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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4 23:38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다병은 괴로웠다. 아마 백천원의 대부분이 그럴 터였다.
백천원주 운피구는 그런 감정을 느낄 겨를도 없는 사람처럼, 온통 핏발 선 눈으로 종이의 산을 점검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운피구가 제대로 잠자리에 드는 모습을 본 사람이 전무했다. 그 집무실을 드나드는 전서구가 하도 많아, 창가가 비어 있을 적이 거의 없었다. 이 모든 현상을 일으킨 장본인은, 몇몇 이들과 함께 앉아 서류를 검토하다가 뺨을 긁적였다.
"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네."
무책임한 혼잣말에, 방다병이 억하심정으로 가득한 눈을 들었다.
"이연화, 너...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전혀 몰랐단 말이야?"
"좀 많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500통? 강호에 나랑 혼인하고 싶은 사람이 오백 명이나 된다고?"
"정확히 516명이거든. 그리고 전부 강호 사람들인 것도 아니야."
방다병이 방금 전까지 보던 두루마리를 향해 투덜거렸다. 화려하게 장식된 고급 종이 위에서, 역시 비싼 먹물과 붓으로 썼을 명필이 춤추고 있었다.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었다는 관리 가문에서 보낸 글이었다. 이연화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했다.
"전부 날 죽이거나 임신시키려는 사람들은 아닐 텐데, 그럼 정말 진지하게 혼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도 많다는 거잖아? 대체 왜지? 천기산장에 왔던 하객들 중에, 결혼 적령기로 보이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다고."
"여기 다섯 살짜리도 있다."
방다병이 한 시진 전 던져놓은 구혼서 하나를 들고는 건조하게 말했다. 이연화는 말세라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사고문주라는 이름 때문에들 이런다니, 정말 얕은 사람들이로군. 결국 나와 연결된 인맥이나 세력을 바라는 거겠지. 내겐 더 이상 그런 게 없다고 확실히 인식시켜야겠네. 설령 있더라도 절대 사사로이 쓰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야. 그러면 많은 머릿수가 걸러지겠지."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닐걸. 넌 요 며칠 거리에 안 나가봐서 모르지?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얼마나 파다한지 알아? 천하제일검 이상이가 연꽃 냄새를 풍기는 아름다운 음인이 되었다는 얘기 말이야. 이야기꾼이 어느새 네 음인 모양 인형까지 만들어서 전해주더라."
방다병이 상대를 꾸짖듯이 전달했다. 상대가 사태의 심각성을 더 절감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으나, 이연화는 여느 때처럼 방다병의 희망대로 반응해주지 않았다. 이연화가 어이없고도 불성실한 얼굴로 대꾸했다.
"음인 모양 인형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어? 게다가 아름다운 음인이 됐다니, 내 겉모습엔 차이가 없는데. 진정성이 떨어지는 이야기꾼이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나는 천하제일검이 아닐걸? 아직 내력도 다 돌아오지 않았고. 아비가 들으면 화낸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해? 이연화-."
"이미 십여 명을 적발했습니다."
운피구가 불쑥 말했다. 이연화와 방다병이 그편을 돌아보았다. 운피구는 전서구가 방금 전해준 쪽지를 확인하고는, 그것을 불에 태우던 참이었다.
"문주의 말씀대로, 이미 구혼서에서부터 수상한 낌새를 풍기는 자들이 있더군요. 적어둔 신상명세와 이력의 앞뒤가 묘하게 맞지 않았습니다.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을 움직여 보았는데, 금원맹에서 떨려나간 자들 몇이 드러났지요. 어찌할까요?"
"이 단계에서 들킬 정도라면 그놈들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패는 아닌 게지. 하지만 너무 공개적으로 쓸어버리면 이쪽의 의도를 의심받을 수 있으니, 조용하게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운피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쪽지에 지령을 써 넣었다. 그 책상 주변을 바라보던 방다병이 고개를 갸웃했다. 운피구는 밀려오는 구혼서를 세 종류로 분류하고 있었다. 전서구에 쪽지를 묶은 다음 구혼서 몇 개를 한 더미로 던지는 것을 보니, 개중 하나는 잠재적 적을 가리키는 더미인 듯했다. 또 하나는 아마도 통과된 구혼서로 보였다(그 더미가 가장 자그마했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무엇인지 금방 알 수가 없었다. 방다병이 물었다.
"저 더미는 뭡니까?"
"자격 미달이다."
