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중국연예
- 중화연예
https://hygall.com/587272085
view 4266
2024.03.10 22:36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다병이 놀라 입을 벌렸다. 싸우던 이들 중 누군가가 칼을 빼든 참이었다. 사람이 죽지는 않았으나, 한 남자의 팔이 깊이 베여 피가 철철 흘렀다. 구경꾼들이 놀란 소리를 지르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놈!" 칼에 베인 자의 수행원과 친구 따위로 보이는 자들이 앞다투어 무기를 꺼냈다. 그러자 먼저 공격한 이를 주축으로 한 세력도 얼른 칼을 꺼내 맞섰다. 삽시간에 펼쳐진 난동에, 구름처럼 모였던 인파가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도록 슬슬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배인을 비롯한 점원들이 아차 하는 얼굴로 말리기 시작했다.
"아니, 대협들. 대협들! 진정하십시오. 이러지 마시고 서로 좋게좋게 대화로 푸시지요."
"맞습니다. 얼른, 얼른 의원을 부르고 가장 좋은 술들을 내올 터이니-."
"저런 놈 따위에게 무시당하고 그냥 넘어갈 순 없다!"
주변인의 난처한 만류를 무시하고,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말을 외치더니 서로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분노와 취기가 뒤섞인 난잡한 싸움이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고 실제로 다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구경꾼들이 왁 소리를 지르며 사방팔방 갈라져 뛰기 시작했다. 떠들썩하던 연회 자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무용수들 역시 쩔쩔매며 시선을 교환하다, 설약이 선화루 안으로 피신하도록 지시하자 얼른 발을 옮겼다. 그들과 함께 움직이던 이연화가 고개를 들어 지붕을 보았다. 먼 거리였으나, 방다병은 분명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눈짓하는 모양새를 본 방다병이 얼른 뒤를 돌았다.
혼란을 틈타, 한 무리가 빠르게 뒤뜰의 창고를 향하고 있었다. 너무나 평범한 저잣거리 일꾼 같은 모습이었다. 부릅뜬 눈으로 그들을 살피던 적비성이 중얼거렸다. "목에 같은 문신이 있다. 세우단 놈들이 맞아." 창고에 들어가기 전, 단원들이 주변을 확인하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방다병은 적비성과 함께 얼른 몸을 낮추었다가, 무리가 창고 안으로 모습을 감춘 후에야 일어났다.
장정들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창고를 나왔다. 그 손마다 흑단으로 만든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토록 지체 없이 달려온 것을 보면, 앞뜰에서의 소란은 감시자들의 눈을 흐리려는 계획인 듯했다. 잠깐 시선을 교환하고, 방다병과 적비성은 거의 동시에 움직여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이번 상대는 무림인들일 가능성이 높았으니, 기척을 완벽히 죽여야 했다. 초저녁의 어둠에 녹아들어 조심스레 움직이던 방다병은, 갑자기 등 뒤에서 익숙한 속삭임이 들렸을 때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변두리로 나갈 줄 알았는데, 더 도심으로 가고 있네. 어쩌려는 셈이지?"
어느새 이연화가 그들을 따라붙어 있었다. 심히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들만 떼어놓았다 뿐이지, 아직 무용수의 차림 그대로였다. 적비성이 그편을 돌아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도망치던 놈들의 흔적은 아직 산중에 흩어져 있어. 하지만 그 문걸이라는 자가 고수라면, 자취가 남지 않게 이동하는 일도 가능했겠지. 상자를 나르는 무리와 합류해, 여현을 떠나는 행상이나 표국 무리로 위장할지도 모른다." 이연화가 흠 소리를 냈다. 밤거리를 누비는 무리를 응시하다, 이연화는 잠깐 어깨너머로 선화루 쪽을 돌아보았다.
"저쪽에도 우리 눈이 있기는 하니, 일단은 이쪽을 따라가 보자고."
"이연화, 너 괜찮은 거야? 혹시라도 공연이 이어지면-."
"사람이 그렇게 다치고, 구경꾼들도 다 도망쳤는데 어떻게 춤을 추겠어. 저기 움직인다, 가자."
이연화가 턱짓했다. 장정들은 이제 좁은 뒷골목으로 진입하여 요리조리 이동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의 종착지를 확인한 방다병이 눈썹을 찌푸렸다. 세우단원들은 아무리 보아도 세가 사람들이 살 법한 대저택 근처에 다다라, 능숙하게 뒷문을 찾았다. 작은 뒷문 앞에서는, 한 남자가 연신 골목 양끝을 두리번거리며 기다리던 참이었다. 방다병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쩐지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이연화가 면사 아래에서 중얼거렸다.
"방소보. 저 사람, 신씨 집안에서 보냈던 심부름꾼 아니야?"
방다병의 입이 딱 벌어졌다. 입은 옷은 조금 달랐으나, 남자는 분명 방시문의 집에 처음 도착했던 날 찾아와 빨리 답을 달라며 무례하게 굴던 사람이었다. 방다병이 경악한 얼굴로 이연화를 돌아보았다.
"맞아. 그럼 여기가-신가의 저택이란 거잖아! 왜 선화루의 창고에서 나온 상자가 여기로 왔지?"
