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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5 21:40



전편  https://hygall.com/522770549


1.


어쩌다가, 어쩌자고, 소년의 눈이 되길 자처했을까. 그저 예고된 발작이 불발되었고, 발산하지 못한 혈기를 해소하기 위해 새벽부터 냅다 달렸던 것 뿐인데 어쩌다가 길 한복판에서 기억 속 소년을 마주했고, 어쩌다가 '그' 소년과 함께 조용한 주택가를 걷게 되어버린 것일까.
쿄스케는 제 팔에 둘러져있는 손을 내려다보며 티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에 저질러버린 행동이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다. 인정해야했다. 이건 정말 지랄이 맞았다. 아니지. 솔직히 변명을 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이건 몸이 불편한 어떤 인간에 대한 순수한 호의이며, 그에게 느꼈던 감정은 동정이고, 지금 이 짓거리는 그저 도의적 차원에서 벌인 일종의 봉사라고.

"쿄스케씨에게는 계속 도움만 받네요.."

히데아키가 중얼거렸다. 잔뜩 풀이 죽은 얼굴 위로 왜인지 축 쳐진 토끼 귀 같은게 함께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쿄스케는 눈을 거칠게 비볐다.

"음... 히데아키라고 했지? 안보여도 길은 잘 아나보네."

화제를 돌릴 생각으로 말을 꺼냈지만, 진심이었다. 눈이 안보이는 것치고는 멀쩡하게 길을 찾는 모습이 의아했다. 굽이굽이 골목을 꽤 돌았는데도 막힘이 없었다.

"이 근처는 나름 익숙하니까요"
"..."
"그치만 조금만 멀어져도 못 다녀요"
"...왜?"
"차나 자전거 소리가 무서워서.... 안 보이게 되고부터는 거의 집에만 있거든요."
"그.. 눈이 계속 안보였던게 아니야?"

히데아키가 잠시 말을 아꼈다. 함께하는 내내 종알거렸던 입이 다물어지자 실이 끊어진 것처럼 조용해졌다.

"...네.. 전에는 집중하면 희미하게는 보였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5년 전에 갑자기 깜깜해지더니, 그 뒤로는 쭉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히데아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뜨거운 유황불 같았다.
5년 전부터라는게 5년 전의 몇날 며칠인데?
'그' 날이 히데아키의 세상이 깜깜해지기 전이었다면 어떻게 할건데?
확인해야지. 증명해야지.

백군의 주장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렸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다. 너무 깊이 엮이지는 않는게 좋겠어. 쿄스케는 백군의 말을 싸그리 무시한 채 결론을 내렸다.

"... 쿄스케씨?"

별안간 끼어든 히데아키의 목소리에 쿄스케는 송곳에 귀를 찔린 것처럼, 움찔하며 히데아키를 내려다보았다.

"..아, 미안. 뭐라고 그랬지?"
"그래서 의외로 저, 할 줄 아는 것도 많다구요"
"...뭘 할 수 있는데?"
"음..꽃꽂이랑 손뜨개질도 할 수 있구요....아! 커피도 꽤 잘 내려요. 그리구 또..."

손가락을 접어가며 '할 줄 아는' 무언가를 자랑하는 히데아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쿄스케 자신은 시도할 생각조차 해 본적 없는 지루하고 시시한 것들 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히데아키의 목소리와 표정이 정말 행복해보였다. 가만히 히데아키를 바라보고만 있던 쿄스케는 가슴께를 벅벅 긁었다. 조금. 그러니까 아주 조금 간지러워서.


##


쿄스케는 고개를 높게 치켜들었다. 그는 키가 꽤 큰 편이었기 때문에 허리를 곧추 세워서까지 무언가를 올려다본게 제법 오랜만이었다. 눈 앞에 자리한 료칸은 그만큼 거대했다. 쿄스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오래된 목조 건물 특유의 묵직한 향기가 코를 가득 채웠다. 따뜻한 증기 냄새. 포근한 비누향기까지도. 히데아키를 품에 넣었을 때 느껴졌던 향기는 이 비누향기였구나. 라고 멍하니 생각했다.

"다녀왔습니다-!"

히데아키는 여전히 그에게 팔짱을 끼운 상태로 대문을 넘었다. 깊게 엮이지 말자고 결론을 내린 주제에 결국 집까지 와버렸다. 뜨거운 철판 위에 놓인 고기처럼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발바닥이 홀랑 익어버릴지도 모른다. 지랄도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백군의 불퉁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럼 난 이만 돌아갈게."

쿄스케는 여태껏 제 팔을 붙잡고 있는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백군의 말이 옳았다. 봉사든 지랄이든 이정도면 충분했다. 그대로 뒤를 돌아 나가려는데 히데아키가 다급한 손짓으로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기, 기다려주세요!
모처럼 여기까지 오셨는데 차라도..."

