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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1 00:59
긴글주의 캐붕주의 몰라그냥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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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수는 오랫만에 저자로 나왔다.
주루 2층에 자리를 안내 받고 앉으려고 할 때 였다.
밖으로 웅성거리며 소란스러웠다.
시비가 붙은 듯 했다.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구경하고 있었다.
석수가 옆에 서 있는 수하를 불렀다.
“ 무슨일이냐 ”
“ 사내가 여인을 희롱했고, 여인이 사내를 때렸다고 합니다. ”
석수가 주먹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 관아는 왜 오질 않는거냐 ”
“ 저기 오네요. 절대! 끼어들지 마세요. ”
수하를 째려보자 수하도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 이런 일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관아에서 처리하는 것이 맞아요. 그리고 희롱한 사내가 예부상서 댁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더더욱 끼어들지 마세요. ”
석수가 마땅찮은 듯 혀를 찼지만 틀린말은 아니였다.
관아와 백천원은 각각 담당하는 사건이 다르고 대상자가 달랐다. 백천원은 강호인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에만 손을 뻗을 수 있었고, 지금처럼 일반인과 강호인의 문제라면 관아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관원들은 몰려든 구경꾼들을 해산시키고 예부상서 아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예부상서 아들의 득의양양한 표정이 눈에 들어오자 석수의 미간이 구겨졌다.
“ 관원이라는 자들이 권력에 아첨하는 꼴이라니 한심하군 ”
관원들은 이내 희롱당한 여인에게 삿대질을 소리쳤다.
“ 어서 도련님께 사죄드리지 않고 뭐하느냐! 어여삐여겨주셨으면 감사하다 할일이지 감히 주먹을 휘둘러? ”
“ 저자가 내 부모도 아닌데 날 왜 어여삐여긴답니까? 그리고 그걸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무례가 아닙니까!
내 분명 이러지마시라 의사를 밝혔것만, 내 의사랑 상관없이 내 몸에 손을 댄 자에게 감사하다 하라고요? ”
소녀가 똑부러진 말투로 말했다.
“ 도성 사람들은 다 이렇습니까? 예도 수치도 모르고, 권력이 있는 자라면 죄를 지어도 굽신거리고 약자를 보살피지 않는다고요? ”
구경꾼들이 사라지자 여인의 뒷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빨간 중의 위에 흰 겉옷을 입은 소녀였다.
긴 머리를 높게 묶어 움직일때마다 결좋은 머리가 흔들렸다.
석수는 어딘가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슬러 10대로 돌아간 기분이였다. 그때 저런 뒷모습을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석수가 자리를 박차고 2층에서 아래로 훌쩍 뛰어내려 소녀에게 다가갔다.
“ 문주??? ”
사람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여인에 화들짝 놀랐다.
소녀가 고개를 돌려 석수를 바라봤다.
“ 문주..? ”
그녀의 기억 속 이상이와는 다른 얼굴에 석수는 순간 실망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연화와 꼭 닮은 얼굴이였다. 전체적인 이목구비가 이연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했다.
붓으로 그린 듯한 눈매와 오똑한 코하며, 도톰한 입술이 아름다운 소녀였다.
이연화의 유약함을 닮았으나 총명한 눈빛은 소녀의 내면이 얼마나 단단한지 보여줬다.
“ 왠 놈이냐!!! 방해하지 말고 썩꺼져라 ”
석수가 관원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낭자, 그럴리 없을테지만, 나도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냥 의미 없이 물어보는 것이오. 혹시 이연화란 사람을 아시오? ”
석수의 말에 소녀의 눈이 커졌다.
“ 제 아버지를 아세요? ”
방금 관원에게 날카로운 목소리를 호통친 사람과 다른 사람인 듯, 어린티가 나는 목소리였다.
석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소매에서 백천원의 패를 꺼내들었다.
“ 이 낭자는 강호인 같으니, 백천원도 개입하겠다. 어린 낭자를 희롱한 파렴치한을 감싸고, 피해자를 협박, 위협하였으니, 이 곳 관아에게도 그 죄를 물을 것이다. ”
석수의 말에 관원들도, 예부상서의 아들과 그와 함께 소녀를 희롱한 이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석수가 품에서 신호탄 두 개를 쏘아올렸다.
세도가 자식들도 하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2각 정도 지나자 세도가에서 하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왔다. 대여섯 명의 집에서 몰려온 사람의 수가 백명에 다달았다.
관아에서도 관원들이 달려와 그들을 포위했다.
그 중 한명의 관원이 앞으로 나왔다.
“ 왜 일을 키우십니까. 그냥 좋게좋게 끝내도 될 것을요. ”
“ 저 때문에 죄송해요. ”
소녀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석수는 애가 탔다.
제 문주를 꼭 닮은 문주의 아이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석수의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저 멀리 건물의 기와를 밟으며 공중에서 세 명의 사람이 훅 내려왔다.
“ 석 원로, 무슨 일이길래 긴급탄을 터트린건가요? ”
백강순이 장포를 펄럭이며 말했다.
석수는 아무말이 없었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소녀가 보였다.
“ 문...주? ”
운피구가 얼른 소녀에게 다가갔다.
“ 화..안이니? ”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운 원로! 이 무슨 일인가! 누군데... 이렇게... ”
“ 너 혼자 온거니? 문주..아니 이 선생은? 그리고 두 사람은? ”
운피구의 말에 백강순과 기한불은 이 소녀가 그들의 문주와 관련이 있음을 눈치챘다.
“ 저 혼자왔어요. 아버지는... ”
소녀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에요? ”
분홍빛 옷자락이 휘날리며 한명의 여인이 다가왔다.
“ 교 원로! ”
사람들의 공수를 받으며 교완만이 다가왔다.
교완만의 뒤로 상도문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소녀는 갑작스러운 전개에 놀란 듯 했다.
강호의 형당인 백천원이 개입하고, 누군지 모르는 대단한 사람들이 나타나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였다.
“ 상이.... ”
교완만이 큰걸음으로 화안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 화안이구나. 맞지? ”
석수와 백강순, 기한불이 눈을 크게 떴다.
“ 교 원로도 아시오? ”
“ 뭣들 하는거야! 여기서 무슨 신파를 찍어!!!! ”
예부상서의 아들이 삿대질을 하며 목청을 높였다.
화안이 예부상서의 아들을 향해 커다란 도를 빼어 들었다.
“ 나를 희롱하고 내 부모를 욕보인 네 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
석수가 네 사람에게 이 상황에 대해 대략적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정리할테니, 운피구와 교완만에게 화안을 주루로 데리고 가 왜 혼자 도성에 왔는지, 혹시 문주에게 무슨 일이 있는건 아닌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화안을 데리고 가려하자, 사람들이 계집을 내노라며 소리를 질렀다.
백천원과 교완만이 데리고 온 이들이 칼을 꺼내들자 그 박력에 사람들이 주춤거렸다.
교완만은 화안을 의자에 앉히고 화안의 손을 토닥거렸다.
“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한 십년전쯤 네 아버지가 너를 데리고 나를 만나러 왔었단다. 그 때도 이버지를 꼭 빼닮았는데 지금이은 아주 똑같구나. ”
운피구는 화안을 보자 기뻤다. 문주가 제게 안위를 부탁했었던 아이였다. 그와 동시에 불안감이 치솟았다.
