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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4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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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방다병이 새벽같이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침상 위에 끌어안고 누워있는 두 사람을 보더니 무거운 보따리를 쾅 하고 내려놓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바람에 깬 이연화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방소보, 아침은 먹었어?”
“아니.”
“있어봐. 볶음밥 데워줄게. 소 낭자가 열심히 만들었다고.”
하품을 하며 장작에 불부터 붙이는 이연화를 보고 방다병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적비성은 한숨도 안 잔 사람처럼 멀끔한 눈으로 방다병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방다병은 왠지 불쾌해서 고개를 팩 돌렸다.
이날은 아침부터 연화루가 분주했다. 배를 채운 방다병이 자랑스레 본인의 ‘무림 고수의 서화 모음’을 늘어놓더니 어느새 시켜둔 건지 소소용이 가져온 전단지에서 사고문 다과회 소식을 듣고 달려나갔다. 그러더니 교완만이 찾아와 사과하는 통에 이연화는 사고문 다과회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고 방다병이 10년 전 일을 알아내겠다며 적비성에게 듣지도 않을 이혼증 약을 달여 먹이려다가 실패하는 등 하루 종일 소란이었다.
그날 저녁 방다병은 거나하게 취했다.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없도록 하자며 내미는 술을 이연화는 차마 받아줄 수 없어서 자리를 피했다. 적비성은 이연화가 건넨 술잔을 눈썹 한번 치켜들고는 받아줬다. 방다병은 이연화를 쫓지 않았다. 그저 홀로 남은 술자리에서 남은 술을 모조리 마셨을 뿐이다.
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밤공기는 제법 선선했다. 앉은 자리에 엎어져 버린 방다병이 이슬을 맞게 하기에는 양심이 허락지 않은지라 이연화는 축 늘어진 몸을 부축하여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막 청년기에 접어든 몸은 크고 무겁고 뜨끈했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하는 사람을 부축하기란 참 성가신 일이다. 그런데 은혜를 모르는 술주정뱅이는 이연화와 함께 침상에 엎어져 일어나기를 거부했다.
“방소보, 네 자리로 가야지.”
이연화가 짐짓 타일렀지만, 방다병은 꿍얼거리며 알 수 없는 몸짓만 해댔다. 마치 칭얼거리는 어린아이이 같아서 이연화는 피식 웃고는 방다병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남들이 제 사부를 욕한다고 이렇게까지 상심한 모습을 보자니 복잡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기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사고문을 떠난 지 10년.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그 옛날 어린아이에게 무심코 던졌던 말이 방다병을 이렇게 키워냈다는 것이 얼떨떨하기도 했다. 키우지도 않은 제자라니. 제가 버린 과거로 인해 상심하는 타인이라니. 이 무슨 행운일까.
방다병이 어리광을 부리듯 목덜미에 이마를 묻고 비벼댔다.
“얼어 죽을 이연화… 나 버리고 가지 마.”
이연화는 방다병이 깬 줄 알고 내려다봤다. 그러나 방다병은 잔뜩 술에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중얼중얼 잠꼬대하고 있었다. 마침 적비성이 자려고 들어왔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이연화는 그가 방다병을 침상에서 치우려고 발로 걷어차기라도 할까 봐 긴장했지만 의외로 적비성은 아무런 딴지도 걸지 않고 침상 밑의 이부자리에 누웠다.
이연화는 적비성의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어젯밤에는 손장난을 쳐놓고 오늘 밤은 생판 남인 척 굴다니. 기억 상실이 시간별로 일어나는 것일까? 낮에는 교완만을 납치해 주겠다는 소리나 하고. 물론 자기 신분에 대한 정보를 달라는 조건이었지만. 그러다 문득 적비성의 말이 생각났다. 방다병이든 소소용이든 상관 안 한다던 말. …대마두의 연애관은 어디까지 열린 것일까. 이연화는 생각을 멈췄다. 상상하다 보면 어디까지고 멀리 가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방다병의 숨이 고르게 바뀌자, 이연화는 방다병을 옆으로 누이고 이불을 함께 덮었다. 도련님을 돌보는 것은 참으로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
여택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방다병의 마음속은 해결되지 않는 일들로 어지럽기만 했다. 그중에 가장 큰 고민은 이연화가 이상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지만 마음을 꽉 막히게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그 응어리는 여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목욕 시중을 받고 나온 이연화에게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알고 보니 그 냄새는 여택에서 손님맞이로 쓰는 목욕물에 풀어놓은 은은한 난향이었다. 이연화는 의복을 갈아입고 가지런히 빗은 머리끝이 촉촉하게 젖은 채로 서있었다. 여종에게 목욕시중을 받고서.
