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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9 23:58
진정령, 난백 ㅅㅍ
회상이가 하는 견우 직녀 이야기는 작교선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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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회상이 나한테 맨날 피리 연주해준다는 이야기를 금광요에게 적는 것도 우습고, 사실 섭회상 얼굴을 보다보면 연주는 귀에 들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살다보니 이렇게 음악도 감상하고 호강하는 날도 있구나 하고 별일 없이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 보면 뭘 했다고 칠월 칠석이었다. 나야 명절 따위 전혀 감흥이 없지만, 섭회상은 아니었는지 오작교 운운하며 무척 들떠 보였다. 뭘 어떻게 꾸며도 부정세는 칠월 칠석의 그 맑고 투명한 분위기는 안 나니 포기하라고 섭회상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웬일로 아침부터 나를 부르지 않아 나는 오랜만에 오전 수련에 참여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게 기분이 영 별로였지만, 체념하고 하니 할 만 했다. 저번에 섭회상이 봐준 뒤로도 새벽 연습을 계속했더니 검법도 이제 몸에 좀 익은 것 같았고. 이제 섭씨 검법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대련 때마다 효과적으로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약올라하는 모습들이 뿌듯해 내내 실실 웃고 있었더니 그게 총령 눈에 띈 모양이었다.
-밀. 자네는 이제 됐으니 문하생들 자세나 좀 봐주게.
기껏 섭씨 검법을 다 익혔는데 이러는 게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나는 얌전히 말을 듣기로 했다. 그러나 내 억울함에 깊게 공감했는지 대신 나서주는 인간이 하나 있었다.
-총령 형님! 온 지 이제 한 달 된 수사한테 지도를 맡기다니요. 말이 안 됩니다.
지난번 내 팔에 멍을 남겼던 장본인이 그러는 걸 보자니 빈정 상하긴 해도, 그 말이 또 틀린 건 아니라 나는 그냥 입 다물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부정세 내에서 출세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종주께서 총애하신다고 이런 식으로 편의를 봐주면, 다른 수사들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혼자 후궁체험 중인지 총애 이 지랄...... 너 하라니까 종주 남첩? 아무도 안 말린다. 하지만 그것도 섭회상이 나를 자꾸 부르는 게 그를 포함한 다른 수사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 아니까 못 들은 척 넘겼다. 다들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데, 총령이 수사 배치는 자기 마음이라며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게 소란을 종식시켰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총령이 시킨 것처럼 저 뒤쪽 나이 어린 문하생들에게로 갔다.
확실히 십대 어린 애들 가르치다보면 뭔가 소소하게 재미도 있고 마음도 풀어졌다. 이 어린 애들이 어쩌다가 주화입마 돌려돌린다는 부정세에 왔을까 사실 조금 짠하기도 했다. 애들도 대충 윗 나잇대 수사들 사이에서 내 취급이 어떤지 알 텐데, 모나게 구는 애 없이 말 잘 듣는 게 기특해 자세도 잡아주고 호구조사도 해주다보면 금세 애들이 내 곁에 동그라니 모여 있었다. 어차피 이제 곧 식사 시간이라, 나는 일찍 쉬고 싶어하는 애들 마음을 모른 척 눈감아 주었다.
-누님은 오늘 칠월 칠석인데 함께 보낼 형님 안 계세요?
-응.
-아......
처음엔 대부분 나에 대해 궁금해서 던지는 질문들이었지만 몇 번 헛발질 하자 다들 섭회상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예쁘게 섭회상을 포장했다.
-종주님은 왜 제자를 안 받으세요?
-몸이 안 좋으셔서 그래. 어쩔 수가 없는 거지.
-종주님은 진짜 아무것도 몰라요?
-누가 그래? 종주님이 얼마나 고전에 박식하시다고.
수련이라는 게 검이나 도 수련이 전부가 아니다, 경전을 읽고 명상을 해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도 수련이다 약을 파는데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그렇게 수련을 하셨다면 일문삼부지에서 일문이부지 정도는 되셨겠지.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얼굴은 익숙한데, 생각해보니 이름도 모르네. 하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무시하고 문하생들한테 가서 점심 먹자고 말하려는데, 이 개새끼가 어린 애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톡 건들며 말하는 게 아닌가.
-부정세에는 미래가 없다. 금린대로 가는 게 나아. 너희 아직 안 늦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인내심이 똑 부러졌다.
-그럼 너나 가, 미친놈아.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정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라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고, 뭐. 어쩌겠나.
-연차 꽉 찬 수사라는 게 어린 문하생들 앞에서 종주 험담이나 하면 안 부끄럽냐?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은 불 구경 그리고 싸움 구경이라고, 다들 숨 죽인 채 나와 이름 모를 놈을 번갈아보았다. 원래라면 내가 이렇게 눈에 띌 행동을 할 리 없다. 근데 생각해보면, 이미 내 얼굴 다 팔렸다 이거야. 이후에 부정세 말고 다른 데서 활동하려면 적어도 이십 년은 수진계를 떠나 있어야 할 거라고. 그리고 그때쯤 되면 나도 늙어 뒤졌을 거다. 다른 말로 해서, 나는 잃을 게 없었다.
-허, 참.
-허, 참 이 지랄하지 말고.
어디까지 웃어넘길 심산인지, 상대방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럴 일이 아니라고 머리는 생각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오늘이 칠월 칠석인데 싸우면 부정 탄다는 어린애를 떼어내며 나는 검을 뽑았다.
-붙자.
-뭐?
-입으로만 종알거리지 말고 실력으로 붙자고.
그러면서 나는 내친 김에 말했다.
-내가 이기면 알아서 입 다무는 조건으로.
상대방은 혀를 차며 웃었다.
한 번 싸움이 시작되자 다들 알아서 거리를 벌리고 둥글게 둘러싸며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제야 나는 뭔가 울컥했다. 내가 시발 보름만에 섭씨 검법을 다 외웠는데...... 지난 보름을 되갚을 기회가 여기 온 것이다.
그런 감상을 티내는 대신, 달려오는 상대방을 나는 표정 없이 응시했다.