운피구가 그편을 힐끔 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이연화가 조금 미심쩍은 얼굴로 그편을 기웃거렸다.
"너무 많이 걸러내는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주께 선택받거나 최소한 백천원에 들어오려는 계획을 가진 사람이라면, 감히 흠이 있는 구혼서를 내지는 못했겠지요. 확인할 것도 없이 부족한 내용들만 걸러냈습니다. 가장 최근에 저쪽으로 분류한 내용이 뭔지 아십니까? '본 영웅은 이미 거느린 음인이 많지만, 전 사고문주라면 그 명성을 보아 첫째 반려의 자리를 주겠다'는 헛소리였습니다."
운피구가 두루마리 더미를 경멸의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방다병은 소매에 붙은 징그러운 벌레를 발견한 사람처럼 이상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연화는 눈을 잠깐 크게 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차라리 그렇게 투명하다면 다행이네. 쓸데없는 수고를 줄여주는 셈이지 않겠어." 물론 운피구는 그에 전혀 동의하지 못한 얼굴로 정중히 말했다.
"문주, 이곳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문주께서는 백천원의 일을 잠시 맡아주시지요. 문주께서 각지의 자료와 기록을 확인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사건이 많이 해결되었다고 수사관들이 기뻐하더군요."
"나야 그쪽이 더 적성이긴 하지만, 예상보다 구혼서 수가 너무 많아서 말이야. 자네에게만 맡겨놓자니 마음이 영 불편한데."
"문주께서 방금 전의 내용 같은 것들을 직접 보실 수도 있다는 부분이 더 마음에 걸립니다. 저는 괜찮으니, 부디 백천원을 도와주시고 회복에 힘쓰십시오. 아직 문주의 몸이 완전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운피구가 힘주어 말했다.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일어섰다. "고마워, 피구. 그럼 잠깐 관하몽을 만나보고 자료실에 들르겠네." 말을 맺으며, 이연화는 퍽 의미심장한 눈으로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그 의도를 금방 읽은 방다병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대놓고 떼를 쓴 후 보름 정도의 시간 동안, 방다병은 두 차례 이연화의 '실험 대상'이 되었다. 오늘까지 더한다면 세 번이었다.
처음 이연화와 단둘이 방에 들어갔을 때, 방다병은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로 침상에 앉았다. 도무지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런 짓을 할 용기는 없어, 방다병은 운기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연화를 앞에 두고 공격적인 체취를 마구 풀어내는 일은 아주 어려웠지만-애초부터, 방다병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체취를 이용하는 양인들을 꽤 저열하게 여겨 멸시해 왔다. 어쩌겠는가? 청년은 예의와 도리를 아는 부모의 손에 성장했다-익숙하지 않은 심법에 열중하듯 끙끙거리며 애를 쓰자 어찌어찌 남들과 비슷하게는 할 수 있었다.
냄새를 풀면서도, 방다병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한 채 근심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불순한 표정이나 반응을 보이면 어떡하지? 혹시 이연화가 내게 반응해서, 적비성과 함께 있을 때처럼 연꽃 냄새를 확 풀어버리면 어쩌지? 그러면 안 되는데-그런데 나한테만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도 썩 기쁠 것 같지는 않단 말이야. 아니, 잠깐. 반응하면 그게 훨씬 큰일이지 않나? 반응을 안 하면 다행인 건데, 난 왜-.
"방소보, 못하겠으면 얘기하라고 했지? 똥 마려운 것처럼 이상한 표정 짓지 말고 얘기해 봐. 괜찮은 거야?"
멀찍이 섰던 이연화가 의심스럽게 말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혼란스럽게 전개되던 생각을 멈추고, 방다병은 눈을 더 질끈 감으면서 허세를 부렸다.
"나...난 괜찮거든? 안 괜찮을 이유가 없잖아. 넌 어떤데?"
"음, 견딜 만해. 아비랑 있을 때보다 거리가 좀 있어서 그런 건가? 방소보, 나 조금만 가까이 간다."
이연화가 아무렇지 않게 건넸다.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허벅지를 꽉 움켜쥐고는 숨을 골랐다. 이연화는 아무 냄새도 풍기고 있지 않았는데, 상황이 이래서인지 상대의 접근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사부이자 친구 앞에서 혼자만 홀딱 벗고 선 듯한 기분이었다.
