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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6 03:05
레이, 후회하지 않아? 111112에서 상현이 50번째 되는 날 샌즈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글쎄, 샌즈. 무엇을? 더 정확하게 물어야지."

"레이는 뭐든 쉽게 대답해주는 게 없네."

"너야말로 솔직한 법이 없지."

"정말로 그런 법은 없으니까."



만약 솔직해야 한다면, 그런 법이 있다면 샌즈 너는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는데? 글쎄, 레이. 결국 샌즈와 레이는 서로의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111112에 다녀온 이후 별다른 임무가 없어 둘은 자유롭게 우주를 돌아다녔다. 레이는 가끔 샌즈와 브랫을 생각했다. 밀빛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 애비게일과 같이 샌즈를 사랑한다던 사내. 평생이 영원이 된대도 샌즈를 사랑하겠다던 굳은 결의를 말이다.



샌즈는 브랫의 무엇에 반했을까? 달인어 개체 중에도 브랫과 비슷한 이는 많았다. 샌즈보다 체격이 크거나 똑똑하거나 전략적이거나 하는 달인어를 두고 왜 유한한 생명을 사랑했을까? 레이는 그게 궁금했다. 영원에서 유한을 빼도 결국 남은 건 무한대의 외로움인데 그것을 감안하고서 샌즈가 내린 결정은 무엇에 의해서였는지. 사실, 무한도 아니었다. 애비게일은 무한한 삶을 살지 못했으니까. 상현이 50번째 되는 날이다. 레이는 상현의 꼭짓점을 향해 유영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샌즈는 쉽게 달로 갈 수 없었다. 상현과 하현은 지구를 향해 갈 수 있는 통로기 때문이다. 그곳에 도착하면 보이는 저 멀리의 111112의 적도를 향해 뛰어들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때 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샌즈, 어디야? 나 방금 뭘 본 것 같아.



"뭘 봤는데?"

"달의 꼭짓점에서는 111112가 보이잖아."

"그치."

"꼭 브랫과..."

"브랫과?"

"......"

"레이?"





... 샌즈. 와봐야 할 것 같아. 이상하지. 명령도, 부탁도 아닌데 111112에서 레이가 무엇을 봤는지가 왜 궁금할까.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다시는 보지 않기로 스스로 약속했는데 무엇에 미련이 있을까? 그리고 샌즈는 꼭짓점에 도착하자마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111112에서 달까지 빛의 속도로 2초가 되지 않는데 그 찰나의 깜빡이는 눈동자. 샌즈가 가장 사랑하던 아이작의 파랗고 시리던 우주와 같던 눈. 브랫은 볼 수 없는데도 뒤를 돌아버리게 된다. 마주하는 레이의 눈에도 눈물이 한가득이었다.



레이, 너도 브랫이 그리웠어? 샌즈... 브랫 옆을 봐. 천체망원경에 맺히는 홍채는 아이작의 것이 아닌 낯선 눈이었다. 하지만 레이와 샌즈는 본능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는데, 애비게일의 눈이었기 때문이다. ...레이.





"레이... 애비게일이야. 네가 맞게 봤어."

"알아."





샌즈는 돌아서는 레이를 잡을 수 없었다. 대신 뾰족달의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아 브랫의 눈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안녕, 아이작. 보고 싶었어. 유리병의 냄새가 바뀌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이작의 냄새는 항상 그리움의 향이었는데 점점 소금의 향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무슨 뜻이야? 샌즈는 묻고 싶었다. 나를 생각하는 게 아이작에게는 슬픔인지. 영원히 슬퍼하라고 사랑한 건 아니었다. 평생을 사랑의 감정에 빠져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명백한 오판이었다. 오만, 브랫이 들고 다니던 책 제목 중에 본 단어다. 그 옆은 편견. 샌즈는 하나는 극복하고 하나는 극복하지 못했다고 생긱했다.



그래, 아이작. 우리는 꽤 오만했지. 영원이 평생이 된대도 그걸 서로의 눈과 사랑에 대고 맹세했으니까. 사막의 모래들을 증인으로 삼고서. 그런데 어쩌지. 내가 당신을 고통 속에 살게 했네. 눈 한 번 깜빡이는 시간 속에 들어오는 감정이 너무 벅차 도저히 소화할 수가 없어.





그치만 난 사랑을 선택하기로 했어. 이 말은 꼭 삼켜내기로 했다. 지금부터 할 일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다음 하현이 오기 전까지 달인어 영원 포기 각서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단 한 마리의 달인어도 영원을 포기하지 않았다. 샌즈 역시 영원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나 111112에 다녀온 이후 영원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샌즈가 사랑하는 아이작은 유한하며 다시 태어난대도 아이작일 수 없다. 자신은 평생 숨어 살면서 아이작만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고 해도 아이작의 평생에 고통만 안겨줄 수는 없었다.



