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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9 22:47
수인물
ㅅㄱㅈㅇ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런 기분이었다.
불상이 앉았던 커다란 건물이 무너져내리던 것처럼, 자신의 존재도 그처럼 허물어져버린 느낌이었다.
위무선에 대한 기나긴 집착과 증오는 종식되었지만 그와 함께 인생의 활기도 목적도 빛이 바래어버린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견딜 수 없이 허전하고 쓸쓸하며, 무서운 기분은 수도 없어 겪어왔지만 이번은 달랐다.
위무선은 유랑을 떠났고, 이따금씩 운심부지처로 돌아오는 모양이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운몽의 땅끝 한 자락을 밟았다는 소리도 들은 적 없었다.
바람이 스쳐가는 식으로 그가 남망기와 함께 있었다던가, 남가 소년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싸하게 시려왔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나를 만나러 연화오로 와 달라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저와는 다르게 홀가분해 보이던 위무선에게 족쇄를 걸고 싶지 않았다.
운심부지처는 무너진 것을 재건한 후 그대로 수십년, 수백년을 묵어갈 듯 변함이 없었다. 무력이 건물을 무너뜨리고 숲을 태울 수는 있어도 가풍을 바꿀 수는 없다. 고소 남씨는 다시금 고고한 기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남희신에게 면대를 청했지만 도로 폐관에 들어갔다고 하여 거절당했다. 공무가 있다면 남계인이 대신 만나주겠다 했지만 강징은 그냥 돌아섰다.
위무선이 다시 돌아오기도 전에, 남희신이 개인적으로 편의를 봐주겠다는 일이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말하긴 뭣했다. 어차피 마지못해 받아들였던 일이라 아쉽지도 않았고 그저 쓴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는 정말로 회복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지기에게 배신당한 일이 그렇게 충격이었을까. 하긴, 나는 지기란 게 없는 사람이니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산문을 빠져나오자 강해지는 햇살이 외려 사무치는 외로움을 불러일으켰다.
강징은 천천히 숲에 묻힌 선부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저만한 크기의 가문의 주인인데, 쉽게도 자리를 비우는군.
위무선은 근래 왔다가 또 떠난 모양이었다.
요즘은 금릉도 말을 잘 듣지 않게 되었다. 분명 외부 세력에 시달리며 힘들텐데 괜찮다고만 하고. 그러는 와중에도 남가의 공자들과 몰려다닐 시간은 있는 건지.
섭회상은 끝까지 모든 일을 부인했지만 이후로 180도 바뀌어버린 그의 태도가 진실을 말해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다들 제멋대로 구는구나.
강징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종주직까지 팽개쳐버리는 남희신도, 위무선도, 위무선을 따라 훌쩍 나가버린다고 하는 남망기도. 이제 약관 언저리가 된 조카도.
그런데, 그에 비해 나는.
강징은 찬찬히 과거를 곱씹어보았다. 어려서부터 지워진 무거운 자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강압감만 느껴왔을 뿐. 정말로 원해서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끔찍하게 무겁고 괴로운 길을 걸어 오면서도 어떻게 해낼까만 고민했지, 도망을 칠 궁리를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의 존재보다도 의무가 우선인, 강징은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런데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느껴본 적 없던 이런 감정은 불쑥 어디서부터 솟아난 것인지.
습관적으로 어검을 하여 공중을 날아가면서 점점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 번 터져버린 불만은 주체할 수 없이 가득 넘쳐 흘러 왁 소리라도 치고 싶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무엇을 원한다는 걸까.
당장 내일부터라도 손에 쥐고 있던 일들을 다 놓아버려도 된다면. 더이상 금릉을 위하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무엇을 하면 될까.
알 수가 없었다.
***
어느 날 일찌기 일과를 끝낸 강징은 뒷산에 올랐다.
갑자기 왜 뒷산인가. 어쩌면 연화오의 정면으로 펼쳐지는 호수와 사람들의 모습이 죄다 무거운 제 인생의 총체 같아서. 그것을 피하고 싶은 심리였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강징은 하염없이 걸어올라갔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졸졸 흐르는 개울이 나타나고, 이윽고 작은 폭포 아래 고인 물에 도착했다. 연화오의 소년 소녀들은 대부분 호수에서 헤엄을 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좁고 물이 찬 계곡에는 잘 오지 않았다. 가끔 -주로 위무선이-사고를 쳐서 집에 갇혔을 때에만. 함께 몰래 빠져나와서 이 곳을 찾곤 했다.
