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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9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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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허니랑 포옹 풀고 나자 아직 팬들이 있음을 직시하곤 잠시 기다리라 낮게 얘기한 후 마저 사인해주겠다. 관계자들까지 인사 다 하고 비로소 공연장 주변이 잠잠해지면 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벤 생각해 공연장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기다리고 있는 허니 발견하곤 공연하는 내내 깃든 흥분이, 이제 허니 보면서 발이 둥둥 뜨는 기분으로 치환되겠지.


저녁 먹었느냐는 말에 아직이라고 하니까 시간 괜찮으면 식사하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 생각 이상으로 환대는 물론 아주 반색하는 기색이 허니도 싫지 않아서 그럴까..요? 하는데 공연 후 샤워하고 나와서인지 젖은 머리칼이나 은은하게 풍기는 스킨 향이 그렇지 않아도 못 본 사이 성숙해진 벤을 한층 으-른처럼 보이게 만들어 차 타고 가는 동안 심장이 얕고 빠르게 뛸 거 같다. 


이목을 생각해 매우 프라이빗한, 개인 룸이 있는 레스토랑으로 왔는데 밖으로 보이는 풍광이 꽤 괜찮겠지. 미국이란 나라는 대충 보면 개방적이고 개인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여도 여기보다 더 보수적이고 가족적인 곳도 없어서 (뉴욕은 몰라도) 서부에서 허니 또래의 남자들은 거의 다 결혼했고, 딱히 결혼 압박이나 눈치를 주진 않지만 데이트조차 하지 않으면 레즈비언이라고 여기거나 약간 이상하게 간주하는 눈초리가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느껴졌던 허니인데 이렇게 말끔하고 (이 나라 여자들이 환장하는) 섹시하기까지한 성적 매력이 풍부한 남자와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설렐 수밖에.


둘 다 못 본 세월이 오래라 궁금한 건 많지만 그것보다 더 앞서 나가는 열뜬 감정 속에 이 기분이 꺾일까 봐 서로가 모르는 달라진 사정에 대해서 쉽사리 묻진 못할 거 같아. 그래서 겨우 한다는 얘기가 콘서트엔 어떻게 오게 되었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아예 이리로 넘어오게 된 건지 차례로 확인 사살 받고 나서야 그 동안 같은 곳에 살고 있었으면서 서로가 만나지도 못한 게 아쉽기도 하고 이제서야 해후한 게 속상한 마음에 왜 좀 더 일찍 내게 연락하지 않았냐는 섭섭한 마음 내비치겠지.


" 내가 연락처 줬잖아. 연락 왜 안 했어? "
" 그 연락처가 아직도 유효해? "


몇 마디 나누면서 처음의 어색함이 풀어지고 나니까 허니도 말이 편해지는데 아까는 오랜만에 만나기에 자길 기억할지, 기억을 하든 못하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떨리고 두근거리는 감정이었다면 지금은 자길 보며 호의적인 마음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게 기대 이상이라 살짝 놀랍기도 한데 그게 싫지만은 않은 허니여서 덩달아 기분 고조되는 허니겠다. 게다가 모처럼 만났음에도 흐트러짐 없이 근사하게 변모한 벤의 모습이 지난 추억을 퇴색시키지 않아서 고맙고도 간만에 근사한 남자와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는 게 한결 마음을 더 울렁거리게 만들겠지. 


한편 벤은 비록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바뀐 번호가 무색해지긴 했지만 어째서 여행 이후라도 단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냐는 약간의 원망 섞인 마음으로 물은 건데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한 허니의 대답에 그저 너털웃음만 쏟을 수밖에. 그 너털웃음엔 허탈하면서도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돼 있다는 말이 허니에게도 적용되는 건가 싶어 인연의 신비함을 다시금 곱씹어 보는 기쁜 마음도 깃들어 있을 거 같다.


" 공연 어땠어? "
" 난 재즈나 컨트리는 잘 몰라. 그래도 너하곤 잘 어울리더라. "
" 좋아하는 가수가 누군데? "
" 쳇 베이커는 자주 들어. 니나 시모네도 좋아하고. "
" 니나 시모네 좋아해? 콘서트 가 봤어? "
" 아니. 애석하게도. "
" 난 실황 영상을 본 적 있는데 무대에서의 애드립이나 쇼맨십이 몹시 재치 있고 멋지더라. "


뭔가 공통분모를 발견하는 듯한 기분에 신이 난 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열거하면서 봇물을 터트리자 이윽고 두 사람 다 핑퐁 게임 하듯이 주고 받으며 여행, 소설, 작가로 다양하게 흘러가겠지. 


