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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0 23:35
진정령 ㅅㅍ
본편은 여기가 마지막이고 내일이면 외전까지 해서 다 끝날 것 같다.
개연성 없지만 얘네가 그런 일 겪고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 자체가 개연성 없으니 어쩔 수 없었음......
조금 긺 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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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계 사람이라면 섭회상이 누구인지 몰라볼 수 없었다. 수진계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검은 옷의 귀공자가 웬 거지를 길 한가운데에서 끌어안는 걸 보는 일은 흔치 않아서, 주위에서는 작게 소동이 일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퍼뜩 정신이 든 건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아키라 때문이었다.

-스승님......

주눅든 그 목소리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여기서 아키라의 말을 알아들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아키라에게 글을 가르쳤지, 대륙말을 가르치지는 않았으니까.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나는 섭회상의 품을 벗어났다. 그와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곧장 아키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아키라는 반쯤은 겁먹은 얼굴로, 반쯤은 섭회상이 누구인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그와 나를 번갈아보았다. 그러나 곧 스스로 답을 발견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화가!

나는 입을 벌렸지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경이로움이 서려았는 아키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섭회상에게 박혀있는 그 애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다시 보게 된 섭회상은...... 거기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가 정말 내 앞에 있었다. 눈물이 고인 그의 두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섭회상의 손이 천천히 다가와 내 뺨을 쓰다듬었다. 차갑고 부드러운 그 감촉을 나는 너무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곧 섭회상의 뒤로 우르르 달려온 부정세 수사들이 나를 보더니 멈칫했다. 섭회상이 그들을 뒤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뭔가 물을 새도 없이 내 손을 붙잡아 이끌었다.

사실 뭔가를 질문할 정신도 없었다. 속절없이 그에게 이끌려 가면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고, 애초에 무엇을 정리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호기심으로 가득찬, 그리고 약간은 겁에 질린 사람들의 시선이 사방에서 따갑게 느껴졌다. 숨이 막히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지 아닌지조차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간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마다 우르르 몰려오는 부정세 수사들을 우스워 했고, 아키라가 나를 잘 따라오는 것을 보며 안심했다.

머리 위로 태양이 아프게 내리쬐었다.

길거리였다가, 어딘가의 객잔이었다가, 방이었다. 방문이 닫힘과 동시에 섭회상이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도무지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두 팔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나와 맞닿은 몸을 안아보았다. 그 몸은 수증기로 변해 내 두 팔 사이를 빠져나가는 대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밀아.

어떻게 해야 하지. 어깨가 젖어드는 것을 나는 속절없이 느끼고만 서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따금 혼자 재회의 광경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상상 속 나는 항상 평온하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처럼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떠는 게 아니라. 마찬가지로, 상상 속 그는 무정할 정도로 침착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 달변가였다. 이렇게 침묵하고 있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하지. 한참 동안 입술만 달싹이다가, 나는 그를 불러보았다.

-종주.

-보고 싶었어.

섭회상이 기다렸다는 듯 내 어깨에 더 깊숙히 얼굴을 묻었다.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밀아.

너무도 부드럽게 내 가슴을 찔렀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내 상상일 리도 없으니, 꿈일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도무지 여기서 깰 것 같지가 않았다. 섭회상의 몸이 서서히 멀어지더니, 눈물젖은 얼굴로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것도 잠시였다. 맥이 풀리기라도 한 듯 그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기억 속에서보다 더 창백해지고 야윈 얼굴을.

아마 내 지금 얼굴도 그가 기억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나를 올려다보며 섭회상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새롭게 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흰 얼굴과 대비되는 내 그림자가 그의 옆으로 비스듬히 선 채 객잔 바닥 위로 길게 드리워 있었다. 그가 천천히 내 손을 잡아오자 그와 내 그림자가 이어졌다. 나는 그가 내 두 손에 이마를 기대는 것을 그저 무력하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한참동안 섭회상은 그렇게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자기를 다잡듯 어색하게 웃으며 내 손에 이마를 가져다댔다. 그러자 내 가슴이 더 견디지를 못 했다. 기침 소리에 그가 나를 다시 올려다보기 전에, 나는 천천히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이제 눈높이가 거의 같아진 그가 나에게 흐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널 다시 만나는 생각을 한 순간도 안 한 적 없어. 그런데 이상하지,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가 두 눈을 감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그저 물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왜? 섭회상이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그 질문은 항상 내 혀끝을 맴돌았다.

내가 아무리 견문이 좁고 학식이 얕아도, 섭회상과 내가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더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 그와 다시 만나고 말았으니, 부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약속했잖아.

툭 던져진 섭회상의 말에, 나는 두 눈을 깜박였다.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잖아. 그리고 너는 나와 한 약속을 항상 지켰으니까, 그것만 생각했어. 사실 너를 다시 만나는 게 무섭기도 해서, 네가 올 때까지 기다려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그러다간 정말 내가 죽을 것 같았어.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섭회상이 말을 이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대라면 십수 개를 댈 수 있어도, 살고 싶은 이유는 너를 다시 만나는 것 외에는 달리 없었어. 난 살고 싶어, 밀아. 네가 필요해. 뭐가 더 먼저인지를 모르겠어.

