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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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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주의, 주화입마 주의
*방다병,적비성과 센티넬/가이드스러운 연형제인 과거 이상이 현 이연화가 요마 우두머리인 천마왕 현야와 얽히는 이야기.
23편.
푸른빛이 작은 깃털을 그려냈다. 깃털이 분열하듯 흩어져 같은 모양을 여럿 만들어내더니 손바닥 반만한 작은 형체로 모여 오종종한 새모양이 되었다. 조그마한 푸른빛 참새가 된 빛가루는 포로롱 소리를 내며 허공에 품고 날아온 전서를 펼쳤다.
《 어머니, 이연화가 벽차지독에 중독되어서 기력이 쇠하고 몸이 약합니다. 증사부께 물어 방법을 찾아봐 주세요. 그리고 저희는 무사하니 걱정 마세요.》
이선생과 있더니 비술이 늘었구나, 천기당에서만 쓰는 전서술 참새가 손을 쪼는 시늉을 하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 하당주가 제 아들을 떠올리며 흡족하게 웃었다. 본디 전서용 비술에는 작은 곤충이나 새같은 날개 달린 작은 생물이 쓰였다. 참새 정도면 큰 축에 속해 전서술로는 과시용에 가까웠으나 천기당에서는 천사들의 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새를 고집했다. 방다병도 참새를 만들어 부릴 줄 알았지만 연형제를 만나기 전에는 전서에 내용을 많이 담지 못하거나 먼거리로 보내지 못했었다. 무공도 공격 비술도 뛰어난 그였지만 어찌된지 안정이 되지 않아 걱정하던 차에 연형제가 나타나자마자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나 천기당 당주이자 어미로서 뿌듯하던 참이었다.
"아끼는 사람을 만나야 완전해지는게 너답구나."
하당주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방다병의 다정함이 어려서부터 남달랐다는 것은 어미로서 너무도 잘 알았다. 어린 시절의 방다병은 키우던 병아리가 혀를 빼어 물고 죽었을 때 땅에 묻어주며 몇 날을 울고 식음을 전폐했었다. 병아리의 혼을 어미 닭 곁으로 보내주는 비술을 보여주고 나서야 겨우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제 행복해진거에요?라 물었던 그였다. 그 때 허공에 병아리를 그려 날리며 하얀 거짓말을 해준 이가 천기당에서 비술 교육을 담당하는 증보령, 증사부였다. 그도 방다병의 성정을 알아봐 특히나 다병을 아꼈더랬다. 독에도 능한 그라면 방다병의 연형제를 위해 애써줄터였다.
문득 몸이 약했던 그에게 잠자리에서 늘 이상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일이 기억났다. 방다병은 언제나 조금만 더 들려달라며 보채곤 했다. 하당주는 과장을 보태어 이상이가 실력도 뛰어난데 훈련을 열심히 해서 지존이 되었다고 했다. 아들에게 의지를 불어넣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어린 방다병은 어떤 이야기보다도 이상이가 밤낮없이 수련을 하여 최고가 되고 연형제 없이도 요마를 쉽게 처치했다는 활약 이야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천마왕을 봉인하면서 목숨을 바쳤다는 대목에서는 몹시 슬퍼했다.
[이상이의 시신은 찾았나요?]
[아니,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단다.]
[그럼 죽지 않았을거에요. 이상이가 죽었을리가 없어요. 그는 지존이었잖아요!]
[그 후로 이상이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단다, 얘야. 살아 있었다면 왜 사고문으로 돌아가지 않았겠니. 이상이는 고매한 정신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모두를 구한거야.]
[싫어요. 너무해요.]
[울지 말거라, 이상이는 이렇게 네 마음 속에 살아 있잖니.]
[이상이에게 연형제가 있었다면 안 죽었을까요?]
[글쎄다, 후대 사람인 우리는 모를 일이지.]
[어머니, 저는 연형제를 만나면 꼭 지켜줄거에요. 이상이처럼 혼자 싸우게 두지 않을거에요.]
