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중국연예
- 중화연예
https://hygall.com/511610837
view 3524
2022.12.04 22:15
진정령, 난백 ㅅㅍ
분량이 애매해서 괜히 끊느니 그냥 한 번에 올림 ㅈㅇ
1-1: https://hygall.com/510097371
1-2: https://hygall.com/510098997
2-1: https://hygall.com/510265342
2-2: https://hygall.com/510266758
2-3: https://hygall.com/510576125
2-4: https://hygall.com/510578287
외전1: https://hygall.com/510708761
3-1: https://hygall.com/510709361
3-2: https://hygall.com/510884992
3-3: https://hygall.com/510886315
4-1: https://hygall.com/511095972
4-2: https://hygall.com/511097042
5-1: https://hygall.com/511336650
5-2: https://hygall.com/511339029
외전2: https://hygall.com/511606508
-그러고 보니 고소에서는 어떠셨습니까?
따지자면 섭회상이 고소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우스웠다. 그래도 변명하자면 그 전까지는 몸도 박살났고 정신도 없어서 섭회상이 고소를 다녀왔다는 것 자체를 잠시 잊고 있었다.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바람을 쐬던 섭회상도 뭐가 그리 뜬금없냐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특별할 건 없었어. 그냥...... 그러고보니 밀이 너는 고소에 가본 적이 있댔나?
-몇 번 가보기는 했습니다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없네요.
사람들 말씨가 나긋나긋하고 과일이 맛있다 사방이 물이다 뭐 그 정도? 마지막으로 고소에 갔을 때가 언제였나 고민하던 나는 섭회상의 한숨소리를 듣곤 그에게로 다시 주의를 기울였다.
-나는 지학이 되던 때부터 무려 삼 년 정도를 고소에 가서 살았다구.
-어쩌다가요?
-고소수학 때문이지 왜긴 왜겠어.
고소수학. 십대 후반의 명문가 자제들이 고소 남씨 선부에 가서 일 년 간 공부하고 오는 그거. 섭회상은 사대 세가 중 하나인 청하 섭씨 자제이니 당연히 갔을 것인데, 3년 간 고소수학을 했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섭회상의 시무룩한 표정에서 감을 잡았다. 설마.
-세 번을 가신 거예요?
-그때 형님이 정말 얼마나 무서웠는지...... 사수 하느니 그냥 부정세 오지 말라는 말씀까지 하셨어.
-사수 안 하셨잖아요?
-그야 세 번째 되던 해 운심부지처가 불탔으니까.
나는 못 참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그 때가 그 때였군요.
-응. 그래서 고소에 계시는 둘째 형님과는 여러모로 연이 깊어. 형님이 둘째 형님과 고소수학 동기이신데다 친하기도 하셔서...... 아마 셋째 형님이 아니셨더라도 두 분은 언젠가 의형제를 맺으셨을 거야.
혈연이야 그렇다 쳐도 학연까지...... 고소수학 그거 말이 수학이고 공부지 사실상 차기 종주들 인맥 다지는 자리구나. 그야 그럴 것이다.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수진계 가문들이 고소 남씨한테 선물까지 가져다 바치면서 자기 자식들을 부탁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고소 남씨가 학식이 깊기로 소문이 났대도 말이지.
고소 남씨 부럽다. 예전에 들은 바로 수학료는 받지 않는다지만, 수학생들이 고소 와서 쓰는 돈 생각하면 그게 다 누구에게 득 되겠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섭회상이 계속 말을 이었다.
-셋째 형님은 당시에 우리 형님 부사셨어. 그래서 나랑 같이 고소에 갔었지. 배례식 때 누군가 셋째 형님의 출신을 가지고 나쁜 말을 했는데, 둘째 형님께서 막아주셨어. 그래서인지 둘째 형님과 셋째 형님은 우리 형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둘이 좀...... 각별한 사이셨어.
그거 내가 아주 잘 알지.
-둘째 형님께선 사일지정 때 정체를 숨기고 도망다니셔야 했거든. 그때 셋째 형님이 많이 도와 드렸대. 그래서 그런지 둘째 형님은 이제나 저제나 항상 셋째 형님을 끔찍이 챙기셔.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형님이 셋째 형님께 많이 무서웠잖아? 그래서 분위기가 험악해질 때마다 나는 항상 둘째 형님을 찾곤 했어. 그러면 둘째 형님이 우리 형님을 잘 말려주셨지.
그것도 내 잘 안다. 나는 운몽에서 보았던 어린 애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무심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적봉존께선 염방존을 왜 그리 못마땅해하셨나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섭회상이 내게로 시선을 내렸다.
-나도 몰라. 들은 이야기만 많을 뿐. 사실 형님께서 못마땅해 하신 적 없는 사람이 드물어. 나한테도 맨날 화를 내셨는걸. 그래서...... 사실 반쯤은 일부러였던 것도 있어. 고소수학에서 번번이 낙제하던 것 말이야.
-네?
-그도 그럴게, 형님이 볼 때마다 공부해라, 수련해라 잔소리를 하시니 부정세에 있기가 너무 갑갑했단 말이야. 배부른 소리라는 건 알아. 하지만 그때 난 십대였으니까 좀 봐줘.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순진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섭회상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무튼, 우리 형님 마음에 쏙 들었던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제 알겠어?
모르겠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속으로만 말했는데 그걸 용케 들은 건지, 섭회상이 나에게 답답하다는 듯 부채질을 했다.
-둘째 형님 말이야, 둘째 형님. 형님은 항상 둘째 형님만 보면 화내던 것도 잊으시고 입가에 미소를 띄우셔서, 나는 둘째 형님이 되도록이면 오래 여기 부정세에 머물러주셨으면 했어. 둘째 형님도 셋째 형님도, 종종 형님께 청심음을 타 주러 부정세에 오셨었거든. 아, 청심음......
섭회상이 아차하는 얼굴로 부채를 들어 자기 입을 막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밀아......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여전히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작게 속닥거렸다.
-청심음은 고소 남씨의 비곡인데, 들으면 마음을 맑게 해주고 화기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둘째, 셋째 형님이 우리 형님께 자주 연주해 드렸어. 주화입마를 최대한 늦출 수 있도록 말이야. 원래 고소 밖으로 반출하면 안 되는데, 둘째 형님이 특별히 셋째 형님께 직접 가르쳐주셨거든. 셋째 형님은 나한테 가르쳐주셨는데......
-종주님이 금도 타세요?
-아니. 나는 피리로 연주해드렸어. 저번에 내가 들려준 적 있잖아. 그거.
저번에 들려준 적 있다고? 내가 알기로 섭회상이 나에게 들려준 곡은 하나뿐이었다. 그럼 설마 저번에 들려줬던 그 동영풍 음악을 말하는 건가? 고소 남씨 비곡이 동영풍이라고? 말이 안 되는데. 그리고 금광요가 섭명결한테 금 타준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섭회상한테 직접 곡을 가르쳐주기까지 했다고?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확인차 질문했다.
-그 음악을 염방존께서 가르쳐주신 거라고요?
-응. 아무튼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나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섭회상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수진계 삼존이 이렇게나 서로에게 진심이었다니까? 큰 형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둘째 형님과 셋째 형님뿐이지만 말이야. 두 분의 우애는 세상 사람들이 길이길이 탄복할 정도고, 나는 애초에 두 분이 의형제를 맺은 상대도 아니라...... 가끔은 조금 외로워.
그렇게 말하는 섭회상의 어깨에선 묘하게 힘이 빠져있었다. 그가 찻잔을 멀거니 들여다보았고,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종주님. 종주님은 혹시 친구 되시는 분이......
-아무도 없냐고?
-함광군이랑 삼독성수가 종주님과 동년배 아닌가요?
섭회상이 위무선이랑 고소수학 동기였다면 그 둘과도 연이 적잖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섭회상이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보기에 함광군과 내가 서로 막역한 사이일 것 같아?
내가 함광군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얼음 같은 사람이라는 것만은 사람들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둘 이름만 따져봐도, 빛을 품은 군자과 모르쇠 선생은...... 서로 접점이 전혀 없지. 내가 차마 빈말로도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섭회상은 괜찮다는 듯 내게 손을 내저어보였다.
-강 형과는 종종 만나. 근데 사실 그쪽도 나는 좀 무서워서.
그건 그렇지. 아직도 사도 썼다고 개처럼 끌고 가던 게 내 눈에 선하다니까? 그 모습만 봐서는 그가 위무선과 친형제처럼 살가운 사이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릉노조랑 삼독성수가 원래는 사이 엄청 좋았다던데요.
-맞아. 위 형이 나랑 같이 장난칠 때마다 강 형은 한 발짝 뒤에서 잔소리하면서 망 봐줬어.
섭회상이 위무선을 위 형이라 부른다고 내가 이제 와 놀랄 이유는 없었고, 얼마간 나는 섭회상이 풀어놓는 고소수학 시절 이야기를 말없이 듣기만 했다. 정신의 절반 정도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다른 절반 정도로는 금광요가 가르쳐줬다는 그 청심음을 생각했다. 고소 남씨의 비곡과 동영의 곡조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감이 존재했다. 문제는 그 거리감에 대해 금광요에게 물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명확한 이유를 댈 수 없었지만, 왠지 금광요에게 말을 꺼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섭회상의 서가에 있던 음호부와 관련된 문서처럼.
-듣고 있어?
-네? 네.
얼빠진 대답을 내놓자, 섭회상은 보란 듯이 서운한 티를 냈다.
-내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 없어?
-그게 아니라......
금광요에게 묻지는 못하지만, 섭회상에겐 물을 수 있겠지.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요. 사람들이 행로령 근처에서 자꾸 사람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부사님께 말씀 드리니 손 쓸 방도가 없다셔서......
-아, 그거?
지나치게 가벼운 섭회상의 목소리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가, 그의 설명을 듣곤 그대로 잠시 동안 넋이 나갔다.
-그건 정말 별일 아니야. 행로령은 대대로 우리 가문의 도를 묻어두는 곳이었어.
-네?
