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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5 23:56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다병은 죽고 싶었다.
살면서 이만큼 죽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앞뒤가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찰나의 선명한 그림이라면 뚝뚝 끊기듯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아래에 누웠던 이연화, 당혹으로 상기된 얼굴, 흰 목덜미에 취한 것처럼 입술을 묻던 순간, 약간의 열기와 난처함을 품은 채 방다병을 부르던 낮은 목소리...방다병이 내적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뛰어난 의술로 난데없는 희락기는 다스려졌고, 이제 약간의 두통 말고는 별달리 남은 증상도 없었으나, 어젯밤의 기억과 관하몽의 설명은 방다병을 정신적 절벽으로 사정없이 몰아갔다.
이연화 얼굴을 어떻게 보지? 이상이의 형질이 바뀌자마자 넋을 빼고 달려든 사람들을 저열한 짐승처럼 보았는데, 내가 그놈들과 별다를 것도 없이 행동해 버렸잖아! 어머니한테도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느냐고 호언장담했는데! 방다병이 침대 위에서 뭍 위의 생선처럼 퍼덕였다. 시뻘게진 얼굴이 좀처럼 원래 빛깔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젯밤의 자신이 눈앞에 있다면, 술 대신 당장 약이나 먹으라며 머리를 후려치고 싶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방다병은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홱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를 덮었다. 매우 원초적인 방어기제였다. 하지만 얼굴을 가렸다 하여 상대의 목소리를 막을 재간은 없었다.
"일어났어? 몸은 좀 어때?"
방다병은 이불 안에 숨어 나오고 싶지 않았다. 사실 영영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군자의 자세가 아니었기에, 방다병은 결국 이불 안에서 꾸물꾸물 모습을 나타내 앉았다. 차마 상대와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앞으로 다가와 요리조리 방다병을 살피던 이연화가 말했다. 참 태연한 투였다.
"음, 이제 괜찮아 보이네. 열이 아직 안 내린 것 같긴 하지만. 다행이야."
방다병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대가 어쩌면 이렇게 멀쩡할 수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연화가 허리를 낮춰 방다병과 시선을 맞추려 들었다. 그 오른손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뭐야, 왜 그래. 계속 어디 안 좋아? 관 협의 부를까? 방다병? 방소보?"
"이연화, 미안해. 면목이 없어...."
방다병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작게 사과했다. 살짝 커진 눈으로 방다병을 보던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됐어, 나도 희락기가 어떤지 잘 알아. 내가 이상이였던 시절에도 그것 때문에 진짜 부끄러웠던 적 있었다니까. 살다 보면 다들 한 번씩 겪는 일이지. 내가 얼마나 많은 양인들하고 부대꼈는데 그런 것도 이해를 못 하겠어? 관 협의가 나한테 상비약을 하나 더 줬으니, 다음에 같은 일이 생겨도 괜찮을 거야. 신경 쓰지 말라고, 방 대협."
이연화가 사촌동생을 달래주는 큰형처럼 이야기하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방다병은 그리 나아지지 않은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방다병의 얼굴을 살피던 이연화는, 이내 손등으로 그 어깨를 탁 때렸다. 방다병이 퍼뜩 상대를 보았다. 이연화는 청년이 퍽 유난을 떤다고 타박하듯이 말했다.
"네가 뭘 했다고 이렇게 죽상이야? 별일 없었어, 그냥 날 못 알아보고 술 취한 사람처럼 엉겨붙은 것뿐이야."
방다병은 순간 치민 의혹에 입을 살짝 열었지만,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내가 정말 이연화를 못 알아보고 엉겨붙은 걸까? 그렇다기엔 상대의 모습과 목소리, 체취가 불로 새긴 것처럼 선명히 남아 있었다. 만일, 만일 정말로 내가 이연화라서 엉겨붙은 거라면 어쩌지? 방다병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관하몽도 말했다. 양인들은 종종 자신에게 중요한 음인을 빼앗기거나, 그 음인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희락기를 맞기도 한다고. 그 말을 들은 당시의 방다병은 그야말로 새파랗게 질렸다.
