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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7 22:42
"딸, 여기를 네 방으로 정했는데 어때? 맘에 안 들면 바꿔줄 수도 있긴한데, 이미 가구까지 다 옮겼으니까 그냥 여기를 쓰는 게 편하긴 할 거야"
"엄마 마음대로 해."
난 정말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엄마가 내방을 어디로 정하든, 내방을 없애든, 바람을 피워서 아빠랑 이혼을 하든.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감각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무렵 엄마의 새 남편과 그의 아들이 우리의 새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제대로 소개시켜준적은 없네, 브란도 아저씨랑 말론오빠 알지?"
"허니 오랜만이구나, 벌써 그때보다 키가 컸네."
"안녕하세요 아저씨."
"갑자기 같이 살게되서 네가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네가 여기에 잘 적응하게 도와줄거야. 이제 무슨 일 있으면 무슨 일 있으면 아저씨랑 오빠한테 말하면 된다."
"네 감사해요."
엄마나 아저씨나 옆에 저 이상해보이는 남자나 다들 나뺴고 편해보이고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난 아저씨를 증오하고 원망하겠다는 유치한 결심따위 하지 못했다. 엄마랑 아저씨가 주변 이웃에게 인사를 하러 간다며 다정한 얼굴로 나갈 때도 전혀 우습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혼자 쉬고 싶을 뿐이었다. 앞으로도 딱 이 정도로만 지내면 될 것 같았는데, 그때 나의 쿨한 척을 비웃기라도 하는듯한 느긋하지만 묘하게 들떠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허니, 이따 내 차 태워줄까? 영화도 보고싶으면 보러가고."
"..?'
대답을 하고 싶지가 않다. 그의 콧소리 섞인 목소리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던 내 마음에 갑자기 돌을 던진 것 같았고, 웃고 있는 얼굴이 날 열받게 만들려는것 같았다. 어떻게 별것도 아닌 걸로 이렇게까지 기분이 안 좋아질 수가 있을까?
아무튼 나는 그가 먼저 인사했지만 못 본척했고 대꾸도 안 했다. 내가 왜 이럴까? 사실 그가 싫을 이유도 없는데. 난 모르는 사람을 이유 없이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잘못에 대한 성찰을 지금 하기엔 너무 피곤하니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내 방이 될 것으로 추정되는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있었는데 자꾸만 그의 얼굴과 목소리, 차 키를 돌리며 여유롭게 얘기하던 모습이 떠올라 짜증이 났다. 그는 지금도 밖에 서있을까? 설마 내가 무시한게 화가 날까? 이런 심란해지기만 하는 생각에 피곤이 몰려와 노력하지 않아도 금방 잠에 들 수 있었다.
**
"허니, 일어나. 도대체 몇 시까지 잘 거니?"
"아… 엄마, 지금 몇 시야?"
"6시야. 일어나서 밥 먹고, 내일 첫 등교니까 준비해야지."
"준비할게 뭐가 있다고 그래 그냥 가면 되는거지."
"얘도 참, 아 그리고 말론이랑 네 학교가 바로 붙어 있거든 그러니까 아침마다 같이 등교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굳이 같이 가야 돼? 버스 타고 다니고 싶은데."
"이런 시골 동네에 무슨 버스야 한 시간에 하나 올까 말까인데. 오빠 차 타고 편하게 등교하는 게 좋지."
하.. 자기전에 짜증이 솟구쳤던게 안끝나고 이어지는거같다. 이제 하다하다 내 오빠가 되버린 그 남자의 차를 타고 등교해야 한다니. 자고일어나서 봐도 그가 신경쓰이고 짜증날까? 그냥 피곤해서 그랬던거 였으면 좋을텐데. 엄마가 자꾸 오빠한테 먼저 몇시에 갈껀지 물어보고 상의해보는게 좋겠다고 그의 방 앞으로 날 떠밀어서 어쩔수없이 그의 방문을 열었다.
"너 누가 들어오래. 노크같은건 안 배웠어?"
"아... 정신이 없어서 미안..."