[그래, 좋은 생각이다. 자, 이제 잘 시간이야. 네가 열심히 수련하면 연형제를 만나 지켜줄 수 있을거야.]
다음날부터 목검을 들고 팔부터 휘두르기 시작한 소년은 놀랍게도 석달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수련생들 무리에 섞여 같이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선배들을 제치고 두각을 나타냈다. 방에는 저잣거리에서 사온 이상이 초상의 모작품을 걸어두고 인사를 하며 운기조식을 했다.
방다병은 나날이 열심히 수련에 매진했다. 언젠가 만날 연형제를 이상이처럼 홀로 두지 않겠다 다짐하며. 자신이 강호를 제패하는 지존이 되겠다는 이유보다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이유로 몸을 일으킨 아들을 보며 하당주는 새삼 방다병의 다정한 면모와 제 사람을 아끼는 강한 애착심을 확인했다.
그런 그가 천기당에서 열아홉이 되도록 연형제를 만나지 못해 의기소침해 있어 늘 마음이 쓰였더랬다. 그리하다 이연화를 만났으니 아들이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구는 심정이 이해가 갔다. 하필 그 연형제가 몸이 약하니 방다병이 얼마나 애가 탈지 어미로서도 충분히 그 마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심지어 천하의 맹독이라는 벽차지독이라니, 대체 이연화는 어쩌다 그런 독에 당했단 말인가. 하당주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시녀에게 하명했다.
"증선생을 만나야겠다. 채비를 해다오."
천기당의 전담 의원이자 독에 정통한 증보령이라면 벽차지독을 다룰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하당주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하당주의 머리 속에 순간적으로 엷게, 이연화에 대한 의구심이 떠올랐지만 이미 아들의 연형제이니 더는 생각할 것이 없다며 도리질을 쳤다. 마음이 급했는지 일어서다가 탁자에 몸이 부딪혔다. 그때 달각대는 소리가 나더니 허벅지에 뭔가가 아프게 닿았다. 인상을 쓴 하당주가 허리춤에 걸린 장신구를 잡아 올렸다. 푸른 매듭 장식 사이에 얽힌 뽀얀 백옥에 금이 가있었다. 하당주는 힘을 주어 장신구를 뜯어내 버리려 했다. 불길하게 깨어지고 야단이란 말인가. 하지만 곧 무슨 생각에서인지 백옥을 소매춤에 소중히 넣었다. 금이 갔다 해도 백옥은 백옥이지 않은가. 하당주는 빨리 뛰기 시작하는 가슴께를 누르며 밖으로 나섰다.
*
모한이 가져온 마차는 몹시 쓸만했다. 지붕이 있는 복층인데다 안이 넓기까지 해 앉을 자리와 누울 자리가 충분했다. 윗 층은 설계상 안정성을 기하느라 천장이 낮아 몸을 숙여야했지만 누워 자기엔 무리가 없었다. 가장 편해 보이는 아래층은 이미 방다병이 이연화의 자리를 마련해놨고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옆자리에 누가 누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며 말이 오갔다.
방다병이 모한에게 공수를 했다. 하지만 눈빛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연화의 연형제가 저이니 당연히 제가 한 공간에 있어야지요. 모공자의 마차라 이리 말씀드리는 것이 외람되오나 제가 이연화 옆에 있겠습니다."
모한의 눈썹이 꿈틀댔다. 적비성은 벌써부터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이 경맥을 통했으니 이연화에게 도움이 될거다. 하지만 이연화가 내 내력도 필요로 한다는걸 잊지마. 나 역시 마찬가지고. 언제든 내려갈거다."
그 말이 제법 집요하게 들려 이연화는 헛기침을 했다. 적비성은 거침없이 윗층에 연결된 사다리로 다리를 올렸다. 방다병과 모한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우리만치 굳은 마차 주인의 표정과 네가 뭐라하건 상관없다는 듯 꼿꼿하게 선 제 연형제의 태연한 얼굴에 이연화는 눈을 데룩 굴렸다.
