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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4 17:21
1 / 2 / 3
음인씹
희신강징+명결강징 약무선망기
아침부터 강징은 무척 들떠보였음. 그간 오고가긴 했으나 사흘을 운몽에서 지냈다면 나흘은 고소에서 지내는 식이었으니, 그의 손길이 조금 빠져있었던 운몽에 정말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이 난 것 같았음. 희신도 덩달아 가슴이 뜀. 이곳에서 전부를 다시 시작하는 거라고 여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얻게 된 사람이라 상처를 주었지만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뿐임. 강징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 제가 모든 걸 다 해주고 그를 보호할거라고 다짐함. 고소에서 다시 강징을 요구하긴 했으나 전부 거절했고 강종주는 이제 자신만의 사람으로 살아갈거라고 말함. 과거의 위무선은 망기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얼마간은 그가 가진 궤도술법까지 사용해서 망기를 지켜주었음. 무선이 몰래 망기를 건드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손이 닿는 순간 일정시간 흉시가 되게 한다던지 저주를 걸어놔서 몇번 데이고 나니 다들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거지. 거기다 망기 자체도 강하고. 자기도 그래야 했던건데 그땐 몰랐다고 자책함
먼저 일어난 희신이 씻을 물 가져다가 얼굴 닦아줌. 수사들에게 물어봐서 강징이 가장 좋아하던 옷으로 가져와서 입혀주고 머리도 해줬겠지. 고분고분 받는 강징의 얼굴도 나쁘지 않아보였음.
강징은 지옥같은 곳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아직 완전히 나아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던 거임. 더이상 장로들의 교육을 빙자한 희롱에 놀아나지 않아도 되었고 희신이 이제 그전과 같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약조했으니..
가장 일찍 일어난 둘이라, 강징은 먼저 연무장으로 향해 운몽의 구석구석을 살폈음. 부관이 달려와 종주께서 벌써 기침하셨냐고 인사 올리자 마자 수리할 곳을 일러주며 일 시작하는 거. 그간 묘하게 힘들어보이셨고 얼마전까지 크게 부상을 입으셔서 와병하셨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유달리 의욕적이로 표정도 좋아보였음. 종주가 일어나셨으니 부사들도 삼삼오오 모여들어 졸졸 따라다님.
강종주 성격대로 역정내고 가서 할일이나 할 것이지 뭣하러 내 뒤를 쫓느냐 하며 으르렁 거리는 거. 종주님 다시금 사나워지신 모습을 보이 수사들은 너무 기뻤음
위무선은 이미 강종주가 너무 사나워 어지간한 악귀들은 운몽 문턱도 넘지 못하니 부적같은 건 필요없다고 했겠지. 강징이 이전처럼 돌아왔으니 모두 기뻤을거임. 특히 남희신은 하루종일 강징 따라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세부적인 내용을 따로 부사와 논의하며 실제로 도움이 되어 주었음. 강징이 굵은 틀을 잡아주면 남희신이 세밀한 일정을 조절하는 식으로.
강징은 여전히 밤만되면 조용해졌고 표정 없는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아래 깔린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음. 일을 하는 동안에 오히려 피곤하지만 마음은 편해보여서 수사들도 그렇고 남희신도 깨어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장계를 올리고 서류를 들고 오거나, 종주께서 봐주셔야 한다며 수련 일정을 빠듯하게 잡았음.
남희신은 그렇게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음. 믿고 싶었고.
한달여의 시간이 지났을 때 홀로 씻고 싶다며 욕탕에 들어간 강징이 거의 두시진이 되도록 나오지 않는 거. 운몽의 수사들은 강징에게 많은 걸 묻지 않고, 말없이 더운 불을 보충해주며 그가 찬물에 잠기지 않도록 신경써줄 뿐이었음. 머리가 아플 정도로 자욱한 연꽃향이 가득한 욕실에 걸음을 들이며 남희신은 다시 습관처럼 미소지었음. 강징은 그의 보살핌을 피하지 않았고 그에게 다정하거나 애틋하진 않았지만 부군으로서의 대접은 차고 넘치게 해주었음.
