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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0 21:51
이때까지 철저하게 외면당했기 때문일까.
강징은 남망기가 한 번 쳐다보고, 손을 잡혀 끌려갔던 일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잊혀지질 않았음.
저렇게 차가운 사람이랑 한평생이나 살 수 있을까?
결국은 결혼해도 지금처럼 남들 보는 자리에서나 같이 앉아있다 헤어지는 사이가 될텐데. 그치면 결혼하면 최소한 애는 낳아야 하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강징은 몸이 부르르 떨리며 차라리 그가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때가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런데 그 날 이후로 남망기가 사소한 예의를 차리기 시작함.
앉기 전에 의자를 빼 준다던가, 식당에서 잘못 놓인 수저를 바꿔준다던가, 청하지도 않은 음료를 갖다준다던가. 여느 양인이 음인에게 할 법한 행동들이었음.
하지만 그마저도 그가 하니 엄청 가식적인 느낌이라서 강징은 체할 것만 같았지.
강징은 일부러 그가 갖다준 물건은 안 쓰고, 안 먹고 하며 아주 소심하게 무시를 했음. 그러면서 혹시나 그 쪽에서 싫다고 파혼이라도 해주지 않으려나 하고 은근히 바람.
하지만 얼마 안 가 실낱같은 희망도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을 알았음.
오늘은 운심쪽 기업의 중역 파티였어.
거기에 함께 참석했던 부친이 굳은 얼굴로 다가와서는, 기자들이 와 있으니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귀띔하는 소리에 강징은 이제 정말로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구나 싶어 심란해짐.
공개돼도 상관없는 가벼운 발표회나 사장의 인삿말 등등이 끝나고 주변에서 이끄는대로 특별히 마련한 테이블 앞에 앉은 강징은 가슴이 답답했음.
몹시 눈총을 주는 가족들의 시선에 간신히 억지 미소를 짓고. 터지는 후레쉬 빛에 눈이 멀었다가. 시끌벅적 요란한 가운데 혼자만의 우울한 망상에 빠져들었던 강징은 문득 억지로 현실로 끌려 돌아왔음.
사진을 찍던 누군가가 다정한 포즈를 취해달라고 요청하자 강징은 속으로 기가 차서 어쩌라는 거냐 싶어 꼼짝도 하지 않았지.
그런데 갑자기 앉아 있는 의자 뒤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더니, 따뜻하고 부드러운 뭔가가 얼굴을 눌렀음.
화들짝 고개를 돌리며, 금방 자신의 뺨에 키스를 하고 멀어지는 남망기를 본 강징은 경악을 했음.
주위에서는 박수 소리가 쏟아지고 사람들이 웃거나 환호하는 소리로 가득해졌지만 강징은 순간 귓가가 멍멍해지며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음.
마침내 인터뷰가 끝나고 파티가 시작되어도 강징은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못했음.
도중에 위무선이 온 것도 같았지만 무언으로 짜증을 내며 밀어내자 저리로 가버렸지.
차츰 혼란스럽기만 하던 강징의 머릿속에 먹구름이 몰려왔음.
---아니,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눈길도 안 주더니, 남이 하란다고 키스를 해?!
대체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 거야???
강징은 생각할수록 불쑥불쑥 분노가 커져갔음.
잠시 후, 자리를 떠났던 남망기가 돌아와 와인잔을 건네자 엉겁결에 받고 만 강징은 그만 화가 폭발해버리고 말았음.
남망기는 단정하게 자리에 앉다가 움찔했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강징이 빈 와인잔을 든 채 빤히 쳐다보고 있겠지.
다소 큰 잔에 들었던 내용물을 죄다 부어버렸는지, 한쪽 바지에 축축한 느낌이 넓게 번져가고 있었음.
남망기가 지그시 바라보는 것이 조금 무서웠지만 강징은 이를 악물고 오기를 부리며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보았음.
그런데 남망기는 이내 고개를 돌리며 담담하게 앞에 놓인 차를 마셨음.
그는 두 번 다시 강징을 보지 않았으며 와인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았음.
남망기는 새하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실내 파티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바지 한 쪽이 보라색이 되어버린 것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음.
