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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3 22:30
삼나더
과자를 양껏 먹어 달달해진 입속을 혀로 훑으며 금릉이 곤란한 듯 신음했다.
"너무 먹었나? 이러다 저녁밥 못 먹겠는데."
"어이구, 천하의 금 종주께서도 군것질 때문에 혼날까봐 걱정이 되시나요?"
"시끄러, 남경의. 넌 우리 외숙한테 안 혼나봐서 몰라. 난 어릴 적에 외숙 입에서 불이 나오는 게 아닐까 진심으로 걱정한 적도 있어."
"그래도 금릉이 종주직에 오른 뒤로 강 종주께서 제법 체면을 살려주시잖아요."
남사추가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선선히 웃었다. 그 말을 들은 금릉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듯 뒷목을 꾹 눌렀다.
"그건 남들 눈앞에서나 그러시는 거고...... 과자 먹느라 밥을 못 먹겠다고 하면 앞으로 석 달 열흘은 서신에 그걸로 잔소리를 울궈먹으실 거야."
"크하하! 야, 아씨. 너 혼날 때 꼬옥 나 불러라, 응? 그런 재밌는 구경을 이 남경의 님이 놓쳐서야 쓰겠- 어?"
"왜 그래, 경의?"
"저기 저 사람......?"
금릉이 손끝으로 가리킨 곳은 약방이었다. 그리고 약방을 나온 열네다섯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품속에 무언가를 숨긴 채 재빨리 걸음을 옮기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남경의가 어어, 하고 손가락질 했다.
"누님 몸종인 운패 아냐?"
"...응. 내 눈에도 그렇게 보였어."
남사추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금방 사라졌다곤 해도 그녀는 분명 남 소저가 어릴 적부터 모셔온 충복이었다. 웬만해선 규방 규수인 주인의 곁을 떠나지 않는 몸종이 홀로, 그것도 약방을 다녀갔다는 사실은 소년들에게 의심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당장은 안 캘 거야."
금릉이 한숨을 쉬며 남가 소녀들에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과년한 규수의 일인데 무슨 일일지 알고 내가 함부러 뒤를 캐겠어. 고소 남씨의 명예를 존중해서라도 그런 짓 안 해, 걱정 마."
"고마워요, 금릉."
남사추가 안심했다는 듯 미소지었다. 남경의 역시 조금 껄쩍지근한 기색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외숙께 무슨 일이 생기면 나설 거야."
"그땐 금릉이 나설 필요도 없이 내가 나설게요."
"걱정 마, 아씨. 나도 있고 사추도 있고 또 택무군도 있으니까!"
"그러고보니 택무군께서 오셨지. 부디 남 소저를 잘 타일러 데려가시면 좋으련만."
그러나 정말, 금릉이 어찌 알았겠는가.
믿어 마지 않았던 그 택무군이야말로 가장 믿을 수 없는 위험 인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
.
.
챙그랑! 요란하게 다기 깨지는 소리는 다행히 별채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 소저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가슴을 들썩이다 고운 푸른색 능라비단 소매에 서로운 듯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거야?! 희신 오라버니께선 대체 무엇 때문에 사사건건 날 방해하지 못해 안달이신 거냐고!"
서러운 아가씨의 탄식에 유모는 방금 전 아가씨가 팽개친 깨진 찻잔을 치우다 슬그머니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유순한 제 아가씨가 이리 짜증을 낼 만도 했다. 요양을 핑계로 버티면 그래도 가문의 귀한 여식의 청을 뿌리칠 수 없어 돌아가 주리라 생각했던 남희신이 요 며칠 내내 강 종주님의 뒤를 늘어붙은 엿가락처럼 따라다니며 빈틈을 내어주지 않고 있었다. 만두를 빚든 자수를 놓든 강징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들은 강징에게 말을 붙여볼 새도 없이 그대로 제 손으로 들고 다시 처소로 돌아와야 하는 일이 허다했던 것이다.
한 번은 작정하고 강징의 외출에 몰래 따라 나선 적도 있었다. 얼굴이 거의 비칠 지경이라 사실상 쓰나마나인 하얀 유모를 쓰고 조심조심 따라가 보는 눈이 많은 장터에서 실수로 부딪힌 척이라도 할 심산이었다. 물론 남 소저라고 해서 체면도 자존심도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마음이 급했고 강징에 대한 연정은 깊었다. 이건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는 연정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출타하셨나 봅니다, 강징.