섭회상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못한 식물처럼 힘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오히려 누군가 내 머리 위로 찬물을 들이부은 것만 같았다. 방금 전부터 미묘하게 계속 느껴지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눈 앞의 섭회상은 마치 관음묘에서 금광요를 붙잡던 나 같았다.

-살아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해야할 걸 알아.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부디 곁에 있어주면 안 되겠니?

이제 나는 금광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당연히 나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을 것이며 나와 함께 떠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너무 지저분하니까. 이별은 깔끔하다. 하지만 그 반대는 바로 이렇다. 살아만 달라고 해서 나는 살았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 얼굴을 보면, 또 다른 욕심들이 꾸역꾸역 생겨나는 것이다.

죽었어야 했나. 내가 살아있어서, 그게 내 욕심이어서, 내 과거도 지금 눈 앞의 섭회상도 망가져버리면 어떻게 해야하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모른다 하더라도 대답을 해야 했다. 섭회상이 내게로 몸을 숙인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옷깃 사이로 드러난 섭회상의 마른 목뼈는 마치 깃털 빠진 새의 날갯깃 같았다. 심장이 할퀴듯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손을 뻗었다. 내 거친 손이 그의 부드러운 얼굴에 생채기라도 낼까 봐 무서웠기에, 내 움직임은 아주 느렸다. 그러나 그가 내 손길을 기다리며 두 눈을 감았고, 결국 내 손바닥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가 그것을 원해서, 나도 원했다. 내가 원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말은 사족에 불과했다. 나는 마찬가지 아주 느리게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말을 내뱉고 나자, 이젠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어쩐지 홀가분하다 못해 가슴 한 구석이 시렸다. 흔들리는 눈망울을 마주보며, 나는 다신 볼 수 없는 얼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애써 태연한 척 웃어보였다. 그러면 무엇이든 조금이나마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어쩌면 내 표정이 방금 전의 섭회상과 비슷할 것도 같았다.

-제가 온 겁니다. 이번에는 묻지 않으십니까? 왜 왔냐고요.

대꾸하는 대신 섭회상은 울었다.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울었다. 어쩔 줄 모르고 그의 얼굴을 더듬던 나를 그는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

포옹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모른다. 울음을 그치고도 섭회상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안긴 채 간간히 기침을 하면서, 창가에 날아다니는 빛먼지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늘 그립던 향을 맡으면 맡을수록 어째 점점 더 현실감이 없어서, 나는 발 닿지 않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점점 어지러웠다.

그래서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섭회상의 품을 빠져나갔다. 그는 나를 순순히 놓아주었지만, 내 팔 한쪽을 꼭 붙잡은 채였다. 두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했다.

-종주. 저 일단은 목욕부터 좀 하고 오겠습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섭회상이 놔 달라는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인지 오히려 더 끌어안아와서, 나는 말 그대로 질겁했다.

-하지만 나는 네가 어떻든 좋은걸.

-아니......

-사랑해. 밀아.

정말 영악한 사람이었다. 그런 목소리로 그 말을 들으면, 아무리 사나운 짐승이어도 온순해질 것이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예. 그러니 좀 놓아주세요. 종주.

그게 내가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점잖음이었다. 섭회상이 마침내 나를 놓아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주본 섭회상의 두 눈은 다시 눈물로 젖어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무심해. 정말 어쩜 그렇게 변한 게 없니?

그가 중얼거렸다.

-너는 내가 지저분하면 안아주지도 않을 거야?

-제가 그러겠습니까? 종주님이야말로 정말 여전하시네요.

섭회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싫어?

태연한 척 하지만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그저 헛웃음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린 그림 속에도, 그 어디에도 없었던 그 얼굴을.

내가 바라보는 동안 서서히 섭회상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눈빛은 하지 마.

-예?

무슨 눈빛을 말하는 걸까 고민하는 사이 그가 말했다.

-다 타버린 것 같아.

그러면서 그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내 옷소매를 틀어쥔 그의 손마디가 하얀 것을 바라보다가, 그 위에 손을 올렸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나를 놓아줄 때까지.

섭회상의 방 옆이 비어있는 게 우연인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튼 거긴 이제 내 방이었다. 섭회상의 그의 방을 나와 밑을 내려다보자, 다행히도 잘 따라와 있는 아키라가 보였다. 나는 시커먼 부정세 수사들 옆에서 빳빳이 고개를 들고 있는 아키라를 발견하곤 나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아키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손짓하자 열심히 계단을 뛰어올라온 아키라는 섭회상을 보더니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섭회상도 운 티가 역력한 얼굴을 가리려는 듯 옷소매로 얼굴을 가렸기에, 나는 그냥 아키라를 내 방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어차피 둘 다 씻어야 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대충 욕조 두 개에 뜨거운 물이 담겼다. 그 뜨거운 물에 잠긴 채로 좀 쉴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옆의 나무통에 담겨있는 아키라 때문이었다. 아키라는 나에게 화살 쏘듯 질문을 우다다 던졌다. 그 심정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내 마음이 다 정돈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왜 또 거짓말했어요? 그냥 화가 아니죠! 왕 아니에요 왕?