긴 하루를 함께하고 같은 침상에 눕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겠지. 강징이 언젠가 그간의 일을 떨치게 된다면 그때 그에게 양껏 사랑을 말할 수도 있을테니까.
가규에 얽매여 쫓기듯 살아온 희신은 다정했으나 사랑을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이제야 늦게 고민함. 이릉노조가 제 동생을 그리 아낀것처럼 하면 되는지, 혹은 야사와 옛 이야기들에 전해 내려오는 것들처럼 연시를 쓰고 서로의 밤을 훔치면 되는 건지.. 마음은 끓었으나 아는 것이 없었음. 운몽의 늦은 저녁 오랫동안 장을 헤메다 상인에게 설득당해 사온 연꽃모양의 은령을 들고서도 그랬음. 영력은 미미하여 호신의 효과는 없을 것이나 운몽의 전통이라며 권하던 상인의 얼굴은 자신만만했음.
어쩌면 그리 쉬운 거였을지도 모르는 거임. 작은 고백을 주고 받고 정표를 서로 지니고 제 살처럼 누군가를 아끼고. 오래전 고소 수학시절 천진했던 강징의 미소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걸 자주 생각함. 어쩌면 이 어리석고 그가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을지도 모를 감정이었음.
늦게 귀가하니 강징은 올해 있을 운몽의 대소사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있었음. 종주인 그가 혼인하여 거취가 명확하지 않은지 오래 되어 이렇게 돌아왔으니 더 화려해야했고 실수가 있어서는 안되니까. 피곤해보이는 강징을 보며 차를 우려내고 명단을 추리는 것과 각 종주간의 인과를 살피는 것은 제가 하겠다는 말에 강징은 공손한 태도로 감사 인사를 올림. 자꾸 비교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이런 귀찮은 일을 도맡는 망기와 그 곁에서 응석부리는 무선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음. 위무선에게 남망기는 너무나 당연한 사람이라 그들이 서로를 돕는 것이 더 익숙했으니, 감사보다야 애정을 더 표현하는 쪽이었음. 남잠, 난 남잠 없으면 어떻게 살지? 하고 어깨에 매달리는 무선에게 망기가 달리 무슨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귓볼이 붉어지고 살짝 고개를 숙이거나 하는 애정이었음. 강징과 자신 사이엔 없는거였지.
강징의 손에 은령을 쥐여주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룸. 많이 피곤했는지 잠시 눈을 질끈 감고 미간을 누르기까지 하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음.
이 즈음 강징은 새로운 습관이 생겼음. 늦은 저녁 삼독을 깨끗한 천으로 닦고 또 닦았음. 영검은 신체와 같으니 수선자로서 아끼는 것이 당연했으나 조금 강박적일 정도였을거임. 그래도 많은 말을 묻지 않았고, 사실 물을 수도 없었고 희신은 곁에서 바라보기만 했음.
차가운 새벽 깨어난 남희신은 다시 발작하기 시작한 제 도려를 품에 안아 꾹 누르고 있었음. 잘못했다고 빌던 강징의 입을 틀어 막고, 차마 염치가 없어 울지도 못하는 희신이 몇번이고 수백번이고 속삭였음. 모두 끝났습니다, 아징. 다시는 그런 일 없을겁니다. 다신 그대를 괴롭게 하지 않을겁니다. 이곳은 운몽입니다.. 강종주의 침실이며 겹겹이 운몽의 수사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니 그대는 안전합니다. 헐떡이며 흘러내린 눈물이 머리칼을 전부 적시고 겨우 초점이 잡힌 시선으로 방을 훑고서야 희신의 말을 믿는 것 같았음. 지친채로 기절하듯 잠든 강징을 안고 그날처럼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남희신도 무너짐.