어느 새 남희신은 강 종주라는 호칭조차 영영 까먹어버린 것인지 강징을 늘 강징이라고만 부르고 있었다. 강징 역시 이젠 다 포기한 듯 허허 웃으며 "택무군께선 장터 구경을 오신 겁니까?" 하고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희신 오라버니가 어떤 분인가. 공자방 1위의 명성이 아깝지 않은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사내다운 어깨에 보는 이마다 한숨짓게 만드는 준수한 얼굴을 가진 사내가 아닌가. 자연스럽게 강징의 몸을 반쯤 가리다시피 하며 강징의 뒤에서 걸음을 옮기는 남희신이라는 철벽에 가로막힌 남 소저는 그날 또 한 번 허탕을 치고 털레털레 연화오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러다 약혼은커녕 얼굴 한 번 뵙지도 못하고 고소로 돌아가게 생겼어...... 어떡하면 좋아, 유모?!"
"진정하세요, 아가씨. 어찌됐든 지금 강 종주님께선 선도 안 보시고 숨겨둔 여인이 있는 것도 아니시잖아요. 자주 뵙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 강 종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미색이 뛰어난 처자는 온 운몽을 둘러봐도 아가씨밖에 없으세요."
"아니, 아니야...... 신붓감을 꼭 운몽에서만 찾으라는 법은 없잖아. 섭하엔 나랑은 달리 어른스럽고 대담한 미녀도 많다고 그러고, 외가인 미산 우씨에서도 강 종주님의 혼처를 물색하고 있다잖아. 안 돼, 안 돼. 정말 시간이 없어! 그, 그 분은... 그 분은 내가 방계라서 싫어하시는 걸까?"
"몇 번을 말씀드렸잖아요. 이제껏 강 종주님께서 선을 본 처자들 중에서도 방계 혈족 아가씨들이 많았다고요. 강 종주님께서 원하시는 건 그저 여인다운 현숙함과 미색이 으뜸이라는 거예요. 거기에 후사만 낳는다면ㅡ"
"어머, 유모!"
"이제 부끄러워 하시기만 하면 안 돼요. 사실 강 종주님에게 있어 가장 급한 건 후삽니다. 제아무리 미색이 뛰어나든 현숙하든 운몽 강씨의 적자를 못 낳는 여인은 강 종주님껜 쓸모가 없어요. 허니 아가씨께서도 꾸준히 탕약을 잘 챙겨드시고 진맥도 받으셔야 합니다. ...오늘도 운패를 약방에 보내놨습니다. 곧 돌아오겠죠."
약방. 그 말에 남 소저의 두 뺨이 붉어졌다. 눈썹머리를 찡그리고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지만 유모는 그런 아가씨를 이해한다는 듯 조곤조곤 타이르기 시작했다.
"압니다. 이 어멈은 다 알아요. 하지만 아가씨. 이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마음에도 없는 사내와 혼인하실래요? 아니면 먼저 움직여 원하는 것을 얻으실래요?"
"나, 나는......"
"생각해보니 저희가 너무 안일했어요. 그토록 오래 수행하신, 한 가문의 종주이신 분께 미약 몇 방울 섞은 간식이 통했을 것 같진 않아요."
"유모! 누가 들으면ㅡ"
"어차피 연화오 것들은 저희 별채에 신경도 안 씁니다. 부엌도 따로 있는 별채에 바깥 것들이 어찌 오겠어요? 그러니 운패가 약을 사서 돌아오면 방법을 조금 바꿔보는 거예요."
"어떻게?"
"아가씨는 저만 믿으세요."
불안한 듯 어깨를 떠는 제 작은 아가씨의 어깨를 감싸쥐며 유모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그녀는 본래 활달하고 여기저기 쏘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정이었다. 고소 남씨의 노비가 되며 소음 하나 없이 고요하고 깊은 첩첩산중에 갇혀 지내는 생활엔 이젠 진력이 날 지경이었다. 이따금 숨 쉬는 구멍처럼 채의진으로 내려가 물건을 사 오는 일이라도 없었으면 아마 미쳐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도 이젠 늙었다. 산 속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버거워 무릎이며 온몸이 쑤시고 비명을 질러댔다.