쿄스케가 다시 히데아키를 향해 몸을 틀었다. 옷깃을 꼭 쥐고 있는 손이 퍽 간절해보였다. 거절을 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타박타박, 발소리가 들렸다.
여기에 우리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건가. 쿄스케는 저도 모르게 기척을 읽어내려 온 신경을 집중했다.


"형!"

아.

"..카즈!"
"혼자서 너무 돌아다니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맥이 탁 풀렸다. 잘 생각해보면 이렇게 큰 료칸에 다른 사람이 없을 리가 없는데. 그 기척을 읽어내고 심지어 대응까지 하려했던 자신이 어이가 없어졌다. 이래서 안에서 새던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건가. 쿄스케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히데아키처럼 고급 기모노를 차려입은 남자는 히데아키보다 키가 크고 인상이 날카로웠다. 비슷한 구석을 찾으라면 입술 위에 콕 박혀있는 점 정도였다. 아마도 히데아키의 형제 쯤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히데아키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곧 멀뚱히 서있는 쿄스케를 바라보았다.

"...손님..이십니까?"

있으면 안되는 존재를 향하는 눈빛. 보이지 않기에 편견도 없는 히데아키의 눈빛에 그새 익숙해지기라도 한 것인지 언제나 받아왔던 부외자 취급이 새삼스러웠다. 하지만 이해를 못할 것도 아니었다. 거대한 독잇뱀 같은 사내가 제 형과 함께 있으니 수상할 수 밖에. 쿄스케는 그를 향해 짧은 목례를 했다. 이건 그의 질문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카즈, 이 분은 곤경에 처한 나를 도와주신 분이야.
 쿄스케씨, 이 쪽은 제 동생이에요."

한껏 날 서있던 경계가 곧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이런 인간이 형을 도왔다는 사실이 신뢰가 가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그는 곧 깊게 고개를 숙였다.

"...마츠다 카즈히로입니다. 형 때문에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손님을 맞은 참이라 제대로 된 대접을 해드리기는 어렵겠네요."

대접 필요없어. 필요 없다고.

"대신 편히 쉬시다 가십시오."

카즈히로의 손짓에 늙은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차를 준비해달라는 말에 그녀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고 사라졌다. 상황이 이렇게되니 대접같은 거 필요없으니까 제발 그만 보내달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쿄스케씨, 제 방으로 가요!"

저 즐거워보이는 웃음에 찬물을 끼얹을 맘도 없었고, 여전히 옷깃을 쥐고 있는 히데아키의 손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쿄스케는 어쩔수 없이 히데아키의 손에 질질 끌려갔다. 지금 제 표정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처음으로 치과에 끌려가는 어린애의 표정일까. 아니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의 표정일까.
어느 쪽이던, 꼬라지가 꽤 우스울 것은 분명했다. 쿄스케는 짧게 숨을 토했다. 그리고 머리에 결정타를 맞은 사람처럼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어차피 우스워진 마당에 오늘 하루 쯤은, 히데아키의 장단에 어울려줘도 괜찮지 않을까.
나중을 위해서. 정말 그 나중을 위해서 조금쯤 확인작업을 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


그렇게 끌려온 히데아키의 '방'은 쿄스케를 놀라게하기에 충분했다. 이만큼이나 거대한 료칸에서 요만큼이나 작은 방이 있다는 것이 첫째였고, 아직 환한 대낮인데도 방 안은 어두컴컴하다는 것이 둘째였다.
조금 전 상황으로 미루어보건대 히데아키는 장남인 것 같았는데, 꽤나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있는 듯 했다. 쿄스케는 한평생 자신에게 따라붙었던, 경계 가득한 시선들을 떠올렸다. 이런데서 동질감을 느낀다고 하면 이상한 거겠지.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는 히데아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쿄스케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달칵. 방이 환해지는 것과 동시에 작은 노크소리가 들렸다.

"애기씨, 차 준비해왔습니다요."
"아! 네, 들어오세요!"

늙은 여자의 목소리에 히데아키가 반색을 하며 그녀를 맞아주었다. "도련님께서 죄송하다고 전해달라셨어요" 라는 그녀의 말에 쿄스케는 고개만 까딱해보였다. 그녀 또한 덧붙이는 말 없이 조용히 가져온 것들만 내려놓고 방을 나섰다. 애기씨. 도련님.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니, 아닌가? 쿄스케는 멍하니 입 속으로 호칭을 중얼거리다가 풉, 웃어버렸다.

"쿄스케씨..?"

한번 새어나온 웃음은 잔뜩 넘쳐흘러서 쿄스케는 푸하하, 크게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히데아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혼자서 신나게 웃고있는 쿄스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실례.. 크흡.. 왜 누구는 도련님이고, 누구는 애기씨야"

쿄스케는 어느새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쳐내며 그를 물끄러미 보고있는 히데아키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맑고 새하얀 얼굴에, 살면서 험한 일 한번 해본적 없을 것 같은 고운 손. 이런 사람을 부를 수 있는 말이 애기씨 말고 다른게 있으려나? 아마도 없을 것 같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애기씨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에 대한 작은 경외심마저 들었다.