"됐고, 앞으로 7시반에 출발할꺼니까 늦지마 1분이라도 늦으면 버리고 갈 거야."
"응 알겠어."
"고맙다고는 안해?"
"고마워 태워줘서."
"진짜 열받게 하네 사실 안 고마운거 알아."
어떻게 알았지. 자고 일어나니 정신이 맑아져서 그런가 그가 훨씬 또렷하게 보였고 불편한 느낌도 더 확실해졌다. 원래 나만 무례한 짓을 하고 그는 느낌만 무례했지만 이제 그도 무례한 말을 한다. 그가 말을 그의 모습만큼 나쁘게 할 수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의 말을 무시하는 짓은 안 했을 것이다. 그가 나를 등교시켜준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맙지 않았지만 그 앞에선 말할 수가 없었다. 고맙다고 했는데도 열받아하는 그가 안 고맙다고 하면 어떤 말을 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아무튼 그와 전보다 훨씬 불편해진 대화를 나누다가 대답할 말이 없어진 나는 또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방문을 닫고 나왔다. 해명하자면 이번엔 그가 짜증 나서 나왔다기보단 그가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해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의 평온한 척도 벌써 힘들어진것 같은데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이 복잡해진 나는 잠이나 자려 했지만 낮잠을 5시간 동안 자버린 탓에 어떤 짓을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창밖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어떤 작고 야무져 보이는 남자애가 가로등 밑으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 난 보드를 타고 다니는 게 쿨하다고 여겨지는 요즘 유행에 동의해 본 적이 없지만 그애의 모습을 보니 뭔가 시원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난 보드 살 돈도 없는데. 이제 알바라도 해야 되나?
이런저런 생각을 끝도 없이 하던 나는 끝내 잠에 들기는 했.... 기는 개뿔 한숨도 못 잤다. 등교 첫날인데 이런 컨디션으로 가야 하는 건 재앙이지만 그래도 그 덕에 7시 반까지 준비를 마치는 건 당연하고 아침밥도 느긋하게 먹을 수 있었다. 밥을 먹는 사람이 네 명이나 돼 체할 거 같다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엄마 여기는 애들이 스케이트보드 타고 다녀도 뭐라고 안 하나 봐."
"그거는 어떻게 타고 다녀도 위험한 걸 왜 타는지 모르겠다 정말.."
"재밌잖아."
"사달라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안전한 곳에서 보호대 같은 거 차고 타면은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아저씨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저씨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는데, 이유는 앞에 앉은 말론이 입 주변에 다 묻히며 먹는 모습을 보고 머릿속이 새하얘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입모양으로 소리는 안 나게 뭐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가 뭐라고 말한 건지 전혀 못 알아들었다. 그걸 나만 본 게 아닌지 갑자기 아저씨가 말론의 머리를 때리더니 이게 무슨 버릇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게 때리기까지 할 일인가? 나한테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지만 나는 즉시 기분이 나빠졌고 말론은 아예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엄마는 눈치를 보는 것 같았고 난 이제 오싹해지기 까지 했다. 그렇게 나머지 식사는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진행되다 끝났고 나는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는데 먼저 가고 없을 줄 알았던 말론의 차가 그대로 있었다.
"내가 어제 1분이라도 늦으면 간다고 했지."
"안 늦었는데?"
"그러니까 계속 기억하라고 얘기하는 거야."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아저씨한테 받은 화를 나한테 푸는 건가? 나름 잘 지내는게 앞으로 살기가 편할텐데 벌써 서로 이렇게 틱틱대다니.. 하긴 내가 먼저 무시하긴 했다. 내 잘못이네.. 그냥 그때 비위를 맞춰 줬어야 한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어영부영 학교까지 무사히 오긴 해서 다행이었지만 한 가지 신경 쓰였던 건 차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그가 자꾸 노려봤다는 것이다. 그와의 신경전에 지친 나는 더 피곤해지고 싶지 않아 그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어이없어 하며 도대체 뭐가 미안한 거냐고 물었다.
"아니 오빠도 나를 너무 싫어하는 거 같길래."
"오빠도?"
"..."
"왜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부르지 마 역겨워."