여러 가문을 다니면서 검법을 익히다보니 늘어난 것은 각 검법의 목적을 파악하는 능력이었다. 확실히 유명한 가문일수록 검법이 더 이치에 맞았고 쓸 만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가문마다 그 이치라는 게 다 달랐다. 예를 들어 금씨 검법은 보기에 예쁜 것이 중요하고, 화려한 만큼 잘 사용하면 무척 치명적이었다. 섭씨 같은 경우 그와 정반대였다. 나는 도가 아니라 검을 사용하니 내가 익힌 검법이 섭씨의 정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게 있다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투박하고 거친 게 섭씨 특징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휘둘러진 검을 피하며 검등 쪽으로 상대방의 어깨를 쳤다.
상대를 죽일 생각 없이 하는 싸움이라 생각보다는 김이 빠졌지만, 어쨌든 싸움은 싸움이었다. 경직된 대련을 할 때보다야 마음이 후련했다. 마음이 후련하니 싸움도 잘 풀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검이 왼쪽 팔을 스쳤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피를 보겠다니 거절할 필요 없었다.
굳이 상대방의 피를 보려고 검을 쓸 필요도 없었다. 영력을 담아 가슴팍을 걷어차자, 상대방이 저 멀리 나가떨어지며 피를 한 움큼 토했다. 내가 원래 피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데, 비에 젖은 연무장 위로 흩뿌려진 피를 보자 어쩐지 오싹하니 웃음이 나왔다. 얼굴을 적신 빗물을 대충 훔친 뒤, 저기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대에게 다가가려는데.
-밀!
고개를 돌리자, 경악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섭회상이 있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가 비를 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종주.
싸움이고 뭐고 그 순간엔 뒷전이었다. 검을 내린 채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서는데, 아무래도 그의 얼굴이 좀 이상했다. 비 맞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조금 지나치게 창백한데......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물에 젖은 종이 인형처럼 섭회상이 허물어졌다.
-종주!
더 생각할 것 없이, 나는 달려가서 그를 받아냈다.
그 뒤로 한 차례 소란이 일었고, 나는 엉겁결에 섭회상의 방, 그러니까 침실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의원이 와서 맥을 짚더니 놀라서 쓰러진 것이라는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종주께서는 원래 피를 보면 쓰러지곤 하신다는 부사의 말에, 나는 진짜 내가 모시는 게 종주인지 아가씨인지 모를 지경이라는 생각을 했다. 와중에 부정세 인간들이 뭘 당연하다는 듯이 나한테 섭회상을 맡기곤 나가버려서, 나는 쫄딱 젖은 옷도 못 갈아입고 섭회상의 침상 옆을 지켜야 했다. 그러고보니까 의원이라는 게 종주 맥만 짚고 내 상처는 보지도 않고 가버렸네. 섭회상이 피를 보면 기절한대놓고 피를 안 치워주면 어떡하냐. 부정세 진짜 왜 이러지.
고민하던 나는 머리끈을 풀어 팔의 상처를 대충 싸맸다. 어차피 대련하느라 땀도 뺐고 비도 맞았으니 오늘은 목욕이 필수였다. 섭회상이 눈 뜨자마자 내가 처녀귀신인 줄 알고 또 쓰러지면 안 되니 머리를 대충 정리한 뒤, 나는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 섭회상의 얼굴을 관찰했다. 비가 와서 흐린 방 안, 평소 섭회상에게서 나는 솔내음새는 더욱 짙었고 섭회상의 상앗빛 옷은 짙은 회색으로 보였다.
바꿔 말해, 섭회상의 얼굴은 평소보다 배는 더 창백했다. 창백한 안색이 안쓰러웠지만, 그렇지만...... 정말 예쁘다. 조막만한 얼굴이며, 오똑한 코며, 얄쌍하게 빠진 눈매며 도톰하고 조그만 입술이며. 입술...... 자꾸만 거기 가 닿으려는 손가락을 막으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 대지 말자. 손 댔다가 괜히 망가지기라도 하면......
문득 지난 번 섭회상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돈으로 뭘 사고 싶냐고 했었지. 글쎄. 난 아무리 생각해도 안목 따위 없고, 기를 생각도 딱히 없었다. 귀한 장식품이나 옷감 파는 가게에 가본 적도 없고, 비싼 밥도 한 두 끼 먹으면 질렸다. 그러니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섭종주님은 내가 구경한 것 중 가장 귀한 것인 셈이다.
평생 이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나는 구경이 체질인가 보다. 나는 홀린 듯 섭회상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의 눈꺼풀이 떨리는 것을 보고 황급히 몸을 물렸다. 마침내 그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형님?
이건 솔직히 이마 때려서 다시 기절시켜도 합법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말없이 섭회상을 바라만 보았다. 이윽고 그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아...... 밀이구나.
-괜찮으세요? 연무장에서 기절하셨어요.
-맞다. 이제 기억나. 너...... 너 괜찮아?
섭회상이 내 팔을 붙잡으려는 것을 나는 황급히 빼냈다.
-종주님 피 보시면 기절한다면서요. 전 괜찮아요. 그냥 싸움이 붙은 것뿐이에요.
섭회상은 대꾸 대신 상처를 살폈다. 의외로 손 힘이 셌고, 소매에 묻은 피를 봤을 텐데 기절도 안 했다. 그가 내 소매를 걷어올리는 동안 나는 그냥 체념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의 손이 팔 안쪽의 여린 살을 스칠 때 몸이 떨리긴 했지만, 참았다. 다행히 그는 내 떨림을 눈치 못 챈 모양이었다.
-지혈은 되어 있는데, 그래도 약은 발라야지. 감염이 되면 어떡해. 대체 왜 그렇게 험히 싸운 거야?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네 눈빛이...... 네가...... 네가 그 수사를 죽이는 줄 알았어.
-그게......
