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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1 22:05
진정령, 난백 ㅅ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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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내 방에 돌아온 나는 이틀치 수면향 덕분인지, 그 날 아주 달디 단 잠을 잘 수 있었다. 꿈 한 톨 없이 정말 깔끔하게. 아침에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고 나자 내 인생이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어차피 시작부터 잘 풀릴 리 없던 인생인데 이제 와서 고민하는 것도 의미 없다는 생각에 나는 담배 한 대 피우고 힘차게 또 하루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협탁 위 아니면 내 품 안에 있어야 할 장죽이 없었다.

나는 몇 번이고 텅 빈 내 품을 더듬다가, 침상 옆을 뒤지다가, 혹시 내가 어제 종주실에 장죽을 놓고 온 건가 하는 생각을 해냈다. 나는 대충 몸 정리를 마친 뒤 곧장 종주실로 향했다. 하지만 거기에 내 담뱃대는 없었다. 청소를 맡은 시비들에게도 물어보았지만, 아는 바가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자랑은 아니었지만 나는 꽤 심각한 중독자였고, 금단만 아니었으면 폐가 썩어 죽었을 거란 이야기도 여러 번 들었었다. 그말인즉슨, 수련이고 나발이고 그날 내가 해야 할 임무 첫 번째는 잃어버린 담배 찾기였다 이 말씀이다. 눈이 벌겋게 돼서 부정세를 돌아다니는 내 꼴이 여긴 흉악한 게 아니었는지, 가복들과 시비들부터 해서 일반 수사들까지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게 느껴졌다. 당연히 상관 없었다. 나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었으니까. 거의 한 시진 가까이 부정세를 돌아다니던 나는 잠에서 이제 막 깬 듯한 몰골로 정원에 나와있는 섭회상을 보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종주. 간밤에 안녕하셨어요?

-어...... 응. 그런데 밀이 너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무슨 일이냐는 건 얼굴이 무슨 일이냐는 건가? 모르겠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 장죽 보셨어요?

-아니? 못 봤는데. 왜? 잃어버렸어?

고개를 끄덕이자, 섭회상은 뭐 좋은 일이라도 생긴 양 즐거워했다.

-그럼 나도 같이 찾아줄게! 재밌겠다!

남의 불행을 행복으로 삼는 모습이 얄밉기 그지없었지만, 도움이 필요없다고 하기엔 담배가 너무 간절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은, 어제 밤과 달리 화창한 섭회상의 얼굴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섭회상과 나는 흩어져서 부정세를 뒤지기로 했다. 나는 남쪽으로, 섭회상은 북쪽으로. 혼자 얼마나 찾았을까, 나는 마침내 장죽을 발견했다. 연무장 바로 옆 계단에서. 두 동강이 나 있는.

그건 누가 봐도 누군가 고의로 부러뜨린 것이었다. 나는 나 스스로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부서진 나뭇대를 뚫어져라 바라만 보곤 있었다. 그러다보면 오전 훈련을 마친 수사들이 내가 왜 그러고 있나 궁금했는지 슬금슬금 모여들었고,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부러진 내 담뱃대를 천천히 주워들었다. 그리고 말아쥐었다.

-아밀!

그리고 그렇게 나를 부를 이는 섭회상뿐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마냥 해맑은 얼굴로 부채를 파닥거리는 섭회상이 보였다.

-담배 찾았어? 왜 다들 이렇게 모여 있......

섭회상은 내 손에 들린 장죽의 잔해를 보더니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곧장 빽 외쳤다.

-피! 너 손에 피 나!

한바탕 작은 소동이 벌어진 뒤, 나는 무려 종주실에서 종주에게 상처를 치료받았다. 섭회상은 조심 조심 내 손바닥을 싸매며 울상을 지었다.

-화 난 건 알겠는데, 그래도 너무 흥분했잖아. 담배 못 피우는 게 그렇게 화 나?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그 장죽이 비싼 거야?

나는 흰 천으로 잘 싸매진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장죽 따위 아무리 비싸봤자 내가 못 살 건 아니었다. 그러니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섭회상이 언젠가 말했듯, 이건 돈 주고도 얻을 수 없는 어떤 것에 관한 문제였다.

-선물받은 거였어요.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선물요.

어머니, 아버지나 할머니가 주던 걸 제외하고 그 장죽은 내가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받아본 첫 선물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선물을 준 그 누군가는 당연히 금광요다. 금광요. 그를 생각하며 잠시 넋이 나가 있는데, 섭회상이 위로하듯 내 팔목을 가만가만 두드렸다.