방다병의 속내를 정확히 짐작할 길 없던 이연화는, 작은 바람을 일으키며 방다병의 앞으로 다가왔다. 방다병의 턱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 동안 무공을 정진한 탓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상대의 기척과 거리가 정확히 느껴졌다. 하도 감각이 곤두선 터라, 그 숨소리와 체온까지도 생생했다. 가슴이 정신없이 쿵쾅거렸다. 머리에 열이 오르자, 힘껏 뿜어내던 체취가 조금 더 강해졌다.
"흐음."
이연화가 작은 소리를 낸 순간,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했다. 상대의 옷이 거의 코앞에서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절대 보지 말아야지. 절대 보지 말아야...방다병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생각했다. 곧 작은 병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연화가 무언가를 삼켰다. 방다병의 손아귀로 힘이 들어갔다. 상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의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었다. 영원에 가깝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후, 앞에서 작은 바람이 일었다. 상대가 몸을 돌리면서 생긴 바람이었다.
그 바람결에 아주 희미하게 섞인 연꽃 냄새를 맡은 순간, 방다병은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눈앞에서 긴 머리칼과 푸른 옷자락이 돌아서고 있었다. 방다병의 손이 움찔했다. 그 등을 콱 붙들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린 스스로에게 대경하며-청년은 누군가를 향해 폭력적인 충동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방다병은 할퀴듯이 허벅지를 움켰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축축했다. 이연화가 다시 자신을 보기 전에, 방다병은 허둥지둥 다시 눈을 감고는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다행히 눈치 채지 못했는지, 이연화는 픽 웃으며 이제 끝났으니 숨 쉬고 눈 좀 뜨라는 말을 건넸다.
방다병과의 첫 '실험'이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다고 여긴 듯, 이연화는 그 뒤로도 방다병에게 같은 일을 부탁했다. 방다병은 자신이 '실험 대상'이 되겠다고 악을 썼던 날, 어쩐지 가소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적비성을 살짝 이해하고 내심 신경질을 냈다. 이연화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양인으로서 이연화와 함께 있는 시간은 죽도록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형질을 마구 발산하면서도 한 가닥의 통제력을 남겨두어야 했고, 상대가 설령 실수하더라도 자신은 실수해선 안 되었다. 어쩌다 아주 약간의 연꽃 냄새라도 맡게 되면, 속으로 세상의 모든 도경을 읊조리며 허벅지를 할퀴어야 했다.
이연화, 설마 내가 괜찮아 보이려고 노력하니까 정말 괜찮은 줄 아는 거 아니야?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초래한 상황임에도, 방다병은 왠지 야속한 심정에 휩싸인 채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도 벌써 세 번째라 그런지, 처음에 비하면 나름대로 딴 생각을 펼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겨우 손톱 크기의 여유였지만). 언제까지 나한테 이런 일을 부탁할 셈이냐고 물으려다, 방다병은 목소리를 멈추었다.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연화는 다시 태연하게 적비성을 찾아갈 터였다.
그건 싫었다. 그건 정말, 정말 싫었다.
자신이 감시역을 맡는다 쳐도, 그 두 명이 다시금 그런 모습으로 붙어있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차마 이연화에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그날 방다병이 본 적비성은 당장이라도 이연화의 목을 꽉 물어버릴 것처럼 굴고 있었다. 지금껏 그토록 상대를 집어삼키는 듯한 체취를 맡은 적이 없었다. 거기에 진한 연꽃 냄새가 가감 없이 섞이니, 부적절하다 못해 머리가 핑 돌 만큼 어지러운 공기가 만들어졌다. 그놈하고는 역시 안 돼, 내가 참는 게 낫지! 방다병이 속으로 고개를 탈탈 털며 생각했다.
"전부터 느꼈는데, 네 냄새도 좀 힘들긴 하네."
세 번째 실험을 마치고 이연화가 방문을 열어 환기시키며 중얼거린 말에, 방다병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청년은 반사적으로 쩔쩔매며 속사포처럼 물었다. "왜? 내가 너무 과했어? 뭔가 실수한 거야? 도중에 잠깐 다른 생각을 했는데, 그게 문제였나?" 이연화가 눈썹을 이상한 모양으로 찌푸렸다.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런 뜻이 아냐. 네 형질도 꽤 강하긴 한데, 그 영향력이 적 맹주보다는 덜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실제로도 그렇긴 하지만...네 냄새는 다른 의미로 좀 힘드네. 흥미로운걸."
이연화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물론 속사정을 모르는 방다병은 전혀 흥미로워할 수 없었다. 청년이 조금 억울하게 외쳤다.
