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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7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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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음주의
수정재업

1.
아이는 3년간 정 붙일 데 없이 컸다고 한다. 열병 탓에 기억을 잃었다던 아이는 그러나 나를 보곤 이전과 같이 다리에 매달려 왔다. 3년 전보다야 놀랄 만치 자랐으나 여즉 작다. 이릉에서 너와 마주친 순간이 떠오른다. 아이는 여전히 원이라는 이름을 쓴다. 愿. 남들은 그것이 성실하라는 바람이 든 것이리라 생각했다. 허나 내가 바라는 것이 있어,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할 것이라 그리 지었다. 나를 올려다보며 웃는 아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2.
오늘은 중원절이다. 네가 왔을까. 문령을 하였으나 답은 없었다. 마을에는 꽤 크게 상이 차려져 있었다. 혹여라도 네가 배를 곯지는 않겠지, 안심했다. 아원을 데리고 거리로 나갔다. 아이는 지전을 태웠고 강에 등을 띄웠다.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등을 띄우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나는 지전을 태우지 못했다. 어쩌면, 너는, 어쩌면... 아이가 네 몫의 지전을 태웠으니 그것으로, 부디.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 아이를 잃은 줄 알고 걱정을 했다. 둘러보는 차에 옷자락을 잡아당겨 내려다보니 귀신 가면을 집은 작은 몸이 보였다. 내가 내려다보자 가면을 벗고 배시시 웃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어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눈에 띄었을 것이나 달리 할 도리가 없었다. 사무치게 그린다.
아이는 종이로 된 나비 장난감이니 나무로 된 검 같은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어를 보느냐고 물었을 때 아이는 그리움을 본다 말했다. 아이의 손은 여전히 작아 예전이 겹쳤다. 한참을 장난감을 구경하고 아이와 놀아주던 이를 생각했다.
함광군, 제 어린 시절 기억 속에는 이것들이 있을까요? 아이가 물었다. 그리운 기분이 듭니다. 언젠가는 누군가 이걸 들고 저와 놀아주었던 것 같아요.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다만 아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3.
간밤 새 눈이 내렸다. 온통 흰 풍경이야 운심부지처에서는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인데도 아원은 아침부터 함빡 웃었다. 평소와 달리 아침의 절반도 뜨지 않고서 일어나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였다. 조용히 바라보자 아이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수저를 놀렸다. 약탕까지 마셔 그릇을 비운 뒤에야 아이는 인사를 하고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뛰지만 않고서 재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어제와 판이해 형장께서 조금 웃으셨다.
짬을 내 눈 구경을 하는 아원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눈을 쥐어 뭉쳤다가, 굴렸다가, 눈밭을 굴렀다. 아마 지켜보는 것을 알지 못해 한 일일 터이다. 입김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고 흰 뺨이 새빨갛게 얼었는데도 아이는 하냥 웃기에 여념이 없었다. 영차영차 눈덩이를 굴리더니 결국 제 몸만 한 눈덩이를 만들어내고는 흡족해했다. 다른 눈덩이를 만들려는 찰나에 아원을 멈춰 세웠다. 빨간 코를 하고서 코를 훌쩍이던 아원은 땡그란 눈을 하고 멈추었다. 아이의 얼굴을 한 번 쓸어주고 빨갛게 언 뺨이며 귀를 두 손으로 쥐었다. 아이는 헤, 웃더니 뺨을 내 손에 비볐다. 날이 차다, 이만 들어가자. 하는 말에는 아쉬워하면서도 아원은 또 순순히 나를 따라 들어왔다.

4.
아원이 벌을 받았다. 물구나무를 선 채로 가규를 이백 번 베낀 아이는 수저를 들지 못하였다. 벌을 담당한 수사에게 물으니 방계의 아이와 주먹다짐을 한 탓이라 하였다. 방계의 아이는 눈이며 입가가 온통 시퍼렇게 물들었는데 아원의 얼굴은 깨끗했다. 나는 꼭 저렇게 분에 찬 흰 얼굴을 알았는데.
아이가 다툰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 바라보고 있으니 아원은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함광군의 오점이라고 했다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뿌리도 모르는 아이를, 오로지 함광군이 동정심에 데려다 키우는 것을 저만 모른다고 했다고. 아이는 너무 울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고, 약탕을 마시도록 했다. 아이는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함광군,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아정하게 살게요, 함광군께 누가 되지 않을게요. 나는 그저 네 그 마음이 가장 아정하다 말했다. 아이의 어깨를 짚어 주었다. 남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말거라. 그 아이보다야 네가 나를 더 잘 알 터이니. 아이는 울음을 그쳤다. 감사의 말을 하려는 아이에게 식불언이라 말했다. 아이는 배죽 웃고 수저를 들었다.