-부모님은 아닐 거고...... 그 친구라는 사람이 준 선물 맞지?

고개를 끄덕이자, 섭회상은 마찬가지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피묻은 장죽을 마찬가지로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데, 이거 정말 칠석 때 피를 봐서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를 슬슬 건드리는 섭회상 때문에 고개를 들었다.

-완전히 부서져서 수리도 어려울 것 같아. 소중한 물건이었다는 건 알겠지만...... 이건 그만 버리는 게 어때?

조심스럽게 내 안색을 살피는 섭회상을 보자니 어쩐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일개 수사고 섭회상은 종주였다. 그러니 그가 내 눈치를 보는 건 말이 안 되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이미 부러진 것을 어쩌겠는가. 오래된 물건이었으니 금광요도 이해할 것이다. 사실 신경도 안 쓰겠지. 그러니 나만 마음을 추스르면 된다. 나는가슴 한 쪽이 답답한 걸 무시하고, 섭회상에게 최대한 밝게 웃어보였다.

-그래야죠. 오래 된 거였는데, 이 참에 새로 하나 사야겠네요. 생......

각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섭회상이 붕대 감은 내 손을 두 손으로 부서져라 꽉 쥐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잘 됐네. 내가 새로 사줄게.

-아니, 종주......

-이런 건 담주에서 잘 만들어. 오늘 당장 같이 가자.

-네, 알겠으니까 손 좀......

겨우 지혈되었던 손에서 다시 한 번 피가 터지고, 섭회상은 미안하다고 삐약거리며 내 손에 다시 한 번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다시 내 손바닥에 새하얀 천이 감긴 뒤, 나는 그러고 보니 뜬금없이 웬 담주인가 싶어 섭회상에게 물었다. 섭회상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미안. 하지만 원래 이맘때 쯤엔 담주가 정말 예쁘거든. 거기 엄청 유명한 정자가 있는데, 가면 산작약이 무척 예쁠 거야. 벌써 끝물일 거라, 지금이 아니면 그 풍경을 못 봐.

-그래요......

나는 반쯤 멍하니 대답했다. 섭회상의 감정선을 좀처럼 따라가기 어려웠다. 돈 쓸 일에 왜 저렇게 기뻐하는 걸까. 뭐가 됐든 선물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고, 나야 돈도 굳으니 좋지 뭐. 부서지고 피묻은 내 장장 열다섯 해 동안의 동반자를 묻어주고 싶었지만, 섭회상이 이제 저건 시비들이 알아서 치우게 두라며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종주님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건 온 부정세가 다 아는 일이니 당장 담주로 향할 일행을 꾸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나한테 지금 당장 피울 담배가 없다는 것이었다. 현기증이 났다. 담주로 가는 내내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갑자기 차가운 손가락 끝이 내 입술을 건드렸다.

-입술 좀 그만 괴롭혀.

고개를 돌리자 마차 안에서 얼굴을 내민 섭회상이 있었다. 부채로 눈 아래를 가리고 있는 게 어디 부잣집 여식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모습이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내 아랫입술을 몇 번 더 쓰다듬더니 멀어졌다. 이제는 다른 의미로 현기증이 났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섭회상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섭회상이 나들이를 나와 신난 듯 나에게 자꾸만 말을 걸었다.

-밀이 너는 담주 와본 적 있어?

-몇 번요.

-그래? 그러면 시화녀에 대해서도 알아?

-아뇨?

그 순간 섭회상은 나를 문명과 동떨어진 어디 저 작은 촌구석의 어린애 보듯 바라보았다.

-시화녀를 몰라? 음철도?

-음철이 뭔지는 아는데 시화녀가 왜요?

내가 답답했는지, 섭회상은 탁 소리 나게 부채를 접었다. 그리고 좋은 시를 읊으면 꽃을 내려주던 시화녀라는 요괴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음철에 대해 한바탕 강의를 했다. 나는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섭회상의 얼굴이나 감상했다. 그러다보면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가 섭회상의 머리 위에 앉았다. 섭회상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는데, 그래서 더더욱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왜, 왜 그렇게 웃어?

대답 대신 손을 뻗자, 나비가 내 손가락 위로 옮겨왔다. 곧장 다시 날아가버렸지만. 섭회상은 날아가는 나비를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어서 정말 한 송이 꽃같이 예뻤다.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꽃 이야기를 해서 나비가 왔나봐요.