" 네가 제인 오스틴 팬인 줄 몰랐어. "
" 왜? "
" 그냥? "
" 그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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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싱겁게, 어깨를 으쓱하며 덤덤하게 음식을 음미하는 허니와 그런 허니를 빤히 보는 벤의 시선에 허니는 " 마초 냄새 풀풀 나고 오일로 샤워한 듯한 남자가 읽기엔 너무나 대척점에 있어서? " 라고 장난스레 말하는 거야. 예전에는 약간 수줍어하면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청년의 느낌이 있었는데 십 여 년이 지난 지금의 벤은 만나자 마자 주변 시선을 개의치 않는 포옹부터, 모든 면면에서 여유가 흘러 넘쳐. 또 입고 있는 옷마저도 ' 나 너희를 유혹할 거야 ' 라고 선언하는 듯한 행색을 띠고 있어서 정말이지 이 나라 여자들이 열광하는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 게 흐뭇하기도, 어색하기도, 분명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하고 있는 것도 같아 칭찬 대신 놀리는 거였으면.


그러나 한 번도 오일리하다거나 버터 같다는 느끼한 그 비슷한 표현을 전혀 받은 적은 없던 벤은 너무나도 정형화된 XY로서 저를 묘사 / 압축하는 허니의 발언에 약간 충격 먹겠다. 어느 면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모습이 있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게 꽉 막히고 전형적인 마초맨 타입은 아닌데 십여 년 만의 세월 속에 내린 평가가 오일리하고 자기가 별로 지향하지 않은 마초 타입이라니 진지하게 내가 그런 모습인가? 자아성찰 해 볼 듯. 물론 허니는 단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능청 맞고 유들유들해진 모습이 생경하고 낯설어 버터 바른 것 같다고 은유 섞은 농담을 흘린 거지만 진의는 이 나라 여자들이 간절히 열망하는 남성성에 완벽하게 다가 선 모습을 오롯이 칭찬하기 민망해 돌려 말한 거지. 영국인이면 이 정도 조크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애석하게도 벤이 허니의 조크를 못 받아들였지만 십여 년 만에 만났음에도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두 사람은 취향 교집합이 많고 얘기도 잘 통해 데면데면한 감정 빠르게 허물고 즐거운 저녁 식사 하겠다. 특히 벤은 미국으로 옮기고 나선 자기 명성도 상승된 만큼 파파라치도 신경 써야 하고, 파티 아니고는 일반인을 만날 기회가 전무해 오랜만에 이렇게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찾은 기쁨과 과거 약간 애틋했던 감정까지 되살아나 모처럼 심장에 펌프질을 하는 듯 온 몸 구석구석 피가 도는, 정말 살아있는 느낌을 느낄 거 같다. 


농담도 제법 섞어가며 즐겁게 보낸 식사의 말미엔 서로 연락처 주고 받고 기회 되면 또 언제 저녁이든 브런치든 식사를 하자며 헤어져라. 그게 데이트인지 단순히 친구로서 만나는 건지는 명확히 정의하지 못했지만 이젠 같은 곳에 살고 있으니 다시 연락이 온다면, 그리고 그게 반복적으로 이어진다면 아마도 데이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상상과 기대를 하면서.


허니가 데이트 하는 사람이 있냐고 묻지 못한 건 그저 오랜만에 만난 호의적인 감정으로 단순히 저녁 식사를 청한 건데 불쑥 데이트 하는 사람이 있냐 묻는 게 혹 사적인 질문처럼 비칠까 못 물은 거겠지. 아는 친구를 십여 년 만에 만났다면 또 모르지만 둘은 특수한 상황에서 만난데다 벤은 사생활이 화두에 오르내리는 직업이니 단순히 취향이나 관심사를 넘어 사생활을 묻는 건 결례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선을 넘었다고 여길까 봐 못 물었을 거 같다. 자세히는 몰라도 영국 출신들은 대체로 사생활을 배우 생활과 철저히 이분화시키는 편인데 괜히 거기에 호기심을 느끼는, 벤을 잘 알지 못하는 가십에 사로잡힌 사람 1로 치부되고 싶지 않은 거. 