"음.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아무래도 이곳에 세우단의 간부가 계신 모양이네. 잘하면 단주를 뵙게 될지도 모르겠는걸."
이연화가 턱을 매만지며 읊조렸다. 방다병이 손 아래의 지붕을 꽉 쥐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우단이 축적한 거액의 재화가, 이 정도의 눈속임과 계략을 거친 후 고작 말단이나 중간관리자에게 전달될 리는 없었다. 이 집에는 분명 세우단의 우두머리급 인물이 있을 터였다.
"뒷문이라고 해도, 이만큼 경비가 삼엄한 세가에 여러 명을 출입시키려면 신씨 성을 단 사람의 개입이 있었어야 해. 신가는 여현에서 가장 힘 있는 집안이라고 했는데, 왜 이런 범죄까지 저지르면서 재산을 모으려 한 거지?"
방다병이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린 말에, 적비성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신씨 자식놈을 보면,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집안이라는 것쯤은 뻔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부정한 방식으로 쌓아올린 권세일지도 모르지."
"음. 만일 그렇다면, 그놈이 표적으로 삼기 딱 좋았겠어. 여현을 꿰고 있는 집안인 데다, 돈과 욕심까지 있으니 얼마나 안성맞춤이야."
"그놈? 그놈이라면, 혹시 문걸을 말하는 거야?"
이연화가 빈정거린 말에, 방다병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사건이 스쳤다. 적당한 사람을 단주로 점찍어 접근한 다음, 범죄조직을 세워 돈을 벌고 홀로 도망쳤던 남자. 문걸이 이번에는 신씨 집안의 사람을 내세워 활동했단 말인가? 저택 외벽의 지붕에 앉아, 방다병은 열중하여 상황을 지켜보았다.
장정들은 심부름꾼의 안내를 받아, 후미진 정원 한편에 상자들을 나란히 내려놓았다. 곧 한 장년인이 뒷짐을 진 채 재빠르게 다가와, 심부름꾼과 무슨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입은 옷이나 걷는 태도를 보니, 아마도 신씨 집안의 어른인 듯했다. 그 이목구비가 신춘광과 퍽 닮아 있었다. 남자는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곧 장정들에게 손짓했다. 단원들이 상자의 봉인을 풀기 위해 열쇠를 갖다 댄 순간, 주변을 줄곧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던 이연화가 혀를 차더니 지붕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열지 마시오!"
이연화가 낮게 지시했다. 난데없는 등장에, 상자를 열려던 사람들 중 몇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개중 한 사람은 이미 자물쇠를 풀고 상자의 뚜껑을 들던 참이었다.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상자 틈새에서 흰 연기가 확 새어나왔다. 이연화를 비롯한 사람들이 얼른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 근처에 있던 단원들은 얼결에 연기를 들이마시고는 눈을 뒤집으며 쓰러져 경련했다. 이연화에 뒤따라 내려선 적비성이 오른손을 강하게 내질러 그 연기를 날려버렸다. 장년인과 심부름꾼, 이제 두어 명밖에 남지 않은 세우단원이 당혹과 두려움에 찬 얼굴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너, 너희는 누구냐?"
장년인이 일행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짐짓 호통을 치는 투였으나, 그 손끝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연화는 상대에게 제대로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미간을 좁히고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혹시나 해서 계속 지켜봤는데, 심악이나 문걸은 여기 없어. 잘못 짚었네."
"보나마나 이 상자들은 모두 비었을 거다. 이쪽은 눈속임용이었군."
"그럼, 우리가 이러는 사이에 진짜 상자를 가진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을 거란 얘기잖아!"
방다병이 눈을 크게 뜨고는 외쳤다. 마음이 급했지만, 방다병은 일단 당황하여 쩔쩔매는 장년인을 향해 백천원의 패를 들어 보였다.
"저는 백천원의 형탐입니다. 어르신은 누구시며, 세우단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나, 나는 신우련이다. 내 형님이 신가의 가주야! 세우단이라니,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침입한 불한당들이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형탐이면 이리 무도하게 굴어도 된단 말인가? 백천원에도 내 아는 사람이 있으니, 정식으로 항의하여-."
신우련이 짐짓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허우대는 멀쩡했으나 영 힘이 없어 보이는 모양새가, 역시 신춘광과 매우 닮아 있었다. 호랑이 그림을 가져와 제 앞을 막으려는 수작에, 방다병은 물론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아무리 현장을 잡히더라도, 스스로를 권력자로 여기는 이들은 결코 쉽게 잘못을 인정하거나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신우련의 허세가 끝나기 전, 방다병은 칼을 빼들어 아직 열리지 않은 상자 하나를 겨누었다. 신우련을 비롯한 사람들이 움찔했다. 낭랑하고 분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시간이 없습니다. 저희는 지금 당장 원흉을 쫓으러 갈 것입니다. 지금 사건의 경위를 빠르게 자백하고 추적에 도움을 주신다면 이후 죄를 경감해드릴 것이나, 그들을 체포한 다음에야 입을 여신다면 저를 포함하여 아무도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겁니다. 열을 세겠으니 그 전에 말씀하시지요. 열을 센 후에는, 세우단의 부단주가 당신을 위해 만든 함정을 하나 열겠습니다."
