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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7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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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여기까지가 한 편이었는데 좀 긴 것 같아서 잘라 올림
생각해보니까 진정령 ㅅㅍ 난백 ㅅㅍ
캐붕 같고 개연성 없는 것 같다면 너의 생각이 맏다......
내가 떠나지 않고 계속 집에 붙어있던 건 금광요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생을 마칠 때까지 나는 묵묵히 기다렸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뒤로 삼 년 좀 넘게 살았다. 그 동안 별일이 다 있었다. 금광요가 돌아가고 얼마 안 있어 이릉노조가 갑자기 궁기도에 있던 온씨 방계 일족을 난장강으로 데려갔고, 그 과정에서 금씨 수사 여럿을 죽인 것이다. 그리고 이 년 뒤 폭주한 위무선 손에 수진계 수사들 몇 천 명이 죽었다. 거기엔 금자헌과 금자훈이 포함되어있어서, 소식을 전해들은 뒤 어쩐지 난릉 금씨 수사로 있을 적 기억이 떠올라 감상이 묘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뭐 어쩌겠나, 사는 놈은 살고 죽는 놈은 죽는 거지. 어차피 다들 죽는데, 곱게 죽으면 그걸로 그냥 감사하는 거고 아니어도 진짜 뭐 어쩔 것인가.
할머니도 죽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폐병으로 죽은 건 아니었다. 죽기 전날까지 기침을 하긴 했지만 각혈은 증상에 없었으니까. 그냥...... 어느날 아침 눈 떴더니 기침 소리가 안 들리더라. 조용한 방 안에서 나는 잠시 동안 천장만 보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완전히 밝았을 때 즈음, 옆 이불에 누워있는 몸을 확인했다.
그게 끝이었다.
이 정도면 호상이지. 어언 십 년 간 약값을 보낸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할머니가 죽고 유품을 정리하던 차 벽장 한쪽에 무더기로 쌓인 은자가 보여 나는 허탈하게 웃어야 했다.
정말 끝까지.
산다는 건 도대체 뭘까. 할머니의 시신을 묻으며 나는 새삼 그런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남겨놓은 은자는 할머니와 함께 묻을까 하다가 돈 낭비 같아서, 그냥 마을 사람들에게 뿌렸다. 그러자 겨울임에도 분위기가 무척 훈훈해졌다. 마치 돈이 장작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돈으로 기름칠을 하기도 했고, 시체 썩을 걱정 없는 겨울이라 장례는 느긋하게 치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매장까지 다 마치고 나니 더 이상 내가 하동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나는 집을 그대로 내버려둔 뒤 밤에 조용히 떠났다. 뭐 이웃집이 무너뜨려서 쓰든 그대로 내버려둬서 썩든 어떻게든 될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곧바로 금린대로 가는 대신, 나는 남은 돈으로 딱 일 년 동안 유랑을 했다. 유랑이라 해봐야 여기 저기 야렵을 다닌 게 다였다. 머리가 다 안 자랐을 때부터 검으로 벌어먹고 살아왔더니, 벌어먹고 살 필요 없는 데도 자꾸만 검을 쓰게 되더라. 거물들은 선문세가에서 돈 받고 잡아주니, 나는 주로 소소한 요괴들을 잡고 감사 인사 듣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나같은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같은 목표물을 추적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그들은 꼭 내게 물었다.
-소협께서는 어디서 검을 배우셨는지요?
대충 자기들이 아는 가문 검법이 다 섞여있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임을 알아서,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 일개 객경에 불과하다고 짧게 답하곤 했다.
십 년 좀 안 되어 다시 밟게 된 금린대는 전보다 훨씬 화려했으나 어째 내부 분위기가 더 개판이었다. 금자헌이 죽고 몇 년 안 지났으니 당연히 분위기가 안 좋을 만 하지만, 그새 또 묘하게 인상이 달라진 금광요를 보면 뭔가 더 있는 듯했다.
-그래.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금광요는 나에게서 돌려받은 붓대롱을 매만지며 반쯤 혼잣말을 했다. 채광 좋은 금린대 아니랄까봐, 햇빛을 한몸에 받는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마르고 고요해보였다. 그가 물었다.
-제일 중요한 건 네 선택이지. 금린대에 들어오고 싶어?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금광요가 자기에게 내리쬐는 햇빛과 어울리지 않게 어슴푸레한 미소를 띄웠다.
-그럴 것 같았어. 그럼 이렇게 하자. 너는 금씨 사람은 아니지만, 내 사람이야. 공식적으로는 나와 아무 관계 없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객경과 비슷하다고 치자. 네가 원하는 곳에 집을 얻어. 내가 구해줄게. 그리고 내가 이따금 부탁을 하면 그 부탁을 들어주면 돼. 어때?
선문세가에서 보낸 시간이 헛되진 않아서, 나는 금광요가 금씨 바깥에서 자기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그 부탁이라는 게 어떤 건지 좀 더 구체적으로 여쭤볼 수 있을까요. 염방존. 제가 암살에는 소질도 없고 또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아서.
난릉 금씨 가문의 서자라곤 해도, 금광요는 이제 종주의 유일한 친아들이었다. 고고한 고소 남씨나 다들 단명하는 청하 섭씨라면 다를 수도 있지만, 금광요가 당시 앉아있던 그 자리는 황실을 방불케 하는 온갖 암투를 헤쳐나가야 겨우 현상 유지를 할 수 있는 그런 자리였다. 금광요의 손이 깨끗할 거란 기대는 애초에 안 했다. 바란다면 덜 더럽기를 바랐달까. 나를 놀란 듯 바라보던 금광요가 힘없이 웃었다.
-당연하지. 내가 너를 아는데, 그런 일을 시킬 리 있어? 사람 해치는 일은 절대 시키지 않을 거야.
-글쎄요. 저라고 사람을 안 죽여본 건 아니니까.
그렇게 대꾸하며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금광요는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다가 내 이름을 불렀다.
-헌.
-네?
-말 안 했었지?
-뭘......
-돌아가신 조모님의 명복을 빌어.
멈칫하던 나는 금광요에게 공수해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도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염방존. 혼인도, 득남도.
내 인사에 금광요가 정확히 어떤 얼굴을 했더라. 이상하게 그것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웃고 있었고, 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보이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에게 괜찮냐고 물어봤을 때, 그는 떨리는 입꼬리를 굳혔다. 그리고 내게 괜찮고 또 고맙다고 나지막히 답했다.
그 뒤로 나는 난릉 근처 최대한 집값이 싼 곳에 집을 얻었고, 곧 그게 잘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 내가 내 집에 머무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집안일을 하며 세간을 관리해줄 사람을 하나 고용했는데, 몇 년 지나고 나니 거의 내가 그녀 집에 신세지는 형국이 되었다.
아무튼 금광요는 나를 선문의 이곳 저곳에 파견했다. 객경이라기보다는 세작으로 써먹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나는 금광요가 보낸 세가의 수사로 활동하면서 그가 요구하는 정보들을 전해주었다.
사일지정을 용케 살아서 버텼다고는 해도, 그게 다였다. 나는 가문이 굴러가는 방식을 가문 내부에서 제대로 익힌 적도 없었고, 뒷배도 없으니 나 혼자 백날 수련해봐야 요직을 맡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사실 금광요가 돈을 내고 나를 교육시켜준 것이라고 봐야 했다. 그가 아니면 애초에 내가 어떻게 가문의 주요 문서들을 손에 잡아보았겠는가.