“ 아가 어찌 어린 너 혼자 도성에 온거야? 이 선생은? 두 사람은? ”
화안의 턱이 움찔움찔하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엉엉 소리내 우는 서러운 울음소리에 교완만은 불길함을 느꼈다.
“ 다 저를 버렸어요. 아버지도, 적 의부도. ”
교완만과 운피구가 눈을 마주쳤다. 교완만의 목소리가 떨렸다.
“ 아가 천천히 말해봐 ”
화안이 망설이는 듯 했다.
” 얼마 전 방 의부가 도성에 잠시 다녀온다며 서신을 놓고 사라졌어요. 저는 알아요. 방 의부도... 저를 버린거예요. “
두 사람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운피구가 사람을 불러 천기산장으로 소식을 전하라 했다.
화안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었다.
2각 정도 후 주루 안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소화!!!! ”
방다병의 부름에 화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의부!! ”
“ 다친 곳은 없어? 여긴 어찌 온거야! 내가 분명 서신을 남겼잖아! ”
방다병의 꾸짖는 듯한 말투에 화한이 다시 서럽게 울었다.
“ 의부도 날 버린 줄 알았단말야!! ”
방다병이 멈칫했다. 이내 화안을 안아주었다.
“ 내가.. 내가 널 어떻게.. ”
“ 상이....상이에겐 별일 없는거죠? 방대협? ”
교완만의 목소리가 떨렸다.
방다병의 눈가가 빨개졌다.
방다병이 점원을 불렀다. 화안이 지쳤으니 방에서 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화안은 방다병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으나,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다는 말에 잠시 방에서 쉬기로 했다.
세 사람이 탁자에 둘러앉았다.
“ 한달 전, 이연화를 묻었어요. ”
보통의 아침이였다. 이연화는 아침잠이 많았다. 화안까지 일어나고 한참 후에 이연화는 게으른 표정으로 일어나 방다병이 차린 아침을 먹었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 아버지 너무 안일어나는거 아니예요? ”
“ 소화, 니가 가서 좀 깨워. 어찌 네 아버지는 자식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고 저리 게으름을 피우는걸까? ”
방다병이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화안이 내실로 들어갔다. 커다란 침상에 누운 제 아버지가 보였다.
화안은 웃으며 침상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갔다.
화안도 알고 있었다. 이연화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라는 것을. 그리고 의부 둘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어찌 보면 참 이상한 관계일 수 있었다.
세 명의 사내가 한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하지만 이상하다거나 괴이하게 생각하기에는 그들 세 사람의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 아버지 아버지! 이제 일어나셔야죠. ”
화안이 이불 속에서 이연화의 몸을 끌어안았다.
몸은 여전히 따뜻했으나, 어딘가 이상했다.
이불 밖으로 고개를 꺼내 이연화의 얼굴을 바라봤다.
화안이 떨리는 손으로 이연화의 코끝에 손가락을 대었다.
“ 아버지!!!!!! ”
화안의 비명소리에 적비성과 방다병이 내실로 들어왔다.
“ 무슨 일이야? ”
“ 아버지! 눈 좀 떠봐! 장난치지 말고! ”
화안이 이연화의 몸을 흔들며 울고 있었다.
방다병이 휘청거리며 느릿하게 내실로 들어왔다.
침상에 걸터앉아 멍하니 이연화를 바라보다 웃었다.
“ 소화, 넌 바보처럼 네 아버지의 장난에 또 속은거야! ”
그러면서도 벌벌 떠는 손으로 이연화의 손목의 맥을 짚었다.
“ 아비. 나 손이.. 손이 좀 떨려서 맥을 못 짚겠어. 니가... 니가 좀... ”
방다병의 큰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 이럴 순 없잖아? 이렇게.. 이렇게.. ”
방다병이 이연화의 몸 위로 엎어져 짐승처럼 울부졌다.
방다병과 화안이 오열하는 동안 적비성은 발이 땅에 붙은 것 마냥 내실 입구에 서서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49일이 지났다. 햇볕이 따뜻하고 강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이연화를 묻었다.
어쩐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언젠가처럼 들러붙는 세 사람을 피해 저자에 놀러나갔거나, 약초를 캐러 산에 갔다던가. 이연화가 없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연화를 묻은 다음 날 아침 화안이 방다병의 방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왔다.
“ 의부!!! ”
놀란 방다병이 몸을 일으켰다.
“ 무슨 일이야? ”
“ 적 의부가... ”
화안과 함께 내실로 들어가자 적비성이 늘 몸에 지녔던 커다란 도와 언젠가 이연화가 선물한, 한시도 떼 놓은 적 없던 옥패가 탁자 위에 있었다.
방다병은 직감했다.
적비성이 이연화의 뒤를 따라갔음을.
화안도 눈치를 챘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방다병은 적비성이 부럽고 미웠다.
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화안을 내려다 보았다. 아이의 존재가 가슴을 짓눌렀다.
“ 화안도 이제 15살이니,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할 것 같아, 어머니께 화안을 부탁하려고 왔어요. ”
교완만은 입을 틀어막고 새어나오려는 소리를 감켰다.
“ 상이는... 편하게 갔나요? ”
“ 전날도 보통의 날들과 똑같았어요. 크게 아프지도 않았고. 한 오년전 쯤, 약마가 그러더라고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이니 늘 준비하고 있으라고요. 저랑 아비는 믿지 않았지만. ”
“ 화안을 맡기고 나서 방 대협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
운피구의 말에 방다병이 멈칫했다.
“ 설마 문주를 따라가실 생각입니까? ”
방다병의 눈가가 붉어졌다.
“ 하루하루가 지옥같아요. 매분매초 이연화가 보고싶어요. 소화를 볼 때마다, 저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이연화가 좀 더 살았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를... 화안을.. ”
“ 역시 그렇지? 날 버리려던 게 맞잖아! ”
언제 나왔는지 계단 아래에서 화안이 울면서 방다병을 노려보았다.
“ 소화.. ”
방다병이 당황한 얼굴로 화안에게 다가갔다.
“ 아니.. 나는.. ”
방다병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연화가 목숨걸고 낳았고 15년을 애지중지 키웠다. 당연히 소중했다. 하지만 이연화가 죽고난 후 삶의 모든게 버거웠다. 화안의 존재도 방다병을 숨막히게 했다.
“ 내가 아버지를 빼다박았다며! 날 아버지라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
짝-
바로 전까지만해도 미안함이 가득했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 누구도.. 그게 너라고 해도 이연화를 대신할 수 없어. ”
방다병이 화안을 뒤로하고 주루 밖으로 나갔다.
화안은 한쪽 뺨을 부여 잡고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했다.
교완만이 얼른 달려와 화안을 안았다.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는 이연화의 아이를 보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운피구는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왔다.
밖은 어느정도 정리가 된 듯 했다.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는 천기당의 전 당주인 방다병까지 나서자 예부상서의 아들은 패배한 개처럼 꼬리를 말았다. 관원들도 당혹감에 휩싸였다.
“ 내 딸아이를 희롱했다고? 예부상서라면 패융각이겠군. 가서 전해라. 방다병이 만나고 싶어하니 이 곳으로 당장 오라고. ”
그리고 관원들을 향해서도 말했다.