그건 섭회상이 매양 읊는 시들 중에 하나를 따라한 것이었다. 서당개 한 달이면 풍월을 읊는다 이 말씀이야.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헛기침을 하는데, 섭회상은 말없이 입술만 달싹이더니 다시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그건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닌데……

시발. 내가 그럼 그렇지.

그 뒤로 섭회상도 나도 말이 없었지만, 나는 입술을 깨물고 싶은 충동을 더는 느끼지 않았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수사들의 시선을 뒤늦게 느끼고 정신줄을 잡지 못한 데 자책하긴 했지만, 이미 지난 일을 뭐 어쩌겠는가.

이윽고 담주에 도착하자마자 섭회상은 체신머리도 없이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리려다가 비틀거렸다. 그 모습이 확실히 귀엽기는 했다만.

-지금이 몇 시야?

-미 시쯤 되었죠.

-그럼 네 것부터 먼저 사러 가자.

그러면서 나를 이끄는 섭회상을 따라 나는 순순히 걸었다. 풍류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은 것답게, 담주는 어쩐지 햇볕마저도 산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 물 흐르듯 여유로워보였다. 심지어 물건을 파는 상인들마저도 그런 분위기를 풍기니, 돈만 많으면 한평생 여기서 유유자적 살다가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몇 번 와본 적 있었지만 그때에는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던 것이 신기해 나는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어쨌는지, 섭회상이 내게 가볍게 부채질을 해주며 주의를 돌렸다.

-네가 쓰던 연죽이 무척 이름난 장인이 만든 거란 것 알아. 맘 같아선 나도 얼마나 오래 걸리든 상관 없이 직접 주문을 넣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네 입술에서 기어이 피가 날 것 같다.

하기야 진짜 부자들은 기성품따위 쓰지 않지. 금광요가 주었던 장죽도 그가 직접 장인에게 세공을 맡긴 것이었다. 뭐 그가 본인 입으로 그렇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 정도야 척 보면 척이니까. 생각해 보면 주위 사람들 눈에는 굉장히 이상해 보였을 지도 모른다. 웬 거지가 담뱃대만 비싼 것을 들고 다니니. 담뱃대 도둑으로 안 몰린 게 다행인 지경일지도.

-자, 골라 봐.

이래서 내가 부자가 못 되나? 섭회상을 따라 연죽전에 들어선 나는 주루룩 펼쳐진 담뱃대들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주문 맡길 돈이 있어도 주문서를 쓸 머리가 없으니. 정말이지, 내 눈엔 그게 그거였다. 뭐가 더 길고 뭐가 더 짧다, 뭐가 검고 뭐가 붉다만 구별될 뿐이었다. 결국 나는 멍청하게 섭회상을 보았다.

-종주님이 골라주시면 그냥 그거 쓰겠습니다.

-이번에도 내가 골라주는 게 네 취향이라고 할 셈이야?

-네.

나는 당당했다. 섭회상은 내 대답을 듣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꼼꼼히 진열대를 살피던 그는 무늬 없이 새까만 대나무 대롱을 집어들었다.

-이건 어때?

그쯤 되자 뭐가 됐든 그냥 담배를 태울 수만 있다면 다 좋았다. 그럼에도 마치 흑단목처럼 검고 매끈한 나무 대롱을 보다보면 자연스레 부정세가 생각났고, 만약 내가 계속 이것을 쓰게 된다면 부정세를 떠난 뒤에도 섭회상을 추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뒤 내 손에는 검은색의, 새로운 담뱃대가 쥐어졌다. 섭회상이 값을 치르며 내 팔을 부채로 톡 쳤다.

-이제 이 담뱃대 값만큼은 더 나한테 더 충성하겠지?

-당연하죠.

진심이지만 성의 없는 대답을 들려준 뒤, 나는 그를 따라 황급히 가게를 나섰다.

가게를 나오자마자, 나는 품 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담뱃잎을 담배통에 꾹꾹 눌러담았다. 불을 붙인 뒤 기다렸다가 깊게 한 모금 빨고 나니, 저절로 만족스런 신음 같은 것이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와 함께 흘러나왔다.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몇 번 더 빨고 나니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나는 담배통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연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섭회상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하얘서 그런가, 홍조가 퍼지는 게 참 잘 보이기도 했다. 속 편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였다.

-그거 안 피우기로 했잖아. 이 주머니는 또 뭐야?