물론 금광요는 언젠가 그 비슷한 말을 하는 나를 붙잡고 다정하게도 말했다.
-그런 생각 하지 마. 헌아. 네가 실력이 없었으면 내가 애초에 너에게 일을 맡기지도 않았겠지. 그냥 너에게 돈만 안겨주면 되는걸.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고맙지만 재수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백 살 넘게 살 때까지 필요한 돈을 계산해도 금린대의 부에는 발끝만치도 못 미친다는 것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애초에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금광요의 말이 심히 간지럽다는 것이었다.
-넌 사일지정에서도 살아남았잖아.
-운이 좋았던 것뿐이죠, 염방존.
도무지 표정관리 되지 않는 내가 우스웠는지, 금광요가 묘한 미소를 짓더니,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다.
-정말,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
-네. 제가 아는 선문 명사들 다 개죽음당했는데요.
그나마 명문가 자제면 덜하지만, 받쳐줄 가문조차 없다면 유명세와 장수 둘 중 하나 선택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게 맞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금광요는 나직하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걱정이다.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재미있어서. 네가 한 만큼 내가 지불한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나도 일감 주는 입장에서 노력해볼게.
그 말을 듣고 나는 솔직히 좀 긴장했다. 그러나 금광요가 요구해온 정보는 거의 다 별거 아니었다. 나는 그냥 그에게 몇 주, 몇 달 단위로 그 세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만 하면 되었고, 그가 뭔가를 더 조사하거나 찾으라고 하면 그리하면 되었고,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하면 떠나면 되었다. 내가 떠난 가문이 금광요의 손에 멸문되었다거나 가세가 꺾였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으니, 나는 내 직업에 만족했다. 만족하지 않아도 별 수 없었다. 내가 지령을 받고 망설이면, 금광요가 예의 슬픈 얼굴로 그 일이 필요한 이유를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그러면 나는 결국...... 할 수밖에 없었다.
금광요는 똑똑했다. 아예 선을 넘는 부탁을 하면 내가 발을 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고, 나는 그런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내가 등신이지, 그냥. 그런 생각으로 혼자 독한 담배를 피우면서도, 금광요와 나는 단둘이 술잔을 기울일 정도로 잘 지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함께 대작할 때는 서로 반말하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서, 나는 술값은 누가 내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고 물처럼 술을 들이키곤 했다.
-너는 정말 재미있어.
-또 그 소리야?
내가 한 병 마시는 동안 한 잔 마시는 염방존께선 술 취한 내 얼굴을 자주 흥미로운 얼굴로 살펴보곤 했다. 나는 보고싶은 만큼 보라고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간 금광요가 겪은 일들이 꽤 많아서, 나는 만날 때마다 최대한 그의 비위를 맞춰주는 편이었다. 예컨대 그의 아들은 세 살 나이에 비운의 사고로 명을 달리했고, 그의 애비라는 작자는 얼마 안 가 그를 견제하려고 모현우라는 또 다른 사생아를 데려왔다.
금씨 내에서 그의 세력이 그리도 불안정하니, 사람들은 금광요를 존경하면서도 비웃었다. 그와 의형제를 맺은 적봉존도 난릉 금씨가 설양을 객경으로 받은 뒤 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어떻게 제정신으로 버티고 사냐는 내 질문에 금광요는 나지막히 웃더니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가.
-설양 말이야. 너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그렇게 묻는 금광요에게 손을 저어보였던 기억이 난다.
-몰라.
-모른다고?
-그래. 금광선이 설양을 살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네가 뭔가 할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아니지. 그런데 이렇게 물어보는 걸 보면 네 마음에 뭔가 걸리는 게 있냐? 응. 그래서 난 모르겠다.
말을 마친 뒤 현기증을 못 이기고 술상에 머리를 박았다. 금광요에게선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섭명결한텐 왜 그래?
-큰형님께, 내가 뭐?
-섭명결이 뭐 예쁘다고 그렇게 챙기고 다녀? 온 수진계에 소문 다 났더라. 네가 부인마냥 지극정성이라고.
그렇게 호구잡혀서 살지 말라고 일장 연설을 하다보면 머리 위로 웃음소리가 울렸다. 머리를 다독이는 손길을 느끼며 초점 없는 눈을 깜박이던 기억이 난다.
-헌아.
-응?
-우리 오래 보자.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또 제법 다정해서, 나는 술 깨는 티를 내지 않으려 몸을 웅크렸다.
-그래야지.
그때 이미 나는 그를 향한 막연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금광선이 얽힌 일이야 그렇다 치지만, 금여송의 죽음엔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좀 많았다. 금광요와 그가 추진하는 감시탑 건설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 갓난배기 아들을 납치해 죽이는건 대가리가 텅 비어있고 목숨이 별로 아깝지 않은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인데, 경험상 보통 그 두 개가 같이 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내가 차마 그런 의심을 구체화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금광요가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말이 되는데, 금광요가 죽이려면 금광선을 죽이지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왜 죽이겠는가. 돈도 많고, 안 가진 게 없는데 왜.
물론 돈 많다고 능사는 아닌 것을 나는 알았다. 너 혹시 이미 등선한 거 아니냐. 나는 금광요 앞에서 술에 취하면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겁 아니고서야 금광요의 기구한 인생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물론 이 세상에 비참한 인생이야 차고 넘치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좆같은 인생은 얼마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겁이라...... 나보단 아송의 인생이 더 겁에 가깝겠지.
그렇게 말하는 금광요는 그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특유의 보조개 움푹 패인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톡 치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넘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금광요를 향한 의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랬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얼마 뒤 금광선이 죽었을 때는 아예 금광요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금여송 대신 진작 그 새끼가 뒤졌어야 한 건데,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개새끼. 끝까지 그 새끼는 금광요의 어머니를 낙적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금광요를 선독이라, 염방존이라, 금종주라 불렀고 그야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내 맘 한 구석에서 그는 여전히 내 등에 업혔던 어린 맹요였다. 그가 모현우를 쫓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자기에게 반하는 가문을 간단히 멸문시켰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섭명결이 금린대에서 주화입마로 죽은 뒤 시체가 행방불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내가 침묵하고 그에 관해 더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마 그 때문이었다.
*
그쯤 되어 수진계를 뜨고 싶다는 생각이 무척 강렬히 일었다. 그동안 금광요는 내게 약속했던 대로 내 몸값을 후히 쳐줬고, 그 대신 점점 더 나를 빡세게 굴렸다. 나는 돈 쓸 일이 거의 없었기에 십 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돈이 내 곳간에 쌓여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 살지 모르는데 일을 관둘 수는 없었다. 금광요와의 계약을 관두는 게 수사로서의 생을 끝낸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었지만 유의어는 되었다. 염방존께서는 감시탑에 반대하는 가문 하나를 얼마 전 통째로 날려버리신 대단한 분이었으니까.
이러니, 나같은 가난뱅이한텐 금단맺고 수련하는 게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수명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노동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금광요가 나를 금린대로 부른 것은 섭명결이 죽고 팔 년쯤 지난 뒤의 일이었다. 팔 년이면 강산의 오분지사가 변하고도 넉넉히 남는 시간이니, 나는 금광요가 나를 소환한 게 청하 섭씨와 관련있으리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그때 나는 한참 동영에 나가 있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금광요가 내게 맡기는 임무들이 대체적으로 뜬금없긴 했지만, 동영 정찰을 부탁했을 때에는 어이가 없어서 왜냐는 질문도 안 나왔다. 법기나 영약, 가능하면 비급과 비곡집까지 쓸모 있을 만한 것들을 최대한 모아오고 거기 땅과 정세 좀 봐두라는 게 금광요의 요청이었다.
