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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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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차지독으로 왠만한 약은 안들어, 태아때문에 함부로 처방을 내리기도 어려워, 게다가 몸상태도 안좋으니 침을 놓기도 여의치 않고. 이연화를 치료하기위해 관하몽은 의원으로서의 도전의식을 불태웠지만 연일 낙담하기 일수였지. 게다가 도통 성격도 방식도 안맞는 약마랑 붙어있다보니 이 젊은이 미간의 깊은 고랑은 좀처럼 펴질날이 없었어. 뒷채 어딘가에서 약마와 관하몽이 논의를 빙자한 입씨름은 이제 하루라도 안들리면 되려 이상할 정도였지. 대체로 정파의 애송이 주제에 고리타분하다와 사파가 얼마나 비윤리적으로 잘못된것인지 - 정파에서 올바르고 반듯하게 자란 불행히도 청년은 저보다 세배정도의 세월을 살아온 흰머리 지긋한 노친네에게 방자하게 굴지는 못하는것에 이연화는 종종 속으로 탄식을 흘렸어. 자신이라면 바로 빌어먹을 영감탱이라고 주저없이 내뱉었을텐데 - 둘이 침 튀기는 설전을 듣고 있노라면 종종 적비성조차도 끼어들지 못할것 같았어.


약을 먹이던 침을 놓던 뜸을 들이던 모두 환자의 체력이 받쳐줘야 뭐든 더 해볼텐데 이연화는 점점 더 쇠약해져서 뭘 시도해던 백해무익이었어. 살아있는 생물은 그게 동물이건 인간이건 기본적으로 먹어야 힘을 쓸수 있는거잖아? 그런데 이연화는 죽이나 몇모금 삼킬뿐 당최 뭘 먹지 못하니 일단 입덧을 먼저 해결해야 했어.


- 이선생님, 양인의 향을 받으시지요. 


보통 임신한 음인은 각인한 양인의 향으로 임신 증상을 수월하게 보낼수 있어. 하지만 이연화의 양인은 없지 않은가.


- 각인한 양인이 없을 경우 임시변통으로 다른 양인의 향으로 임신증상을 완화시킬수 있습니다. 각인한 양인만큼은 아니지만 가까운 상대일 경우 효과가 있을수 있어요.


지금 이 은신처에 있는 양인은 둘이나 되었어. 관하몽은 질 좋은 약초를 골라보는듯한 눈길로 방다병과 적비성을 훑어보았지. 둘 다 강호에서 내노라하는 양인중의 우성 양인이고 이연화와 친한 사이이니 꽤 좋은 방안었어. 희색이 도는 방다병과 수긍하는 듯한 적비성의 건장한 모습을 보고있노라니 아주 안성마춤인것 같았어. 관하몽과 약마는 평인이니 어차피 고려 대상도 아니지만 이런 우성 양인이 있으면 일반 양인은 필요도 없지. 


- 아니 그걸 왜 이제 말해요? 진작에 시도해보면 좋았잖아요!


방다병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향을 풀어낼 기세였어. 종이 한장처럼 얇아진 이연화를 볼때마다 얼마나 애가 탔는지. 방다병은 정말이지 가능하면 저가 대신 아팠으면 했어. 어렸을때 몸이 허약해 병든 몸이 얼마나 힘겨운지 누구보다 다 잘알기때문에 이연화의 고통을 더 깊이 공감했어.


- .. 벽차지독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말씀 드렸을겁니다.


관하몽은 본인은 점잖게 답했다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그의 희번뜩한 시선이 약마를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어. 뭘 하려고해도 늘 벽차지독이 걸림돌이었어. 이연화는 양인에서 음인으로 변한 희귀한 상태인데다 독중의 독에 중독까지 됬으니 사례가 없는 치료법은 절대 하지 않는 관하몽이라도 이젠 과감한 수를 써보지 않을수가 없던거지. 


- 싫어요.


침상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어. 네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한사람에게 획 돌아갔어. 이연화는 담담히 그 시선을 마주하면 거부의 뜻을 거두지 않았어.


- 왜? 왜 싫어? 이연화 왜 싫은데? 