"함정이라고? 문, 아니, 그놈이 나를...아냐, 설마 그럴 리가...."
신우련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 갈팡질팡하는 꼴이 딱 허수아비였다. "말세네, 방소보가 협박을 하고 있어. 애한테 뭘 가르친 거야?" 방다병이 숫자를 세는 동안, 뒤편에서 지켜보던 이연화가 적비성을 향해 나직이 건넸다. "이건 협박이 아니라 사기다. 네게 배웠을 가능성이 높지." 적비성이 팔짱을 낀 채 이죽거렸다. 여덟을 센 방다병이 금방이라도 검기를 내뿜을 듯 몸에 힘을 주며 자물쇠를 노려보자, 아직 기절하지 않고 움츠러들어 있던 세우단원 하나가 급히 무릎을 꿇은 채 외쳤다.
"이, 이 자는 세우단의 단주입니다! 저희는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고자 세우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일꾼으로, 부단주의 명을 받아 단주의 집으로 상자를 날랐을 뿐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도 못하는 말단 일꾼일 뿐이니, 부디 공명정대한 형탐께서는 사정을 보아 주십시오!"
"사, 사정을 보아 주십시오!"
그 동료가 눈치 빠르게 무릎을 꿇으며 후창했다. 아마도 문걸에게 버림받은 처지를 금방 파악한 모양이었다. "이, 이 미친놈들이!" 심부름꾼과 신우련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방다병이 입을 열어 세우단원들을 향해 질문하려던 때, 무림인의 감각으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밤에 시끄러운 소리들이 연거푸 울린 탓인지, 몇 사람이 이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멀찍이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웬 소란이냐?"
살짝 쉰 듯한 음성을 듣자마자, 신우련과 심부름꾼이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해져 숨을 삼켰다. 특히 신우련은 이제 기절할 것처럼 허둥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대답이 없자, 여러 개의 등불이 외진 정원으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곧 대여섯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위 무사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선 사람은 신춘광이나 신우련과 사뭇 다른 인상을 하고 있었다. 키는 조금 작았으나 눈빛이 베일 듯 날카롭고 얼굴의 뼈대가 단단하여, 웬만한 바람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을 듯했다. 장년인은 단박에 이해하기 어려운 난장판을 휘 훑더니, 쏘는 듯한 눈으로 신우련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이 미친놈들이 나를 범죄자로 몰아가오, 형님! 어서 이놈들을 처치해야 합니다. 이들을 이대로 보내면 신가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거요."
신우련이 방다병을 손가락질하며 다급히 외쳤다. 이연화가 낮게 웃으며 대꾸했다.
"본인이 결백하다면, 우리가 어디로 가든 명예를 잃을 일이 있겠습니까? 신 가주, 동생분의 기질이 가주와 사뭇 달라 말썽을 자주 일으킬 관상입니다. 지금 현명하게 판단하지 않으신다면, 신가의 명예가 정말로 땅에 떨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주의 눈썹이 꿈틀했다. 남자는 이연화를 힐끗 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웬 예인이 감히 세가에 침입하여 함부로 떠드는가?"
"음. 예인이 말하든 무림맹주가 말하든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이 많더군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연화가 능청스러운 말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금색 머리장식이 가볍게 흔들리며 반짝였다. 칼을 넣지 않은 채 짧게 예를 표하고, 방다병은 단호한 얼굴로 설명했다.
"신 가주. 저는 백천원의 형탐이며, 천기당의 소당주이자 호부상서의 아들인 방다병입니다. 여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가주의 동생분이 긴밀하게 연루되어 있습니다. 이 자들은 세우단이라는 범죄 조직의 일원으로,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이곳에 전달하려던 참이었지요. 정당한 방법으로 단서를 추적하다가 현장을 발견한 것이니, 갑작스러우시겠으나 부디 주범을 잡기 위한 조사에 협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범을 잡기 위해서라면, 내 동생이 주범은 아니라는 뜻이군."
가주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방다병이 내심 혀를 찼다. 머리회전이 빠르고 득실에 밝아 좀처럼 자신의 틈을 내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틈은 놓치지 않는, 아주 귀찮은 유형의 상대였다. 유리알 같은 눈을 굴리며 잠시 턱을 매만지던 남자는, 곧 곁에 섰던 호위에게 무슨 말을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한 호위가 품에서 작은 호각 하나를 꺼냈다. 높고 가느다란 호각 소리가 울리자, 이연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건넸다.
"귀찮아지겠는데. 여긴 나한테 맡기고 너희 먼저 가. 그쪽에 훨씬 실력자들이 많을 테니, 하나보단 둘이 가는 편이 나아."
적비성의 눈빛이 바로 험해졌다. 방다병 역시 상대를 협박하던 상황조차 잠시 잊어버리고 눈살을 찌푸린 채 돌아보았다. 이연화가 한숨을 푹 쉬고는 진지하게 이었다.