그것도 상당히 어릴 적의 얘기이니 도대체 얼마나 오랜만에 온 건지 몰랐다.
아무리 전과 같이 되돌리려 애를 썼어도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연화오와 다르게. 한줄기로 끈기있게 떨어져내려 깊은 물을 형성하는 폭포수와 녹색의 못은 옛날 그대로였다.
무심하게 산을 올랐다가 뜻밖에 그리운 풍경을 만난 강징은 그만 가슴이 지끈했다.
그 후 강징은 시간이 날 때마다 폭포수로 와서 짙게 드리워진 나무 그늘 아래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연화오가 파괴된 직후 강징은 족히 7년 동안 자신의 생일 축연을 열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제가 태어난 날을 축하해줄 혈육이 하나도 없음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몽 강씨가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자 이것도 어찌보면 공적인 행사였기 때문에 해마다 의무처럼 거치게 되었다.
이번에도 막강한 가문의 이름에 걸맞게 닷새나 이어지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감독하던 강징은 넌더리가 났다.
혹시나, 위무선이 오지 않을까. 기적에 가까운 희망을 품어 보았지만. 막 폐관에서 나온 남희신에 남망기까지 참석했어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유랑중이라 강징의 생일인 것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걸 누구에게 확인할 것인가.
갑자기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오래도록 이어지는 연회를 개최한 것이 후회되었고, 혼자가 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나흘째가 되자 강징은 남망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초에 그가 이런 잔치에 참석했다는 사실부터 이상하긴 했지만, 아마 아슬아슬해보이는 제 형이 걱정되어 따라온 거라 짐작했다.
과연 남망기는 떠들썩한 연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내내 서리 같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래도 사흘 동안은 꿋꿋하게 남희신의 곁을 지키더니, 갑작스레 사라져버리자 어쩌면 위무선과 관계된 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슬며시 다가가 함광군은 운심부지처로 돌아간 겁니까, 하고 묻자 남희신은 조금 난감해 하는 기색이었다.
-아닙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조금 피곤해진 모양이지요. 근처에서 산책이라도 하고 있을 겁니다.
조금만 피곤할까. 싱거운 답이었지만 강징은 금세 납득하고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날 밤이 되어도 연화오는 환하게 불이 켜진 채 요란했다. 금단을 지닌 사람들은 흥청망청 즐기는 것도 보통 사람의 배는 할 수 있었으니.
강징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장식처럼 앉아만 있던 제가 없어진다고 아쉬워할 사람도 찾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해가 완전히 져서 캄캄해지자 몰래 뒷문을 빠져나와 계곡으로 향했다.
달이 밝았기에 커다란 물 위로 뚫려 있는 하늘을 통해서 하얀 빛이 쏟아져내렸다.
부드러운 이끼 위에 앉아 바위에 기대어 떨어지는 물소리를 하염없이 듣고 있노라니 아우성을 치며 날뛰던 감정들이 가라앉으며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달빛이 비추는 계곡을 제외한 주변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서 반사되는 하얀 빛에 눈이 시린듯한 착각도 들었다.
이대로, 잠이 들어버린다면.
죽음이 이런 느낌일까. 이렇게 평화로울까.
묵은 고통이 그리 쉽게 삭아질 리 없건만, 며칠이나 이어진 야단법석에서 풀려나자 일시적으로 무감각이 찾아온 듯 고요해졌다.
그런 때에 바스락거리는 기척이 들렸으니, 강징은 과하게 놀라며 경계를 세웠다.
이다지도 어둡고 축축한 산중에서 불쑥 튀어나온 존재는 십중팔구 위협적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둠 속을 쏘아보던 강징의 눈은 뜻밖에 휘어지며 부드러워졌다.
물가를 빙 두른 반대편에, 순백의 늑대 한 마리가 반쯤 어둠에 묻힌 채 이 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살그머니 목이라도 축이려고 왔던 듯, 늑대는 강징을 보고도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수줍어하며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강징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늑대를 구슬리듯 말을 걸었다.
-멋있구나. 어디서 온 거니?