-도무덤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우리 가문의 주화입마는 업보에 가까워서, 이미 돌아가신 조상님들의 도령이 계속 날뛰면 살아있는 후손이 곤란해지게 되거든. 하지만 육대 종주께서 도무덤을 만드시고, 도령과 싸울 마물들도 거기 함께 봉인하신 뒤로 우리는 조상님들의 도령을 걱정할 필요는 없게 됐어. 한시름 놓은 거지. 그런데 가끔 도굴꾼이 도무덤의 진법을 흐트러뜨릴 때가 있단 말이야. 그렇게 되면 도무덤 내의 균형이 깨져서 살아있는 사람을 해칠 수 있어. 그럴 때는 가서 진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으면 돼. 사람들이 수군거리게 두는 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 근처에 최대한 사람 안 지나다니는 게 좋으니까, 소문 듣고 부디 다들 계속 행로령 근처를 피해 주기를 바라는 거지.
갑자기 홍수처럼 쏟아진 정보를 내 머리가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더러, 섭회상이 왜 이 이야기를 이렇듯 선선히 해주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더듬더듬 물었다.
-이거 그, 청하 섭씨 기밀 아닌가요?
-맞아. 아무한테도 이야기 하지 마.
-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걸 저한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알려주세요? 부사님이 저한테 이야기 안 해주신 이유가 있을 텐데요? 그렇게 묻고 싶었는데 말이 안 나왔다. 그러나 섭회상은 내 질문의 의도를 아주 간단히도 파악하곤 미소지었다.
-너를 믿으니까.
섭회상이 너무도 간단하게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누군가 내 심장을 밟는 것 같았다. 내가 침묵하는 동안 섭회상은 한숨 쉬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감 아저씨 말로는 네가 행로령에 대해 물었었다면서. 이야기 안 해줬다고 하길래, 네가 없어졌을 때 나는 너 혼자 행로령에라도 간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너를 찾고 나서 다 이야기해줘야지 했는데, 잊고 있었네.
몸이 조금 회복된 뒤 수련에 참가했을 때 나는 무척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들어보니 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안 섭회상이 부정세 사람들을 다 풀어서라도 나를 찾겠다며 울고 불고 난리를 피웠다는 것이다. 보다 못한 그때 그 새장을 관리하던 시녀가 앵무새 이야기를 꺼냈고 당장 나를 찾는 수색대가 꾸려졌다고 했다. 얼굴 화끈해지는 건 오직 내 몫이었다. 이래도 너랑 종주님이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그렇게 묻는 수사들에게 나는 그렇다고 피곤한 목소리로 일일히 답해야 했다. 이젠 아무도 안 믿어주는 모양새였지만. 부사든 총령이든 요즈음 나만 보면 묘하게 싸해지는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하루 말없이 사라졌다고 그 정도였으면 내가 아예 부정세 떠난다고 할 때는 어쩌려고 그러나. 내가 그런 상념에 잠겨있는 동안, 섭회상이 차가 다 식었다며 사람을 불러 새 찻상을 내오게 했다. 곧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찻주전자가 따끈한 다과와 함께 상 위에 올랐다. 원래 있던 차와 다과들은 누가 먹나 내가 아주 잠깐 동안 생각할 때였다.
-들어보니, 도굴꾼이 나타난 건 정말 오랜만이라 대처가 늦었다고 해. 그래서 죄 없는 생명이 다쳤지만...... 장사는 후하게 치러줬어. 다른 핑계를 대고 가족들에게 보상도 해줬고.
관자놀이께가 아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두 눈을 깜박였다. 내게서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자 섭회상은 나더러 너도 차를 좀 마시라며 권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손바닥이 데일 듯한 뜨거움에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섭회상이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벌써 또 행로령을 살펴보러 가야 할 때가 됐네. 이 주쯤 뒤에 갈 건데 같이 갈래, 밀아?
-네. 그렇게 하세요.
나는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러고도 잠시 넋놓고 있는데, 차가운 손이 뺨에 닿았다. 눈을 깜박이자 찻상 너머로 손을 뻗은 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섭회상이 보였다.
-괜찮아? 갑자기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아닙니다.
섭회상. 하얗고, 조그맣고, 순진하고, 겁 많고, 예민하고, 날카롭고, 우울하고, 사랑스럽다. 나는 내 뺨에 닿아있는 섭회상의 손을 붙잡아 쥐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맞췄다. 뻥 뚫린 정원의 하늘 아래 섭회상의 얼굴이 시시각각 붉어지는 것이 내 눈에는 아주 잘 보였다.
-오, 오늘 무슨 날이야?
-아뇨. 그냥.
천천히 섭회상의 손을 놓았지만 그 손은 여전히 내 입술 위에 있었다. 그의 손끝이 내 입술을 가볍게 쓸더니 아쉬움이 역력한 티를 내며 멀어졌다. 목이 탄다는 듯 입술을 핥더니, 차를 마실 생각은 못하고 부채를 펴서 자기 얼굴에 빠르게 부채질을 해대는 섭회상이 사랑스럽기만 해서 죽고 싶었다. 마른 세수를 하며 품에서 담뱃대를 꺼내는데, 섭회상이 부채 너머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생각해보니까 불공평해.
-뭐가요?
-너는 십대 때 뭐하고 지냈어? 한 번도 얘기 안 해줬잖아.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정원에 내리쬐고 있었고, 다리는 다 안 나았지만 바람 좀 쐬라고 밖에 데리고 나온 앵무새도 예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니 섭회상이 이 시간을 어떻게든 더 끌고 싶어하는 건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내게는 섭회상의 것처럼 멋드러진 십대 시절이 없었다. 나는 담뱃불을 붙였다.
-뭐가 궁금하신데요?
-너는 어쩌다가 수사가 된 거야?
섭회상에게 이야기 안 했었나? 했던 것 같은데, 할머니가 하동 부씨로 나 끌고 갔다고. 아무튼 별로 이 주제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길게 담배연기를 뱉었다.
-돈 많이 벌려고죠, 뭐. 길거리 나가서 어린 애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커서 뭐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금단 맺은 수사 되고 싶다 그래요.
-너도 금단을 맺고 수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
-아뇨. 저희 아버지 꿈이었죠. 저는 어릴적에 달리 꿈 같은 걸 가져본 적이 없어요. 제가 수사가 된 건...... 이미 하동 부씨에 넘어간 은자들을 낭비할 수 없어서. 정말 그게 다예요. 열 살 나이에 처음으로 목검이라는 걸 잡아봤고, 그 뒤로 계속 굴렀습니다. 열심히 하긴 했지만 그게 꿈이었던 적은 없어요.
꿈이라는 단어 자체가 조금 이상했다. 사냥꾼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사냥꾼으로 살다가 죽는 거고 종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마찬가지 종주로 살다가 죽는 게 당연한 세상 아닌가. 물론 예외야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예외다. 나는 섭회상을 빤히 바라보았다.
-종주님은 달리 꿈이라고 할 만한 게 있으셨어요?
-당연하지. 나는 평생 부정세 둘째 공자로 사는 게 꿈이었어.
섭회상이 웃었다. 그런 소박한 것도 꿈이라고 한다면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꿈을 발굴하는 대신 나는 아버지에 대해 계속 말하기로 했다. 그 편이 더 편했다.
-저희 아버지는 오대 가문의 수사가 되는 게 꿈이었대요.
-그래?
-네. 홀어머니 밑 외아들만 아니었어도 가출해서 진짜 강호에 몸 담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냥 포기하고 검 대신 도끼를 들었어요. 할머니가 사람 죽이는 일은 하면 안 된다고 끝끝내 붙잡았다나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섭회상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중원절 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네가 수사가 되길 바라셨다지 않았어?
-막상 보니까 평생 손에 사람 피 안 묻히고 살아도 개죽음 당하는 건 똑같았던 거죠.
나는 건조하게 답했다.
당시 많은 중소세가들이 적은 돈을 받고 문하생을 모집했었다. 그렇게 값싸게 모집된 아이들은 대부분 뭐랄까, 속되게 말하면 병풍 용이었다. 물론 그 적은 돈을 내려고 할머니는 자기 손자의 명줄을 끊어야 했지만.
그렇게 치러낸 남동생의 목숨값이 얼마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남동생의 죽음 그 자체만큼 고통스러웠다. 나름 이름 있는 세속의 가문에서도 자기 아들딸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선문세가에 많은 돈을 바쳤기 때문에, 원래대로였다면 뒷배경 없는 나는 문서나 서류 따위 만져볼 일도 없이 성인이 되고 얼마 안 있어 어디 야렵에 나가 죽었을 것이다. 그걸 알아서 이 가문 저 가문 전전하던 것도 있었다. 그냥, 내가 사일지정을 거치면서까지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고 그 이후로는 금광요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엔. 글이야 하동 부씨 문하생으로 있을 때 어영부영 깨쳤고 검술도 내가 노력해서 지금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치지만, 그 이상의 모든 것은 내가 금광요의 아래에 들어가며 얻은 것들이니까.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고, 내가 들어도 내 인생은 재미 없었다. 이 침울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섭회상의 눈에 서린 궁금증을 읽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이야기할 마음은 없었다. 내 생각이 전해졌는지, 섭회상은 어색하게 웃더니 접시 위의 과자를 집어들었다.
-이거 맛있으니까 이것도 먹어.
팥소가 가득 들어있는 과자를 나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지만 그저 우적우적 씹었다. 그런 나에게 섭회상이 물었다.
-네 아버지 이야기도 좋지만, 너는? 네가 원하는 건 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지금......
모든 게 지금 같으면 좋겠다. 내리쬐는 햇볕과, 한가한 적막과, 내 맞은편에 앉은 섭회상과 선선한 가을바람이 계속 존재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문득 들었다. 영원이라기엔 너무 거창하지만, 그 비슷한 무언가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말했다.
-종주님께서 그려주셨으면 합니다.
-무얼?
-그냥, 지금을요.
나 같으면 그림 그려달란 부탁을 받았을 때 귀찮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할 것 같은데, 섭회상은 반짝 눈을 빛냈다.
-그런 부탁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밀아.
섭회상이 시종들에게 붓과 벼루, 종이 등 이것저것 가져오도록 하는 동안 나는 어느새 내 어깨에 와서 앉아있는 앵무새를 간질거렸다. 섭회상이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음에 들어?
무채색의 정원에 앉아있는 얼굴 없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섭회상은 칭찬 받은 아이마냥 기쁘게 말했다.
-족자에 담아서 선물로 줄게.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종주님.
-응?
-어릴 때 꿈이 섭이공자로 평생 사시는 거였다면, 지금은요?