섭회상이 내 손에서 주머니를 잡아챘던 것이다. 순간 누군가 머리 위로 얼음물을 들이부은 것 같았다. 좆됐다. 하필 금광요 이건 난릉 금씨 티 안 내면 죽는 것도 아니고 금색으로 만들어선. 그런 생각을 하며 섭회상의 손에 들린 금색 담뱃주머니를 노려보는데, 섭회상이 나에게 물었다.

-이게 네 취향이야?

-아닌데요. 그냥 아무거나 산 건데요?

섭회상은 작게 콧소리를 흘리더니 주머니를 자기 품에 넣었다. 부채를 펼쳐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는 그에게선 웬일로 종주의 위엄 같은 것이 풍겼다.

-오늘 살 게 많겠네.

그렇게 말하는 그는 내가 본 그 어느 때보다도 기뻐 보였다. 돈 쓰는 게 취미인가. 근데 왜 굳이 나한테 돈을 쓸까. 그건 모르겠으나 나는 섭회상을 따라 계속 담주 거리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연초전은 나도 자주 가 봤으니, 담뱃잎과 비단주머니야 고르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문제는 구할 걸 다 구하고도 우리 종주님이 길거리를 떠나지 않으려 한다는 데 있었다. 담주 사람들은 섭회상과 그의 수사들을 자주 목격해왔는지 이쪽에 별달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게 편하긴 했지만.

-비녀?

나는 섭회상이 멈춰선 좌판을 둘러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섭회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골라 봐.

이쯤 되면 이건 이미 하나의 고착화된 문답이었다. 나는 취향이랄 게 딱히 없다니까. 무엇보다 나는 비녀든 머리장식이든 사용하지 않았다. 머리끈만 있으면 해결될 일을 무엇하러 거추장스럽게 작대기를 쓴단 말인가. 자기도 머리장식 수수한 거 쓰면서. 섭회상은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게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디서 찢어온 것 같은 천은 너무하잖아. 이건 부정세의 품격이 달린 문제라고.

부정세의 품격을 논하고 싶으면...... 당신이 지금 일을 다 팽개쳐놓고 여기 나와있으면 안 되지 않을까? 그런 질문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아까는 내가 골라주었으니 이번에는 네가 고르라는 섭회상의 성화에, 나는 시선으로 좌판을 배회하다가 은으로 된 평범한 비녀를 하나 집어들었다.

-넌 꼭 골라도 그런 걸 고르니.

-아니, 종주님. 부정세 수사복에 화려한 비녀 차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섭회상과 투닥거리던 나는 내가 고른 비녀를 수호해냈고, 섭회상은 못마땅해하면서도 나를 설득하진 못했다. 그래놓고 그는 자기가 맡아두겠다며 내 비녀를 가져갔다.

어느새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섭회상은 산작약은 내일 봐야겠다며 나에게 객잔을 예약하라 시켰고, 나는 섭회상이 길거리를 더 구경하는 동안 그와 부정세 수사들이 묵기에 적절한 객잔을 찾아 방을 잡았다. 이제 필요한 건 담주 길거리에서 섭회상을 찾는 일이었다. 부정세 수사복이 새까맣고 침침한 건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어둠의 인간들이 모여 있는 것을 찾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섭회상이라면 부채 파는 가게에 있지 않을까 해서 기웃거리던 나는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치는 것을 느끼곤 뒤를 돌았다.

코 앞에 다가와 있는 것은 불그스레한 짐승의 머리였다. 부리부리한 눈이 나를 꿰뚫어보았다.

눈을 깜박이는 사이 모든 일이 다 벌어졌다. 내 주먹이 뻗어 있었고, 짐승은, 그러니까 짐승 머리 탈을 쓴 남자는 저 멀리 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리고 비명을 지르는 동안, 나는 얼터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섭씨 수사들을 비슷한 얼굴로 마주보았다.

그 일이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나는 백주......대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사람 많은 번화가에서 자기가 모시는 종주 얼굴에 주먹을 날린 미친놈이 되었고 섭회상의 입술은 터졌으며 그의 왼뺨에는 시퍼런 피멍이 들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지능이 낮아진다는데, 그 말이 맞는 듯했다. 나는 그대로 얼어버렸고, 섭회상은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축 늘어져 있어 수사들이 객잔으로 업어날랐다. 내가 겨우 정신 차렸을 때에는 객잔에 잡아두었던 섭회상의 방이었다. 정말 반쯤 기절했던 건지 비몽사몽 눈을 뜬 섭회상은 곧 우는 소리를 내며 자기 뺨을 감쌌다. 그도 나만큼이나 정신이 없는지, 쓰러질 때 머리를 다친 건지 뭐라 말이 없었다.