그래 그게 문제였다. 이 사람은 왜 이리 차분한 것이지? 당연히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 경험도 많겠지만 설마 여자의 시중을 받는 일마저 익숙할 줄은 몰랐다. 음란한 일은 전혀 즐기지 않는 정인군자의 얼굴을 하고서는. 방다병은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배신감을 느끼는지 알지 못한 채 그날 저녁은 분위기에 취했다. 방다병은 어려서는 병치레하느라 누워만 지냈고, 자라서는 무예를 익히느라 바빴기에 밖으로 놀러 다니지 않았다. 학문을 배울 때는 몸이 약한 그를 배려해 아버지가 스승을 집으로 모셨기 때문에 글벗도 깊이 사귀지 못했다. 방다병에게는 같이 못된 짓을 할만한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만산홍의 분위기는 불편했다. 여자의 시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방다병에게 그날의 분위기는 난잡하고 외설스러웠다. 내심 이연화를 흘끔거리던 방다병은 그가 아무런 걱정 없이 연회를 즐기며 서비 낭자의 시중을 받는 것을 보고 마음이 비뚤어졌다. 그래서 청아 낭자, 아니 소령 공주가 따라주는 술을 연거푸 받았었다.
방다병은 내심 이 일을 이연화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여택에서는 내내 그럴 기회가 없었고 지금은 그럴만한 시기가 지나버려 따져 묻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응어리가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커지는 것이다.
방다병은 일단 연화루로 돌아와 이연화에게 이상이가 아닌지 따져 물었다. 그러나 역시 이연화는 부정했다. 방다병은 이연화를 믿고 싶었기에 믿었다.
연화루의 네 명은 황천부 주인의 단서를 찾기 시작했지만,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소소용이 할아버지에게 물어보겠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연화루엔 오랜만에 남자 셋이 남았다. 늘 재잘거리던 소녀 한 명이 없어진 것뿐인데 연화루가 고요했다. 방다병은 약간 심심해질 지경이었다. 1층에 앉아서 챙겨왔던 무림 고수의 서화를 뒤적거렸지만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방다병은 이연화를 찾아 나섰다.
연화루는 산 밑에 대놨는데 산길을 조금 올라가면 조그마한 계곡이 있었다. 산길을 오르며 생각 없이 두리번거리던 방다병의 눈에 하얀 등짝이 보였다. 이연화였다. 방다병은 저도 모르게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그저 씻는 것뿐인데 왠지 봐선 안 될 것 같았다.
이연화는 어깨 위로 물을 끼얹더니 자맥질을 하며 잠깐 놀다가 머리를 끝까지 푹 담그고 빼냈다. 그는 얼굴에 흘러내린 물을 손으로 훔쳐냈다. 이제는 이연화의 하얀 가슴이 보였다. 적비성이 말하던 가슴의 흉터도 보였다. 골방에 틀어박혀 글공부나 하는 서생처럼 밝은 피부 위로 맺힌 물방울들이 햇볕을 받아 희게 빛났다. 이연화는 조금 말랐지만, 근골이 의외로 단단해 보였다. 굽힌 팔꿈치 아래로 잡힌 근육이 도드라졌고 배에는 군살이 없었다. 가슴엔 연한 색의 유륜이 자리 잡고 쇄골은 모양 좋게 긴 목과 연결되어 있었다. 입술에는 아직도 물기가 뚝뚝 떨어져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고 두 눈은 한심하다는 듯이 저를 쳐다보는… 응?
“방소보. 거기서 뭐 해?”
“앗, 아니 난. 그게….”
“...훔쳐본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나, 나는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다고.”
방다병이 펄쩍 뛰었다. 그러더니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두 눈은 초점을 잃고 방황하고 얼굴은 빨개졌다. 이연화는 갑자기 몸을 가리고 싶었다.
“씻을 거야?”
“응?”
“씻을 거면 너도 빨리 벗고 들어와. 곧 해 떨어져.”
