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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5 23:27

날조주의

 

1

 

 

 

 

 

 

남자, 그러니까 루디는 허드너에게 꾸준히 인사를 건넸다. 허드너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고 자신을 꺼는 것을 알면서도 눈이 마주치면 손을 까딱여 인사를 건넸다. 어떤 때에는 소리를 내어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콜사인으로 불리는 것이 익숙한 허드너로써는, 그의 다정하고도 낮은 음색이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영화 제작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것처럼, 그는 부지런하면서도 자유로워 보였다. 군인과는 정반대에 놓여있는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보편적인 여느 예술인과는 달랐다. 담배를 피우기는 했으나 대마초는 하지 않았고, 술을 즐기기는 했으나 매 순간 취해있지는 않았다. 사람들 대하는 것에 있어 모난 대신 카리스마가 있었다. 때때로 그는 예술가 보다는 큰 공장을 거느린 사업가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아무튼,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저 사람은 언제 돌아갈 생각이래?"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왜?"

 

"그냥. 민간인이 이런 곳에 오래 있어봐야 좋을 건 없으니까."

 

 

진심이었다. 허드너는 실로 그랬다. 그가 떠났으면 하는 이유가 몇 가지 더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알버트 루디는 민간인이었고, 그가 카메라를 들고 선 이곳은 폭풍의 눈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을 꼭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공습이 휩쓸고 지나간 진주만에 다시금 찾아온 평화는 더 큰 폭풍의 전야에 불과할 뿐이었다. 또한 가라앉지 않은 돌풍은 여전히 태평양 곳곳에 불어닥치고 있었다.

 

전쟁은 이제 더 이상 대서양 건너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에 따라 하와이 제도는 최전선이 되었고, 절대로 무너져서는 안 되는 고지가 되었다. 그들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몰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무엇이 먼저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이란 본래 그런 것이었다.

 

 

"잘 다녀왔어요?"

 

 

루디가 제 조수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카메라를 두고 홀로 걸어오며 묻는다. 레이는 어느새 자리를 뜨고 없었다.

 

 

"그래요."

 

 

당신도 잘 지냈냐는 질문은 굳이 던지지 않는다. 그가 다가오는 게 부담스럽다. 껄끄럽고, 불편할 뿐이다.

 

 

"별 일은 없었죠?"

 

 

허드너는 잠깐 말을 고른다. 편한 거짓과 불편한 진실. 이 남자에게 굳이 불편한 진실을 알리며 대화를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항상 그렇죠."

 

 

그래서 허드너는 늘 거짓을 말한다. 바다 위에서, 또 하늘 위에서,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항상?"

 

 

루디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는다. 그의 손길이 허드너의 눈썹 위를 스치고, 아릿한 통증이 머리를 울린다.

 

 

"항상 이렇게 다쳐요?"

 

 

그가 묻는다. 걱정한다. 그의 사소한 걱정이 허드너의 속에 기름을 붓는다. 고작 피부가 조금 찢어진 것으로도 그는 호들갑을 떤다. 기껏해야 일주일이면 사라질 상처가 걱정되나보다. 그게 화가 났다. 그의 좁은 세상은 이리도 평화로워서, 배알이 꼴린다.

 

 

"별거 아니에요."

 

"이게 왜 별게 아니에요."

 

"루디, 당신은 저 태평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요."

 

"......."

 

"그러니까 고작 이 정도 상처에도 호들갑을 떠는 거라고요."

 

"......."

 

 

그러나 루디는 당황하지 않는다. 쩔쩔매며 허드너를 달래려 들지도 않으며, 변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가만히 허드너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피곤하네요."



또한 그는, 피곤하다는 말만을 남기고 제 옆을 지나치는 허드너를 붙잡지도 않았다.
 

 

*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지만, 루디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허드너에게 말을 건네왔다. 속이 좋은 건지, 자존심도 없는 건지. 일부러 시선을 피하면 마주칠 때까지 끈덕지게 붙어오는 시선에 속이 뒤틀렸지만 그렇다고 웃는 낯에 침을 뱉고 싶지도 않아서. 허드너는 그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올 때마다 불편한 기색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 일'이 벌어질 항모가 출항하던 날에도.
 


그것은 단지 사고였을 뿐이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운 나쁜 사고. 허드너도 그것만이 진실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눈앞에서 추락하던 동료의 잔상은 지워질 줄을 몰랐다. 정찰 임무를 마치고 항공 모함으로 돌아오던 중 기체 이상으로 벌어지는 사고는 드물지만 눈에 띄는 특별한 경우도 아니었음에도, 허드너는 쉽사리 그 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부품이야 새 것으로 갈아 끼우면 그만인 일이었다. 전쟁 속에서는 파일럿 또한 전투의 부품에 불과한 것이다. 구하기 힘든, 조금 귀한 부품이라는 점이 보병과는 다른 특수성을 띄긴 하였으나. 결국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해서 흘러갈 뿐이었다.

