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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1 05:24
bgsd 어나더 3나더
스즈키가 마치다를 찾아낸 건 네 번째 바에서였다. 마치다는 카운터석에 앉아 있었다. 스즈키가 마치다의 옆에 가서 앉자 마치다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잔에 든 위스키를 비워 버리더니 빈 크리스털 잔을 살짝 위로 들었다. 바텐더가 조용히 다가오자 마치다는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잔 더."
스즈키는 잔을 가져가는 바텐더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은 걸로."
이 조직에서는 몇 년 전 확실히 폭스가 속한 팀을 전부 괴멸시키려고 했었다. 목숨을 걸고 폭스를 살려보낸 팀원들 덕분에 폭스는 무사했지만, 그때 그 팀을 전멸시키려 했던 작자들은 여전히 폭스까지도 전부 제거하려고 하고 있다. 대체 왜? 아직도 대체 왜 그 팀을, 그리고 폭스를 제거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헬폭스의 잠입 작전 때 신입만 주구장창 붙이는 건 그때처럼 지령실의 작은 실수가 큰 일을 만들어내 헬폭스를 그때 그의 팀처럼 전멸시키려 하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쪽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폭스까지 없애 버리려고. 이렇게 직접으로 손을 쓰는 것까지 꺼리지 않는 걸 보면 분명히 그 팀과 폭스를 없애려 하는 게 한둘이 아니거나 조직 내부에 이들의 악독한 시도를 알고 덮어주는 자까지 있다는 이야기리라. 하지만 조직 수뇌부일 리는 없었다. 조직 수뇌부에서 헬폭스 같은 유능한 인력을 제거할 이유도 없고, 제거하고자 한다고 해도 비밀 엄수만 약속받고 손을 털... 아닌가.
헬폭스는 팀원들이 전멸했는데도 조직을 나가지 않고 팀원들이 고심해서 붙여줬다고 좋아했던 코드명인 폭스 앞에 헬을 붙일 때부터 이미 팀원들의 복수를 꿈꾸고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나가라도 한다고 해도 순순히 나갈 리가 없으니... 설마 조직 수뇌부에서 헬폭스를 제거하려는 건가. 아니... 그럼 사고인 척 은밀히 제거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제거해 버리면 되잖아. 지금 헬폭스를 죽이려는 자들이 말도 안 되는 위험한 작전들을 헬폭스에게 배치해서 헬폭스를 없애려 하는 건 대놓고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직 수뇌부라면 번거롭게 남들의 손을 빌릴 이유가 없으니... 역시 조직 내부에 다른 마음을 품은 자들이 있어. 대체 뭐지.
아무것도 모르고 여전히 저를 죽이려 하는 조직에서 목숨 걸고 일하는 있는 이가 평소처럼 맹한 얼굴로 - 마치다 케이타가 맹한 표정이나 짓고 다니는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안다. 누가 봐도 맹한 표정이 아니라 찬바람 쌩쌩 날리는 살벌한 얼굴이라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다. 다만 조직에서 자기를 죽이려 하는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화가 나서 스즈키의 눈에나 맹하게 보이는 것뿐- 아무튼 맹한 얼굴로 술이나 마시고 있는 걸 보니 속이 뒤틀려서인지, 오후에 그 지령실에 들어갔을 때부터 내내 감정이 온통 휘저어 있었기 때문인지 같은 걸로 한 잔 달라는 짧은 말을 하는데도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더 까칠하게 나왔다.
상태가 꽤나 이상하긴 했는지 평소에는 스즈키가 무슨 짓을 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마치다도 흘긋 스즈키를 돌아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즈키는 바텐더가 금방 내어 준 위스키를 한 번에 비워 타는 속을 잠재우려 했지만 속은 진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독한 알코올에 목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미간을 찌푸리자 마치다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쳐다보고 있다가 툭 내뱉었다.
"버번 아닌데?"
"...그러네요."