이연화는 어릴 적 길에서 생활하며 강에서 씻는 것이 익숙했다. 너무 어릴 때라 목욕이 아니라 멱을 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었다. 사부를 모신 뒤에도 선고도와 함께 씻었기 때문에 여럿이서 씻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그러나 방다병은 달랐다. 귀하게 자란 호부상서의 아들이니 늘 욕간에서 홀로 씻었지, 타인과 목욕은 해본 적이 없었다. 단체생활이란 그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였다. 그런데도 이연화가 같이 씻자고 하니 겸연쩍으면서도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까짓것, 이 몸도 남자답게 같이 목욕할 수 있어.
방 도련님은 쭈뼛거리며 속옷만 남기고 옷을 벗고는 물에 들어갔다. 가을이라 물이 아주 찼다. 방다병은 머리끝까지 푹 담그고 올라오며 어깨를 떨었다.
“물이 왜 이렇게 차.”
“시원하고 좋잖아. 곧 더 추워지면 일일이 물을 데워서 씻어야 하니 지금 호사를 누리라고.”
“아… 그러네. 이젠 목욕물까지 떠와야겠구나.”
이연화와의 생활이 즐거우면서도 이런 점은 고생스럽기는 했다. 길에서 생활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니 한가지라도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삼시세끼 밥도 지어야 하고 물도 길어야 하고 말도 먹여야 한다. 이연화가 연화루를 끌고 다닌 지 얼마나 되었는진 몰라도 조금씩 보수하기도 해야 했다. 물론 적비성과 자신이 부셔 먹은 것도 한몫했지만.
“방소보. 힘들면 돌아가면 돼.”
“아니, 누가 돌아간대? 너와 강호를 누벼야지. 하나도 힘들지 않아.”
“미래의 부마께서 이렇게 험하게 살면 되겠어? 너의 소령 공주가…”
“악!”
방다병은 소리를 지르며 이연화의 입을 막고 경고했다.
“나는 혼인 안 할 거야. 부마 소리 좀 하지 마.”
방다병은 진지한데 입이 막힌 이연화의 눈엔 웃음기가 서렸다. 그 눈빛이 마치 떼쓰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 해서 방다병은 볼멘소리를 했다.
“안 할 거면 고개를 끄덕여. 안 그러면 안 놔줄 거야.”
이연화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이연화는 방다병에게 약속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늙은 여우처럼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할 뿐. 약이 오른 방다병은 입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이연화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번에는 대답을 잘 듣고 싶었다.
“부마 소리 안 할 거지?”
방다병은 이연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연화가 대답할 때 그것이 진실인지 확실히 알고 싶었다. 이연화의 눈은 맑고 깊었다. 문득 서로가 너무 가깝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연화의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혀 방다병의 모습을 거꾸로 그려내고 있었다.
산에서 바람이 내려와 물 위로 파문을 일으키고 두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물은 차가운데 식어가는 피부 위로 상대방의 열기가 느껴졌다. 이연화는 끝까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방다병은 충동적으로 생각했다. 안 놔줄 거야.
입술이 닿았다. 조급한 숨이 이연화의 뺨을 간질였다. 방다병은 서툴게 입술을 찍고 쪼고 지근거리에서 멈췄다. 청년의 풋풋한 내음이 이연화를 졸랐다. 이연화는 따뜻한 숨을 마시면서 점잖게 타일렀다.
“방소보. 이런 건 상대가 좋다고 하면 해야지.”
“싫으면. …싫으면 고개를 저으면 되잖아.”
이연화는 방다병에게서 조금 떨어져 코를 긁었다.
“그런 건 눈치껏 하는 거야. 뭐… 난 이제 추워서 나가야겠다.”
방다병은 이연화를 놔주었다. 속옷을 입지 않은 이연화의 동그란 엉덩이가 물속에서 솟아오르더니 매끈한 다리가 계곡을 걸어 나갔다. 이연화가 옷을 입으려고 돌아서자, 방다병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방소보. 감기 걸리지 않게 적당히 씻고 와. 저녁 준비 해놓을게.”
이연화는 그렇게 가버렸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고서. 방다병은 차가운 물 속에서 한참동안 자신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계곡에서 나갈 수 있었다.