반면에 운몽이란 곳은 어떠한가! 따스한 햇살과 맑은 강물이 참으로 시원한 자유로운 땅이었다. 시장은 활기가 넘쳤고 연화오 역시 노복들이 까르르 웃으며 이따금 아웅다웅대기도 하는, 그야말로 사람 사는 곳 같았다. 그런 곳의 안주인 자리에 제 아가씨가 들어가기만 한다면...... 풍요롭고 활기찬 이곳에서 귀여운 아가씨의 시중을 들고 이것저것 풍족하게 챙긴 후 노년엔 면천되어 각자 가정을 꾸린 자식들과 손주들의 시중을 받으며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게다가 아들딸 부부의 가족들 역시 아가씨께 부탁드려 이 좋은 땅에서 살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유모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넘치는 듯 했다. 우선 불안해하는 아가씨께 따뜻한 차를 내어드리고, 운패가 은밀히 사 온 두 개의 약첩을 정성스레 달였다. 하나는 미약이었고, 또 하나는 회임을 유도하는 약으로 이는 연화오에 올 때부터 남 소저가 꾸준히 먹어온 것이었다. 약이 다 달여지려면 아직 멀었다. 그 동안 미약을 섞을 술을 가지러 유모가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그림자는 소리없이 다가와 유모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사람의 급소가 어디인지 정확히 아는 손놀림이었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유모가 하얀 소매폭 속으로 떨어지듯 쓰러졌다. 유모의 몸을 받아들어 조심스레 어깨에 짊어진 남희신이 그저 평온하고 웃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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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내려놓고 저녁상을 들라 이르던 강징의 입이 떡 벌어졌다. 평소라면 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잣죽 냄새에 입맛을 다셨을 터였다. 그러나 그 상을 손수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온 이가 남가 종주 남희신이라는 점이 강징이 식욕도 잊고 기함하게 만든 것이다.
"택무군!"
"공무가 바빠 오늘은 서재에서 일을 하며 식사를 하신다 들어 이리 왔습니다."
"아, 아니, 왜?!"
"이 사람과 술 한 잔을 하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을 들은 강징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랬다. 분명 남희신이 찾아왔을 때 점심을 권하고 술을 할 수 있다면 같이 한 잔 하고 싶다고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분명 남희신은 술을 즐기지 않을 터였는데......
"술기운은 날릴 수 있습니다. 듣자하니 이 하풍주가 그렇게나 향이 좋다지요? 술기운만 날려버리면 향 좋은 차를 즐기는 것과 그리 다를 게 무엇 있겠습니까. 강 종주와 차를 나눈다고 생각하지요."
"택무군......"
"희신이라 불러주시지요."
달이 아름다우니 이런 밤엔 마음을 나눌 상대가 필요합니다.
강징이 탄복인지 탄식인지 모를 한숨을 흘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하얀 달빛을 받으며 술상을 받쳐든 미인이라니. 어느 사내가 이를 마다할 수 있을까! 물론 그 미인이 꼭 여자라는 법은 없었지만. 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저와 진정한 친분을 나누려는 고소 남씨의 종주의 진심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강징의 입가가 선선히 미소를 그렸다.
"알겠습니다, 희신. 오늘밤만큼은 지기로서 허심탄회하게 술잔을 나눠보시지요."
남희신이 활짝 웃었다.
그야말로 담청색 하늘 위로 한가득 들어찬 새하얀 보름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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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는? 아직도 안 돌아왔어?"
"그런 것 같아요. 술이랑 약만 올려두고 어딜 간 건지......"
머리를 만져주던 운패의 대답에 남 소저의 미간이 좁혀졌다. 기껏 결심한 일인데도 가장 큰 조력자의 부재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강 종주님께선 오늘 시찰을 다녀오셔서 평소보다 곤하실 테고 저녁엔 꼭 반주를 드신다잖아요. 기회예요! 강 종주님의 저녁상에 올릴 술병을 몰래 유모가 준비한 술병으로 바꿔놓았으니 강 종주님께서도 진작 그걸 드셨을 거라구요. 지금 가시지 않으면 안 돼요!"
"...맞아. 이건 기회야. 유모는, 유모는 뭔가 다른 일이 있겠지."
입술을 깨물며 남 소저가 벌떡 일어났다. 능화경에 비친 자태가 사뭇 아름답고 요요했다. 매끄럽게 틀어올린 머리 언저리에서 매화 모양 백옥 보요가 남 소저가 움직일 때마다 청아하게 흔들렸고, 살구색 치마는 하늘거리며 부드러운 선을 그렸다.