섭회상은 대답 대신 그저 묘한 미소를 짓더니, 종이를 조심스레 들어올려 해를 가렸다. 햇빛을 투과한 종이는 거의 투명할 정도라, 반대편에서 종이 너머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글쎄. 모르겠어.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을 반쯤 믿었다.
그러니 그날 섭회상도 나도 서로에게 궁금한 것을 절반 정도씩 간직했던 셈이다. 그러나 내쪽에서 그 비밀의 정체를 털어놓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바로 다음날 저녁이었다. 섭회상이 족자에 담은 그림을 내게 건네주었고, 나는 그것을 감상하며 어제 정말 이랬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노을빛이 스며들자 그림은 또 전혀 새로운 풍경이 되었다. 이런 날은 또 언제 올까 감히 그런 소망을 품고 있던 나는, 멀리서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음과 아우성이 순간 내 안에서 들려온 소리인 듯 섬찟했다. 고개를 들자 섭회상도 겁먹은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보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세요.
그 말만 남기고, 나는 들고 있던 족자를 내려놓은 뒤 빠르게 종주실을 나섰다. 섭회상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사실 별 일 아니리라는 생각이 제일 컸다. 그러지 않았다면 섭회상만 두고 종주실을 나왔을 리가 없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는 몰랐다.
소리를 따라 달리자 곧 일반 수사들의 숙소가 보였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있었다. 완전 새빨갛게 물든 하늘 아래 피냄새가 스쳤고, 길게 울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칼날에 반사된 햇빛 때문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거기엔 온몸으로 피를 뿜으며 난동을 부리는 검붉은 짐승이 있었다.
그게 정말 짐승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아주 잘 알았고, 그게 문제였다.
도끼리 부딪치는 소리도 내가 들었던가?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내가 본 광경은 결코 잊지 못했다. 부정세의 검은 수사복이 저 스무 해 전 기산 온씨의 망령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넓은 도가 반사하는 것이 그 피인지 아니면 하늘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기, 머리를 풀어헤친 채 처절하게 도를 휘두르는 남자에게는 어린 아이이든 성인이든 할 것 없이 보는 사람을 어쩌지 못하게 만드는 광기가 있었다.
죽음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과 그것을 기다려줄 수 없는 사람들 간의 대치는 언제나 아수라장일 수밖에 없고, 이미 주변에는 창백하고 미동도 없는 손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피에 젖어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눈과 분명히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나는......
나는 달리고 있었다. 세상이 눈 앞에서 좁아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가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 나는 흙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어떤 손이 다가와 나를 붙들었을 때, 나는 내 검은 어깨 위 새하얀 그 손을 보고 기겁했다. 둔하게 굳어있던 고막이 제 기능을 하게 되었을 때, 내가 들은 건 섭회상의 목소리였다.
-밀아, 괜찮아? 대체 무슨 일이야!
섭회상의 두 팔이 나를 조심스레 감싸 안는 동안 내 시선은 정원의 소나무에 닿아있었다. 돌아왔구나.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어떻게든 말하려 애썼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섭회상이 보아선 안 된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엔 그 생각 뿐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연못의 물마저도 붉었다. 나는 아예 섭회상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뭐라고 중얼거렸는지, 섭회상이 나에게 뭐라고 속삭였는지, 그런 것들은 칼로 도려낸 듯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에 들었다가 깨어났다고 착각할 정도로. 눈을 깜박여보니 호흡이 어느 정도 잦아들어 있었고, 섭회상이 여전히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나는 짙은 솔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이제 하늘은 거의 붉지 않았다. 그 대신 까맸다. 섭회상은 나를 정원 의자에 앉혔다. 나는 김을 내며 찻잔 안으로 떨어지는 찻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군가 섭회상에게 수사 중 하나가 주화입마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동안 나는 그냥 그렇게 있었다. 섭회상이 말문을 틀 때까지.
-날 걱정한 거야?
그쯤 되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걱정까지나 했다고 생색낼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뗐다.
-종주님은 이야기 듣고도 아무렇지 않으시네요.
-그야 난 부정세에서 평생을 살았는걸. 내가 내 눈 앞에서 사람이 피 토하고 죽는 걸 몇 번이나 봤을 것 같아? 적어도 형님이 처음은 아니었어.
싸늘한 가을 바람이 부는데, 섭회상은 혼자 여름처럼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많이 봤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우리 아버지도, 형님도 그렇게 돌아가셨는걸.
-종주님은......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으나 막상 어떻게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섭회상이 피 토하며 쓰러져서 주화입마 왔다는 소리 들은지 아직 반 년도 안 됐다. 아까 그 남자는 저렇게 되기까지 두 달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섭회상은 여전히 기이할 정도로 맑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나는 자꾸만 말을 더듬었다.
-종주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그렇게, 그렇게......
-죽지 않을 거냐고? 글쎄. 사람 일을 누가 알겠어. 아무도 모르지.
그러더니 섭회상은 쥐고 있던 부채를 펼쳤다. 거기에는 아무 무늬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죽으면 싫어?
섭회상이 섭회상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 순간 그 얼굴에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질문을 한 게 그가 아니라면 나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대답 대신 섭회상을 노려보았다. 섭회상이 그런 나를 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기분 알겠니?
다시 한 번,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는 잠시 동안 대치했다. 그 사이 섭회상의 입가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그라졌다. 곧 그는 진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한 마디 없이도 나는 그 시선을 이해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리내어 웃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따라 웃지 않을 것 같은 웃음이었다. 힘없이 다시 주저앉은 나는 가슴팍을 더듬어 담뱃대를 꺼냈다. 섭회상은 내가 담배통에 잎을 채워넣는 동안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손이 떨리는 바람에 담뱃잎이 뭉텅이져 여기 저기 떨어졌지만, 그게 중요한가. 불을 붙인 뒤, 나는 한 모금 길게 빨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뭐 정리할 것도 없었다만.
-사실 별 건 아닙니다.
-그래?
-네.
어쩐지 곧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내 고요하기만 한 정원이 내 목을 졸랐다. 나는 숨을 참고 버텼다. 그러나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니지만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는 사실 하나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여덟 살 때, 부모님이 청하 섭씨 수사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섭회상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빠르게 체념했다.
*
-그 수사도 죽었죠. 제 눈 앞에서.
이 이야기는 금광요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한낱 작은 마을에서 주화입마 온 섭씨 수사에게 열 명쯤 도살당한 사건 따위, 금광요가 알 리 없지. 금광요. 그 이름을 생각하며 나는 맞은편에 앉은 섭회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독 노란 달빛 아래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공포 외의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도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 모르겠으니 상관 없었다. 나는 말을 꺼낸 김에 그저 되는 대로 내뱉었다.
-그 수사가 제 코 앞까지 와서 얼굴에 피를 뿜고 죽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눈은 아마 제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평생 저는 모르겠죠. 그 사람이 어린애는 죽이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자기 팔을 멈춘 건지, 아니면 제가 산 게 정말 우연인지.
뭐가 됐든, 그때 그 붉고 검은 눈에 있던 공포는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처럼 끈질기게 내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자기를 좀 살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조차 사치라 여겨질 정도로 그때 그의 눈빛은 절박했고, 그가 내 부모를 죽였음에도 나는 그를 도울 수 없었다는 공포에 내내 시달려야 했다.
어두운 방에 기침하는 할머니와, 앓는 남동생과 함께 처박혀 있는 동안 그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냐면 그건 거짓이다. 하지만.
-오해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일로 청하 섭씨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은 품지 않았으니까.
-왜?
이젠 내가 미소지을 차례였다. 이걸 미소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광경을 한 번 보게 되면 사람은 운명을 믿게 됩니다. 종주님은 안 그러셨습니까?
섭회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차 말을 이었다.
-제가 본 건 재앙 그 자체였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사람이 죽으면, 자기가 서 있던 땅을 원망해야 합니까? 원망해 봐야 뭐가 달라집니까?
아주 어릴 때는 물론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때는 누구든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만약 그 섭씨 수사가 부모님을 죽이지 않았다면 남동생도 어쩌면 죽지 않았을지 모른다. 적어도 더 오래 살았을 것이고, 나도 그만치 괴로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컴컴한 방 안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세상을 차차 알아가면서 나는 그 일로 죽은 수사를, 청하 섭씨를 원망한다는 게 우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얻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원망해 봐야 제 속만 괴로울 뿐, 변하는 게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할머니조차도 나에게 복수라는 단어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애초에 할머니가 왜 나를 수사로 길렀는지 알 길이 없다.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서? 정말 그것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죽기보다는 죽이는 쪽이 되기를 바란 걸까. 모른다. 정말 모르겠단 말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텅 비어있었다. 섭회상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밀아......
나는 부러 그의 말을 끊었다.
-당시 섭종주, 그러니까 종주님의 부친께서 사과의 말씀과 함께 아주 후한 배상금을 보내셨던 걸 기억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 돈으로 제가 검을 쥔 거네요.
이러니 인연이란 참 신기하지 않은가. 나는 희게 질리는 섭회상의 얼굴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사실 돈으로 배상하는 것 말고 달리 그 분도 뭘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수사들을 저희 지역에 보낸 것도 좋은 마음에 그러신 걸 텐데...... 그런데 그때 할머니가 배상금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종주님. 전 청하 섭씨가 정말 싫더군요.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전통 때문에 계속 도를 쓴다는 게 너무 오만하잖아요. 그럴 권리가 어디서 나옵니까? 청하 섭씨가 뭔데요? 가문이 뭐고 전통이 뭔데요? 그게 사람 목숨보다 중요합니까? 백 년짜리 가문은 중요하고, 십 년 이십 년 짜리 사람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섭회상은 아무 말 없이 나를 기다려주었다. 밤하늘 아래 새까맣게 젖어있는 그의 눈동자가 마치 처음 봤을 때처럼 인형 같았다. 문득, 미치고 싶다는 그의 말이 이해가 갔다.
-청하 섭씨가 대체 뭔데 그 수사도, 저희 부모님도, 저희한테 사과하신 전전대 종주님도 그렇게 돌아가셔야 했습니까? 왜 적봉존께서 그렇게 돌아가셔야 했고, 종주님이 그걸 보셔야 했죠? 가문을 책임지는 종주마저도 그렇게 줄줄이 생을 마치니 제가 원망할 건 청하 섭씨라는 그 이름 뿐인데, 그게 뭔지 도무지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부정세에 온 뒤로는...... 청하 섭씨가......