누군가 불러온 의원이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금단도 맺은 몸이니 보름이면 다 나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뒤에야 섭회상은 상황에 대해 뭔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제일 처음 보인 반응은, 당연하게도, 아파 죽겠다며 우는 것이었다. 수사들은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더니 나만 두고 슬슬 섭회상의 방을 나갔다. 아마 섭회상의 얼굴을 갈긴 게 내가 아니었어도 비슷했을 텐데, 섭회상의 투정을 받아주고 싶어하는 수사들은 내가 알기로 부정세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고, 아이고...... 너무 아파, 아......

알고 보니 섭회상보다 내가 더 멍청했는지, 아니면 반응 속도가 느렸는지, 나는 커다랗게 멍이 든 섭회상의 얼굴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저 조막만한 얼굴에 저렇게 큰 멍자국이라니. 도톰하고 조그맣던 입술은 한쪽 끝에 피딱지를 매달고 있었고, 그 상처를 낸 건 다른 누가 아닌 나였다. 차마 죄송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아야, 아...... 아니, 밀아. 너는 왜 울어? 네가 때려놓고선.

내가 여전히 아무 말도 못하자, 섭회상의 얼굴에는 분명한 걱정이 서렸다. 그는 곧 웃음으로 그것을 덮었다.

-너 평소에는 정말 우리 형님 같더니 이럴 때면 꼭...... 아니다. 아무튼 얼굴이 이렇게 됐으니 이제 나 진짜 장가 못 가겠다. 그치? 선도 못 봐. 안 볼 거야. 나가자마자 퇴짜 맞을 게 분명해.

그러더니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마구 웃는 섭회상 때문에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웃지 마세요. 입술 흉 지면 어떡해요.

-나를 걱정하는 거야, 내 얼굴을 걱정하는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섭회상에겐 내가 과민반응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그건 그가 내 속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나는 내가 섭회상에게 주먹을 날린 그 순간 내 손에 검이 들려있지 않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몸을 일으키며, 섭회상은 입가가 따가운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계속 즐거운 듯 웃었다.

-진짜 기가 막히다. 네가 오고 나서 심심할 틈이 하나 없어.

-웃지 마시라니까요.

맞은 쪽은 웃고 때린 쪽은 울고, 별 말도 안 되는 부조리극이 아닐 수 없었다. 먼저 그 극을 끝맺은 건 섭회상이었다. 후련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그는 멀쩡한 쪽으로 턱을 괴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까이 놓인 촛대의 그림자가 그의 옷자락과 얼굴 반쪽 위에 너울거렸다. 그가 미소를 짓더니, 터진 입술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그런데 네가 탈바가지를 무서워할 리가 없고...... 대체 무슨 일이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섭회상은 그런 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그건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밀이 너 너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 같다. 네 입술에 피 안 나게 하려고 오늘 담주까지 온 건데, 기어이 내 입술에 피를 내네.

-죄송해요.

내가 힘없이 대꾸하자, 섭회상은 나를 데려다 자기 옆에 앉혔다. 나는 그때까지도 넋이 반쯤 나가 있어서 섭회상의 가늘게 뜬 두 눈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했다.

-진짜 미안해?

-네......

부정세 수사복 벗을까요, 내가 그렇게 물으려 했을 때였다. 금광요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면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고민하던 나는 섭회상의 갑작스런 요구에 그대로 뇌를 정지시켰다.

-진짜 미안하면, 여기 상처난 데 입맞춰 줘.



뭐라고. 내가 뭐라 말도 못하고 굳어있는 사이, 섭회상이 옷깃 사브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게 가깝게 다가와 앉았다. 내 시선은 피딱지가 앉은 섭회상의 입술에 고정되어있었다. 내가 알기로 섭회상의 몸에서 오늘 상처가 난 곳은 거기 한 군데 뿐이었다.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섭회상의 향기도 평소보다 더욱 진득했다. 나는 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못, 못 하겠어요.

더듬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섭회상이 피식 웃었다. 그의 손이 내 턱을 쥐었다. 아주 느린 움직임이었지만 나는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에도.

지난번 그의 방에서 입술끼리 서로 닿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의 말랑한 혀가 내 입술을 간지럽히더니 내 입 안으로 파고들 때까지도 나는 그저 굳어있었다. 그가 가볍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피맛이 혀끝에 스쳤다. 그 순간 나는 정신을 차리고선 섭회상을 밀쳤다. 끈적한 입맞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섭회상은 아프다며 우는 소리를 냈다. 나는...... 나는 그저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엄살 부리기를 관둔 듯, 섭회상은 나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웃었다.