-그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라, 그래.

그렇게 대답한 것을 나는 후회했다. 아키라의 눈이 빠질까 봐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러면 스승님은......

-부하.

-그냥 부하 아니잖아요!

잔뜩 흥분해서 물을 첨벙거리는 아키라를 나는 반쯤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른 씻기나 해. 쪼글쪼글해진다.

-스승님......

아키라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민하려던 찰나, 아키라가 불쑥 말했다.

-다행이에요.

-뭐가?

-이젠 스승님이 어느날 갑자기 죽어버릴까봐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잖아요. 맞죠?

할 말을 잃은 나를, 아키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바라보았다.

-조금 질투나기는 하지만......

-뭐가?

바보가 된 기분으로 나는 되물었다. 아키라가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외에 아키라는 나에게 여러가지를 더 물어보았지만,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것은 몇 개 없었다. 대신 물을 수 있는 건 있었다.

-너 아직도 검 배우고 싶어?

내 질문에, 몸을 닦던 아키라의 손이 우뚝 멈췄다.

-스승님, 지금 장난하는 거죠?

-뭐?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을 뭘로 들은 거예요!

아키라가 갑자기 꽥 외쳤다.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알 수가 없었지만 나는 그냥 말을 더 안 얹기로 했다. 그게 현명한 선택일 것 같았다.

-종주님께 너를 문하생으로 받아주시겠느냐 여쭤보려고 했지.

수사 한둘 늘어난다고 부정세 멸망하지는 않겠지.

-종주? 그게 그 사람 이름이에요?

-아니.

그 뒤로 물이 식을 때까지 나는 아키라와 시덥지 않은 이야기들을 계속 나누었다. 사실 시덥잖다고만은 말할 수 없었다. 수사가 무엇인지부터 이것저것 설명해줘야 했으니까.

내가 아키라에게 검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래봐야 내가 가르쳐준 걸 동영의 검으로 써먹긴 힘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예 이 땅에서 수사가 될 생각이 있다면야, 못 배우게 할 이유가 없지.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지금 자기가 꿈 꾸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닐걸. 우리가 꿈을 나눠꿀 사이는 아니니까.

내 말에 아키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모르겠다. 여전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목욕을 빌미로 섭회상과 잠시 떨어지기로 한 건 잘한 선택이었다. 조금이라도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함께 있어달라는 섭회상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아야만 했으니까. 섭회상이 알고 있을까? 나는 이제 수사 노릇하기엔 영 글렀다는 것을. 부정세 수사복을 준다면 입을 순 있지만, 의미가 있을까.

그래도 되는 게 맞긴 한가? 물에서 나온 나는 급하게 준비된 것이 분명한 새옷을 걸치며 심호흡을 했다.

-스승님, 이거 어떻게 입어요?

욕조에 서서 그렇게 묻는 아키라 덕에 긴장이 풀리긴 했지만.

어떻게든 해 봐야지. 아키라가 옷 입는 것을 도와준 뒤 섭회상의 방문을 열며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창가에 앉아있던 섭회상이 나를 돌아보며 미소지어보였다. 그가 자주 나에게 지어주던 그 미소였다. 물론 초췌한 안색과 붉어진 눈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맘 같아선 그런 그의 얼굴을 십 년은 보고 있어야 마음이 좀 진정될 것 같았지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찻잔이 놓인 그의 맞은편 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어쩐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투명한 찻물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면, 섭회상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정말 동영에 가 있었던 거구나.

고개를 들자, 섭회상이 나를 가라앉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그곳에 있을 거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어. 하지만...... 네가 이 땅에 남아있을 이유가 적어도 한 두 개는 더 있었으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섭회상의 시선이 말해주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의 입술에서 어떤 이름이 나올지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의 시신은 그 조카가 수습했어. 그 어머니의 시신도......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것만은 약속할게. 죽은 이를 원망할 필요 없다고 네가 나에게 알려줬잖아.

나는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둔한 무언가가 가슴께에 느껴졌다. 그러나 그게 아픔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원망스럽지.

나는 자동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섭회상이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종주께서 그리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합니다.

그는 복수를 해야 했고, 그 복수의 과정에서 금광요는 모든 것을 알고 죽어야 했다. 그래야 했다는 것을 나는 머리로 알았다.

이해했다. 금광요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었다면, 입증할 수 없는 죄책감에 나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짓눌렸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드를 생각했겠지. 그러나 그와 나의 관계는 그가 죽는 그 순간 끊겼고, 나는 더 이상 그를 전처럼 곱씹을 수 없었다.

그러니 섭회상이 금광요에게서 나를 빼앗은 게 아니다. 그가 나에게서 금광요를 영영 가져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내가 글러먹은 인간이어서 아니겠는가. 금광요가 나를 믿은 게 그의 실수여서, 그래서......

그래서, 한 번도 섭회상의 저 가는 목줄기를 움켜쥐는 꿈은 꾼 적이 없었다. 차라리 내 목을 쥐면 쥐었지, 저 사람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섭회상은 내 생각을 읽은 듯 흐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결국 나를 용서하는 거니?