"내 냄새가 왜 힘들어? 나 조절 잘 못하던 어릴 때에도, 그렇게 힘든 냄새라는 소리 들은 적 없는데."
"그게 문제야, 그게. 너는 꽤 강한 양인인데도 체취가 이상하게 부담이나 경계심을 잘 안 줘. 적 맹주는 힘으로 무식하게 밀어붙여서 아슬아슬해지는 느낌인데, 너는 통제할 필요가 없다고 달래는 것 같아서 오히려 상대하기 어렵단 말이지. 다행이야, 방소보. 네가 음인들을 이용해먹는 사기꾼이나 범죄자였으면 아주 위험한 인물이 됐겠어."
이연화가 삿대질하며 농담처럼 덧붙였다. 정말 아무런 의도도 없는, 마치 과일이나 채소의 향기를 품평하는 듯한 말이었으나 방다병은 그만 귀가 빨개지고 말았다. 어쨌든, 이연화가 내 냄새를 편안하다고 느꼈단 거잖아. 그래서 오히려 통제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고. 바짝 마른 입을 축이기 위해 찻잔을 훌쩍 비우던 방다병에게, 이연화가 팔짱을 끼고는 물었다. 조금 전처럼, 역시 과일이나 채소의 향기를 묻는 듯한 투였다.
"궁금한 게 있었는데, 내 냄새는 대체 양인한테 어떻게 맡아지는 거야?"
방다병은 찻물을 뿜을 뻔했다. 두어 번 콜록거리며 겨우 차를 삼킨 방다병이 고개를 돌렸다. 이연화는 방다병이 퍽 유난을 떤다고 말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방다병은 그 뻔뻔한 얼굴에 식은 차를 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방다병이 괜히 퉁명스럽게 건넸다.
"너도 알잖아, 연꽃 냄새라고."
"연꽃 냄새인 건 나도 알지. 하지만 그냥 연꽃 냄새잖아. 무슨 느낌이길래 적 맹주까지 그러나 이해가 잘 안 돼서. 나도 양인으로 살았으니 여러 체취를 가진 음인들을 만나봤지. 가끔은 절제하기 어렵기도 했고. 그래도 이성이 날아갈 만큼 영향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거든."
"그냥...넌 좀 달라."
방다병은 차마 상대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 감각을 상대에게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웠고, 사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눈썹을 살짝 든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추 공자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괜히 울컥한 방다병이 이연화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그 사람이 준 옥패는 어쨌어? 설마 갖고 다녀?"
"그거? 적 맹주가 가져갔어. 실험 대상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니까 냉큼 빼앗지 뭐야."
이연화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어쩐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방다병의 기분은 조금 더 술렁였다. 나보다 본능과 욕망에 충실하며 군자의 덕과 절제를 모르는 대마왕에게서, 반드시 이연화를 지켜내야 해! 내심 비장하게 생각하며 주먹을 쥐던 방다병의 눈앞으로, 무뚝뚝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방다병이 펄쩍 뛰어올라 손가락질을 했다.
"기척 좀 내고 다녀!"
"알아차리지 못한 네가 문제지. 감각을 더 발달시켜라."
"너-."
"나는 잠시 백천원을 떠날 거다. 그 사이 꼬마와 또 이런 짓을 하려거든 다른 보초를 불러라."
적비성이 방다병을 무시하고 이연화를 향해 말했다. 이연화가 의아하게 물었다.
"금원맹에 무슨 일 있어?"
"맹과는 관계 없다. 너도 알게 되겠지. 곧 다시 보자, 이연화."
속내를 알 수 없도록 말한 적비성이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이 녀석을 옆에서 잘 감시해라. 어디 가서 또 무슨 무모한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흥, 네가 했던 말 중에 제일 동의할 만 하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그럴 거거든."
"너희 말이야, 본인을 앞에 두고 그렇게 말하는 건 무례한 짓이야. 다들 예절을 어디에서 배운 거야?"
이연화가 짐짓 혀를 차며 타박했으나, 적비성과 방다병 둘 중 누구도 타격을 받지 않았다. 휙 사라지는 적비성을 바라보며, 방다병은 그토록 이연화의 일거수일투족에 열을 내던 남자가 대체 무슨 일로 백천원을 떠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보름 뒤, 이연화와 방다병은 아주 의외의 장소에서 적비성과 다시 마주쳤다. 백천원에서 일차적으로 걸러낸 후보들이 드디어 한 자리에 모인 날이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다병은 괴로웠다. 아마 백천원의 대부분이 그럴 터였다.