-네가 이런 얼굴도 할 수 있는 줄은 몰랐네.

그려놓고 싶다, 고 그가 말한 순간 나는 뒤돌아 섭회상의 방을 박차고 나왔다. 등 뒤로 유쾌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그 웃음소리가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않을 때까지, 섭회상의 향기가 나지 않을 때까지 나는 길디 긴 객잔 복도를 달려나갔다. 계단에서는 반쯤 발을 헛디디기까지 했다.

내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준비되어있던 욕조에 그대로 얼굴부터 박았다. 물이 뜨거웠지만, 뜨거운 게 오히려 나았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뛰었다. 시발 시발 시발...... 중얼거리자 물거품이 보그르르 일었다.

시발.

죽고 싶었다.

그날 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당연했다. 밤을 새우는 걸로도 모자라, 섭회상이 사준 담뱃잎을 그날 밤 다 태워버릴 기세로 나는 담배를 피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건 오히려 마른 장작에 불을 지피는 꼴이었다. 담뱃대도, 담뱃잎도, 심지어 내 몸에 나는 향기까지 다 섭회상이어서 나는 그 밤 내내 돌 것 같았다.

내가 경험이 없냐, 묻는다면 그래. 그렇다. 그렇다고 내가 성적인 지식이 없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알 것을 다 알아서 남자를 멀리했다는 편이 더 아다리가 맞을 것이다. 내 여건 상 누군가와 진지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하룻밤 불장난으로 덜컥 애가 들어서는 것은 사양이었다. 가끔 그런 쪽으로 충동이 일 때면 나는 현명하게 혼자서 그것을 해결했다.

문제는 이게,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냥 다리 사이에 손을 넣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입술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부드러운 감촉과, 자꾸 눈 앞에 어른거리는 섭회상의 옷자락 때문에 가슴께부터 아랫배까지가 지끈거렸다. 살아 움직이는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나를 위로한 적은 이전까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내가 모시는 종주라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한심해. 한심하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떨리는 손을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그리고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꽉 깨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내가 과연 소리를 잘 참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끈적해진 내 손을 보며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나는 내일 이 옷을 그대로 입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더 죽고 싶어졌지만, 일단은 물에 몸부터 담그기로 했다. 다 식어버린 물이 빠르게 몸의 열을 식혀주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잔잔히 파동이 이는 수면을 바라보며, 나는 아침해가 뜨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실히 날은 밝아왔고, 나는 좀 짜증날 정도로 맑아진 머리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우선 금광요가 나에게 준 가장 명료한 임무는 섭회상을 가남 성씨의 딸과 혼인시키는 것이었다. 맞선을 보겠다는 대답까지 이끌어놓고 그 얼굴에 피멍을 내 놓았으니 이건 거의 일보 전진 삼보 후퇴였다. 그래도 맞선을 보겠다고 하기는 한 것을 보니 크게 어려운 임무까지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섭씨에서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은 사실상 금광요가 다 알고 있는 것들일 테니 의미가 없었고...... 난 마치 금광요에게 빚을 거듭 지게 된 듯한 심정이었다. 차라리 지난 번처럼 가산 규모를 알아오라, 밀실 위치를 알아오라 하는 것이었으면 깔끔했을 텐데.

잠깐. 밀실? 생각해보니까 금광요가 청하 섭씨 밀실의 소재도 알고 있으려나? 한때 종주의 부사까지 했었으니 당연히 알겠지 싶으면서도, 만약 모른다면......

문제는 이거였다. 금광요가 나한테 청하 섭씨 밀실을 찾아오랬는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명령하면 내가 거절할 수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내가 지금 유일하게 의지가 가능한 건 섭회상을 해할 마음이 없다는 금광요의 말이었다.

금광요는 정말 이상한 인간이다. 나는 창문을 열고 하늘 높이 뜬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그거 한 번 업어줬다고 나한테는 벌써 스무 해 가까이 잘해주면서, 나름 스승이었던 온약한을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아무리 일면식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가문 하나 멸문시키는 데 거리낌이 없는 것도 그렇다.