스즈키는 바텐더에게 한잔을 더 요청했다. 마치다의 말대로 오늘은 버번이 아니라 스카치 위스키였다. 마치다에게 가슴이 찢어지는 기억을 또 되살려준 애송이 요원 때문에 속이 진탕이 되고, 자신을 아껴주던 팀원들이 모두 죽어나가는 걸 봤어야 했을 그를, 팀장과 팀원들이 소중히 아끼던 막내라고 마치다만은 어떻게든 살려서 내보내려 했다던데, 그 와중에도 혼자 나갈 수 없다고 팀원들에게 맞서고 반항하다 결국 혼자 밀려나서 살아남았다는 그를 생각하니 가슴에 열불이 나고, 폐광이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는데도 손가락 끝이 전부 피로 물들여가는 것도 모르고 맨손으로 흙을 파내며 팀원들을 꺼내려 하고 있는 걸 조직에서 파견한 다른 요원들이 기절시켜서 끌고왔다는, 검은 잠입복이 온통 피범벅이 된 채로 본부로 끌려와서 지령실을 개박살 냈다던 그를 생각하니 또 가슴이 무너져서 술이 계속 들어갔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놓고도 아직도 마치다를, 헬폭스를 죽이려 하는 이들을 생각하니 더더욱 속이 진탕이 돼서. 스즈키는 술이 센 편이 아니라서 마치다를 만날 때도 늘 두세 잔 정도만 마셨는데 마음이 흐트러지니 술이 계속 들어갔다.
우리 여우 녀석은 술을 마셔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데 취하기는 또 금방 취하거든. 또랑또랑한 눈 멀쩡한 얼굴을 하고 말도 안 되는 주정 부릴 때 얼마나 귀여운데.
그의 팀장이었던 아저씨는 그러면서 웃었는데 스즈키가 만난 마치다는 한 번도 취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늘 술을 마셔대고 담배를 피워댔다.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싸늘하고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작정한 듯 건강을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망치려고 들었다. 그를 아껴주던 이들이 다 죽었는데 혼자서만 멀쩡히 잘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밥 먹으러 갑시다."
"배 안 고픈데."
"먹어줘요."
"..."
"스페인 요리 어때요? 좋아해요?"
왜 아저씨는 좋아하는 요리 같은 것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스즈키가 '우리 여우'랑 친해졌으면 좋겠다고 했으면서. 가만히 있으면 엄청 냉정하고 완벽주의자처럼 보이는데 알고 보면 허술한 녀석이라든가 그런 말 같은 거 하지 말고, 몸 쓰는 걸 잘해서 춤은 제법 추는데 노래는 못 부른다든가 그런 말 같은 거 하지 말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쉴 때는 뭘 하면 푹 쉴 수 있는지 그런 거나 말해 주지. 지금 나 좀 봐요. 가르쳐준 게 치즈케이크밖에 없어서 주구장창 치즈케이크만 먹이고 있잖아요.
"..."
"근처에 스페인요리 전문 레스토랑이 있는데 괜찮대요. 같이 가요."
"너..."
"네?"
"상태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들어가."
"당신이 밥 같이 먹어주면 상태 좋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가요."
마치다는 평소보다 예민하고 피곤해 보이는 스즈키가 신경 쓰이는지 더 투덜거리지 않고 따라왔고, 스즈키가 안내한 스페인요리 전문점에서 여러 가지 해산물 요리도 군말없이 먹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무인 호텔에 함께 들었으나 마치다는 평소처럼 거칠게 날뛰지 못했다. 평소엔 마치다가 멋대로 거칠게 굴어도 맞춰주던 스즈키가 오늘은 마치다가 뭘 해 볼 틈도 주지 않고 마치다를 찍어누르고 박아댔으니까. 마치다가 힘들어하는 게 보이는데도 어쩐지 속이 계속 울컥울컥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사방이 적으로 가득한 곳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 목숨을 걸고 임무를 해치우고 목숨을 걸고 탈출하던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건물 3층에서 뛰어내리던 모습이나 실탄이 들어 있는 총을 들고 순찰을 하는 경비 직원들이 지나가는 복도의 틈새에서 총을 꺼내들고 숨죽여 숨어 있던 모습이 떠오르고 높이가 20m가 넘는 건물의 옥상에서 다른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내리던 모습이 떠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
그래도 최근엔 이 몸에 흉터를 더 생기는 일은 없었지만 몇 년 전에는 크게 다치는 일도 몇 번이나 있었다.
폭스의 팀이 괴멸당했을 때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돌아오기도 했다지.
그 세월을 살아오며 몸에 남은 흉터들이 스즈키의 눈 앞에 훤히 드러나 있어서 더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계속 사납게 굴었는데 마치다는 반항도 하지 않고 맞춰줬다. 그리고 안 그래도 흉터가 많은 마치다의 몸이 엉망진창이 된 후에야 스즈키가 마치다의 몸 위로 털썩 쓰러지자 한동안 얌전히 깔려 있던 마치다가 스즈키의 어깨를 쿡 밀었다.
"무겁다."
"... 미안해요."