"미안한데.. 뭐라 부르든 내 마음이지."
나는 이렇게 말한 뒤 바로 문을 열고 나와서 학교로 뛰어들어갔다. 난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그는 원래 내가 맨날 제 할 말만 하고 도망가는 애인 줄 알 것이다. 나도 내 태도가 갑자기 이렇게 변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아마 역겹다는 말을 처음 들어봐서 놀라 도망 나온 것일 거다.
그렇게 학교에 들어가 선생님을 만나 교실에 들어갈 때까지 별 감흥이 없었던 나는 교실 맨 뒷자리에 혼자 앉아있던 남자애를 발견하고 나서는 매우 놀랐다. 어젯밤에 본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애다. 선생님이 내게 자기소개를 해보라는 소리가 들리는것같다."
"안녕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왔고 허니 비라고 해. 앞으로 잘 지내보자."
"그래 허니 이제 뒤에 비어있는 자리로 가서 앉으렴. 지미!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고 학교도 소개해 줘."
"네 선생님."
그의 옆자리로 가서 앉는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수십가지 생각은 한것같다. 생각이 정리될 틈도 없이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허니? 우린 옆자리 운명인것 같다."
"무슨 말이야 그게?"
"너 내 옆집으로 이사왔잖아. 여기서도 옆자리고."
허니는 지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는 밝은 미소와 다정한 눈빛으로 주변을 환하게 만들어주는 재능을 타고난 것 같았다.
"옆집이었구나… 전혀 몰랐어 사실 어젯밤에 네가 혼자 보드 타던 거를 보긴 했는데."
"몰래 봤구나!"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변태도 아니고.."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자주 변태 짓 해!"
이 해맑은 애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사실 네가 스케이트 타는 걸 보고 멋지다고 생각했거든."
지미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 그럼 오늘 방과 후에 가르쳐줄까? 짐정리하느라 바쁘면 다음에 해도 되고."
허니는 잠시 망설였지만, 지미의 제안이 고마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 번 해보자. 이따 8시에 너네 집으로 갈게."
"약속!"
"약속."
나는 첫날부터 지미와 친밀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학와서 이렇게 빨리 친구를 사귄일은 허니비 역사에선 일어나지 않을법한 일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서 내가 중얼거린 말은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얼마나 살았다고 그래?"
"아니 어디있다가 나온거야? 놀랐잖아."
"내가 갑자기 튀어나온게 아니라, 너가 정신이 팔려있어서 내가 옆에 온 줄도 몰랐던 거지."
"그래 내 잘못으로 하자."
말론은 전학온지 몇주 되지도않아 친구를 많이 사귄건지 아주 주렁주렁 달고다녔다. 저마다 그에게 말을 걸고, 주의를 끌려고 애쓰는 게 눈에 보였다. 그가 손을 대충 휘젓기만 해도 마치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빠져들어 보고 있었다. 공작새가 날개를 펼친 것도 아니고 저게 뭐라고 다들 저런 표정을 짓지. 으..
말론은 여전히 그 특유의 느긋하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한 사람인 듯했고, 말투엔 언제나 깔린 은근한 비아냥과 여유가 섞여 있었다. 그걸 매력적이라고 느끼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게 너무 뻔했다. 말론의 그 ‘위험한 매력’에 다들 흠뻑 빠져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어이없고 우스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밤새 못잔잠이 몰려와 바로 가방만 던져놓고 지미를 만나기 전까지 알람을 맞춰놓고는 바로 골아떨어졌다.
**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났는데 내 방 책상 위엔 내가 사달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갖고 싶었던 스케이트보드가 떡하니 올려져 있었다. 아침에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서 미안하다는 의미로 아저씨가 사주시지 않았나 싶다. 아저씨한테 감사하다는 편지라도 써야 하나, 아저씨가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감사의 인사는 해야 요즘 저지른 나의 만행들이 조금 묻히지 않을까 싶은데...
아저씨 감사해요
사달라고 조르려던건 아닌데..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
-허니비-
사달라고 조르려던건 아닌데..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
-허니비-
이렇게 짧고 성의없는 편지를 남긴 채, 시간이 촉박해진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보드를 챙겨 밖으로 나섰다.