영원을 포기하면 죽음 이후는 죽음 그 자체가 된다. 샌즈는 영원 포기각서의 조항을 꼼꼼히 읽었다. 놀랍게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지옥불도, 지옥에서의 노동도, 죽을만큼 괴롭다는 갈증도, 열상도 샌즈는 모두 괜찮았다. 아이작과 평생 함께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자신을 사랑하는 아이작을 믿기로 했다. 인어공주에 나오는 것 같은 제약은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샌즈는 인간처럼 사는 데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달인어의 모든 능력을 상실하고, 달인어 세계에서 이뤄왔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칸에 반듯하게 체크를 하고 숨을 골랐다. 마지막 사인만이 남았다.







레이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애비게일이 살아있다면, 정말 '그' 애비게일일까? 레이와 사랑을 했던, 미래를 속삭였던, 피구덩이에서 레이의 눈을 마주하던, 웃는 얼굴로 사랑을 말해주었던 그 애비게일일까. 애비게일은 원망할까? 아니다, 그렇게 쉽게 누구를 싫어할 사람이 아닐 뿐더러 그때 레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레이는 그 오랜 시간 애비게일을 그리워했고, 그만큼 자책했고 괴로워했다. 아무도 구해주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모두를 원망했고, 샌즈가 없었다면 레이는 죽을 뻔했다. 달인어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샌즈는 거짓을 말하지 않고, 레이는 무언가를 판별하고 탐색할 때 실수하지 않는다. 그건 애비게일이었다. 애비게일의 기억까지 온전히 가지고 있는.



우주 저편에 있는 공간에 샌즈가 찾아왔다. 레이는 샌즈의 표정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샌즈는 사랑을 찾으러 갈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은 샌즈의 변명 같은 이유를 들어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일단 레이는 샌즈를 꼭 껴안았다. 샌즈, 가. 가도 돼. 샌즈는 레이를 마주 안으며 대답했다. 레이, 너도 가는 거야.



"나는 가지 않아."

"왜? 애비게일이 맞아. 그러니까 가야지."

"그래도 우리는 그때의 우리가 될 수 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아갈 수 없어."

"다시 사랑하면 되잖아."

"브랫이 널 사랑하는 걸 느꼈어?"

"응. 지금은. 이번 하현에 내려갈 거야."





잘 가, 샌즈.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없어. 레이는 그 말만 반복했다. 나를 잊고 내려가서 행복하게 살아. 너는 잊지 않아, 레이. 네가 나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건 내가 이뤄낸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나를 잊지 마. 샌즈는 더이상 레이를 설득하지 않았다. 그건 레이가 샌즈와 자기 자신에게 벌주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샌즈는 사랑을 얻는 댓가로 레이를 잃어야 했다. 레이는 사랑을 선택하지 않아 샌즈를 잃어야 했다. 뼈아픈 등가 교환이었다. 우정이야말로 사랑의 최종 단계이므로 그들은 꼭 안고 사랑을 선택하며 사랑을 버렸다. 레이가 그날에 자기를 버려둔 것처럼.



레이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샌즈는 보기보다 치밀한 달인어였다는 점이다. 샌즈는 유한한 삶에 대한 동의서, 영원 포기각서를 갓파더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곧 갓파더가 올 것이다. 111112로 내려가는 달인어는 처음이라 지난한 신문 과정이 될 것이다. 어쩌면 견제 대상이므로 쉽게 보내줄 수도 있다.



"샌즈, 달인어를 포기하겠다고."

"네."

"왜?"

"제가 사랑하는 이가 유한한 삶을 살고 있어서요."

"111112에 살고 있나?"

"네, 달인어 자격을 상실하고 유한한 생을 가지고 간다면 협정 위반은 아닐 겁니다."

"협정 위반을 걱정하는 게 아니야. 영원 포기각서의 조항은 다 읽어봤나?"

"네. 견딜 수 있습니다."





평생이 영원이 된대도. 나의 고통이 영원이 된대도. 샌즈는 속으로 생각했다.



"벌써 인간스러운 행동을 하는군. 아직 달인어라 그게 잘 들리는 걸 잊은 건가?"

"아닙니다. 그런데, 저희 111112 임무에서 본부의 실수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보상으로 뭔가 해달라고?"

"아, 브랫은 사후세계로 보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소멸이다. 알고 있나?"

"압니다. 대신 저를 보지 않겠죠."





지독한 사랑이야. 안 그래? 누가 봐도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샌즈의 머리 속을 울렸다. 허락이라는 뜻이다. 영원 포기각서와 유한한 삶에 대한 동의서에 '허가' 직인이 찍혔다. 이젠 정말로 끝이다. 갓파더가 나가려던 샌즈를 붙잡았다. 왜지? 그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나? 어떻게?