연화루 이연화 방다병 적비성
다음 날 아침. 방다병이 새벽같이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침상 위에 끌어안고 누워있는 두 사람을 보더니 무거운 보따리를 쾅 하고 내려놓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바람에 깬 이연화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방소보, 아침은 먹었어?”
“아니.”
“있어봐. 볶음밥 데워줄게. 소 낭자가 열심히 만들었다고.”
하품을 하며 장작에 불부터 붙이는 이연화를 보고 방다병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적비성은 한숨도 안 잔 사람처럼 멀끔한 눈으로 방다병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방다병은 왠지 불쾌해서 고개를 팩 돌렸다.
이날은 아침부터 연화루가 분주했다. 배를 채운 방다병이 자랑스레 본인의 ‘무림 고수의 서화 모음’을 늘어놓더니 어느새 시켜둔 건지 소소용이 가져온 전단지에서 사고문 다과회 소식을 듣고 달려나갔다. 그러더니 교완만이 찾아와 사과하는 통에 이연화는 사고문 다과회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고 방다병이 10년 전 일을 알아내겠다며 적비성에게 듣지도 않을 이혼증 약을 달여 먹이려다가 실패하는 등 하루 종일 소란이었다.
그날 저녁 방다병은 거나하게 취했다.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없도록 하자며 내미는 술을 이연화는 차마 받아줄 수 없어서 자리를 피했다. 적비성은 이연화가 건넨 술잔을 눈썹 한번 치켜들고는 받아줬다. 방다병은 이연화를 쫓지 않았다. 그저 홀로 남은 술자리에서 남은 술을 모조리 마셨을 뿐이다.
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밤공기는 제법 선선했다. 앉은 자리에 엎어져 버린 방다병이 이슬을 맞게 하기에는 양심이 허락지 않은지라 이연화는 축 늘어진 몸을 부축하여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막 청년기에 접어든 몸은 크고 무겁고 뜨끈했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하는 사람을 부축하기란 참 성가신 일이다. 그런데 은혜를 모르는 술주정뱅이는 이연화와 함께 침상에 엎어져 일어나기를 거부했다.
“방소보, 네 자리로 가야지.”
이연화가 짐짓 타일렀지만, 방다병은 꿍얼거리며 알 수 없는 몸짓만 해댔다. 마치 칭얼거리는 어린아이이 같아서 이연화는 피식 웃고는 방다병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남들이 제 사부를 욕한다고 이렇게까지 상심한 모습을 보자니 복잡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기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사고문을 떠난 지 10년.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그 옛날 어린아이에게 무심코 던졌던 말이 방다병을 이렇게 키워냈다는 것이 얼떨떨하기도 했다. 키우지도 않은 제자라니. 제가 버린 과거로 인해 상심하는 타인이라니. 이 무슨 행운일까.
방다병이 어리광을 부리듯 목덜미에 이마를 묻고 비벼댔다.
“얼어 죽을 이연화… 나 버리고 가지 마.”
이연화는 방다병이 깬 줄 알고 내려다봤다. 그러나 방다병은 잔뜩 술에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중얼중얼 잠꼬대하고 있었다. 마침 적비성이 자려고 들어왔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이연화는 그가 방다병을 침상에서 치우려고 발로 걷어차기라도 할까 봐 긴장했지만 의외로 적비성은 아무런 딴지도 걸지 않고 침상 밑의 이부자리에 누웠다.
이연화는 적비성의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어젯밤에는 손장난을 쳐놓고 오늘 밤은 생판 남인 척 굴다니. 기억 상실이 시간별로 일어나는 것일까? 낮에는 교완만을 납치해 주겠다는 소리나 하고. 물론 자기 신분에 대한 정보를 달라는 조건이었지만. 그러다 문득 적비성의 말이 생각났다. 방다병이든 소소용이든 상관 안 한다던 말. …대마두의 연애관은 어디까지 열린 것일까. 이연화는 생각을 멈췄다. 상상하다 보면 어디까지고 멀리 가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방다병의 숨이 고르게 바뀌자, 이연화는 방다병을 옆으로 누이고 이불을 함께 덮었다. 도련님을 돌보는 것은 참으로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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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택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방다병의 마음속은 해결되지 않는 일들로 어지럽기만 했다. 그중에 가장 큰 고민은 이연화가 이상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지만 마음을 꽉 막히게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그 응어리는 여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목욕 시중을 받고 나온 이연화에게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알고 보니 그 냄새는 여택에서 손님맞이로 쓰는 목욕물에 풀어놓은 은은한 난향이었다. 이연화는 의복을 갈아입고 가지런히 빗은 머리끝이 촉촉하게 젖은 채로 서있었다. 여종에게 목욕시중을 받고서.