“ 이가양에게도 전해라. 내가 만나고 싶어하니 당장 이 곳으로 오라고. ”
2각이 좀 넘자 저 멀리서 화려한 장포를 입은 사내 둘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화안이 객실 창문너머로 방다병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오늘 보는 방다병의 모습은 다 처음보는 모습이였다.
방다병은 자신에게 단 한번도 화를 내거나 매를 든 적이 없었다. 언제나 이연화를 뒤를 따라다니며 웃고 있었고 가끔씩 이연화에게 혼이 났다. 혼난 방다병이 축처져 있으면 화안이 위로해주곤 했다.
어렴풋이 방다병이나 적비성이 시골 구석에서 농사나 지으며, 이연화와 함께 약이나 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나치게 돈과 재물이 많았고, 가끔씩 두 사람을 만나러 오는 이들은 그들을 굉장히 깍듯하게 대했다.
예부상서나, 관아의 관리라면 대단한 사람들일텐데 두 사람 모두 방다병의 앞에서 허리를 숙인 채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
밖에 있는 방다병은 그녀가 알 던 사람과 완전히 달랐다.
교완만이 화안의 곁에서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방 의부는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전 그동안 의부가 화내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언제나 웃고 있으셨죠. ”
화안의 말에 교완만이 희미하게 웃었다.
“ 난 몇 번 봤어. 두 사람이 이어지기 전에. ”
“ 두 의부의 손목에 연꽃 모양의 화상 자국이 있어요. 아버지가 준 예물이라고 했어요. 두 사람은 흉터가 연해지면 아버지께 다시 찍어달라고 졸랐죠. ”
화안이 자신의 손목을 문질렀다. 어렸을 땐 자신도 연꽃 흉터를 가지고 싶어 제 아버지를 졸랐었다.
“ 아버지를 묻고난 후, 적 의부도 떠나고 난 어느 밤에 혼자인게 두려워 의부에게 갔었어요. 그 때 의부가 울면서 자신의 몸에 낙인을 찍는걸 봤어요. 팔이며 다리에는 연꽃모양 화상자국이 가득했어요. ”
화안의 등을 쓰다듬던 교완만의 손이 멈칫했다.
“ 어느정도는 저도 알고 있어요. 방 의부는 제가 없었다면 벌써 아버지를 따라갔을거라는걸요. 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고 계신거죠. ”
화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을 소매로 닦고선 교완만을 보며 웃었다. 이연화와 꼭 닮은 웃음에 교완만 역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 아! 제가, 뭐라고 불러야해요? 상도문의 전 문주시라면서요? ”
“ 날 의모라고 부르렴. 그 옛날, 엇갈리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넌 내 딸로 태어났을 수도 있었으니. ”
똑똑-
“ 화안, 네 의부가 널 부르는구나. ”
운피구가 문 밖에서 조심스레 말했다.
밖으로 나가자 그녀를 희롱한 사내들과 그녀를 핍박했던 관원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있었다.
“ 낭자! 제가 아들놈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해 낭자께 무례를 저질렀네요. 죄송합니다. ”
나이 지긋한 사내가 연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또 한명의 사내가 무릎을 꿇은 관원들을 발로 차며 윽박을 질렀다.
“ 아가씨 제가 이 모자란 놈들을 제대로 손봐놓겠습니다. 다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께.. 잘 좀.. ”
화안이 슬쩍 곁눈질로 방다병을 바라봤다.
아버지께 혼나면 둥근 눈에 침울함을 담고 하소연을 하던 그 사내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소동이 마무리 된 후, 화안은 잠시 잠이 들었었다. 너무 많이 울었던지 그녀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방다병이 백천원의 네 명의 원로와 교완만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했다.
이연화의 죽음 앞에 여섯 사람은 침통함을 금치 못했다.
“ 왜 알리지도 않았던거야! 방다병!! ”
석수의 목소리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 너 때문에 문주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어! 왜 알리지 않은거냐고! ”
백강순과 기한불도 방다병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 어디 정신이 있었겠어요. 오죽하면, 알릴 정신도 없었겠어요. ”
교완만이 방다병을 두둔하며 석수를 달랬다.
“ 만약 화안을 도성에 맡기는 거라면 백천원에서 돌보겠어. 문주의 딸이니 우리가 돌보는게 맞지. ”
“ 그게 좋겠군요. 우리 네 명은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 있으니 화안을 돌보는데 적합하겠네요. ”
운피구가 드물게 감정을 보이며 말했다.
“ 미안해서 어쩌죠. 화안은 제가 모만산장으로 데리고 가기로 했어요. 저 역시 한가하니 제가 돌보려고요. ”
방다병이 고개를 들고 교완만을 바라봤다.
어쩌면, 교완만에게 보내는게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었다.
“ 그래주시겠어요? ”
방다병이 침상에 누워있는 화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연화 혼자 낳은 것처럼 화안은 이연화의 얼굴을 꼭 닮았다.
15살의 이연화라,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하도 울어 부운 눈가를 가만히 매만졌다.
화안에게 미안하고 이연화에게 미안했지만 방다병도 더는 어쩔 수 없었다.
화안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 위로 화안의 손이 올려졌다.
“ 의부, 18살 생일이 되면, 그 때 절 만나러 와주실래요? 그 땐 저도 어른이니,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을거예요. 그 때까지만, 제가..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아버지. ”
방다병의 눈물이 화안의 얼굴로 떨어졌다.
지옥같은 시간이 3년이나 늘어났지만, 마지막으로 그 정도는 해야 나중에 이연화를 만나도 면목이 설 것 같았다.
방다병이 화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천천히 사라졌다.
화안은 혹시라도 방다병이 들을까 이불을 입에 물고 오열했다.
3년의 시간이 그의 아버지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지만 화안 역시 제 부모를 모두 다 잃은 슬픔은 감당할 수 없었다.
쏜 화살같이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교완만은 화안이 진짜 자신의 딸인 것처럼 돌봤고, 백천원의 네 명의 원로 역시 친딸처럼 그녀를 보살폈다.
가끔씩 제 아버지와 두 의부를 생각하며 슬픔에 빠지는 날이 있었지만 슬픔은 길지 않았다. 15년간 넘치는 사랑과 보살핌 속에 있었으니 세 사람을 생각하면 슬픔보다는 즐거운 추억이 더 많이 생각났다.
드디어 도성에서 맞는 3번째 생일이 돌아왔다. 그녀도 18살 성인이 되었다.
교완만은 벌써부터 그녀의 생일과 성인식 준비에 열과 성을 다 했다.
모만산장의 곳곳에 붉은 휘장과 금빛 장식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호사스러운게 아니냐는 화안의 말에 교완만은 아직 반 밖에 꾸미지 않은거라고 했다.
백천원에서 성인식에 쓸 거라며 휘황찬란한 가구와 장식들을 보내왔다.
3년간 방다병에게선 서신 한통 없었지만 화안은 그의 의부가 약속을 꼭 지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다병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될 지 모르는 자신의 18번째 생일이 빨리 오기를 바라기도, 평생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떠들썩한 음악과 펄럭거리는 깃발이 화려하게 공중을 장식했다.
상도문 전 문주의 양녀의 생일 연회엔 강호의 많은 문파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보통 여인의 성인식과 다르게 화안은 앞에 나서서 사람들을 맞이했다. 인형처럼 앉아서 제 의부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3년 동안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이제는 혼자서기를 할 수 있을만큼 성장했음을 보여 그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
오전부터 사람들을 맞이했고, 정오가 되자 성인식이 진행되었다.