말끝을 흐리며,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청하 섭씨란 이제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젠 정말로 청하 섭씨를 원망하고 미워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감히 느끼기로는, 섭회상도 지금 내가 입 밖에 낸 생각을 한 번쯤은 해 보았을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내 추측일 뿐이다. 나는 고개를 떨궜다.
-청하 섭씨가 원망스럽습니다. 종주님도 그렇게 돌아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다 부숴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종주님이 청하 섭씨이시잖아요? 그래서......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어서 나는 내 빈 손만 덩그러니 내려다보았다. 왜 이 이야기를 꺼냈을까. 그냥 끝까지 참을걸, 나는 괜찮은데...... 정말 괜찮다. 나는 섭회상처럼 죽은 형을 생각하며 우는 일도 없고, 악몽을 꾸지도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입술을 씹는데, 섭회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제가 괜찮으면 안 되는 겁니까? 그럼 안 괜찮다고 하죠. 모르겠습니다.
섭회상이 내 앞에 다가와 섰다. 나는 섭회상의 두 발을 바라보다가, 내 얼굴에 와 닿는 그의 부채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부채가 턱에 닿는 대로 고개를 들어 부채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달을 가리고 선 그의 얼굴은 분명 어두웠지만, 나는 그의 눈가가 젖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밀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았다. 섭회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그저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내게 문제의 핵심을 내어놓았다.
-왜 부정세에 온 거야?
저도 여기 오고 싶지 않았어요. 금광요가 아니었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거예요. 여기를 마지막으로 수진계를 떠나려 했어요. 어쩌면 나는 그런 말을 쏟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을 제쳐놓고 입술이 움직였다.
-종주님을 만나러요.
아무 대답 없었지만, 나는 섭회상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턱 끝에 있던 부채를 거두어들였다.
-사과하기엔 이제 와서 너무 늦었지? 그래도 정말 미안해, 밀아. 어떻게 사죄를......
떨리는 그 목소리를 들을 때, 속에서 둔탁한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마치 도망치듯 고개를 저었다.
-종주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그를 속이는 건 나였으니까.
-종주님은 화나지 않으십니까? 제가 이제야 이 이야기를 해서요. 저를 더 이상 믿지 못하신대도 이해합니다.
차라리 그가 그래주었으면 좋겠는 게 그 순간 내 마음이었다. 그러나 섭회상은 그 말을 듣곤 웃었다. 무언가를 억지로 참는 듯 괴로운 미소였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우리 형님께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장 못 견뎌 하셨거든. 하지만 난 항상 생각했어.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잠시 말을 멈춘 섭회상이 내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이 세상에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은 없어요. 종주님.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섭회상이 입술을 달싹였다. 기이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되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답변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내 얼굴로 다가온 그의 손을 쥐었다. 그러나 머릿속이 이미 텅 비어있어서, 생각한 보람이 없이 나는 되는대로 지껄여야 했다.
-사람의 마음에는 항상 뭔가가 남고야 마니까요. 적봉존께서 종주님께 청하 섭씨라는 짐을 물려주고 싶으셨을까요? 아닐걸요. 정말 자기 죽음에 초연하셨을까요? 그것도 저는 모른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분도 어쩔 수 없으셨죠. 그런 겁니다. 마음과 삶이 정말 일치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니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경멸했다는 적봉존도, 정말 겉과 속이 같을 순 없다. 인간인 이상 그럴 순 없다. 섭명결과 전혀 딴판이었다는 섭회상도 지금 이렇게 종주 자리에 앉아있다. 그는 주화입마를 여러 번 목격해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보름달이 되는 밤이면 섭명결의 악몽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또 부정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점에서 섭회상은 섭명결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섭회상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한 건 네가 말한 것과는 달라. 나는 남을 속이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 거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마치 내가 자기를 반박해줬으면 하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겠는가?
-종주님. 사람은 의외로 자기 마음을 모릅니다. 자기 마음을 모르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누구를 속이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논해요.
-그러면 진심은 어떻게 아니?
-뭐든 진심이 될 수 있죠.
섭회상은 눈을 감은 채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잠든 그의 얼굴을 보던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너는 정말 이상해. 네가 한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다 궤변이라고 할 거야.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일문삼부지잖아?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네 말을 믿어도 이상하지 않지.
섭회상의 두 눈이 천천히 뜨였다. 여전히 눈물에 젖어있었지만, 그의 두 눈은 분명 아까와는 다른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약속할게. 나는 절대 그렇게 죽진 않을 거야.
나는 말문이 막힌 채로 섭회상의 얼굴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섭회상이 내게 잡혀있던 손을 비틀어 깍지를 껴올 때까지.
-그러니 나와 함께 살아줄래?
항상, 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그러고 싶습니다.
그게 진심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
말을 마치자 침묵이 흘렀고, 한참 동안 섭회상은 내 손을 말없이 매만졌다. 나 또한 멍하니 그 손의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보드랍고, 차갑고, 그러나 내 손보다 더 크고 단단했다. 그 사실에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몸이 굳을 즈음, 섭회상이 나지막히 말했다.
-아마 평생 나는 너에게 미안할 테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비틀어 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손힘은 늘 그렇듯 대단했다. 결국 나는 포기하고 물었다.
-제가 싫대도요?
-응. 미안.
자기도 그 대답이 우스웠는지, 그는 작게 웃더니 나를 품에 안았다. 맨질맨질한 회색 옷감 때문인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자 꼭 바위에 뺨을 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섭회상과 바위라니. 이 세상에 그보다 안 어울리는 짝패를 찾기도 힘들겠다. 그런 생각에 잠긴 채 그의 품에서 나는 소나무향에 집중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내 머리를 울렸다.
-어떻게 나를 용서할 수가 있어?
-말씀 드렸잖아요.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없다고.
차라리 그가 나와 같은 피해자로 여겨진다면 모를까, 아무래도 그를 원수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것 때문에 죽은 이들이 나에게 성을 낸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난 정말 글러먹은 인간이다. 그리고 멍청했다. 저 사람이 괜찮다고 하면, 정말 괜찮은 이 채로 끝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때, 섭회상이 여전히 희미한 떨림이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냐니, 왜 괜찮냐는 것일까?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종주님이...... 종주님이셔서요. 종주님이 괜찮다고 하시면, 저는 괜찮습니다.
하나 남은 답이 이따위라는 게 통탄할 만한 일이었지만, 내 어휘력이 얼마나 바닥인지는 섭회상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상관없지 않을까. 애초에 기대도 안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나를 감싼 섭회상의 두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는 한참 뒤 다시 내게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없겠니?
-건강만 하세요.
-그런 것 말고.
잠시 뜸을 들인 섭회상이 슬며시 입을 뗐을 때, 난 그제야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안장은 어떻게......
-그냥, 마을 무덤터에 했지요.
-그럼......
-그게 피차 편해요.
그렇잖은가. 살면서는 쌀밥에 고기반찬 먹어본 경험도 얼마 없는데 죽고 나서 갑자기 사람 집만 한 무덤이 생기면 죽은 분들 놀라서 일어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다 흙으로 돌아간 사람들에게 내가 대체 뭘 해줄 수 있는가.
-정 걱정되면 저한테 돈으로 주시든가요.
-뭐?
-원래 후손 덕은 조상이 본다고, 후손이 잘 사는 게 조상한테는 최고 선물이죠.
대충 그렇게 그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던 나는 갑자기 내게서 멀어지는 섭회상 때문에 두 눈을 깜박여야 했다. 내가 너무 지나쳤나? 하지만 그게 내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섭회상의 두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그리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도 강렬해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이제 알겠어.
-뭘......
-너는 정말 재물을 탐하는 게 아니야.
갑자기요? 그렇게 되물으려 했던 나는, 이어진 섭회상의 말에 그대로 굳었다.
-어차피 받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해서 자꾸 돈을 받겠다는 거잖아. 넌 정말 그 누구에게든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묻고 싶었는데 말문이 떨어지질 않았다. 침묵하는 나에게 섭회상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니?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 머릿속에 걸리는 게 있었다.
-당연히 있죠. 그리고 받았습니다. 오늘.
내가 보던 그림. 그 회색 족자. 섭회상의 손이 내 얼굴을 놓아주었고, 나는 탁상 위로 손을 뻗어 족자를 손에 쥐었다. 섭회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를 보다 보면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적봉존요?
-아니. 다른 사람.
-남자죠, 그 사람도?
이제 반쯤 체념했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러자 섭회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조금 허물어지는 분위기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섭회상이 말했다.
-남자이기는 해. 하지만 생긴 게 닮았다는 건 아냐. 난 욕심도 많고 미련도 많아서, 너나 그 사람같은 이를 보면 신기하거든.
말을 마쳤던 섭회상이 보다 힘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그 사람을 보면서는 그저 부러울 뿐이었는데, 너를 볼 때는 달라. 너를 볼 때는......
섭회상이 말끝을 흐리는 동안 나는 족자의 매끈한 천을 가만가만 쓸어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계속 침묵하는 게 어딘가 짚이는 데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물었다.
-제가 불쌍하세요?
-그렇다면 화 나?
-아뇨. 감사하죠.
진심이었다. 다시 섭회상을 올려다보자, 그의 눈에서는 다시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슬퍼보여서, 그 순간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차오르는 생각들로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나에게 실망한 걸까? 앞으로 나에게 얼마나 더 실망하게 될까? 사실, 섭회상이 나에게 실망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뭐라고?
-그만 생각해.
순간 나는 내가 머릿속의 생각들을 입 밖에 내뱉은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섭회상이 말했다.
-나 이제 네 표정도 어느 정도 읽을 줄 알아. 너 말수만 적다뿐이지 생각은 참 많잖아.
-원래 안 이랬습니다.
정말이다. 생각이 이렇게 많아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건 섭회상을 만나면서부터였다. 말이 많아진 것도 마찬가지다. 왜인지 모를 충동에 휩싸인 채 나는 입을 열었다.
-종주님 때문에 변한 겁니다. 종주님 때문에......
이렇게 내가 바뀌었다고. 호기롭게 말문을 뗐으나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나는 중간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나 상관 없다는 듯 섭회상이 나와 눈을 맞췄다.
-알아.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밀아.