5.
아이가 크게 앓았다. 매해 아이는 네가 우리를 떠나간 계절이 오면 열병을 앓았다. 으레 있는 일이라지만, 사람의 마음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밤을 새웠다. 아이의 옆에 앉아 손을 잡아 주고 얼굴에 적신 영견을 올려 주었다. 아이의 온몸이 아이를 안아 들고 돌아왔던 그 날처럼 뜨거워 딱 그날처럼 목이 메었다. 아이가 깨어날 때면 등을 받쳐 입술 사이로 탕약을 흘려 넣어 주고 가슴을 도닥여주었다. 함광군, 송구스럽습니다, 하는 말에 나는 되었다고 답하고 그저 아이의 반듯한 이마를 두어 번 쓸어 주었다. 네가 건강한 것이 내 가장 큰 복이다, 잠든 아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이가 앓지 않기를 바랐다. 오래도록 건강히, 행복하게 자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네가 그것을 바랐을 것이므로, 그리고 이제는 내가 그것을 바라서.

6.
오늘은 아이를 데리고 토끼를 보았다. 네가 남기고 간 토끼들은 자라 번성했다. 동물이 허락되지 않은 운심부지처에서도 토끼들은 잘 자랐다. 희고 보드라운 것 사이에 아이를 내려 두니 아이가 웃었다. 하냥 해맑은 웃음이었다. 가지고 간 푸성귀를 토끼들에게 먹이고 있자니 아이가 내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먹이를 주어 보고 싶은 듯해 아이에게 채소를 쥐여 주었다. 올망졸망 모여든 토끼들 사이에서 아이는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 씹었다. 아이는 작고 하얗고 까맣던 탓으로 토끼와 별반 다르지도 않았다. 아삭아삭 푸릇한 채소를 씹는 모양새가 토끼와 퍽 다르지도 않아 웃음이 났다가 아이에게 토끼 몫을 빼앗아서는 아니 된다 일렀다. 아이는 그 흔한 투정 한 번 없이 먹던 것을 삼키고 토끼들에게 채소를 챙겨 주었다. 바구니에 든 푸성귀를 비우고 난 아이는 한참이고 작은 토끼 하나를 품에 껴안고 쓰다듬기 바빴다. 돌아가자 이르는 말에 토끼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몇 번이나 끌어안는 것을 지켜보았다. 꼭 너를 닮아 여기에 앉아 토끼를 안은 채 너를 데리고 운몽으로 갈까, 하는 이가 하나 있었다는 말을 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돌아가는 길에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가 손을 꼼지락거리기에 바라보니 토끼 밥을 제가 챙겨 주어도 되겠느냐고 물어왔다. 가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네 뜻대로 하여라, 일렀다.

7.
아이가 내게 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손은 쉬이 물집이 잡혔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손을 섬세히 모으고선 아이는 곧잘 집중했다. 아플 법도 한데 입술을 꼭 깨물고 열심인 모습이 기꺼웠다. 아이는 습득력이 빨랐다. 음을 이해하는 능력도 뛰어나 곧잘 제대로 된 음계를 짚어냈다. 누구이건 간에 이런 제자에게는 아는 것을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싶으리라. 이는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어서 아이에게는 내가 아는 모든 곡을 가르칠 생각이다. …한 곡만을 빼고.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만을 위한 곡이기에….

8.
아이가 검을 잡았다. 비록 실제 쇠붙이로 된 검은 아니었으나 나무로 된 검도 검이라 아이는 긴장을 했다. 긴장한 얼굴이 호둣속처럼 졸아들어 어찌할 도리를 알 수 없었다. 허나 아이는 한 번 검을 뻗을 때마다 점차 웃었다. 제법 오랜 시간 검을 휘두른 아이는 목검을 단정히 정리하고 내게로 다가왔다. 그에 비해 딛는 걸음걸음이 떨리는 것이 눈에 보여 조금쯤 웃었다.

9.
아이는 문령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는 때때로 여러 뜻을 지닌 한 음을 해석하는 데 애를 먹었다. 비단 문령에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나 어찌하여 기쁨이 있다有喜 는 말이 회임하였다는 뜻이 되는지를 물었다. 어떤 아이가 가족에게 찾아오는 일이 그만치 경사스럽고 기쁜 일이라 그럴 것이라 답했다. 아이는 표정이 흐려졌다. 금 위로 힘없이 떨어진 손에 우렁우렁 우조의 소리가 흘렀다. 함광군, 제 가족에게도 저는 기쁨이었을까요? 더없는 기쁨이었으리라고 답했다. 너의 부모, 고모, 숙부, 그리고 누구보다도 한 짓궂은 형에게 네가 더없는 기쁨이었음을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사람이 나이므로. 하고픈 말은 삼키고 다만 금을 다루는 데에 있어 방금과 같은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 덧붙였다. 금은 예민한 악기이다. 다루는 자의 마음이 다른 데 있어서야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없겠지. 천하의 보배라도 다루는 이의 마음이 다른 데에 있는데 어찌하여 옳은 소리를 낼 수 있겠느냐?