"미안... 애기씨라는 호칭이 너무 잘어울려서요. 애기씨"

아직도 웃음이 가득한 목소리에 히데아키의 얼굴이 불을 당긴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게...그, 어렸을 때부터 부르던게 굳어져서...."
"아, 그렇습니까, 애기씨?"
"놀리지 마세요...."

쿄스케가 기억이란걸 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이렇게 마음놓고 웃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기분 째지는 시간을 보낸다 한들 소리내어 웃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쿄스케는 큰 몸을 구깃구깃 접어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히데아키의 얼굴은 어쩌면 폭발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빨개져있었다. 한바탕 웃고났더니 도살장에 끌려운 가축 같았던 불편한 감정이 한결 가셨다. 쿄스케는 찻잔을 들었다. 제법 향이 진한 녹차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이렇게 부드럽게 풀어진 분위기는 뜻밖의 수확이고, 그는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편이 아니었다. 원하는 진실을 얻어내기 위한 가장 최고의 무기는 친밀감이라고 했다. 물론,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쿄스케는 그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애기씨, 실례가 안된다면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그렇게 안부르시면 생각해볼게요..."

히데아키의 입술이 한 자만큼 튀어나왔다. 쿄스케는 또 한번 웃음이 터질 뻔한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히데아키는.. 나를 왜 집에 들일 생각을 한거야?"
"....네?"
"보통, 처음 만난 사람을 집 안까지 들이지는 않잖아. 내가 아주 무서운 인간이면, 그땐 어떻게 하려고?"

진심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어영부영 여기까지 끌려오긴 했지만, 잠깐만 생각해봐도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을 집까지 들였어. 그것도 앞도 안보이는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이지?
무엇보다 트라우마의 한복판에 존재하던 이가 우연히, 갑자기 내 눈 앞에 나타나는 그런 일이 가능키나 해?
당장 떠오르는 가능성은 세가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거나. 나를 기억한다거나. 아니면 둘 다.
어느쪽이든간에 나를 기억한다면, 나는 히데아키를 살려둘 수 없-



"친구.."


별안간 끼어든 조그만 목소리에 전깃불을 끈 것처럼 생각이 뚝 끊어졌다. 히데아키가 찻잔을 손에 꼭 쥔 채로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당신과 친구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씨발


"..그럼 안되는 걸까요?"


아아. 애기씨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나같은 놈은 죽었다 깨나도 모를 순수하고 아름다운 곳일까요?

찻잔이 부서져라 세게 쥐고, 쿄스케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 말도안되는 생각이었지만.




++

이게 뭐라고 3편까지..
이렇게 어나더 풀 계획이 없엇던거라 두서없이 주절주절거려서 노잼이네 미안 ㅠㅠ
마냥 무해한 히데아키 애기씨가 보고싶었어.. 나는 그래쒀....

쿄스케히데아키 마치아카
2023.02.05 21:48
ㅇㅇ
허미 독잇뱀같은 쿄스케 히데아키가 무해함으로 무장해제 시켜버리네ㅠㅠㅠㅠ 히데아키 애기씨라는 말 너무 잘 어울려
[Code: b9af]
2023.02.05 21:58
ㅇㅇ
모바일
하 센세 어나더
[Code: b729]
2023.02.05 22: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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밎ㅌ칀 애기씨!!! 애기씨!!!!!!!! 쿄스케 이놈 벌써 감겨부렀네ㅠㅠㅠ 애기씨 그날 뭘 보긴 봤을거 같은데 센세 어나더로 알려줄꺼조?
[Code: 04a8]
2023.02.05 22: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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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와줘서 고맙 ㅜㅜ 오래 오래 봐요 ㅈㅂ ㄹㅇ 존잼
[Code: 4135]
2023.02.05 23:0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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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씨라는 호칭이 너무 잘어울려서요. 애기씨
쿄스케 머야 이거 존나 설레....센세
노잼이라니 겸손한 말 하지마 존나재밌으니 걱정말고 어나더만 부탁해ㅠㅠㅠ
[Code: 0a74]
2023.02.05 23:3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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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스케히데아키는 진짜 이 둘만의 바이브가 있다 존나 좋아ㅠㅠㅠㅠ 쿄스케는 살아온 인생이 험했던지라 친절한 애기씨보고도 의심부터 할 생각뿐인데 애기씨 소리 잘어울리는 히데아키는 그저 순수할 뿐이고ㅠㅠㅠㅠㅠ 그 위화감에 좋든싫든 몸서리치는 쿄스케 존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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