일문삼부지가 언제부터 그렇게 똑똑했고 통찰력이 있었냐고,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그의 말을 믿었다. 그게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길이라 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분량이 애매해서 괜히 끊느니 그냥 한 번에 올림 ㅈㅇ
1-1: https://hygall.com/510097371
1-2: https://hygall.com/510098997
2-1: https://hygall.com/510265342
2-2: https://hygall.com/510266758
2-3: https://hygall.com/510576125
2-4: https://hygall.com/510578287
외전1: https://hygall.com/510708761
3-1: https://hygall.com/510709361
3-2: https://hygall.com/510884992
3-3: https://hygall.com/510886315
4-1: https://hygall.com/511095972
4-2: https://hygall.com/511097042
5-1: https://hygall.com/511336650
5-2: https://hygall.com/511339029
외전2: https://hygall.com/511606508
-그러고 보니 고소에서는 어떠셨습니까?
따지자면 섭회상이 고소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우스웠다. 그래도 변명하자면 그 전까지는 몸도 박살났고 정신도 없어서 섭회상이 고소를 다녀왔다는 것 자체를 잠시 잊고 있었다.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바람을 쐬던 섭회상도 뭐가 그리 뜬금없냐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특별할 건 없었어. 그냥...... 그러고보니 밀이 너는 고소에 가본 적이 있댔나?
-몇 번 가보기는 했습니다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없네요.
사람들 말씨가 나긋나긋하고 과일이 맛있다 사방이 물이다 뭐 그 정도? 마지막으로 고소에 갔을 때가 언제였나 고민하던 나는 섭회상의 한숨소리를 듣곤 그에게로 다시 주의를 기울였다.
-나는 지학이 되던 때부터 무려 삼 년 정도를 고소에 가서 살았다구.
-어쩌다가요?
-고소수학 때문이지 왜긴 왜겠어.
고소수학. 십대 후반의 명문가 자제들이 고소 남씨 선부에 가서 일 년 간 공부하고 오는 그거. 섭회상은 사대 세가 중 하나인 청하 섭씨 자제이니 당연히 갔을 것인데, 3년 간 고소수학을 했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섭회상의 시무룩한 표정에서 감을 잡았다. 설마.
-세 번을 가신 거예요?
-그때 형님이 정말 얼마나 무서웠는지...... 사수 하느니 그냥 부정세 오지 말라는 말씀까지 하셨어.
-사수 안 하셨잖아요?
-그야 세 번째 되던 해 운심부지처가 불탔으니까.
나는 못 참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그 때가 그 때였군요.
-응. 그래서 고소에 계시는 둘째 형님과는 여러모로 연이 깊어. 형님이 둘째 형님과 고소수학 동기이신데다 친하기도 하셔서...... 아마 셋째 형님이 아니셨더라도 두 분은 언젠가 의형제를 맺으셨을 거야.
혈연이야 그렇다 쳐도 학연까지...... 고소수학 그거 말이 수학이고 공부지 사실상 차기 종주들 인맥 다지는 자리구나. 그야 그럴 것이다.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수진계 가문들이 고소 남씨한테 선물까지 가져다 바치면서 자기 자식들을 부탁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고소 남씨가 학식이 깊기로 소문이 났대도 말이지.
고소 남씨 부럽다. 예전에 들은 바로 수학료는 받지 않는다지만, 수학생들이 고소 와서 쓰는 돈 생각하면 그게 다 누구에게 득 되겠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섭회상이 계속 말을 이었다.
-셋째 형님은 당시에 우리 형님 부사셨어. 그래서 나랑 같이 고소에 갔었지. 배례식 때 누군가 셋째 형님의 출신을 가지고 나쁜 말을 했는데, 둘째 형님께서 막아주셨어. 그래서인지 둘째 형님과 셋째 형님은 우리 형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둘이 좀...... 각별한 사이셨어.
그거 내가 아주 잘 알지.
-둘째 형님께선 사일지정 때 정체를 숨기고 도망다니셔야 했거든. 그때 셋째 형님이 많이 도와 드렸대. 그래서 그런지 둘째 형님은 이제나 저제나 항상 셋째 형님을 끔찍이 챙기셔.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형님이 셋째 형님께 많이 무서웠잖아? 그래서 분위기가 험악해질 때마다 나는 항상 둘째 형님을 찾곤 했어. 그러면 둘째 형님이 우리 형님을 잘 말려주셨지.
그것도 내 잘 안다. 나는 운몽에서 보았던 어린 애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무심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적봉존께선 염방존을 왜 그리 못마땅해하셨나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섭회상이 내게로 시선을 내렸다.
-나도 몰라. 들은 이야기만 많을 뿐. 사실 형님께서 못마땅해 하신 적 없는 사람이 드물어. 나한테도 맨날 화를 내셨는걸. 그래서...... 사실 반쯤은 일부러였던 것도 있어. 고소수학에서 번번이 낙제하던 것 말이야.
-네?
-그도 그럴게, 형님이 볼 때마다 공부해라, 수련해라 잔소리를 하시니 부정세에 있기가 너무 갑갑했단 말이야. 배부른 소리라는 건 알아. 하지만 그때 난 십대였으니까 좀 봐줘.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순진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섭회상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무튼, 우리 형님 마음에 쏙 들었던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제 알겠어?
모르겠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속으로만 말했는데 그걸 용케 들은 건지, 섭회상이 나에게 답답하다는 듯 부채질을 했다.
-둘째 형님 말이야, 둘째 형님. 형님은 항상 둘째 형님만 보면 화내던 것도 잊으시고 입가에 미소를 띄우셔서, 나는 둘째 형님이 되도록이면 오래 여기 부정세에 머물러주셨으면 했어. 둘째 형님도 셋째 형님도, 종종 형님께 청심음을 타 주러 부정세에 오셨었거든. 아, 청심음......
섭회상이 아차하는 얼굴로 부채를 들어 자기 입을 막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밀아......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여전히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작게 속닥거렸다.
-청심음은 고소 남씨의 비곡인데, 들으면 마음을 맑게 해주고 화기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둘째, 셋째 형님이 우리 형님께 자주 연주해 드렸어. 주화입마를 최대한 늦출 수 있도록 말이야. 원래 고소 밖으로 반출하면 안 되는데, 둘째 형님이 특별히 셋째 형님께 직접 가르쳐주셨거든. 셋째 형님은 나한테 가르쳐주셨는데......
-종주님이 금도 타세요?
-아니. 나는 피리로 연주해드렸어. 저번에 내가 들려준 적 있잖아. 그거.
저번에 들려준 적 있다고? 내가 알기로 섭회상이 나에게 들려준 곡은 하나뿐이었다. 그럼 설마 저번에 들려줬던 그 동영풍 음악을 말하는 건가? 고소 남씨 비곡이 동영풍이라고? 말이 안 되는데. 그리고 금광요가 섭명결한테 금 타준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섭회상한테 직접 곡을 가르쳐주기까지 했다고?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확인차 질문했다.
-그 음악을 염방존께서 가르쳐주신 거라고요?
-응. 아무튼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나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섭회상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수진계 삼존이 이렇게나 서로에게 진심이었다니까? 큰 형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둘째 형님과 셋째 형님뿐이지만 말이야. 두 분의 우애는 세상 사람들이 길이길이 탄복할 정도고, 나는 애초에 두 분이 의형제를 맺은 상대도 아니라...... 가끔은 조금 외로워.
그렇게 말하는 섭회상의 어깨에선 묘하게 힘이 빠져있었다. 그가 찻잔을 멀거니 들여다보았고,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종주님. 종주님은 혹시 친구 되시는 분이......
-아무도 없냐고?
-함광군이랑 삼독성수가 종주님과 동년배 아닌가요?
섭회상이 위무선이랑 고소수학 동기였다면 그 둘과도 연이 적잖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섭회상이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보기에 함광군과 내가 서로 막역한 사이일 것 같아?
내가 함광군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얼음 같은 사람이라는 것만은 사람들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둘 이름만 따져봐도, 빛을 품은 군자과 모르쇠 선생은...... 서로 접점이 전혀 없지. 내가 차마 빈말로도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섭회상은 괜찮다는 듯 내게 손을 내저어보였다.
-강 형과는 종종 만나. 근데 사실 그쪽도 나는 좀 무서워서.
그건 그렇지. 아직도 사도 썼다고 개처럼 끌고 가던 게 내 눈에 선하다니까? 그 모습만 봐서는 그가 위무선과 친형제처럼 살가운 사이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릉노조랑 삼독성수가 원래는 사이 엄청 좋았다던데요.
-맞아. 위 형이 나랑 같이 장난칠 때마다 강 형은 한 발짝 뒤에서 잔소리하면서 망 봐줬어.
섭회상이 위무선을 위 형이라 부른다고 내가 이제 와 놀랄 이유는 없었고, 얼마간 나는 섭회상이 풀어놓는 고소수학 시절 이야기를 말없이 듣기만 했다. 정신의 절반 정도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다른 절반 정도로는 금광요가 가르쳐줬다는 그 청심음을 생각했다. 고소 남씨의 비곡과 동영의 곡조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감이 존재했다. 문제는 그 거리감에 대해 금광요에게 물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명확한 이유를 댈 수 없었지만, 왠지 금광요에게 말을 꺼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섭회상의 서가에 있던 음호부와 관련된 문서처럼.
-듣고 있어?
-네? 네.
얼빠진 대답을 내놓자, 섭회상은 보란 듯이 서운한 티를 냈다.
-내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 없어?
-그게 아니라......
금광요에게 묻지는 못하지만, 섭회상에겐 물을 수 있겠지.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요. 사람들이 행로령 근처에서 자꾸 사람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부사님께 말씀 드리니 손 쓸 방도가 없다셔서......
-아, 그거?
지나치게 가벼운 섭회상의 목소리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가, 그의 설명을 듣곤 그대로 잠시 동안 넋이 나갔다.
-그건 정말 별일 아니야. 행로령은 대대로 우리 가문의 도를 묻어두는 곳이었어.
-네?
