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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6 21:53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로부터 사고문의 이상이가 금원맹의 적비성과 혼인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면 어떨까?



"...말도 안 돼."



그럼 분명 상이는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알지도 못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지 말라고 얘길 꺼낸 사람을 어디 모자란 사람 취급했을거야.



그런데 그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나머지 당사자라면?



".....진짜? 진짜로 내가 너랑...?"
"햇수로는 벌써 삼 년이 되어간다."



이상이는 황당한 말을 하고 있는 적비성이 사실 한 점 거짓없는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거란 확신이 들어 정말로 심란했어. 적어도 이상이가 파악하고 있던 적비성이라면 직접 거짓말을 하기보다 무력으로 남을 굴복시켜 까만 것을 하얗다고 말하도록 하는 인간이었으니 말이지. 물론... 이상이가 인생에서 결혼을 아예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건 아니었어. 막연하긴 했지만 세상이 평화롭게 안정되면 축복 속에 가정을 꾸리고 안온한 행복을 만끽하며 근심없이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했던 적도 있었어. 다만, 언제나 상이의 곁에 있을 거라고 믿었던 사람은 적비성과는 너무나 다른 한 사람이었기에...



"....내가 마음에 품었던 정인은 네가 아니었을텐데?"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이상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다소 무신경하게 말을 내뱉어버리고 말았지. 적비성의 표정이 조금 서늘하게 굳어버리는 걸 보고나서야 아, 이게 뭔가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한 발 늦게 후회 했지만 아무리 이상이라도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순 없었어. 아니, 저와 삼 년쯤이나 같이 살았다면서 말 한 마디에 이렇게 쉽게 무서운 얼굴이 되는게 말이 되냐고? 이상이는 제가 아쉽지만 않았어도 냉기가 풀풀 떨어지는 적비성을 두고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땐 맞았잖아!' 얄밉게 한 마디를 더 얹어줬을 거라고 생각했어.



"교완만을 말하는 거라면, 그래. 한 때 그녀와 네가 그런 사이였긴 했지."
"...으응. 그랬구만. 아쉽지만 아마 인연이 아니었던..."
"하지만 결국 네 스스로 결혼을 허락한 유일한 상대는 나고."



이상이는 단호하게 결혼 사실을 못박는 적비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억나지 않는 자신이 어떤 업보를 쌓아왔던걸까 스스로를 타박했어. 어쩌면 적비성이 꾸민 계책에 당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납득가지 않는 일은 곧 죽어도 하지 않는 제 고집스러운 성격 역시 잘 알아 아무래도 적비성의 말처럼 그들의 결혼에는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었을 게 확실했어. 적비성은 꿍하니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다가 시선을 피한 채 머리를 굴리고 있는 이상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어. 이상이는 오만하기라면 제게 지지 않을 적비성도 뜻밖에 한숨을 쉴 줄 아는지 그 때 처음 알았어.



"근처를 지날때면 아직도 교완만이 네게 들려 종종 사탕을 가져다 준다."
"...아."
"교완만과 넌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지만, 네가 그 사탕을 물고 활짝 웃으면 솔직히 좀 짜증날 때도 있어. 알아? 그런데 그럴때면... 넌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적비성은 살짝 벌어진 이상이의 도톰한 아랫입술에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말을 맺지 않고 그대로 입을 꾹 다물어버렸어. "...적맹주, 무슨 말을 하다가 말아?" 이상이가 궁금함에 슬쩍 미끼를 던지는데도 적비성은 금같은 침묵을 선택하며 고작 이런 일에도 쉽게 증발해버린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재차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어. 하마터면 별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전부 늘어놓을 뻔 했지. 지금의 저 녀석에겐 언제나 교완만의 사탕보다 사탕을 물고 닿아오는 반려의 입술 쪽이 더 달았었다는 사실까지 구구절절 말해줄 필요는 없을테니까.