"반드시 각인했거나, 성애적인 마음을 품은 대상일 때만 생기는 일은 아닙니다."
관하몽은 마치 위로하려는 듯 그렇게 덧붙였지만, 방다병은 그 어조에 깔린 사실을 읽었다. 그럼 보통은 각인했거나, 성애적인 마음을 품은 대상일 때 벌어지는 일이라는 거잖아! 방다병의 눈이 울상에 가깝게 변했다. 이름뿐이지만 자신의 스승이자, 전 사고문주이자, 처음 사귄 강호 친구이자 전우인 사람에게 내가 그런, 그런...방다병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신이 천하의 얕은 쓰레기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마음을 전혀 알 길 없이, 이연화는 참 속도 편한 태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또 과민반응한다. 방다병, 잘 들어. 이 스승은 네가 난데없는 희락기 때문에 내게 달려든 일로 크게 상심하지 않으니, 너도 빨리 털어버려."
"이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야? 적비성이 중간에 막지 않았으면, 난...난...."
"나한테 맞고 기절했겠지. 뭐가 문제야? 걱정 마, 방 도련님. 나랑 사고를 치는 바람에 네 창창한 앞날이 막히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파들파들 떠는 방다병을 향해, 이연화가 차를 마시며 놀리듯 말했다. 방다병은 두 가지 말을 동시에 떠올렸지만, 둘 중 어느 것도 꺼내지 못했다. 너 정말 나를 때릴 수 있었겠어? 기억 속의 너는 날 바로 제압하지 못한 채 엄청 당황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너랑 사고를 치는 게 왜 창창한 앞날이 막히는 일이야? 그건 별로 나쁜 일이-방다병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몸에 묻은 물을 푸르르 터는 불여우 같은 동작이었다. 자꾸만 생각이 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이연화가 코웃음을 치고는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관 협의가 알려줬어, 지금 상황이 이래서 네가 과히 곤두섰을 수도 있다고. 미안하다면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이제 내일이면 다 마무리될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말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해."
방다병이 푹 한숨을 쉬었다. 맞는 말이었지만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었다. 설령 그렇더라도 어떻게든 진정된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이연화의 말대로, 그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방다병은 불만스러운 소년처럼 꿍얼거렸다.
"낯짝 두꺼운 늙은 여우."
"이 녀석, 무례하긴. 희락기일 때는 봐줘도, 맨정신일 때는 안 봐줘."
이연화가 짐짓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방다병은 간신히 웃음 비슷한 것을 흘렸지만, 그 귀는 줄곧 터질 것처럼 빨개져 있었다.
그 후로, 천기산장의 소당주는 아주 작은 나사가 하나 빠진 기계 인형처럼 생활했다.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위화감이었지만, 방다병 본인은 반쯤 죽을 맛이었다. 잠깐이라도 손이나 머리가 한가해지면 어김없이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심지어 그 그림은 생각할수록 더욱 선명해졌고, 사실과 상상이 묘하게 뒤섞여 풍부해졌다. 자신을 함부로 때리지도 못하고 쩔쩔매던 몸이나, 목덜미를 살짝 물자 이끌리듯이 흐르던 체취나, 빈틈없이 닿았던 하체의 감촉이나, 흐트러진 머리칼과 침의 같은 것들이 자꾸만 불쑥불쑥 튀어나와 방다병을 벌겋게 물들이고는 사라졌다.
"청렴이라."
이연화의 중얼거림을 들었을 때, 방다병은 제발 저린 도둑처럼 화들짝 돌아보았다. 지금 자신의 마음은 청렴과 영 거리가 멀었다.
"뭐?"
"종 공자가 그렇게 썼네. 어울리긴 하는데."
이연화가 종려명의 답안을 한편으로 밀어두었다. 그는 '가장 귀한 덕'이라는 질문에 대해 후보들이 제출한 답안을 확인하고 있었다. 헛기침을 한 방다병이 아비의 답안을 펴보았다. 신(信). 어쩐지 적비성답다고 생각하며, 방다병은 이연화를 향해 턱짓했다.
"네가 적은 답안은 뭐였어?"