백천원주 운피구는 그런 감정을 느낄 겨를도 없는 사람처럼, 온통 핏발 선 눈으로 종이의 산을 점검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운피구가 제대로 잠자리에 드는 모습을 본 사람이 전무했다. 그 집무실을 드나드는 전서구가 하도 많아, 창가가 비어 있을 적이 거의 없었다. 이 모든 현상을 일으킨 장본인은, 몇몇 이들과 함께 앉아 서류를 검토하다가 뺨을 긁적였다.
"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네."
무책임한 혼잣말에, 방다병이 억하심정으로 가득한 눈을 들었다.
"이연화, 너...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전혀 몰랐단 말이야?"
"좀 많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500통? 강호에 나랑 혼인하고 싶은 사람이 오백 명이나 된다고?"
"정확히 516명이거든. 그리고 전부 강호 사람들인 것도 아니야."
방다병이 방금 전까지 보던 두루마리를 향해 투덜거렸다. 화려하게 장식된 고급 종이 위에서, 역시 비싼 먹물과 붓으로 썼을 명필이 춤추고 있었다.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었다는 관리 가문에서 보낸 글이었다. 이연화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했다.
"전부 날 죽이거나 임신시키려는 사람들은 아닐 텐데, 그럼 정말 진지하게 혼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도 많다는 거잖아? 대체 왜지? 천기산장에 왔던 하객들 중에, 결혼 적령기로 보이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다고."
"여기 다섯 살짜리도 있다."
방다병이 한 시진 전 던져놓은 구혼서 하나를 들고는 건조하게 말했다. 이연화는 말세라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사고문주라는 이름 때문에들 이런다니, 정말 얕은 사람들이로군. 결국 나와 연결된 인맥이나 세력을 바라는 거겠지. 내겐 더 이상 그런 게 없다고 확실히 인식시켜야겠네. 설령 있더라도 절대 사사로이 쓰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야. 그러면 많은 머릿수가 걸러지겠지."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닐걸. 넌 요 며칠 거리에 안 나가봐서 모르지?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얼마나 파다한지 알아? 천하제일검 이상이가 연꽃 냄새를 풍기는 아름다운 음인이 되었다는 얘기 말이야. 이야기꾼이 어느새 네 음인 모양 인형까지 만들어서 전해주더라."
방다병이 상대를 꾸짖듯이 전달했다. 상대가 사태의 심각성을 더 절감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으나, 이연화는 여느 때처럼 방다병의 희망대로 반응해주지 않았다. 이연화가 어이없고도 불성실한 얼굴로 대꾸했다.
"음인 모양 인형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어? 게다가 아름다운 음인이 됐다니, 내 겉모습엔 차이가 없는데. 진정성이 떨어지는 이야기꾼이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나는 천하제일검이 아닐걸? 아직 내력도 다 돌아오지 않았고. 아비가 들으면 화낸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해? 이연화-."
"이미 십여 명을 적발했습니다."
운피구가 불쑥 말했다. 이연화와 방다병이 그편을 돌아보았다. 운피구는 전서구가 방금 전해준 쪽지를 확인하고는, 그것을 불에 태우던 참이었다.
"문주의 말씀대로, 이미 구혼서에서부터 수상한 낌새를 풍기는 자들이 있더군요. 적어둔 신상명세와 이력의 앞뒤가 묘하게 맞지 않았습니다.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을 움직여 보았는데, 금원맹에서 떨려나간 자들 몇이 드러났지요. 어찌할까요?"
"이 단계에서 들킬 정도라면 그놈들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패는 아닌 게지. 하지만 너무 공개적으로 쓸어버리면 이쪽의 의도를 의심받을 수 있으니, 조용하게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운피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쪽지에 지령을 써 넣었다. 그 책상 주변을 바라보던 방다병이 고개를 갸웃했다. 운피구는 밀려오는 구혼서를 세 종류로 분류하고 있었다. 전서구에 쪽지를 묶은 다음 구혼서 몇 개를 한 더미로 던지는 것을 보니, 개중 하나는 잠재적 적을 가리키는 더미인 듯했다. 또 하나는 아마도 통과된 구혼서로 보였다(그 더미가 가장 자그마했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무엇인지 금방 알 수가 없었다. 방다병이 물었다.
"저 더미는 뭡니까?"
"자격 미달이다."