그 새끼가 종주님 욕했단 말이에요. 그렇게 이르는 것도 어이가 없고, 금광요 명을 받고 부정세에 잠입한 내가 섭회상 욕에 화냈다는 것도 우스웠다. 그래서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죄송해요. 제가 원래 그렇게 폭력적인 인간이 아닌데, 오늘은 날도 별로고 영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랬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섭회상은 내게 대꾸하는 대신 익숙한 솜씨로 품에서 지혈제를 꺼내 상처에 뿌렸다. 고통이 심하지는 않았는데, 상처에 약을 펴바르는 섭회상의 부드러운 손길 때문에 조금 죽고 싶었다. 창 밖에 들리는 빗소리에 집중하며, 나는 아까까지 보지 못했던 섭회상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조금 더 내밀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종주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림과 부채가 아름답게 정렬되어 있었고, 책도 서가에 빼곡히 들어차있었다.
갑작스런 당김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내 팔을 꼭 붙잡고 있는 섭회상의 두 손이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종주.
-흉이 남겠네. 어떡하면 좋아. 안 그래도 이리 흉터가 많은데.
그러면서 섭회상이 고개를 들었다. 텅 빈 눈을 보자마자, 나는 이 일이 섭명결과 관련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니 근데 내가 진짜 섭명결을 닮았나...... 뭔지는 몰라도, 차라리 울고 있으면 나을 텐데 아무 표정도 감정도 없이 내 팔의 상처를 응시하는 섭회상의 얼굴을 그저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이 흉터는 계속 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내가 그렇게 툭 내뱉은 건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아직까지 상처에 닿아있는 섭회상의 손끝으로부터 마치 불꽃이 번지는 것만 같아 나는 파드득 몸을 떨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는 섭회상에게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몸 챙기세요.
-잠깐만.
섭회상이 나를 불러세웠다. 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자, 그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너는 정말 이상해. 너와 있다 보면 나까지 이상해져.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데 그게 나쁘지 않으니, 정말 이상하지?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섭회상이 말했다.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자.
그는 품 속에서 자그마한 회색 주머니를 꺼냈다.
-향낭이야. 네 이름은 밀인데 네게서 나는 향기는 전혀 달지 않잖아. 그래서 내가 만들었어.
-종주......
-왜, 나 말고 오늘 너한테 선물 줄 사람이 있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내 말에 섭회상이 피식 웃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거의 자동적으로, 섭회상의 시선이 내 입술로 향했다. 시발. 마른침을 삼키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다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엔 나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보다도...... 저거 홍조인가? 아니겠지? 내 눈이 잘못된 거겠지. 그렇게 창백하던 얼굴이 이리 쉽게 붉어질 수는 없잖아. 그때 섭회상이 물었다.
-너는?
-네?
-너는 내 선물 뭐 준비해놨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반응이 너무 티가 났는지, 섭회상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설마 내 선물은 없는 거야? 나 네 종주인데?
-아니...... 아닙니다. 있어요. 선물.
-진짜?
-그럼요. 칠월 칠석이니까 저녁 때 드리겠습니다. 기다리세요!
나는 그 길로 섭회상의 방을 박차고 나와 내 방에서 전낭을 챙겼다. 그리고 바로 검에 올라탔다. 가장 가까운 번화가까지 어검해서 반 시진이면 가니까, 가서 선물을 고르면 될 것이다.
머리를 풀고, 비가 와서 온몸이 다 흠뻑 젖은 채로 번화가를 활보하는 섭씨 수사는 모두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개중에는 내가 괴뢰인 줄 알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시발. 이쯤 되면 가게에서도 나 안 받아주겠는데. 아무 생각 없이 나온 거라 사실 뭘 사야 할지도 몰랐다. 뭘 사든 직접 만든 향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거였다.
나는 잠시 동안 길거리에 우뚝 서서 뭘 사야 할지 고민했다. 나는 좋은 안목도, 예술적 소양도, 그 무엇도 없었다. 섭회상 같은 사람이 만족할 법한 선물을 고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잠시동안 서서 예쁜 우산을 쓰고 짝지어 지나가는 남녀들을, 또는 홀로 비를 즐기듯 산책하는 사람들을, 비 맞기 싫어 바쁘게 뛰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나를 징그럽다는 듯 흘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그냥 없어지는 것도 괜찮겠다는 초연한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화끈거리던 몸의 열기는 어느 정도 식은 것 같았다.
그 길로 붓 가게에 들어서자, 가게 주인은 나를 보더니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나는 본론부터 간단히 말하기로 했다.
-여기서 제일 비싼 붓 하나만 주시죠.
처음엔 나를 내쫓으려고 안달이던 주인은 섭회상의 심부름을 왔다는 내 말에 의심 어린 눈으로 나를 훑어보다가 수사복을 알아보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 분이 아무 붓이나 사오라고 하시진 않을 건데...... 어떻게, 벌써 신상이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으셨나보죠?
비싼 물건 팔 수 있다는 데 금세 기쁜 얼굴이 되어선, 주인은 내 앞에 여러 붓을 늘어놓았다. 뭐라 뭐라 설명하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설명을 듣던 나는 이게 그 분 취향이라는 주인의 결론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걸로 주십시오.
주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붓을 포장해주었다. 나는 붓 가게 주인보다도 섭회상의 호오에 대해 모르는 내가, 그의 설명을 듣고도 기어이 섭회상의 취향을 이해 못 하는 내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속쓰릴 이유가 없다.
돈의 좋은 점은 여기에 있다. 내 무지를 어느 정도 보충해주니까. 나는 내 전낭에 담겨있던 돈을 다 지불하고도 남은 돈을 열흘 안에 내겠다는 계약서까지 쓴 채 가게를 나왔다. 그러나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부정세에 도착하자 초저녁이었다. 나는 식사할 새 없이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섭회상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인기척이 없었고, 설마해서 정원에 나가보자 비 그친 정원에 섭회상이 홀로 서 있었다. 다가가자, 섭회상은 내게 왔냐고 인사하는 대신 부채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은하수가 보여?
-아직 뚜렷하진 않은데요?
-응.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겠다.
오롯이 하늘을 향해있는 섭회상의 얼굴을 슬쩍 보다가, 나는 품 안에서 붓을 꺼냈다.