반면 벤은 과거 여행에서 연락처를 달라고 했을 때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며 거절 아닌 거절을 당한 기억으로 오랜만에 만나서 이성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게 캐주얼한 만남으로 이어갈 의중을 품고 질문하는 것으로 비칠까 그때보다 말을 아낄 거 같다. 그렇지 않아도 맨즈 헬스나 GQ 같은 통속적이고 전형적인 남성 잡지 한 페이지에 실리는 남자로 정의해버린 듯 해서 식상하고 닳은 남자가 된 기분인데 순간의 궁금함을 못 참아 섣불리 자길 가볍게 만들고 허니와 즐거운 시간을 깨고 싶지 않은 거였으면. 만일 앞으로도 식사나 술을 마실 기회를 응하게 된다면 그 안에서 허니의 사정과 마음도 자연스레 알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을 버는 거였으면 좋겠다.  


그날 벤은 집에 가서 꽤나 뒤척이다 새벽에 잠듦. 그리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세안하는데 문득 거울 속 자신을 찬찬히 살펴보니 정말 그렇게 많이 바뀌고 느끼해진 건가 싶어 이리저리 얼굴 돌려보다 간만에 깔끔하게 쉐이빙 한 민반스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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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만남까진 꽤 터울이 있을 거 같다. 허니도 연구원으로 매번 실험 - 연구 개발에 바쁜데 특히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는 거듭된 테스트에 바짝 민감해져 집은 거의 잠만 자고 나오는 곳이 돼 여가에 할애할 시간은 사치임. 벤은 공연 연달아 하고 잠시 쉬는데 데이트 한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대뜸 연락하기가 망설여져 한 달 정도 지나서 살풋 연락해 보지만 그땐 허니가 한창 연구실에서 틀어박혀 있던 시기라서 전화 놓쳤으면. 뒤늦게 휴대폰 확인한 허니가 요즘 너무 바쁘다며 사정 설명하면 벤은 연구원 삶도 배우 못지 않게 빡빡할 땐 빡빡하구나 싶어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곧이어 거절하는 건데 못 알아 듣고 또 추근댄 건가 답지 않게 자낮도 했으면 내가 좋겠다.


결국 제품 출시 테스트 끝내고서 그간 밀린 잠을 자며 며칠 쉬던 허니가 그제서야 벤에게 미안하다며 이제서야 좀 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며 연락하지만 그땐 벤이 다시 드라마 새 시즌 발표 들어가서 홍보다 인터뷰다 해서 바쁜 시점에 물려 있을 거야. 그래도 홍보 인터뷰 마치고 돌아오니 약 두 달여 만에 온 연락이 무지 반가워서 자낮 빠르게 회복하고 입이 귀에 걸리는 벤인데 자기가 그렇게 좋아서 히죽거리는 거 자기조차 모르겠지.


낮에 일하는 허니와, 주로 오후 늦은 ~ 새벽까지 일하는 서로의 패턴상 스케줄 맞추기가 쉽지 않아 며칠 후 허니가 퇴근길에 벤 사는 선셋대로 집 근처로 갈 테니 잠시 나올 수 있냐 묻는 거야. 대단한 건 아니지만 줄 게 있다고 하면서. 벤은 허니의 메시지가 너무 반갑고 좋은데 아무리 계산해도 짬이 나질 않으니 결국 방송국으로 떠나기 전 30분 정도가 유일한 시간일 듯.


시커먼 선팅이 기막힌 차가 하나 내려오더니 클락션 울리며 차창 내려오면 거기에 아직 잠기운이 완전히 달아나진 않은, 약간 피곤한 벤 얼굴이 빼꼼 보이겠지. 차문 열어줘 타면 그새 또 못 만나 사이 어색한 기운 흘러라. 앉아서인 것도 있고, 앞에 드라이버랑 홍보 관계자가 앞에 있어서 시선이 의식돼 거의 닿을 듯 말 듯 엉거주춤하게 포옹한 뒤 벤이 " 잘 지냈어? " 하면 허니는 괜히 자기 때문에 일찍 움직였나 싶어 " 피곤한데 괜히 불러내서 미안 " 해라.