"거 참 곤란하게 됐네요. 제가 이 모양이라 객 주제에 좋은 자리를 차지해 벌어진 일같으니 제가 위로 가지요. 그럼 두 분이 편하게 아래 층에서..."
"싫어."
"싫습니다."
두 남자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답했다. 이연화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둘이 이리도 죽이 잘 맞는데 괜찮지 않겠습니까?"
"놀리지마, 이연화."
방다병이 모한을 노려보다시피 하며 답했다. 대관절 제 연형제는 모한을 왜 이리 경계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야영하기 좋게 마차도 준비해온데다 전력에 큰 도움이 되는 고수임에도 냉대하기가 적을 대하듯 하니 합류를 권한 이연화로서는 퍽 난감했다.
"그럼 어쩌자는거야. 아래도 위도 다 싫다니. 알아서들 해. 내가 밖에서 잘테니."
"그건 안되지요."
모한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연형제랍시고 붙어 있는 두 놈을 멀리 내쫓고 싶었지만 모한으로서도 잠자리를 보장 받아야 해서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었다. 모한의 육체가 현야를 오래 담아두기 어려웠기에 가사 상태로 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모한은 속으로 이를 갈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누가 옆에 있으면 잘 수가 없습니다. 공간이 충분하니 아래 층에 세 분이 손님방처럼 주무시고 제가 위에 머물고 싶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적비성이 마차에서 튀어나왔다. 남은 셋은 그런 적비성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마차 주인의 요구에 응했을 뿐이다."
방다병은 퍽이나 그러시겠어,라 중얼거렸다. 그래도 모한보다는 적비성이 열 배는 나았다.
"그렇다면 저희가 맞춰야지요."
모한은 여기가 천마곡이었다면 눈 앞의 녀석을 벽으로 던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연화는 아무리 봐도 제 연형제들 사이에 흐르던 유치하지만 묘한 기류에 모한이 합류한 것만 같아 골치가 아파왔다.
"선기탑까지 가려면 서둘러야해. 긴 길이고 중간에 더는 마을이 없다. 식량도 물도 충분하지만 가는 길이 안전하리란 보장이 없어. 북쪽으로 갈수록 요마가 많다."
민망함을 감추려는지 적비성의 말이 길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한 방다병이, 봐주는 심정으로 지도를 소리나게 펼쳤다. 북쪽을 탐사한 이들이 적어 거친 산세를 그려놓은 뾰족한 그림과 길을 제외하면 마을이라고는 방금 지나온 풍림촌의 원래 이름인 석주촌 말고는 없었다.
"이 지도도 믿을만한게 못 돼. 뭐가 더 있을지 몰라. 마을이 있다 해도 석주촌처럼 요마에게 당해서 이미 없어졌을지도 모르고."
이연화가 지도를 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그리고 선기탑으로 향하는 길목 중간에 지렁이처럼 구불대는 선 여럿과 뱀 사자를 가리켰다.
"뱀소굴이라도 있는 모양이야."
"뱀요마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 천기당의 모원로님이 예전에 비술사들이 선기탑에 갈 때 따라나선 적이 있었대. 아마도 현월도를 봉인하러 가기 위해서였겠지. 북쪽은 인간도 거의 없고 짐승들 뿐이라 몇 안되는 요마들이 짐승을 요마처럼 만들고 부려서 세력을 만든다고 하셨어."
방다병의 설명에 적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요마라기엔 요기가 약한 삵이 돌아다녔던거로군. 이 지역에서는 짐승을 조심할 필요가 있겠어."