-선물입니다.
-어라? 정말 선물 준비해 뒀던 거였어?
-그럼요.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나는 최대한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섭회상이 나를 웃는 얼굴로 흘깃 보더니 상자를 열어 붓을 확인했다. 그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보며 나는 묘한 쾌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거...... 네가 구하기 쉬운 물건은 아니었을 텐데.
-전 돈 쓸 일이 없어서요. 이런 데 쓰려고 돈 벌죠.
-이런 데가 뭔데? 넌 돈이 좋지 다른 게 좋은 건 아니라며.
-그건......
내가 대답 못 하자, 섭회상은 웃으며 붓을 들어 살펴보았다.
-고마워서 어쩌지? 나는 그냥 향낭밖에 못 줬는데, 너는 이런 귀한 걸 주고.
-아뇨. 종주께서 주신 향낭이 더 귀해요.
그건 진심이었다.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물건보다, 섭회상이 나를 위해 만들어준 하나뿐인 향낭이 더 귀한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향을 배합하는 법도 모르고, 향낭을 만드는 법은 더더욱 모른다. 애초에 나는 칠석날 다른 사람과 선물을 주고받아본 적조차 없었다. 지금 이 모든 게 나는 다 처음이었다.
-중요한 건 네 취향이지. 향이 마음에 들어? 네가 평소에 쓰던 것과는 다르잖아.
-그건 그냥 벌레 쫓아준대서 쓰던 거예요. 전 향기를 잘 모르고 취향이랄 것도 없어요. 하지만......
나는 품에서 향낭을 꺼내 가볍게 향기를 맡았다. 달콤한 냄새가 벌레를 쫓아주긴커녕 불러들일 것 같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드디어 내가 미쳤나보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이제 취향이 생긴 것 같습니다.
한참 동안 섭회상과 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밤하늘에 은하수가 또렷해지자, 섭회상이 그것을 가리키며 한참 만에 침묵을 깼다.
-직녀와 견우가 드디어 만났겠다. 그치?
-그러게요.
-둘은 후회할까? 자기 본분을 잊고 서로에게 빠져든 것을?
-그러니까 칠석 때마다 울겠죠.
내 말에, 섭회상이 피식 웃었다.
-그럼 둘이 서로를 원망하겠네?
-왜 원망해요?
나는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한 건가 싶어 물었다.
-누군가를 만난 걸 후회하는 거랑 그 누군가를 원망하는 게 같은 겁니까?
섭회상은 내 질문을 잠시 곱씹는 듯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두 가지가 같은 건 아니지. 하지만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평안히 자기 삶을 살 수 있었을 테니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지 않을까?
-그런 걸로 원망할 사이면 칠석마다 안 만나겠죠. 까마귀나 까치가 대머리 될 일도 없을 거고......
좀 더 고급스러운 어휘가 내 머릿속 사전엔 없었던 것일까? 섭회상이 빡대가리인 게 아니라 내가 빡대가리였던 거군. 아니 근데 내가 원래 이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은데, 왜 요즘 이렇게 생각에 집중이 안 되고 계속 어지러운 건지 모를 일이었다.
설마 멍청한 것도 옮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섭회상을 바라보는데, 직녀가 내 옆에 내려와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섭회상의 시선은 하늘에 꽂혀있었다. 평소에는 귀엽기 그지없는데, 이렇게 표정이 없을 때면 눈매가 살짝 올라가 있어서 그런지 조금 날카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의 옆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가 여전히 나를 보지 않은 채로 한숨 쉬듯 읊조렸다.
-요컨대 그들의 만남 그 자체가 그들의 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지? 하기야 굳세지 못한 마음은 물을 닮아서, 함께한 시간을 꿈과 같게 한다지 않니.
내가 한 말이 그거였는지 모르겠어서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섭회상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무른 마음이야말로 견우를 견우로, 직녀를 직녀로 만든 거겠지. 어쩌면 그 둘보다 은하수가 먼저 있었는지도 몰라.
이번에도 뭐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섭회상이 나를 돌아보더니 웃었다.
-아무튼, 상처는 안 아프고?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같이 길한 날 피를 봤으니, 아무래도 남은 한 해가 평탄치 못할 것 같아 걱정이야. 다 네 잘못이라구.어떻게 책임질래?
갑자기? 나는 멍청히 두 눈을 깜박였다. 섭회상이 또 어린애가 되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난 안 그래도 팔자가 사나운데, 너 때문에 더 사나워졌잖아.
-아니......
나는 잠시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물었다.
-그럼 제가 뭐 어떻게 해드려야 할까요?
-약속해줘.
섭회상이 냉큼 말했다.
-뭐를요?
약속해달라고 말해놓고서 무슨 약속을 받아낼 것인지까지는 생각을 안 한 모양이었다. 고심하듯 입술을 우물거리던 그는 방금 막 생각했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네가 나를 지켜줘.
저랑 부정세 수사복 입은 다른 몇 백 명이 지금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묻기엔 섭회상 스스로가 자기 요구에 대해 놀란 얼굴이었다. 단순히 놀란 게 아니라 묘한 설렘과 흥분, 그리고 두려움이 그 얼굴에 투명하게 내비쳐서 바라보는 내 가슴까지 울렁거렸다.
-나를 지켜줘. 네가 날 지켜주면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
생각해보면 섭회상은 첫 만남 때부터 네가 나를 지켜줄 것 아니냐며 내내 염불을 외웠다. 그것과 지금 이 순간의 부탁이 무엇이 다르냐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목숨 바쳐 지켜드리겠노라 여러 번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 나는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하는 대답을 곧바로 돌려주지 못했다. 내 어깨에 걸쳐진 부정세 수사복이 이제 와 너무 무거웠던 탓이다.
사실 내가 입고 있어야 하는 건 금색 수사복이었다. 벌써 스무 해 가까이 그랬다. 하지만 나를 말없이 바라보는 섭회상을 마주보다 보면 그 사실을 오늘 하루쯤은 무시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고 싶었다. 결국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섭회상이 미소지었다.
