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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위무선은 아주 오랜만에 고국의 땅을 밟았다. 그러나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답답한 비행기에서 해방된 폐가 급하게 공기를 들이켰다. 피곤함에 당장 호텔로 향해 쓰러지고 싶었지만 할 일이 많았다. 교수로 임용된 모교에 인사차 들러야 했으며 살 집도 구해야 한다. 인파 속에서 바쁘게 걷던 위무선은 기내용 캐리어만을 한 손에 쥔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멈춰 섰다. 익숙한 공기의 냄새와 자신과 비슷한 생김새의 사람들.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타국에서 돌아왔으나 이 땅에서도 그는 혼자였다. 공항 유리창으로 햇볕이 쏟아졌다. 문득 눈이 시렸다. 6년 만이었다.
76.
학장은 조기 졸업과 유학 코스를 밟고 최연소 교수로 임용된 천재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위무선이 이룰 수 있는 것들, 바라는 학문적 지향점과 거시적인 목표들을 기대하며 반짝이는 눈에 양심이 다 찔릴 지경이었다. 최선을 다해 맞장구를 쳐주고 나오니 기가 빨려 한숨이 다 나왔다. 마중을 가까스로 거절한 위무선은 잠시 혼자 캠퍼스를 거닐었다. 교정은 텅 비어 있었지만 곧 3월이 되면 학생들로 복작복작하게 붐빌 것이다. 멍하게 앉아있는 위무선의 앞으로 학생으로 보이는 커플이 꼭 붙어 지나갔다. 겨울 끝자락의 추위에도 둘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앳된 얼굴로 웃으며 위무선을 지나쳤다. 속절없이 떠오르려는 옛 기억을 억지로 차단한 위무선이 부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살면서 한 번도 떠오르는 생각을 거르거나 억지로 막은 적이 없었는데. 이제 그 짓도 6년 동안 꽤 익숙해졌다.
77.
방 좀 보려고 하는데요. 남자 혼자 살정도면 돼요.
위무선이 제시한 돈과 조건으로는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집은 그냥 잠만 자고 나오는 공간이 된지 오래였다. 공인중개사는 위무선이 까다로워 보이지 않자 안심한 눈치였다. 젊은 남자가 혼자 집을 구하며 거액을 내놓으니 이것저것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어봐 왔으나 웃는 얼굴로 선을 긋자 곧 입을 다물었다. 계약서를 살피던 위무선은 틀어져 있던 TV에서 들리는 이름에 순식간에 주의를 빼앗겼다. ‘운몽 그룹의 성공신화를 새로 써낸 강만음 사장과 배우 A씨의 스캔들이 화제입니다. 두 사람은 xx일 저녁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같은 차로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되어….’ 위무선은 잠시 굳었다가 고개를 쳐박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사장님. 어? 네? 입꼬리를 억지로 당긴 위무선이 입을 열었다. TV좀 꺼 주시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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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어치우기로 했다. 도망치듯이 떠났던 유학에서도 결국 돌아온 주제에 뭘 더 숨긴단 말인가. 아직도 질투로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위무선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유학동안 배운건 공부뿐만이 아니었다. 몸에도 안좋은걸 뭐하러 입에 대! 언제였더라. 호기심에 태운 담배를 들킨 위무선은 불같이 화를 내는 강징을 하루종일 달래고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했다. 강징은 나중에는 너랑 같이 오래 살고싶다며 품속에서 작게 중얼거렸었다. 급하게 뱉은 연기 사이로 옛기억이 흩어졌다.
79.