운피구가 그편을 힐끔 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이연화가 조금 미심쩍은 얼굴로 그편을 기웃거렸다.
"너무 많이 걸러내는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주께 선택받거나 최소한 백천원에 들어오려는 계획을 가진 사람이라면, 감히 흠이 있는 구혼서를 내지는 못했겠지요. 확인할 것도 없이 부족한 내용들만 걸러냈습니다. 가장 최근에 저쪽으로 분류한 내용이 뭔지 아십니까? '본 영웅은 이미 거느린 음인이 많지만, 전 사고문주라면 그 명성을 보아 첫째 반려의 자리를 주겠다'는 헛소리였습니다."
운피구가 두루마리 더미를 경멸의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방다병은 소매에 붙은 징그러운 벌레를 발견한 사람처럼 이상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연화는 눈을 잠깐 크게 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차라리 그렇게 투명하다면 다행이네. 쓸데없는 수고를 줄여주는 셈이지 않겠어." 물론 운피구는 그에 전혀 동의하지 못한 얼굴로 정중히 말했다.
"문주, 이곳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문주께서는 백천원의 일을 잠시 맡아주시지요. 문주께서 각지의 자료와 기록을 확인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사건이 많이 해결되었다고 수사관들이 기뻐하더군요."
"나야 그쪽이 더 적성이긴 하지만, 예상보다 구혼서 수가 너무 많아서 말이야. 자네에게만 맡겨놓자니 마음이 영 불편한데."
"문주께서 방금 전의 내용 같은 것들을 직접 보실 수도 있다는 부분이 더 마음에 걸립니다. 저는 괜찮으니, 부디 백천원을 도와주시고 회복에 힘쓰십시오. 아직 문주의 몸이 완전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운피구가 힘주어 말했다.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일어섰다. "고마워, 피구. 그럼 잠깐 관하몽을 만나보고 자료실에 들르겠네." 말을 맺으며, 이연화는 퍽 의미심장한 눈으로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그 의도를 금방 읽은 방다병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대놓고 떼를 쓴 후 보름 정도의 시간 동안, 방다병은 두 차례 이연화의 '실험 대상'이 되었다. 오늘까지 더한다면 세 번이었다.
처음 이연화와 단둘이 방에 들어갔을 때, 방다병은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로 침상에 앉았다. 도무지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런 짓을 할 용기는 없어, 방다병은 운기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연화를 앞에 두고 공격적인 체취를 마구 풀어내는 일은 아주 어려웠지만-애초부터, 방다병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체취를 이용하는 양인들을 꽤 저열하게 여겨 멸시해 왔다. 어쩌겠는가? 청년은 예의와 도리를 아는 부모의 손에 성장했다-익숙하지 않은 심법에 열중하듯 끙끙거리며 애를 쓰자 어찌어찌 남들과 비슷하게는 할 수 있었다.
냄새를 풀면서도, 방다병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한 채 근심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불순한 표정이나 반응을 보이면 어떡하지? 혹시 이연화가 내게 반응해서, 적비성과 함께 있을 때처럼 연꽃 냄새를 확 풀어버리면 어쩌지? 그러면 안 되는데-그런데 나한테만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도 썩 기쁠 것 같지는 않단 말이야. 아니, 잠깐. 반응하면 그게 훨씬 큰일이지 않나? 반응을 안 하면 다행인 건데, 난 왜-.
"방소보, 못하겠으면 얘기하라고 했지? 똥 마려운 것처럼 이상한 표정 짓지 말고 얘기해 봐. 괜찮은 거야?"
멀찍이 섰던 이연화가 의심스럽게 말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혼란스럽게 전개되던 생각을 멈추고, 방다병은 눈을 더 질끈 감으면서 허세를 부렸다.
"나...난 괜찮거든? 안 괜찮을 이유가 없잖아. 넌 어떤데?"
"음, 견딜 만해. 아비랑 있을 때보다 거리가 좀 있어서 그런 건가? 방소보, 나 조금만 가까이 간다."
이연화가 아무렇지 않게 건넸다.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허벅지를 꽉 움켜쥐고는 숨을 골랐다. 이연화는 아무 냄새도 풍기고 있지 않았는데, 상황이 이래서인지 상대의 접근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사부이자 친구 앞에서 혼자만 홀딱 벗고 선 듯한 기분이었다.