그래 그게 문제였다. 이 사람은 왜 이리 차분한 것이지? 당연히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 경험도 많겠지만 설마 여자의 시중을 받는 일마저 익숙할 줄은 몰랐다. 음란한 일은 전혀 즐기지 않는 정인군자의 얼굴을 하고서는. 방다병은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배신감을 느끼는지 알지 못한 채 그날 저녁은 분위기에 취했다. 방다병은 어려서는 병치레하느라 누워만 지냈고, 자라서는 무예를 익히느라 바빴기에 밖으로 놀러 다니지 않았다. 학문을 배울 때는 몸이 약한 그를 배려해 아버지가 스승을 집으로 모셨기 때문에 글벗도 깊이 사귀지 못했다. 방다병에게는 같이 못된 짓을 할만한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만산홍의 분위기는 불편했다. 여자의 시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방다병에게 그날의 분위기는 난잡하고 외설스러웠다. 내심 이연화를 흘끔거리던 방다병은 그가 아무런 걱정 없이 연회를 즐기며 서비 낭자의 시중을 받는 것을 보고 마음이 비뚤어졌다. 그래서 청아 낭자, 아니 소령 공주가 따라주는 술을 연거푸 받았었다.
방다병은 내심 이 일을 이연화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여택에서는 내내 그럴 기회가 없었고 지금은 그럴만한 시기가 지나버려 따져 묻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응어리가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커지는 것이다.
방다병은 일단 연화루로 돌아와 이연화에게 이상이가 아닌지 따져 물었다. 그러나 역시 이연화는 부정했다. 방다병은 이연화를 믿고 싶었기에 믿었다.
연화루의 네 명은 황천부 주인의 단서를 찾기 시작했지만,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소소용이 할아버지에게 물어보겠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연화루엔 오랜만에 남자 셋이 남았다. 늘 재잘거리던 소녀 한 명이 없어진 것뿐인데 연화루가 고요했다. 방다병은 약간 심심해질 지경이었다. 1층에 앉아서 챙겨왔던 무림 고수의 서화를 뒤적거렸지만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방다병은 이연화를 찾아 나섰다.
연화루는 산 밑에 대놨는데 산길을 조금 올라가면 조그마한 계곡이 있었다. 산길을 오르며 생각 없이 두리번거리던 방다병의 눈에 하얀 등짝이 보였다. 이연화였다. 방다병은 저도 모르게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그저 씻는 것뿐인데 왠지 봐선 안 될 것 같았다.
이연화는 어깨 위로 물을 끼얹더니 자맥질을 하며 잠깐 놀다가 머리를 끝까지 푹 담그고 빼냈다. 그는 얼굴에 흘러내린 물을 손으로 훔쳐냈다. 이제는 이연화의 하얀 가슴이 보였다. 적비성이 말하던 가슴의 흉터도 보였다. 골방에 틀어박혀 글공부나 하는 서생처럼 밝은 피부 위로 맺힌 물방울들이 햇볕을 받아 희게 빛났다. 이연화는 조금 말랐지만, 근골이 의외로 단단해 보였다. 굽힌 팔꿈치 아래로 잡힌 근육이 도드라졌고 배에는 군살이 없었다. 가슴엔 연한 색의 유륜이 자리 잡고 쇄골은 모양 좋게 긴 목과 연결되어 있었다. 입술에는 아직도 물기가 뚝뚝 떨어져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고 두 눈은 한심하다는 듯이 저를 쳐다보는… 응?
“방소보. 거기서 뭐 해?”
“앗, 아니 난. 그게….”
“...훔쳐본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나, 나는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다고.”
방다병이 펄쩍 뛰었다. 그러더니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두 눈은 초점을 잃고 방황하고 얼굴은 빨개졌다. 이연화는 갑자기 몸을 가리고 싶었다.
“씻을 거야?”
“응?”
“씻을 거면 너도 빨리 벗고 들어와. 곧 해 떨어져.”