교완만이 우는 듯 웃는 듯한 얼굴로 화안의 머리에 비녀를 꽂아줬다.
아름다운 소녀가 여인이 되었다. 백천원의 세 명의 원로는 연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석수는 주책들 떨지말라고 타박했지만 그녀의 눈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생일 연회가 시작되었다.
화안은 제 생일 연회에 와준 사람들께 인사를 하고 연회에 참여하면서도 입구를 힐끔거렸다.
제 의부는 꼭 올 것이니 제일 먼저 방다병을 맞이하고 싶었다.
교완만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침울해지는 자신의 양녀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날은 금새 저물었다. 생일 연회도 다 끝이 났다.
연회가 끝나고도 화안은 입구를 서성거렸다.
교완만과 백천원 네 원로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화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저 멀리 모만산장을 향해오는 불빛이 보였다.
화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교완만과 네 원로도 화안 곁으로 다가왔다.
불빛이 점점 다가올 수록 하나의 불빛이 아니였다. 수 십명의 사람들이 어두운 밤, 모만산장을 향해 오고 있었다.
화안을 비롯한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교완만의 손짓에 주위에 있던 수하들이 입구로 몰려왔다.
횃불을 든 사람들이 입구 근처로 다가왔다.
다행히 무장한 사람들은 아니였고 촌민들이였다.
여자남자, 노인, 어린아이가 모두 섞여있었다.
한 노인이 문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목소리를 냈다.
“ 이곳에 화안 아가씨가 계신가요? ”
화안이 교완만을 쳐다봤다. 교완만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안이 한 발 앞으로 나갔다.
“ 제가 화안인데요. 누구..누구시죠? ”
촌민들이 잠시 웅성거리는 듯 하다 갑자기 절을 했다.
“ 은인의 따님께 인사드립니다. ”
화안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노인의 몸을 일으켰다.
“ 은인이라뇨? 누구.. ”
노인이 품에서 무명천으로 싼 무언가를 꺼내 건냈다.
“ 은인께서, 아가씨께 전해달라하셨습니다. 생일 선물이라고요. 그리고 약속을 못지켜서 미안하다고. ”
화안이 떨리는 손으로 무명천을 열자 쪼개진 비녀가 나왔다.
“ 은인께 건내받고 부러진걸 알았습니다. 고쳐서 드릴까 하다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물건이니 그대로 전달드리는게 맞는 것 같아서 그대로 들고 왔어요. ”
“ 아버지는요? 제 아버지는요? ”
화안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후두둑 떨어졌다.
“ 제.. 아버지는요..? ”
미려촌은 필금산이라고 부르는 야트막한 산에서 흐르는 물길 하류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였다.
산의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가 그들의 식수원이였지만 간혹 비가 많이 내리면 그 물줄기로 인해 마을이 해를 입기도 했다.
그래서 미려촌이 있는 요서현에서는 상류에 고인 물이 갑자기 미려촌으로 쏟아내리지 않게 제방을 쌓기도, 물줄기를 주변으로 돌리는 등 여러가지 방법을 찾았고 그럭저럭 큰 피해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곳을 지나는 남자가 있었다.
최근 비가 많이 와, 상류 쪽 마을로 가려다가 잠시 머물게 되었다.
남자는 비가 내리는 모습과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다 마을 촌장을 찾아갔다.
남자의 말은 이랬다.
최근 이 지역에 비가 많이 온 것 같다며, 산의 지반이 흘러내린 흔적이 많고, 제방의 상태가 좋지 않아보이니 대피하는게 좋겠다는 말이였다.
생활터전을 두고 떠나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더군다나 몇년동안 큰 피해는 없었던 터라 더더욱 떠날 수 없었다.
비는 계속 쏟아졌다. 남자는 각 집들을 돌면서 이대로 가다간 큰 사고가 날 수 있으니 주변 마을이나 지대가 높은 곳으로 이동하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조금 심드렁한 표정을 했다.
갑자기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사람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상류의 제방이 큰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었다. 그 틈으로 물길이 새어나오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쏟아져 내렸다.
피할 시간조차 없었다. 이대로 다 수장되겠다고 생각할 때 남자가 산 근처로 빠르게 날아갔다.
산으로 검기를 날려 산의 일부를 무너트렸다. 물길을 막아 당장 마을이 물에 잠기는 걸 막았다. 계속 검기와 장을 날려가며 물길을 돌리기 위해 뛰어다녔다.
사람들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남자의 잔상을 뒤쫒았다.
쏟아지는 물과 바위들이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물줄기는 마을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주변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의 표정이 공포에서 환희로 바뀌는 순간이였다. 서로 부둥켜 안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이 산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마을의 은인이였다.
산 가까이 다가가도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촌장이 소리쳤다. 어서! 어서들 찾게나-
사람들이 남자를 찾아냈을 때는 남자는 커다란 바위에 깔린 상태였다. 어깨 아래로는 바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달라붙어 바위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커다란 바위는 꿈쩍하지 않았다.
- 괜히 힘빼지 마세요.
남자가 피를 울컥 쏟아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 대협! 조금만 힘내십시오! 저희가 구해드릴게요.
남자가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이상한 모양으로 꺽인 팔을 내밀었다.
- 부탁을...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상도문.. 모만산장에 있는 제 딸.. 화안에게 이걸 전해주세요. 생일 축하단다고. 그리고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고요.
화안이 주저 앉아 오열했다. 목이 메이고 가슴이 답답해 꺽꺽 소리가 났다.
소녀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산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손에 쥔 쪼개진 비녀는 울퉁불퉁하고 매무새가 좋지 않았다. 비녀 머리는 뭘 조각한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냥 보아도 윤기나는 옥은 최상임이 틀림없었다.
주신촌 사람들이 마을 어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말 발굽소리와 뿌연 흙먼지가 보였다. 얼마되지 않아 그들이 기다리던 사람이 눈 앞으로 나타났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는 사람은 이제 갓 스물이 될까말까한 여인이였다.
흰색 옷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었으며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 산적 토벌을 요청하셨죠? ”
여인의 목소리는 조금 낮은 듯 했으나 청량했다.
사람들은 불안해졌다. 가냘프고 어린 여인의 모습에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드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여인은 사람들의 불안한 표정을 읽었던지 웃으면서 등뒤에서 커다란 도를 꺼내서 멋드러지게 휘둘렀다.
여인의 몸통만큼 두껍고 긴 도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모습에 사람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 소문은 들어보셨죠? 커다란 도를 휘두르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협객이 있다고! 그게 바로 저예요! ”
여인이 꺄르륵 웃었다.
“ 자 이제 안내해주세요! 빨리 해치우고 다음 마을로 넘어가야하거든요. ”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 초입에 들어섰다.
“ 여러분은 마을로 돌아가시고 혹시 모르니 제가 돌아올때까지 문을 잘 잠그고 계세요. ”
사람들을 물린 여인은 콧노래를 부르며 커다란 도를 뽑았다.
“ 오늘도 잘 부탁해요. 아버지들! ”
연화루 이연화 다병연화 비성연화
드디어 끝이다!!!!! 읽어준 붕붕이들 덕분에 끝을 냈다.