난 원래도 금광요에게 토달거나 따지는 일이 없었다. 금광요는 내 손에 무고한 피 안 묻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돈도 많이 줬고, 내가 그 외에 뭘 더 바라겠는가. 은원엔 큰 관심 없지만 배은망덕하지는 않아서, 난 금광요가 나를 아낀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이름도 바꿔 말하는 나같은 떠돌이 수사는 사실 고급 인력이었고,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게 목숨값이라는 게 문제지. 어느 가문 사람인지 유추할 수 없는 초식과 과거는 목숨을 걸 때만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이었다. 이게 자기 목숨만 건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보통 그런 수사는 암살 임무를 맡게 되는 게 현실이다. 그게 싫은 나를 배려해, 금광요는 내게 조사나 정찰 임무만을 주로 맡겼다. 게다가 그는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임무를 주로 맡겼는지라, 괜히 금광요 외의 다른 사람들과 더 교류하면서 힘 뺄 필요도 없었다.
즉 그는 흠잡을 데 없는 고용주였다. 그래서 그의 지시를 받자마자 나는 동영까지 배 타고 갔다. 물론 난 동영 말 하나도 모른다는 항변을 하긴 했지만, 여행 간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익히라는 그의 말에 더 할 말이 없었다. 가는 길 돌연 태풍이 치는 바람에 용왕님을 뵐 뻔 한 것도 있지만, 그것도 어떻게 용케 살아남았다.
동영에 도착해서도 나는 죽을 위기를 수 차례 겪었다. 대륙에 서른 해 가까이 살며 맞은 칼침 수보다 동영에서 오 년 살며 맞은 칼침 수가 더 많았다. 거기 살다보면 왜 전설 속 나쁜 놈들이 다 동영행인지 이해가 갔다. 섬이라 폐쇄적인 건 알겠고 아직 대륙의 수진계만큼 거대한 수행자 집단이 없다는 것도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쌈닭의 후예들인지 툭하면 검 뽑고 달려들더라. 쓰는 검법도 전혀 달라서 초반엔 막는 것도 힘들었다. 주술은 또 왜 그렇게 독한지. 조사해서 차곡차곡 모으면서도, 금광요가 이걸 대륙에서 대체 어떻게 써먹을 생각인걸까 심란할 때가 많았다.
물론 가서 새로 배운 것도 많았고, 좋은 기억도 없지 않았다. 새하얗고 나긋한 사람이 많은 것도 좋았지. 하지만 그뿐이어서, 굳이 내가 여기 와서 이 고생을 해야 할까 담배 말릴 때가 많았다. 술과 담배가 달고 맛있어서 버텼지 안 그랬으면 거기 오 년이나 못 있었다.
-살아서 돌아왔네?
그렇게 묻는 얼굴이 곱기는 또 오질나게 고와서 한 대 치지도 못하고. 용궁 보고 왔으니까 목숨값 쳐달라는 내 말에 금광요는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그에게 틈틈이 보내던 것 외에 따로 정리해둔 조사 자료를 건넸고, 그는 몇 시진 동안 그것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는 그 옆에서 그냥...... 술 마셨다.
그는 내 작업을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애초에 나는 그가 뭘 원했는지 몰랐기에, 그냥 그가 던지는 질문들에 대답이나 했다. 그러나 궁금함이 내 얼굴에 드러났던 모양인지, 금광요가 내게 넌지시 말했다.
-지금이야 수진계가 평화롭지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동영은 예로부터 멀고도 가까운 곳이니 미리 조사해 놓은 것뿐이야. 아헌 너는 거기 계속 머물 생각 없어?
잠깐 동안 나는 눈만 깜박였다. 얘 진짜 뭐지.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설마 그건가? 선문세가 내부를 더 건드릴 수는 없으니 앞으로는 무슨 일이 생기면 동영 이름을 팔려는 건가?
금광요라는 인간에게 정과 의리를 느끼는 것과 별개로, 나는 그가 얼마나 머리를 잘 굴리는지 알고 있었다. 머리를 잘 굴리는 게 아니면 운이 억수로 좋은 건데, 그는 수진계에서 가장 팔자 험한 사람 1위였으니 당연히 후자는 못 되었다. 불행이 금광요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그는 예쁜 미소를 지으며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다보니 그를 위협으로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그에게 유리하게 흐르고있었다. 그 사실에 대해 수진계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인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생각 없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관계를 생각하면 거의 주인과 가신에 가까웠다. 그는 내게 일을 시키고 돈을 주었지만, 그건 명분이었다. 그가 돈을 주지 않는대도 나는 금광요를 거절할 수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나는 아직 동영 물이 다 안 빠진 머리로 멍하니 생각했다. 그때 금광요가 내 어깨를 짚었다.
-네가 거기 있어주면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왜, 혹시 모르지. 네가 나를 배웅 나올 수도 있잖아.
술식이 엉켜 처음부터 다시 다 계산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초보 주술사처럼, 나는 금광요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내 얼굴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금광요의 입가가 약간 굳었다. 그는 우아한 손길로 내 어깨를 다독였다.
-지금 당장 동영으로 가서 살라는 건 아니야. 네가 어디서 살 건지,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지. 그냥...... 생각해 보라고. 우선은 푹 쉬어. 또 부를게.
그러더니 금광요는 나를 약하게 만드는 바로 그 외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금광요가 뒤 돌기 전에 그의 팔을 덥썩 붙잡았다.
-너 그러지 좀 마.
-뭐?
순수하게 놀란 듯한 금광요의 얼굴을 보자 속에서 울컥거리며 무언가가 새어나왔다.
-넌 염방존이고, 선독이고, 사람들 사이 평판도 좋잖아.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최악을 가정해? 그냥 금린대에서 평생 호화롭게 잘 살 생각만 해. 그럼 되잖아. 왜 네가 너를 자꾸 괴롭혀.
그건 내 진심이었다. 그러나 듣는 금광요도 말하는 나도, 그게 순진해빠진 소리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밑바닥에서 올라간 사람은 항상 더한 밑바닥에 처박힐지 모른다는 불안을 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형체없는 불안이 금광요가 이러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누가 자기에게 복수의 칼날을 간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음을 금광요는 알고 있었다. 항상 그런 눈빛이었다.
물론 금광요는 아버지보다 더 나은 아들로, 세상이 탄복하는 치정자로 평생을 살기 위해 뭐든 할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각본대로 완벽히 흘러가기엔 너무 길다는 것을 그도 나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기엔, 그는 이미 인과의 씨앗을 너무 많이 뿌렸다.
그래서? 나더러 또 네 밑바닥에 마중나와 달라고? 차마 그렇게 묻지는 못하고 감히 선독의 팔만 으스러져라 쥐는데, 금광요가 자기 손으로 내 손등을 덮었다. 그가 나직히 말했다.
-항상 고마워, 아헌.
아헌.
아헌. 그렇게 나를 부르는 건 이제 금광요뿐이었다.