-약속이야.
회상이가 하는 견우 직녀 이야기는 작교선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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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회상이 나한테 맨날 피리 연주해준다는 이야기를 금광요에게 적는 것도 우습고, 사실 섭회상 얼굴을 보다보면 연주는 귀에 들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살다보니 이렇게 음악도 감상하고 호강하는 날도 있구나 하고 별일 없이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 보면 뭘 했다고 칠월 칠석이었다. 나야 명절 따위 전혀 감흥이 없지만, 섭회상은 아니었는지 오작교 운운하며 무척 들떠 보였다. 뭘 어떻게 꾸며도 부정세는 칠월 칠석의 그 맑고 투명한 분위기는 안 나니 포기하라고 섭회상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웬일로 아침부터 나를 부르지 않아 나는 오랜만에 오전 수련에 참여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게 기분이 영 별로였지만, 체념하고 하니 할 만 했다. 저번에 섭회상이 봐준 뒤로도 새벽 연습을 계속했더니 검법도 이제 몸에 좀 익은 것 같았고. 이제 섭씨 검법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대련 때마다 효과적으로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약올라하는 모습들이 뿌듯해 내내 실실 웃고 있었더니 그게 총령 눈에 띈 모양이었다.
-밀. 자네는 이제 됐으니 문하생들 자세나 좀 봐주게.
기껏 섭씨 검법을 다 익혔는데 이러는 게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나는 얌전히 말을 듣기로 했다. 그러나 내 억울함에 깊게 공감했는지 대신 나서주는 인간이 하나 있었다.
-총령 형님! 온 지 이제 한 달 된 수사한테 지도를 맡기다니요. 말이 안 됩니다.
지난번 내 팔에 멍을 남겼던 장본인이 그러는 걸 보자니 빈정 상하긴 해도, 그 말이 또 틀린 건 아니라 나는 그냥 입 다물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부정세 내에서 출세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종주께서 총애하신다고 이런 식으로 편의를 봐주면, 다른 수사들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혼자 후궁체험 중인지 총애 이 지랄...... 너 하라니까 종주 남첩? 아무도 안 말린다. 하지만 그것도 섭회상이 나를 자꾸 부르는 게 그를 포함한 다른 수사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 아니까 못 들은 척 넘겼다. 다들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데, 총령이 수사 배치는 자기 마음이라며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게 소란을 종식시켰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총령이 시킨 것처럼 저 뒤쪽 나이 어린 문하생들에게로 갔다.
확실히 십대 어린 애들 가르치다보면 뭔가 소소하게 재미도 있고 마음도 풀어졌다. 이 어린 애들이 어쩌다가 주화입마 돌려돌린다는 부정세에 왔을까 사실 조금 짠하기도 했다. 애들도 대충 윗 나잇대 수사들 사이에서 내 취급이 어떤지 알 텐데, 모나게 구는 애 없이 말 잘 듣는 게 기특해 자세도 잡아주고 호구조사도 해주다보면 금세 애들이 내 곁에 동그라니 모여 있었다. 어차피 이제 곧 식사 시간이라, 나는 일찍 쉬고 싶어하는 애들 마음을 모른 척 눈감아 주었다.
-누님은 오늘 칠월 칠석인데 함께 보낼 형님 안 계세요?
-응.
-아......
처음엔 대부분 나에 대해 궁금해서 던지는 질문들이었지만 몇 번 헛발질 하자 다들 섭회상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예쁘게 섭회상을 포장했다.
-종주님은 왜 제자를 안 받으세요?
-몸이 안 좋으셔서 그래. 어쩔 수가 없는 거지.
-종주님은 진짜 아무것도 몰라요?
-누가 그래? 종주님이 얼마나 고전에 박식하시다고.
수련이라는 게 검이나 도 수련이 전부가 아니다, 경전을 읽고 명상을 해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도 수련이다 약을 파는데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그렇게 수련을 하셨다면 일문삼부지에서 일문이부지 정도는 되셨겠지.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얼굴은 익숙한데, 생각해보니 이름도 모르네. 하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무시하고 문하생들한테 가서 점심 먹자고 말하려는데, 이 개새끼가 어린 애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톡 건들며 말하는 게 아닌가.
-부정세에는 미래가 없다. 금린대로 가는 게 나아. 너희 아직 안 늦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인내심이 똑 부러졌다.
-그럼 너나 가, 미친놈아.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정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라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고, 뭐. 어쩌겠나.
-연차 꽉 찬 수사라는 게 어린 문하생들 앞에서 종주 험담이나 하면 안 부끄럽냐?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은 불 구경 그리고 싸움 구경이라고, 다들 숨 죽인 채 나와 이름 모를 놈을 번갈아보았다. 원래라면 내가 이렇게 눈에 띌 행동을 할 리 없다. 근데 생각해보면, 이미 내 얼굴 다 팔렸다 이거야. 이후에 부정세 말고 다른 데서 활동하려면 적어도 이십 년은 수진계를 떠나 있어야 할 거라고. 그리고 그때쯤 되면 나도 늙어 뒤졌을 거다. 다른 말로 해서, 나는 잃을 게 없었다.
-허, 참.
-허, 참 이 지랄하지 말고.
어디까지 웃어넘길 심산인지, 상대방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럴 일이 아니라고 머리는 생각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오늘이 칠월 칠석인데 싸우면 부정 탄다는 어린애를 떼어내며 나는 검을 뽑았다.
-붙자.
-뭐?
-입으로만 종알거리지 말고 실력으로 붙자고.
그러면서 나는 내친 김에 말했다.
-내가 이기면 알아서 입 다무는 조건으로.
상대방은 혀를 차며 웃었다.
한 번 싸움이 시작되자 다들 알아서 거리를 벌리고 둥글게 둘러싸며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제야 나는 뭔가 울컥했다. 내가 시발 보름만에 섭씨 검법을 다 외웠는데...... 지난 보름을 되갚을 기회가 여기 온 것이다.
그런 감상을 티내는 대신, 달려오는 상대방을 나는 표정 없이 응시했다.