용서를 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라고 대답하려다가, 그가 원하는 대답이 그게 아닐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어깨가 힘이 풀린 듯 축 늘어졌다.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난 몇 개월 간 나는 많이 바빴어. 네가 날 떠나기로 결정한 거니까...... 그걸 받아들이고 너를 찾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정신 차려보니 너를 백방으로 찾고 있더라. 네가 살아있다고 믿었어.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으니까. 물론 네가 내 얼굴을 보고 싶어할 거라고 확신은 못 했지만...... 너에게마저 불청객이 되면 정말 못 견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널 다시 만나야만 하겠어서.

말을 마친 그는 무언가 더 하지 못 한 말이 있는 듯 망설였다. 나야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그저 그를 마주보고만 있었다. 섭회상의 두 손이 탁상 위를 잠시 헤매더니 주먹을 말아쥐었다.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나는 그에게 물었다.

-부채가 없으시네요?

섭회상이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잃어버린 것 같아. 방금 전, 길거리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부릅뜬 눈으로 섭회상의 빈 손을 바라보았으나, 섭회상은 오히려 마음을 정한 듯 나와 시선을 맞췄다.

-밀아. 나와 함께 부정세로 가 줄래?

방금 전 것과 이건 뭔가 서로 다른 부탁이겠지. 그 정도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도려가 되어줘.

아주 잠시 동안, 또는 아주 오랫동안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섭회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시선을 내리자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져 있는 두 손이 보였다. 그걸 본다고 정신이 드는 건 아니었지만...... 확인할 것은 확인해야 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섭회상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두 눈을 깜박였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었다. 아무리 내가 섭회상에게 원하는 건 다 주겠다고 했다지만, 이건 물고기에게 갑자기 물 밖으로 나와 숨 쉬라고 하는 격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그의 제안이 말도 안 되는 이유는 오백 개 넘게 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탈사당하신 거 아니죠.

산통깨는 질문인 것을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이건 내가 아는 섭회상답지 않았다. 섭회상이 쓰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알아. 내가 답지 않게 너무 성급하지? 하지만 더 이상 너를 속여서는 안 되잖아.

할말을 잃은 나에게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내 마음은 확고한데, 아무 말 없이 부정세로 널 데려가는 건 옳지 않잖아. 네가 나를 거절한대도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거잖니. 그건 아주 힘든 일이겠지. 그래도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 알아.

말을 마친 그가 아주 초조한 듯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가 다시 폈다.

-하지만 정말...... 안 되겠니?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섭회상은 별다른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극도로 긴장하다 못해 침착해진 얼굴이었다. 물이 요란스럽게 끓다가도, 너무 끓어 수증기가 되면 고요해지지 않는가. 그에게서 퍼져나오는 기운이 바로 그러했다.

그새 야위어 날카로워진 턱선과 대비되어, 그게 조금도 섬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미치고 싶다던 그의 말이 왜 갑자기 떠오르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미 그는 미친 게 아닐까? 아니면 내가 미친 건가?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현실감이 없는 만큼, 생각해보겠다고 일단 말하고 고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게 현실이든 아니든, 섭회상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본 만큼 나도 그에 상응하는 답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손을 잡을 듯 말 듯 그 근처에서 망설이는 섭회상의 손을 바라보다가, 그 위를 내 손으로 덮었다. 그의 손이 그대로 굳는 게 느껴졌다.

-종주.

그렇게 부르기는 불렀으나, 곧장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침묵하던 나는 늘 그렇듯 실없는 말이나 내놓았다.

-이건 제가 되냐 안 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점에서?

나는 이미 이 대화의 결말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내가 섭회상을 말로 이길 수 있을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시도는 해 봐야 했다.

-가문이니 의무니 하는 이야기 꺼내는 건 저도 싫지만, 그래도 섭씨를 신경은 쓰셔야죠. 안 그래도...... 그런데, 청하 섭씨가...... 이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무리 사람들이 청하 섭씨에 큰 관심이 없대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미 섭회상은 그 누구도 가지 않을 길을 걸어왔다. 왜 계속 가시밭길을 자처하려는 것인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섭회상이 말했다.

-지난 일 년 간 분명해졌어. 세간의 평이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야. 반면 너는 내가 원하는 유일한 것인데, 내가 아무리 어리석다고 해도 그렇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분명하잖아.

-하지만 종주......

나는 섭회상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현실적인 문제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나이야 금단 있는 수행자에게 무의미하다 치지만, 내 금단은 이미 금단이라 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고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섭회상에게 줄 수 없는 처지였다.

-그건 간단해. 너도 알잖아? 섭씨 피에 무엇이 흐르는지. 그 고리를 한 번이라도 끊어낼 수 있다면 나쁠 것 없지.

뭐?

-예?

나는 고개를 들어 섭회상을 바라보았다. 섭회상이 조금 가까워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여전히 기묘한 열기가 그의 두 눈에 서려 있었다.

-또 뭐가 고민이니? 다 이야기해 봐.

섭회상의 손이 점점 더 강하게 내 손을 쥐어왔다.

-신기하지. 널 설득할 거리를 이 자리에서 수백 개는 더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아. 어쩌면 내가...... 너무 멀리 와 버렸는지도 모르지. 네가 내 눈 앞에 있는데 어떻게 너를 다시 놓아줄 수 있겠어? 그런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오만했어.