방다병의 속내를 정확히 짐작할 길 없던 이연화는, 작은 바람을 일으키며 방다병의 앞으로 다가왔다. 방다병의 턱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 동안 무공을 정진한 탓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상대의 기척과 거리가 정확히 느껴졌다. 하도 감각이 곤두선 터라, 그 숨소리와 체온까지도 생생했다. 가슴이 정신없이 쿵쾅거렸다. 머리에 열이 오르자, 힘껏 뿜어내던 체취가 조금 더 강해졌다.
"흐음."
이연화가 작은 소리를 낸 순간,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했다. 상대의 옷이 거의 코앞에서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절대 보지 말아야지. 절대 보지 말아야...방다병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생각했다. 곧 작은 병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연화가 무언가를 삼켰다. 방다병의 손아귀로 힘이 들어갔다. 상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의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었다. 영원에 가깝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후, 앞에서 작은 바람이 일었다. 상대가 몸을 돌리면서 생긴 바람이었다.
그 바람결에 아주 희미하게 섞인 연꽃 냄새를 맡은 순간, 방다병은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눈앞에서 긴 머리칼과 푸른 옷자락이 돌아서고 있었다. 방다병의 손이 움찔했다. 그 등을 콱 붙들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린 스스로에게 대경하며-청년은 누군가를 향해 폭력적인 충동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방다병은 할퀴듯이 허벅지를 움켰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축축했다. 이연화가 다시 자신을 보기 전에, 방다병은 허둥지둥 다시 눈을 감고는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다행히 눈치 채지 못했는지, 이연화는 픽 웃으며 이제 끝났으니 숨 쉬고 눈 좀 뜨라는 말을 건넸다.
방다병과의 첫 '실험'이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다고 여긴 듯, 이연화는 그 뒤로도 방다병에게 같은 일을 부탁했다. 방다병은 자신이 '실험 대상'이 되겠다고 악을 썼던 날, 어쩐지 가소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적비성을 살짝 이해하고 내심 신경질을 냈다. 이연화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양인으로서 이연화와 함께 있는 시간은 죽도록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형질을 마구 발산하면서도 한 가닥의 통제력을 남겨두어야 했고, 상대가 설령 실수하더라도 자신은 실수해선 안 되었다. 어쩌다 아주 약간의 연꽃 냄새라도 맡게 되면, 속으로 세상의 모든 도경을 읊조리며 허벅지를 할퀴어야 했다.
이연화, 설마 내가 괜찮아 보이려고 노력하니까 정말 괜찮은 줄 아는 거 아니야?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초래한 상황임에도, 방다병은 왠지 야속한 심정에 휩싸인 채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도 벌써 세 번째라 그런지, 처음에 비하면 나름대로 딴 생각을 펼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겨우 손톱 크기의 여유였지만). 언제까지 나한테 이런 일을 부탁할 셈이냐고 물으려다, 방다병은 목소리를 멈추었다.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연화는 다시 태연하게 적비성을 찾아갈 터였다.
그건 싫었다. 그건 정말, 정말 싫었다.
자신이 감시역을 맡는다 쳐도, 그 두 명이 다시금 그런 모습으로 붙어있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차마 이연화에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그날 방다병이 본 적비성은 당장이라도 이연화의 목을 꽉 물어버릴 것처럼 굴고 있었다. 지금껏 그토록 상대를 집어삼키는 듯한 체취를 맡은 적이 없었다. 거기에 진한 연꽃 냄새가 가감 없이 섞이니, 부적절하다 못해 머리가 핑 돌 만큼 어지러운 공기가 만들어졌다. 그놈하고는 역시 안 돼, 내가 참는 게 낫지! 방다병이 속으로 고개를 탈탈 털며 생각했다.
"전부터 느꼈는데, 네 냄새도 좀 힘들긴 하네."
세 번째 실험을 마치고 이연화가 방문을 열어 환기시키며 중얼거린 말에, 방다병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청년은 반사적으로 쩔쩔매며 속사포처럼 물었다. "왜? 내가 너무 과했어? 뭔가 실수한 거야? 도중에 잠깐 다른 생각을 했는데, 그게 문제였나?" 이연화가 눈썹을 이상한 모양으로 찌푸렸다.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런 뜻이 아냐. 네 형질도 꽤 강하긴 한데, 그 영향력이 적 맹주보다는 덜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실제로도 그렇긴 하지만...네 냄새는 다른 의미로 좀 힘드네. 흥미로운걸."
이연화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물론 속사정을 모르는 방다병은 전혀 흥미로워할 수 없었다. 청년이 조금 억울하게 외쳤다.