스즈키가 옆으로 내려가 눕자 마치다는 후들거리는 팔을 들어서 제 이마에 손을 얹었다. 마치다의 손목에는 스즈키가 꽉 누르며 잡는 동안 생긴 새빨간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미쳤네. 스즈키 노부유키. 아주 돌았지, 니가.
"정말 미안해요."
"...됐어."
마치다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하다가 입을 다물고 그냥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스즈키가 놀라서 내려다보자 다리가 후들거려서 넘어졌는지 다시 일어서려던 마치다가 다시 또 주저앉아버려서 노부는 얼른 마치다를 부축해 침대에 앉혔다.
"욕조에 물 받아놓고 올 테니까 기다려요."
"필요없어."
"그 다리로 샤워도 못하겠는데 왜 또 고집을 부려요? 물 받아놓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마치다는 대답없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물을 받는 동안 스즈키가 먼저 샤워를 하고 나와서 보니 마치다는 그대로 누워 있었지만 자고 있는 건가 해서 다가가니 바로 눈을 뜨고 스즈키를 올려다봤다. 아주 그냥 눈에 살기가 가득하네. 스즈키가 욕실로 가려는 마치다를 안고 일어서자 마치다는 스즈키를 흘긋 노려봤지만 아무 말도 없었다.
거참 걷기 편하게 목이라도 안아주지. 뻣뻣한 거 봐. 조금 전까지는 노부의 등을 죄 긁어놓으면서 매달렸으면서.
욕실 안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미끄러지기라도 했다가는 대형사고일 게 뻔해서 꺼지라고 쏘아 붙이는 마치다를 끌어안고 욕조에 들어가 있었다. 원래도 마치다도 스즈키도 함께 호텔에 들어오고 나면 몸이 얼룩덜룩해졌지만 오늘은 스즈키가 이성을 잃었기 때문에 마치다의 몸이 더 엉망진창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즈키가 하도 씹어놓고 온몸에 시퍼런 멍과 새빨간 손자국들을 남겨놔서 마치다의 온몸에 새겨져 있는 흉터들이 안 보인 덕분에 들끓던 마음은 조금 가라앉았다. 평소처럼 혼자 씻게 해 주지 않고 욕실까지 따라들어온 스즈키가 귀찮았는지 씻는 내내 얼굴이 서늘하던 (물론 원래도 서늘하다) 마치다는 따뜻한 물에 한참 몸을 푹 담근 덕분인지 볼이 빨개져서 평소와 달리 살아 있는 사람 같아 보이는 것도 위안이었다.
그렇게 곱게 씻겨서 데리고 나오자 다리에 힘이 좀 돌아왔는지 비틀거리면서도 옷을 껴입은 마치다는 그대로 나가려는 듯 하다가 스즈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폰."
"내 폰이요?"
"그래, 네 폰."
스즈키가 잠금을 풀고 마치다의 손에 폰을 올려주자, 마치다는 화면을 몇 번 톡톡톡 두드리더니 돌려줬다. 폰 화면에는 '사토'라는 흔한 성과 함께 휴대전화 번호가 저장돼 있었다.
"... 당신 번호예요?"
"네가 전화한다고 항상 내가 바로 나올 거라는 말은 아니야. 전화를 반드시 받을 거라는 말도 물론 아니고. 문자 같은 거에 답할 생각도 없어."
"..."
"그래도 사람을 이렇게 너덜너덜하게 만들 정도일 때까지 쌓아두는 것보단 낫겠지."
스즈키가 피식 웃자 마치다는 평소처럼 '간다'라고 내뱉듯이 말하고는 휙 돌아서 나갔다. 스즈키는 창가로 다가가서 마치다가 나오는 모습을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봤다. 이 조직의 요원들 신상은 기밀 중의 기밀이다. 하지만 그때 아저씨는 노부가 1년만 더 훈련을 받으면 바로 본인의 팀으로 데려갈 생각이었고, 스즈키는 보육원에 있을 때부터 아저씨와 아저씨의 팀원들 몇 명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저씨는 스즈키에게 팀원들의 이름도 다 알려줬었다. 콜사인만이 아닌 본명도. 그때 그 팀에 사토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흔한 성이지만 마치다에게 이제 떠올리기만 해도 아픈 존재가 돼 버린, 그에게 목숨처럼 소중했던 그리고 이제는 목숨보다 더 소중해진 이들을 떠올리게는 하지 않는 성을 고른 건가.
사토 좋아하네.
스즈키는 창 밖으로 마치다의 모습이 보이자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입력했다.
- 조심해서 들어가요.
마치다는 폰을 꺼내서 확인하긴 했지만 여전히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사라져 버렸다.
매정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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