금광요가 아내에게 잘 하고 조카에게 잘 하는 것을 보면 섭회상에게도 나름 진심일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의 감이라는 게 있다. 금광요는 아마 피치 못할 순간이 오면 섭회상도 나도 망설임 없이 죽일 것이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렇게 죽어도 억울할 건 딱히 없는 인생이지만...... 나는 담배 연기가 어슴푸레하게 밤하늘로 타고 올라가다가 사라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섭회상을 생각하면 가슴에 누군가 묵직한 추를 매단 듯 가슴이 답답했다.

섭회상도 참 금광요만큼은 아니지만 희한한 인간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궁금하지만, 아마 자기도 그 답을 모를 거다. 적어도 모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정말......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를 위해 뭐든 해주고 싶고, 그가 뭘 하든 가슴이 지끈거리는 게. 우리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무것도 아닌 사이인데도.

마찬가지로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는 섭회상의 얼굴에서 굴러떨어지던 짐승 가면을 떠올렸다. 이젠 아무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달이 얼음 녹듯 점차 투명해져갔고 새벽 특유의 분위기가 내 방에도 스며들었다. 나는 재가 되어버린 담뱃잎을 털며 나름 깔끔한 결론을 내렸다. 그냥 되는 대로 살자. 염방존의 큰 그림을 내가 어떻게 파악할 수 있겠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저번처럼 말해주겠지.

결론을 내린 뒤 평소처럼 내력운용하다가, 아침식사를 위해 내려간 나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부정세 수사들 때문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달았다. 안 그래도 수사들 사이를 겉도는 나였는데, 이젠 정말 회생이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아직 종주님이 깨어나지 않으셨다는 말을 듣고 잠자코 객잔 주인에게 아침상을 받아 섭회상의 방까지 배달했다. 섭회상은 앓는 소리로 나를 맞아주었다.

쨍쨍한 아침 햇살 아래, 그의 얼굴은 어째 막 맞은 어제보다 더 참혹했다. 원래 붓기라는 게 뒤늦게 드러난다는 건 알지만, 한쪽 뺨이 부은 섭회상은 미안하지만 좀 울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와중에 자기가 못생겨졌으니까 보지 말라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섭회상 때문에 나는 석고대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굴이 이리 되었으니 올해 산작약은 못 보러 가겠다는 섭회상의 말에 대가리라도 박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진짜 죄송해요, 종주님.

-괜찮아. 내년에 다시 보러 오면 되지.

내년까지 내가 부정세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섭회상이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확인을 바라는 듯한 그의 눈빛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년에 또 와요.

-응. 그때는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주먹 날리지 말고.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나 이거 먹여줘.

그래야죠...... 네네...... 나는 죄인의 심정으로 직접 선회상의 수발을 들었다. 그리고 나서 찻상을 내오라고 나가려는데, 섭회상이 나를 붙잡았다.

-이리 와서 앉아봐.

침대에 걸터앉은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나를 등 돌려 자기 앞에 앉게 했다. 의아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던 나는 내 머리카락을 쥐는 손길을 느끼곤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가만히 있어.

두피를 가볍게 스친 손가락이 곧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당기더니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꼬물거린다기보다는, 꽤 많이 해본 듯 능숙하게 움직였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 손길을 느끼며 앉아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가운 금속성의 무언가가 또 다시 두피를 스쳤다.

-다 됐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면경이 얼굴 앞에 불쑥 들이밀어졌다. 얼굴은 늘 보던 그 얼굴이라 더 볼 게 없었지만, 땋아올려져 은비녀로 야무지게 고정되어있는 머리카락은 확실히 낯설었다. 빤히 바라만 보고 있자, 귓가에 갑자기 숨결이 훅 끼쳤다.

-어때?

나는 몸부림으로 대답했다. 섭회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느라 입가의 상처도 다 터졌고...... 약을 발라주는 동안 섭회상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좋아서.

곧장 나온 대답에 나도, 섭회상도 그대로 굳었다. 하지만 섭회상은 곧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뺨에 올라온 붉은기를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다 못해, 아예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나를 감상했다.

-잘 어울려. 비녀.

어쩌겠는가. 그 쪽이 갑이고 나는 을인데다가, 어제 이후로는 정, 아니 병쯤 되었으니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부정세로 돌아오자마자 내가 종주를 팼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그 동안 조금이지만 누그러졌던 총령의 눈빛이 싸늘해진 건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부사도 사정을 듣더니 나를 좀 죽이고 싶다는 듯 미소지었다. 둘이 진짜 섭회상을 끔찍이 아끼는 모양이었다. 부정세가 망해보여도 망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속으로 혼자 만족했다.