곧 주말이다! 우리 붕붕이들 행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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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수는 오랫만에 저자로 나왔다.
주루 2층에 자리를 안내 받고 앉으려고 할 때 였다.
밖으로 웅성거리며 소란스러웠다.
시비가 붙은 듯 했다.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구경하고 있었다.
석수가 옆에 서 있는 수하를 불렀다.
“ 무슨일이냐 ”
“ 사내가 여인을 희롱했고, 여인이 사내를 때렸다고 합니다. ”
석수가 주먹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 관아는 왜 오질 않는거냐 ”
“ 저기 오네요. 절대! 끼어들지 마세요. ”
수하를 째려보자 수하도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 이런 일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관아에서 처리하는 것이 맞아요. 그리고 희롱한 사내가 예부상서 댁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더더욱 끼어들지 마세요. ”
석수가 마땅찮은 듯 혀를 찼지만 틀린말은 아니였다.
관아와 백천원은 각각 담당하는 사건이 다르고 대상자가 달랐다. 백천원은 강호인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에만 손을 뻗을 수 있었고, 지금처럼 일반인과 강호인의 문제라면 관아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관원들은 몰려든 구경꾼들을 해산시키고 예부상서 아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예부상서 아들의 득의양양한 표정이 눈에 들어오자 석수의 미간이 구겨졌다.
“ 관원이라는 자들이 권력에 아첨하는 꼴이라니 한심하군 ”
관원들은 이내 희롱당한 여인에게 삿대질을 소리쳤다.
“ 어서 도련님께 사죄드리지 않고 뭐하느냐! 어여삐여겨주셨으면 감사하다 할일이지 감히 주먹을 휘둘러? ”
“ 저자가 내 부모도 아닌데 날 왜 어여삐여긴답니까? 그리고 그걸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무례가 아닙니까!
내 분명 이러지마시라 의사를 밝혔것만, 내 의사랑 상관없이 내 몸에 손을 댄 자에게 감사하다 하라고요? ”
소녀가 똑부러진 말투로 말했다.
“ 도성 사람들은 다 이렇습니까? 예도 수치도 모르고, 권력이 있는 자라면 죄를 지어도 굽신거리고 약자를 보살피지 않는다고요? ”
구경꾼들이 사라지자 여인의 뒷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빨간 중의 위에 흰 겉옷을 입은 소녀였다.
긴 머리를 높게 묶어 움직일때마다 결좋은 머리가 흔들렸다.
석수는 어딘가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슬러 10대로 돌아간 기분이였다. 그때 저런 뒷모습을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석수가 자리를 박차고 2층에서 아래로 훌쩍 뛰어내려 소녀에게 다가갔다.
“ 문주??? ”
사람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여인에 화들짝 놀랐다.
소녀가 고개를 돌려 석수를 바라봤다.
“ 문주..? ”
그녀의 기억 속 이상이와는 다른 얼굴에 석수는 순간 실망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연화와 꼭 닮은 얼굴이였다. 전체적인 이목구비가 이연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했다.
붓으로 그린 듯한 눈매와 오똑한 코하며, 도톰한 입술이 아름다운 소녀였다.
이연화의 유약함을 닮았으나 총명한 눈빛은 소녀의 내면이 얼마나 단단한지 보여줬다.
“ 왠 놈이냐!!! 방해하지 말고 썩꺼져라 ”
석수가 관원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낭자, 그럴리 없을테지만, 나도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냥 의미 없이 물어보는 것이오. 혹시 이연화란 사람을 아시오? ”
석수의 말에 소녀의 눈이 커졌다.
“ 제 아버지를 아세요? ”
방금 관원에게 날카로운 목소리를 호통친 사람과 다른 사람인 듯, 어린티가 나는 목소리였다.
석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소매에서 백천원의 패를 꺼내들었다.
“ 이 낭자는 강호인 같으니, 백천원도 개입하겠다. 어린 낭자를 희롱한 파렴치한을 감싸고, 피해자를 협박, 위협하였으니, 이 곳 관아에게도 그 죄를 물을 것이다. ”
석수의 말에 관원들도, 예부상서의 아들과 그와 함께 소녀를 희롱한 이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석수가 품에서 신호탄 두 개를 쏘아올렸다.
세도가 자식들도 하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2각 정도 지나자 세도가에서 하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왔다. 대여섯 명의 집에서 몰려온 사람의 수가 백명에 다달았다.
관아에서도 관원들이 달려와 그들을 포위했다.
그 중 한명의 관원이 앞으로 나왔다.
“ 왜 일을 키우십니까. 그냥 좋게좋게 끝내도 될 것을요. ”
“ 저 때문에 죄송해요. ”
소녀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석수는 애가 탔다.
제 문주를 꼭 닮은 문주의 아이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석수의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저 멀리 건물의 기와를 밟으며 공중에서 세 명의 사람이 훅 내려왔다.
“ 석 원로, 무슨 일이길래 긴급탄을 터트린건가요? ”
백강순이 장포를 펄럭이며 말했다.
석수는 아무말이 없었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소녀가 보였다.
“ 문...주? ”
운피구가 얼른 소녀에게 다가갔다.
“ 화..안이니? ”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운 원로! 이 무슨 일인가! 누군데... 이렇게... ”
“ 너 혼자 온거니? 문주..아니 이 선생은? 그리고 두 사람은? ”
운피구의 말에 백강순과 기한불은 이 소녀가 그들의 문주와 관련이 있음을 눈치챘다.
“ 저 혼자왔어요. 아버지는... ”
소녀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에요? ”
분홍빛 옷자락이 휘날리며 한명의 여인이 다가왔다.
“ 교 원로! ”
사람들의 공수를 받으며 교완만이 다가왔다.
교완만의 뒤로 상도문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소녀는 갑작스러운 전개에 놀란 듯 했다.
강호의 형당인 백천원이 개입하고, 누군지 모르는 대단한 사람들이 나타나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였다.
“ 상이.... ”
교완만이 큰걸음으로 화안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 화안이구나. 맞지? ”
석수와 백강순, 기한불이 눈을 크게 떴다.
“ 교 원로도 아시오? ”
“ 뭣들 하는거야! 여기서 무슨 신파를 찍어!!!! ”
예부상서의 아들이 삿대질을 하며 목청을 높였다.
화안이 예부상서의 아들을 향해 커다란 도를 빼어 들었다.
“ 나를 희롱하고 내 부모를 욕보인 네 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
석수가 네 사람에게 이 상황에 대해 대략적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정리할테니, 운피구와 교완만에게 화안을 주루로 데리고 가 왜 혼자 도성에 왔는지, 혹시 문주에게 무슨 일이 있는건 아닌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화안을 데리고 가려하자, 사람들이 계집을 내노라며 소리를 질렀다.
백천원과 교완만이 데리고 온 이들이 칼을 꺼내들자 그 박력에 사람들이 주춤거렸다.
교완만은 화안을 의자에 앉히고 화안의 손을 토닥거렸다.
“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한 십년전쯤 네 아버지가 너를 데리고 나를 만나러 왔었단다. 그 때도 이버지를 꼭 빼닮았는데 지금이은 아주 똑같구나. ”
운피구는 화안을 보자 기뻤다. 문주가 제게 안위를 부탁했었던 아이였다. 그와 동시에 불안감이 치솟았다.