"나? 아무것도 안 적었는데."
이연화가 다음 후보의 답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방다병의 눈이 커졌다.
"그냥 빈 종이를 넣어둔 거야?"
"맞아. 중요한 건 누가 그 통을 훔쳐보러 오는가였어. 절박함이 적을 판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순 없지만, 유용한 기준이기는 하지."
이연화가 흥얼거리듯 말했다. 방다병이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어젯밤 너는 나랑 그러고...있었는데. 방다병을 힐끔 본 이연화가 픽 웃었다. "내가 밤새 지켜볼 필요는 없었어. 지통에 물과 닿으면 검게 변하는 약을 묻혀놨거든. 소세를 끝낸 손에 검은 자국이 있다면, 어제 그 통을 훔쳐본 거야." 아아. 방다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이연화, 최종 후보는 전에 얘기했던 그 아홉으로 할 생각이야?"
"음. 다른 후보들을 다시 훑어봤지만, 그 아홉이 가장 적절하겠어. 혹시 오늘 손에 검은 자국이 남은 후보가 또 보인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자, 그럼 마지막 후보를 선발하러 가 보자고. 이 짓도 얼마 안 남았네."
이연화가 빙글거리며 일어섰다. 못된 잔꾀를 부리는 여우 같은 얼굴이었다. 그 얄미운 모양새를 평소처럼 구박하지도 못하고, 방다병은 이연화와 함께 후보들이 모인 자리를 찾았다.
최종 후보의 이름이 호명되자, 뽑힌 사람들은 매우 상기되고 기쁜 표정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오직 아비만이 가면 아래에서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어, 사람들은 대체 저자가 얼마나 기발한 답을 내놓았기에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의심하는 말을 수군거렸다. 방다병은 이 무신경한 첩자에 속으로 약간 신경질이 났으나, 다른 한편으로 적비성이 연기한답시고 정말 기쁜 표정을 지었다면 그것도 퍽 소름끼쳤으리라 생각했다. 뽑히지 못한 사람들에게 아쉬움과 고마움을 표하고, 이연화는 아홉의 후보를 향해 말했다.
"내일 있을 과제가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고심이나 준비가 필요한 일이 아니니, 부디 편히 쉬시고 내일 안내에 따라 모여 주시지요."
후보들이 마지막 과제에 대해 궁금해하며 돌아서는 사이, 방다병은 재빠른 눈으로 사람들의 손을 훑었다. 손바닥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자세를 취한 이는 없었기에, 청년은 반대로 손을 부자연스럽게 마주 쥐거나 보여주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밝혀내려 했다.
아홉의 사람들 중, 방다병의 눈에 두 사람이 띄었다. 쭉 사이가 좋지 않던 서호천과 구소양이었다. 방다병이 놀라 눈을 깜박였다. 설마, 앙숙처럼 보이던 저 두 공자가 뱀과 여우일까? 이연화를 힐끗 보자, 그는 서호천과 구소양이 아닌 다른 지점을 응시하던 참이었다. 그 눈에 이채가 돌면서, 입가로 순간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쳤다.
"이연화, 왜 그래?"
방다병이 흩어지는 후보들의 뒷모습을 보며 소곤거렸다. "음, 아니야. 조금 의외다 싶어서." 이연화는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의아했지만, 방다병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이연화와 나란히 걸었다. 마지막 단계를 준비하자면 할 일이 많았다. 그날 밤이 깊도록, 방다병은 한동안 머릿속 생각에 시달리지 않았다. 후보들에 대한 자료를 다시 확인하고, 마지막 계획의 세부사항과 안전장치를 조정하다 보니 어느새 밤을 꼴딱 새울 지경이 된 탓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말도 안 되는 그림에 사로잡히느니 차라리 일에 사로잡히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방다병은, 책상에 엎드려 잠깐 선잠에 빠졌을 때 꿈에서 이연화를 보았다.
