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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1 22:46

ㅅㅍㅈㅇ
개붕적 감상 ㅈㅇ
다소 중언부언 ㅈㅇ

영화 위키드 다 보고 뭔가 퀴어/소수자성의 관점으로 자꾸 해석하게 되는데,
글린다 <-> 엘파바의 관계가 평생 소수자성을 띄고 사회로부터 배척당해 늘 경계선상에 머물며 버텨온 사람과 단 한번도 자신이 소수자성을 띌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실제로도 사회의 한 가운데에서 대중적으로 두루 원하는 요소만 갖춘 주인공으로 살아온 사람이 만나서 같은 사건을 겪고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그런 거 같음

전체적으로 난 글린다랑 엘피가 진짜 정신적 사랑을 나눈 거 같고, 글린다<-> 피예로 관계는 서로 필요한 트로피 느낌으로 붙어있다는 느낌을 받았음
아니 나 정도 되는데 저정도 남자애가/딱 이런 여자애가 옆에 붙어 있어야지;; 라는 느낌...?
근데 그게 글린다가 지금까지 속해온, 소위 '정상성' 사회의 정점에 선 롤모델이기도 하니까 더 그런 거 같음

둘이 서로 싫어하면서 자꾸 신경쓰이고 티격대는 동안, 글린다도 자기가 좀 더 우위에 있다는 걸 앎
근데 동시에 글린다가 그렇데 원하던 교장쌤으로부터의 인정 + 마법 재능이 있다는 인정은 오직 엘파바만 받는 상황이고, 누군가 자기보다 앞서고 자기보다 빛는는 상황 + 자신을 대놓고 배척하는 상황을 처음 겪어본 글린다는 충격을 받았겠지.
교장쌤은 심지어 글린다에게 굉장히 냉정하고 차가움. 다소 경멸적인 표정을 짓기까지 함.
그 부분에서 글린다는 처음으로 자기가 소외될 수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고 생각함. (물론 이게 좀 과한 해석일 수도 있음.)
근데 그걸 깊이 생각해보기 전에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안온한 현실(자길 떠받드는 주변 친구들 등)이 있으니, 그냥 얼른 넘겨버리고 잔여 감정을 엘파바에 대한 미움(실은 어느정도 질투가 섞인)으로 돌려버린 거 같음.

이야기 중반에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다가가 춤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건네고(사실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화해 제스처 건넨 심리에는 순수하게 엘피에게 미안하다는 것 외에 '나쁜 사람'이 되기 싫은 죄책감도 좀 섞였다고 봄. 그게 아주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함. 위선도 어느 정도는 선이긴 하니까. 대놓고 악독을 떨며 자랑스러워하는 것보단 훨씬 낫긴 하지...),
둘은 지금껏 앙금을 풀고 친구 관계로 넘어가지만, 그 상황에서도 글린다는 엘파바를 그대로 인정하고 완벽하다고 하기보다는 '자기 식대로' 살 수 있게 인도해주려고 함.
분명 시혜적인 태도지만, 그들이 속한 사회의 주류인사계층은 글린다 같은 사람들을 인정하는데다가, 글린다가 겪어온 세상도 그렇게 살아왔을 때만 꼭 따뜻하게 반겨주니까 어쩔 수 없는 거 같음.
즉 글린다는 '너가 노력해서 이 경계선 안에 깊숙이 들어오려고 하면 돼! 그럼 다 해결 돼!'인 거임. 글린다에게는 아예 경계선 바깥으로 완전히 뛰쳐나간다는 선택지 자체가 있을 수 없음.
보면 초반에 나온 글린다네 부모님만 봐도... 애를 평생 애지중지 보석처럼 공주처럼 떠받들며 예뻐한게 보이잖아..ㅋㅋㅋ

글린다에게 엘파바는 순탄하고 밝고 달기만 한 인생에 처음으로 밀어닥친 거대한 사건이었을 거라고 생각함.
분명 자기가 우위에 있고, 자기한테 고맙다거나 예쁘다고 해줘야 하는게 당연한 거 같은데 오히려 자기가 원하지만 받지 못한 인정을 대신 받고, 자기라면 꺾여버렸을 상황에 꿋꿋하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니까. 애초에 글린다가 퀸비 속성이 있기는 해도 그렇게 물렀던게 그만큼 정말 악다구니같은 싸움과 애증 관계에 놓여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음. 그야말로 온실 속 화초처럼 컸을 테니까.
매 순간 투쟁하듯 자기 존재를 입증하고 증명하고 한 자리에서 버텨내 온 엘파바랑 멘탈 자체가 다를 수 밖엔...

엘파바는 글린다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왔잖아.
엘파바 역시 배척당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외롭고 슬퍼도 울며 비는 게 자길 더 비참하게 만들 걸 아니까 + 그게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을 걸 아니까 차라리 '난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 꺼져'의 스탠스를 고수하며 살아왔지.
추측이지만 특히 아빠와의 관계에서 이게 더 확립된 건 아닐가 하는 생각도 해봄. 영주인 아버지는 엘파바가 무엇을 해도 화내고 미워하고 그냥 닥치고 가만있으라고 하니까. 자기가 빌고 얌전히 있고 하라는 대로 해도 늘 아버진 자기를 미워할 거니까 그런 부분에서 엘파바가 세상 사람들과 자신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도 '내가 뭘해도 날 그런식으로 볼 게 분명한데'라는 생각이 박혔을 거임. 그걸 두고 절대 피해망상이라고 할 순 없음. 100명 중 99.9명이 늘 그래왔고 그로 인해 지독하게 상처 입어온 인간이 당연히 그렇게 학습하지 뭘 어쩐단 말임...