“ 아가 어찌 어린 너 혼자 도성에 온거야? 이 선생은? 두 사람은? ”
화안의 턱이 움찔움찔하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엉엉 소리내 우는 서러운 울음소리에 교완만은 불길함을 느꼈다.
“ 다 저를 버렸어요. 아버지도, 적 의부도. ”
교완만과 운피구가 눈을 마주쳤다. 교완만의 목소리가 떨렸다.
“ 아가 천천히 말해봐 ”
화안이 망설이는 듯 했다.
” 얼마 전 방 의부가 도성에 잠시 다녀온다며 서신을 놓고 사라졌어요. 저는 알아요. 방 의부도... 저를 버린거예요. “
두 사람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운피구가 사람을 불러 천기산장으로 소식을 전하라 했다.
화안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었다.
2각 정도 후 주루 안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소화!!!! ”
방다병의 부름에 화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의부!! ”
“ 다친 곳은 없어? 여긴 어찌 온거야! 내가 분명 서신을 남겼잖아! ”
방다병의 꾸짖는 듯한 말투에 화한이 다시 서럽게 울었다.
“ 의부도 날 버린 줄 알았단말야!! ”
방다병이 멈칫했다. 이내 화안을 안아주었다.
“ 내가.. 내가 널 어떻게.. ”
“ 상이....상이에겐 별일 없는거죠? 방대협? ”
교완만의 목소리가 떨렸다.
방다병의 눈가가 빨개졌다.
방다병이 점원을 불렀다. 화안이 지쳤으니 방에서 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화안은 방다병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으나,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다는 말에 잠시 방에서 쉬기로 했다.
세 사람이 탁자에 둘러앉았다.
“ 한달 전, 이연화를 묻었어요. ”
보통의 아침이였다. 이연화는 아침잠이 많았다. 화안까지 일어나고 한참 후에 이연화는 게으른 표정으로 일어나 방다병이 차린 아침을 먹었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 아버지 너무 안일어나는거 아니예요? ”
“ 소화, 니가 가서 좀 깨워. 어찌 네 아버지는 자식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고 저리 게으름을 피우는걸까? ”
방다병이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화안이 내실로 들어갔다. 커다란 침상에 누운 제 아버지가 보였다.
화안은 웃으며 침상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갔다.
화안도 알고 있었다. 이연화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라는 것을. 그리고 의부 둘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어찌 보면 참 이상한 관계일 수 있었다.
세 명의 사내가 한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하지만 이상하다거나 괴이하게 생각하기에는 그들 세 사람의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 아버지 아버지! 이제 일어나셔야죠. ”
화안이 이불 속에서 이연화의 몸을 끌어안았다.
몸은 여전히 따뜻했으나, 어딘가 이상했다.
이불 밖으로 고개를 꺼내 이연화의 얼굴을 바라봤다.
화안이 떨리는 손으로 이연화의 코끝에 손가락을 대었다.
“ 아버지!!!!!! ”
화안의 비명소리에 적비성과 방다병이 내실로 들어왔다.
“ 무슨 일이야? ”
“ 아버지! 눈 좀 떠봐! 장난치지 말고! ”
화안이 이연화의 몸을 흔들며 울고 있었다.
방다병이 휘청거리며 느릿하게 내실로 들어왔다.
침상에 걸터앉아 멍하니 이연화를 바라보다 웃었다.
“ 소화, 넌 바보처럼 네 아버지의 장난에 또 속은거야! ”
그러면서도 벌벌 떠는 손으로 이연화의 손목의 맥을 짚었다.
“ 아비. 나 손이.. 손이 좀 떨려서 맥을 못 짚겠어. 니가... 니가 좀... ”
방다병의 큰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 이럴 순 없잖아? 이렇게.. 이렇게.. ”
방다병이 이연화의 몸 위로 엎어져 짐승처럼 울부졌다.
방다병과 화안이 오열하는 동안 적비성은 발이 땅에 붙은 것 마냥 내실 입구에 서서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49일이 지났다. 햇볕이 따뜻하고 강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이연화를 묻었다.
어쩐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언젠가처럼 들러붙는 세 사람을 피해 저자에 놀러나갔거나, 약초를 캐러 산에 갔다던가. 이연화가 없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연화를 묻은 다음 날 아침 화안이 방다병의 방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왔다.
“ 의부!!! ”
놀란 방다병이 몸을 일으켰다.
“ 무슨 일이야? ”
“ 적 의부가... ”
화안과 함께 내실로 들어가자 적비성이 늘 몸에 지녔던 커다란 도와 언젠가 이연화가 선물한, 한시도 떼 놓은 적 없던 옥패가 탁자 위에 있었다.
방다병은 직감했다.
적비성이 이연화의 뒤를 따라갔음을.
화안도 눈치를 챘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방다병은 적비성이 부럽고 미웠다.
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화안을 내려다 보았다. 아이의 존재가 가슴을 짓눌렀다.
“ 화안도 이제 15살이니,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할 것 같아, 어머니께 화안을 부탁하려고 왔어요. ”
교완만은 입을 틀어막고 새어나오려는 소리를 감켰다.
“ 상이는... 편하게 갔나요? ”
“ 전날도 보통의 날들과 똑같았어요. 크게 아프지도 않았고. 한 오년전 쯤, 약마가 그러더라고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이니 늘 준비하고 있으라고요. 저랑 아비는 믿지 않았지만. ”
“ 화안을 맡기고 나서 방 대협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
운피구의 말에 방다병이 멈칫했다.
“ 설마 문주를 따라가실 생각입니까? ”
방다병의 눈가가 붉어졌다.
“ 하루하루가 지옥같아요. 매분매초 이연화가 보고싶어요. 소화를 볼 때마다, 저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이연화가 좀 더 살았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를... 화안을.. ”
“ 역시 그렇지? 날 버리려던 게 맞잖아! ”
언제 나왔는지 계단 아래에서 화안이 울면서 방다병을 노려보았다.
“ 소화.. ”
방다병이 당황한 얼굴로 화안에게 다가갔다.
“ 아니.. 나는.. ”
방다병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연화가 목숨걸고 낳았고 15년을 애지중지 키웠다. 당연히 소중했다. 하지만 이연화가 죽고난 후 삶의 모든게 버거웠다. 화안의 존재도 방다병을 숨막히게 했다.
“ 내가 아버지를 빼다박았다며! 날 아버지라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
짝-
바로 전까지만해도 미안함이 가득했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 누구도.. 그게 너라고 해도 이연화를 대신할 수 없어. ”
방다병이 화안을 뒤로하고 주루 밖으로 나갔다.
화안은 한쪽 뺨을 부여 잡고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했다.
교완만이 얼른 달려와 화안을 안았다.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는 이연화의 아이를 보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운피구는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왔다.
밖은 어느정도 정리가 된 듯 했다.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는 천기당의 전 당주인 방다병까지 나서자 예부상서의 아들은 패배한 개처럼 꼬리를 말았다. 관원들도 당혹감에 휩싸였다.
“ 내 딸아이를 희롱했다고? 예부상서라면 패융각이겠군. 가서 전해라. 방다병이 만나고 싶어하니 이 곳으로 당장 오라고. ”
그리고 관원들을 향해서도 말했다.