그때의 위무선과 강징도 캠퍼스에서 꼭 붙어 다녔다. 신혼집은 강징의 대학 근처로 구했다. 강징은 둘의 대학 중간지점으로 찾으려고 했지만 그냥 위무선이 밀어붙였다. 나이가 차자마자 일찍 따둔 면허도 차도 있으니 괜찮다는 말은 둘째였고 속마음은 강징의 하루에 귀갓길, 즉 위무선이 모르는 시간이 있는 것이 싫었다. 대학가 술집이야 거기서 거기였으니 강징이 술자리에 나가면 바로 튀어나가 데려올 수도 있었다. 위무선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강징의 친구들과 안면을 텄고 유명인사가 되었다. 고지식한 강징은 매번 위무선을 남편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 대개 ‘그래 주접이 참 심하구나’ 정도의 반응이 돌아와 강징을 환장하게 했다. 같이 사는 것을 알고 웨딩 사진까지 보여주고 나서야 진짜였냐며 입을 딱 벌리는 것이다. 대체 왜 다들 남의 말을 못 믿는 거냐고 씩씩대는 강징을 달래는 것은 위무선의 일이었다. 위무선과 마찬가지로 짓궂은 면이 있는 강징의 친구들은 위무선이 나타나면 얘 징아, 네 전남친 왔다 하며 강징을 놀렸다. 그럼 눈을 흘기면서도 쪼르르 달려오는 것이 귀여워 죽고 싶을 지경이 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품으로 들어오는 강징을 감싸고 흘긋 시선을 돌리면 진짜랬잖아, 하고 핀잔을 주는 강징의 친구와 그 옆에서 아쉽다는 얼굴로 이쪽을 보는 남자 하나가 있다. 위무선과 눈이 마주친 남자는 움찔하곤 시선을 피했다. 이러니 위무선이 마음을 못 놓을수 밖에 없다. 아무것도 모르고 재잘대는 강징이 얄미워 어깨를 깨물었다. 악! 아퍼! 사실 맨살을 깨물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한 달 동안 말도 하지 않으려 들것이다. 그러니 그건 이따 밤에. 위무선은 옆구리를 치는 강징의 손을 잡고 볼에 입을 맞췄다.
80.
위무선은 강징이 어려웠다. 강징은 자기가 위무선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여기는 눈치였지만 위무선은 한번도 강징을 완전히 얻었다고 확신한 적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강징을 드디어 얻었다고 생각 했을 때, 강징이 품 안을 빠져나갔다. 불퉁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고 있던 어린 강징을 처음 만났던 날에 위무선은 강징에게 온 정신을 빼앗겼다. 친구라면 당장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도 단짝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강징의 친구가 되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대신에 위무선은 긁힌 팔의 상처와 며칠 동안 끙끙 앓게 한 열감기를 바치고 강징의 오빠가 되었다. 그때 위무선은 책에서 봤던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있는 강징의 속마음을 간신히 엿보았다. 그 애는 무섭고 외로웠던거다. 어렸을 적 기억은 이제 희미하지만 냉랭하던 강풍면과 우자연 사이에서 주눅 든 강징만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가슴을 콕콕 쑤셨다. 강징은 그제서야 위무선을 보고 웃어주기 시작했다. 강징이 계속 웃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강징의 손을 잡고 어디든 다녔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끈질기게 붙어 달래 주었다. 점점 강징을 잘 알게 되었다. 위무선이 자신만만해 있을 때 즈음 강징은 위무선의 ‘손바닥 안’을 빠져나갔다. 강징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손을 잡는 것은 그때쯤엔 거의 습관이 되어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강징의 어깨를 감쌌을 때, 흠칫 굳고 빠져나가는 작은 몸을 보고 위무선은 혼란스러워졌다. 그건 찰나였으나 위무선은 알아챌 수 있었다. 강징은 점점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복잡한 생각이 오가는 눈동자를 보고 있을 때면 위무선은 초조해졌다. 당장 강징의 뺨을 붙들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강징을 잘 아는 것은 위무선이어야 하는데. 그러나 직감이 초조한 위무선을 말렸다. 지금 강징을 다그쳤다간 정말로 강징이 저 멀리 멀어질 것 같다는 기분 나쁜 직감이었다. 그래서 차분히 기다렸다. 위무선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면서 더 자세히 강징을 살폈다. 강징이 여전히 위무선을 보고 웃어주었으니 참을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강징이 웃으면 가슴이 뿌듯하게 부풀었고 저까지 웃게 되었다. 강징이 시무룩해지면 마음이 저렸다. 당장 무릎에 앉히고 원하는 것을 들어줄 때까지 달래고 싶었다.
81.