방다병이 불쑥 튀어나와 이연화의 곁에 다가앉았어. 불여우가 뭔가를 조를때마다 꼬리를 흔들곤 했는데 방다병의 엉덩이에서 그와 똑같은 꼬리가 보인는것 같았어. 이연화는 살짝 피하듯 몸을 뒤로 기댔지만 방다병은 그만큼 가까이 다가가 둘 사이의 틈이 벌어지지 않았어. 조급하게 답을 요구하는 방다병의 눈빛에 이연화는 배를 한번 쓰다듬어 보고 곧 입을 열었어.


- 너네 미래의 부인한테 미안한 짓이야. 어느 부인이 자기 부군이 과거에 외간 음인한테 향 풀어줬다고 하면 좋아하겠어? 나중에 바가지 긁힐 일 하지 말라고. 양인이 조신하게 굴어야지 어디 함부로 향을 굴릴려고 그래?  또 이 아이가 너네랑 무슨 상관이 있는것도 아니고. 


장난인듯 가볍게 말하지만 명백하게 거부의 의사가 들어있는 이연화의 대답에 방다병은 어리둥절하다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나기 시작했어.  미래의 부인? 그게 갑자기 여기서 왜 나와? 그리고 무슨 상관이냐고? 아이가 자신의 아이는 아니지얼정 자신을 밀어내는 이연화가 너무 섭섭하고 화가 났어. 가슴에 또 답답한 돌이 얹힌것 같아 방다병의 얼굴이 일그러졌어. 


적비성의 눈썹끝이 매섭게 올라갔어. 그는 방다병처럼 말로 이연화를 설득거나 이유를 물어볼 생각이 없었어. 미래의 부인고 자신들의 관계고 이러쿵 저러쿵 하며 쓸때없는 시간을 낭비할 바에 그냥 시작해버리는게 나았지. 물론 이연화의 얼토당토하지도 않는 말에 몹시 언짢아져 더 깊게 생각하는게 귀찮아졌던것도 있고.


- 할말 다 했으면 얌전히 있어라.


방다병에게 턱짓하니 바로 알아듣고 방다병은 바로 밖으로 나갔어. 문이 닫히자마자 적비성은 바로 자신의 향을 풀기 시작했어.


방안에 젖은 흙내가 묵직하게 퍼져나갔어. 깊이를 알수 없는 높고 너른 산속에서 비가 한바탕 세차게 내린후 솔솔 풍겨오는 대지의 냄새. 깊게 들여마시면 고목이 느껴지듯 맑고 깊은 향에 안심이 되면서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그런 감각이 온몸을 감싸왔어.


이연화는 한결 편안함을 느꼈지만 딱히 입덧이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어. 적비성은 입맛이 살짝 썼지만 망설이지 않고 밖으로 나갔어. 관하몽과 약마가 창문을 열어 방안을 환기시키고 나니 바로 방다병이 들어왔어.


풋풋한 풀잎향이 가볍게 방안을 휘감았어. 햇빛을 잔뜩 머금어 진하게 녹음이 진 이파리에서 흘러나오는 청량한 수풀의 냄새. 코끝을 청량하게 스치는것을 한숨 들이쉬면  맑고 깨끗한 향에 포근해지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감각이 온몸에 스며들었어.


이연화는 역시 편안했지만 마찬가지로 입덧에는 별 소용이 없는것 같았어. 방다병은 기대감이 가득했던 얼굴은 한껏 구겨졌어. 


이연화는 다행이라 여기면서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했어. 사실 두려웠어. 거절했던 이유가 만약 향을 받아들였다가 둘 중 하나의 향에 반응한다면 그건 무슨 뜻인거지. 혹시 그가 아이의 아버지....이연화는 그 생각을 서둘러 슥슥 지워버렸어. 그랬는데 적비성의 그 무대포 성격에 얼결에 받아버리고 말았는데 역시 아니란걸 확인한 셈이니 얼마나 다행이야 하지만 한편으로 왠지 약 한사발 마신것 처럼 입안이 떫고 썼어. 쓴 탕약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도 너무 쓰다고 느껴질만큼. 약간 도톰한 배를 다시 무심결에 쓰다듬었어. 



- 두 분이서 함께 향을 풀어보는게 어떻게습니까.


그때까지 한마디도 없던 약마의 말에 방다병과 적비성의 시선을 마주했어. 반신반의하는 눈빛이 얽혔지만 둘의 결론은 하나였어. 




연화루 비성연화 다병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