시발. 금린대를 나서며 나는 좆같게도 뻥 뚫린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금린대 앞문으로 맹요를 업고 나온 게 벌써 십 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이었다. 금린대 뒷문으로 들락날락거린지도 마찬가지 십 년이 훨씬 넘었다. 품을 더듬거려 장죽을 꺼낸 나는 그것마저 금광요가 준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이마를 짚었었다.
그 뒤로 나는 기약 없이 쉬었다. 밀린 잠을 잤고, 수련을 했고, 야렵을 했다. 그러면서 여기 저기 방랑하다 보면 소문들이 들려왔다. 함광군과 삼독성수가 경쟁하듯 이릉노조 숭배자들을 쫓은지 벌써 십오 년이 다 되어가고, 수진계 감시탑의 숫자가 벌써 백이 넘었고, 감시탑 문제로 택무군과 염방존이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한지도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가고, 송람과 효성진의 족적이 끊긴 것도 그쯤 되었고 등등. 온약한 멱을 따자고 다 함께 모여 검을 치켜든 게 어제 같은데 그 어제가 너무나 아득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르는 거였으면, 잠도 한 번 잘 때마다 일 년 십 년 이렇게 자게 해주지. 예? 부처님아. 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디 이름 없는 객잔에 처박혀 자작하던 때였다. 옆자리 사람들의 대화가 문득 귀에 와 박혔다.
-일문삼부지 말이야. 어제 서른 다섯 됐다고 생일 잔치를 열더니, 느닷없이 주화입마가 왔는지 자기 형님 부르면서 쓰러졌다지 뭔가. 사람들 말로는 섭명결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굴었다는데……
-죽었어?
-아니, 그건 아니구. 다행인지 뭔지 금방 눈을 떴다네. 근데 어쩐지 사람이 더 맹해졌다는군.
-그게 말이 되나? 애초에 적봉존 주화입마 와서 간 거 보고 반쯤 넋나가서 종주 자리만 지키고 있었잖나. 미쳤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그거보다 더 멍청해졌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해? 섭명결도 분명 참다 참다 속 터져서 자기 동생을 잡으러 온 게 분명하네.
거기까지 듣고, 나는 텅 빈 술잔을 뒤집었다.
-때려치우자.
아마 그렇게 중얼거리며 담뱃불을 붙였던 것 같다.
금광요가 나를 부른 건 며칠 뒤였다. 몇 년간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얼굴로 그는 나를 웃으며 맞아주었다. 그에 비해 내 꼴은 아마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 금세 걱정이 서렸다.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그가 나를 불렀다.
-아헌.
-염방존.
-생각해보니까 이 질문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네. 너는 혼인 생각은 없어? 가정을 꾸리고, 어느 한 군데 정착할 생각 말이야.
나도 생각해본 지 한참 된 질문이었어서, 나는 질문한 당사자를 바라보며 잠시 넋이 빠져있었다. 금광요는 꽤 평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는 결혼했다 이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결혼생활이 평탄치 않았다는 걸 알기에 담담히 말했다.
-제가 홀몸인 게 염방존께는 더 편할 텐데요? 제가 그 질문 듣고 갑자기 맘먹으면 어쩌려고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물론 네가 혼자인 게 일 맡길 때 더 맘 편하긴 하지. 하지만 친구로선 아니야. 네가 기댈 데가 있으면 좋겠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부부라는 건...... 의지가 되거든.
그래서 너도 네 부인한테 의지하냐? 네 부인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던 금광요가 한숨을 쉬었다.
-걱정이야. 너도 그렇고, 회상도 그렇고.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나는 인상을 썼다.
-일문삼부지? 며칠 전에 자기 생일 잔치에서 주화입마 왔다던?
-주화입마는 아니었어. 허나 그 전조 증상 같아 보이기는 했지.
-잘 모르지만, 듣기로 수련 경지가 웬만한 십대 수사보다 낮다는데 주화입마가 가능해? 섭명결이야 그렇다 치는데 섭회상이라면...... 하긴 접싯물에도 코박고 죽는다니까.
속이 안 좋았다. 내가 중얼거리는 동안 금광요는 먼 곳을 보고 있다가, 말을 마치자 다시 나를 보았다.
-네 말대로야. 섭씨 도령은 변덕스러워서, 수련을 안 한다고 주화입마를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들어본 적 없는 것도 맞아. 그러니 아헌. 부탁이 있어.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나는 고민했다. 금광요의 입을 막을 것인가, 그의 부탁을 들을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선택할 기회는 사라져버렸다. 금광요가 말했다.
-부정세에 들어가서 회상을 좀 살펴봐 줘.
나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없이 눈을 깜박이며 서 있자, 금광요가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큰 형님이 돌아가신 뒤, 회상은 완전히 어린애가 됐고 청하 섭씨는 더 이상 전과 같은 명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됐어. 말만 사대세가일 뿐, 수사들이 많이 빠졌고 자연스레 활동도 줄었지. 너는 부정세에 들어가서 회상을 지켜봐주기만 하면 돼. 말했다시피 지금 청하는 거의 기사 상태에 가까우니 그곳에서의 수련이나 업무가 힘들진 않을 거야. 혹시 회상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부정세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지 그것만 봐 줘.
나는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한 말이었으나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섭회상과 청하 섭씨가 걱정되는 게 전부라면, 금광요 성격상 진작에 손을 썼을 것이고 또 나를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보내도 이런 식으로 보낼 게 아니라 자기 사람이라는 추천장을 써줬겠지. 나는 물었다.
-정말 지켜보기만 합니까?
금광요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롭니다.
말을 마치자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금광요였다.
-회상은 내 의동생이니,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부정세 사정을 자세히 알아봐 주면, 내가 회상을 도울 때 참고할 수 있겠지.
그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이상하게 최근 일인 데도 그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게.
갑작스레 말을 놓는 나를 금광요는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그는 이어진 내 말에 멈칫했다.
-근데 이 일 끝나면 쉬고 싶어.
-그야 당연하지.
-내 말은, 아주 오래 쉬고 싶다고. 네 말대로 혼인…… 혼인은 솔직히 늦었고, 그냥 애 기르고 하면서.
금광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 무표정이 무섭진 않았다. 그저 그 눈에 분명히 서린 상처를 보기 힘들어 두 눈을 감은 것뿐이다. 참아야 돼. 참아야 된다고. 그렇잖아. 이게 사는 거야? 너 진짜 평생 이렇게 살 거냐고?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침묵을 견뎠다.
-아헌.
눈을 떴을 때 금광요는 웃고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아오는 것을 나는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해. 나 네가 말했던 것 다 기억하고 있어. 언젠간 산 속에서 토끼 같은 남편 여우 같은 딸 얻고 조용히 살고 싶다며.
-너......
-넌 나중에 내가 찾아가면 차 한 잔 대접 안 해줄 거야?
그쯤 되어 나는 대화의 갈피를 잡았지만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금광요가 나를 놓아줄 리 없었다. 그러기엔 내가 금광요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지. 너무 깊게 발을 들였다. 금광요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품에서 장죽을 꺼내 불을 붙이며, 나는 다시 두 눈을 감았다.
-해 드려야지. 아주 가산을 다 팔아서라도.
금광요는 그거면 됐다는 듯 웃었다.
-응. 그러니 걱정 말고, 늘 하던 것처럼 해. 그리고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편히 쉬고 돌아와.
어디로, 금린대로? 아니면 너한테로? 그 질문을 하지는 못한 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금린대를 나왔다. 그리고 부정세로 향했다.
