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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01:00


실제로도 그런 삶을 살아오던 유안이 사랑에 눈이 멀어서 조금씩 무너지는 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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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텀을 가진 드라마 촬영 기간의 휴식기에 연극을 시도한 건 반쯤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촬영의 막바지 무렵, 동료배우들의 실력이나 모니터 너머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한창 끓어오를 무렵 에이전시에서 적절한 제안을 하기도 했고.
 

그래서 유안은 자신의 마지막 씬을 촬영한 날 곧바로 콘월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웨스트엔드 근처에 있다는 제작사와의 미팅을 위해서.

 

런던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유안은 에이전시가 전날 그에게 전달해준 몇 개의 각본을 읽고 있었다. ‘네가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봐. 아마 대부분은 네가 출연의사를 밝히면 무릎이라도 꿇고 좋아할 걸.’ 담당자의 말에 유안은 맥없이 웃고 말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본인의 인지도가 확실히 이전에 비해 많이 올라갔다는 걸 실감하곤 했다.

그러나 본인도 모르게 우쭐한 기분이 들기라도 하면 유안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 사람들은 유안 미첼이 아니라 그 드라마에 나온 그 배역으로 나를 더 익숙하게 생각할 거라고, 그들이 반기는 건 그 유명세일 거라고.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 건 어쩌면 그의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 탓인지도 몰랐다. 드라마 촬영장에서 친해진 중년 배우는 조심스러운 유안의 성정을 두고 신인 배우다운 정조라고 표현하며 웃었다. 명백하게 놀림이 섞인 말이긴 했지만 그다지 틀린 표현도 아니었다. 그는 배우로서 -지극히 사전적인 의미로- 순결하고 싶었다. 작품 밖에서도 이슈를 몰고 다니며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건 그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럴만한 성격도 못 되고.

 

아무튼. 영화나 드라마판에서야 잔뼈가 굵었다지만 연극은 커리어 초반 이후로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던 터라 일부러 대형 투자사가 낀 작품이 아닌 인디에 가까운 작품들을 골랐다는 말에 유안은 다시 한 번 자아를 공손하게 가다듬으며 신중히 활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하는 일이니만큼 부디 얻어갈 것들이 많기를 바라면서.

 


 

-

 


 

다섯 작품. 꼬박 이틀에 걸친 미팅 끝에 유안은 작품 하나를 골랐다. 작품의 제목은 타티아나. 유명 러시아 오페라 오네긴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해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연출가의 설명은 오히려 그가 썼다는 각본보다도 고루했지만, 유안은 각본 속에 묘사된 오네긴이라는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었다. 대체 무엇이 그 남자로 하여금 순수한 여인의 연정을 걸레짝으로 만들고, 친우를 제 손으로 죽이게 만들었으며, 세월 앞에서 빛을 바래기는 커녕 다른 이름으로 피어난 감정에 허덕이게 만들었는가.

 

 

“제가 가장 흥미로운 걸로 고르긴 했는데, 이미 유명한 작품이잖아요. 어쩌면 인디 연극이라는 메리트를 누리지 못하는 걸지도 몰라요.”

 

“뭐 어때? 좋게 생각해. 유명한 원작이 많으니 그만큼 캐릭터 빌드업은 탄탄하게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에이전시에서 유안을 담당하는 매니저 콜린은 일을 언제나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재치가 있었다. 업계에서 유안의 나이만큼이나 오래 일했다는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드라마틱한 배우들에게 반평생을 시달린 탓인지 연기니 삶이니 하는 것들에 반쯤은 무심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무책임한 낙관은 걱정이 많은 유안에게는 꽤 도움이 되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참고할 만한 작품이 많으니 네 역할을 연기하는 데 있어서 문제는 없을 거라고. 그 말을 듣자 유안은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되었고 연출가와의 미팅에서 오히려 얻게 된 불안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좋은 일- 혹은 흥미로운 일은 연이어 생겨났다.

 

 

[만나서 반가워요. 허니 비입니다.]