강징을 가두었던 곳에서 도망쳤다고 생각했으나 그 지옥을 여기까지 끌고 온것에 불과함.
다음날 유달리 창백한 얼굴로 연무장에 나섰던 강징은 오래지 않아 부관의 손에 부축받으며 침소로 들어왔음. 수사들 앞에서는 끝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종주 처소의 문이 열린 순간 이미 무릎이 꺾였음. 방안에 있던 남희신이 다가오자 덜덜 떨기 시작했지만 거부하진 않겠지. 거부한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어서. 지난 밤 잘 자질 못해서 이렇다고, 쉬고 싶다는 말에 자리를 펴주고 옆방으로 옮김.
남희신은 어떻게든 강징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고 그가 상처 내는 내내 자신에게 의지했던 강징을 떠올리며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겠지. 그래서 괴로워하는 걸 알면서도 제 자리를 만들고 싶어 바둥거렸던 건데 그것또한 포기하게 됨. 자신의 음인으로 시작하여 정인이 되었고 그래서 어떻게든 곁에 두고 싶었으나 이제 그가 원한다면 사라져 줄 수도 있어짐. 강징이 견딜 수만 있다면 그의 곁을 욕심내지 않을 수 있는 시점까지 옴
그날 저녁 삼독을 닦던 강징이 문득 삭월은 좋은 검입니다. 하고 중얼거리듯 말함. 오래전 적봉존과 대련하시며 삭월의 겁집으로 패하를 막지 않았습니까? 하며 잠시 웃었음. 그때 강징이 보인 미소가 너무 허탈하고 부서질 것 같아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으나 그럼에도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여 아직도 기억하십니까? 하며 웃었음.
주화입마의 위험으로 폐관에 든 의형을 못본지도 오래되었다고 여김. 회상의 이야기를 들으니 오랜 시간 폐관하며 도령을 잘 다스려 성공적이라고 들었는데. 동생의 지기가 이렇게 자라 가문의 종주가 되었으니 감회가 새로울텐데. 멍하게 허공을 보던 강징이 눈을 마주쳐 오는 바람에 오히려 희신이 놀람.
부군의 검도 닦아드릴게요. 손을 내민 강징에게 홀린것처럼 제 패검을 쥐어주고, 곱게 내리깐 눈을 바라보고만 있었음. 가만히 들여다보면 강인해보이는 얼굴이었으나 그 속에 든 것이 여리고 물러 쉽게 상처받고 무너지기도 하는 사람이었던 것을. 종주께서 아직 석반을 들지 않았다는 수사의 말에 직접 상을 보러감. 간혹 운이 좋으면 강징은 남희신이 떠먹여주는 것들을 고분고분 받아먹었으니까. 볼수록 애가 타도록 사랑스러운 사람이라 잘해주고 싶었겠지.
손수 강징이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차려 상을 내어왔으나 정작 그토록 아끼는 사람의 손에 닿지도 못했음. 침실은 짙은 피비린내로 젖어 있었고 강징은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 제 몸에서 빠져나가는 핏물을 허망히 바라보고만 있었음.
강징을 오래 보필한 부관만이 이 상황을 지켜봤겠지. 남희신은 침착하게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음. 영류로 피를 틀어막듯이 강징의 온몸을 감쌌음. 강징은 차라리 떠나게 놔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입조차 열수 없었음. 지독하게 피곤했고 남희신은 그가 떠올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어있어서.
택무군은 이때 나직한 목소리로 주변을 물리고 이 일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음. 당연한 일임. 강종주 혼자 건사하고 있는 이 운몽에서, 종주께서 자해하여 생사가 위독하다고 한다면 이 운몽은 당장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부관이 사라지고 희신은 아징, 미안합니다. 아징.. 앞으로는.. 아무일도 없을 겁니다.. 아징.. 누구도 그대를 해치지 않을겁니다.. 낮게 시작한 목소리는 덜덜 떨리기 시작해서 끝내엔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되어버렸음.