-종주......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내 손을 놓는 그가 나는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그가 꺼져가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

피가 통하는 손에서 얼얼한 감각이 올라왔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그가 왜 사과했는지는 몰라도 뭔가 대꾸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먼저 입을 뗀 건 섭회상이었다.

-하지만 믿어 줘. 전부터 계속 생각해 왔어. 청하 섭씨가 너에게 어떻게 속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결론은 하나잖아. 그렇지 않니?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섭회상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마음을 정리한 듯, 한결 차분해진 눈이었다.

-나도, 우리 가문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 알아. 계속 모른 척 해왔어. 무서웠으니까.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네가 있다면, 네가 내 옆에 있어준다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만 하는 거겠지. 내가 너를...... 지키고 싶으니까.

섭회상의 말이 무겁게 내 어깨를 내리눌렀다. 나는 우리 둘 다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전히 나는 무턱대고 그에게 약속부터 해댔고, 그는 내가 그 약속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도 나도 서로를 안다는 것이었다.

알아서, 그가 지금 나에게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또 잠 못 이루는 날들을 보냈을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아니면 안 돼. 네가 없으면 할 수 없어. 그럴 자신이 없어, 더 이상은...... 그러니 부탁할게, 밀아. 부디 내 옆에 있어줘.

연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켰다. 유릿조각이 목을 넘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애초에 내가 이 부탁을 거절할 수 있긴 한 것인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할 리는 없을 것이다. 항상 그렇듯, 나는 섭회상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짜놓은 계획에 내가 다시 한 번 하나의 조각으로 들어맞을 일이 있다면, 그리고 그래야 한다면...... 나는 또 다시 그가 바둑돌을 놓는 대로 움직일 자신이 있었다. 나는 살아갈 자격도, 행복할 자격도 없을지 모르지만, 섭회상은 아니니까.

그는 행복해야 했다. 그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종주님은 저에게 항상 과분하시죠.

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 사실에 제가 적응해야 한다면, 해야지 뭐 어떡하겠습니까. 사람들 손가락질 받는 것도 종주님이고 손해보는 것도 종주님인데, 종주님께서 그게 좋으시다면 제가 뭘 어떡하겠어요.

내 대답에 섭회상은 조금씩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갔다. 여전히 내 손 위에 얹혀있던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꼈지만, 나는 그의 두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더 멋드러진 말을 내놓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었다.

-진심이에요.

섭회상이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동시에 웃었다. 내가 손을 뻗어 그 눈물을 닦아주는 동안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아. 그건 항상 알고 있었어, 밀아.

*

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이제는 세상에 거의 없지만, 있다면 알 것이다. 나는 이미 결정한 일에 미련을 두지 않는 편이라는 것을. 어차피 내가 섭회상을 거절할 수 없는 바에, 굳이 이것저것 더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눈물을 그칠 수 있게 동영에서의 일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해나가기 시작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손목에 남은 흉터를 매만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뭐 이야기한 것도 없는데 어느새 저녁이었다. 창 밖으로부터 길거리의 소음을 싣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노을지는 하늘은 동영이나 여기나 정말 다를 게 없었다.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앉은 섭회상은 덜 마른 내 머리카락을 훑어내렸다. 나는 멍하니 그 손길을 느꼈다.

-그 아이 이름이 뭐랬더라?

-아키라요? 맑을 정 자를 씁니다.

-그래? 예쁜 이름이네.

이름 하니까, 내 이름은 계속 밀인지 무엇일지 알 수가 없었다. 상관은 없다. 하지만 이대로 내 이름을 갈아버리게 될 것인지가 궁금하긴 했다.

-그런데, 종주. 저는 앞으로도 계속 밀입니까?

내 질문이 뜬금 없긴 했는지, 섭회상은 놀란 듯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러더니 불쑥 내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글쎄. 나만 쓰는 애칭이지 않을까?

순간 여러 모로 소름이 돋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떨자 섭회상이 작게 웃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왜? 싫어?

-싫다기보다는......

-너도 날 이름으로 부르면 공평하지 않겠니?

-아뇨? 전혀요.

어떤 의미에서 뭐가 공평하다는 것인지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섭회상을 더 섭섭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나를 어떻게 부르든 상관 없다고 말하려 할 때였다.

-그럼 너는 앞으로 나를 뭐라고 부르게?

-종주님이요.

대충 이 대화가 향하는 맥락은 파악했지만 거기 휘말리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섭회상이 맥빠진 듯 내 어깨 위로 한숨을 쉬는 것을 모른 척하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 객잔인 앞 건물의 복도 창문 사이로,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그럼 네가 평생 내 이름을 부르는 날은 없는 거니?

-글쎄요. 제가 한 번 적당히 잘 조절해보겠습니다.

내 대답에, 섭회상은 작게 웃었다. 그리곤 대화 주제를 돌려버렸다.

-아무튼 그 애에게는 고마워해야겠는걸. 너를 살렸다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은데 말이 통할지......

-제가 전해드리죠.

지금은 말고, 이따가. 또는 내일. 붉은 빛에 젖은 방 안을 둘러보며 나는 물었다.