 

허드너의 삶 또한 마찬가지였다. 동료가 몇이 떠나가든, 그의 삶은 지속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줄어들 줄을 몰랐으며, 그가 몸을 실은 항모는 태평양을 항해했다. 그런데도 그가 동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일단은 그랬다.

 

초토화 된 진주만 기지는 수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다시금 정상 궤도에 올라섰으나, 제대로 된 전쟁을 치르기에는 일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부에서 내려오는 지시도 대부분이 정찰 임무일 뿐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허드너로 하여금 무력감과 회의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죽어가는 동료들을 지켜보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따금씩,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

 

 

항모를 내린 허드너의 앞을 막아선 건, 이번에도 그 남자, 루디였다.

 

 

"...비켜주세요."

 

 

이제 와서 그에게 친절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지만, 최소한의 예의라도 갖추고 싶었던 허드너가 말했다. 그가 건네는 시덥잖은 농담도, 짖궃지 않은 장난도,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만큼은 더더욱 사양이니까.

 

 

"무슨 일 있어요?"


그러나 루디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한 걸음 성큼 가까이 다가온다.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좀 피곤하네요."


허드너는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줄도 모르고 루디의 곁을 지나치려다가 손목을 붙들린다.


"거짓말."


거짓말. 그 말이 비수가 되어 허드너의 심장을 파고드는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늘 사람 좋은 행세를 하던 그를 무너트린 것도, 한순간이었다. 그는 많은 일에 지쳐있었고, 질려있었다. 언제라고 루디에게 다정히 말을 건넨 적도 없건만.


"그래요, 거짓말이에요."

"......."

"레이가 죽었어요. 내 눈앞에서, 추락해서, 그가 죽었다고요."

"...톰."

"이제 속이 좀 시원해요?"

"잠시만요, 톰.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해요! ...난 하나도 괜찮지 않아요. 항상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

"그런 게 전쟁이고, 난 군인이니까."


저도 모르게 풀려버린 힘에 루디는 허드너의 손목을 놓아주고 말았다. 허드너는 가만히 루디를 바라보다가 완전히 일그러진 표정이 되어서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그를 지나쳤다. 루디를 향해 내뱉은 날카로운 말들은 그대로 허드너의 심장에 박혔다.


"미안해요."


그가 지나치는 순간, 루디가 사과를 건네왔지만 허드너는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사실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루스터행맨 루행크오 루디허드너
 
2024.05.05 23:40
ㅇㅇ
모바일
계속 쌓여왔던 슬픔이랑 상실감이 루디씨 앞에서 이렇게 터져버렸네ㅠㅠㅠㅠㅠ타이밍이 안 좋긴 했지만 그래도 루디씨 입장에서는 허드너씨의 아픔을 알게 된 순간인 것 같기도 하고ㅠㅠㅠㅠㅠ
[Code: 9651]
2024.05.05 23:49
ㅇㅇ
모바일
허드너 항상 괜찮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거라는거 너무 슬프다ㅠㅠㅠㅠㅠ 루디는 매일 말걸고 다가오는데 허드너 너무 몰려있어서 겨우 예의만 차리다가 터져버렸네ㅠㅠㅠㅠ
[Code: fd9d]
2024.05.06 00:5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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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있는 허드너씨 넘 좋구 절대 혼자두기 싫다....
[Code: fff4]
2024.05.06 09: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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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너씨ㅜㅜㅜㅜ 레이가 죽었다니.... 루디씨한테 위로받았음 좋겠는데 상처가 많고 사선을 넘나들어서 넘 방어적이네 루디씨가 살살 녹아내리게 해줬으면 좋겠다ㅜ 루며들어줘 허드너씨
[Code: bc86]
2024.05.06 13:5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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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루디씨 타이밍이 좀 안좋았어요ㅠㅠㅠㅠㅠ 지금까지는 나름 그래도 예의있게 대해왔는데 레이가 죽으면서 허드너씨 쌓아놨던 둑이 다 터진 느낌ㅠㅠㅠ 허드너씨 실시간으로 마음이 병들어가나봐.. 루디씨가 허드너씨 마음속에 들어설 틈이 생겨날 수 있을까ㅠㅠㅠㅠ 화이팅 루디씨... 센세 진짜 넘 맛있어요..
[Code: 0cf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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