"그런데 너는 무슨 생각으로 나랑 덜컥 결혼한거야? 이 산속에 틀어박혀 살아도 괜찮아? 금원맹은 어쩌고?"



적비성이 조용히 눈을 뜨자 입술을 꾹 물고 있던 이상이가 아까보다 한결 조심스러운 태도로 적비성에게 물어왔어. 그렇지 않으면 적비성이 또 필요한 얘기를 해주지 않고 도중에 입을 다물거라고 생각했는지 일부러 꽤 예의바른 표정을 짓는 게, 꼭 녀석이 기르는 개랑 하는 짓도 귀엽고 흡사해 적비성의 마음이 허무하게 누그러들었어.



적비성은 이연화에게 구혼하던 시절을 떠올려 보았어. 극독과 병, 사람에 망가지고 상처입은 녀석을 고치고 달래 마음을 얻기까지 어느 과정 하나 쉬운 게 없었어. 그의 속은 끝없이 가라앉아가는 진흙뻘과 같아 처음엔 많은 것을 시도조차 할 수 없었어. 그러나 조금씩 뿌리를 심고 잔잔하게 물을 채워 비로소 평안해진 네 안에 다시 생의 집착이 움트게 될 때까지, 적비성은 적지 않은 시간을 연화의 곁에서 인내하고 살폈을거야. 적비성은 청혼을 하는 저를 두고 웃음이 터졌던 이연화를 평생 잊지 못할거라고 생각했어. 살짝 수줍게 웃던 미소에 기다렸던 꽃이 피는 것 같이 기쁘고 설렜어. 이연화는 답을 기다리는동안 건장한 석상이 되어버린 적비성에게 뜻밖의 숙제 하나를 내주었어.



"네가 자기랑 결혼하고 싶으면 맹을 해산하고 오라길래, 해산했다."
"뭐어???금원맹을???"
"지금은 금원맹으로부터 파생된 조직조차 남아있지 않아. 명령을 어기면 내가 전부 찾아내 죽여버릴 거라고 해서."
"아니... 그게... 어떻게... 그렇게...???"



이상이는 적비성의 간결한 답변이 기대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어. 적비성은 이상이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 건네주고 자신도 홀짝였어. 사파제일의 조직을 없애고 오면 결혼해준다는 놈이랑, 없애란다고 진짜 없애고 나타난 놈 둘 중에 누가 더 정신나간 놈일지 이미 일어난 일의 단편을 전해듣기만 했는데도 어질어질해졌어.



문득 이상이에게 그 옛날 사부님과 사모님이 사이가 좋으시다가도 체통없이 다투실 때 모르는 척 주워들었었던 말 하나가 생각났어.



'결혼은 끼리끼리 하는 거라고 했소! 그러니 당신도 조금쯤은 나와 비슷, 아얏! 아악!! 내가 실언했소! 악! 잘못! 잘못했소!!'



사부님.. 부족한 제자는 그 말씀의 뜻을 이제야 조금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이상이는 졸지에 강호의 평화를 이뤄내버린 자신의 원대한 업적에 마음이 답답해졌어.



"......그렇지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마치 없었던 일처럼."



적비성이 하나같이 엄청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는데도 머릿속에 속시원히 떠오는 게 없어 더 그랬어. 상대에 대한 감정의 깊이마저 적비성은 그저 특별한 느낌없이 금원맹주 적비성으로 느껴질 뿐이라 도움이 되지 않았지. 아무리 그래도 혼인은 좀 더 내밀하고 개인적인 목적과 기대를 동반하기 마련 아니겠어? 눈 떠보니 애정보다는 복수심에 칼끝을 겨누려던 인간과 함께 살고 있다는데 이상이는 하고많은 상대중에 왜 하필 이 녀석과 결혼하게 된 것인지 이유라도 좀 알고 싶었어.



"괜찮아.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조급해 할 필요 없어."



