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42304765
view 10255
2023.05.11 23:08
오질 말 것을 그랬나.
선문 백가 중에서도 핵심 인물들만 모이는 종주회에,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강징은 후회하며 산길을 올랐다.
하필이면 다른 곳도 아닌 그의 본진, 운심부지처.
잠시 멈추어 짙푸른 녹음 사이에 묻혀 있는 선부를 바라보자, 이 곳에서도 참 많은 일을 겪었다 싶었다.

“어서 오십시오.”
강징은 평소의 오만하고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그러나 남희신은 여상하게 인삿말을 건넸다. 부드러운 그의 얼굴에는 우려했던 경멸이나 부자연스러운 벽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징도 익히 아는, 누구나 알고 있는 택무군의 모습이었다.
강징은 안도하는 한편으로는 허전한 마음을 안고 대청으로 들어섰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강징의 상념은 저 먼 곳을 떠돌고 있었다. 절대로 남희신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그야말로 온 신경이 그에게 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말로 알고 싶었다. 미칠 듯한 연심 때문만은 아니다. 남희신의 그런 일면을 본 것이 너무 충격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아도 강징은 자신이 후회를 해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주워담기를 거부한 것도 자신이었다.
족히 이십여년을 알아온 사람이 별안간 가슴 속 깊이 꽂혀, 어쩔 줄 모르고 앓아왔던 게 지난 1년 가량의 일.
위무선처럼 눈 감고 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면 묻을 수도 있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와 동등한 지위에 몸담고 있는 그를 강징은 시도 때도 없이 만나야 했고, 만나기만 하면 애써 꺼뜨렸다고 생각했던 불씨에 불이 붙어 타오르곤 했다.
결국에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정도로 절박해서였다. 이대로는 개인적인 삶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지위며 본분까지 망쳐버리고 말 것 같아서.
물론 당연히 거절당할 거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거절을 통해 이 마음을 꺾기 위함이었다. 
남희신을 방문하면서, 강징은 방어적인 마음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하나에서 열까지 세고 있었다. 
아무리 온화한 그라도 다소 거리끼는 표정은 막지 못하겠지. 그래도 언제나 그래왔듯 심히 동요하지는 않으며, 정중하게 거절할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심장이 터질듯 두근거렸던 강징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미안합니다만, 당신과 저는 합이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남희신이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던가? 아무리 그라도 역시 불쾌했던가. 얻어맞은 듯 당황한 강징에게 그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여유있는 척을 하고 있지만, 사실 저는 그렇게 느긋한 사람이 아닙니다. 착한 사람도, 따뜻한 사람도 아닙니다. 
...살아오며 겪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 때문이 아니라, 제가 본디 강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만 강종주, 저는 지쳐버렸습니다. 그러니 정인 같은 건 바라지도 않지만, 만약 생긴다 해도 이따위 삭막한 심성을 달래주고 의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남희신이 제 마음을 받아들이는 기행을 저질렀다 해도 이보다 놀랍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강징의 놀란 시선을 맞받아보는 남희신의 눈빛은 직선적이었고, 서늘하고, 표정은 굳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 상상조차 못해본 쌀쌀맞고 날것 그대로의 발언들.
게다가 강징이 소매 속에 숨기고 있던 약을 쥔 손가락을 가늘게 떨자, 그가 가볍게 콧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명단초입니까? 단기간 동안의 기억을 상실하도록 만드는 약재.”
그 말에 강징은 더욱 놀라며 소매를 등 뒤로 말아 감추었다. 
이 또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강징은 남희신이 거절하자마자 차에 약을 타서 그의 기억을 깡그리 지워버릴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쉽게 간파했을 뿐 아니라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종주. 그 정도로 겁쟁이신줄은 몰랐는데요.”
지독하게 꼬집어 말하는 독설.
강징은 물론 창피한 감정을 느꼈다.
같은 사내에게 연정을 고백하는 수치심, 게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충격.
그라면 부드럽게 거절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그의 기억을 지울 거라 해도 감히 고백할 용기는 못 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멸차게 거절을 당한 뒤에도 놀라움이 수치심을 압도했다.
“저에게 거절을 당하면 약을 먹일 셈이었군요.”
“......”
“궁금합니다만, 제가 받아들일 경우도 고려하셨던가요?”
강징은 이를 악물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잠시 눈을 내리깔았던 남희신이 이내 소매를 받치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기억을 잃어버리길 원하신다면, 기꺼이 먹어드리지요.”
그러나 강징은 이상한 눈빛으로 그의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남희신의 손은 피부빛과 마찬가지로 희고 손가락이 아름다웠다. 그러면서도 사내답게 크고 마디가 시원스러운 매력적인 손이었다. 이어서 겁도 없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강징의 눈빛은 이제까지와는 색다른 흥분으로 젖어 있었다.
남희신의 얼굴은 표정이 강해지자 짙은 눈썹이 두드러져 보였고 눈매도 무척이나 독해 보였다.
마치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 것 같았다. 수십년간 한결같은 모습만 보아왔던 강징으로서는 괴리감을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의문이 든 것이다.
그의 이런 얼굴을 본 사람이 또 있었을까, 하는.
고소 남씨는 매우 절제된 행동을 강요하는 가문이다. 어쩌면 그의 가족들도, 지기조차도 본 적이 없는 건 아닐지...?
만약 내가 강한 척 버텨왔던 것처럼 당신도 그리해 온 거라면, 딱딱하게 웅크린 그와 같은 무표정을 대체 누가 파내어 보았을까.
명경지수처럼 흔들림 없고 강한 당신이 사실은 힘들고 지쳤다는 얘기를, 또 누구에게 했을까.
마침내 강징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남희신이 같은 사내라는 이유로 거절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강징이 깨달은 것은 홀린 듯 연화오로 돌아오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조금 어수선했다.
이 일이라면 아마 삼독성수가 서슬이 퍼래서 덤벼들겠거니, 모두들 같은 예상으로 긴장하고 있는데 그는 석상처럼 앉은 채 말이 없었다. 혹은 참고 있다가 단번에 터뜨리려는 건 아닐까? 사람들은 눈치를 보면서도 저마다의 이득을 다투는데 최선을 다했다.
고소 남씨는 겉보기 추한 입씨름은 일삼지 않기에 남희신은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강징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절대로 이 편을 보지 않으니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는 것 같다. 지나치게 말이 없긴 하지만, 평소처럼 시무룩하니 심기가 불편한 듯 보이는 정도였고. 미세한 동요는 그의 비밀을 아는 남희신만이 알까말까했다.
분명 상처를 받았겠지. 계속 내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하지만 내내 상대를 생각해 왔던 건 남희신도 마찬가지였다.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친하지도 않았던 사람을 상대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소리를 길게 늘어놓고. 속을 다 뒤집어 보여주었다.
단지 한 마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만 하면 충분했을 것을.
아니면 그가 지니고 있던 약을 먹어버리는 것도 괜찮았을 터인데.
관음묘 사건 후, 남희신은 폐관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몇 년 동안이나 반복했었다. 사람들 앞에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 것도 이제 1년이나 될까말까 한 일이었다.
강징에게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정말로 지친 상태였다.
세상은 다시금 평화로운 상태로 되돌아갔지만 남희신은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연인도, 부인도 없는 그에게서 몇 안 되는 지기들이, 그것도 더없이 흉한 이유로 다 떠나가버렸다.
남희신은 가슴이 답답해질 때면 감정을 숨기기 위해 습관적으로 떠올리는 미소를 머금고 찻잔을 쓰다듬었다.
금광요가 죽었으니, 이제는 자신의 미소에 공허함이 어린다 해도.
알아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