" 아니야. 일찍 가면 여유롭게 메이크업이랑 인터뷰 연습 할 수 있어. "
" 그렇다면 죄책감이 이만큼 줄어드네. "


엄지와 검지로 얼마 되지 않은, 이만큼이라는 말에 결국 벤이 웃음 터트리고 허니도 웃음 터트릴 거야. " 아, 줄 거 있어. " 그리곤 허니가 곧바로 가져온 가방을 벤한테 하나, 홍보 담당자 몫도 하나 건네주는 거야.


" 내가 개발한 거랑 우리 회사 제품 몇 개 넣었어. 네 피부 타입을 정확히 모르지만 써보고 맞는 게 있으면 좋겠다. "


딱 봐도 종류가 상당한 화장품 가방을 보자 홍보 담당자가 " 와우! 이거 유명한 거잖아요. 여기서 일해요? " 찬탄하는데 벤은 세세히 살피지 않았어도 저 뿐만 아니라 자기 도와주는 식구까지 챙겨주는 것도, 개발한 것을 챙겨왔다는 것으로부터 (자기와는 상관 없는데도 이유 모를) 뿌듯함과 자긍심, 무엇보다 여행에서도 느꼈지만 찰나의 만남에서도 절대로 빈 손으로 돌려보내는 법 없는 허니의 사람을 대하는 법, 따뜻한 마음, 그녀의 재능이 새삼 파도처럼 밀려올 거야. 


" 실험실에 처박혀서 이걸 만든 거야? "
" 정작 나는 막 다크서클이 여기까지 내려오고.. 벤처럼 그런 사람들이 모델로 나와서 비로소 내 노력이 반짝거리는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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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자조적인 농담을 건네면 벤은 자기를 추켜세우면서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비하할 줄도 아는 유머러스한 허니로부터 또 한 번 웃음 터지겠다. 고마워 너 생각하면서 잘 쓸게. 그럼, 내 다크서클과 뾰루지와 맞바꾼 거야. 다시 한 번 티키타카 농담 오가면 그제서야 어색함 완전히 풀어지겠지. 이어 상당한 고가의 화장품을 선물 받은 홍보 담당자가 신이 나 시간 되면 벤 방송국 가는데 따라가지 않겠느냐고 하는 거지. 지금요? 


" 어려워요? " 홍보 담당자가 등 돌려 묻는데 벤도 괜찮으면 같이 하지 않을래? 하는 뜻으로 눈썹 올려. 근데 녹화가 길게 이어지면 늦은 밤 끝나니까 허니 다음날 스케줄이 엉망 되는 게 좀 걱정되긴 해.


" 가는 건 어렵지 않지만 몇 시에 끝나는지 모르니까.. "
" 늦으면 11시, 빠르면 10시예요. "


홍보 담당자의 말에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11시 끝나도 분장 지우고 팬서비스 하고 이것저것 하고 집에 오면 새벽일 게 분명해. 물론 허니는 녹화 당사자가 아니니까 중간에 나와도 상관 없지만 괜히 재미 겸 구경갔다가 늦게 마치면 내일 일에 지장에 가기도 하고, 중간에 나오자니 오랜만에 만났는데 매정하게 여겨질까 싶어 고민돼. 결국 벤이 고민하는 기민한 감정 읽어내곤 고단해 보이는데 오늘은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제발 허니가 제 말을 엎고 같이 가주길 바라는 아이러닉한 마음을 가지겠지.


" 그래, 녹화 잘하고 와. " 


하지만 허니는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두 번은 예스라고 대답해주지 않아 벤은 파도처럼 밀려왔던 갖가지 감정이 썰물처럼 빠지며 김 샌 느낌이겠다. 그리고 그날 벤은 방송국 녹화뿐만 아니라 팬서비스를 비롯해 업계 관계자들 만나 인사하고 술 한 잔 하느라 정말 새벽 3시 넘겨서 들어오게 됐어. 허니가 거절한 게 정말 다행이었는데 녹화 사이사이 방청객쪽 보면서 허니가 앉아 있는 상상을 한 번 해보기도 하고, 술을 마시면서 지금 허니는 자겠지? 그래 거절한 게 다행이었어 안도 같기도 아쉬움 같기도 한 감정이 막 뒤섞이는 하루를 보낼 거 같다. 