"이번엔 진짜야, 꿍꿍이 같은 거 없어. 여긴 별거 아니야. 심악과 문걸을 쫓는 게 더 큰일이지. 정리하고 금방 뒤따라갈 테니, 너희는 먼저 선화루로 가서 여랑 낭자를 찾도록 해. 이미 지체한 시간이 아깝다고. 너, 지금도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이연화가 성실한 눈으로 방다병의 어깨를 툭 때리며 물었다. 그 태도에서 딱히 거짓의 기색을 찾지 못한 방다병이 영 못마땅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여러 개의 발소리가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곧 검은 옷을 입은 일단의 무인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잘 훈련받은 호위들은 상황에 의문을 품거나 질문하는 절차 없이, 일사불란하게 칼을 빼든 채 일행과 대치했다. 세우단원들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어떤 편에 붙는 것이 나을지 눈치를 살폈고, 신우련은 기세가 등등해져 다시 턱을 들었다.
"이 일에 대해 제대로 해명해야 할 거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조정과 강호에 모두 뒷배를 가진 유명인사가 쳐들어왔단 말이냐. 정말 최악의 경우, 난 네 목을 내주고 신가의 이름을 지킬 것이야."
가주가 신우련을 향해 차갑게 건네자, 잠시나마 펴졌던 얼굴이 다시 흙빛으로 가라앉았다. 남자가 방다병을 향해 말했다.
"비록 도둑처럼 남의 집에 침입하긴 했으나, 귀한 집의 공자가 계시니 무리하게 해를 가할 생각은 없소. 하지만 신가에서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어찌 행동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지 판단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말아주셨으면 하오."
"형님, 그래도 입을 완전히 막아야-."
"시끄럽다. 춘광이 놈이 속 썩이는 걸로도 충분한데, 너까지 이 난리더냐."
가주가 쏘아붙이자, 빌빌거리며 나서려던 신우련이 입을 다물었다. 방다병이 답답하게 외쳤다. "저희를 막으시면, 오히려 가주의 동생이 더 큰 누명을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앞으로, 이연화가 한 발짝 나섰다. 붉은 면사 아래에서 조롱의 말이 흘러나왔다.
"방다병, 됐으니 어서 가기나 해. 저런 사람들을 논파하려고 해봤자 안 통해. 책임져야 할 게 많은 데다, 고집도 자존심도 너무 세거든."
청명한 소리와 함께, 그 손에 세검이 딸려 나왔다. 무대에서 사용하던 검이었다. 달빛에 반짝일 만큼 닦여 있었으나 어쨌든 춤에 사용하는 병기라, 화려하고 장식적인 모양새가 한눈에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앞에 섰던 무인들의 얼굴로 순간적인 비웃음이 스쳤다. 가주의 눈썹이 꿈틀했다. 칼 든 손을 편안히 늘어뜨린 이연화를 향해, 남자가 위압적으로 말했다.
"그 차림을 보니, 선화루의 예인인 듯한데. 자네는 대체 어떤 연유로 이곳에서 행패를 부리는가?"
"그, 그래. 이 일로 인한 화가 너 하나에서 끝날 듯싶으냐? 내 너희 무용단에 아주 막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야. 앞으로 대희국 어디서도 제대로 공연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신우련이 삿대질하며 핏대를 세웠다. 이연화가 심드렁한 태도로 한쪽 눈가를 만졌다.
"어차피 화라면 당신들이 더욱 크게 입을 테고, 뭣보다 저는 정식 단원이 아닙니다. 연이 닿아 그들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이지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선화루에서 당신을 보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당신처럼 음주가무를 즐길 만한 사람이, 오늘 같은 날 춤 구경을 하러 오지 않고 집에 눌러있는 것만 봐도 수상하다는 걸 알겠네요."
"가자."
신우련을 놀리듯 이야기하는 이연화를 등지며, 적비성이 방다병을 향해 건넸다. 방다병이 대답하기도 전에, 적비성은 이미 자리를 박차 날아오르고 있었다. 청년이 놀라 적비성과 이연화를 번갈아 보는 사이, 이연화가 그 등을 세차게 떠밀었다. 몸이 붕 떠오를 정도의 일격에, 방다병은 재빨리 균형을 잡으며 경공을 펼쳤다. "막아!" 대장처럼 보이는 자가 날카롭게 외치자, 무인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비도를 던졌다. 누군가는 짤막한 쇠침을 비롯한 암기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방다병은 그 날붙이들이 자신의 몸에 닿으리란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등 뒤에서 강력한 내력의 발출이 느껴졌다. 강한 힘에 휘말린 무기들이 맥없이 밀려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땅을 박차려던 무인 몇이 흠칫 멈추었다. 잘못 도약했다간 저 무기들처럼 추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듯했다. 지붕에 내려앉아, 방다병은 참지 못하고 이연화를 한 번 돌아보았다. 태평하게도, 이연화는 방다병을 향해 손을 한 차례 흔들고는 어서 가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꾸물거리지 마." 적비성이 그 어깨를 잡아끌었다. 방다병이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이대로 가도 괜찮겠어?"
"이연화가 세검을 꺼냈을 때, 아무도 경계하지 않았어. 절세 고수가 없다는 뜻이다."