연화오 가복들의 눈에 띄지 않게 새카만 천을 뒤집어쓴 남 소저는 기척을 숨기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병약하다곤 해도 남가의 여식인 이상 금단을 맺고 기척을 숨기는 것쯤은 어릴 적부터 단련해 온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인 유모나 운패의 부축을 받는다면 오히려 더 들키기 쉬울 터라 이 일은 온전히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오늘은 강징이 서재에서 저녁을 든다는 건 운패가 미리 알아온 정보였다. 서재에 다다른 남 소저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쥔 채 후우, 하고 떨리는 숨을 골랐다.
새하얗고 고운 손끝이 막 서재 문에 닿았을 때였다. 안쪽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남 소저가 지레 깜짝 놀라 "꺄악!" 소리를 질렀다. 뒤이어 강징의 다급한 목소리가 "태, 택무군! 희신!" 하고 외쳤다.
"희신 오라버니?!"
남 소저가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강징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나 달빛을 받으며 당황해하는 미녀의 미모보다는 당장 제 품 안에서 쓰러진 채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는 남희신이 더 급했다.
"남 소저가 어찌 이 시각에 여기에....? 아, 아니 그보다! 갑자기 택무군께서 쓰러지셨소!"
"네?!"
"택무군께 뭔가 지병이라도 있으신 겝니까?! 허면 얼른 조치를 취해야-"
"아, 아니, 저는, 그게, 그러니까......"
"혹 제게 맞춰 무리해서 술을 드셔서 이리 되신 건 아닌지......"
"술이요?"
남 소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강징은 미처 그것까진 보지 못했다.
"제가 저녁을 먹을 때 반주를 한 잔씩 하는데 오늘 택무군께서 건너오셔서 같이 술을 들게 되었는데 갑자기 이리 쓰러지시니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 그 술을 오라버니께서 드셨단 말입니까?!"
"예? 아, 예. 혹 고소 남씨 사람이 술을 마셨을 때 따로 듣는 약이라도 있을까요?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의원부터-"
"그게, 그게......!"
의원이라니! 아니, 애초에 술도 못 하는 고소 남씨 사람이 대체 그 술을 왜 마셨단 말인가! 의원이 와서 미약의 존재를 밝히면 그 일은 또 어떻게 수습한단 말인가! 운몽의 종주가 운몽 약방에서 구한 미약의 소재를 알아내는 것쯤이야 석가모니가 제 손 안에서 노는 손오공을 붙잡는 것보다 쉬울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남 소저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강징이 의아한 얼굴로 "남 소저? 얼른 의원을 불러-" 까지 말했을 때였다.
"...의원은 필요없습니다."
강징의 고개가 순식간에 아래로 향했다. 강징의 품속에서 남희신이 가늘게 눈을 뜨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애써 웃고 있었다. 그러다 눈동자만 스르르 굴려 제 친척 누이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느냐?"
남희신의 말은 쏟아지는 백 발의 화살처럼 날카로웠다. 남 소저가 후들후들 떨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강징은 이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남희신과 남 소저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동생은 이만 처소로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예? 하지만 의원이-"
"아, 아아, 아아아......!"
주저앉은 남 소저는 비명과도 같이 울부짖다 그대로 상반신만을 뒤로 틀어 허우적대다 몸을 일으켜 그대로 쏜살같이 줄행랑을 쳐 버렸다. 남가 여식이라곤 상상도 못할 요란한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고, 강징은 허한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강징."
남희신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향기로운 술냄새가 풍겨왔다. 그제서야 강징은 남희신이 술기운을 날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저가 주는 잔을 모두 받아마셨음을 눈치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남희신이 억센 손아귀힘으로 강징의 손을 붙들고 제 아랫도리로 가져갔다. 강징은 뭐라 다시 말하기도 전에 제 손 안에 뿌듯하게 들어찬,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존재감에 경악하고 말았다.
"아악?!"
기겁하며 강징이 손을 떼려 했지만 남희신은 오히려 한 번 손이 닿자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강징의 손을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 강징의 허리를 단숨에 껴안고 몸을 밀착시켰다.
"뭐 하는 짓입니-!" 어, 어어? 어?!"
"알고 있잖아."
남희신이 싱긋 웃었다. 술기운으로 붉게 물든 뺨과 열감에 들떠 일렁이는 눈, 하얗게 빚어놓은 조각같은 얼굴이 강징의 어깨에 얹어졌다. 목덜미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엔 교태가 흘러넘쳤다. 그 남희신이.
"내가 당신 좋아하는 거, 진작 눈치챘잖아."