부드러운 강징의 목소리를 들은 늑대는 더욱 겸연쩍어진 듯, 고개를 아래로 꼬면서 눈을 피했다.
강징은 더럭 마음이 끌렸다.
-물을 마시러 온 거냐? 이리 와 봐. 해치지 않을게.
늑대는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머리를 돌린 채 우두커니 서 있다가, 흘긋 강징을 보고는 또 시선을 돌렸다.
-멍멍아, 이리 와. 이리 와 봐. 착하지.
늑대가 그럴수록 강징은 더욱 안달이 났다.
달빛과 물과 어둠뿐인 세상은 침침한 정적에 잠겨서 별세계 같았다. 그래서인지 마치 어린 시절 철없는 소년으로 돌아가버린 기분으로, 제가 좋아하던 개를 얼러대듯 늑대를 얼르며 강징은 울 것처럼 생소하며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늑대가 돌아가버릴 듯 뒷걸음질을 쳤으나 강징은 끈질기게 불렀다.
부르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거의 애를 태우는 느낌으로.
-제발, 이리 와 줄래...?
마침내 늑대가 타박타박 땅을 딛으며 다가오자 강징은 너무 좋아 가까워지는 늑대의 머리를 두 팔로 폭 안았다.
눈처럼 부드러워 보이던 털은 의외로 빳빳했다. 하지만 북실북실하고 따스했다. 이 또한 강징이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리고 다시 찾지 못한, 옛 추억 중 하나였다.
강징은 저도 모르게 힘껏 끌어안고는 안타까운 그리움에 젖어 뺨을 비벼대었다.
남망기는 심하게 당황스러웠다.
수진계에는 수인이 흔치 않았고, 수선인은 기를 운용하여 본색을 완전히 감출 수 있었으므로 대부분은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고소 남씨의 직계 중 유일한 수인으로 발현한 그도 마찬가지였다.
수인은 양인의 열락기나 음인의 희락기와 마찬가지로, 주기적인 발현을 한다.
그것이 하필 강징의 탄신 축연과 겹쳤지만 그는 억지로 왔던 것이다.
전날까지는 약으로 어찌 누를 수 있었지만 금일 새벽이 되자 그도 불가능해졌다. 하여 남망기는 연화오를 살짝 빠져나와서 온종일 숲 그림자 속을 숨어다녔다.
포식 동물로 화해도 절대 육식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내 작은 굴 속에 숨어 있던 남망기는 밤이 으슥해지자 물을 마시러 나오며 그 곳에 강징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아무튼 강징이 있었다.
당당하게 걸치고 있던 화려한 자색 장포를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늘어뜨린 채, 마치 소박맞은 여인이라도 되는 양 기운이 빠진 그런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는.
고소 남씨의 의복처럼 새하얗긴 하지만 위압적인 덩치의 늑대 모습에, 강징이 자전부터 휘두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감각을 의심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에 다시 한 번 놀란 남망기는 이내 갈등에 휩싸였다.
강징은 늑대의 정체는 몰라도, 개를 잘 알았기에 그가 경계심도 적의도 없다는 걸 예리하게 읽어내었다.
강아지라도 불러대는 듯한 목소리에 남망기는 한심한 느낌이 들면서도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발짝씩, 저에게로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며 남망기는 흥분하기 쉬운 짐승의 심장이 펄떡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그 손에 닿고, 그 팔에 안기고, 강징의 얼굴이 자신의 털가죽에 비벼대자 남망기는 다시금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후에 일어난 일은 다음날 수인이 풀렸을 때나 되어서야 제대로 돌아볼 수 있었다.
태어나서 자신의 늑대 모습을 남에게 보인 적 없던 함광군은, 심지어 개 취급으로 쓰다듬어지고 턱을 간지럽혀지며 마구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민망한 기분도 소리를 내어 웃던 강징의 얼굴만 떠올리면 다 사라져버렸다.
남몰래 연정을 키워오던 시절에는 강징의 사람을 밀어내는 성질과 차가운 조소, 숨기지도 않고 내비치는 적의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 냉혹한 얼굴이 부드럽게 웃는 것을 보고, 그 팔이 폭신 안아주는 따뜻함을 느껴버리고 만 다음에는.