심지어 이번 꿈의 이연화는 잠깐 당혹하다가, 양팔을 내밀어 방다병을 방다병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무안하게 쩔쩔매면서도, 방다병은 그 손길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연꽃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툭하면 얄미운 거짓말을 늘어놓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채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다병. 그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방다병이 정신없이 그 뺨과 목에 입술을 댔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피부가 뜨거웠다. 이연화의 가슴팍을 더듬던 손이 옷깃 안으로 미끄러졌다. 그 손바닥은 명치와 배를 지나-.
방다병은 눈을 떴다. 꿈을 꾸던 중임에도, 얼굴로 피가 몰려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방다병이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배어나온 땀에 이마가 서늘했다. 방다병. 그 낮게 잠긴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청년은 벌게진 얼굴로 얼굴을 훔치다가, 자신의 하반신을 내려다보고는, 다시금 죽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미쳤나 봐. 희락기는 약으로 눌러 놓았는데! "방다병, 방다병. 정신 차려!" 방다병이 탁상에 이마를 쿵쿵 박으며 외쳤다. 하지만 바람대로 정신이 확 맑아지지 않아, 불쌍한 청년은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깊은 새벽이라, 백천원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몇 번이나 깊은 심호흡을 하고, 방다병은 검을 꺼내 휘두르기 시작했다. 잡념을 없애려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제일이었다.
"방다병, 뭐 해?"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방다병은 잠재우려던 잡념에 재차 사로잡혀 발을 삐끗했다. 검을 내리고 돌아보자, 그곳에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이연화가 있었다. "이 새벽까지 안 자고. 넌 일을 그렇게 했는데 졸리지도 않아? 어려서 그런가." 이연화가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검을 넣은 방다병이 괜히 발끈하며 받았다.
"어린 게 아니라 젊은 거라고 하는 거야. 그러는 너는? 이 밤에 어딜 가?"
"음, 관 협의를 잠깐 보고 오는 길이야."
"관하몽은 왜? 어디 아파?"
방다병의 얼굴이 삽시간에 걱정으로 물들었다. 상대의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묻자, 이연화가 에이 소리와 함께 손을 내저었다. "아냐, 그냥 선물을 하나 받았어. 유연신침의 선물이니 분명 쓸모가 있겠지." 퍽 대수롭잖은 투였지만, 그 손목으로 언뜻 보인 옥 염주는 꽤 섬세한 솜씨로 만들어져 있었다. 방다병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팔찌를 살펴보았다.
"뭐에 쓰는 건데? 이연화, 너 전처럼 어디 안 좋은데 숨기는 거면 미리 말해. 어차피 내가 알아낼 테니까."
"쯧, 걱정 많은 녀석. 그런 거 아니니까 의심하지 말고, 앞으로 마음 좀 편히 먹고 살아. 어린 게 쓸데없이 근심 걱정이 많으니까 갑자기 희락기도 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이연화가 혀를 차며 놀리듯이 건넸다. 하지만 방다병은 급소를 얻어맞은 기분에 얼굴을 확 붉혔다. 방을 나서기 전까지 보았던 꿈이 뇌리를 스쳤다. 그 꿈속의 이연화가 감히 눈앞의 모습과 겹쳐지기 전에, 청년은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저었다. 현실을 침범하려는 망상을 막기 위한 노력이었다. "네, 네가 너무 오래 아팠으니까 그렇지! 졸리다며, 가서 빨리 잠이나 자!" 짐짓 성난 사람처럼 버럭 외치고, 방다병은 홱 몸을 돌려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잠깐 어깨너머로 돌아본 흰 얼굴은,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다병이 퍽 괴상하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바보 같은 이연화! 뜨끈뜨끈한 등과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다병은 백천원의 밤하늘을 괴롭게 날았다.
날이 밝은 후, 마지막 시험이 치러질 장소에 나타난 이연화는 여느 때처럼 말끔하고 태연했다. 맑은 햇살 아래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새하얀 옷과 머리끈이 버들가지마냥 나풀거렸다.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한 방다병은 괜히 뚱한 얼굴로 그 얼굴을 보았다. 물론 이연화의 탓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억하심정이 치밀었다. 이연화가 예의바른 미소와 함께 건넸다.