“ 이가양에게도 전해라. 내가 만나고 싶어하니 당장 이 곳으로 오라고. ”
2각이 좀 넘자 저 멀리서 화려한 장포를 입은 사내 둘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화안이 객실 창문너머로 방다병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오늘 보는 방다병의 모습은 다 처음보는 모습이였다.
방다병은 자신에게 단 한번도 화를 내거나 매를 든 적이 없었다. 언제나 이연화를 뒤를 따라다니며 웃고 있었고 가끔씩 이연화에게 혼이 났다. 혼난 방다병이 축처져 있으면 화안이 위로해주곤 했다.
어렴풋이 방다병이나 적비성이 시골 구석에서 농사나 지으며, 이연화와 함께 약이나 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나치게 돈과 재물이 많았고, 가끔씩 두 사람을 만나러 오는 이들은 그들을 굉장히 깍듯하게 대했다.
예부상서나, 관아의 관리라면 대단한 사람들일텐데 두 사람 모두 방다병의 앞에서 허리를 숙인 채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
밖에 있는 방다병은 그녀가 알 던 사람과 완전히 달랐다.
교완만이 화안의 곁에서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방 의부는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전 그동안 의부가 화내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언제나 웃고 있으셨죠. ”
화안의 말에 교완만이 희미하게 웃었다.
“ 난 몇 번 봤어. 두 사람이 이어지기 전에. ”
“ 두 의부의 손목에 연꽃 모양의 화상 자국이 있어요. 아버지가 준 예물이라고 했어요. 두 사람은 흉터가 연해지면 아버지께 다시 찍어달라고 졸랐죠. ”
화안이 자신의 손목을 문질렀다. 어렸을 땐 자신도 연꽃 흉터를 가지고 싶어 제 아버지를 졸랐었다.
“ 아버지를 묻고난 후, 적 의부도 떠나고 난 어느 밤에 혼자인게 두려워 의부에게 갔었어요. 그 때 의부가 울면서 자신의 몸에 낙인을 찍는걸 봤어요. 팔이며 다리에는 연꽃모양 화상자국이 가득했어요. ”
화안의 등을 쓰다듬던 교완만의 손이 멈칫했다.
“ 어느정도는 저도 알고 있어요. 방 의부는 제가 없었다면 벌써 아버지를 따라갔을거라는걸요. 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고 계신거죠. ”
화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을 소매로 닦고선 교완만을 보며 웃었다. 이연화와 꼭 닮은 웃음에 교완만 역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 아! 제가, 뭐라고 불러야해요? 상도문의 전 문주시라면서요? ”
“ 날 의모라고 부르렴. 그 옛날, 엇갈리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넌 내 딸로 태어났을 수도 있었으니. ”
똑똑-
“ 화안, 네 의부가 널 부르는구나. ”
운피구가 문 밖에서 조심스레 말했다.
밖으로 나가자 그녀를 희롱한 사내들과 그녀를 핍박했던 관원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있었다.
“ 낭자! 제가 아들놈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해 낭자께 무례를 저질렀네요. 죄송합니다. ”
나이 지긋한 사내가 연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또 한명의 사내가 무릎을 꿇은 관원들을 발로 차며 윽박을 질렀다.
“ 아가씨 제가 이 모자란 놈들을 제대로 손봐놓겠습니다. 다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께.. 잘 좀.. ”
화안이 슬쩍 곁눈질로 방다병을 바라봤다.
아버지께 혼나면 둥근 눈에 침울함을 담고 하소연을 하던 그 사내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소동이 마무리 된 후, 화안은 잠시 잠이 들었었다. 너무 많이 울었던지 그녀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방다병이 백천원의 네 명의 원로와 교완만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했다.
이연화의 죽음 앞에 여섯 사람은 침통함을 금치 못했다.
“ 왜 알리지도 않았던거야! 방다병!! ”
석수의 목소리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 너 때문에 문주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어! 왜 알리지 않은거냐고! ”
백강순과 기한불도 방다병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 어디 정신이 있었겠어요. 오죽하면, 알릴 정신도 없었겠어요. ”
교완만이 방다병을 두둔하며 석수를 달랬다.
“ 만약 화안을 도성에 맡기는 거라면 백천원에서 돌보겠어. 문주의 딸이니 우리가 돌보는게 맞지. ”
“ 그게 좋겠군요. 우리 네 명은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 있으니 화안을 돌보는데 적합하겠네요. ”
운피구가 드물게 감정을 보이며 말했다.
“ 미안해서 어쩌죠. 화안은 제가 모만산장으로 데리고 가기로 했어요. 저 역시 한가하니 제가 돌보려고요. ”
방다병이 고개를 들고 교완만을 바라봤다.
어쩌면, 교완만에게 보내는게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었다.
“ 그래주시겠어요? ”
방다병이 침상에 누워있는 화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연화 혼자 낳은 것처럼 화안은 이연화의 얼굴을 꼭 닮았다.
15살의 이연화라,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하도 울어 부운 눈가를 가만히 매만졌다.
화안에게 미안하고 이연화에게 미안했지만 방다병도 더는 어쩔 수 없었다.
화안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 위로 화안의 손이 올려졌다.
“ 의부, 18살 생일이 되면, 그 때 절 만나러 와주실래요? 그 땐 저도 어른이니,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을거예요. 그 때까지만, 제가..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아버지. ”
방다병의 눈물이 화안의 얼굴로 떨어졌다.
지옥같은 시간이 3년이나 늘어났지만, 마지막으로 그 정도는 해야 나중에 이연화를 만나도 면목이 설 것 같았다.
방다병이 화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천천히 사라졌다.
화안은 혹시라도 방다병이 들을까 이불을 입에 물고 오열했다.
3년의 시간이 그의 아버지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지만 화안 역시 제 부모를 모두 다 잃은 슬픔은 감당할 수 없었다.
쏜 화살같이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교완만은 화안이 진짜 자신의 딸인 것처럼 돌봤고, 백천원의 네 명의 원로 역시 친딸처럼 그녀를 보살폈다.
가끔씩 제 아버지와 두 의부를 생각하며 슬픔에 빠지는 날이 있었지만 슬픔은 길지 않았다. 15년간 넘치는 사랑과 보살핌 속에 있었으니 세 사람을 생각하면 슬픔보다는 즐거운 추억이 더 많이 생각났다.
드디어 도성에서 맞는 3번째 생일이 돌아왔다. 그녀도 18살 성인이 되었다.
교완만은 벌써부터 그녀의 생일과 성인식 준비에 열과 성을 다 했다.
모만산장의 곳곳에 붉은 휘장과 금빛 장식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호사스러운게 아니냐는 화안의 말에 교완만은 아직 반 밖에 꾸미지 않은거라고 했다.
백천원에서 성인식에 쓸 거라며 휘황찬란한 가구와 장식들을 보내왔다.
3년간 방다병에게선 서신 한통 없었지만 화안은 그의 의부가 약속을 꼭 지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다병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될 지 모르는 자신의 18번째 생일이 빨리 오기를 바라기도, 평생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떠들썩한 음악과 펄럭거리는 깃발이 화려하게 공중을 장식했다.
상도문 전 문주의 양녀의 생일 연회엔 강호의 많은 문파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보통 여인의 성인식과 다르게 화안은 앞에 나서서 사람들을 맞이했다. 인형처럼 앉아서 제 의부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3년 동안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이제는 혼자서기를 할 수 있을만큼 성장했음을 보여 그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
오전부터 사람들을 맞이했고, 정오가 되자 성인식이 진행되었다.