-도무덤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우리 가문의 주화입마는 업보에 가까워서, 이미 돌아가신 조상님들의 도령이 계속 날뛰면 살아있는 후손이 곤란해지게 되거든. 하지만 육대 종주께서 도무덤을 만드시고, 도령과 싸울 마물들도 거기 함께 봉인하신 뒤로 우리는 조상님들의 도령을 걱정할 필요는 없게 됐어. 한시름 놓은 거지. 그런데 가끔 도굴꾼이 도무덤의 진법을 흐트러뜨릴 때가 있단 말이야. 그렇게 되면 도무덤 내의 균형이 깨져서 살아있는 사람을 해칠 수 있어. 그럴 때는 가서 진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으면 돼. 사람들이 수군거리게 두는 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 근처에 최대한 사람 안 지나다니는 게 좋으니까, 소문 듣고 부디 다들 계속 행로령 근처를 피해 주기를 바라는 거지.
갑자기 홍수처럼 쏟아진 정보를 내 머리가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더러, 섭회상이 왜 이 이야기를 이렇듯 선선히 해주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더듬더듬 물었다.
-이거 그, 청하 섭씨 기밀 아닌가요?
-맞아. 아무한테도 이야기 하지 마.
-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걸 저한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알려주세요? 부사님이 저한테 이야기 안 해주신 이유가 있을 텐데요? 그렇게 묻고 싶었는데 말이 안 나왔다. 그러나 섭회상은 내 질문의 의도를 아주 간단히도 파악하곤 미소지었다.
-너를 믿으니까.
섭회상이 너무도 간단하게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누군가 내 심장을 밟는 것 같았다. 내가 침묵하는 동안 섭회상은 한숨 쉬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감 아저씨 말로는 네가 행로령에 대해 물었었다면서. 이야기 안 해줬다고 하길래, 네가 없어졌을 때 나는 너 혼자 행로령에라도 간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너를 찾고 나서 다 이야기해줘야지 했는데, 잊고 있었네.
몸이 조금 회복된 뒤 수련에 참가했을 때 나는 무척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들어보니 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안 섭회상이 부정세 사람들을 다 풀어서라도 나를 찾겠다며 울고 불고 난리를 피웠다는 것이다. 보다 못한 그때 그 새장을 관리하던 시녀가 앵무새 이야기를 꺼냈고 당장 나를 찾는 수색대가 꾸려졌다고 했다. 얼굴 화끈해지는 건 오직 내 몫이었다. 이래도 너랑 종주님이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그렇게 묻는 수사들에게 나는 그렇다고 피곤한 목소리로 일일히 답해야 했다. 이젠 아무도 안 믿어주는 모양새였지만. 부사든 총령이든 요즈음 나만 보면 묘하게 싸해지는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하루 말없이 사라졌다고 그 정도였으면 내가 아예 부정세 떠난다고 할 때는 어쩌려고 그러나. 내가 그런 상념에 잠겨있는 동안, 섭회상이 차가 다 식었다며 사람을 불러 새 찻상을 내오게 했다. 곧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찻주전자가 따끈한 다과와 함께 상 위에 올랐다. 원래 있던 차와 다과들은 누가 먹나 내가 아주 잠깐 동안 생각할 때였다.
-들어보니, 도굴꾼이 나타난 건 정말 오랜만이라 대처가 늦었다고 해. 그래서 죄 없는 생명이 다쳤지만...... 장사는 후하게 치러줬어. 다른 핑계를 대고 가족들에게 보상도 해줬고.
관자놀이께가 아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두 눈을 깜박였다. 내게서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자 섭회상은 나더러 너도 차를 좀 마시라며 권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손바닥이 데일 듯한 뜨거움에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섭회상이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벌써 또 행로령을 살펴보러 가야 할 때가 됐네. 이 주쯤 뒤에 갈 건데 같이 갈래, 밀아?
-네. 그렇게 하세요.
나는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러고도 잠시 넋놓고 있는데, 차가운 손이 뺨에 닿았다. 눈을 깜박이자 찻상 너머로 손을 뻗은 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섭회상이 보였다.
-괜찮아? 갑자기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아닙니다.
섭회상. 하얗고, 조그맣고, 순진하고, 겁 많고, 예민하고, 날카롭고, 우울하고, 사랑스럽다. 나는 내 뺨에 닿아있는 섭회상의 손을 붙잡아 쥐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맞췄다. 뻥 뚫린 정원의 하늘 아래 섭회상의 얼굴이 시시각각 붉어지는 것이 내 눈에는 아주 잘 보였다.
-오, 오늘 무슨 날이야?
-아뇨. 그냥.
천천히 섭회상의 손을 놓았지만 그 손은 여전히 내 입술 위에 있었다. 그의 손끝이 내 입술을 가볍게 쓸더니 아쉬움이 역력한 티를 내며 멀어졌다. 목이 탄다는 듯 입술을 핥더니, 차를 마실 생각은 못하고 부채를 펴서 자기 얼굴에 빠르게 부채질을 해대는 섭회상이 사랑스럽기만 해서 죽고 싶었다. 마른 세수를 하며 품에서 담뱃대를 꺼내는데, 섭회상이 부채 너머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생각해보니까 불공평해.
-뭐가요?
-너는 십대 때 뭐하고 지냈어? 한 번도 얘기 안 해줬잖아.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정원에 내리쬐고 있었고, 다리는 다 안 나았지만 바람 좀 쐬라고 밖에 데리고 나온 앵무새도 예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니 섭회상이 이 시간을 어떻게든 더 끌고 싶어하는 건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내게는 섭회상의 것처럼 멋드러진 십대 시절이 없었다. 나는 담뱃불을 붙였다.
-뭐가 궁금하신데요?
-너는 어쩌다가 수사가 된 거야?
섭회상에게 이야기 안 했었나? 했던 것 같은데, 할머니가 하동 부씨로 나 끌고 갔다고. 아무튼 별로 이 주제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길게 담배연기를 뱉었다.
-돈 많이 벌려고죠, 뭐. 길거리 나가서 어린 애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커서 뭐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금단 맺은 수사 되고 싶다 그래요.
-너도 금단을 맺고 수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
-아뇨. 저희 아버지 꿈이었죠. 저는 어릴적에 달리 꿈 같은 걸 가져본 적이 없어요. 제가 수사가 된 건...... 이미 하동 부씨에 넘어간 은자들을 낭비할 수 없어서. 정말 그게 다예요. 열 살 나이에 처음으로 목검이라는 걸 잡아봤고, 그 뒤로 계속 굴렀습니다. 열심히 하긴 했지만 그게 꿈이었던 적은 없어요.
꿈이라는 단어 자체가 조금 이상했다. 사냥꾼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사냥꾼으로 살다가 죽는 거고 종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마찬가지 종주로 살다가 죽는 게 당연한 세상 아닌가. 물론 예외야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예외다. 나는 섭회상을 빤히 바라보았다.
-종주님은 달리 꿈이라고 할 만한 게 있으셨어요?
-당연하지. 나는 평생 부정세 둘째 공자로 사는 게 꿈이었어.
섭회상이 웃었다. 그런 소박한 것도 꿈이라고 한다면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꿈을 발굴하는 대신 나는 아버지에 대해 계속 말하기로 했다. 그 편이 더 편했다.
-저희 아버지는 오대 가문의 수사가 되는 게 꿈이었대요.
-그래?
-네. 홀어머니 밑 외아들만 아니었어도 가출해서 진짜 강호에 몸 담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냥 포기하고 검 대신 도끼를 들었어요. 할머니가 사람 죽이는 일은 하면 안 된다고 끝끝내 붙잡았다나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섭회상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중원절 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네가 수사가 되길 바라셨다지 않았어?
-막상 보니까 평생 손에 사람 피 안 묻히고 살아도 개죽음 당하는 건 똑같았던 거죠.
나는 건조하게 답했다.
당시 많은 중소세가들이 적은 돈을 받고 문하생을 모집했었다. 그렇게 값싸게 모집된 아이들은 대부분 뭐랄까, 속되게 말하면 병풍 용이었다. 물론 그 적은 돈을 내려고 할머니는 자기 손자의 명줄을 끊어야 했지만.
그렇게 치러낸 남동생의 목숨값이 얼마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남동생의 죽음 그 자체만큼 고통스러웠다. 나름 이름 있는 세속의 가문에서도 자기 아들딸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선문세가에 많은 돈을 바쳤기 때문에, 원래대로였다면 뒷배경 없는 나는 문서나 서류 따위 만져볼 일도 없이 성인이 되고 얼마 안 있어 어디 야렵에 나가 죽었을 것이다. 그걸 알아서 이 가문 저 가문 전전하던 것도 있었다. 그냥, 내가 사일지정을 거치면서까지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고 그 이후로는 금광요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엔. 글이야 하동 부씨 문하생으로 있을 때 어영부영 깨쳤고 검술도 내가 노력해서 지금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치지만, 그 이상의 모든 것은 내가 금광요의 아래에 들어가며 얻은 것들이니까.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고, 내가 들어도 내 인생은 재미 없었다. 이 침울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섭회상의 눈에 서린 궁금증을 읽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이야기할 마음은 없었다. 내 생각이 전해졌는지, 섭회상은 어색하게 웃더니 접시 위의 과자를 집어들었다.
-이거 맛있으니까 이것도 먹어.
팥소가 가득 들어있는 과자를 나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지만 그저 우적우적 씹었다. 그런 나에게 섭회상이 물었다.
-네 아버지 이야기도 좋지만, 너는? 네가 원하는 건 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지금......
모든 게 지금 같으면 좋겠다. 내리쬐는 햇볕과, 한가한 적막과, 내 맞은편에 앉은 섭회상과 선선한 가을바람이 계속 존재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문득 들었다. 영원이라기엔 너무 거창하지만, 그 비슷한 무언가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말했다.
-종주님께서 그려주셨으면 합니다.
-무얼?
-그냥, 지금을요.
나 같으면 그림 그려달란 부탁을 받았을 때 귀찮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할 것 같은데, 섭회상은 반짝 눈을 빛냈다.
-그런 부탁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밀아.
섭회상이 시종들에게 붓과 벼루, 종이 등 이것저것 가져오도록 하는 동안 나는 어느새 내 어깨에 와서 앉아있는 앵무새를 간질거렸다. 섭회상이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음에 들어?
무채색의 정원에 앉아있는 얼굴 없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섭회상은 칭찬 받은 아이마냥 기쁘게 말했다.
-족자에 담아서 선물로 줄게.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종주님.
-응?
-어릴 때 꿈이 섭이공자로 평생 사시는 거였다면, 지금은요?