-부정세에 갈 때, 그 애를 데려가도 될까요?

-당연하지.

-섭씨 문하생으로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럼. 네가 원한다면야.

그 대답이 너무 달콤해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내 어깨에 여전히 얼굴을 묻은 채, 섭회상이 이번엔 내 머리카락으로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안 된다고 했으면 어떡할 생각이었어?

모르겠다. 생각 안 해봤다. 애초에 그를 만날 거라는 생각을 못 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열심히 고민을 하는데, 섭회상이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그럴 것 같았어.

-예?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저도 모르는 걸 종주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다 아는 수가 있지.

그러면서 그는 내 머리카락을 지그시 쥐었다. 두피로부터 느껴지는 묘한 감각에, 나는 작게 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보니 이릉노조는요? 어떻게 지낸답니까?

그건 그리 좋은 질문은 아닌 듯했다. 섭회상이 느리게 내 머리카락을 놓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글쎄. 아마 함광군과 함께 잘 지내고 있겠지.

그의 대답 뒤로 침묵이 흘렀다. 위무선. 나는 섭회상의 검은 옷자락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 이름을 곱씹었다. 위무선과 섭회상은 친구 사이였다고 했지. 하지만 분명 뭔가 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섭회상이 위무선을 헌사한 것과 관련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자기를 되살려놓으면 소름돋을 법도 하다. 그리고 따지자면 섭회상이 위무선을 위해 그를 헌사했다기보다는 복수의 일환에 가까웠으니, 위무선이라면 자기가 이용당했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아니다. 이용당한 게 맞구나.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나는 섭회상의 심정을 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섭회상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웃었다.

-사이가 멀어지는 건 당연하지. 예상하고 있었어.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 서린 씁쓸함은 당연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자기를 되살려준 건데, 이릉노조가 생각보다 예의 없네요.

-위 형은 원래 예의 같은 것과는 담 쌓은 사람인걸. 아무튼, 나는 괜찮아.

-괜찮긴요.

위무선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기어이 그와의 관계가 틀어졌다니 입맛이 썼다. 그러나 섭회상이 나를 두 팔로 끌어안아와서 곧 그런 생각마저 사라졌다.

-정말 괜찮아. 네가 있잖아. 그리고 나름 고마움도 받고 있는걸.

-고마움이요?

-함광군과는 아주 조금이지만 사이가 좋아졌거든.

함광군. 남망기? 뜬금 없는 이름이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섭회상과 남희신 사이가 좋을 수가 없고 남망기는 남희신과 우애가 그리 얕지 않을 텐데.

-내가 함광군이었어도, 나에게 고마워 할 것 같기는 해.

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섭회상 때문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대신 다른 질문을 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함광군이 선독 자리에 앉았다고 하셨죠.

왜요? 그 질문을 나는 생략했다. 그래도 섭회상이 충분히 알아들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나는 내 그릇을 잘 아는걸. 무엇보다도, 내게는 급하게 꺼야 할 불이 있잖아.

그게 정말 그가 원하는 것일까 생각하면서도, 나는 자기 꿈이 평생 섭이공자로 사는 것이라던 섭회상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섭회상은 나를 끌어안은 그대로 뭔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뒷목에 닿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다가, 나는 문득 입을 열었다.

-작년 칠석 기억하세요? 벌써 일 년이 지났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시간이 빠르게 흐른 것처럼 말하는구나.

-부정세 떠난 뒤로는 거의 눈 깜박할 사이에 반 년이 흐른 것 같습니다. 헤어져 있는 게 이런 느낌인 거면, 직녀든 견우든 그리 한탄할 것도 없겠어요.

내 말에, 잠시 침묵하던 섭회상이 말했다.

-언젠간 정말 다시 만날 거라고 믿은 거니?

-예?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리 담담할 수가 있어.

나는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나를 더 꽉 끌어안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하루가 평생 같았어.

그제야 나는 섭회상이 서운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섭회상을 서운하게 한 전적이야 많았지만, 그때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두 손을 들어, 내 어깨에 늘어져 있는 섭회상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멀어지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잠자코 마주했다.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노을빛에 붉어진 그의 두 뺨을 감싸도 마찬가지였다. 이 순간이 평생 같다면 그는 믿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섭회상이 내 두 손목을 쥐더니 고개를 기울여 손바닥에 지그시 입술을 눌러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손바닥에서부터 타고 오르는 간지러움이 심장에 직격으로 꽂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침묵 속에서 어느새 짙어져 있는 섭회상의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더듬거렸다.

-종주. 저 심장 무리하면 안 됩니다.

다른 건 몰라도, 만나자마자 또 피를 토해서 소동을 피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섭회상이 웃는 게 손바닥 위로 느껴졌다. 또다시 가벼운 진동이 타고 올라왔다.

-그럼 네가 말해 줘. 어디까지가 괜찮은데?

-그걸 알면 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진짜로. 답답해서 크게 숨을 들이 쉬는데, 섭회상의 입술이 손목 위로 미끄러져 올라왔다.

-그만하라고 하면 그만할게.