적비성이 비뚜름한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저놈들은 이연화의 상대가 못 돼. 일각이면 끝날 거다." 방다병이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숨을 삼켰다. 물론 자신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이연화를 혼자 남겨두는 일이 썩 편안하지는 않았다. 이연화는 이제 왼손으로 슬쩍 뒷짐을 진 채, 자신을 노려보는 적들에게 태연히 건네던 참이었다.
"선화루에서 다 못 추고 온 춤이 있었는데, 여기서 이으면 되겠네요."
"방다병, 남겠다면 알아서 해라. 나는 먼저 간다."
짜증스레 말한 적비성이 몸을 날렸다. 혀를 차며 두 방향을 번갈아 보다, 방다병은 결국 적비성과 같은 쪽으로 날아올랐다. 다치면 안 돼, 이연화. 전음으로 건네자, 한숨과 웃음을 동시에 품은 말이 돌아왔다. 너나 조심해, 방소보. 방다병이 한쪽 입매를 잠깐 올렸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다병이 놀라 입을 벌렸다. 싸우던 이들 중 누군가가 칼을 빼든 참이었다. 사람이 죽지는 않았으나, 한 남자의 팔이 깊이 베여 피가 철철 흘렀다. 구경꾼들이 놀란 소리를 지르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놈!" 칼에 베인 자의 수행원과 친구 따위로 보이는 자들이 앞다투어 무기를 꺼냈다. 그러자 먼저 공격한 이를 주축으로 한 세력도 얼른 칼을 꺼내 맞섰다. 삽시간에 펼쳐진 난동에, 구름처럼 모였던 인파가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도록 슬슬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배인을 비롯한 점원들이 아차 하는 얼굴로 말리기 시작했다.
"아니, 대협들. 대협들! 진정하십시오. 이러지 마시고 서로 좋게좋게 대화로 푸시지요."
"맞습니다. 얼른, 얼른 의원을 부르고 가장 좋은 술들을 내올 터이니-."
"저런 놈 따위에게 무시당하고 그냥 넘어갈 순 없다!"
주변인의 난처한 만류를 무시하고,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말을 외치더니 서로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분노와 취기가 뒤섞인 난잡한 싸움이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고 실제로 다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구경꾼들이 왁 소리를 지르며 사방팔방 갈라져 뛰기 시작했다. 떠들썩하던 연회 자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무용수들 역시 쩔쩔매며 시선을 교환하다, 설약이 선화루 안으로 피신하도록 지시하자 얼른 발을 옮겼다. 그들과 함께 움직이던 이연화가 고개를 들어 지붕을 보았다. 먼 거리였으나, 방다병은 분명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눈짓하는 모양새를 본 방다병이 얼른 뒤를 돌았다.
혼란을 틈타, 한 무리가 빠르게 뒤뜰의 창고를 향하고 있었다. 너무나 평범한 저잣거리 일꾼 같은 모습이었다. 부릅뜬 눈으로 그들을 살피던 적비성이 중얼거렸다. "목에 같은 문신이 있다. 세우단 놈들이 맞아." 창고에 들어가기 전, 단원들이 주변을 확인하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방다병은 적비성과 함께 얼른 몸을 낮추었다가, 무리가 창고 안으로 모습을 감춘 후에야 일어났다.
장정들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창고를 나왔다. 그 손마다 흑단으로 만든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토록 지체 없이 달려온 것을 보면, 앞뜰에서의 소란은 감시자들의 눈을 흐리려는 계획인 듯했다. 잠깐 시선을 교환하고, 방다병과 적비성은 거의 동시에 움직여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이번 상대는 무림인들일 가능성이 높았으니, 기척을 완벽히 죽여야 했다. 초저녁의 어둠에 녹아들어 조심스레 움직이던 방다병은, 갑자기 등 뒤에서 익숙한 속삭임이 들렸을 때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변두리로 나갈 줄 알았는데, 더 도심으로 가고 있네. 어쩌려는 셈이지?"
어느새 이연화가 그들을 따라붙어 있었다. 심히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들만 떼어놓았다 뿐이지, 아직 무용수의 차림 그대로였다. 적비성이 그편을 돌아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도망치던 놈들의 흔적은 아직 산중에 흩어져 있어. 하지만 그 문걸이라는 자가 고수라면, 자취가 남지 않게 이동하는 일도 가능했겠지. 상자를 나르는 무리와 합류해, 여현을 떠나는 행상이나 표국 무리로 위장할지도 모른다." 이연화가 흠 소리를 냈다. 밤거리를 누비는 무리를 응시하다, 이연화는 잠깐 어깨너머로 선화루 쪽을 돌아보았다.
"저쪽에도 우리 눈이 있기는 하니, 일단은 이쪽을 따라가 보자고."
"이연화, 너 괜찮은 거야? 혹시라도 공연이 이어지면-."
"사람이 그렇게 다치고, 구경꾼들도 다 도망쳤는데 어떻게 춤을 추겠어. 저기 움직인다, 가자."