두번 다시 전과 같이 절제된 평온함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ㅅㄱㅈㅇ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런 기분이었다.
불상이 앉았던 커다란 건물이 무너져내리던 것처럼, 자신의 존재도 그처럼 허물어져버린 느낌이었다.
위무선에 대한 기나긴 집착과 증오는 종식되었지만 그와 함께 인생의 활기도 목적도 빛이 바래어버린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견딜 수 없이 허전하고 쓸쓸하며, 무서운 기분은 수도 없어 겪어왔지만 이번은 달랐다.
위무선은 유랑을 떠났고, 이따금씩 운심부지처로 돌아오는 모양이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운몽의 땅끝 한 자락을 밟았다는 소리도 들은 적 없었다.
바람이 스쳐가는 식으로 그가 남망기와 함께 있었다던가, 남가 소년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싸하게 시려왔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나를 만나러 연화오로 와 달라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저와는 다르게 홀가분해 보이던 위무선에게 족쇄를 걸고 싶지 않았다.
운심부지처는 무너진 것을 재건한 후 그대로 수십년, 수백년을 묵어갈 듯 변함이 없었다. 무력이 건물을 무너뜨리고 숲을 태울 수는 있어도 가풍을 바꿀 수는 없다. 고소 남씨는 다시금 고고한 기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남희신에게 면대를 청했지만 도로 폐관에 들어갔다고 하여 거절당했다. 공무가 있다면 남계인이 대신 만나주겠다 했지만 강징은 그냥 돌아섰다.
위무선이 다시 돌아오기도 전에, 남희신이 개인적으로 편의를 봐주겠다는 일이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말하긴 뭣했다. 어차피 마지못해 받아들였던 일이라 아쉽지도 않았고 그저 쓴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는 정말로 회복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지기에게 배신당한 일이 그렇게 충격이었을까. 하긴, 나는 지기란 게 없는 사람이니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산문을 빠져나오자 강해지는 햇살이 외려 사무치는 외로움을 불러일으켰다.
강징은 천천히 숲에 묻힌 선부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저만한 크기의 가문의 주인인데, 쉽게도 자리를 비우는군.
위무선은 근래 왔다가 또 떠난 모양이었다.
요즘은 금릉도 말을 잘 듣지 않게 되었다. 분명 외부 세력에 시달리며 힘들텐데 괜찮다고만 하고. 그러는 와중에도 남가의 공자들과 몰려다닐 시간은 있는 건지.
섭회상은 끝까지 모든 일을 부인했지만 이후로 180도 바뀌어버린 그의 태도가 진실을 말해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다들 제멋대로 구는구나.
강징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종주직까지 팽개쳐버리는 남희신도, 위무선도, 위무선을 따라 훌쩍 나가버린다고 하는 남망기도. 이제 약관 언저리가 된 조카도.
그런데, 그에 비해 나는.
강징은 찬찬히 과거를 곱씹어보았다. 어려서부터 지워진 무거운 자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강압감만 느껴왔을 뿐. 정말로 원해서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끔찍하게 무겁고 괴로운 길을 걸어 오면서도 어떻게 해낼까만 고민했지, 도망을 칠 궁리를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의 존재보다도 의무가 우선인, 강징은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런데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느껴본 적 없던 이런 감정은 불쑥 어디서부터 솟아난 것인지.
습관적으로 어검을 하여 공중을 날아가면서 점점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 번 터져버린 불만은 주체할 수 없이 가득 넘쳐 흘러 왁 소리라도 치고 싶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무엇을 원한다는 걸까.
당장 내일부터라도 손에 쥐고 있던 일들을 다 놓아버려도 된다면. 더이상 금릉을 위하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무엇을 하면 될까.
알 수가 없었다.
***
어느 날 일찌기 일과를 끝낸 강징은 뒷산에 올랐다.
갑자기 왜 뒷산인가. 어쩌면 연화오의 정면으로 펼쳐지는 호수와 사람들의 모습이 죄다 무거운 제 인생의 총체 같아서. 그것을 피하고 싶은 심리였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강징은 하염없이 걸어올라갔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졸졸 흐르는 개울이 나타나고, 이윽고 작은 폭포 아래 고인 물에 도착했다. 연화오의 소년 소녀들은 대부분 호수에서 헤엄을 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좁고 물이 찬 계곡에는 잘 오지 않았다. 가끔 -주로 위무선이-사고를 쳐서 집에 갇혔을 때에만. 함께 몰래 빠져나와서 이 곳을 찾곤 했다.
