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겁의 세월을 사는 동안 제가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대로 죽어버릴까 수십번을 생각했지만 이 목숨은 온객행이 준 것이라 쉽게 놓을 수도 없었지. 수천년을 살면서 그의 연인이 남겼던 물건들은 재가 되어 바스라졌으니 딱 하나 남아있는 건 그가 준 목숨뿐이니까. 저와 온객행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 온객행이 현세에 존재했었다는 증거. 보고픔에 지쳐 몇 백년 긴긴 잠으로 시간을 죽이다가 언젠가 딱 한번. 딱 한번 그의 연인이 꿈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깬 후에 깊은 상실감에 얼마나 몸서리쳤는지 몰라. 그 이후로 주자서는 잠자는것을 그만 두었어.

또다시 억겁의 세월이 흐르고, 수련을 거듭해 초월적인 존재가 된 주자서는 긴 시간을 살면서 인간사회에 적당히 스며드는 법을 배웠을거임. 그러다 오히려 평범한 생활보다 아예 대부호로 사는 것이 인간들과의 접촉을 덜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지. 근대에 다다렀을때는 이미 인간은 순수함을 잃어 무공과 강호라는 말 자체가 사라지게될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어. 현대에 와선 직업을 바꾸고 얼굴도 바꾸고 때에 따라서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며 생활했는데 어느날 강한 이끌림이 느껴졌어. 심장을 관통할 것 같은 떨림에 처음으로 거친 호흡을 내뱉었지. 드디어 그가 돌아온거야.

그가 현세에 돌아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어디서 볼수 있을까? 주자서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음. 억겁의 시간을 버텨왔는데 고작 몇년을 못 참겠어? 아직은 약한 기운이지만 마치 텔레파시처럼 저를 끌어당길거야.

그리고 결국 원점이지. 8년이었어. 그 옛날, 아주 까마득한 옛날 걸인으로 역용하던 시절 온객행과 처음 만났던 거리.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주점과 객잔이 있던 자리가 전부 높은 건물로 변한 그 곳.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기척으로도 알 수 있었지. 제 연인에 관한건 빠짐없이 기억하는 신선이니까. 저 멀리 그의 기척이 느껴져 심장이 빠르게 뛰고... 그리고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연인을 마주하게 되었어. 싱그럽고 위태로운, 갸날픈 내 연인. 8년만에 만난 내 아이. 전생의 업 때문인지 거리에서 생활하는, 소매치기의 특유의 두리번거는 눈빛이 제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지. 한 눈에 알 수있어. 그의 생이 고되다는 것을. 이번 생도 너는 평탄치 않은 삶을 사는구나.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한 저를 한번 쳐다보더니 길을 걷는 척 조금씩 가까워져오는데 도리어 웃음이 나오겠지. 드디어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어. 그리고 어두운 욕망도 새어나왔을거야. 이번생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일부러 아이에게 틈을 보였어.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척 한눈 팔고 있으니 아이가 다가와 조그만 손으로 지갑을 꺼내는걸 기척으로 느꼈지. 하얗고 여린 손이 옷깃을 스칠 때 그가 정말로 환생했다는 사실을 깨달고 그 기쁨에 얼마나 떨었던가. 언뜻 스친 그의 향이 갓 열매를 맺은, 과거의 연인과 똑같은 향이라 미칠 것만 같았어. 이번 생도 그는 음인으로 발현하게 될거야. 집착은 사람을 목적지향적으로 만들지. 골목길로 향하는 그를 따라가 손쉽게 의식을 빼앗은 뒤 제 차에 고이 눕혔지.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인간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조차 못할테고.


역시나 그는 깨어나자마자 낯선 환경에 겁먹은 듯 했지. 놀란 모습도 귀여운 나만의 연인. 몇시간이고 어린 연인의 잠든 모습을 사랑스럽게 지켜보다가 두려움에 떠는 아이를 안아 달래며 골목길에 쓰러져 있는 널 발견했다고 거짓말을 보태었어. 혹시 혼자 지내고 있니? 그렇다면 나와 같이 함께 살지 않으련?

이제 이 큰 집에서 혼자 살기 쓸쓸해서 그래.

아이는 경계하는 듯 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어.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세상을 알아 지친 것일지도 모르지. 댓가없는 친절은 경계할것 같으니 아이에겐 약간의 집안일을 돕게하여 그가 오래 머물 수 있는 구실을 만들었어. 제 품으로 돌아온 연인을 위한 것들을 마련했고 마지막 남은 것 하나. 이름.

그런데 네 이름은 뭐니?
어릴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이름이 없어요.

아마 소매치기 무리에서 불리는 이름이 있을텐데 불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어. 어짜피 그에게는 견연이나 온객행 외에 어울리지 않으니 잘 된일이야.

그렇다면 네 이름을 온객행이라고 지어야겠다.

온객행이요? 아이가 어딘가 그리운듯한 느낌으로 천천히 이름을 발음했어. 온객행. 이제 아이는, 비로소 나만의 온객행이 되어 내 삶에 머무르게 될거야.






그런데 왜 저는 아저씨와 같은 성씨가 아니에요?

아이는 배움이 짧을 뿐이지 영특한 이였어. 온객행으로 지내면서 저와 같은 성씨가 아닌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나봐. 오늘도 즐겁게 피아노를 치다가 달려와 제게 안긴 온객행이 물었지. 아버지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어떻게 불러야 해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후보를 세다 곧 저의 눈치를 보고 결국 아저씨라는 호칭을 쓰게 된지 약 1년. 올해로 아홉살이 된 온객행이 제 목에 팔을 감고 졸라댔어. 알려주세요. 전 아저씨 아들이 아닌거에요? 어린 연인을 안아 달래며 주자서는 쓰게 웃을 수 밖에 없었어. 처음부터 같은 성씨를 주지않는 이유는 명백했으나 겨우 말을 삼킬 수 밖에 없지.

그야 이 세상에 아비되는 자와 사랑을 나눌 이가 어디있겠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 너는 나만의 연인이니까.






자서객행 철한공준 자객비
파렴치 욕망 왕감자,,
2021.10.14 22: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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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센세 어찌 이리 맛난 것을 주시는지ㅠㅠ
[Code: 2ba4]
2021.10.14 23:0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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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나이에 찾아냈네 센세 세상에 너무 좋아서 심장 아파(*꒦ິ⌓꒦ີ)
[Code: bcaa]
2021.10.15 08:5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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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서 엄청 오래 기다렸다ㅠㅠ 객행이가 나중에 아버지라고 안 부르게 한 이유 알면 어떤 반응일까ㅋㅋㅋ
[Code: 98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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