피를 취하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달이 차오르자 이상이의 눈이 거짓말처럼 와짝 떠졌디. 그 눈동자가 피처럼 붉었다. 당장 깨어난 요마는 피를 갈구하는 본능에 눈이 멀기 마련이었다.
이상이 역시 타는 듯한 갈증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헐레벌떡 일어나 넘어질 듯 비틀대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속도가 인간의 것이 아니게 빨랐다. 기척을 숨기고 벽에 붙어 서있던 현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둠 속에 붉은 안광이 들짐승의 눈빛처럼 빛났다. 이상이는 다른 기척을 느끼려 두리번거렸으나 산 생명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밝은 달을 올려다본 이상이는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는 누구지-
피를 원해- 마셔야해-
너 뭐야, 피 따위 원하지 않아!
목이 말라-
누구의 것인지 모를 소리가 머리 속을 헤집고 있었다. 두통이 극심해 똑바로 서기가 힘들었다. 이상이는 비척대다가 주저 앉았다. 겨우 뜬 눈으로 주위를 보니 작은 연못이 보였다. 휘영청 밝은 달이 연못에 비추어 주변 수풀을 수면 위에 그려내고 있었다. 이상이는 네 발로 기는 짐승처럼 몸을 낮추어 연못으로 기어갔다. 물을 마시기 위해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이상이는 붉은 빛을 형형하게 내며 잔상마저 길게 꼬리를 빼어 선을 그리는 제 눈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눈을 크게 뜨자 붉은 안광이 더욱 번득였다.
"으,으으..."
차마 비명이 되지 못한 채 괴이하게 새어나온 신음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와중에 비명을 참는 것이 이상이 자신이자 자신이 아닌 요마의 본능임을 알았다. 다른 요마를 부르지 않기 위한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이상이는 괴롭게 몸을 웅크려 머리를 감싸 바닥에 찧어대기 시작했다.
어째서-?
뜨겁고 날카로운 통증이 잘근대며 몸안을 휘저었다. 이상이의 내력이 이질적인 것과 싸우기 시작했다. 다시 발작이 시작되었다. 앞선 보름간 내내 겪었던 격통이었다. 머리가 떠올리는 기억은 희미해도 몸이 기억해 온 근육이 공포로 잔뜩 수축되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나타난 검은 장포 자락이 이상이를 휘감았다. 현야는 이상이의 등이 제 가슴에 닿도록 상체를 굽혀 그를 품어 안았다. 그러자 이상이의 요력이 얌전히 가라앉으며 가여우리만치 떨리던 몸이 안정을 되찾았다. 천마왕은 제 품안에서 떠는 몸을 부드럽게 안았다. 처음 해보는 행위였으나 이 또한 본능에 이끌리듯 자연스러웠다.
잠시 뒤 현야는 왼팔을 손톱으로 그어 상처를 냈다. 갈라진 틈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피냄새를 맡은 이상이의 몸이 들썩였다. 현야는 다른 팔로 이상이를 단단히 품에 가두고는 그의 얼굴 앞에 피가 흐르는 팔을 갖다 대었다. 이상이가 거부하려는 듯 몸을 빼려 했지만 현야에게 갇힌 채였다. 요마의 본능은 피를 탐할 것이었으나 이상이는 놀라우리만치 인간성을 유지하려 애썼다.
"착하지."
새끼를 얼르는 어미처럼, 현야가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이상이가 천천히 현야의 팔을 잡았다. 혀를 대어 맛을 보자 걷잡을 수 없어진 이상이는 그대로 팔을 꽉 움켜쥐고 피를 빨아 마시기 시작했다.
현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벌린 입에서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우릿한 통증은 쾌감이 되어 온몸에 퍼졌다. 이상이가 잡아 먹을 듯 피를 마실수록 현야의 소리가 커졌다. 이상이를 잡은 손이 참지 못하고 옷을 갈라 맨살을 찾았다. 부드러운 어깨와 가슴을 탐하듯 어루만지는 손에는 그 어떤 여유도 없었다. 이상이의 숙인 뒷덜미가 달빛에 희게 빛났다. 현야는 이상이의 뒷덜미에 얼굴을 묻고, 혀를 대고, 이를 세웠다. 달큰한 향에 미칠 것만 같았다.
현야는 저답지 않게 구는 스스로를 보며 자신이 처음으로 지배 당하는 자의 입장에 놓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감각도, 본능도 이상이로 인해 좌우되고 있었다. 이상이가 현야의 일부를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어떤 면에서 이상이는 현야에게 있어 절대적인 강자였다. 강자에의 복종, 이는 요마의 본능에 각인된 규칙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 현야를 짓눌렀다.
피를 다 마신 이상이가 몽롱한 상태로 입을 떼었다. 현야는 이상이의 턱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아무 저항없이 딸려온 얼굴을 보이게 들자 입가에 온통 현야의 피로 칠갑이 되어 있었다. 내 것이 먹을만 하더냐, 현야가 낮게 웃으며 그대로 입술을 내려 이상이의 입술에 맞대었다. 혀가 피묻은 입술을 살며시 갈라 들어갔다. 이상이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더니 곧 눈을 감으며 뒤로 넘어갔다.
현야는 그대로 이상이를 안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깊은 잠에 빠지는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침상에 이상이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현야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을 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현야는 느리게 바닥으로 고개를 내려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올라왔다. 복종의 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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