과자를 양껏 먹어 달달해진 입속을 혀로 훑으며 금릉이 곤란한 듯 신음했다.
"너무 먹었나? 이러다 저녁밥 못 먹겠는데."
"어이구, 천하의 금 종주께서도 군것질 때문에 혼날까봐 걱정이 되시나요?"
"시끄러, 남경의. 넌 우리 외숙한테 안 혼나봐서 몰라. 난 어릴 적에 외숙 입에서 불이 나오는 게 아닐까 진심으로 걱정한 적도 있어."
"그래도 금릉이 종주직에 오른 뒤로 강 종주께서 제법 체면을 살려주시잖아요."
남사추가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선선히 웃었다. 그 말을 들은 금릉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듯 뒷목을 꾹 눌렀다.
"그건 남들 눈앞에서나 그러시는 거고...... 과자 먹느라 밥을 못 먹겠다고 하면 앞으로 석 달 열흘은 서신에 그걸로 잔소리를 울궈먹으실 거야."
"크하하! 야, 아씨. 너 혼날 때 꼬옥 나 불러라, 응? 그런 재밌는 구경을 이 남경의 님이 놓쳐서야 쓰겠- 어?"
"왜 그래, 경의?"
"저기 저 사람......?"
금릉이 손끝으로 가리킨 곳은 약방이었다. 그리고 약방을 나온 열네다섯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품속에 무언가를 숨긴 채 재빨리 걸음을 옮기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남경의가 어어, 하고 손가락질 했다.
"누님 몸종인 운패 아냐?"
"...응. 내 눈에도 그렇게 보였어."
남사추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금방 사라졌다곤 해도 그녀는 분명 남 소저가 어릴 적부터 모셔온 충복이었다. 웬만해선 규방 규수인 주인의 곁을 떠나지 않는 몸종이 홀로, 그것도 약방을 다녀갔다는 사실은 소년들에게 의심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당장은 안 캘 거야."
금릉이 한숨을 쉬며 남가 소녀들에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과년한 규수의 일인데 무슨 일일지 알고 내가 함부러 뒤를 캐겠어. 고소 남씨의 명예를 존중해서라도 그런 짓 안 해, 걱정 마."
"고마워요, 금릉."
남사추가 안심했다는 듯 미소지었다. 남경의 역시 조금 껄쩍지근한 기색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외숙께 무슨 일이 생기면 나설 거야."
"그땐 금릉이 나설 필요도 없이 내가 나설게요."
"걱정 마, 아씨. 나도 있고 사추도 있고 또 택무군도 있으니까!"
"그러고보니 택무군께서 오셨지. 부디 남 소저를 잘 타일러 데려가시면 좋으련만."
그러나 정말, 금릉이 어찌 알았겠는가.
믿어 마지 않았던 그 택무군이야말로 가장 믿을 수 없는 위험 인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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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그랑! 요란하게 다기 깨지는 소리는 다행히 별채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 소저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가슴을 들썩이다 고운 푸른색 능라비단 소매에 서로운 듯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거야?! 희신 오라버니께선 대체 무엇 때문에 사사건건 날 방해하지 못해 안달이신 거냐고!"
서러운 아가씨의 탄식에 유모는 방금 전 아가씨가 팽개친 깨진 찻잔을 치우다 슬그머니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유순한 제 아가씨가 이리 짜증을 낼 만도 했다. 요양을 핑계로 버티면 그래도 가문의 귀한 여식의 청을 뿌리칠 수 없어 돌아가 주리라 생각했던 남희신이 요 며칠 내내 강 종주님의 뒤를 늘어붙은 엿가락처럼 따라다니며 빈틈을 내어주지 않고 있었다. 만두를 빚든 자수를 놓든 강징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들은 강징에게 말을 붙여볼 새도 없이 그대로 제 손으로 들고 다시 처소로 돌아와야 하는 일이 허다했던 것이다.
한 번은 작정하고 강징의 외출에 몰래 따라 나선 적도 있었다. 얼굴이 거의 비칠 지경이라 사실상 쓰나마나인 하얀 유모를 쓰고 조심조심 따라가 보는 눈이 많은 장터에서 실수로 부딪힌 척이라도 할 심산이었다. 물론 남 소저라고 해서 체면도 자존심도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마음이 급했고 강징에 대한 연정은 깊었다. 이건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는 연정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출타하셨나 봅니다, 강징.