적비성은 중원에 야렵을 자주 나가 인간형의 요마에는 익숙했지만 짐승을 부리는 요마는 거의 보지 못했다. 중원은 깊은 숲인만큼 정령이나 작은 요마가 많았지만 북쪽 지역은 험난하고 먹거리도 적어 강하고 독한 요마들이 살아남았다고 했다. 선기탑은 북쪽의 산 바로 아래에 있었는데, 대체 왜 그런 험준한 곳에 탑을 세웠는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방다병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비술사들이 이런 곳에 선기탑을 세운 이유가 뭐지? 현월도를 저기에 둔 이유는 또 뭐고? 사람이 나서서 지키고 있기도 어렵고 되려 요마들에 둘러싸여서 더 위험할 것도 같은데. 역시 보통 탑은 아닐거야."
이연화는 방다병의 말에 침묵을 지키며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연화가 소년 시절이었을 때 비술사 가문의 원로이자 당대 최고의 비술사였던 청류풍이 선기탑을 세우러 북으로 향했었다. 그들은 요마의 힘을 이용해 비술을 강화하는 연구를 할 목적으로 일종의 연구 기관을 세웠었다. 처음에는 순조롭게 보였다. 중간에 석주촌이나 다른 마을이 있어 식량을 조달하기 쉬웠고, 짐승형 요마가 주변에 많다고는 해도 그 수가 적고 힘이 세지 않아 적당히 대응하며 공사를 해나갈 수 있었다. 당시 일꾼들을 보호하기 위해 천사들이 많이 따라가 그 행렬이 도성을 나서는 모습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요력을 쓰기 위해서였지요."
조용히 있던 모한이 끼어들었다. 그 목소리가 차게 들려 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모한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표정은 예의 발랐으나 목소리에 한기가 묻어 있어 어딘지 불편한 느낌마저 들었다.
"비술은 본디 인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요력을 가진 요마에게 더 유리하지요. 당시 비술사들은 요마의 요력을 이용해서 비술을 강하게 만들 생각으로 선기탑을 세운겁니다. 기관술로 요마의 침입을 막고 요마를 잡아가둘 덫을 설치했지요. 그런 짓을 하기에 북쪽이 적당했습니다. 북쪽 요마무리에는 딱히 우두머리가 없으니까요."
그런 짓이라는 말에 묘한 위화감이 들었지만 모한이 쏟아낸 정보가 놀라워 셋은 별로 걸고 넘어지지 않았다.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는거지?"
적비성의 물음에 모두가 모한을 쳐다보았다.
"제가 언젠가 선기탑에 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 사부..가 그 일에 참여해서 들었습니다."
"그럼 모공자도 청류가문입니까?"
방다병이 의외란 듯 묻자 모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빛에 경멸감이 스쳤지만 찰나였다.
"아니오. 저는, 저와 사부는 외지인이었습니다."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듯, 모한이 입을 다물었다. 이연화는 직감적으로 모한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하는 거짓말의 냄새를 이연화는 잘 알았다.
"기관술을 써서 지은 탑이라니 현월도를 봉인하기에 적당하군. 당시 비술사들이 머리를 썼네. 방소보가 기관술에 능한 천기당 차기 당주라 다행이야. 갈 길이 머니 서두르는게 좋겠어. 지난 밤에 일이 많아 다들 피곤하잖아. 마차가 있어 얼마나 다행이야. 어서들 가자고."
이연화가 냉큼 몸을 돌렸다. 자기가 움직이면 모두 따라온다는 것을 이제는 아주 잘 알아 적당할 때 써먹는 그였다. 역시나 세 사람이 묵묵히 따라나섰다. 새끼 오리들을 거느린 어미 오리가 된 기분으로 이연화는 마차로 방다병과 적비성을 들여보냈다. 모한은 마부석으로 향했다. 저들과 굳이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이 없기도 했고, 비마가 모한이 아닌 자의 말을 듣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이연화는 마차에 몸을 반쯤 넣고는 긴히 말하듯 속삭였다.
"아무래도 저 자에게 더 물어야겠어.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
방다병과 적비성을 뒤로 하고, 이연화는 모한의 옆자리에 앉았다. 모한이 한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한으로서는 이연화가 제 연형제들을 놔두고 자기 옆으로 온 것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아까 선기탑 이야기를 하셨지요?"