그때 사춘기를 막 벗어난 아이들은 서로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위무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방지축으로 같이 뛰어다니며 놀던 여자 친구들에게 고백을 받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남자친구가 되어달라는 말에 내가 왜? 하고 되물었다가 울린 여자아이들로 반을 하나 만들 수도 있었다(맹세코 악의는 없었다). 반대로 강징에게도 관심을 보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강징처럼 예쁘고 귀여운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 한편으로 위무선은 강징을 알아본 것이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강징을 꽁꽁 숨겨두고 나만 보고 싶었다. 그거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한마디 할까 말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섭회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좋아한다고? 곰곰이 생각하던 위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난 강징을 좋아해. 시원한 대답에 섭회상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괜한 일에 끼어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 예?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82.
깨달음은 불현듯 찾아왔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시시덕대던 위무선은 습관처럼 눈으로 강징을 찾았고 눈이 마주쳤다. 재빠르게 시선을 피하는 강징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열이라도 나나 싶어 그대로 걸어가 이마를 짚으니 화들짝 놀라 입술을 짓씹으며 위무선을 보았다. 강징은 가끔 눈으로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 애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풋풋하지만 애가 닳아 숨기지도 못하는 열병을.
83.
위무선이 고백을 받았을때 들었던 말은 한결같았다. 좋아해. 사귀자. 좋아해. 내 남자친구 해줘. 좋아하면 고백하고 사귀면 되는 건가. 그러나 그 사귄다는 관계의 친구들을 보고 있자면 어렸던 위무선의 눈에도 참으로 어설펐다. 게다가 어영부영 사귀어놓고 헤어지면 그 전의 친구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어색해졌다. 위무선은 죽어도 강징과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강징과 위무선은 가족이었고 제일 친한 친구였다. 강징을 잃는다는 가정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위무선이 강징과 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어설프고 가벼운 것은 절대 아니었다. 좀 더…강징의 모든 것이 되고 싶었다.
84.
강징도 날 좋아하니 마음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함은 뒷통수를 맞았다. 강징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거리를 두려고 했고 언제든지 위무선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위무선이 제일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위무선은 강징이 먼저 마음을 고백하고 제게 오기를 바랐다. 그건 누가 먼저 고백하는지 순서를 따지는 유치한 짓 따위가 아니었다. 겁도 많고 의심도 많은 강징, 위무선의 선 안에 본인이 있음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강징이 확신이 얻기를 원했다. 강징이 모른다면 알게 하면 될 일이었다. 위무선은 강징을 떠나는 일 따위 생각해본 적 없었으며 자신 역시 키가 지금의 반도 되지 않던 옛날부터 강징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 바보는 손수 돌을 고르고 쌓아 위무선의 마음에 성을 지으면서도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냐, 하며 불안해했다. 위무선이 강징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맹세코 강징 빼고 모두가 다 알았다. 무엇하나 어려울 것 없고 쉽게 질리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강징은 위무선을 안달 나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85.
위형 진짜 집착 쩔어요. 섭회상이 벤치에 앉은 강징을 흘끔거렸다. 쳐다보지 마. 닳아. 질린다는 얼굴을 한 섭회상은 위무선이 던진 아이스크림을 낚아챘다. 어쩔 수 없었다. 적당한 거절도 못 알아듣기에 경고까지 했는데 기어코 강징의 귀에 들어가게 하다니. 덕분에 하루종일 시무룩한 머리꼭지를 보고 마음이 아파 죽는 줄 알았다. 위무선은 여자를 아끼고 우는 것을 못 견뎠으나 강징을 속상하게 하는 것만은 넘어가 줄 수 없었다. 가볍게 찔러보는 선에서 그쳤어야지. 아이돌 연습생 불쌍하다... 우리 징징이가 더 예쁘지 않아? 위무선이 싱글싱글 웃는 것을 보고 섭회상이 입을 딱 다물었다. 여기서 그렇다고 하면 언제부터 강만음을 예쁘게 생각했냐는 추궁이, 그렇지 않다고 하면 눈의 위치를 다시 잡아주겠다는 반협박이 돌아올 것이다.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는 그를 종소리가 구원했다. 위형 종 쳤어요 저 먼저 가요!! 부리나케 도망가는 섭회상은 이미 위무선의 안중에 없었다. 징징아 오빠도 한 입만 조 >_<! 팔랑팔랑 나타나 입을 벌리는 위무선에게 니껀 언제 다 쳐먹었냐고 타박하면서도 강징은 곱게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려주었다. 강징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을 달게 입에 문 위무선이 웃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늘어지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