그리고 남망기가 그렇게 나오자, 강징은 마치 덫에 걸린 것처럼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버리고 말았음.
위무선도 다시 오지 않고, 무척 초조해하며 그냥 눈 딱 감고 도망가버릴까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결국은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잔뜩 신경을 세운 채 그대로 두 시간이나 잡혀 있었어.
마침내 해가 떨어지자 저녁 야회 준비가 다 되어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바깥으로 자리를 옮겨가기 시작했음.
진이 빠져서 될대로 되라고 체념해버린 강징이 슬쩍 눈치를 보자, 그때서야 고개를 돌린 남망기가 짤막하게 말하겠지.
“먼저 가요.”
때마침 위무선이 저 편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보이자, 강징은 발딱 일어났음.
남망기는 대꾸도 하지 않고 부리나케 달아나는 강징의 뒷모습을 묵묵하게 바라보고 있었음.
남망기에게 강징의 첫인상은, 조금 어린애 같은 느낌이었어.
그리고 아이들은 어쩐지 옛날부터 남망기를 보면 울어버릴 때가 많았지.
이따금씩 그에게 반해 고백하러 오던 음인들도 거절하는 말을 들으면 그 중 절반은 울음을 터뜨리곤 했음. -분명 예의를 갖추어서 말했는데.
그래서 처음 강징을 만났을 때 남망기는 그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할지 무척 조심스러웠음.
그래서, 강징이 대차게 노려보며 고의로 와인을 엎는 만행?을 저지르자 남망기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지.
근처가 완전히 비어버린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남망기는 사람을 불러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음.
그때 감옥같은 시간을 보내느라 굶주렸던 강징은 괜히 위무선을 구박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한편 열심히 먹고 마시고 있었음. 그러다가 언뜻 저 편에 서 있는 남망기를 발견하고는 채 씹지도 못한 음식을 꿀꺽 삼켰음.
조금 전까지 보았던 것과 똑같은 옷차림인데, 한쪽 바지를 다 적셨던 얼룩은 완전히 사라져버린지라 어리둥절한 기분이었음.
와인 얼룩을 그렇게 빨리 뺄 수 있는 건가?... 아님 스페어가 있었던 건가?...
저도 모르게 궁금해 하던 강징은 아무렴 어때 하고 고개를 붕붕 저어 그에 대한 관심을 날려버렸음.
야회는 테이블도 작고 한결 자유로운 분위기라 남망기의 곁에 붙어 있을 필요는 없었음.
그래서 파티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강징은 내내 위무선의 곁에 꼭 붙어 있으며 남망기의 반경 20미터 이내에도 들어가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을 했음.
행사가 잇따르는 주말도 지나 대학으로 돌아온 강징은 모처럼 자유로운 속세의 생활을 만끽하고자 했으나, 어느덧 가문의 그림자가 이까지 뻗쳐온 것 같았음.
기자가 왔었기 때문인지, 단순히 캠퍼스를 걷고 있을 때에도 왠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 얼굴이 따끔따끔했음.
그리고 며칠 후 강징의 오피스텔로 쳐들어온 위무선이 폰을 들이대며 깔깔 웃었음.
“너 엄청 풋풋한 얼굴인데, 강징!”
“풋풋은 얼어죽을! 놀란 거야, 놀란 거!”
나중에 술을 먹고 고주망태가 된 위무선이 재워달라고 징징거리는 걸 발로 차서 쫓아낸 후.(대학에 온 후 강징은 여러번 위무선의 주사에 골탕먹었음)
태블릿을 켠 강징은 운심그룹 차남의 약혼 발표가 실린 기사를 검색해보았음.
찻잔을 내려다볼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가볍게 입술을 제 얼굴에 갖다대고 있는 남망기가 어째서인지 조금 다정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음.
“사진이니 그렇지 뭐... ...각도 때문인가?”
강징이 중얼중얼거리며 태블릿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지만, 평면인데 그런다고 다르게 보일 리 없겠지.
제 모습은 얼어 있어서 조금 빙구같아 보였지만.
망설이던 강징은 이윽고 화면을 눌러서 조심스레 사진을 저장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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