늦은 새벽에 들어와 무척 고단하고 술 기운까지 알알하게 퍼져 휘진 벤은 결국 샤워도 못한 채 잠들 거야. 이번엔 고단해 뒤척이진 않았지만 대신 허니가 녹화장 방청객으로 앉아 있고 녹화 내내 자주 얼굴이 실그러지는 꿈 꾸겠다. 히죽히죽 웃던 벤이 문득 이게 꿈인 걸 인지하고 나서야 갑자기 잠에서 확 깨겠지. 그리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는데 익숙한 제 공간임을 인지하자마자 살짝 어이 없어 피식 웃음 쏟아지겠다. 지금 자기 감정을 완전히 형용할 순 없는데 간밤에 꿈이 꽤 기분 좋았던 건 분명했어. 그리고 잠에서 깬 지금은 약간 헛헛하고 허무한 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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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만남은 두 번째보단 길진 않아도 만날 구실을 마련하느라 3주 뒤 지나서일 거 같다. 벤이 허니에게 화장품 받은 보답으로 자기도 나름의 보답을 하고 싶은데 오랜만에 시간이 비는 일요일, 쿠스쿠스 (* 모로코 음식) 먹고 싶은데 마트 장 보러 갈 때 도와줄 수 있느냐고 부탁할 거 같다. 제법 괜찮은 요리를 구사할 수 있게 되면 추억 소환 겸 허니에게도 제게도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사실 점심이나 저녁을 반복적으로 먹자고 하려면 우리가 데이트하는 사이라거나 친구라거나 정확한 관계 정의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 그런 정의가 안 됐을 뿐더러 허니가 데이트 하는 상대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선뜻 밥을 먹자고 하는 것도 꽤 조심스러워서 결국 쿠스쿠스 핑계를 끌어온 거지만)


안 그래도 줄곧 먹고 싶었으나 L.A.에선 파는 데가 없어 정말 먹고 싶다고 하니 어째 도와 줘야지 뭐. 순진한 허니는 벤의 내심도 모른 채 - 사실 벤도 정확히는 모름, 그저 허니를 만나고 싶고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그럴듯한 핑계를 끌어왔는데 그 핑계를 왜 끌어왔는지 출발점을 생각해보지 못함 - 마트 장보기에 따라 나서는데 사람들 시선도 그렇고 파파라치가 있을지도 모를 걸 감안해 모자 푹 눌러 쓴 상태로 평소보다는 좀 더 편안한 복장으로 만나겠다. 


정말 이걸 혼자 해 먹을 수 있겠어? 염려 반, 의문 반으로 물으면 벤이 나 요리 괜찮게 하는 편이라고 입 삐쭉거려. 허니가 과소평가해서 미안하다고 웃으면서 알았다고, 쿠스쿠스랑 곁들일 하리라 수프도 만들어 먹을래? 하는 거지. 벤은 잊고 있었던, 그 새콤한 토마토 수프 기억해내면서 입맛 다시는 흉내 내겠다. 허니가 푸스스 웃으면서 레시피 적어 줄 테니 같이 해먹으면 되겠네 하며 렌틸콩, 토마토, 양파, 마늘까지 챙겨 담으면서 재료 상하지 않게 빨리 해먹으라고 하겠지.


" 일요일 이 시각에, 혼자.. 있는 거야? "


도와 달라고 하긴 했는데 보통 이 시각에 커플들은 집에서 같이 뒹굴고 있거나 브런치를 먹거나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러 가거나 등등 어떻게든 함께 있길 마련이건만 허니는 스스럼 없이 저를 도와주러 나온 게 아무리 봐도 싱글의 그거야. 렌틸콩 통조림을 비교하는 허니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벤이 물으면 허니는 통조림에 집중하다가 한 박자 늦게 벤의 말이 귀에 들어오는 거지. 


" 어.. 그렇지? 아마? "


애매모호한 대답이긴 한데 저처럼 늦게까지 일해서 삶의 바이오리듬이 불안정한 거나 또 기탄 없이 일요일에 나오는 이 순간을 모두 종합해 볼 때 정황상 그건 싱글임을 암시하는 대답이었어. 