여러 가문을 다니면서 검법을 익히다보니 늘어난 것은 각 검법의 목적을 파악하는 능력이었다. 확실히 유명한 가문일수록 검법이 더 이치에 맞았고 쓸 만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가문마다 그 이치라는 게 다 달랐다. 예를 들어 금씨 검법은 보기에 예쁜 것이 중요하고, 화려한 만큼 잘 사용하면 무척 치명적이었다. 섭씨 같은 경우 그와 정반대였다. 나는 도가 아니라 검을 사용하니 내가 익힌 검법이 섭씨의 정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게 있다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투박하고 거친 게 섭씨 특징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휘둘러진 검을 피하며 검등 쪽으로 상대방의 어깨를 쳤다.
상대를 죽일 생각 없이 하는 싸움이라 생각보다는 김이 빠졌지만, 어쨌든 싸움은 싸움이었다. 경직된 대련을 할 때보다야 마음이 후련했다. 마음이 후련하니 싸움도 잘 풀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검이 왼쪽 팔을 스쳤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피를 보겠다니 거절할 필요 없었다.
굳이 상대방의 피를 보려고 검을 쓸 필요도 없었다. 영력을 담아 가슴팍을 걷어차자, 상대방이 저 멀리 나가떨어지며 피를 한 움큼 토했다. 내가 원래 피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데, 비에 젖은 연무장 위로 흩뿌려진 피를 보자 어쩐지 오싹하니 웃음이 나왔다. 얼굴을 적신 빗물을 대충 훔친 뒤, 저기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대에게 다가가려는데.
-밀!
고개를 돌리자, 경악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섭회상이 있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가 비를 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종주.
싸움이고 뭐고 그 순간엔 뒷전이었다. 검을 내린 채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서는데, 아무래도 그의 얼굴이 좀 이상했다. 비 맞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조금 지나치게 창백한데......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물에 젖은 종이 인형처럼 섭회상이 허물어졌다.
-종주!
더 생각할 것 없이, 나는 달려가서 그를 받아냈다.
그 뒤로 한 차례 소란이 일었고, 나는 엉겁결에 섭회상의 방, 그러니까 침실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의원이 와서 맥을 짚더니 놀라서 쓰러진 것이라는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종주께서는 원래 피를 보면 쓰러지곤 하신다는 부사의 말에, 나는 진짜 내가 모시는 게 종주인지 아가씨인지 모를 지경이라는 생각을 했다. 와중에 부정세 인간들이 뭘 당연하다는 듯이 나한테 섭회상을 맡기곤 나가버려서, 나는 쫄딱 젖은 옷도 못 갈아입고 섭회상의 침상 옆을 지켜야 했다. 그러고보니까 의원이라는 게 종주 맥만 짚고 내 상처는 보지도 않고 가버렸네. 섭회상이 피를 보면 기절한대놓고 피를 안 치워주면 어떡하냐. 부정세 진짜 왜 이러지.
고민하던 나는 머리끈을 풀어 팔의 상처를 대충 싸맸다. 어차피 대련하느라 땀도 뺐고 비도 맞았으니 오늘은 목욕이 필수였다. 섭회상이 눈 뜨자마자 내가 처녀귀신인 줄 알고 또 쓰러지면 안 되니 머리를 대충 정리한 뒤, 나는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 섭회상의 얼굴을 관찰했다. 비가 와서 흐린 방 안, 평소 섭회상에게서 나는 솔내음새는 더욱 짙었고 섭회상의 상앗빛 옷은 짙은 회색으로 보였다.
바꿔 말해, 섭회상의 얼굴은 평소보다 배는 더 창백했다. 창백한 안색이 안쓰러웠지만, 그렇지만...... 정말 예쁘다. 조막만한 얼굴이며, 오똑한 코며, 얄쌍하게 빠진 눈매며 도톰하고 조그만 입술이며. 입술...... 자꾸만 거기 가 닿으려는 손가락을 막으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 대지 말자. 손 댔다가 괜히 망가지기라도 하면......
문득 지난 번 섭회상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돈으로 뭘 사고 싶냐고 했었지. 글쎄. 난 아무리 생각해도 안목 따위 없고, 기를 생각도 딱히 없었다. 귀한 장식품이나 옷감 파는 가게에 가본 적도 없고, 비싼 밥도 한 두 끼 먹으면 질렸다. 그러니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섭종주님은 내가 구경한 것 중 가장 귀한 것인 셈이다.
평생 이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나는 구경이 체질인가 보다. 나는 홀린 듯 섭회상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의 눈꺼풀이 떨리는 것을 보고 황급히 몸을 물렸다. 마침내 그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형님?
이건 솔직히 이마 때려서 다시 기절시켜도 합법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말없이 섭회상을 바라만 보았다. 이윽고 그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아...... 밀이구나.
-괜찮으세요? 연무장에서 기절하셨어요.
-맞다. 이제 기억나. 너...... 너 괜찮아?
섭회상이 내 팔을 붙잡으려는 것을 나는 황급히 빼냈다.
-종주님 피 보시면 기절한다면서요. 전 괜찮아요. 그냥 싸움이 붙은 것뿐이에요.
섭회상은 대꾸 대신 상처를 살폈다. 의외로 손 힘이 셌고, 소매에 묻은 피를 봤을 텐데 기절도 안 했다. 그가 내 소매를 걷어올리는 동안 나는 그냥 체념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의 손이 팔 안쪽의 여린 살을 스칠 때 몸이 떨리긴 했지만, 참았다. 다행히 그는 내 떨림을 눈치 못 챈 모양이었다.
-지혈은 되어 있는데, 그래도 약은 발라야지. 감염이 되면 어떡해. 대체 왜 그렇게 험히 싸운 거야?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네 눈빛이...... 네가...... 네가 그 수사를 죽이는 줄 알았어.
-그게......