"...워!"
"악!..아.. 지미 뭐하는거야!"
"넌 놀랄때 발을 동동 구르는구나?"
"구르는것까진 아니었는데.. 귀신 나올것같은 동네에서 이런장난은 너무하잖아."
"미안미안, 귀여워서 그랬어."
생각보다 보드를 타는 게 어려워 몇 번이나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때마다 옆에서 지미가 자연스럽게 나를 받쳐주며 웃었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어려운데? 넌 어떻게 이렇게 잘 타?”
“연습 많이 했지. 근데 너는 연습해도 잘 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빈말을 할 줄 모르는구나?”
“못 타도되지 넌 차 타고 다니니까 괜찮아~”
우린 웃으면서 계속해서 연습을 이어갔고, 나는 계속 넘어지려고 하긴 했지만 그때마다 지미가 잘 잡아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미가 뒤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뭐야, 뭘 그렇게 봐?”
“너네 오빠 말이야. 혹시 친오빠가 아니야?”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내가 하려던 말은 친오빠가 아닌지 어떻게 알았냐는 말이 아니라, 오빠가 있는지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려던 거였지만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가 나를 관찰했다는 사실이 좋았다. 이 동네에 와서 지금까지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지미밖에 없다. 내가 웃는 것도 지금 이 순간뿐이었다.
보드 연습을 마치고 나와 지미는 서로 장난을 주고받으며 동네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그날따라 달이 일찍떠 해와 달이 둘다 빛나고 있었고, 저녁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왔다.
"오늘 진짜 재밌었어. 너랑 타니까 더 그런 것 같아."
내가 말하니 지미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응, 나도."
"..."
"너 이제 잘 안넘어지긴 하는데, 그래도 혼자선 타지 말고.. 넘어져도 안도와준다?'
"너나 조심해 지미. 아까 되게 웃기게 넘어진거 다 기억하고 있어."
"얘는 무슨 내가 진짜 넘어진줄 아네? 허니 너 따라한거잖아."
"아.. 그런거였어? 난 그렇게 이상하게 넘어진적은 없는데."
그렇게 서로 놀리다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나는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며 지미를 바라봤다.
"첫등교에 너같은 애를 만나다니 정말 말도 안된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내가 더 고마워 허니. 내일 보자."
지미가 멀어지며 손을 흔들었고, 허니도 살짝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도 자꾸만 지미의 미소와 따뜻한 목소리가 떠올라 어쩐지 마음이 묘하게 따뜻해지면서도 허전했다.
"딸, 그 스케이트 보드 뭐야? 너꺼야? 산거니?"
"자고 일어났는데 책상위에 있었어. 아저씨가 주신거같던데?"
"음.. 진짜? 아무튼 그거, 도로에서는 절대 타지말고."
"알겠어."
**
아 씨발. 눈을 떴을 땐 벌써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아니 어제는 다 같이 아침도 먹었으면서 보여주기식 하루 행사였던 것인지 집엔 아침밥은커녕 사람의 온기조차 없었다. 깨워주기라도 하지 진짜 너무하네. 말론은 먼저 학교에 갔을 것이다. 버스가 안 온다면 빨리 보드라도 타고 가야 될 것 같다. 헐레벌떡 밖에 나왔는데 말론의 차가 그대로 있었다. 설마 날 기다린 건가? 1분이라도 늦으면 버리고 간다던 사람이 왜 그랬지.
차에 타자마자 말론이 내 손목을 세게 잡고 당겨서 무섭게 말을 했다.
"너 다음부터 늦으면 그 보드 타고 학교 가는 거야. 알아들어?"
"미안해.. 먼저 가지 그랬어."
"그러려고 했는데 보드 타고 가다가 죽기라도 하면 내 탓이 되잖니."
말론은 왠지 농담이 아닌 말투로 말을 하더니 손을 던지듯 놔줬고, 운전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어제 딘 걔가 왜 니랑 다정한척 보드나 타고있던거야?"