그것도 상당히 어릴 적의 얘기이니 도대체 얼마나 오랜만에 온 건지 몰랐다.
아무리 전과 같이 되돌리려 애를 썼어도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연화오와 다르게. 한줄기로 끈기있게 떨어져내려 깊은 물을 형성하는 폭포수와 녹색의 못은 옛날 그대로였다.
무심하게 산을 올랐다가 뜻밖에 그리운 풍경을 만난 강징은 그만 가슴이 지끈했다.
그 후 강징은 시간이 날 때마다 폭포수로 와서 짙게 드리워진 나무 그늘 아래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연화오가 파괴된 직후 강징은 족히 7년 동안 자신의 생일 축연을 열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제가 태어난 날을 축하해줄 혈육이 하나도 없음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몽 강씨가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자 이것도 어찌보면 공적인 행사였기 때문에 해마다 의무처럼 거치게 되었다.
이번에도 막강한 가문의 이름에 걸맞게 닷새나 이어지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감독하던 강징은 넌더리가 났다.
혹시나, 위무선이 오지 않을까. 기적에 가까운 희망을 품어 보았지만. 막 폐관에서 나온 남희신에 남망기까지 참석했어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유랑중이라 강징의 생일인 것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걸 누구에게 확인할 것인가.
갑자기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오래도록 이어지는 연회를 개최한 것이 후회되었고, 혼자가 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나흘째가 되자 강징은 남망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초에 그가 이런 잔치에 참석했다는 사실부터 이상하긴 했지만, 아마 아슬아슬해보이는 제 형이 걱정되어 따라온 거라 짐작했다.
과연 남망기는 떠들썩한 연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내내 서리 같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래도 사흘 동안은 꿋꿋하게 남희신의 곁을 지키더니, 갑작스레 사라져버리자 어쩌면 위무선과 관계된 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슬며시 다가가 함광군은 운심부지처로 돌아간 겁니까, 하고 묻자 남희신은 조금 난감해 하는 기색이었다.
-아닙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조금 피곤해진 모양이지요. 근처에서 산책이라도 하고 있을 겁니다.
조금만 피곤할까. 싱거운 답이었지만 강징은 금세 납득하고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날 밤이 되어도 연화오는 환하게 불이 켜진 채 요란했다. 금단을 지닌 사람들은 흥청망청 즐기는 것도 보통 사람의 배는 할 수 있었으니.
강징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장식처럼 앉아만 있던 제가 없어진다고 아쉬워할 사람도 찾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해가 완전히 져서 캄캄해지자 몰래 뒷문을 빠져나와 계곡으로 향했다.
달이 밝았기에 커다란 물 위로 뚫려 있는 하늘을 통해서 하얀 빛이 쏟아져내렸다.
부드러운 이끼 위에 앉아 바위에 기대어 떨어지는 물소리를 하염없이 듣고 있노라니 아우성을 치며 날뛰던 감정들이 가라앉으며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달빛이 비추는 계곡을 제외한 주변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서 반사되는 하얀 빛에 눈이 시린듯한 착각도 들었다.
이대로, 잠이 들어버린다면.
죽음이 이런 느낌일까. 이렇게 평화로울까.
묵은 고통이 그리 쉽게 삭아질 리 없건만, 며칠이나 이어진 야단법석에서 풀려나자 일시적으로 무감각이 찾아온 듯 고요해졌다.
그런 때에 바스락거리는 기척이 들렸으니, 강징은 과하게 놀라며 경계를 세웠다.
이다지도 어둡고 축축한 산중에서 불쑥 튀어나온 존재는 십중팔구 위협적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둠 속을 쏘아보던 강징의 눈은 뜻밖에 휘어지며 부드러워졌다.
물가를 빙 두른 반대편에, 순백의 늑대 한 마리가 반쯤 어둠에 묻힌 채 이 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살그머니 목이라도 축이려고 왔던 듯, 늑대는 강징을 보고도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수줍어하며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강징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늑대를 구슬리듯 말을 걸었다.
-멋있구나. 어디서 온 거니?