섭회상은 대답 대신 그저 묘한 미소를 짓더니, 종이를 조심스레 들어올려 해를 가렸다. 햇빛을 투과한 종이는 거의 투명할 정도라, 반대편에서 종이 너머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글쎄. 모르겠어.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을 반쯤 믿었다.
그러니 그날 섭회상도 나도 서로에게 궁금한 것을 절반 정도씩 간직했던 셈이다. 그러나 내쪽에서 그 비밀의 정체를 털어놓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바로 다음날 저녁이었다. 섭회상이 족자에 담은 그림을 내게 건네주었고, 나는 그것을 감상하며 어제 정말 이랬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노을빛이 스며들자 그림은 또 전혀 새로운 풍경이 되었다. 이런 날은 또 언제 올까 감히 그런 소망을 품고 있던 나는, 멀리서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음과 아우성이 순간 내 안에서 들려온 소리인 듯 섬찟했다. 고개를 들자 섭회상도 겁먹은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보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세요.
그 말만 남기고, 나는 들고 있던 족자를 내려놓은 뒤 빠르게 종주실을 나섰다. 섭회상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사실 별 일 아니리라는 생각이 제일 컸다. 그러지 않았다면 섭회상만 두고 종주실을 나왔을 리가 없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는 몰랐다.
소리를 따라 달리자 곧 일반 수사들의 숙소가 보였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있었다. 완전 새빨갛게 물든 하늘 아래 피냄새가 스쳤고, 길게 울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칼날에 반사된 햇빛 때문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거기엔 온몸으로 피를 뿜으며 난동을 부리는 검붉은 짐승이 있었다.
그게 정말 짐승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아주 잘 알았고, 그게 문제였다.
도끼리 부딪치는 소리도 내가 들었던가?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내가 본 광경은 결코 잊지 못했다. 부정세의 검은 수사복이 저 스무 해 전 기산 온씨의 망령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넓은 도가 반사하는 것이 그 피인지 아니면 하늘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기, 머리를 풀어헤친 채 처절하게 도를 휘두르는 남자에게는 어린 아이이든 성인이든 할 것 없이 보는 사람을 어쩌지 못하게 만드는 광기가 있었다.
죽음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과 그것을 기다려줄 수 없는 사람들 간의 대치는 언제나 아수라장일 수밖에 없고, 이미 주변에는 창백하고 미동도 없는 손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피에 젖어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눈과 분명히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나는......
나는 달리고 있었다. 세상이 눈 앞에서 좁아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가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 나는 흙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어떤 손이 다가와 나를 붙들었을 때, 나는 내 검은 어깨 위 새하얀 그 손을 보고 기겁했다. 둔하게 굳어있던 고막이 제 기능을 하게 되었을 때, 내가 들은 건 섭회상의 목소리였다.
-밀아, 괜찮아? 대체 무슨 일이야!
섭회상의 두 팔이 나를 조심스레 감싸 안는 동안 내 시선은 정원의 소나무에 닿아있었다. 돌아왔구나.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어떻게든 말하려 애썼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섭회상이 보아선 안 된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엔 그 생각 뿐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연못의 물마저도 붉었다. 나는 아예 섭회상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뭐라고 중얼거렸는지, 섭회상이 나에게 뭐라고 속삭였는지, 그런 것들은 칼로 도려낸 듯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에 들었다가 깨어났다고 착각할 정도로. 눈을 깜박여보니 호흡이 어느 정도 잦아들어 있었고, 섭회상이 여전히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나는 짙은 솔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이제 하늘은 거의 붉지 않았다. 그 대신 까맸다. 섭회상은 나를 정원 의자에 앉혔다. 나는 김을 내며 찻잔 안으로 떨어지는 찻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군가 섭회상에게 수사 중 하나가 주화입마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동안 나는 그냥 그렇게 있었다. 섭회상이 말문을 틀 때까지.
-날 걱정한 거야?
그쯤 되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걱정까지나 했다고 생색낼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뗐다.
-종주님은 이야기 듣고도 아무렇지 않으시네요.
-그야 난 부정세에서 평생을 살았는걸. 내가 내 눈 앞에서 사람이 피 토하고 죽는 걸 몇 번이나 봤을 것 같아? 적어도 형님이 처음은 아니었어.
싸늘한 가을 바람이 부는데, 섭회상은 혼자 여름처럼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많이 봤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우리 아버지도, 형님도 그렇게 돌아가셨는걸.
-종주님은......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으나 막상 어떻게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섭회상이 피 토하며 쓰러져서 주화입마 왔다는 소리 들은지 아직 반 년도 안 됐다. 아까 그 남자는 저렇게 되기까지 두 달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섭회상은 여전히 기이할 정도로 맑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나는 자꾸만 말을 더듬었다.
-종주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그렇게, 그렇게......
-죽지 않을 거냐고? 글쎄. 사람 일을 누가 알겠어. 아무도 모르지.
그러더니 섭회상은 쥐고 있던 부채를 펼쳤다. 거기에는 아무 무늬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죽으면 싫어?
섭회상이 섭회상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 순간 그 얼굴에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질문을 한 게 그가 아니라면 나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대답 대신 섭회상을 노려보았다. 섭회상이 그런 나를 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기분 알겠니?
다시 한 번,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는 잠시 동안 대치했다. 그 사이 섭회상의 입가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그라졌다. 곧 그는 진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한 마디 없이도 나는 그 시선을 이해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리내어 웃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따라 웃지 않을 것 같은 웃음이었다. 힘없이 다시 주저앉은 나는 가슴팍을 더듬어 담뱃대를 꺼냈다. 섭회상은 내가 담배통에 잎을 채워넣는 동안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손이 떨리는 바람에 담뱃잎이 뭉텅이져 여기 저기 떨어졌지만, 그게 중요한가. 불을 붙인 뒤, 나는 한 모금 길게 빨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뭐 정리할 것도 없었다만.
-사실 별 건 아닙니다.
-그래?
-네.
어쩐지 곧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내 고요하기만 한 정원이 내 목을 졸랐다. 나는 숨을 참고 버텼다. 그러나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니지만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는 사실 하나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여덟 살 때, 부모님이 청하 섭씨 수사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섭회상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빠르게 체념했다.
*
-그 수사도 죽었죠. 제 눈 앞에서.
이 이야기는 금광요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한낱 작은 마을에서 주화입마 온 섭씨 수사에게 열 명쯤 도살당한 사건 따위, 금광요가 알 리 없지. 금광요. 그 이름을 생각하며 나는 맞은편에 앉은 섭회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독 노란 달빛 아래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공포 외의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도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 모르겠으니 상관 없었다. 나는 말을 꺼낸 김에 그저 되는 대로 내뱉었다.
-그 수사가 제 코 앞까지 와서 얼굴에 피를 뿜고 죽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눈은 아마 제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평생 저는 모르겠죠. 그 사람이 어린애는 죽이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자기 팔을 멈춘 건지, 아니면 제가 산 게 정말 우연인지.
뭐가 됐든, 그때 그 붉고 검은 눈에 있던 공포는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처럼 끈질기게 내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자기를 좀 살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조차 사치라 여겨질 정도로 그때 그의 눈빛은 절박했고, 그가 내 부모를 죽였음에도 나는 그를 도울 수 없었다는 공포에 내내 시달려야 했다.
어두운 방에 기침하는 할머니와, 앓는 남동생과 함께 처박혀 있는 동안 그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냐면 그건 거짓이다. 하지만.
-오해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일로 청하 섭씨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은 품지 않았으니까.
-왜?
이젠 내가 미소지을 차례였다. 이걸 미소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광경을 한 번 보게 되면 사람은 운명을 믿게 됩니다. 종주님은 안 그러셨습니까?
섭회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차 말을 이었다.
-제가 본 건 재앙 그 자체였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사람이 죽으면, 자기가 서 있던 땅을 원망해야 합니까? 원망해 봐야 뭐가 달라집니까?
아주 어릴 때는 물론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때는 누구든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만약 그 섭씨 수사가 부모님을 죽이지 않았다면 남동생도 어쩌면 죽지 않았을지 모른다. 적어도 더 오래 살았을 것이고, 나도 그만치 괴로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컴컴한 방 안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세상을 차차 알아가면서 나는 그 일로 죽은 수사를, 청하 섭씨를 원망한다는 게 우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얻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원망해 봐야 제 속만 괴로울 뿐, 변하는 게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할머니조차도 나에게 복수라는 단어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애초에 할머니가 왜 나를 수사로 길렀는지 알 길이 없다.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서? 정말 그것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죽기보다는 죽이는 쪽이 되기를 바란 걸까. 모른다. 정말 모르겠단 말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텅 비어있었다. 섭회상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밀아......
나는 부러 그의 말을 끊었다.
-당시 섭종주, 그러니까 종주님의 부친께서 사과의 말씀과 함께 아주 후한 배상금을 보내셨던 걸 기억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 돈으로 제가 검을 쥔 거네요.
이러니 인연이란 참 신기하지 않은가. 나는 희게 질리는 섭회상의 얼굴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사실 돈으로 배상하는 것 말고 달리 그 분도 뭘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수사들을 저희 지역에 보낸 것도 좋은 마음에 그러신 걸 텐데...... 그런데 그때 할머니가 배상금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종주님. 전 청하 섭씨가 정말 싫더군요.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전통 때문에 계속 도를 쓴다는 게 너무 오만하잖아요. 그럴 권리가 어디서 나옵니까? 청하 섭씨가 뭔데요? 가문이 뭐고 전통이 뭔데요? 그게 사람 목숨보다 중요합니까? 백 년짜리 가문은 중요하고, 십 년 이십 년 짜리 사람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섭회상은 아무 말 없이 나를 기다려주었다. 밤하늘 아래 새까맣게 젖어있는 그의 눈동자가 마치 처음 봤을 때처럼 인형 같았다. 문득, 미치고 싶다는 그의 말이 이해가 갔다.
-청하 섭씨가 대체 뭔데 그 수사도, 저희 부모님도, 저희한테 사과하신 전전대 종주님도 그렇게 돌아가셔야 했습니까? 왜 적봉존께서 그렇게 돌아가셔야 했고, 종주님이 그걸 보셔야 했죠? 가문을 책임지는 종주마저도 그렇게 줄줄이 생을 마치니 제가 원망할 건 청하 섭씨라는 그 이름 뿐인데, 그게 뭔지 도무지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부정세에 온 뒤로는...... 청하 섭씨가......