평범하게 말을 꺼낸 이연화가 동시에 전음을 썼다.
- 모공자, 우리 이야기는 이렇게 따로 해야할 것 같습니다.
"더 궁금한게 있습니까."
모한에게서 답이 오지 않자 이연화는 모한과 눈을 마주치려고 고개를 돌렸다. 이미 이연화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모한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사실 요마는 전음술을 익힐 이유가 없었기에 그들 세계에는 전음술이 없었다.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무공이나 법술은 요마에게 불필요했다. 정신 지배를 위해 머리 속으로 직접 소리를 전하는 일방적인 방식 외에 듣기 위한 일에 힘을 쓰는 요마는 없었다.
- 모한. 안 들려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모한은 전음술을 할 줄 모르나? 이연화는 조금 의아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모한에게 몸을 기울여 작은 소리로 청했다.
"모한, 저 둘이 우리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줄 수 있습니까?"
그 말에 이연화를 보던 모한의 눈이 조금 커졌다. 기뻐 보이기도 했다.
"어려우면 다음에 이야기하지요."
"아니, 아닙니다."
이상이가 저에게 부탁을 해올 줄이야. 모한은 무심히 쥐고 있던 고삐를 놓을 뻔 했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간지러움이 천마곡에서 정좌를 하고 앉은 현야의 가슴께에 피어올랐다. 처음 느끼는 감각에 현야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 좋다 해야할지 거슬린다 해야할지 모를 기이한 감각이었다. 이상이의 바램대로 당장 차음술을 써야한다는 생각만 떠올랐다. 모한은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작게 진을 그려 차음술을 썼다. 소리를 가두는 방어막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이제 여기엔 우리 소리만 있습니다."
주변의 소리까지 사라지자 이연화는 내심 당황했다. 이래서는 방다병이나 적비성이 불러도 안 들리겠는데. 반면 모한의 눈에는 웃음기마저 흘렀다. 반 시진 안에도 냉함과 온함 사이를 오가는 모한이 신기했다. 감정 기복이 큰 사내인 것 같았다. 모한이 이연화에게는 과하게 호의적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선기탑에 무슨 일로 갔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그 이야기군요. 맞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요. 80년 전 쯤 되었을겁니다."
자신이 천마곡에 봉인되기 10여년 전 가량, 비술사들이 만들었다는 선기탑에 간 적이 있었다.
"역시 그랬군요. 선기탑이 지어진지 오래 되었는데 모공자가 알고 있어 오래 전에 갔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사부가 아니라 모공자가 그 자리에 있었겠군요."
이연화는 모한이 선기탑을 지을 당시나 연구하는 시기에 비술사로 갔으리라 짐작했다. 모한은 이연화가 생각하는 바를 짐작해 맞장구를 치며 말을 지어냈다.
"그 때는 다른 이름이었지요. 비술사들은 북쪽 요마들을 잡아서 요력을 뽑아내는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문에 가까웠지요."
"확실히 요력이 비술에 유리하기는 하지요. 저도 반요가 된 후 비술이 더 자유로워졌으니까요. 그렇다고 요마로부터 요력을 뽑을 생각을 했다니 놀랍네요. 아무도 몰랐을겁니다. 하지만 결국 요마들에게 당해 폐허가 되고 말았지요. 모공자는 그 때 일도 알고 있습니까?"
그야. 선기탑 비술사들을 없앤게 나인데. 현야는 쿡 웃었다. 천마왕은 그 자들의 악독함에 어울리는 결말을 선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선생은 요마를 죽여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봉인된 천마왕을 없애러 이리 움직이는 것이겠지요?"
"옛날같은 무의미한 전쟁과 비극이 있어선 안되니까요."
"나는 그 때 인간들의 사악함을 보았습니다.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요마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괴롭혀 요력을 뽑아내겠다 혈안이 된 자들을요."