어느 새 남희신은 강 종주라는 호칭조차 영영 까먹어버린 것인지 강징을 늘 강징이라고만 부르고 있었다. 강징 역시 이젠 다 포기한 듯 허허 웃으며 "택무군께선 장터 구경을 오신 겁니까?" 하고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희신 오라버니가 어떤 분인가. 공자방 1위의 명성이 아깝지 않은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사내다운 어깨에 보는 이마다 한숨짓게 만드는 준수한 얼굴을 가진 사내가 아닌가. 자연스럽게 강징의 몸을 반쯤 가리다시피 하며 강징의 뒤에서 걸음을 옮기는 남희신이라는 철벽에 가로막힌 남 소저는 그날 또 한 번 허탕을 치고 털레털레 연화오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러다 약혼은커녕 얼굴 한 번 뵙지도 못하고 고소로 돌아가게 생겼어...... 어떡하면 좋아, 유모?!"
"진정하세요, 아가씨. 어찌됐든 지금 강 종주님께선 선도 안 보시고 숨겨둔 여인이 있는 것도 아니시잖아요. 자주 뵙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 강 종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미색이 뛰어난 처자는 온 운몽을 둘러봐도 아가씨밖에 없으세요."
"아니, 아니야...... 신붓감을 꼭 운몽에서만 찾으라는 법은 없잖아. 섭하엔 나랑은 달리 어른스럽고 대담한 미녀도 많다고 그러고, 외가인 미산 우씨에서도 강 종주님의 혼처를 물색하고 있다잖아. 안 돼, 안 돼. 정말 시간이 없어! 그, 그 분은... 그 분은 내가 방계라서 싫어하시는 걸까?"
"몇 번을 말씀드렸잖아요. 이제껏 강 종주님께서 선을 본 처자들 중에서도 방계 혈족 아가씨들이 많았다고요. 강 종주님께서 원하시는 건 그저 여인다운 현숙함과 미색이 으뜸이라는 거예요. 거기에 후사만 낳는다면ㅡ"
"어머, 유모!"
"이제 부끄러워 하시기만 하면 안 돼요. 사실 강 종주님에게 있어 가장 급한 건 후삽니다. 제아무리 미색이 뛰어나든 현숙하든 운몽 강씨의 적자를 못 낳는 여인은 강 종주님껜 쓸모가 없어요. 허니 아가씨께서도 꾸준히 탕약을 잘 챙겨드시고 진맥도 받으셔야 합니다. ...오늘도 운패를 약방에 보내놨습니다. 곧 돌아오겠죠."
약방. 그 말에 남 소저의 두 뺨이 붉어졌다. 눈썹머리를 찡그리고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지만 유모는 그런 아가씨를 이해한다는 듯 조곤조곤 타이르기 시작했다.
"압니다. 이 어멈은 다 알아요. 하지만 아가씨. 이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마음에도 없는 사내와 혼인하실래요? 아니면 먼저 움직여 원하는 것을 얻으실래요?"
"나, 나는......"
"생각해보니 저희가 너무 안일했어요. 그토록 오래 수행하신, 한 가문의 종주이신 분께 미약 몇 방울 섞은 간식이 통했을 것 같진 않아요."
"유모! 누가 들으면ㅡ"
"어차피 연화오 것들은 저희 별채에 신경도 안 씁니다. 부엌도 따로 있는 별채에 바깥 것들이 어찌 오겠어요? 그러니 운패가 약을 사서 돌아오면 방법을 조금 바꿔보는 거예요."
"어떻게?"
"아가씨는 저만 믿으세요."
불안한 듯 어깨를 떠는 제 작은 아가씨의 어깨를 감싸쥐며 유모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그녀는 본래 활달하고 여기저기 쏘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정이었다. 고소 남씨의 노비가 되며 소음 하나 없이 고요하고 깊은 첩첩산중에 갇혀 지내는 생활엔 이젠 진력이 날 지경이었다. 이따금 숨 쉬는 구멍처럼 채의진으로 내려가 물건을 사 오는 일이라도 없었으면 아마 미쳐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도 이젠 늙었다. 산 속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버거워 무릎이며 온몸이 쑤시고 비명을 질러댔다.