"내 냄새가 왜 힘들어? 나 조절 잘 못하던 어릴 때에도, 그렇게 힘든 냄새라는 소리 들은 적 없는데."
"그게 문제야, 그게. 너는 꽤 강한 양인인데도 체취가 이상하게 부담이나 경계심을 잘 안 줘. 적 맹주는 힘으로 무식하게 밀어붙여서 아슬아슬해지는 느낌인데, 너는 통제할 필요가 없다고 달래는 것 같아서 오히려 상대하기 어렵단 말이지. 다행이야, 방소보. 네가 음인들을 이용해먹는 사기꾼이나 범죄자였으면 아주 위험한 인물이 됐겠어."
이연화가 삿대질하며 농담처럼 덧붙였다. 정말 아무런 의도도 없는, 마치 과일이나 채소의 향기를 품평하는 듯한 말이었으나 방다병은 그만 귀가 빨개지고 말았다. 어쨌든, 이연화가 내 냄새를 편안하다고 느꼈단 거잖아. 그래서 오히려 통제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고. 바짝 마른 입을 축이기 위해 찻잔을 훌쩍 비우던 방다병에게, 이연화가 팔짱을 끼고는 물었다. 조금 전처럼, 역시 과일이나 채소의 향기를 묻는 듯한 투였다.
"궁금한 게 있었는데, 내 냄새는 대체 양인한테 어떻게 맡아지는 거야?"
방다병은 찻물을 뿜을 뻔했다. 두어 번 콜록거리며 겨우 차를 삼킨 방다병이 고개를 돌렸다. 이연화는 방다병이 퍽 유난을 떤다고 말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방다병은 그 뻔뻔한 얼굴에 식은 차를 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방다병이 괜히 퉁명스럽게 건넸다.
"너도 알잖아, 연꽃 냄새라고."
"연꽃 냄새인 건 나도 알지. 하지만 그냥 연꽃 냄새잖아. 무슨 느낌이길래 적 맹주까지 그러나 이해가 잘 안 돼서. 나도 양인으로 살았으니 여러 체취를 가진 음인들을 만나봤지. 가끔은 절제하기 어렵기도 했고. 그래도 이성이 날아갈 만큼 영향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거든."
"그냥...넌 좀 달라."
방다병은 차마 상대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 감각을 상대에게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웠고, 사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눈썹을 살짝 든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추 공자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괜히 울컥한 방다병이 이연화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그 사람이 준 옥패는 어쨌어? 설마 갖고 다녀?"
"그거? 적 맹주가 가져갔어. 실험 대상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니까 냉큼 빼앗지 뭐야."
이연화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어쩐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방다병의 기분은 조금 더 술렁였다. 나보다 본능과 욕망에 충실하며 군자의 덕과 절제를 모르는 대마왕에게서, 반드시 이연화를 지켜내야 해! 내심 비장하게 생각하며 주먹을 쥐던 방다병의 눈앞으로, 무뚝뚝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방다병이 펄쩍 뛰어올라 손가락질을 했다.
"기척 좀 내고 다녀!"
"알아차리지 못한 네가 문제지. 감각을 더 발달시켜라."
"너-."
"나는 잠시 백천원을 떠날 거다. 그 사이 꼬마와 또 이런 짓을 하려거든 다른 보초를 불러라."
적비성이 방다병을 무시하고 이연화를 향해 말했다. 이연화가 의아하게 물었다.
"금원맹에 무슨 일 있어?"
"맹과는 관계 없다. 너도 알게 되겠지. 곧 다시 보자, 이연화."
속내를 알 수 없도록 말한 적비성이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이 녀석을 옆에서 잘 감시해라. 어디 가서 또 무슨 무모한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흥, 네가 했던 말 중에 제일 동의할 만 하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그럴 거거든."
"너희 말이야, 본인을 앞에 두고 그렇게 말하는 건 무례한 짓이야. 다들 예절을 어디에서 배운 거야?"
이연화가 짐짓 혀를 차며 타박했으나, 적비성과 방다병 둘 중 누구도 타격을 받지 않았다. 휙 사라지는 적비성을 바라보며, 방다병은 그토록 이연화의 일거수일투족에 열을 내던 남자가 대체 무슨 일로 백천원을 떠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보름 뒤, 이연화와 방다병은 아주 의외의 장소에서 적비성과 다시 마주쳤다. 백천원에서 일차적으로 걸러낸 후보들이 드디어 한 자리에 모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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