원래 여기까지가 한 편이었는데 좀 긴 것 같아서 잘라 올림
생각해보니까 진정령 ㅅㅍ 난백 ㅅㅍ
캐붕 같고 개연성 없는 것 같다면 너의 생각이 맏다......
내가 떠나지 않고 계속 집에 붙어있던 건 금광요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생을 마칠 때까지 나는 묵묵히 기다렸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뒤로 삼 년 좀 넘게 살았다. 그 동안 별일이 다 있었다. 금광요가 돌아가고 얼마 안 있어 이릉노조가 갑자기 궁기도에 있던 온씨 방계 일족을 난장강으로 데려갔고, 그 과정에서 금씨 수사 여럿을 죽인 것이다. 그리고 이 년 뒤 폭주한 위무선 손에 수진계 수사들 몇 천 명이 죽었다. 거기엔 금자헌과 금자훈이 포함되어있어서, 소식을 전해들은 뒤 어쩐지 난릉 금씨 수사로 있을 적 기억이 떠올라 감상이 묘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뭐 어쩌겠나, 사는 놈은 살고 죽는 놈은 죽는 거지. 어차피 다들 죽는데, 곱게 죽으면 그걸로 그냥 감사하는 거고 아니어도 진짜 뭐 어쩔 것인가.
할머니도 죽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폐병으로 죽은 건 아니었다. 죽기 전날까지 기침을 하긴 했지만 각혈은 증상에 없었으니까. 그냥...... 어느날 아침 눈 떴더니 기침 소리가 안 들리더라. 조용한 방 안에서 나는 잠시 동안 천장만 보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완전히 밝았을 때 즈음, 옆 이불에 누워있는 몸을 확인했다.
그게 끝이었다.
이 정도면 호상이지. 어언 십 년 간 약값을 보낸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할머니가 죽고 유품을 정리하던 차 벽장 한쪽에 무더기로 쌓인 은자가 보여 나는 허탈하게 웃어야 했다.
정말 끝까지.
산다는 건 도대체 뭘까. 할머니의 시신을 묻으며 나는 새삼 그런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남겨놓은 은자는 할머니와 함께 묻을까 하다가 돈 낭비 같아서, 그냥 마을 사람들에게 뿌렸다. 그러자 겨울임에도 분위기가 무척 훈훈해졌다. 마치 돈이 장작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돈으로 기름칠을 하기도 했고, 시체 썩을 걱정 없는 겨울이라 장례는 느긋하게 치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매장까지 다 마치고 나니 더 이상 내가 하동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나는 집을 그대로 내버려둔 뒤 밤에 조용히 떠났다. 뭐 이웃집이 무너뜨려서 쓰든 그대로 내버려둬서 썩든 어떻게든 될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곧바로 금린대로 가는 대신, 나는 남은 돈으로 딱 일 년 동안 유랑을 했다. 유랑이라 해봐야 여기 저기 야렵을 다닌 게 다였다. 머리가 다 안 자랐을 때부터 검으로 벌어먹고 살아왔더니, 벌어먹고 살 필요 없는 데도 자꾸만 검을 쓰게 되더라. 거물들은 선문세가에서 돈 받고 잡아주니, 나는 주로 소소한 요괴들을 잡고 감사 인사 듣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나같은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같은 목표물을 추적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그들은 꼭 내게 물었다.
-소협께서는 어디서 검을 배우셨는지요?
대충 자기들이 아는 가문 검법이 다 섞여있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임을 알아서,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 일개 객경에 불과하다고 짧게 답하곤 했다.
십 년 좀 안 되어 다시 밟게 된 금린대는 전보다 훨씬 화려했으나 어째 내부 분위기가 더 개판이었다. 금자헌이 죽고 몇 년 안 지났으니 당연히 분위기가 안 좋을 만 하지만, 그새 또 묘하게 인상이 달라진 금광요를 보면 뭔가 더 있는 듯했다.
-그래.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금광요는 나에게서 돌려받은 붓대롱을 매만지며 반쯤 혼잣말을 했다. 채광 좋은 금린대 아니랄까봐, 햇빛을 한몸에 받는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마르고 고요해보였다. 그가 물었다.
-제일 중요한 건 네 선택이지. 금린대에 들어오고 싶어?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금광요가 자기에게 내리쬐는 햇빛과 어울리지 않게 어슴푸레한 미소를 띄웠다.
-그럴 것 같았어. 그럼 이렇게 하자. 너는 금씨 사람은 아니지만, 내 사람이야. 공식적으로는 나와 아무 관계 없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객경과 비슷하다고 치자. 네가 원하는 곳에 집을 얻어. 내가 구해줄게. 그리고 내가 이따금 부탁을 하면 그 부탁을 들어주면 돼. 어때?
선문세가에서 보낸 시간이 헛되진 않아서, 나는 금광요가 금씨 바깥에서 자기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그 부탁이라는 게 어떤 건지 좀 더 구체적으로 여쭤볼 수 있을까요. 염방존. 제가 암살에는 소질도 없고 또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아서.
난릉 금씨 가문의 서자라곤 해도, 금광요는 이제 종주의 유일한 친아들이었다. 고고한 고소 남씨나 다들 단명하는 청하 섭씨라면 다를 수도 있지만, 금광요가 당시 앉아있던 그 자리는 황실을 방불케 하는 온갖 암투를 헤쳐나가야 겨우 현상 유지를 할 수 있는 그런 자리였다. 금광요의 손이 깨끗할 거란 기대는 애초에 안 했다. 바란다면 덜 더럽기를 바랐달까. 나를 놀란 듯 바라보던 금광요가 힘없이 웃었다.
-당연하지. 내가 너를 아는데, 그런 일을 시킬 리 있어? 사람 해치는 일은 절대 시키지 않을 거야.
-글쎄요. 저라고 사람을 안 죽여본 건 아니니까.
그렇게 대꾸하며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금광요는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다가 내 이름을 불렀다.
-헌.
-네?
-말 안 했었지?
-뭘......
-돌아가신 조모님의 명복을 빌어.
멈칫하던 나는 금광요에게 공수해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도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염방존. 혼인도, 득남도.
내 인사에 금광요가 정확히 어떤 얼굴을 했더라. 이상하게 그것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웃고 있었고, 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보이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에게 괜찮냐고 물어봤을 때, 그는 떨리는 입꼬리를 굳혔다. 그리고 내게 괜찮고 또 고맙다고 나지막히 답했다.
그 뒤로 나는 난릉 근처 최대한 집값이 싼 곳에 집을 얻었고, 곧 그게 잘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 내가 내 집에 머무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집안일을 하며 세간을 관리해줄 사람을 하나 고용했는데, 몇 년 지나고 나니 거의 내가 그녀 집에 신세지는 형국이 되었다.
아무튼 금광요는 나를 선문의 이곳 저곳에 파견했다. 객경이라기보다는 세작으로 써먹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나는 금광요가 보낸 세가의 수사로 활동하면서 그가 요구하는 정보들을 전해주었다.
사일지정을 용케 살아서 버텼다고는 해도, 그게 다였다. 나는 가문이 굴러가는 방식을 가문 내부에서 제대로 익힌 적도 없었고, 뒷배도 없으니 나 혼자 백날 수련해봐야 요직을 맡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사실 금광요가 돈을 내고 나를 교육시켜준 것이라고 봐야 했다. 그가 아니면 애초에 내가 어떻게 가문의 주요 문서들을 손에 잡아보았겠는가.