이연화가 턱짓했다. 장정들은 이제 좁은 뒷골목으로 진입하여 요리조리 이동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의 종착지를 확인한 방다병이 눈썹을 찌푸렸다. 세우단원들은 아무리 보아도 세가 사람들이 살 법한 대저택 근처에 다다라, 능숙하게 뒷문을 찾았다. 작은 뒷문 앞에서는, 한 남자가 연신 골목 양끝을 두리번거리며 기다리던 참이었다. 방다병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쩐지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이연화가 면사 아래에서 중얼거렸다.
"방소보. 저 사람, 신씨 집안에서 보냈던 심부름꾼 아니야?"
방다병의 입이 딱 벌어졌다. 입은 옷은 조금 달랐으나, 남자는 분명 방시문의 집에 처음 도착했던 날 찾아와 빨리 답을 달라며 무례하게 굴던 사람이었다. 방다병이 경악한 얼굴로 이연화를 돌아보았다.
"맞아. 그럼 여기가-신가의 저택이란 거잖아! 왜 선화루의 창고에서 나온 상자가 여기로 왔지?"
"음.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아무래도 이곳에 세우단의 간부가 계신 모양이네. 잘하면 단주를 뵙게 될지도 모르겠는걸."
이연화가 턱을 매만지며 읊조렸다. 방다병이 손 아래의 지붕을 꽉 쥐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우단이 축적한 거액의 재화가, 이 정도의 눈속임과 계략을 거친 후 고작 말단이나 중간관리자에게 전달될 리는 없었다. 이 집에는 분명 세우단의 우두머리급 인물이 있을 터였다.
"뒷문이라고 해도, 이만큼 경비가 삼엄한 세가에 여러 명을 출입시키려면 신씨 성을 단 사람의 개입이 있었어야 해. 신가는 여현에서 가장 힘 있는 집안이라고 했는데, 왜 이런 범죄까지 저지르면서 재산을 모으려 한 거지?"
방다병이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린 말에, 적비성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신씨 자식놈을 보면,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집안이라는 것쯤은 뻔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부정한 방식으로 쌓아올린 권세일지도 모르지."
"음. 만일 그렇다면, 그놈이 표적으로 삼기 딱 좋았겠어. 여현을 꿰고 있는 집안인 데다, 돈과 욕심까지 있으니 얼마나 안성맞춤이야."
"그놈? 그놈이라면, 혹시 문걸을 말하는 거야?"
이연화가 빈정거린 말에, 방다병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사건이 스쳤다. 적당한 사람을 단주로 점찍어 접근한 다음, 범죄조직을 세워 돈을 벌고 홀로 도망쳤던 남자. 문걸이 이번에는 신씨 집안의 사람을 내세워 활동했단 말인가? 저택 외벽의 지붕에 앉아, 방다병은 열중하여 상황을 지켜보았다.
장정들은 심부름꾼의 안내를 받아, 후미진 정원 한편에 상자들을 나란히 내려놓았다. 곧 한 장년인이 뒷짐을 진 채 재빠르게 다가와, 심부름꾼과 무슨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입은 옷이나 걷는 태도를 보니, 아마도 신씨 집안의 어른인 듯했다. 그 이목구비가 신춘광과 퍽 닮아 있었다. 남자는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곧 장정들에게 손짓했다. 단원들이 상자의 봉인을 풀기 위해 열쇠를 갖다 댄 순간, 주변을 줄곧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던 이연화가 혀를 차더니 지붕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열지 마시오!"
이연화가 낮게 지시했다. 난데없는 등장에, 상자를 열려던 사람들 중 몇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개중 한 사람은 이미 자물쇠를 풀고 상자의 뚜껑을 들던 참이었다.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상자 틈새에서 흰 연기가 확 새어나왔다. 이연화를 비롯한 사람들이 얼른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 근처에 있던 단원들은 얼결에 연기를 들이마시고는 눈을 뒤집으며 쓰러져 경련했다. 이연화에 뒤따라 내려선 적비성이 오른손을 강하게 내질러 그 연기를 날려버렸다. 장년인과 심부름꾼, 이제 두어 명밖에 남지 않은 세우단원이 당혹과 두려움에 찬 얼굴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너, 너희는 누구냐?"
장년인이 일행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짐짓 호통을 치는 투였으나, 그 손끝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연화는 상대에게 제대로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미간을 좁히고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혹시나 해서 계속 지켜봤는데, 심악이나 문걸은 여기 없어. 잘못 짚었네."
"보나마나 이 상자들은 모두 비었을 거다. 이쪽은 눈속임용이었군."
"그럼, 우리가 이러는 사이에 진짜 상자를 가진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을 거란 얘기잖아!"
방다병이 눈을 크게 뜨고는 외쳤다. 마음이 급했지만, 방다병은 일단 당황하여 쩔쩔매는 장년인을 향해 백천원의 패를 들어 보였다.
"저는 백천원의 형탐입니다. 어르신은 누구시며, 세우단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나, 나는 신우련이다. 내 형님이 신가의 가주야! 세우단이라니,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침입한 불한당들이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형탐이면 이리 무도하게 굴어도 된단 말인가? 백천원에도 내 아는 사람이 있으니, 정식으로 항의하여-."