반면에 운몽이란 곳은 어떠한가! 따스한 햇살과 맑은 강물이 참으로 시원한 자유로운 땅이었다. 시장은 활기가 넘쳤고 연화오 역시 노복들이 까르르 웃으며 이따금 아웅다웅대기도 하는, 그야말로 사람 사는 곳 같았다. 그런 곳의 안주인 자리에 제 아가씨가 들어가기만 한다면...... 풍요롭고 활기찬 이곳에서 귀여운 아가씨의 시중을 들고 이것저것 풍족하게 챙긴 후 노년엔 면천되어 각자 가정을 꾸린 자식들과 손주들의 시중을 받으며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게다가 아들딸 부부의 가족들 역시 아가씨께 부탁드려 이 좋은 땅에서 살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유모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넘치는 듯 했다. 우선 불안해하는 아가씨께 따뜻한 차를 내어드리고, 운패가 은밀히 사 온 두 개의 약첩을 정성스레 달였다. 하나는 미약이었고, 또 하나는 회임을 유도하는 약으로 이는 연화오에 올 때부터 남 소저가 꾸준히 먹어온 것이었다. 약이 다 달여지려면 아직 멀었다. 그 동안 미약을 섞을 술을 가지러 유모가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그림자는 소리없이 다가와 유모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사람의 급소가 어디인지 정확히 아는 손놀림이었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유모가 하얀 소매폭 속으로 떨어지듯 쓰러졌다. 유모의 몸을 받아들어 조심스레 어깨에 짊어진 남희신이 그저 평온하고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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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내려놓고 저녁상을 들라 이르던 강징의 입이 떡 벌어졌다. 평소라면 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잣죽 냄새에 입맛을 다셨을 터였다. 그러나 그 상을 손수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온 이가 남가 종주 남희신이라는 점이 강징이 식욕도 잊고 기함하게 만든 것이다.
"택무군!"
"공무가 바빠 오늘은 서재에서 일을 하며 식사를 하신다 들어 이리 왔습니다."
"아, 아니, 왜?!"
"이 사람과 술 한 잔을 하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을 들은 강징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랬다. 분명 남희신이 찾아왔을 때 점심을 권하고 술을 할 수 있다면 같이 한 잔 하고 싶다고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분명 남희신은 술을 즐기지 않을 터였는데......
"술기운은 날릴 수 있습니다. 듣자하니 이 하풍주가 그렇게나 향이 좋다지요? 술기운만 날려버리면 향 좋은 차를 즐기는 것과 그리 다를 게 무엇 있겠습니까. 강 종주와 차를 나눈다고 생각하지요."
"택무군......"
"희신이라 불러주시지요."
달이 아름다우니 이런 밤엔 마음을 나눌 상대가 필요합니다.
강징이 탄복인지 탄식인지 모를 한숨을 흘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하얀 달빛을 받으며 술상을 받쳐든 미인이라니. 어느 사내가 이를 마다할 수 있을까! 물론 그 미인이 꼭 여자라는 법은 없었지만. 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저와 진정한 친분을 나누려는 고소 남씨의 종주의 진심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강징의 입가가 선선히 미소를 그렸다.
"알겠습니다, 희신. 오늘밤만큼은 지기로서 허심탄회하게 술잔을 나눠보시지요."
남희신이 활짝 웃었다.
그야말로 담청색 하늘 위로 한가득 들어찬 새하얀 보름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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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는? 아직도 안 돌아왔어?"
"그런 것 같아요. 술이랑 약만 올려두고 어딜 간 건지......"
머리를 만져주던 운패의 대답에 남 소저의 미간이 좁혀졌다. 기껏 결심한 일인데도 가장 큰 조력자의 부재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강 종주님께선 오늘 시찰을 다녀오셔서 평소보다 곤하실 테고 저녁엔 꼭 반주를 드신다잖아요. 기회예요! 강 종주님의 저녁상에 올릴 술병을 몰래 유모가 준비한 술병으로 바꿔놓았으니 강 종주님께서도 진작 그걸 드셨을 거라구요. 지금 가시지 않으면 안 돼요!"
"...맞아. 이건 기회야. 유모는, 유모는 뭔가 다른 일이 있겠지."
입술을 깨물며 남 소저가 벌떡 일어났다. 능화경에 비친 자태가 사뭇 아름답고 요요했다. 매끄럽게 틀어올린 머리 언저리에서 매화 모양 백옥 보요가 남 소저가 움직일 때마다 청아하게 흔들렸고, 살구색 치마는 하늘거리며 부드러운 선을 그렸다.