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섭회상이 여전히 내 맨살에 입술을 댄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가에는 분명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지만, 그의 시선 자체는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조금은 두려워 보이기도 했다. 그것을 감지한 시점부터,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최대한 대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해도 좋은데, 우선 창문부터 닫죠.

생각보다 비장하게 나온 목소리에 내가 당황한 사이, 섭회상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잔뜩 들뜬 그 웃음소리를 듣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가 내 두 손목을 놓은 채 내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짧고 강하게 입을 맞춰왔다. 훌쩍 멀어져 반짝거리는 그의 두 눈을 보고 있자니, 순식간에 나를 둘러싼 공기가 변한 것만 같았다.

창문이 닫히고 침대로 떠밀렸을 때, 분위기는 다시 한 번 변했다. 섭회상에게 원하는 건 다 해도 좋다고 호언장담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내 머릿속은 경악과 혼돈 그 자체였다. 한다고? 이렇게? 진짜로?

-정말 좋아해, 밀아.

그 말을 듣는다고 거짓말처럼 안정되는 내 심장이 우스워서, 나는 뭐라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입술을 핥았다. 섭회상이 내 위로 몸을 겹치며 그런 내 입술을 가볍게 깨물어왔다. 반사적으로 그의 입맞춤에 응하면서도, 나는 도대체 어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겹씩 떨어져나가는 내 옷도, 마찬가지 내 손 끝에서 흘러내리는 그의 옷자락도, 맨 살을 간간이 스치는 그의 차가운 손도...... 무엇보다도 얼결에 그를 끌어안은 형국이 된 내 두 다리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입맞춤이 멎자 혼란은 더 심해졌다. 당황함에 입술을 질끈 깨물려다가, 피 보는 건 싫다는 섭회상의 말이 떠올라 그럴 수가 없었다. 목을 따라 미끄러지는 그의 입술을 느끼며 어느새 맨살이 된 그의 두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혹시 그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손에 힘을 줄 수도 없었다. 결국 온몸에 어정쩡하게 힘이 들어간 채 덜덜 떨리는데,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어느새 쇄골 아래를 지분거리는 섭회상의 입술 때문인지 그 힘이 자꾸 아래로 쏠렸다. 단단히 맞닿은 몸으로, 그는 내 몸의 떨림과 열기를 고스란히 느끼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결국 나는 두 눈을 질끈 감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단순히 맨살에 닿는 자극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어깨에서부터 살갗을 쓰다듬으며 내려간 섭회상의 손이 내 손을 찾았다. 나는 그가 깍지를 껴오는대로 손가락을 벌렸다. 곧 뜨거운 숨결이 가슴께에 느껴졌다.

-밀아......

나는 입술 새로 새어나오는 신음을 막지 못했다. 분명 나를 침대로 내리누르는 체중은 가볍지 않았는데, 머리가 붕 뜨는 것만 같았다.

-네가 너무 좋아서 어떡하지.

눈을 뜨자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섭회상이 보였다. 나는 섭회상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그 얼굴만으로도 벌써 심장이 지끈거리며 조여왔는데, 젖어서 미끈거리는 그의 입술에 시선이 닿자 그냥 그대로 정신이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반쯤 홀린 사람처럼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간질이던 손을 내려 그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내가 그를 이렇게 만지는 것은. 그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아플 정도로 묵직하게 뛰기 시작했다. 섭회상이 아주 잠시 동안 내 손가락을 입 안에 머금었다. 그리곤 느리게 올라와 다시금 내게 입을 맞췄다.

입맞춤도 격할 것 없이 느리고 질척했고, 내 몸을 타고 내려가는 섭회상의 손길도 부드럽기 그지없었는데 왜 나는 점점 더 숨쉬기가 어려운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반쯤 기침하며 헐떡이고 있었고, 섭회상이 내 입가에 잘게 입을 맞추며 어느새 내 다리 사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들어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곧바로 손을 떼야 했다. 혹시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가 그가 아프기라도 하면...... 아니면, 괜히 내가 또 뭔가를......

-밀아.

섭회상이 깍지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동시에 안으로 깊이 파고드는 손가락 때문에 나는 대답 대신 몸을 떨어야 했다. 섭회상이 내 입술을 핥으며 속삭였다.

-그만 생각해.

그건 명령이라기보다는 마치 주문 같았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가빠진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몽롱하게 울렸다. 그가 내 목을 아프지 않게 깨물어오는 동안, 나는 그가 붙잡지 않은 손으로 애꿎은 이불만 찢어져라 말아쥐었다. 도무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의 손가락이 자꾸만...... 불편하다기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자극인 이물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비틀던 나는 결국 고개를 젖히며 신음했다. 그에 반응하듯 섭회상이 나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더.

그가 내 어깨를 지그시 깨물며 속삭였다.

-더 해도 돼?

나는 그 말 뜻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가 젖은 손으로 내 나머지 한 손에마저 깍지를 껴왔을 때, 나는 그가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반쯤 감긴 눈으로 그의 두 눈을 마주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노을빛이 지고 방 안이 제법 어두워졌기 때문일까? 흐려진 내 시야에서도, 그의 두 눈동자는 무서울 정도로 새까맸다. 그 두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고개를 숙여 내 가슴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스칠 때마다 야릇한 감각이 다시금 아랫배를 뜨겁게 달궜다. 그저 몸을 움찔거리기만 하던 나는, 가슴과 배꼽을 지나 더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입맞춤을 느끼며 두 눈을 깜박였다.