 

 

유안이 타티아나에 배우로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르는 번호로 문자 메시지가 왔다. 본인을 허니 비라고 밝힌 여자는 타티아나의 제작부 스태프로, 앞으로 그와 작품의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작가라기에는 각본과 거리를 두는 것도 같으면서 으레 연출이 하는 이야기들을 하기에 연출부 소속의 어떤 직군이라도 되는 것인가 하며 유안이 머릿속으로 직업의 명패들을 헤아리고 있을 때, 마치 그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여자에게서 메시지가 한 통 더 도착했다.

 

 

[아. 저는 드라마터그에요.]

 

 

생소한 이름이었다. 아니, 외국어가 주는 그 특유의 낯선 느낌이 되살아났다는 쪽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가 방송국 주관의 연기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할 때 들어본 적이 있는 직군이었다. 유안은 그녀에게 답장을 보내기 전 인터넷 창을 열어 드라마터그를 검색했다. 극작술을 연구하는 사람. 희곡 작품이 연극 무대에 올라가는 전 과정을 보조하는 사람. 웨스트엔드에도 이미 유명한 드라마터그들이 몇 명 있었고, 종종 극단에서는 그들을 예술감독이라는 이름으로 고용한다고도 써있었다. 극본이 공연화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퇴색되지 않게 노력한다는 말이 멋있으면서도 와닿지가 않아 유안은 답장을 뭐라고 써야할지 고민했다. 한참 자판 위를 떠돌던 그의 엄지손가락이 더듬더듬 말을 만들어갔다.

 

 

- 아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한숨이 나올만큼 재미없는 답장이다. 유안은 언제나 활달하고 유머러스한 배우만 있는 건 아니니까,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어쩐지 귀끝이 뜨거워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일이 조금 더 익숙해지고나면 조금 더 넉살좋은 반응을 할 수 있을까. 갓 스물을 넘겼을 땐 그러기를 바랐던 것도 같은데, 지금까지도 별로 변하는 것이 없는 걸 보면 숫기없는 것마저도 천성일지도 몰랐다.

 

다행히 허니 비는 그의 시들한 인사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제작팀원들에게 처음 인사를 하고 나면 공통적으로 보내는 안내사항과 참고작품 리스트가 있다며 양해를 구한 뒤에 누가봐도 복붙한 것처럼 보이는 장문의 메시지를 연달아 줄줄이 보냈다. 연출가가 집필을 할 때 참고했던 오페라 공연의 링크, 발레 공연 DVD 수록본, 오네긴의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에 대한 소소한 설명까지. 그래놓고는 받은 사람이 질색할 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어디까지나 이것들은 참고작품일 뿐이고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으니 미리 숙지할 필요는 없다는 친절한 사족이 뒤따라 붙었다. 유안은 그 사족이 어쩐지 만들어진 사회적인 다정함같아 입꼬리를 올려 조용히 웃었다. 설레발이긴 하지만, 허니 비라는 사람이 사실은 그다지 친절할 것 같지 않아서.
 

새로운 직장동료에게서 익숙한 무심함을 -유안은 콜린의 상시 반쯤 감긴 눈을 떠올렸다- 느낀 그는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그녀가 보내준 목록들을 훑었다. 그리고 오페라 공연 링크 중 하나를 눌렀을 때, 그 재생목록이 저작권 만료로 더 이상 송출되지 않는다는 안내문구를 읽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이걸 말을 해주는 게 좋을까. 어차피 꼭 봐야하는 것도 아니라는데 그냥 넘어가는 게 좋을까.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도 본인이 이 일에 진심이라는 걸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배우였다. 그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메시지를 보냈다.

 

 

- 07년도 메트로폴리탄 공연 링크가 만료되었다고 하는데요, 혹시 볼 수 있는 다른 곳이 있을까요?

 

 

답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죄송해요. 다른 곳에 영상이 올라와있는지는 조금 더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제게 공연 DVD가 있는데 가져다 드릴까요?]

 

 

문자 메시지는 이런 점이 문제였다. 지금 이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어떤 어투로 이런 말을 한 건지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맥락을 고려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유안은 문득 이 여자가 자신의 메시지에 당혹스러움을 느꼈을지 아니면 불쾌함을 느꼈을지 궁금했다. 어쩌면 흥미로움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추정컨대 그녀가 이런 리스트를 보냈을 때 링크를 하나하나 눌러보며 실제로 관련 내용을 미리 숙지한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다.