신우련이 짐짓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허우대는 멀쩡했으나 영 힘이 없어 보이는 모양새가, 역시 신춘광과 매우 닮아 있었다. 호랑이 그림을 가져와 제 앞을 막으려는 수작에, 방다병은 물론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아무리 현장을 잡히더라도, 스스로를 권력자로 여기는 이들은 결코 쉽게 잘못을 인정하거나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신우련의 허세가 끝나기 전, 방다병은 칼을 빼들어 아직 열리지 않은 상자 하나를 겨누었다. 신우련을 비롯한 사람들이 움찔했다. 낭랑하고 분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시간이 없습니다. 저희는 지금 당장 원흉을 쫓으러 갈 것입니다. 지금 사건의 경위를 빠르게 자백하고 추적에 도움을 주신다면 이후 죄를 경감해드릴 것이나, 그들을 체포한 다음에야 입을 여신다면 저를 포함하여 아무도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겁니다. 열을 세겠으니 그 전에 말씀하시지요. 열을 센 후에는, 세우단의 부단주가 당신을 위해 만든 함정을 하나 열겠습니다."
"함정이라고? 문, 아니, 그놈이 나를...아냐, 설마 그럴 리가...."
신우련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 갈팡질팡하는 꼴이 딱 허수아비였다. "말세네, 방소보가 협박을 하고 있어. 애한테 뭘 가르친 거야?" 방다병이 숫자를 세는 동안, 뒤편에서 지켜보던 이연화가 적비성을 향해 나직이 건넸다. "이건 협박이 아니라 사기다. 네게 배웠을 가능성이 높지." 적비성이 팔짱을 낀 채 이죽거렸다. 여덟을 센 방다병이 금방이라도 검기를 내뿜을 듯 몸에 힘을 주며 자물쇠를 노려보자, 아직 기절하지 않고 움츠러들어 있던 세우단원 하나가 급히 무릎을 꿇은 채 외쳤다.
"이, 이 자는 세우단의 단주입니다! 저희는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고자 세우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일꾼으로, 부단주의 명을 받아 단주의 집으로 상자를 날랐을 뿐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도 못하는 말단 일꾼일 뿐이니, 부디 공명정대한 형탐께서는 사정을 보아 주십시오!"
"사, 사정을 보아 주십시오!"
그 동료가 눈치 빠르게 무릎을 꿇으며 후창했다. 아마도 문걸에게 버림받은 처지를 금방 파악한 모양이었다. "이, 이 미친놈들이!" 심부름꾼과 신우련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방다병이 입을 열어 세우단원들을 향해 질문하려던 때, 무림인의 감각으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밤에 시끄러운 소리들이 연거푸 울린 탓인지, 몇 사람이 이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멀찍이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웬 소란이냐?"
살짝 쉰 듯한 음성을 듣자마자, 신우련과 심부름꾼이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해져 숨을 삼켰다. 특히 신우련은 이제 기절할 것처럼 허둥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대답이 없자, 여러 개의 등불이 외진 정원으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곧 대여섯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위 무사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선 사람은 신춘광이나 신우련과 사뭇 다른 인상을 하고 있었다. 키는 조금 작았으나 눈빛이 베일 듯 날카롭고 얼굴의 뼈대가 단단하여, 웬만한 바람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을 듯했다. 장년인은 단박에 이해하기 어려운 난장판을 휘 훑더니, 쏘는 듯한 눈으로 신우련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이 미친놈들이 나를 범죄자로 몰아가오, 형님! 어서 이놈들을 처치해야 합니다. 이들을 이대로 보내면 신가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거요."
신우련이 방다병을 손가락질하며 다급히 외쳤다. 이연화가 낮게 웃으며 대꾸했다.
"본인이 결백하다면, 우리가 어디로 가든 명예를 잃을 일이 있겠습니까? 신 가주, 동생분의 기질이 가주와 사뭇 달라 말썽을 자주 일으킬 관상입니다. 지금 현명하게 판단하지 않으신다면, 신가의 명예가 정말로 땅에 떨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주의 눈썹이 꿈틀했다. 남자는 이연화를 힐끗 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웬 예인이 감히 세가에 침입하여 함부로 떠드는가?"
"음. 예인이 말하든 무림맹주가 말하든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이 많더군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연화가 능청스러운 말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금색 머리장식이 가볍게 흔들리며 반짝였다. 칼을 넣지 않은 채 짧게 예를 표하고, 방다병은 단호한 얼굴로 설명했다.
"신 가주. 저는 백천원의 형탐이며, 천기당의 소당주이자 호부상서의 아들인 방다병입니다. 여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가주의 동생분이 긴밀하게 연루되어 있습니다. 이 자들은 세우단이라는 범죄 조직의 일원으로,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이곳에 전달하려던 참이었지요. 정당한 방법으로 단서를 추적하다가 현장을 발견한 것이니, 갑작스러우시겠으나 부디 주범을 잡기 위한 조사에 협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범을 잡기 위해서라면, 내 동생이 주범은 아니라는 뜻이군."
가주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방다병이 내심 혀를 찼다. 머리회전이 빠르고 득실에 밝아 좀처럼 자신의 틈을 내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틈은 놓치지 않는, 아주 귀찮은 유형의 상대였다. 유리알 같은 눈을 굴리며 잠시 턱을 매만지던 남자는, 곧 곁에 섰던 호위에게 무슨 말을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한 호위가 품에서 작은 호각 하나를 꺼냈다. 높고 가느다란 호각 소리가 울리자, 이연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건넸다.