-잠깐, 종주......

섭회상의 입술이 내 아랫배 위에 멎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타고 내 몸 위로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안 될까?

그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아랫배 위로 낮게 울렸다. 나는 못 참고 몸을 떨었다. 저 입술. 저 입술이 지금...... 말도 안 된다.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그가 나를 원하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뭐든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내어주고 싶었다. 무엇이든. 결국 나는 섭회상의 시선을 피하며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목 졸리는 듯한 소리가 잇새로 새어나왔다.

잠깐, 안 돼. 어떡해...... 뜨거워. 머릿속이 온갖 비명으로 아우성쳤지만 입 밖으로는 그 어느것도 튀어나오지 못했다. 오히려 물에 빠진 사람처럼 나는 계속 헛숨을 들이켜야 했다. 붙잡을 게 오직 나를 그렇게 만드는 바로 그 감각 뿐이었다. 온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제발......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스치는 머리카락의 감촉 때문에, 그리고 적나라하게 울리는 젖은 소리 때문에, 나는 못 참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허리를 몇 번이나 비틀고 몸을 들썩여도, 아래에 들러붙은 열기는 끈덕지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 심장이 기어이 마침내 한 번 멈출 때까지.

눈을 감은 것인지 아니면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섭회상이 다시금 올라와 나에게 입맞추는 것을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 있었지만, 나는 그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랑해.

미끈거리는 입술을 겹쳐오며 섭회상이 속삭였다. 나는 멍하니 그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의 가슴팍에 눌린 몸이 숨을 쉴 때마다 들썩이는 게,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냥 이대로 죽고 싶다는 나른한 생각에 잠긴 채로, 나는 나를 내리누르는 몸을 붙잡았다. 완전히 젖어 미끈거리는 아래에 닿는 게 무엇인지, 반쯤 제 기능을 상실한 머리로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 부글거리는 이 감정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죽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가지고 싶었다. 품에 안고 싶었고, 그리고 다시는 놓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도 돼?

섭회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먼저 고개를 들어 그에게 입을 맞췄다. 잠시 굳어있던 그가 내 두 다리를 붙잡아 자기에게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곳이 열리는 고통은 분명 날카로웠지만, 저미는 고통에는 분명한 해방감이 서려있었다. 나는 가까워진 섭회상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의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섭회상이 강하게 끌어안았다. 더 깊이 파고드는 무게감에 신음하자, 섭회상이 내 귓가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아밀......

나는 대답 대신 헐떡였다.

-이대로 계속 네 안에 있고 싶어. 네가 싫대도, 널 놓아주고 싶지 않아......

섭회상의 갈라진 목소리가 고막을 웅웅 울렸다.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리자, 섭회상이 내 귓불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사랑해.

뭉근하게 아래를 휘저어오는 감각에 신음하면서, 나는 떨리는 두 다리로 섭회상의 허리를 당겨안았다. 부끄러움을 더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절박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여기 내 품 안에 있는데, 내가 다시 또 그를 떠나려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왜 눈물이 그치지 않을까. 둔탁한 고통과 쾌감에 흔들리며, 나는 더듬더듬 섭회상의 어깨를 매만졌다. 그의 가파른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중간중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신음에는 물기가 섞여있었다.

나는 손을 움직여, 내 목덜미에 닿아있던 섭회상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끌어와 입을 맞췄다. 내가 막 새롭게 깨달은 사실을 그가 부디 알아주기를 바랐다.

나는 그를 정말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에 몸을 떠는 사이, 섭회상이 자기 뺨을 감싼 내 손을 단단하게 붙잡아왔다. 그리고 더 깊게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

그가 내 입술 위로 흐느끼듯 물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내 품으로 당겨안았다.

*

이후 온몸의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내 위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섭회상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그러다 보면 조금 빠르다 싶은 속도로 잠이 몰려왔다. 섭회상의 몸이 주는 무게감이 답답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안정감이 있었다. 눈이 반쯤 감긴 뒤에도 나는 하염없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닫힌 창문으로부터 빛이 들어오지 않아 캄캄했고, 바람도 불지 않아 덥하고 습한 공기에 숨이 막혔다. 섭회상의 무게 때문에 더 숨이 막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더위 때문이든 압박감 때문이든, 섭회상에게서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목욕한 게 의미 없어지긴 했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건 상관 없다. 문제는 이 방에 방음주술이 안 걸려 있었을 거란 사실이었지. 바로 옆 방에 아키라가 있는데 내일 얼굴을 어떻게 보지. 수사들은? 부정세에서 다시 보게 될 얼굴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앞으로 맨날 이런 고민을 해야 하나?

-무슨 생각 해?

다시 눈을 깜박이자, 섭회상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산작약......

-응?

-산작약 보고 갈까요. 돌아가는 길에.

섭회상의 눈빛이 일렁였다. 다시 입을 맞춰오는 그를, 나는 밀어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