"마지막 문제는 천운에 맡겨보고자 합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다병은 죽고 싶었다.
살면서 이만큼 죽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앞뒤가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찰나의 선명한 그림이라면 뚝뚝 끊기듯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아래에 누웠던 이연화, 당혹으로 상기된 얼굴, 흰 목덜미에 취한 것처럼 입술을 묻던 순간, 약간의 열기와 난처함을 품은 채 방다병을 부르던 낮은 목소리...방다병이 내적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뛰어난 의술로 난데없는 희락기는 다스려졌고, 이제 약간의 두통 말고는 별달리 남은 증상도 없었으나, 어젯밤의 기억과 관하몽의 설명은 방다병을 정신적 절벽으로 사정없이 몰아갔다.
이연화 얼굴을 어떻게 보지? 이상이의 형질이 바뀌자마자 넋을 빼고 달려든 사람들을 저열한 짐승처럼 보았는데, 내가 그놈들과 별다를 것도 없이 행동해 버렸잖아! 어머니한테도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느냐고 호언장담했는데! 방다병이 침대 위에서 뭍 위의 생선처럼 퍼덕였다. 시뻘게진 얼굴이 좀처럼 원래 빛깔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젯밤의 자신이 눈앞에 있다면, 술 대신 당장 약이나 먹으라며 머리를 후려치고 싶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방다병은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홱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를 덮었다. 매우 원초적인 방어기제였다. 하지만 얼굴을 가렸다 하여 상대의 목소리를 막을 재간은 없었다.
"일어났어? 몸은 좀 어때?"
방다병은 이불 안에 숨어 나오고 싶지 않았다. 사실 영영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군자의 자세가 아니었기에, 방다병은 결국 이불 안에서 꾸물꾸물 모습을 나타내 앉았다. 차마 상대와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앞으로 다가와 요리조리 방다병을 살피던 이연화가 말했다. 참 태연한 투였다.
"음, 이제 괜찮아 보이네. 열이 아직 안 내린 것 같긴 하지만. 다행이야."
방다병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대가 어쩌면 이렇게 멀쩡할 수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연화가 허리를 낮춰 방다병과 시선을 맞추려 들었다. 그 오른손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뭐야, 왜 그래. 계속 어디 안 좋아? 관 협의 부를까? 방다병? 방소보?"
"이연화, 미안해. 면목이 없어...."
방다병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작게 사과했다. 살짝 커진 눈으로 방다병을 보던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됐어, 나도 희락기가 어떤지 잘 알아. 내가 이상이였던 시절에도 그것 때문에 진짜 부끄러웠던 적 있었다니까. 살다 보면 다들 한 번씩 겪는 일이지. 내가 얼마나 많은 양인들하고 부대꼈는데 그런 것도 이해를 못 하겠어? 관 협의가 나한테 상비약을 하나 더 줬으니, 다음에 같은 일이 생겨도 괜찮을 거야. 신경 쓰지 말라고, 방 대협."
이연화가 사촌동생을 달래주는 큰형처럼 이야기하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방다병은 그리 나아지지 않은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방다병의 얼굴을 살피던 이연화는, 이내 손등으로 그 어깨를 탁 때렸다. 방다병이 퍼뜩 상대를 보았다. 이연화는 청년이 퍽 유난을 떤다고 타박하듯이 말했다.
"네가 뭘 했다고 이렇게 죽상이야? 별일 없었어, 그냥 날 못 알아보고 술 취한 사람처럼 엉겨붙은 것뿐이야."
방다병은 순간 치민 의혹에 입을 살짝 열었지만,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내가 정말 이연화를 못 알아보고 엉겨붙은 걸까? 그렇다기엔 상대의 모습과 목소리, 체취가 불로 새긴 것처럼 선명히 남아 있었다. 만일, 만일 정말로 내가 이연화라서 엉겨붙은 거라면 어쩌지? 방다병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관하몽도 말했다. 양인들은 종종 자신에게 중요한 음인을 빼앗기거나, 그 음인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희락기를 맞기도 한다고. 그 말을 들은 당시의 방다병은 그야말로 새파랗게 질렸다.