그 새끼가 종주님 욕했단 말이에요. 그렇게 이르는 것도 어이가 없고, 금광요 명을 받고 부정세에 잠입한 내가 섭회상 욕에 화냈다는 것도 우스웠다. 그래서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죄송해요. 제가 원래 그렇게 폭력적인 인간이 아닌데, 오늘은 날도 별로고 영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랬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섭회상은 내게 대꾸하는 대신 익숙한 솜씨로 품에서 지혈제를 꺼내 상처에 뿌렸다. 고통이 심하지는 않았는데, 상처에 약을 펴바르는 섭회상의 부드러운 손길 때문에 조금 죽고 싶었다. 창 밖에 들리는 빗소리에 집중하며, 나는 아까까지 보지 못했던 섭회상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조금 더 내밀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종주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림과 부채가 아름답게 정렬되어 있었고, 책도 서가에 빼곡히 들어차있었다.
갑작스런 당김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내 팔을 꼭 붙잡고 있는 섭회상의 두 손이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종주.
-흉이 남겠네. 어떡하면 좋아. 안 그래도 이리 흉터가 많은데.
그러면서 섭회상이 고개를 들었다. 텅 빈 눈을 보자마자, 나는 이 일이 섭명결과 관련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니 근데 내가 진짜 섭명결을 닮았나...... 뭔지는 몰라도, 차라리 울고 있으면 나을 텐데 아무 표정도 감정도 없이 내 팔의 상처를 응시하는 섭회상의 얼굴을 그저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이 흉터는 계속 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내가 그렇게 툭 내뱉은 건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아직까지 상처에 닿아있는 섭회상의 손끝으로부터 마치 불꽃이 번지는 것만 같아 나는 파드득 몸을 떨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는 섭회상에게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몸 챙기세요.
-잠깐만.
섭회상이 나를 불러세웠다. 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자, 그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너는 정말 이상해. 너와 있다 보면 나까지 이상해져.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데 그게 나쁘지 않으니, 정말 이상하지?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섭회상이 말했다.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자.
그는 품 속에서 자그마한 회색 주머니를 꺼냈다.
-향낭이야. 네 이름은 밀인데 네게서 나는 향기는 전혀 달지 않잖아. 그래서 내가 만들었어.
-종주......
-왜, 나 말고 오늘 너한테 선물 줄 사람이 있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내 말에 섭회상이 피식 웃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거의 자동적으로, 섭회상의 시선이 내 입술로 향했다. 시발. 마른침을 삼키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다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엔 나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보다도...... 저거 홍조인가? 아니겠지? 내 눈이 잘못된 거겠지. 그렇게 창백하던 얼굴이 이리 쉽게 붉어질 수는 없잖아. 그때 섭회상이 물었다.
-너는?
-네?
-너는 내 선물 뭐 준비해놨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반응이 너무 티가 났는지, 섭회상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설마 내 선물은 없는 거야? 나 네 종주인데?
-아니...... 아닙니다. 있어요. 선물.
-진짜?
-그럼요. 칠월 칠석이니까 저녁 때 드리겠습니다. 기다리세요!
나는 그 길로 섭회상의 방을 박차고 나와 내 방에서 전낭을 챙겼다. 그리고 바로 검에 올라탔다. 가장 가까운 번화가까지 어검해서 반 시진이면 가니까, 가서 선물을 고르면 될 것이다.
머리를 풀고, 비가 와서 온몸이 다 흠뻑 젖은 채로 번화가를 활보하는 섭씨 수사는 모두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개중에는 내가 괴뢰인 줄 알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시발. 이쯤 되면 가게에서도 나 안 받아주겠는데. 아무 생각 없이 나온 거라 사실 뭘 사야 할지도 몰랐다. 뭘 사든 직접 만든 향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거였다.
나는 잠시 동안 길거리에 우뚝 서서 뭘 사야 할지 고민했다. 나는 좋은 안목도, 예술적 소양도, 그 무엇도 없었다. 섭회상 같은 사람이 만족할 법한 선물을 고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잠시동안 서서 예쁜 우산을 쓰고 짝지어 지나가는 남녀들을, 또는 홀로 비를 즐기듯 산책하는 사람들을, 비 맞기 싫어 바쁘게 뛰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나를 징그럽다는 듯 흘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그냥 없어지는 것도 괜찮겠다는 초연한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화끈거리던 몸의 열기는 어느 정도 식은 것 같았다.
그 길로 붓 가게에 들어서자, 가게 주인은 나를 보더니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나는 본론부터 간단히 말하기로 했다.
-여기서 제일 비싼 붓 하나만 주시죠.
처음엔 나를 내쫓으려고 안달이던 주인은 섭회상의 심부름을 왔다는 내 말에 의심 어린 눈으로 나를 훑어보다가 수사복을 알아보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 분이 아무 붓이나 사오라고 하시진 않을 건데...... 어떻게, 벌써 신상이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으셨나보죠?
비싼 물건 팔 수 있다는 데 금세 기쁜 얼굴이 되어선, 주인은 내 앞에 여러 붓을 늘어놓았다. 뭐라 뭐라 설명하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설명을 듣던 나는 이게 그 분 취향이라는 주인의 결론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걸로 주십시오.
주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붓을 포장해주었다. 나는 붓 가게 주인보다도 섭회상의 호오에 대해 모르는 내가, 그의 설명을 듣고도 기어이 섭회상의 취향을 이해 못 하는 내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속쓰릴 이유가 없다.
돈의 좋은 점은 여기에 있다. 내 무지를 어느 정도 보충해주니까. 나는 내 전낭에 담겨있던 돈을 다 지불하고도 남은 돈을 열흘 안에 내겠다는 계약서까지 쓴 채 가게를 나왔다. 그러나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부정세에 도착하자 초저녁이었다. 나는 식사할 새 없이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섭회상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인기척이 없었고, 설마해서 정원에 나가보자 비 그친 정원에 섭회상이 홀로 서 있었다. 다가가자, 섭회상은 내게 왔냐고 인사하는 대신 부채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은하수가 보여?
-아직 뚜렷하진 않은데요?
-응.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겠다.
오롯이 하늘을 향해있는 섭회상의 얼굴을 슬쩍 보다가, 나는 품 안에서 붓을 꺼냈다.