"질문이 많으시네요... 하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말씀 드리겠습니다. 처음엔 그냥 신경 쓰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차 대장이었거든요. 조용하게 저를 도와주던 사람이었습니다. 참호를 파주고, 참스는 먹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문학을 좋아했습니다. 이방인이라 특별 취급을 조금 해주긴 했습니다. 달인어라는 말도 비교적 쉽게 믿어줬어요. 이건 한참 뒤의 일이긴 하지만요. 며칠이 지나자 그 관심은 작아져가기 시작했는데 그게 묘하게 아쉽더군요. 누군가가 저를 신경 써준다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111112에서 일이 꼬여 레이와 같이 다시 돌아갔을 때 서운했습니다. 누가 서운하면 사랑이라고 하더라고요. 레이일 겁니다. 나를 감히 사랑하게 만들어서 비참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 모든 감정은 브랫으로 인해 처음 느껴봤습니다. 이게 사랑하는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저를 사랑해주고 사랑할 수 있게 해준 그 인간의 유한한 삶에 평생의 고통을 심어주고 왔습니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고작 모래나 쥐어주고 말입니다. 나중엔 소금의 향이 나서 또 저를 서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건 나를 생각하면 슬퍼한다는 거니까. 그리움이, 사랑이 아니니 말입니다."

"샌즈, 아주 감수성이 풍부한 인어였네."

"어쨌든, 브랫의 삶에서 속상함과 서운함, 슬픔을 읽어낸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마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영원에 대한 회의 말입니다. 돌아갈 수 있는데 돌아가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고작 영원이었으니까요. 영원히 살아야 할 이유가 뭘까요, 고통스럽게 영원을 보내면서 저쪽 어딘가에 내가 준 사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누군가의 유한한 평생을 내려다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영원에 대한 회의... 후회하지 않겠나?"

"저는 다시 돌아온 순간부터 후회하고 있습니다."

"나를 잊겠군. 그건 행복하겠어."

"절대 후회하지 않겠죠."

"알다시피,"

"절대는 없죠. 모든 건 상대적이니까요."

"그 말 모순인 거 알지?"

"상대적인 거죠."

"너를 아는 달인어의 기억을 모두 지울 것이다. 프로토콜이야. 달인어의 집단 탈주는 종족 유지에 방해가 돼."





압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이들은 연결되어 있을 겁니다. 장례식 때 오시지요. 갓파더는 웃으며 답했다. 친히 지옥으로 안내하러 내려가지. 길어야 60년일 겁니다.



샌즈는 갓파더를 뒤로 하고 하현의 초승에 발 맞춰 섰다. 111112와 수직을 이루게.

60년, 평생이 된다면. 영원의 지옥도 기꺼이.



​초승달 뾰족점에서 다이빙을 하는 인어를 본 적이 있는가?






브랫네잇 슼탘 젠킬
너무 늦어서 미안하조 완결 아직 아님...
2024.05.16 05:44
ㅇㅇ
헐 내센세 오셨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2730]
2024.05.16 06:47
ㅇㅇ
모바일
ㅁㅊㅁㅊㅁㅊㅁㅊㅁㅊ 센세야???? 센세냐고???!!!?!! 여기 드러눕는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7680]
2024.05.16 06:56
ㅇㅇ
모바일
아니 내센세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브랫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봐야만 하는 고통스런 영생을 포기하고 대신 행복하고도 유한한 삶으로 향하는 달인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왜라는 대답에 답하는 말에 그리움과 의지와 애정이 다 꾹꾹 눌러 담겨져 있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제 다시 브랫이랑 만나는 일만 남았다 ㅠㅠㅠㅠㅠㅠ
[Code: 98a7]
2024.05.16 07:19
ㅇㅇ
센세이즈댓유???????????????????
[Code: de5f]
2024.05.16 07:28
ㅇㅇ
모바일
센세에게 너무 늦은 건 없어 다시 왔으면 된 거야ㅠㅠㅠㅠㅠㅠㅠㅠ 센세 온 기념으로 정주행 했는데 다시 봐도 몽환적이고 동화같다ㅠㅠㅠㅠㅠ 브랫의 사랑을 느낀 샌즈는 결국 달인어의 삶을 포기하는 구나ㅠㅠㅠㅠㅠㅠ 브랫이 이 모습을 보고 있을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63fc]
2024.05.16 09:56
ㅇㅇ
모바일
아아ㅠㅠㅠㅠ돌아가는구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넘좋다ㅠㅠㅠㅠㅠㅠ
[Code: 8bc8]
2024.05.16 09:56
ㅇㅇ
모바일
다시만나ㅠㅠㅠㅠㅠㅠㅠㅠㅠ영사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8bc8]
2024.05.16 09:56
ㅇㅇ
모바일
이제 지하실로 가서 어나더를 쓰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맛있는거 준비해놨어
[Code: 8bc8]
2024.05.17 12:37
ㅇㅇ
모바일
와 ㅜㅜㅜㅜ 문장이 너무 아름다워 ㅜㅜㅜ 결국 네이트가 브랫한테 가는구나
[Code: 5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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