"반드시 각인했거나, 성애적인 마음을 품은 대상일 때만 생기는 일은 아닙니다."
관하몽은 마치 위로하려는 듯 그렇게 덧붙였지만, 방다병은 그 어조에 깔린 사실을 읽었다. 그럼 보통은 각인했거나, 성애적인 마음을 품은 대상일 때 벌어지는 일이라는 거잖아! 방다병의 눈이 울상에 가깝게 변했다. 이름뿐이지만 자신의 스승이자, 전 사고문주이자, 처음 사귄 강호 친구이자 전우인 사람에게 내가 그런, 그런...방다병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신이 천하의 얕은 쓰레기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마음을 전혀 알 길 없이, 이연화는 참 속도 편한 태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또 과민반응한다. 방다병, 잘 들어. 이 스승은 네가 난데없는 희락기 때문에 내게 달려든 일로 크게 상심하지 않으니, 너도 빨리 털어버려."
"이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야? 적비성이 중간에 막지 않았으면, 난...난...."
"나한테 맞고 기절했겠지. 뭐가 문제야? 걱정 마, 방 도련님. 나랑 사고를 치는 바람에 네 창창한 앞날이 막히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파들파들 떠는 방다병을 향해, 이연화가 차를 마시며 놀리듯 말했다. 방다병은 두 가지 말을 동시에 떠올렸지만, 둘 중 어느 것도 꺼내지 못했다. 너 정말 나를 때릴 수 있었겠어? 기억 속의 너는 날 바로 제압하지 못한 채 엄청 당황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너랑 사고를 치는 게 왜 창창한 앞날이 막히는 일이야? 그건 별로 나쁜 일이-방다병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몸에 묻은 물을 푸르르 터는 불여우 같은 동작이었다. 자꾸만 생각이 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이연화가 코웃음을 치고는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관 협의가 알려줬어, 지금 상황이 이래서 네가 과히 곤두섰을 수도 있다고. 미안하다면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이제 내일이면 다 마무리될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말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해."
방다병이 푹 한숨을 쉬었다. 맞는 말이었지만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었다. 설령 그렇더라도 어떻게든 진정된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이연화의 말대로, 그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방다병은 불만스러운 소년처럼 꿍얼거렸다.
"낯짝 두꺼운 늙은 여우."
"이 녀석, 무례하긴. 희락기일 때는 봐줘도, 맨정신일 때는 안 봐줘."
이연화가 짐짓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방다병은 간신히 웃음 비슷한 것을 흘렸지만, 그 귀는 줄곧 터질 것처럼 빨개져 있었다.
그 후로, 천기산장의 소당주는 아주 작은 나사가 하나 빠진 기계 인형처럼 생활했다.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위화감이었지만, 방다병 본인은 반쯤 죽을 맛이었다. 잠깐이라도 손이나 머리가 한가해지면 어김없이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심지어 그 그림은 생각할수록 더욱 선명해졌고, 사실과 상상이 묘하게 뒤섞여 풍부해졌다. 자신을 함부로 때리지도 못하고 쩔쩔매던 몸이나, 목덜미를 살짝 물자 이끌리듯이 흐르던 체취나, 빈틈없이 닿았던 하체의 감촉이나, 흐트러진 머리칼과 침의 같은 것들이 자꾸만 불쑥불쑥 튀어나와 방다병을 벌겋게 물들이고는 사라졌다.
"청렴이라."
이연화의 중얼거림을 들었을 때, 방다병은 제발 저린 도둑처럼 화들짝 돌아보았다. 지금 자신의 마음은 청렴과 영 거리가 멀었다.
"뭐?"
"종 공자가 그렇게 썼네. 어울리긴 하는데."
이연화가 종려명의 답안을 한편으로 밀어두었다. 그는 '가장 귀한 덕'이라는 질문에 대해 후보들이 제출한 답안을 확인하고 있었다. 헛기침을 한 방다병이 아비의 답안을 펴보았다. 신(信). 어쩐지 적비성답다고 생각하며, 방다병은 이연화를 향해 턱짓했다.
"네가 적은 답안은 뭐였어?"