그러니까 엘파바에겐 사회 속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사랑받고 싶은 소망이 있긴 하지만, 결국 그걸 저버려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세상이 무너지거나 흔들릴 정도의 충격을 받진 않았을 거란 말이지. 이미 익히 단련되어 온 일이니까. 사회 바깥으로 내쳐진 소수자로 취급되어온 일은 엘파바에게 그냥 지금까지의 인생이었으니까.
그래서 엘파바가 사회적 약자, 소수자성을 지닌 존재에게 더 깊이 공감하고 친밀감을 느끼는 걸테지. 동물들의 처우에 그렇게 마법을 폭발시킬만큼 격노한 것도 그 때문일 거고.
말도 못 배우게 가둬지고, 하찮게 여겨지고,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열등한 것처럼' 취급되는 상황에 자기를 대입했을 거 같음. 아버지 태도 보면 친가에서 있을 때 그 동물 유모 아니었다면 아마 글도 못배우고 제대로 된 사람 취급도 못받고 방치되었을 게 뻔함.
그걸 엘파바도 피부로 늘 느끼면서 자랐을 거임. 학교는 무슨 아예 집바깥에도 잘 안 내보이려고 해서 사람들이 영주한테 첫 번째 딸이 있는 줄도 모르는 걸. '안 보이는 존재'로 사회에서 밀려나서 배척되는 감각을 잘 아는 거지.

그러니 후반부에 진실이 드러났을 때, 엘파바에겐 그게 도저히 타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거야. 그건 자기 존재에 맞닿은 현실이니까. 자기가 지금껏 평생 아등바등 고통받았던 문제였으니까. 단순히 타고나기를 '어떤 존재'라는 이유로 쉽게 배척당하고 놀림받고 괴롭혀도 되는 대상으로 격하될 수 있다는 건.


디파잉 그래비티를 그렇게 절절하게 부르고나서도 결국 글린다가 엘파바와 함께 떠나지 못한 건 결국 그가 어쩔 수 없이 주류사회 속에서 버려지는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 거 같음.
아무리 엘피를 (그게 친구로서든 그 이상으로서든) 좋아하고 마음을 주었던들 글린다는 단 한번도 사회 바깥으로 밀려나 배척당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거든. 그게 얼마나 무섭고 견딜 수 없는지만 알지.
그래서 난 이 부분에서 묘하게 퀴어영화적 도식? 같은 걸 느낀게, 이미 퀴어로 찍혀서 평생 내적,외적으로 싸워온 캐릭터를 남몰래 친애할 수는 있어도(그리고 단 둘이 있을 때는 얼마든지 자기 맘을 밝히고 좋아한다고 해도) 차마 스스로 커밍아웃할 수는 없는 '정상 사회'의 굴레 속에 갇힌 캐릭터 구도처럼 보였거든...
나는 그래서 오히려 거기서 글린다가 홀랑 박차고 엘피 손을 잡고 떠났다면 그게 더 캐릭터가 얄팍해질 거라고 생각했음. 너무 안일하고 편리한 전개가 되었다고 느꼈을 거 같아서.

글린다는 살아온 특성상 주류계급으로서 지닌 특유의 시혜성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지만, 엘파바에게 확실히 감기긴 감겼다고 봄.
정신적인 반함이 분명 일어나긴 했지만, 내면에 깊이 프로그래밍된 걸 스스로 깨부술 만큼은 안 된거지.

아무튼 그래서 초반부터 누구보다도 반짝반짝 빛나고 사랑받고 저 위에 높이 떠올라있어 보이던 글린다가 사실 내면적으로는 누구보다도 지독하게 저 아래 갇혀서 스스로 만든 얄팍한 거짓과 기만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속이 썩어들어가게 되고,
모두가 경멸하고 피해서 사회의 저 아래 처해있는 듯 보였던 엘파바가 진실로 자기만의 자유를 찾아내 저 위로 박차올라 누구도 잡지 못할 곳으로 훨훨 날아가버렸다는 게 진짜 인상적이고 재미있는 대비라고 봄.
소위 말하는 정상 사회, 주류 사회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나' 속에 나를 가둘 것이냐, 내가 원하는 '나'로 떠나버릴 것이냐... 그 선택의 기로에 선 이들의 이야기라고 느낌. 이 질문에서 글린다와 엘파바는 각자 전자와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거고.
그게 위키드 뮤지컬 스토리가 가진 카타르시스이자 극적 절묘함이라고 생각하기도 함...

이런 점에서 위키드 뮤지컬이 주는 주제의식은 진짜 악이란 무엇인가, 겉으로 보이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뭘까, 이런 것 외에도 '과연 내가 나로서 있는 걸 사회가 배척할 때, 나는 어디까지 내 자아를 타협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 같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