교완만이 우는 듯 웃는 듯한 얼굴로 화안의 머리에 비녀를 꽂아줬다.
아름다운 소녀가 여인이 되었다. 백천원의 세 명의 원로는 연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석수는 주책들 떨지말라고 타박했지만 그녀의 눈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생일 연회가 시작되었다.
화안은 제 생일 연회에 와준 사람들께 인사를 하고 연회에 참여하면서도 입구를 힐끔거렸다.
제 의부는 꼭 올 것이니 제일 먼저 방다병을 맞이하고 싶었다.
교완만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침울해지는 자신의 양녀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날은 금새 저물었다. 생일 연회도 다 끝이 났다.
연회가 끝나고도 화안은 입구를 서성거렸다.
교완만과 백천원 네 원로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화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저 멀리 모만산장을 향해오는 불빛이 보였다.
화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교완만과 네 원로도 화안 곁으로 다가왔다.
불빛이 점점 다가올 수록 하나의 불빛이 아니였다. 수 십명의 사람들이 어두운 밤, 모만산장을 향해 오고 있었다.
화안을 비롯한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교완만의 손짓에 주위에 있던 수하들이 입구로 몰려왔다.
횃불을 든 사람들이 입구 근처로 다가왔다.
다행히 무장한 사람들은 아니였고 촌민들이였다.
여자남자, 노인, 어린아이가 모두 섞여있었다.
한 노인이 문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목소리를 냈다.
“ 이곳에 화안 아가씨가 계신가요? ”
화안이 교완만을 쳐다봤다. 교완만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안이 한 발 앞으로 나갔다.
“ 제가 화안인데요. 누구..누구시죠? ”
촌민들이 잠시 웅성거리는 듯 하다 갑자기 절을 했다.
“ 은인의 따님께 인사드립니다. ”
화안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노인의 몸을 일으켰다.
“ 은인이라뇨? 누구.. ”
노인이 품에서 무명천으로 싼 무언가를 꺼내 건냈다.
“ 은인께서, 아가씨께 전해달라하셨습니다. 생일 선물이라고요. 그리고 약속을 못지켜서 미안하다고. ”
화안이 떨리는 손으로 무명천을 열자 쪼개진 비녀가 나왔다.
“ 은인께 건내받고 부러진걸 알았습니다. 고쳐서 드릴까 하다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물건이니 그대로 전달드리는게 맞는 것 같아서 그대로 들고 왔어요. ”
“ 아버지는요? 제 아버지는요? ”
화안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후두둑 떨어졌다.
“ 제.. 아버지는요..? ”
미려촌은 필금산이라고 부르는 야트막한 산에서 흐르는 물길 하류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였다.
산의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가 그들의 식수원이였지만 간혹 비가 많이 내리면 그 물줄기로 인해 마을이 해를 입기도 했다.
그래서 미려촌이 있는 요서현에서는 상류에 고인 물이 갑자기 미려촌으로 쏟아내리지 않게 제방을 쌓기도, 물줄기를 주변으로 돌리는 등 여러가지 방법을 찾았고 그럭저럭 큰 피해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곳을 지나는 남자가 있었다.
최근 비가 많이 와, 상류 쪽 마을로 가려다가 잠시 머물게 되었다.
남자는 비가 내리는 모습과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다 마을 촌장을 찾아갔다.
남자의 말은 이랬다.
최근 이 지역에 비가 많이 온 것 같다며, 산의 지반이 흘러내린 흔적이 많고, 제방의 상태가 좋지 않아보이니 대피하는게 좋겠다는 말이였다.
생활터전을 두고 떠나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더군다나 몇년동안 큰 피해는 없었던 터라 더더욱 떠날 수 없었다.
비는 계속 쏟아졌다. 남자는 각 집들을 돌면서 이대로 가다간 큰 사고가 날 수 있으니 주변 마을이나 지대가 높은 곳으로 이동하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조금 심드렁한 표정을 했다.
갑자기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사람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상류의 제방이 큰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었다. 그 틈으로 물길이 새어나오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쏟아져 내렸다.
피할 시간조차 없었다. 이대로 다 수장되겠다고 생각할 때 남자가 산 근처로 빠르게 날아갔다.
산으로 검기를 날려 산의 일부를 무너트렸다. 물길을 막아 당장 마을이 물에 잠기는 걸 막았다. 계속 검기와 장을 날려가며 물길을 돌리기 위해 뛰어다녔다.
사람들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남자의 잔상을 뒤쫒았다.
쏟아지는 물과 바위들이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물줄기는 마을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주변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의 표정이 공포에서 환희로 바뀌는 순간이였다. 서로 부둥켜 안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이 산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마을의 은인이였다.
산 가까이 다가가도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촌장이 소리쳤다. 어서! 어서들 찾게나-
사람들이 남자를 찾아냈을 때는 남자는 커다란 바위에 깔린 상태였다. 어깨 아래로는 바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달라붙어 바위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커다란 바위는 꿈쩍하지 않았다.
- 괜히 힘빼지 마세요.
남자가 피를 울컥 쏟아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 대협! 조금만 힘내십시오! 저희가 구해드릴게요.
남자가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이상한 모양으로 꺽인 팔을 내밀었다.
- 부탁을...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상도문.. 모만산장에 있는 제 딸.. 화안에게 이걸 전해주세요. 생일 축하단다고. 그리고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고요.
화안이 주저 앉아 오열했다. 목이 메이고 가슴이 답답해 꺽꺽 소리가 났다.
소녀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산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손에 쥔 쪼개진 비녀는 울퉁불퉁하고 매무새가 좋지 않았다. 비녀 머리는 뭘 조각한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냥 보아도 윤기나는 옥은 최상임이 틀림없었다.
주신촌 사람들이 마을 어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말 발굽소리와 뿌연 흙먼지가 보였다. 얼마되지 않아 그들이 기다리던 사람이 눈 앞으로 나타났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는 사람은 이제 갓 스물이 될까말까한 여인이였다.
흰색 옷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었으며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 산적 토벌을 요청하셨죠? ”
여인의 목소리는 조금 낮은 듯 했으나 청량했다.
사람들은 불안해졌다. 가냘프고 어린 여인의 모습에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드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여인은 사람들의 불안한 표정을 읽었던지 웃으면서 등뒤에서 커다란 도를 꺼내서 멋드러지게 휘둘렀다.
여인의 몸통만큼 두껍고 긴 도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모습에 사람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 소문은 들어보셨죠? 커다란 도를 휘두르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협객이 있다고! 그게 바로 저예요! ”
여인이 꺄르륵 웃었다.
“ 자 이제 안내해주세요! 빨리 해치우고 다음 마을로 넘어가야하거든요. ”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 초입에 들어섰다.
“ 여러분은 마을로 돌아가시고 혹시 모르니 제가 돌아올때까지 문을 잘 잠그고 계세요. ”
사람들을 물린 여인은 콧노래를 부르며 커다란 도를 뽑았다.
“ 오늘도 잘 부탁해요. 아버지들! ”
연화루 이연화 다병연화 비성연화
드디어 끝이다!!!!! 읽어준 붕붕이들 덕분에 끝을 냈다.
곧 주말이다! 우리 붕붕이들 행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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