이연화는 어릴 적 길에서 생활하며 강에서 씻는 것이 익숙했다. 너무 어릴 때라 목욕이 아니라 멱을 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었다. 사부를 모신 뒤에도 선고도와 함께 씻었기 때문에 여럿이서 씻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그러나 방다병은 달랐다. 귀하게 자란 호부상서의 아들이니 늘 욕간에서 홀로 씻었지, 타인과 목욕은 해본 적이 없었다. 단체생활이란 그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였다. 그런데도 이연화가 같이 씻자고 하니 겸연쩍으면서도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까짓것, 이 몸도 남자답게 같이 목욕할 수 있어.
방 도련님은 쭈뼛거리며 속옷만 남기고 옷을 벗고는 물에 들어갔다. 가을이라 물이 아주 찼다. 방다병은 머리끝까지 푹 담그고 올라오며 어깨를 떨었다.
“물이 왜 이렇게 차.”
“시원하고 좋잖아. 곧 더 추워지면 일일이 물을 데워서 씻어야 하니 지금 호사를 누리라고.”
“아… 그러네. 이젠 목욕물까지 떠와야겠구나.”
이연화와의 생활이 즐거우면서도 이런 점은 고생스럽기는 했다. 길에서 생활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니 한가지라도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삼시세끼 밥도 지어야 하고 물도 길어야 하고 말도 먹여야 한다. 이연화가 연화루를 끌고 다닌 지 얼마나 되었는진 몰라도 조금씩 보수하기도 해야 했다. 물론 적비성과 자신이 부셔 먹은 것도 한몫했지만.
“방소보. 힘들면 돌아가면 돼.”
“아니, 누가 돌아간대? 너와 강호를 누벼야지. 하나도 힘들지 않아.”
“미래의 부마께서 이렇게 험하게 살면 되겠어? 너의 소령 공주가…”
“악!”
방다병은 소리를 지르며 이연화의 입을 막고 경고했다.
“나는 혼인 안 할 거야. 부마 소리 좀 하지 마.”
방다병은 진지한데 입이 막힌 이연화의 눈엔 웃음기가 서렸다. 그 눈빛이 마치 떼쓰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 해서 방다병은 볼멘소리를 했다.
“안 할 거면 고개를 끄덕여. 안 그러면 안 놔줄 거야.”
이연화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이연화는 방다병에게 약속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늙은 여우처럼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할 뿐. 약이 오른 방다병은 입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이연화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번에는 대답을 잘 듣고 싶었다.
“부마 소리 안 할 거지?”
방다병은 이연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연화가 대답할 때 그것이 진실인지 확실히 알고 싶었다. 이연화의 눈은 맑고 깊었다. 문득 서로가 너무 가깝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연화의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혀 방다병의 모습을 거꾸로 그려내고 있었다.
산에서 바람이 내려와 물 위로 파문을 일으키고 두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물은 차가운데 식어가는 피부 위로 상대방의 열기가 느껴졌다. 이연화는 끝까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방다병은 충동적으로 생각했다. 안 놔줄 거야.
입술이 닿았다. 조급한 숨이 이연화의 뺨을 간질였다. 방다병은 서툴게 입술을 찍고 쪼고 지근거리에서 멈췄다. 청년의 풋풋한 내음이 이연화를 졸랐다. 이연화는 따뜻한 숨을 마시면서 점잖게 타일렀다.
“방소보. 이런 건 상대가 좋다고 하면 해야지.”
“싫으면. …싫으면 고개를 저으면 되잖아.”
이연화는 방다병에게서 조금 떨어져 코를 긁었다.
“그런 건 눈치껏 하는 거야. 뭐… 난 이제 추워서 나가야겠다.”
방다병은 이연화를 놔주었다. 속옷을 입지 않은 이연화의 동그란 엉덩이가 물속에서 솟아오르더니 매끈한 다리가 계곡을 걸어 나갔다. 이연화가 옷을 입으려고 돌아서자, 방다병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방소보. 감기 걸리지 않게 적당히 씻고 와. 저녁 준비 해놓을게.”
이연화는 그렇게 가버렸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고서. 방다병은 차가운 물 속에서 한참동안 자신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계곡에서 나갈 수 있었다.
연화루 이연화 방다병 적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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