물론 금광요는 언젠가 그 비슷한 말을 하는 나를 붙잡고 다정하게도 말했다.
-그런 생각 하지 마. 헌아. 네가 실력이 없었으면 내가 애초에 너에게 일을 맡기지도 않았겠지. 그냥 너에게 돈만 안겨주면 되는걸.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고맙지만 재수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백 살 넘게 살 때까지 필요한 돈을 계산해도 금린대의 부에는 발끝만치도 못 미친다는 것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애초에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금광요의 말이 심히 간지럽다는 것이었다.
-넌 사일지정에서도 살아남았잖아.
-운이 좋았던 것뿐이죠, 염방존.
도무지 표정관리 되지 않는 내가 우스웠는지, 금광요가 묘한 미소를 짓더니,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다.
-정말,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
-네. 제가 아는 선문 명사들 다 개죽음당했는데요.
그나마 명문가 자제면 덜하지만, 받쳐줄 가문조차 없다면 유명세와 장수 둘 중 하나 선택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게 맞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금광요는 나직하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걱정이다.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재미있어서. 네가 한 만큼 내가 지불한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나도 일감 주는 입장에서 노력해볼게.
그 말을 듣고 나는 솔직히 좀 긴장했다. 그러나 금광요가 요구해온 정보는 거의 다 별거 아니었다. 나는 그냥 그에게 몇 주, 몇 달 단위로 그 세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만 하면 되었고, 그가 뭔가를 더 조사하거나 찾으라고 하면 그리하면 되었고,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하면 떠나면 되었다. 내가 떠난 가문이 금광요의 손에 멸문되었다거나 가세가 꺾였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으니, 나는 내 직업에 만족했다. 만족하지 않아도 별 수 없었다. 내가 지령을 받고 망설이면, 금광요가 예의 슬픈 얼굴로 그 일이 필요한 이유를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그러면 나는 결국...... 할 수밖에 없었다.
금광요는 똑똑했다. 아예 선을 넘는 부탁을 하면 내가 발을 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고, 나는 그런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내가 등신이지, 그냥. 그런 생각으로 혼자 독한 담배를 피우면서도, 금광요와 나는 단둘이 술잔을 기울일 정도로 잘 지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함께 대작할 때는 서로 반말하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서, 나는 술값은 누가 내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고 물처럼 술을 들이키곤 했다.
-너는 정말 재미있어.
-또 그 소리야?
내가 한 병 마시는 동안 한 잔 마시는 염방존께선 술 취한 내 얼굴을 자주 흥미로운 얼굴로 살펴보곤 했다. 나는 보고싶은 만큼 보라고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간 금광요가 겪은 일들이 꽤 많아서, 나는 만날 때마다 최대한 그의 비위를 맞춰주는 편이었다. 예컨대 그의 아들은 세 살 나이에 비운의 사고로 명을 달리했고, 그의 애비라는 작자는 얼마 안 가 그를 견제하려고 모현우라는 또 다른 사생아를 데려왔다.
금씨 내에서 그의 세력이 그리도 불안정하니, 사람들은 금광요를 존경하면서도 비웃었다. 그와 의형제를 맺은 적봉존도 난릉 금씨가 설양을 객경으로 받은 뒤 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어떻게 제정신으로 버티고 사냐는 내 질문에 금광요는 나지막히 웃더니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가.
-설양 말이야. 너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그렇게 묻는 금광요에게 손을 저어보였던 기억이 난다.
-몰라.
-모른다고?
-그래. 금광선이 설양을 살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네가 뭔가 할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아니지. 그런데 이렇게 물어보는 걸 보면 네 마음에 뭔가 걸리는 게 있냐? 응. 그래서 난 모르겠다.
말을 마친 뒤 현기증을 못 이기고 술상에 머리를 박았다. 금광요에게선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섭명결한텐 왜 그래?
-큰형님께, 내가 뭐?
-섭명결이 뭐 예쁘다고 그렇게 챙기고 다녀? 온 수진계에 소문 다 났더라. 네가 부인마냥 지극정성이라고.
그렇게 호구잡혀서 살지 말라고 일장 연설을 하다보면 머리 위로 웃음소리가 울렸다. 머리를 다독이는 손길을 느끼며 초점 없는 눈을 깜박이던 기억이 난다.
-헌아.
-응?
-우리 오래 보자.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또 제법 다정해서, 나는 술 깨는 티를 내지 않으려 몸을 웅크렸다.
-그래야지.
그때 이미 나는 그를 향한 막연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금광선이 얽힌 일이야 그렇다 치지만, 금여송의 죽음엔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좀 많았다. 금광요와 그가 추진하는 감시탑 건설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 갓난배기 아들을 납치해 죽이는건 대가리가 텅 비어있고 목숨이 별로 아깝지 않은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인데, 경험상 보통 그 두 개가 같이 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내가 차마 그런 의심을 구체화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금광요가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말이 되는데, 금광요가 죽이려면 금광선을 죽이지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왜 죽이겠는가. 돈도 많고, 안 가진 게 없는데 왜.
물론 돈 많다고 능사는 아닌 것을 나는 알았다. 너 혹시 이미 등선한 거 아니냐. 나는 금광요 앞에서 술에 취하면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겁 아니고서야 금광요의 기구한 인생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물론 이 세상에 비참한 인생이야 차고 넘치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좆같은 인생은 얼마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겁이라...... 나보단 아송의 인생이 더 겁에 가깝겠지.
그렇게 말하는 금광요는 그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특유의 보조개 움푹 패인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톡 치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넘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금광요를 향한 의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랬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얼마 뒤 금광선이 죽었을 때는 아예 금광요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금여송 대신 진작 그 새끼가 뒤졌어야 한 건데,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개새끼. 끝까지 그 새끼는 금광요의 어머니를 낙적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금광요를 선독이라, 염방존이라, 금종주라 불렀고 그야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내 맘 한 구석에서 그는 여전히 내 등에 업혔던 어린 맹요였다. 그가 모현우를 쫓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자기에게 반하는 가문을 간단히 멸문시켰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섭명결이 금린대에서 주화입마로 죽은 뒤 시체가 행방불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내가 침묵하고 그에 관해 더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마 그 때문이었다.
*
그쯤 되어 수진계를 뜨고 싶다는 생각이 무척 강렬히 일었다. 그동안 금광요는 내게 약속했던 대로 내 몸값을 후히 쳐줬고, 그 대신 점점 더 나를 빡세게 굴렸다. 나는 돈 쓸 일이 거의 없었기에 십 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돈이 내 곳간에 쌓여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 살지 모르는데 일을 관둘 수는 없었다. 금광요와의 계약을 관두는 게 수사로서의 생을 끝낸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었지만 유의어는 되었다. 염방존께서는 감시탑에 반대하는 가문 하나를 얼마 전 통째로 날려버리신 대단한 분이었으니까.
이러니, 나같은 가난뱅이한텐 금단맺고 수련하는 게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수명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노동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금광요가 나를 금린대로 부른 것은 섭명결이 죽고 팔 년쯤 지난 뒤의 일이었다. 팔 년이면 강산의 오분지사가 변하고도 넉넉히 남는 시간이니, 나는 금광요가 나를 소환한 게 청하 섭씨와 관련있으리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그때 나는 한참 동영에 나가 있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금광요가 내게 맡기는 임무들이 대체적으로 뜬금없긴 했지만, 동영 정찰을 부탁했을 때에는 어이가 없어서 왜냐는 질문도 안 나왔다. 법기나 영약, 가능하면 비급과 비곡집까지 쓸모 있을 만한 것들을 최대한 모아오고 거기 땅과 정세 좀 봐두라는 게 금광요의 요청이었다.