삭월은 애초에 강징의 패검이 아니었고 주인의 의지에 반하여 사람을, 그것도 주인의 정인을 해치고자 하지 않았으니 강징이 원했던 만큼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음. 정말로 죽기를 바랬는데. 강징은 매일 저녁 남희신이 생각을 바꾸어 그를 다시 욕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음. 돌아온 운몽에서도 전혀 괜찮지 않았을거임. 한때 자신의 집이었던 이곳에서도 운몽의 종주가 아닌 음인으로 자신을 생각하게 된거지. 그럴 정도로 망가졌음.
자신의 수사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욕정에 담긴 양인들의 그것처럼 보여 두려웠고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연무장에서 제게 시선이 쏟아지는 순간 이들이 얼굴을 바꾸어 저를 짓밟고 다시 그 지옥같은 순간으로 돌아가게 될 거 같았음.
전부 끝난거구나. 과거 가졌던 것들은 이제 그 자리에 없었고, 강징은 조각조각 부서져 더이상 그가 살았던 삶으로 돌아갈수조차 없었음. 커다랗고 맑은 눈이 침착한 고통만을 담고 있었겠지. 희신은 목이 쉴 정도로 강징에게 속삭였음. 미안하다고, 더이상은 정말로 이런 일이 없을거라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징.
한참을 안겨있던 강징이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멍하게 다시 입을 열었음.
그게 어째서 택무군의 잘못입니까. 제가 부군을 택했습니다.
그러니 강징이 가장 증오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음. 남희신은 고소의 사람으로 그에게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이고 제게 주어질리가 없는 행복을 함부로 탐하여 스스로 구렁텅이에 처박혔으니 강징이 죽이고 싶었던 건 그저 그 자신임.
희신은 거부하고 부정하고 싶었던 걸 끝내 인정해야 했음. 자신의 도려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거.
위무선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했겠지. 그러기 전에, 아마 마지막으로 그의 품에 안을 수 있는 사람을 다시 한번 끌어안았음.
음인씹
희신강징+명결강징 약무선망기
아침부터 강징은 무척 들떠보였음. 그간 오고가긴 했으나 사흘을 운몽에서 지냈다면 나흘은 고소에서 지내는 식이었으니, 그의 손길이 조금 빠져있었던 운몽에 정말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이 난 것 같았음. 희신도 덩달아 가슴이 뜀. 이곳에서 전부를 다시 시작하는 거라고 여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얻게 된 사람이라 상처를 주었지만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뿐임. 강징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 제가 모든 걸 다 해주고 그를 보호할거라고 다짐함. 고소에서 다시 강징을 요구하긴 했으나 전부 거절했고 강종주는 이제 자신만의 사람으로 살아갈거라고 말함. 과거의 위무선은 망기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얼마간은 그가 가진 궤도술법까지 사용해서 망기를 지켜주었음. 무선이 몰래 망기를 건드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손이 닿는 순간 일정시간 흉시가 되게 한다던지 저주를 걸어놔서 몇번 데이고 나니 다들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거지. 거기다 망기 자체도 강하고. 자기도 그래야 했던건데 그땐 몰랐다고 자책함
먼저 일어난 희신이 씻을 물 가져다가 얼굴 닦아줌. 수사들에게 물어봐서 강징이 가장 좋아하던 옷으로 가져와서 입혀주고 머리도 해줬겠지. 고분고분 받는 강징의 얼굴도 나쁘지 않아보였음.
강징은 지옥같은 곳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아직 완전히 나아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던 거임. 더이상 장로들의 교육을 빙자한 희롱에 놀아나지 않아도 되었고 희신이 이제 그전과 같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약조했으니..