연화오 가복들의 눈에 띄지 않게 새카만 천을 뒤집어쓴 남 소저는 기척을 숨기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병약하다곤 해도 남가의 여식인 이상 금단을 맺고 기척을 숨기는 것쯤은 어릴 적부터 단련해 온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인 유모나 운패의 부축을 받는다면 오히려 더 들키기 쉬울 터라 이 일은 온전히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오늘은 강징이 서재에서 저녁을 든다는 건 운패가 미리 알아온 정보였다. 서재에 다다른 남 소저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쥔 채 후우, 하고 떨리는 숨을 골랐다.
새하얗고 고운 손끝이 막 서재 문에 닿았을 때였다. 안쪽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남 소저가 지레 깜짝 놀라 "꺄악!" 소리를 질렀다. 뒤이어 강징의 다급한 목소리가 "태, 택무군! 희신!" 하고 외쳤다.
"희신 오라버니?!"
남 소저가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강징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나 달빛을 받으며 당황해하는 미녀의 미모보다는 당장 제 품 안에서 쓰러진 채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는 남희신이 더 급했다.
"남 소저가 어찌 이 시각에 여기에....? 아, 아니 그보다! 갑자기 택무군께서 쓰러지셨소!"
"네?!"
"택무군께 뭔가 지병이라도 있으신 겝니까?! 허면 얼른 조치를 취해야-"
"아, 아니, 저는, 그게, 그러니까......"
"혹 제게 맞춰 무리해서 술을 드셔서 이리 되신 건 아닌지......"
"술이요?"
남 소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강징은 미처 그것까진 보지 못했다.
"제가 저녁을 먹을 때 반주를 한 잔씩 하는데 오늘 택무군께서 건너오셔서 같이 술을 들게 되었는데 갑자기 이리 쓰러지시니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 그 술을 오라버니께서 드셨단 말입니까?!"
"예? 아, 예. 혹 고소 남씨 사람이 술을 마셨을 때 따로 듣는 약이라도 있을까요?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의원부터-"
"그게, 그게......!"
의원이라니! 아니, 애초에 술도 못 하는 고소 남씨 사람이 대체 그 술을 왜 마셨단 말인가! 의원이 와서 미약의 존재를 밝히면 그 일은 또 어떻게 수습한단 말인가! 운몽의 종주가 운몽 약방에서 구한 미약의 소재를 알아내는 것쯤이야 석가모니가 제 손 안에서 노는 손오공을 붙잡는 것보다 쉬울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남 소저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강징이 의아한 얼굴로 "남 소저? 얼른 의원을 불러-" 까지 말했을 때였다.
"...의원은 필요없습니다."
강징의 고개가 순식간에 아래로 향했다. 강징의 품속에서 남희신이 가늘게 눈을 뜨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애써 웃고 있었다. 그러다 눈동자만 스르르 굴려 제 친척 누이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느냐?"
남희신의 말은 쏟아지는 백 발의 화살처럼 날카로웠다. 남 소저가 후들후들 떨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강징은 이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남희신과 남 소저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동생은 이만 처소로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예? 하지만 의원이-"
"아, 아아, 아아아......!"
주저앉은 남 소저는 비명과도 같이 울부짖다 그대로 상반신만을 뒤로 틀어 허우적대다 몸을 일으켜 그대로 쏜살같이 줄행랑을 쳐 버렸다. 남가 여식이라곤 상상도 못할 요란한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고, 강징은 허한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강징."
남희신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향기로운 술냄새가 풍겨왔다. 그제서야 강징은 남희신이 술기운을 날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저가 주는 잔을 모두 받아마셨음을 눈치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남희신이 억센 손아귀힘으로 강징의 손을 붙들고 제 아랫도리로 가져갔다. 강징은 뭐라 다시 말하기도 전에 제 손 안에 뿌듯하게 들어찬,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존재감에 경악하고 말았다.
"아악?!"
기겁하며 강징이 손을 떼려 했지만 남희신은 오히려 한 번 손이 닿자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강징의 손을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 강징의 허리를 단숨에 껴안고 몸을 밀착시켰다.
"뭐 하는 짓입니-!" 어, 어어? 어?!"
"알고 있잖아."
남희신이 싱긋 웃었다. 술기운으로 붉게 물든 뺨과 열감에 들떠 일렁이는 눈, 하얗게 빚어놓은 조각같은 얼굴이 강징의 어깨에 얹어졌다. 목덜미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엔 교태가 흘러넘쳤다. 그 남희신이.
"내가 당신 좋아하는 거, 진작 눈치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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