말끝을 흐리며,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청하 섭씨란 이제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젠 정말로 청하 섭씨를 원망하고 미워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감히 느끼기로는, 섭회상도 지금 내가 입 밖에 낸 생각을 한 번쯤은 해 보았을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내 추측일 뿐이다. 나는 고개를 떨궜다.
-청하 섭씨가 원망스럽습니다. 종주님도 그렇게 돌아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다 부숴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종주님이 청하 섭씨이시잖아요? 그래서......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어서 나는 내 빈 손만 덩그러니 내려다보았다. 왜 이 이야기를 꺼냈을까. 그냥 끝까지 참을걸, 나는 괜찮은데...... 정말 괜찮다. 나는 섭회상처럼 죽은 형을 생각하며 우는 일도 없고, 악몽을 꾸지도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입술을 씹는데, 섭회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제가 괜찮으면 안 되는 겁니까? 그럼 안 괜찮다고 하죠. 모르겠습니다.
섭회상이 내 앞에 다가와 섰다. 나는 섭회상의 두 발을 바라보다가, 내 얼굴에 와 닿는 그의 부채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부채가 턱에 닿는 대로 고개를 들어 부채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달을 가리고 선 그의 얼굴은 분명 어두웠지만, 나는 그의 눈가가 젖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밀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았다. 섭회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그저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내게 문제의 핵심을 내어놓았다.
-왜 부정세에 온 거야?
저도 여기 오고 싶지 않았어요. 금광요가 아니었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거예요. 여기를 마지막으로 수진계를 떠나려 했어요. 어쩌면 나는 그런 말을 쏟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을 제쳐놓고 입술이 움직였다.
-종주님을 만나러요.
아무 대답 없었지만, 나는 섭회상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턱 끝에 있던 부채를 거두어들였다.
-사과하기엔 이제 와서 너무 늦었지? 그래도 정말 미안해, 밀아. 어떻게 사죄를......
떨리는 그 목소리를 들을 때, 속에서 둔탁한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마치 도망치듯 고개를 저었다.
-종주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그를 속이는 건 나였으니까.
-종주님은 화나지 않으십니까? 제가 이제야 이 이야기를 해서요. 저를 더 이상 믿지 못하신대도 이해합니다.
차라리 그가 그래주었으면 좋겠는 게 그 순간 내 마음이었다. 그러나 섭회상은 그 말을 듣곤 웃었다. 무언가를 억지로 참는 듯 괴로운 미소였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우리 형님께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장 못 견뎌 하셨거든. 하지만 난 항상 생각했어.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잠시 말을 멈춘 섭회상이 내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이 세상에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은 없어요. 종주님.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섭회상이 입술을 달싹였다. 기이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되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답변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내 얼굴로 다가온 그의 손을 쥐었다. 그러나 머릿속이 이미 텅 비어있어서, 생각한 보람이 없이 나는 되는대로 지껄여야 했다.
-사람의 마음에는 항상 뭔가가 남고야 마니까요. 적봉존께서 종주님께 청하 섭씨라는 짐을 물려주고 싶으셨을까요? 아닐걸요. 정말 자기 죽음에 초연하셨을까요? 그것도 저는 모른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분도 어쩔 수 없으셨죠. 그런 겁니다. 마음과 삶이 정말 일치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니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경멸했다는 적봉존도, 정말 겉과 속이 같을 순 없다. 인간인 이상 그럴 순 없다. 섭명결과 전혀 딴판이었다는 섭회상도 지금 이렇게 종주 자리에 앉아있다. 그는 주화입마를 여러 번 목격해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보름달이 되는 밤이면 섭명결의 악몽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또 부정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점에서 섭회상은 섭명결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섭회상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한 건 네가 말한 것과는 달라. 나는 남을 속이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 거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마치 내가 자기를 반박해줬으면 하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겠는가?
-종주님. 사람은 의외로 자기 마음을 모릅니다. 자기 마음을 모르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누구를 속이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논해요.
-그러면 진심은 어떻게 아니?
-뭐든 진심이 될 수 있죠.
섭회상은 눈을 감은 채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잠든 그의 얼굴을 보던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너는 정말 이상해. 네가 한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다 궤변이라고 할 거야.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일문삼부지잖아?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네 말을 믿어도 이상하지 않지.
섭회상의 두 눈이 천천히 뜨였다. 여전히 눈물에 젖어있었지만, 그의 두 눈은 분명 아까와는 다른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약속할게. 나는 절대 그렇게 죽진 않을 거야.
나는 말문이 막힌 채로 섭회상의 얼굴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섭회상이 내게 잡혀있던 손을 비틀어 깍지를 껴올 때까지.
-그러니 나와 함께 살아줄래?
항상, 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그러고 싶습니다.
그게 진심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
말을 마치자 침묵이 흘렀고, 한참 동안 섭회상은 내 손을 말없이 매만졌다. 나 또한 멍하니 그 손의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보드랍고, 차갑고, 그러나 내 손보다 더 크고 단단했다. 그 사실에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몸이 굳을 즈음, 섭회상이 나지막히 말했다.
-아마 평생 나는 너에게 미안할 테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비틀어 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손힘은 늘 그렇듯 대단했다. 결국 나는 포기하고 물었다.
-제가 싫대도요?
-응. 미안.
자기도 그 대답이 우스웠는지, 그는 작게 웃더니 나를 품에 안았다. 맨질맨질한 회색 옷감 때문인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자 꼭 바위에 뺨을 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섭회상과 바위라니. 이 세상에 그보다 안 어울리는 짝패를 찾기도 힘들겠다. 그런 생각에 잠긴 채 그의 품에서 나는 소나무향에 집중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내 머리를 울렸다.
-어떻게 나를 용서할 수가 있어?
-말씀 드렸잖아요.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없다고.
차라리 그가 나와 같은 피해자로 여겨진다면 모를까, 아무래도 그를 원수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것 때문에 죽은 이들이 나에게 성을 낸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난 정말 글러먹은 인간이다. 그리고 멍청했다. 저 사람이 괜찮다고 하면, 정말 괜찮은 이 채로 끝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때, 섭회상이 여전히 희미한 떨림이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냐니, 왜 괜찮냐는 것일까?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종주님이...... 종주님이셔서요. 종주님이 괜찮다고 하시면, 저는 괜찮습니다.
하나 남은 답이 이따위라는 게 통탄할 만한 일이었지만, 내 어휘력이 얼마나 바닥인지는 섭회상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상관없지 않을까. 애초에 기대도 안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나를 감싼 섭회상의 두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는 한참 뒤 다시 내게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없겠니?
-건강만 하세요.
-그런 것 말고.
잠시 뜸을 들인 섭회상이 슬며시 입을 뗐을 때, 난 그제야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안장은 어떻게......
-그냥, 마을 무덤터에 했지요.
-그럼......
-그게 피차 편해요.
그렇잖은가. 살면서는 쌀밥에 고기반찬 먹어본 경험도 얼마 없는데 죽고 나서 갑자기 사람 집만 한 무덤이 생기면 죽은 분들 놀라서 일어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다 흙으로 돌아간 사람들에게 내가 대체 뭘 해줄 수 있는가.
-정 걱정되면 저한테 돈으로 주시든가요.
-뭐?
-원래 후손 덕은 조상이 본다고, 후손이 잘 사는 게 조상한테는 최고 선물이죠.
대충 그렇게 그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던 나는 갑자기 내게서 멀어지는 섭회상 때문에 두 눈을 깜박여야 했다. 내가 너무 지나쳤나? 하지만 그게 내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섭회상의 두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그리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도 강렬해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이제 알겠어.
-뭘......
-너는 정말 재물을 탐하는 게 아니야.
갑자기요? 그렇게 되물으려 했던 나는, 이어진 섭회상의 말에 그대로 굳었다.
-어차피 받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해서 자꾸 돈을 받겠다는 거잖아. 넌 정말 그 누구에게든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묻고 싶었는데 말문이 떨어지질 않았다. 침묵하는 나에게 섭회상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니?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 머릿속에 걸리는 게 있었다.
-당연히 있죠. 그리고 받았습니다. 오늘.
내가 보던 그림. 그 회색 족자. 섭회상의 손이 내 얼굴을 놓아주었고, 나는 탁상 위로 손을 뻗어 족자를 손에 쥐었다. 섭회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를 보다 보면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적봉존요?
-아니. 다른 사람.
-남자죠, 그 사람도?
이제 반쯤 체념했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러자 섭회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조금 허물어지는 분위기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섭회상이 말했다.
-남자이기는 해. 하지만 생긴 게 닮았다는 건 아냐. 난 욕심도 많고 미련도 많아서, 너나 그 사람같은 이를 보면 신기하거든.
말을 마쳤던 섭회상이 보다 힘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그 사람을 보면서는 그저 부러울 뿐이었는데, 너를 볼 때는 달라. 너를 볼 때는......
섭회상이 말끝을 흐리는 동안 나는 족자의 매끈한 천을 가만가만 쓸어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계속 침묵하는 게 어딘가 짚이는 데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물었다.
-제가 불쌍하세요?
-그렇다면 화 나?
-아뇨. 감사하죠.
진심이었다. 다시 섭회상을 올려다보자, 그의 눈에서는 다시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슬퍼보여서, 그 순간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차오르는 생각들로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나에게 실망한 걸까? 앞으로 나에게 얼마나 더 실망하게 될까? 사실, 섭회상이 나에게 실망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뭐라고?
-그만 생각해.
순간 나는 내가 머릿속의 생각들을 입 밖에 내뱉은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섭회상이 말했다.
-나 이제 네 표정도 어느 정도 읽을 줄 알아. 너 말수만 적다뿐이지 생각은 참 많잖아.
-원래 안 이랬습니다.
정말이다. 생각이 이렇게 많아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건 섭회상을 만나면서부터였다. 말이 많아진 것도 마찬가지다. 왜인지 모를 충동에 휩싸인 채 나는 입을 열었다.
-종주님 때문에 변한 겁니다. 종주님 때문에......
이렇게 내가 바뀌었다고. 호기롭게 말문을 뗐으나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나는 중간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나 상관 없다는 듯 섭회상이 나와 눈을 맞췄다.
-알아.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밀아.
일문삼부지가 언제부터 그렇게 똑똑했고 통찰력이 있었냐고,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그의 말을 믿었다. 그게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길이라 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https://hygall.com/511610837
[Code: b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