"뭐?"
"안어울리게"
"알 바는 아니잖아.. 그리고 다정한 척이라니 걔는 그냥 친절해서 나한테 보드타는 법을 알려준 것뿐이야."
"걔가 왜 그러는 거 같애?"
"무슨 상관인데?'
"데이트라도 했나봐? 별짓을 다한다 아주."
"너가 뭔데.."
아주 작게 말했는데 정확히 들었나 보다. 그 뒤로 소리를 지르는건지 불을 뿜는건지 모르겠는 말론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져 그냥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냥 팔 정도 부러지지 않을까. 그 정도면 해볼만 한데. 그렇게 체감상 3시간 정도 지난 것 같은 15분이 지나고 학교에 도착했더니 처음 보는 여자애가 나를 보고 화를 내며 다가왔다.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그 애에게 무슨 일 있냐고 물었고 그 아이는
"몰라서 물어? 너가 뭔데 지미랑 둘이 밤새 노닥거린거야. 데이트라도 한거니?"
"아니야 그냥 지미가 스케이트보드 타는걸 알려준다고해서 만난거야."
하지만 그 아이는 내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고 대답 대신 내 손목을 세게 붙잡고 나를 강제로 화장실로 끌고 갔다. 당황한 나는 저항할 틈도 없이 화장실 안으로 밀어넣어졌고, 문을 닫고 잠근 뒤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밀폐된 공간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화장실 밖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 아이들은 날 향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더러운 걸레물을 나에게 뿌렸다.
"이거라도 좀 닦으면서 네가 지미랑 어울릴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고."
나는 정신없이 학교를 뛰쳐나와 무작정 택시를 잡아탔다. 떨리는 심장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정신없이 숨을 몰아쉬면서 누군가 나를 따라오지는 않는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상태로 집의 답답함까지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택시 기사님께 일단 멀리 가달라고 부탁했고, 어딘지 모르겠는 곳에 도착한 뒤 하염없이 걸으며 발길을 따라갔다.
며칠간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것 같다. 사실 3년간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내가 갈 곳이 하나도 없는 느낌이다. 선생님한테 전화가 계속 오고 있지만 안 받고 꺼버렸다. 선생님이 엄마한테도 연락을 할 거고 모두가 내가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는 게 피곤하지만 지금은 그딴 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일단 이 더러운 옷을 벗고 따듯한 물을 받은 욕조에 들어가고 싶은데... 눈물이 난다. 아빠가 보고 싶고 3년 전에 해맑고 평온하던 내가 그립다.
나는 급하게 샤워라도 할 수 있게 께름직한 모텔이라도 내가 갖고 있는 돈을 모조리 털어 빌렸다.
"아 이제 살 것 같다..."
씻고 좀 쉬려고 누웠는데 잠에 들어 버렸던 거 같다. 일어나니 해는 져있었고 핸드폰을 급하게 켜보니 부재중 전화 와 메시지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그중엔 놀랍게도 엄마는 없었는데 당황스럽게도 말론이 보낸 메시지가 수십 개나 있었다. 글로만 봐도 느껴지는 분노에 다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난 이미 전 재산을 이 거지 같은 모텔에 써버렸지 않나.
**
멀리서 말론의 차가 급하게 오고있는게 보였고, 차에서 내린 남자는 더 급하고 화도 머리 끝까지 나보였다.
"넌 어떻게 된게 이모양이야?"
라고 하길래 한대 맞기라도 할 줄 알았지만 그가 나를 정말 세게 껴안았다. 누가 날 안아주니 감정이 북 받히기 시작했고 눈물이 멈출 수 없이 나왔다. 말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안아줬고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오는 길은 처음으로 조용하고 편했다. 그와 있어도 편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집에 들어와 이제 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는데 말론과 달리 아저씨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아저씨는 진짜로 이상한 사람이 맞았던 건지 내가 아니라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고 나는 말리고 말리다가 결국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빠는 그날 밤 자기 잘못도 아닌 일로 아버지께 매를 맞았다.
말론너붕붕 지미너붕붕
[Code: 32c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