난 원래도 금광요에게 토달거나 따지는 일이 없었다. 금광요는 내 손에 무고한 피 안 묻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돈도 많이 줬고, 내가 그 외에 뭘 더 바라겠는가. 은원엔 큰 관심 없지만 배은망덕하지는 않아서, 난 금광요가 나를 아낀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이름도 바꿔 말하는 나같은 떠돌이 수사는 사실 고급 인력이었고,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게 목숨값이라는 게 문제지. 어느 가문 사람인지 유추할 수 없는 초식과 과거는 목숨을 걸 때만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이었다. 이게 자기 목숨만 건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보통 그런 수사는 암살 임무를 맡게 되는 게 현실이다. 그게 싫은 나를 배려해, 금광요는 내게 조사나 정찰 임무만을 주로 맡겼다. 게다가 그는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임무를 주로 맡겼는지라, 괜히 금광요 외의 다른 사람들과 더 교류하면서 힘 뺄 필요도 없었다.
즉 그는 흠잡을 데 없는 고용주였다. 그래서 그의 지시를 받자마자 나는 동영까지 배 타고 갔다. 물론 난 동영 말 하나도 모른다는 항변을 하긴 했지만, 여행 간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익히라는 그의 말에 더 할 말이 없었다. 가는 길 돌연 태풍이 치는 바람에 용왕님을 뵐 뻔 한 것도 있지만, 그것도 어떻게 용케 살아남았다.
동영에 도착해서도 나는 죽을 위기를 수 차례 겪었다. 대륙에 서른 해 가까이 살며 맞은 칼침 수보다 동영에서 오 년 살며 맞은 칼침 수가 더 많았다. 거기 살다보면 왜 전설 속 나쁜 놈들이 다 동영행인지 이해가 갔다. 섬이라 폐쇄적인 건 알겠고 아직 대륙의 수진계만큼 거대한 수행자 집단이 없다는 것도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쌈닭의 후예들인지 툭하면 검 뽑고 달려들더라. 쓰는 검법도 전혀 달라서 초반엔 막는 것도 힘들었다. 주술은 또 왜 그렇게 독한지. 조사해서 차곡차곡 모으면서도, 금광요가 이걸 대륙에서 대체 어떻게 써먹을 생각인걸까 심란할 때가 많았다.
물론 가서 새로 배운 것도 많았고, 좋은 기억도 없지 않았다. 새하얗고 나긋한 사람이 많은 것도 좋았지. 하지만 그뿐이어서, 굳이 내가 여기 와서 이 고생을 해야 할까 담배 말릴 때가 많았다. 술과 담배가 달고 맛있어서 버텼지 안 그랬으면 거기 오 년이나 못 있었다.
-살아서 돌아왔네?
그렇게 묻는 얼굴이 곱기는 또 오질나게 고와서 한 대 치지도 못하고. 용궁 보고 왔으니까 목숨값 쳐달라는 내 말에 금광요는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그에게 틈틈이 보내던 것 외에 따로 정리해둔 조사 자료를 건넸고, 그는 몇 시진 동안 그것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는 그 옆에서 그냥...... 술 마셨다.
그는 내 작업을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애초에 나는 그가 뭘 원했는지 몰랐기에, 그냥 그가 던지는 질문들에 대답이나 했다. 그러나 궁금함이 내 얼굴에 드러났던 모양인지, 금광요가 내게 넌지시 말했다.
-지금이야 수진계가 평화롭지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동영은 예로부터 멀고도 가까운 곳이니 미리 조사해 놓은 것뿐이야. 아헌 너는 거기 계속 머물 생각 없어?
잠깐 동안 나는 눈만 깜박였다. 얘 진짜 뭐지.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설마 그건가? 선문세가 내부를 더 건드릴 수는 없으니 앞으로는 무슨 일이 생기면 동영 이름을 팔려는 건가?
금광요라는 인간에게 정과 의리를 느끼는 것과 별개로, 나는 그가 얼마나 머리를 잘 굴리는지 알고 있었다. 머리를 잘 굴리는 게 아니면 운이 억수로 좋은 건데, 그는 수진계에서 가장 팔자 험한 사람 1위였으니 당연히 후자는 못 되었다. 불행이 금광요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그는 예쁜 미소를 지으며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다보니 그를 위협으로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그에게 유리하게 흐르고있었다. 그 사실에 대해 수진계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인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생각 없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관계를 생각하면 거의 주인과 가신에 가까웠다. 그는 내게 일을 시키고 돈을 주었지만, 그건 명분이었다. 그가 돈을 주지 않는대도 나는 금광요를 거절할 수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나는 아직 동영 물이 다 안 빠진 머리로 멍하니 생각했다. 그때 금광요가 내 어깨를 짚었다.
-네가 거기 있어주면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왜, 혹시 모르지. 네가 나를 배웅 나올 수도 있잖아.
술식이 엉켜 처음부터 다시 다 계산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초보 주술사처럼, 나는 금광요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내 얼굴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금광요의 입가가 약간 굳었다. 그는 우아한 손길로 내 어깨를 다독였다.
-지금 당장 동영으로 가서 살라는 건 아니야. 네가 어디서 살 건지,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지. 그냥...... 생각해 보라고. 우선은 푹 쉬어. 또 부를게.
그러더니 금광요는 나를 약하게 만드는 바로 그 외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금광요가 뒤 돌기 전에 그의 팔을 덥썩 붙잡았다.
-너 그러지 좀 마.
-뭐?
순수하게 놀란 듯한 금광요의 얼굴을 보자 속에서 울컥거리며 무언가가 새어나왔다.
-넌 염방존이고, 선독이고, 사람들 사이 평판도 좋잖아.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최악을 가정해? 그냥 금린대에서 평생 호화롭게 잘 살 생각만 해. 그럼 되잖아. 왜 네가 너를 자꾸 괴롭혀.
그건 내 진심이었다. 그러나 듣는 금광요도 말하는 나도, 그게 순진해빠진 소리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밑바닥에서 올라간 사람은 항상 더한 밑바닥에 처박힐지 모른다는 불안을 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형체없는 불안이 금광요가 이러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누가 자기에게 복수의 칼날을 간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음을 금광요는 알고 있었다. 항상 그런 눈빛이었다.
물론 금광요는 아버지보다 더 나은 아들로, 세상이 탄복하는 치정자로 평생을 살기 위해 뭐든 할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각본대로 완벽히 흘러가기엔 너무 길다는 것을 그도 나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기엔, 그는 이미 인과의 씨앗을 너무 많이 뿌렸다.
그래서? 나더러 또 네 밑바닥에 마중나와 달라고? 차마 그렇게 묻지는 못하고 감히 선독의 팔만 으스러져라 쥐는데, 금광요가 자기 손으로 내 손등을 덮었다. 그가 나직히 말했다.
-항상 고마워, 아헌.
아헌.
아헌. 그렇게 나를 부르는 건 이제 금광요뿐이었다.