벤은 재능도 뛰어나고 아무리 자조했어도 인종의 특성인지 저와는 비견도 안 되게 주름이 안보이는 피부나 나이보다 훨씬 앳되어 보이는 외견, 웃을 때 윤슬이 이는 것처럼 몹시 반짝거리는 눈 등이 도저히 서른 중반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 그 순간, 처음으로 여행 메이트 혹은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던 A에게서 벗어나 여자로 완전히 인지한 뒤 저하고는 너무 나이 차이가 많아 보이는 건 아닐까, 안 그래도 나 느끼한 마초 타입 같다고 했는데 비교하는 상황으로까지 뻗어나가게 될 거 같다. 


허니는 벤의 물음에 애써 초연하게 대답했지만 그 말 뜻이 데이트 하는 상대가 없느냐는 질문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어 조금 머쓱하면서도 부끄러워. 데이트 하는 상대가 없는 걸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벤 또한 으레 성적 매력이 떨어지거나 하자가 있는 사람으로 보진 않을까 이 민망한 기분 서둘러 토스해버리겠지.


" ... 넌? "
" 느끼해서 아마도..? "


벤도 허니가 집어 든 렌틸콩 통조림 성분표 바라보면서 시치름하게 허니가 표현했던 말을 빌려 똑같이 대답해주면 허니는 뜬금 없는 벤의 말에 의아한 얼굴이야. 그러고 보니 전과는 다르게 면도도 깔끔하게 했고, 모자를 써 머리를 손질하진 않았어도 깨끗하게 씻어 프레쉬한 향이 맴돌아. 그리고 그 향은, 분명 허니 회사에 만든 샤워 베스였는데 제가 개발한 제품은 아니어도 연구원이니까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어.


" 혹시 ? " 허니가 벤 팔목 살짝 당겨 향 맡으면 벤이 여전히 시치름하게 아무 일 없었다는 냥 능청 떨어라. 허니는 괜히 자기가 선물한 거 써준 거나 대충 하고 나온 차림에도 말끔하게 면도도 하고 소매가 꼬질꼬질하다거나 남루하지 않은 제법 새것으로 보이는 맨투맨, 전체적으로 청결함을 잊지 않은 면면들이 흐뭇해서 기분 좋아져 " 하리라 수프 내가 만들어 줄까? " 해.


" ... ? "
" 오늘 먹고 싶지 않다면 뭐.. "


어깨 으쓱하면서 다시 쇼핑 리스트로 눈을 내리면 벤은 곧 얼굴이 난만하게 피어나겠지. 그리곤 쇼핑 카트 힘차게 밀며 눈 맞은 강아지 마냥 허니 쫄래쫄래 쫓아가겠다. 그 말은 곧 벤 집이든, 허니 집이든 서로의 공간에 들어가는 걸 허락하겠다는 말이자 확실히 저를 위해 시간을 할애해 요리를 해주겠다는 뜻이기도 했고,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기도 했어.


" 같이 가~ "





+

사실 단편으로 쓴 거라 어나더는 계획에 없었어서 ㅜ 고마워





 

2024.05.09 23:0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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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센세가 어나더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16df]
2024.05.09 23: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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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야악 내센세다
[Code: 200e]
2024.05.09 23:4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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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센세가 어나더를ㅠㅠㅠㅠㅠㅠ 진짜 너무 간질간질 설레고 좋다 삽질하는 심리 묘사도ㅠㅠㅠㅠ 센세 필력 미쳤다 진짜
[Code: d7b6]
2024.05.10 01:2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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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라 너무 좋아 센세 요리하는 것도 보여조
[Code: e79b]
2024.05.10 07: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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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센세 오셨다ㅋㅋㅋ 너무 설레ㅜㅜㅜ 짜릿해 최고야
[Code: 87fe]
2024.05.10 09:1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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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둘이 재회했는데 왜케 간질간질해 개설렌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5ed1]
2024.05.10 10:0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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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연애물같아 ㅠㅠㅠㅠ센세 또 올거라믿어
[Code: 50d0]
2024.05.11 01: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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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질간질한데 삐그덕거리는거 귀엽고 설레 ㅠㅠㅠ
[Code: 79d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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