가장 일찍 일어난 둘이라, 강징은 먼저 연무장으로 향해 운몽의 구석구석을 살폈음. 부관이 달려와 종주께서 벌써 기침하셨냐고 인사 올리자 마자 수리할 곳을 일러주며 일 시작하는 거. 그간 묘하게 힘들어보이셨고 얼마전까지 크게 부상을 입으셔서 와병하셨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유달리 의욕적이로 표정도 좋아보였음. 종주가 일어나셨으니 부사들도 삼삼오오 모여들어 졸졸 따라다님.
강종주 성격대로 역정내고 가서 할일이나 할 것이지 뭣하러 내 뒤를 쫓느냐 하며 으르렁 거리는 거. 종주님 다시금 사나워지신 모습을 보이 수사들은 너무 기뻤음
위무선은 이미 강종주가 너무 사나워 어지간한 악귀들은 운몽 문턱도 넘지 못하니 부적같은 건 필요없다고 했겠지. 강징이 이전처럼 돌아왔으니 모두 기뻤을거임. 특히 남희신은 하루종일 강징 따라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세부적인 내용을 따로 부사와 논의하며 실제로 도움이 되어 주었음. 강징이 굵은 틀을 잡아주면 남희신이 세밀한 일정을 조절하는 식으로.
강징은 여전히 밤만되면 조용해졌고 표정 없는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아래 깔린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음. 일을 하는 동안에 오히려 피곤하지만 마음은 편해보여서 수사들도 그렇고 남희신도 깨어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장계를 올리고 서류를 들고 오거나, 종주께서 봐주셔야 한다며 수련 일정을 빠듯하게 잡았음.
남희신은 그렇게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음. 믿고 싶었고.
한달여의 시간이 지났을 때 홀로 씻고 싶다며 욕탕에 들어간 강징이 거의 두시진이 되도록 나오지 않는 거. 운몽의 수사들은 강징에게 많은 걸 묻지 않고, 말없이 더운 불을 보충해주며 그가 찬물에 잠기지 않도록 신경써줄 뿐이었음. 머리가 아플 정도로 자욱한 연꽃향이 가득한 욕실에 걸음을 들이며 남희신은 다시 습관처럼 미소지었음. 강징은 그의 보살핌을 피하지 않았고 그에게 다정하거나 애틋하진 않았지만 부군으로서의 대접은 차고 넘치게 해주었음.
긴 하루를 함께하고 같은 침상에 눕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겠지. 강징이 언젠가 그간의 일을 떨치게 된다면 그때 그에게 양껏 사랑을 말할 수도 있을테니까.
가규에 얽매여 쫓기듯 살아온 희신은 다정했으나 사랑을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이제야 늦게 고민함. 이릉노조가 제 동생을 그리 아낀것처럼 하면 되는지, 혹은 야사와 옛 이야기들에 전해 내려오는 것들처럼 연시를 쓰고 서로의 밤을 훔치면 되는 건지.. 마음은 끓었으나 아는 것이 없었음. 운몽의 늦은 저녁 오랫동안 장을 헤메다 상인에게 설득당해 사온 연꽃모양의 은령을 들고서도 그랬음. 영력은 미미하여 호신의 효과는 없을 것이나 운몽의 전통이라며 권하던 상인의 얼굴은 자신만만했음.
어쩌면 그리 쉬운 거였을지도 모르는 거임. 작은 고백을 주고 받고 정표를 서로 지니고 제 살처럼 누군가를 아끼고. 오래전 고소 수학시절 천진했던 강징의 미소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걸 자주 생각함. 어쩌면 이 어리석고 그가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을지도 모를 감정이었음.
늦게 귀가하니 강징은 올해 있을 운몽의 대소사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있었음. 종주인 그가 혼인하여 거취가 명확하지 않은지 오래 되어 이렇게 돌아왔으니 더 화려해야했고 실수가 있어서는 안되니까. 피곤해보이는 강징을 보며 차를 우려내고 명단을 추리는 것과 각 종주간의 인과를 살피는 것은 제가 하겠다는 말에 강징은 공손한 태도로 감사 인사를 올림. 자꾸 비교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이런 귀찮은 일을 도맡는 망기와 그 곁에서 응석부리는 무선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음. 위무선에게 남망기는 너무나 당연한 사람이라 그들이 서로를 돕는 것이 더 익숙했으니, 감사보다야 애정을 더 표현하는 쪽이었음. 남잠, 난 남잠 없으면 어떻게 살지? 하고 어깨에 매달리는 무선에게 망기가 달리 무슨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귓볼이 붉어지고 살짝 고개를 숙이거나 하는 애정이었음. 강징과 자신 사이엔 없는거였지.