 

뭐라고 답장을 하는 게 좋을까. 유안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내용을 어떻게 하면 친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를 고민했다. 간단히 말을 하면 도리어 본인이 그녀를 귀찮게 여기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말을 고르게 됐다. 적절한 문장이 생각이 안 나 고민하기를 한참, 결국 유안이 고른 것은 적당한 핑계였다.

 

 

- 번거로우시겠지만 그럼 다음 미팅 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 전까지는 다른 영상을 보는 걸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다음 미팅, 그러니까 연극에 참여하기로 한 제작진이 전부 모이는 자리까지는 어차피 사흘 정도만 남은 시점이었다. 이만하면 작품에 관심이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도 적절하게 호의를 받아들이는 듯한 대답이 됐을 거라고 생각하며 유안은 안심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의 답장은 신속했다.

 

 

[그럼요.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낯선 사람들과 마주하는 건 언제나 긴장되는 법이다. 유안은 새로운 인연을 쌓는 것이 스스로 성장하는 기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첫 미팅 날이면 배가 뒤틀리는 듯한 감각을 느끼곤 했다.

 

연습실이 딸린 제작사 지하주차장에 도착하고서도 유안이 미적거리며 내릴 생각을 하지 않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콜린이 슬쩍 룸미러로 그를 살폈다.

 

 

“속이 안 좋아?”

 

“조금요. 그런데 괜찮아요. 조금만 있다가 내릴게요.”

 

“그래, 뭐. 어차피 일찍 도착하기도 했고.”

 

 

공식 스케줄보다 한 시간 가량 일찍 도착하는 건 유안의 몇 안 되는 고집 중 하나다. 몇 년 전, 런던에 상경한지 얼마 되지 않아 끔찍한 교통체증을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심지어 그때는 콜린이 배정되지 않아 대중교통으로 이동을 하던 시기였다- 유안이 미팅자리에 지각을 했을 때, 까마득한 선임 배우 중 한 명이 농담 삼아 ‘주인공은 언제나 늦는 법이지’ 하고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서였다. 유안은 그런 걸 유독 못 견뎌했다. 으레 할 수 있는 말이고 오히려 그런 변죽이 분위기를 풀어줄 수 있다는 걸 알아도 그 대상이 본인이 되면 죽을 죄를 진 것마냥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이번에도 유안은 소집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을 한 참이었다.

 

연극 쪽 사람들은 드라마나 영화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경계한다던데, 나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를 알아보기는 할까. 어쨌든 연출가는 나를 마음에 들어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괜찮을 거야. 어쨌든 나는 나답게 있으면 돼. 스스로를 다독이는 건지 아니면 타이르는 건지 모를 생각들을 차례대로 곱씹은 유안은 마침내 버릇처럼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의 화면을 닫고 차 문을 열었다.

 

 

“다녀올게요.”

 

 

지하주차장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으로 간 유안이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사이에 작은 소형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혹시 같은 팀인가.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무렵 운전석이 열리는 것을 보며 유안은 망설이다가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모자를 눌러쓴 여자는 아직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헐레벌떡 그를 향해 뛰어왔다. 여자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녀의 열린 크로스백에서 종이뭉치들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들썩였고, 유안은 그 모습이 퍽 불안했다.

 

우려와 달리 종이 한 장 떨어뜨리는 일 없이 무사히 엘리베이터에 당도한 여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유안도 그녀를 따라 미소지으며 다행이네요, 하고 작게 인사를 돌려주었고. 이제 약속된 사회적 합의에 따라 두 사람은 정면을 바라보며 어색한 침묵 속에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여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모자를 살짝 뒤로 젖히고, 유안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유안은 그 표정을 잘 알았다.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종종 그런 표정을 짓고는 했으니까.

 

 

“일찍 오셨네요?”

 

 

여자가 종이가 가득 들어찬 가방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더니 곧 무언가를 꺼내서 유안에게 내밀었다. 오페라 공연 DVD였다. 그제야 유안은 눈앞의 여자가 허니 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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