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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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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비성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봤음에도 믿을수가 없었어. 처음에 무안에게서 이상이가 자신의 장원에 숨어있는것 같다고 들었을때 말도 않된다고 생각했어. 무안은 적비성의 오른팔이자 호위 시위로 항상 적비성과 같이 전장을 누볐기에 이상이의 얼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절대 적비성에게 거짓을 고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무안도 다른 임무를 수행하려 그 근처를 지나다 먼 발치에서 봤기때문에 처음엔 잘못 본거라고 여겼다고 했어. 하지만 너무 익숙한 얼굴인데다 적비성이 예전에 이상이를 얼마나 찾았는지 알기에 일단 보고하는거라고 했어.
반신반의 하면서도 일단 확인하지 않고는 못배길것 같았어. 십중팔구는 아닐거라고 여기면서도 발걸음을 재촉했어. 자신의 장원에 이런곳이 있었나 높고 두터운 담에 굵은 쇠사슬로 잠긴 묵직한 대문에 당도할때까지도. 무안이 자물쇠를 풀고 제법 힘겹게 문을 여니 문 틈 사이로 긴머리카락을 늘어트이고 있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올때까지도 말이야. 안아있던 이가 천천히 일어서니 바람결 따라 머리카락이 가볍게 나부끼며 어둠속에 달이 드러나듯 하얀 옆얼굴이 드러났어. 유려한 곡선이 많이 눈에 익었어.
마침내 온전히 드러난 모습에 적비성은 못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수가 없었어. 이미 죽어서 무덤까지 세워져있다는 보고를 듣고도 믿지 않았는데...고집스럽게 어딘가에 살아있을거라 여겼었는데 그렇다고 그가 이런식으로 눈 앞에 나타날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느릿하게 자신을 향하는 몸짓에 적비성은 반사적으로 도를 움켜쥐었다가 맥이 풀렸어. 눈앞의 이는 계속 적비성의 예상에 벗어났어. 그는 아주 공손하게 적비성앞에 무릎을 꿇고 고두했어.
무릎을 꿇었다고?
심사가 뒤틀리며 알수 없는 거부감에 적비성은 성큼성큼 다가가 엎드려있는 그의 팔을 거칠게 잡아올렸어. 종이 찢어지듯 힘 없이 끌려오는것에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어. 바로 코앞에서 마주 보고 있는 얼굴은 지난 수년간 그렇게 찾아헤매던 바로 그 사람이었어. 다소 초췌해보이지만 맑은 옥처럼 단아한 이목구비는 검을 맞대며 늘상 보던 그 얼굴이 맞는데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강을 따라 산을 너머 곳곳에 사람을 보내 찾아보았는데 자신의 영역안에 있었다고? 그것도 하루 이틀이면 충분히 갈수 있는곳에? 묻고 싶은게 많은데 무엇하나 소리낼수가 없었어.
- 이상이
적비성은 씹어내듯 이름 석자를 한자 한자 내뱉었어. 적비성의 이글이글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는 사뭇 여유로워 보였어. 그는 느릿하지만 또박또박하게 답했어.
- 신첩 이연화라고 합니다.
살풋 미소를 짓는 차분한 모습은 수년전 부서지는 햇살처럼 흪뿌리던 검광 너머로 패기만만하게 웃음을 터트리던 소년 장수를 일견 떠올리게 했어. 적비성은 혼란스러웠어. 눈 앞의 이는 분명 이상이가 맞는데 그는 자신을 이연화라 칭하고 있어.
- 무슨 속셈이냐 이상이.
- 작년에 폐하의 명을 받고 측비로 시집오지 않았습니까.
적비성의 머리속에 그제야 한해 전쯤 적국에서 시집와 얼굴 한번도 보지 않았던 측비를 떠올랐어. 황명이었지만 아무런 관심도 없었기에 오늘까지도 깨끗하게 잊고 있었지. 이상이가 자신의 측비로 들어왔다니? 약소국에서 대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이상이를 이런식으로 강대국에 보냈는지 모르지만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어. 지난 세월동안 속았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는데 작게 윽...하는 신음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이상이가 티는 안내지만 붙잡힌 팔목을 살짝 떨고 있었어.
- 왕야 실컷 보셨으면 이제 좀 놔주시겠습니까.
적비성의 입가가 차갑게 호를 그렸어. 팔을 놓아주며 동시에 적비성은 손을 들어 이상이를 공격했어. 그리 쎈 공격도 아니었건만 이상이는 몇걸음 피하지도 못한채 매서운 주먹에 어깨를 강타당했어. 가볍게 수를 쓴거라 내력을 많이 쓰진 않았는데 그럼에도 타격이 꽤 있었는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이상이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어.
적비성은 또다시 분노했고 또 실망했어. 적비성은 이상이와 다시 대결하는 날만을 꿈꿔왔어. 경위야 어쨌든간에 이젠 이상이를 찾아냈으니 그 동안 못다한 승부를 짓고 싶었어. 자신 못지 않게 호승심이 강한 이상이라면 적비성이 검을 든다면 응당 맞붙어야 했어. 충분히 대응할수 있는 공격이었어. 그런데 제대로 받아내기는 커녕 어이없게 당하고나 있다니. 약간 내상조차 입은듯 선혈이 선명한 입술을 보니 심기가 뒤틀렸어. 비틀거리다가 가볍게 기침하며 숨을 가다듬는 것에 적비성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웠어.
- 이 무슨 한심한 모습이냐 이상이.
적비성은 시선만으로도 눈 앞의 사람을 꿰뚫어버릴것 같았어. 하지만 이상이는 잔잔한 수면처럼 고요했어. 담담히 마주하는 시선에 드러나는것이 없이 이상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가늠할수가 없었어.
- 신첩이 어찌 감히 왕야께 비하겠습니까.
공손히 답하는 이상이의 태도는 딱 아랫사람의 그것이었어. 적비성은 잠시 이상이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어.
연화루 비성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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