강징의 손에 은령을 쥐여주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룸. 많이 피곤했는지 잠시 눈을 질끈 감고 미간을 누르기까지 하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음.
이 즈음 강징은 새로운 습관이 생겼음. 늦은 저녁 삼독을 깨끗한 천으로 닦고 또 닦았음. 영검은 신체와 같으니 수선자로서 아끼는 것이 당연했으나 조금 강박적일 정도였을거임. 그래도 많은 말을 묻지 않았고, 사실 물을 수도 없었고 희신은 곁에서 바라보기만 했음.
차가운 새벽 깨어난 남희신은 다시 발작하기 시작한 제 도려를 품에 안아 꾹 누르고 있었음. 잘못했다고 빌던 강징의 입을 틀어 막고, 차마 염치가 없어 울지도 못하는 희신이 몇번이고 수백번이고 속삭였음. 모두 끝났습니다, 아징. 다시는 그런 일 없을겁니다. 다신 그대를 괴롭게 하지 않을겁니다. 이곳은 운몽입니다.. 강종주의 침실이며 겹겹이 운몽의 수사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니 그대는 안전합니다. 헐떡이며 흘러내린 눈물이 머리칼을 전부 적시고 겨우 초점이 잡힌 시선으로 방을 훑고서야 희신의 말을 믿는 것 같았음. 지친채로 기절하듯 잠든 강징을 안고 그날처럼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남희신도 무너짐.
강징을 가두었던 곳에서 도망쳤다고 생각했으나 그 지옥을 여기까지 끌고 온것에 불과함.
다음날 유달리 창백한 얼굴로 연무장에 나섰던 강징은 오래지 않아 부관의 손에 부축받으며 침소로 들어왔음. 수사들 앞에서는 끝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종주 처소의 문이 열린 순간 이미 무릎이 꺾였음. 방안에 있던 남희신이 다가오자 덜덜 떨기 시작했지만 거부하진 않겠지. 거부한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어서. 지난 밤 잘 자질 못해서 이렇다고, 쉬고 싶다는 말에 자리를 펴주고 옆방으로 옮김.
남희신은 어떻게든 강징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고 그가 상처 내는 내내 자신에게 의지했던 강징을 떠올리며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겠지. 그래서 괴로워하는 걸 알면서도 제 자리를 만들고 싶어 바둥거렸던 건데 그것또한 포기하게 됨. 자신의 음인으로 시작하여 정인이 되었고 그래서 어떻게든 곁에 두고 싶었으나 이제 그가 원한다면 사라져 줄 수도 있어짐. 강징이 견딜 수만 있다면 그의 곁을 욕심내지 않을 수 있는 시점까지 옴
그날 저녁 삼독을 닦던 강징이 문득 삭월은 좋은 검입니다. 하고 중얼거리듯 말함. 오래전 적봉존과 대련하시며 삭월의 겁집으로 패하를 막지 않았습니까? 하며 잠시 웃었음. 그때 강징이 보인 미소가 너무 허탈하고 부서질 것 같아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으나 그럼에도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여 아직도 기억하십니까? 하며 웃었음.
주화입마의 위험으로 폐관에 든 의형을 못본지도 오래되었다고 여김. 회상의 이야기를 들으니 오랜 시간 폐관하며 도령을 잘 다스려 성공적이라고 들었는데. 동생의 지기가 이렇게 자라 가문의 종주가 되었으니 감회가 새로울텐데. 멍하게 허공을 보던 강징이 눈을 마주쳐 오는 바람에 오히려 희신이 놀람.