적비성이 무뚝뚝하지만 제법 다정하게 상이를 위로했어. 뾰족한 방법이 없는 지금으로선 가장 최선의 방안이 맞긴 했어. 초조해하는 이상이와 느긋한 적비성이 보기 드문 대조를 이루었어.



"아, 하지만 네가 알아둬야 할 것이 있긴 있군."



가만히 이상이를 지켜보던 적비성이 뭔가 할 말이 더 남았는지 입을 열었어.



"우린 혼인하던 날부터 무슨일이 있어도 서로 반드시 지켜왔던 약속이 있다."
"...그게 뭔데?"



적비성은 기억을 잃은 상이가 이제껏 본 어떤 모습보다 비장하고 진지한 태도로 이상이를 긴장시켰어.



"난 네가 만든 음식은 그게 뭐든지간에 함께 식사를 하고 다 먹어주기로 했다."







이상이는 적비성의 눈치를 보며 들이키던 찻물을 그대로 뿜어버리고 말았어. 예의도 뭣도 없는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적비성이 한 이야기가 진짜..너무..너무도 충격적인 소리라서...



"내..내가.. 요리를 해?"



다시 말하지만, 이상이의 인생에서 결혼은 언젠가 할 수도 있겠다고 약간의 가능성을 염두해두던 일이었어. 비록 상대가 엄청나게 꼬여 버린 게 충격적이었지만 결혼 자체는 그럴 수 있겠다 싶었어.



하지만 요리는..?



단언컨대, 이상이는 사람은 썰어도 식재료를 썰어볼거라곤 상상조차 해 본적이 없었어. 무공은 노력하면 반드시 성장하고 갈고 닦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고 실제로 상이는 본인의 명성으로 그것을 증명해내고 있었지. 그러나 요리라는 건 안타깝게도 보기보다 섬세한 혀를 가지고 태어난 이상이에게 무공과 가장 대척되는 지점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능력이었어. 이걸 거꾸로 바꿔 말하면 '요리를 척척 해낼 것 같은 이상이'란 '검이 무거워서 들지 못하는 이상이'와 비슷하게 말이 안되는 소리로 느껴진다는 거야. 상이의 팔에 소름이 돋고 있었어.



"참고로 지키지 않으면 당장 이혼해버릴 거라고 해서 한 번도 어긴 적 없어."



...그랬구나. 아주 미쳤었구나, 이상이. 다 잡아놓은 대마두에게 직접 제조한 독을 먹이는 걸로도 모자라 먹지 않으면 세상에 다시 풀어놓을거라고 뻔뻔하고 앞뒤도 안맞는 멍청한 협박을 했었다니. 상이는 남은 생에 곱게 죽지 못해도 조용히 입 다물고 살아야겠다고 한 가지는 확실하게 다짐했지.



"그리고 넌 아무리 혼자있고 싶고, 내가 보기 싫어도 내 옆에서 함께 잠들어야 해."



역시나 기이하기 짝이 없는 뜻밖의 요구를 터트리며 적비성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어. 이상이는 적비성과 한 침상 위에 누운 자신을 무심코 그려보다가 이번엔 등줄기까지 타고 올라오는 소름을 느끼며 머릿속을 황급히 빡빡빡 지워버렸을거야.



"....내가 싫다고 거부하면?"
"네가 거부하는 걸 멈출때까지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을 보란듯이 붙잡고 고문하고 계속 죽여버릴거다."
"...아니, 내 쪽은 이혼인데 넌 사람이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난데없이 살벌한 적비성의 협박에 이상이는 할 말을 잃었어. 게다가 좀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지. 상이는 한시라도 빨리 기억을 되찾아 이 말도 안되는 약조가 나오게 된 배경을 뭐라도 간절히 이해하고 싶어졌어.

그렇게 아직은 알 길 없는 대마두와의 결혼생활이 덩그러니 상이 앞에 펼쳐지게 되었어.


연화루 비성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