"나? 아무것도 안 적었는데."
이연화가 다음 후보의 답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방다병의 눈이 커졌다.
"그냥 빈 종이를 넣어둔 거야?"
"맞아. 중요한 건 누가 그 통을 훔쳐보러 오는가였어. 절박함이 적을 판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순 없지만, 유용한 기준이기는 하지."
이연화가 흥얼거리듯 말했다. 방다병이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어젯밤 너는 나랑 그러고...있었는데. 방다병을 힐끔 본 이연화가 픽 웃었다. "내가 밤새 지켜볼 필요는 없었어. 지통에 물과 닿으면 검게 변하는 약을 묻혀놨거든. 소세를 끝낸 손에 검은 자국이 있다면, 어제 그 통을 훔쳐본 거야." 아아. 방다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이연화, 최종 후보는 전에 얘기했던 그 아홉으로 할 생각이야?"
"음. 다른 후보들을 다시 훑어봤지만, 그 아홉이 가장 적절하겠어. 혹시 오늘 손에 검은 자국이 남은 후보가 또 보인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자, 그럼 마지막 후보를 선발하러 가 보자고. 이 짓도 얼마 안 남았네."
이연화가 빙글거리며 일어섰다. 못된 잔꾀를 부리는 여우 같은 얼굴이었다. 그 얄미운 모양새를 평소처럼 구박하지도 못하고, 방다병은 이연화와 함께 후보들이 모인 자리를 찾았다.
최종 후보의 이름이 호명되자, 뽑힌 사람들은 매우 상기되고 기쁜 표정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오직 아비만이 가면 아래에서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어, 사람들은 대체 저자가 얼마나 기발한 답을 내놓았기에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의심하는 말을 수군거렸다. 방다병은 이 무신경한 첩자에 속으로 약간 신경질이 났으나, 다른 한편으로 적비성이 연기한답시고 정말 기쁜 표정을 지었다면 그것도 퍽 소름끼쳤으리라 생각했다. 뽑히지 못한 사람들에게 아쉬움과 고마움을 표하고, 이연화는 아홉의 후보를 향해 말했다.
"내일 있을 과제가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고심이나 준비가 필요한 일이 아니니, 부디 편히 쉬시고 내일 안내에 따라 모여 주시지요."
후보들이 마지막 과제에 대해 궁금해하며 돌아서는 사이, 방다병은 재빠른 눈으로 사람들의 손을 훑었다. 손바닥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자세를 취한 이는 없었기에, 청년은 반대로 손을 부자연스럽게 마주 쥐거나 보여주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밝혀내려 했다.
아홉의 사람들 중, 방다병의 눈에 두 사람이 띄었다. 쭉 사이가 좋지 않던 서호천과 구소양이었다. 방다병이 놀라 눈을 깜박였다. 설마, 앙숙처럼 보이던 저 두 공자가 뱀과 여우일까? 이연화를 힐끗 보자, 그는 서호천과 구소양이 아닌 다른 지점을 응시하던 참이었다. 그 눈에 이채가 돌면서, 입가로 순간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쳤다.
"이연화, 왜 그래?"
방다병이 흩어지는 후보들의 뒷모습을 보며 소곤거렸다. "음, 아니야. 조금 의외다 싶어서." 이연화는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의아했지만, 방다병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이연화와 나란히 걸었다. 마지막 단계를 준비하자면 할 일이 많았다. 그날 밤이 깊도록, 방다병은 한동안 머릿속 생각에 시달리지 않았다. 후보들에 대한 자료를 다시 확인하고, 마지막 계획의 세부사항과 안전장치를 조정하다 보니 어느새 밤을 꼴딱 새울 지경이 된 탓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말도 안 되는 그림에 사로잡히느니 차라리 일에 사로잡히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방다병은, 책상에 엎드려 잠깐 선잠에 빠졌을 때 꿈에서 이연화를 보았다.