부군의 검도 닦아드릴게요. 손을 내민 강징에게 홀린것처럼 제 패검을 쥐어주고, 곱게 내리깐 눈을 바라보고만 있었음. 가만히 들여다보면 강인해보이는 얼굴이었으나 그 속에 든 것이 여리고 물러 쉽게 상처받고 무너지기도 하는 사람이었던 것을. 종주께서 아직 석반을 들지 않았다는 수사의 말에 직접 상을 보러감. 간혹 운이 좋으면 강징은 남희신이 떠먹여주는 것들을 고분고분 받아먹었으니까. 볼수록 애가 타도록 사랑스러운 사람이라 잘해주고 싶었겠지.
손수 강징이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차려 상을 내어왔으나 정작 그토록 아끼는 사람의 손에 닿지도 못했음. 침실은 짙은 피비린내로 젖어 있었고 강징은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 제 몸에서 빠져나가는 핏물을 허망히 바라보고만 있었음.
강징을 오래 보필한 부관만이 이 상황을 지켜봤겠지. 남희신은 침착하게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음. 영류로 피를 틀어막듯이 강징의 온몸을 감쌌음. 강징은 차라리 떠나게 놔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입조차 열수 없었음. 지독하게 피곤했고 남희신은 그가 떠올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어있어서.
택무군은 이때 나직한 목소리로 주변을 물리고 이 일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음. 당연한 일임. 강종주 혼자 건사하고 있는 이 운몽에서, 종주께서 자해하여 생사가 위독하다고 한다면 이 운몽은 당장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부관이 사라지고 희신은 아징, 미안합니다. 아징.. 앞으로는.. 아무일도 없을 겁니다.. 아징.. 누구도 그대를 해치지 않을겁니다.. 낮게 시작한 목소리는 덜덜 떨리기 시작해서 끝내엔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되어버렸음.
삭월은 애초에 강징의 패검이 아니었고 주인의 의지에 반하여 사람을, 그것도 주인의 정인을 해치고자 하지 않았으니 강징이 원했던 만큼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음. 정말로 죽기를 바랬는데. 강징은 매일 저녁 남희신이 생각을 바꾸어 그를 다시 욕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음. 돌아온 운몽에서도 전혀 괜찮지 않았을거임. 한때 자신의 집이었던 이곳에서도 운몽의 종주가 아닌 음인으로 자신을 생각하게 된거지. 그럴 정도로 망가졌음.
자신의 수사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욕정에 담긴 양인들의 그것처럼 보여 두려웠고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연무장에서 제게 시선이 쏟아지는 순간 이들이 얼굴을 바꾸어 저를 짓밟고 다시 그 지옥같은 순간으로 돌아가게 될 거 같았음.
전부 끝난거구나. 과거 가졌던 것들은 이제 그 자리에 없었고, 강징은 조각조각 부서져 더이상 그가 살았던 삶으로 돌아갈수조차 없었음. 커다랗고 맑은 눈이 침착한 고통만을 담고 있었겠지. 희신은 목이 쉴 정도로 강징에게 속삭였음. 미안하다고, 더이상은 정말로 이런 일이 없을거라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징.
한참을 안겨있던 강징이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멍하게 다시 입을 열었음.
그게 어째서 택무군의 잘못입니까. 제가 부군을 택했습니다.
그러니 강징이 가장 증오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음. 남희신은 고소의 사람으로 그에게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이고 제게 주어질리가 없는 행복을 함부로 탐하여 스스로 구렁텅이에 처박혔으니 강징이 죽이고 싶었던 건 그저 그 자신임.
희신은 거부하고 부정하고 싶었던 걸 끝내 인정해야 했음. 자신의 도려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거.
위무선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했겠지. 그러기 전에, 아마 마지막으로 그의 품에 안을 수 있는 사람을 다시 한번 끌어안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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