-선물입니다.
-어라? 정말 선물 준비해 뒀던 거였어?
-그럼요.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나는 최대한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섭회상이 나를 웃는 얼굴로 흘깃 보더니 상자를 열어 붓을 확인했다. 그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보며 나는 묘한 쾌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거...... 네가 구하기 쉬운 물건은 아니었을 텐데.
-전 돈 쓸 일이 없어서요. 이런 데 쓰려고 돈 벌죠.
-이런 데가 뭔데? 넌 돈이 좋지 다른 게 좋은 건 아니라며.
-그건......
내가 대답 못 하자, 섭회상은 웃으며 붓을 들어 살펴보았다.
-고마워서 어쩌지? 나는 그냥 향낭밖에 못 줬는데, 너는 이런 귀한 걸 주고.
-아뇨. 종주께서 주신 향낭이 더 귀해요.
그건 진심이었다.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물건보다, 섭회상이 나를 위해 만들어준 하나뿐인 향낭이 더 귀한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향을 배합하는 법도 모르고, 향낭을 만드는 법은 더더욱 모른다. 애초에 나는 칠석날 다른 사람과 선물을 주고받아본 적조차 없었다. 지금 이 모든 게 나는 다 처음이었다.
-중요한 건 네 취향이지. 향이 마음에 들어? 네가 평소에 쓰던 것과는 다르잖아.
-그건 그냥 벌레 쫓아준대서 쓰던 거예요. 전 향기를 잘 모르고 취향이랄 것도 없어요. 하지만......
나는 품에서 향낭을 꺼내 가볍게 향기를 맡았다. 달콤한 냄새가 벌레를 쫓아주긴커녕 불러들일 것 같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드디어 내가 미쳤나보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이제 취향이 생긴 것 같습니다.
한참 동안 섭회상과 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밤하늘에 은하수가 또렷해지자, 섭회상이 그것을 가리키며 한참 만에 침묵을 깼다.
-직녀와 견우가 드디어 만났겠다. 그치?
-그러게요.
-둘은 후회할까? 자기 본분을 잊고 서로에게 빠져든 것을?
-그러니까 칠석 때마다 울겠죠.
내 말에, 섭회상이 피식 웃었다.
-그럼 둘이 서로를 원망하겠네?
-왜 원망해요?
나는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한 건가 싶어 물었다.
-누군가를 만난 걸 후회하는 거랑 그 누군가를 원망하는 게 같은 겁니까?
섭회상은 내 질문을 잠시 곱씹는 듯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두 가지가 같은 건 아니지. 하지만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평안히 자기 삶을 살 수 있었을 테니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지 않을까?
-그런 걸로 원망할 사이면 칠석마다 안 만나겠죠. 까마귀나 까치가 대머리 될 일도 없을 거고......
좀 더 고급스러운 어휘가 내 머릿속 사전엔 없었던 것일까? 섭회상이 빡대가리인 게 아니라 내가 빡대가리였던 거군. 아니 근데 내가 원래 이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은데, 왜 요즘 이렇게 생각에 집중이 안 되고 계속 어지러운 건지 모를 일이었다.
설마 멍청한 것도 옮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섭회상을 바라보는데, 직녀가 내 옆에 내려와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섭회상의 시선은 하늘에 꽂혀있었다. 평소에는 귀엽기 그지없는데, 이렇게 표정이 없을 때면 눈매가 살짝 올라가 있어서 그런지 조금 날카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의 옆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가 여전히 나를 보지 않은 채로 한숨 쉬듯 읊조렸다.
-요컨대 그들의 만남 그 자체가 그들의 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지? 하기야 굳세지 못한 마음은 물을 닮아서, 함께한 시간을 꿈과 같게 한다지 않니.
내가 한 말이 그거였는지 모르겠어서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섭회상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무른 마음이야말로 견우를 견우로, 직녀를 직녀로 만든 거겠지. 어쩌면 그 둘보다 은하수가 먼저 있었는지도 몰라.
이번에도 뭐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섭회상이 나를 돌아보더니 웃었다.
-아무튼, 상처는 안 아프고?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같이 길한 날 피를 봤으니, 아무래도 남은 한 해가 평탄치 못할 것 같아 걱정이야. 다 네 잘못이라구.어떻게 책임질래?
갑자기? 나는 멍청히 두 눈을 깜박였다. 섭회상이 또 어린애가 되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난 안 그래도 팔자가 사나운데, 너 때문에 더 사나워졌잖아.
-아니......
나는 잠시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물었다.
-그럼 제가 뭐 어떻게 해드려야 할까요?
-약속해줘.
섭회상이 냉큼 말했다.
-뭐를요?
약속해달라고 말해놓고서 무슨 약속을 받아낼 것인지까지는 생각을 안 한 모양이었다. 고심하듯 입술을 우물거리던 그는 방금 막 생각했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네가 나를 지켜줘.
저랑 부정세 수사복 입은 다른 몇 백 명이 지금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묻기엔 섭회상 스스로가 자기 요구에 대해 놀란 얼굴이었다. 단순히 놀란 게 아니라 묘한 설렘과 흥분, 그리고 두려움이 그 얼굴에 투명하게 내비쳐서 바라보는 내 가슴까지 울렁거렸다.
-나를 지켜줘. 네가 날 지켜주면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
생각해보면 섭회상은 첫 만남 때부터 네가 나를 지켜줄 것 아니냐며 내내 염불을 외웠다. 그것과 지금 이 순간의 부탁이 무엇이 다르냐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목숨 바쳐 지켜드리겠노라 여러 번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 나는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하는 대답을 곧바로 돌려주지 못했다. 내 어깨에 걸쳐진 부정세 수사복이 이제 와 너무 무거웠던 탓이다.
사실 내가 입고 있어야 하는 건 금색 수사복이었다. 벌써 스무 해 가까이 그랬다. 하지만 나를 말없이 바라보는 섭회상을 마주보다 보면 그 사실을 오늘 하루쯤은 무시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고 싶었다. 결국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섭회상이 미소지었다.
-약속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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