모한이 이연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은 천마왕을 죽일건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연화의 몸이 굳었다. 모한의 낮은 목소리가 울리듯 귀를 파고 드는 것 같았다. 아니, 몸을 옭죄는 것처럼 느껴졌다. 차음술 결계로 외부 소리가 모두 차단되어 작은 공간에 모한의 목소리만이 울려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그 질문은 마치 이상이에게 하는 것만 같았다. 이연화는 모한이 제 정체를 알 리가 없다 여기면서도 선기탑이 지어질 시대를 산 모한이라면 이상이를 알 터였고 자신이 이상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어떻게? 비술의 경지를 가늠할 수 없는 이 사내는 독심술이라도 쓴단 말인가.
"제가 무슨 수로요."
"죽일 수 있다면 죽일겁니까."
모한의 눈빛이 진지했다. 이연화는 더는 눈을 보지 못하고 비마의 불타는 듯한 갈기에 시선을 두었다. 바람에 꺼지는 촛불처럼 뒤로 누워 일렁이며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불꽃 갈기가 어지러이 휘날렸다.
"그래야 한다면요. 헌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모공자도 지금 우리와 함께 가고 있지 않습니까."
고개를 돌린 이연화는 모한의 눈에 서린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모한 역시 제 감정을 읽지 못했다. 천마왕을 죽이겠다는 이상이의 말이 거슬렸지만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거슬리는 것은 모조리 치우고 없애는 현야였지만 이번에는 이 거슬림을 어찌 처리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모한은 제 움직임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몸뚱이도 제 존재도 낯설었다.
"현월도가 무슨 물건이지요?"
모한은 속내를 숨기고 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짐작가는 바가 있었으나 아니길 바랬다.
"천마왕이 결계를 깨려고 하고 있어요. 우리는 그를 막아야하고요. 현월도로 천마왕을 찌르면 결계가 풀려도 그를 저지할 수 있습니다."
현야의 가슴 아래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이상이, 너는 다시 나에게 검을 박으러 오는구나. 내 바램대로 다시 찾아와 직접 너를 볼 수 있어.
그러한데, 어째서.
아니, 이렇게라도 네가 온다면.
현야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분노도 원망도 아닌 무언가가 현야를 휘어 감아, 하마터면 모한과의 연결을 끊을 뻔 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 자욱을 남겼다. 주먹이라도 꽉 쥐어 정신을 차리고 싶었으나 자꾸만 손이 풀렸다. 모한의 눈빛이 흐려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에 현야는 입술을 깨물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입술에 피가 맺히고 나서야, 모한의 시야가 다시 선명해졌다.
"이선생, 들어가 쉬세요."
모한이 힘겹게 몸을 세웠다. 그러나 차음술을 걷어내는 손짓만큼은 거칠고 단호했다. 이연화는 모한이 또 종잡을 수 없게 차가워졌다고 여겼다. 어쩐지 더는 말을 붙일 수 없어, 이연화는 모한이 마차를 세우자 마부석에서 조심스레 내려갔다.
"가보겠습니다."
"몸이 안 좋으면 말해요. 바로 세울테니."
어차피 내가 느낄테지만. 이연화가 마차에 탄 기척에, 모한은 다시 말을 부렸다. 고삐를 놓고 등을 기댄 모한은 눈을 감았다. 살을 가르는 상처를 입은 것도, 분노로 마음이 격해진 것도 아닌데 내상을 입은 것마냥 피로했다. 생경한 감각이 가슴과 배 안쪽에서 뭉근하게 피어났다 이지러지기를 반복했다.
현야는 이상이 앞에서 이토록 한없이 무력해졌다. 눈빛으로, 말 한마디로, 표정으로, 이상이는 천마왕에게 비술을 걸어 속을 어지럽히는 것 같았다. 어떤 구미호도 이런 유혹술로 마음을 교란시키지 못할 터였다.
"내게 뭘 어찌 한 것이냐, 이상이."
현야가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수천년을 몰랐던, 희열과 고통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실소였다.
연화루 이연화 이상이 방다병 적비성 현야 현야상이 다병연화 비성연화 일단 성의가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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