10.
아이의 검술 실력이 남가의 동년배 중에 제일이라는 말을 들었다. 뿌듯했다. 그 성취가 나의 것이 아님에도 기껍고 그저 즐거웠다. 출신도 알 수 없는 아이라 투덜거리는 혈족에게는 친히 아이가 나의 아들임을 명심하시라 일러둔 지 오래였다. 이제 사람들은 역시나 그 함광군의 아들다운 성취라 목소리를 높였다. 내게는 기꺼웠으나 그것이 너의 부담이 될까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너를 칭찬하는 말에 웃고야 마는 것은 까닭은 자명했다. 나의 아이. 네가 살리고자 했고 내가 살린, 어쩌면, 어쩌면 우리의………

11.
우리는 무엇이었을까?

12.
이제는 알 수 없지.

13.
오늘은 아이가 불경을 읽었다. 장서각에 들어 일을 보는 동안 내 곁에 앉아 한참 아정집을 필사하다 골라든 것이 불경이었다. 아이는 짧은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글자를 짚어가며 불경을 읽어내려갔다. 익숙지 않은 글자들에 작게 소리를 내어 읽는 탓에 작은 입이 벌어졌다 닫혔다. 무, 고, 집, 멸, 도, 무, 지, 역, 무, 득…. 고, 집, 멸, 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아이는 몇 번이고 그 문장을 읽었다. 무, 고, 집, 멸, 도, 무, 지, 역, 무, 득… 그렇게 한참 아이가 외는 구절을 듣고 또 들었다. 내가 읽을 때는 그저 익숙한 것이었으나 아이의 입으로 듣는 구절은 내가 듣던 것과 달랐다.
석반을 마친 뒤에 아이가 물었다. 지혜도 얻음도 없다면, 고통도 집착도 성함도 쇠함도 없다면, 어째서 이리 열심히 배워야 하는가요, 함광군? 아원의 배움이 짧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그것을 깨닫기 위해 배운다 일렀다. 다른 모든 것을 가르친대도 나는 아원에게 이것만은 가르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나조차 깨닫지 못한 것을 어찌 가르칠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너를 놓지 못하는데…. 지금조차도.

14.
아이가 동무를 사귀었다. 아원보다 세 살이 어린 방계의 아이로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어 엄숙하기로 이름 높은 숙부의 마음마저 사로잡았다고 들었다. 아원은 매일 그 아이의 이야기를 하기에 바쁘다. 함광군, 오늘은 그 애와 불경을 읽었습니다, 함광군, 오늘은 그 애가 채의진에 간 일을 자랑했어요. 함광군, 오늘은... 아원이 이야기하는 그 아이는 당당하고 재기발랄해 자주 누군가가 떠오르도록 만들었다.
아이가 처음 동무를 사귀었다고 한 날의 얼굴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눈을 한껏 휘고, 양 뺨이 볼록 튀어나오도록 웃는 웃음. 그래, 마음이 맞는 동무를 사귄다는 것은 그렇게나 기쁜 일이다. 한참 아이의 이야기를 하던 아원이 얼마 남지 않은 축제에 아이와 함께 가고 싶다 이르기에 그렇게 하라 하였다. 조금쯤 마음이 허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은자가 든 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아원은 감사합니다, 함광군. 하고 웃었다. 아원은 다정하고 상냥하며 아정한 아이로 자라나고 있다. 동무에게 온 마음을 기울일 줄 아는, 너와 똑 닮은.

15.
형장께서 아이의 성품을 칭찬하셨다. 나를 칭찬하신 일보다 더 크게 기꺼웠다.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없어도, 숙부님께서도 아이를 크게 아끼고 계신다. 아이는 모난 구석 없이 단단하게 자랐다. 마치 연꼿 씨앗처럼 둥글고 단단하고 향기롭다. 어쩌면 그날의 우리도 그러할 수 있었을까? 나는 너를 아껴 너를 걱정한다 말하고, 너는 나와 함께 방법을 찾아 나가고.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나의 부덕으로 인함이다. 아이를 기르는 일은 나의 공보다는 과를 들추어 비춰보는 일에 다름없다.

16.
아이에게 자를 주었다. 思追. 思君不可追. 임을 그리워하나 좇을 수 없어서, 언제나 앞서서 갔으면서 끝까지, 따라가지조차 못하게, 하나를 남기고 가버린 이 하나가 사무치는 날들이어서. 아이는 아정하게 웃었다. 더없이 아정하게.

망기무선 망선 진정령
2023.08.27 07:2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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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원을 사랑하고 아끼는 망기 눈물난다 ㅠㅠㅠㅠ
[Code: 0508]
2023.08.27 23:46
ㅇㅇ
모바일
아원아아༼;´༎ຶ ۝༎ຶ`༽함광쥰༼;´༎ຶ ۝༎ຶ`༽
[Code: 9831]
2023.09.04 08: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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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원아 ㅠㅠㅠㅠ 함광군 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17f9]
2023.09.30 13: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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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함광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원작같고 절절해서 눈물날것같음...
[Code: bddc]
2024.01.19 01: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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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광군 사추 내룬물버튼들 ㅜㅜ
너무 좋은데 슬프다 ㅜㅜ
다들 함광군 서사가 없다고 하지만 상상할수있는 서사가 오만개라서 너무 좋은데
[Code: c4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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