부드러운 강징의 목소리를 들은 늑대는 더욱 겸연쩍어진 듯, 고개를 아래로 꼬면서 눈을 피했다.
강징은 더럭 마음이 끌렸다.
-물을 마시러 온 거냐? 이리 와 봐. 해치지 않을게.
늑대는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머리를 돌린 채 우두커니 서 있다가, 흘긋 강징을 보고는 또 시선을 돌렸다.
-멍멍아, 이리 와. 이리 와 봐. 착하지.
늑대가 그럴수록 강징은 더욱 안달이 났다.
달빛과 물과 어둠뿐인 세상은 침침한 정적에 잠겨서 별세계 같았다. 그래서인지 마치 어린 시절 철없는 소년으로 돌아가버린 기분으로, 제가 좋아하던 개를 얼러대듯 늑대를 얼르며 강징은 울 것처럼 생소하며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늑대가 돌아가버릴 듯 뒷걸음질을 쳤으나 강징은 끈질기게 불렀다.
부르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거의 애를 태우는 느낌으로.
-제발, 이리 와 줄래...?
마침내 늑대가 타박타박 땅을 딛으며 다가오자 강징은 너무 좋아 가까워지는 늑대의 머리를 두 팔로 폭 안았다.
눈처럼 부드러워 보이던 털은 의외로 빳빳했다. 하지만 북실북실하고 따스했다. 이 또한 강징이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리고 다시 찾지 못한, 옛 추억 중 하나였다.
강징은 저도 모르게 힘껏 끌어안고는 안타까운 그리움에 젖어 뺨을 비벼대었다.
남망기는 심하게 당황스러웠다.
수진계에는 수인이 흔치 않았고, 수선인은 기를 운용하여 본색을 완전히 감출 수 있었으므로 대부분은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고소 남씨의 직계 중 유일한 수인으로 발현한 그도 마찬가지였다.
수인은 양인의 열락기나 음인의 희락기와 마찬가지로, 주기적인 발현을 한다.
그것이 하필 강징의 탄신 축연과 겹쳤지만 그는 억지로 왔던 것이다.
전날까지는 약으로 어찌 누를 수 있었지만 금일 새벽이 되자 그도 불가능해졌다. 하여 남망기는 연화오를 살짝 빠져나와서 온종일 숲 그림자 속을 숨어다녔다.
포식 동물로 화해도 절대 육식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내 작은 굴 속에 숨어 있던 남망기는 밤이 으슥해지자 물을 마시러 나오며 그 곳에 강징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아무튼 강징이 있었다.
당당하게 걸치고 있던 화려한 자색 장포를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늘어뜨린 채, 마치 소박맞은 여인이라도 되는 양 기운이 빠진 그런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는.
고소 남씨의 의복처럼 새하얗긴 하지만 위압적인 덩치의 늑대 모습에, 강징이 자전부터 휘두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감각을 의심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에 다시 한 번 놀란 남망기는 이내 갈등에 휩싸였다.
강징은 늑대의 정체는 몰라도, 개를 잘 알았기에 그가 경계심도 적의도 없다는 걸 예리하게 읽어내었다.
강아지라도 불러대는 듯한 목소리에 남망기는 한심한 느낌이 들면서도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발짝씩, 저에게로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며 남망기는 흥분하기 쉬운 짐승의 심장이 펄떡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그 손에 닿고, 그 팔에 안기고, 강징의 얼굴이 자신의 털가죽에 비벼대자 남망기는 다시금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후에 일어난 일은 다음날 수인이 풀렸을 때나 되어서야 제대로 돌아볼 수 있었다.
태어나서 자신의 늑대 모습을 남에게 보인 적 없던 함광군은, 심지어 개 취급으로 쓰다듬어지고 턱을 간지럽혀지며 마구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민망한 기분도 소리를 내어 웃던 강징의 얼굴만 떠올리면 다 사라져버렸다.
남몰래 연정을 키워오던 시절에는 강징의 사람을 밀어내는 성질과 차가운 조소, 숨기지도 않고 내비치는 적의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 냉혹한 얼굴이 부드럽게 웃는 것을 보고, 그 팔이 폭신 안아주는 따뜻함을 느껴버리고 만 다음에는.
두번 다시 전과 같이 절제된 평온함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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