이 일로 어린 문하생들이 더 나한테 거리감 없이 다가오게 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누님이 종주님 진짜 때렸어요? 왜요? 세게 때렸어요? 종주님 울었어요? 등등 질문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가끔 안쓰럽게 여긴 수사들이 빼내어주곤 했다. 그러나 그러는 그들도 나에게 대체 종주님과 무슨 관계냐고 진지하게 물어왔기에, 나는 그냥 피곤한 얼굴로 사실 그대로를 말해주었다. 내가 전대 섭종주님을 닮았대. 그러면 다들 대강 알겠다는 얼굴로 멀어졌다. 시발.

그래서 정말 이상하게도, 섭회상이 나를 무슨 전속시녀마냥 옆에 두고 부려먹는 동안 오히려 부정세 내에서 생활하기는 더 편해졌다. 흐릿한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던 이전 가문에서와는 다르게, 친해진 수사 몇과 농담 따먹기를 하게 될 정도까지 이르렀다.

의원 말마따나 보름 뒤에는 섭회상의 얼굴에서 멍자국을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섭회상은 여전히 비만 오면 자기 뺨이 다 아프다는 핑계로 나를 거의 자기 옆에 끼고 살았다. 낮이고 밤이고 붙어있다보면 그의 종알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허전할 지경이었고, 이제는 그가 종종 나를 그리는 동안 잠에 들지 않고 깨어있을 정도의 집중력도 유지가 되었다. 사실, 먹을 갈거나 붓을 놀리는 섭회상의 손을 바라보는 건 내게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즐거울 때면 나는 내 본분을 생각하려 애썼다.

가장 즐거운 순간에 애써 그 흥을 깨는 내 행동을 섭회상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잘은 모르지만, 내가 얼굴도 다 나으셨으니 이제 선도 한 번 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묻자 섭회상은 먹 갈던 것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너는 내가 얼른 혼인하면 좋겠어? 왜?

-그냥, 종주님 사람이 생기면 종주님도 더 맘편해하실 것 같아서요.

-너는 내 사람 아니야?

내가 아무 대답도 못하자, 섭회상은 얇은 붓을 붓통에서 빼내어 내 귓가에 꽂아주었다.

-장난이야. 왜 그런 얼굴을 해? 네가 원한다면 선을 볼게. 하지만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니까...... 다음달쯤으로 날짜를 잡자.

나는 그날 저녁 금광요에게 소식을 전했다. 가남 성씨 시켜서 부정세로 연통을 넣게 하라고. 얼마 뒤 나는 부사로부터 섭회상이 그 가문 아가씨와 선을 볼 거라는 확답을 전해들었다. 부사는 섭회상의 결정이 꽤 맘에 든 얼굴이었다. 후사 문제가 무척 걱정이었나보지. 그가 생각하기에 섭회상이 십 년 넘게 도망다니다가 겨우 선 보기를 승낙한 건 나라는 유일한 변수 때문이었는지, 나더러 앞으로도 종주를 잘 좀 부탁한다고 말했다. 전혀 상반된 두 사람에게 같은 부탁을 들으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선 날짜가 잡혔지만 섭회상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계속 나를 데리고 놀았다. 그렇게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도, 다행히 객잔에서처럼 그가 나에게 입을 맞춰오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내 손을 붙잡거나 끌어당기기는 했지만 선은 넘지 않는 것이, 뭐랄까...... 이런 표현이 적합할진 모르겠지만 나를 봐주는 것 같아 보였다.

-남동생 이름이 뭐였어?

이젠 섭회상과 이런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또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대답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문제였다. 섭회상의 머리카락을 빗어주던 나는 앞의 거울에 비친 섭회상의 얼굴을 잠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청이요.

대답한 나는 섭회상의 머리카락을 다시 한 번 빗어내렸다. 시비들이 해야 할 일을 왜 내가 하냐고 묻는 데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청이라는 이름은 내가 다른 가문에서 활동할 때 쓰던 많은 이름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남동생의 이름이 아니었던 건 아니고.

-그렇구나. 많이 보고 싶겠다.

그 말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잠시 더 멈칫했다가 섭회상에게 물었다.

-말이 나온 김에, 종주님. 휴가를 써도 될까요?

-뭐?

갑자기 나를 돌아보는 섭회상 때문에, 나는 쥐고 있던 섭회상의 머리카락을 그대로 놓아버렸다.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억울한 얼굴을 하는 섭회상에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곧 중추절이잖아요. 가족 묘소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운몽에 갈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