심지어 이번 꿈의 이연화는 잠깐 당혹하다가, 양팔을 내밀어 방다병을 방다병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무안하게 쩔쩔매면서도, 방다병은 그 손길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연꽃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툭하면 얄미운 거짓말을 늘어놓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채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다병. 그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방다병이 정신없이 그 뺨과 목에 입술을 댔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피부가 뜨거웠다. 이연화의 가슴팍을 더듬던 손이 옷깃 안으로 미끄러졌다. 그 손바닥은 명치와 배를 지나-.
방다병은 눈을 떴다. 꿈을 꾸던 중임에도, 얼굴로 피가 몰려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방다병이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배어나온 땀에 이마가 서늘했다. 방다병. 그 낮게 잠긴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청년은 벌게진 얼굴로 얼굴을 훔치다가, 자신의 하반신을 내려다보고는, 다시금 죽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미쳤나 봐. 희락기는 약으로 눌러 놓았는데! "방다병, 방다병. 정신 차려!" 방다병이 탁상에 이마를 쿵쿵 박으며 외쳤다. 하지만 바람대로 정신이 확 맑아지지 않아, 불쌍한 청년은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깊은 새벽이라, 백천원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몇 번이나 깊은 심호흡을 하고, 방다병은 검을 꺼내 휘두르기 시작했다. 잡념을 없애려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제일이었다.
"방다병, 뭐 해?"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방다병은 잠재우려던 잡념에 재차 사로잡혀 발을 삐끗했다. 검을 내리고 돌아보자, 그곳에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이연화가 있었다. "이 새벽까지 안 자고. 넌 일을 그렇게 했는데 졸리지도 않아? 어려서 그런가." 이연화가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검을 넣은 방다병이 괜히 발끈하며 받았다.
"어린 게 아니라 젊은 거라고 하는 거야. 그러는 너는? 이 밤에 어딜 가?"
"음, 관 협의를 잠깐 보고 오는 길이야."
"관하몽은 왜? 어디 아파?"
방다병의 얼굴이 삽시간에 걱정으로 물들었다. 상대의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묻자, 이연화가 에이 소리와 함께 손을 내저었다. "아냐, 그냥 선물을 하나 받았어. 유연신침의 선물이니 분명 쓸모가 있겠지." 퍽 대수롭잖은 투였지만, 그 손목으로 언뜻 보인 옥 염주는 꽤 섬세한 솜씨로 만들어져 있었다. 방다병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팔찌를 살펴보았다.
"뭐에 쓰는 건데? 이연화, 너 전처럼 어디 안 좋은데 숨기는 거면 미리 말해. 어차피 내가 알아낼 테니까."
"쯧, 걱정 많은 녀석. 그런 거 아니니까 의심하지 말고, 앞으로 마음 좀 편히 먹고 살아. 어린 게 쓸데없이 근심 걱정이 많으니까 갑자기 희락기도 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이연화가 혀를 차며 놀리듯이 건넸다. 하지만 방다병은 급소를 얻어맞은 기분에 얼굴을 확 붉혔다. 방을 나서기 전까지 보았던 꿈이 뇌리를 스쳤다. 그 꿈속의 이연화가 감히 눈앞의 모습과 겹쳐지기 전에, 청년은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저었다. 현실을 침범하려는 망상을 막기 위한 노력이었다. "네, 네가 너무 오래 아팠으니까 그렇지! 졸리다며, 가서 빨리 잠이나 자!" 짐짓 성난 사람처럼 버럭 외치고, 방다병은 홱 몸을 돌려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잠깐 어깨너머로 돌아본 흰 얼굴은,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다병이 퍽 괴상하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바보 같은 이연화! 뜨끈뜨끈한 등과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다병은 백천원의 밤하늘을 괴롭게 날았다.
날이 밝은 후, 마지막 시험이 치러질 장소에 나타난 이연화는 여느 때처럼 말끔하고 태연했다. 맑은 햇살 아래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새하얀 옷과 머리끈이 버들가지마냥 나풀거렸다.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한 방다병은 괜히 뚱한 얼굴로 그 얼굴을 보았다. 물론 이연화의 탓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억하심정이 치밀었다. 이연화가 예의바른 미소와 함께 건넸다.
"마지막 문제는 천운에 맡겨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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