시발. 금린대를 나서며 나는 좆같게도 뻥 뚫린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금린대 앞문으로 맹요를 업고 나온 게 벌써 십 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이었다. 금린대 뒷문으로 들락날락거린지도 마찬가지 십 년이 훨씬 넘었다. 품을 더듬거려 장죽을 꺼낸 나는 그것마저 금광요가 준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이마를 짚었었다.
그 뒤로 나는 기약 없이 쉬었다. 밀린 잠을 잤고, 수련을 했고, 야렵을 했다. 그러면서 여기 저기 방랑하다 보면 소문들이 들려왔다. 함광군과 삼독성수가 경쟁하듯 이릉노조 숭배자들을 쫓은지 벌써 십오 년이 다 되어가고, 수진계 감시탑의 숫자가 벌써 백이 넘었고, 감시탑 문제로 택무군과 염방존이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한지도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가고, 송람과 효성진의 족적이 끊긴 것도 그쯤 되었고 등등. 온약한 멱을 따자고 다 함께 모여 검을 치켜든 게 어제 같은데 그 어제가 너무나 아득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르는 거였으면, 잠도 한 번 잘 때마다 일 년 십 년 이렇게 자게 해주지. 예? 부처님아. 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디 이름 없는 객잔에 처박혀 자작하던 때였다. 옆자리 사람들의 대화가 문득 귀에 와 박혔다.
-일문삼부지 말이야. 어제 서른 다섯 됐다고 생일 잔치를 열더니, 느닷없이 주화입마가 왔는지 자기 형님 부르면서 쓰러졌다지 뭔가. 사람들 말로는 섭명결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굴었다는데……
-죽었어?
-아니, 그건 아니구. 다행인지 뭔지 금방 눈을 떴다네. 근데 어쩐지 사람이 더 맹해졌다는군.
-그게 말이 되나? 애초에 적봉존 주화입마 와서 간 거 보고 반쯤 넋나가서 종주 자리만 지키고 있었잖나. 미쳤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그거보다 더 멍청해졌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해? 섭명결도 분명 참다 참다 속 터져서 자기 동생을 잡으러 온 게 분명하네.
거기까지 듣고, 나는 텅 빈 술잔을 뒤집었다.
-때려치우자.
아마 그렇게 중얼거리며 담뱃불을 붙였던 것 같다.
금광요가 나를 부른 건 며칠 뒤였다. 몇 년간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얼굴로 그는 나를 웃으며 맞아주었다. 그에 비해 내 꼴은 아마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 금세 걱정이 서렸다.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그가 나를 불렀다.
-아헌.
-염방존.
-생각해보니까 이 질문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네. 너는 혼인 생각은 없어? 가정을 꾸리고, 어느 한 군데 정착할 생각 말이야.
나도 생각해본 지 한참 된 질문이었어서, 나는 질문한 당사자를 바라보며 잠시 넋이 빠져있었다. 금광요는 꽤 평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는 결혼했다 이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결혼생활이 평탄치 않았다는 걸 알기에 담담히 말했다.
-제가 홀몸인 게 염방존께는 더 편할 텐데요? 제가 그 질문 듣고 갑자기 맘먹으면 어쩌려고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물론 네가 혼자인 게 일 맡길 때 더 맘 편하긴 하지. 하지만 친구로선 아니야. 네가 기댈 데가 있으면 좋겠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부부라는 건...... 의지가 되거든.
그래서 너도 네 부인한테 의지하냐? 네 부인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던 금광요가 한숨을 쉬었다.
-걱정이야. 너도 그렇고, 회상도 그렇고.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나는 인상을 썼다.
-일문삼부지? 며칠 전에 자기 생일 잔치에서 주화입마 왔다던?
-주화입마는 아니었어. 허나 그 전조 증상 같아 보이기는 했지.
-잘 모르지만, 듣기로 수련 경지가 웬만한 십대 수사보다 낮다는데 주화입마가 가능해? 섭명결이야 그렇다 치는데 섭회상이라면...... 하긴 접싯물에도 코박고 죽는다니까.
속이 안 좋았다. 내가 중얼거리는 동안 금광요는 먼 곳을 보고 있다가, 말을 마치자 다시 나를 보았다.
-네 말대로야. 섭씨 도령은 변덕스러워서, 수련을 안 한다고 주화입마를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들어본 적 없는 것도 맞아. 그러니 아헌. 부탁이 있어.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나는 고민했다. 금광요의 입을 막을 것인가, 그의 부탁을 들을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선택할 기회는 사라져버렸다. 금광요가 말했다.
-부정세에 들어가서 회상을 좀 살펴봐 줘.
나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없이 눈을 깜박이며 서 있자, 금광요가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큰 형님이 돌아가신 뒤, 회상은 완전히 어린애가 됐고 청하 섭씨는 더 이상 전과 같은 명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됐어. 말만 사대세가일 뿐, 수사들이 많이 빠졌고 자연스레 활동도 줄었지. 너는 부정세에 들어가서 회상을 지켜봐주기만 하면 돼. 말했다시피 지금 청하는 거의 기사 상태에 가까우니 그곳에서의 수련이나 업무가 힘들진 않을 거야. 혹시 회상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부정세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지 그것만 봐 줘.
나는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한 말이었으나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섭회상과 청하 섭씨가 걱정되는 게 전부라면, 금광요 성격상 진작에 손을 썼을 것이고 또 나를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보내도 이런 식으로 보낼 게 아니라 자기 사람이라는 추천장을 써줬겠지. 나는 물었다.
-정말 지켜보기만 합니까?
금광요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롭니다.
말을 마치자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금광요였다.
-회상은 내 의동생이니,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부정세 사정을 자세히 알아봐 주면, 내가 회상을 도울 때 참고할 수 있겠지.
그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이상하게 최근 일인 데도 그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게.
갑작스레 말을 놓는 나를 금광요는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그는 이어진 내 말에 멈칫했다.
-근데 이 일 끝나면 쉬고 싶어.
-그야 당연하지.
-내 말은, 아주 오래 쉬고 싶다고. 네 말대로 혼인…… 혼인은 솔직히 늦었고, 그냥 애 기르고 하면서.
금광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 무표정이 무섭진 않았다. 그저 그 눈에 분명히 서린 상처를 보기 힘들어 두 눈을 감은 것뿐이다. 참아야 돼. 참아야 된다고. 그렇잖아. 이게 사는 거야? 너 진짜 평생 이렇게 살 거냐고?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침묵을 견뎠다.
-아헌.
눈을 떴을 때 금광요는 웃고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아오는 것을 나는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해. 나 네가 말했던 것 다 기억하고 있어. 언젠간 산 속에서 토끼 같은 남편 여우 같은 딸 얻고 조용히 살고 싶다며.
-너......
-넌 나중에 내가 찾아가면 차 한 잔 대접 안 해줄 거야?
그쯤 되어 나는 대화의 갈피를 잡았지만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금광요가 나를 놓아줄 리 없었다. 그러기엔 내가 금광요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지. 너무 깊게 발을 들였다. 금광요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품에서 장죽을 꺼내 불을 붙이며, 나는 다시 두 눈을 감았다.
-해 드려야지. 아주 가산을 다 팔아서라도.
금광요는 그거면 됐다는 듯 웃었다.
-응. 그러니 걱정 말고, 늘 하던 것처럼 해. 그리고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편히 쉬고 돌아와.
어디로, 금린대로? 아니면 너한테로? 그 질문을 하지는 못한 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금린대를 나왔다. 그리고 부정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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