"귀찮아지겠는데. 여긴 나한테 맡기고 너희 먼저 가. 그쪽에 훨씬 실력자들이 많을 테니, 하나보단 둘이 가는 편이 나아."
적비성의 눈빛이 바로 험해졌다. 방다병 역시 상대를 협박하던 상황조차 잠시 잊어버리고 눈살을 찌푸린 채 돌아보았다. 이연화가 한숨을 푹 쉬고는 진지하게 이었다.
"이번엔 진짜야, 꿍꿍이 같은 거 없어. 여긴 별거 아니야. 심악과 문걸을 쫓는 게 더 큰일이지. 정리하고 금방 뒤따라갈 테니, 너희는 먼저 선화루로 가서 여랑 낭자를 찾도록 해. 이미 지체한 시간이 아깝다고. 너, 지금도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이연화가 성실한 눈으로 방다병의 어깨를 툭 때리며 물었다. 그 태도에서 딱히 거짓의 기색을 찾지 못한 방다병이 영 못마땅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여러 개의 발소리가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곧 검은 옷을 입은 일단의 무인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잘 훈련받은 호위들은 상황에 의문을 품거나 질문하는 절차 없이, 일사불란하게 칼을 빼든 채 일행과 대치했다. 세우단원들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어떤 편에 붙는 것이 나을지 눈치를 살폈고, 신우련은 기세가 등등해져 다시 턱을 들었다.
"이 일에 대해 제대로 해명해야 할 거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조정과 강호에 모두 뒷배를 가진 유명인사가 쳐들어왔단 말이냐. 정말 최악의 경우, 난 네 목을 내주고 신가의 이름을 지킬 것이야."
가주가 신우련을 향해 차갑게 건네자, 잠시나마 펴졌던 얼굴이 다시 흙빛으로 가라앉았다. 남자가 방다병을 향해 말했다.
"비록 도둑처럼 남의 집에 침입하긴 했으나, 귀한 집의 공자가 계시니 무리하게 해를 가할 생각은 없소. 하지만 신가에서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어찌 행동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지 판단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말아주셨으면 하오."
"형님, 그래도 입을 완전히 막아야-."
"시끄럽다. 춘광이 놈이 속 썩이는 걸로도 충분한데, 너까지 이 난리더냐."
가주가 쏘아붙이자, 빌빌거리며 나서려던 신우련이 입을 다물었다. 방다병이 답답하게 외쳤다. "저희를 막으시면, 오히려 가주의 동생이 더 큰 누명을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앞으로, 이연화가 한 발짝 나섰다. 붉은 면사 아래에서 조롱의 말이 흘러나왔다.
"방다병, 됐으니 어서 가기나 해. 저런 사람들을 논파하려고 해봤자 안 통해. 책임져야 할 게 많은 데다, 고집도 자존심도 너무 세거든."
청명한 소리와 함께, 그 손에 세검이 딸려 나왔다. 무대에서 사용하던 검이었다. 달빛에 반짝일 만큼 닦여 있었으나 어쨌든 춤에 사용하는 병기라, 화려하고 장식적인 모양새가 한눈에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앞에 섰던 무인들의 얼굴로 순간적인 비웃음이 스쳤다. 가주의 눈썹이 꿈틀했다. 칼 든 손을 편안히 늘어뜨린 이연화를 향해, 남자가 위압적으로 말했다.
"그 차림을 보니, 선화루의 예인인 듯한데. 자네는 대체 어떤 연유로 이곳에서 행패를 부리는가?"
"그, 그래. 이 일로 인한 화가 너 하나에서 끝날 듯싶으냐? 내 너희 무용단에 아주 막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야. 앞으로 대희국 어디서도 제대로 공연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신우련이 삿대질하며 핏대를 세웠다. 이연화가 심드렁한 태도로 한쪽 눈가를 만졌다.
"어차피 화라면 당신들이 더욱 크게 입을 테고, 뭣보다 저는 정식 단원이 아닙니다. 연이 닿아 그들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이지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선화루에서 당신을 보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당신처럼 음주가무를 즐길 만한 사람이, 오늘 같은 날 춤 구경을 하러 오지 않고 집에 눌러있는 것만 봐도 수상하다는 걸 알겠네요."
"가자."
신우련을 놀리듯 이야기하는 이연화를 등지며, 적비성이 방다병을 향해 건넸다. 방다병이 대답하기도 전에, 적비성은 이미 자리를 박차 날아오르고 있었다. 청년이 놀라 적비성과 이연화를 번갈아 보는 사이, 이연화가 그 등을 세차게 떠밀었다. 몸이 붕 떠오를 정도의 일격에, 방다병은 재빨리 균형을 잡으며 경공을 펼쳤다. "막아!" 대장처럼 보이는 자가 날카롭게 외치자, 무인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비도를 던졌다. 누군가는 짤막한 쇠침을 비롯한 암기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방다병은 그 날붙이들이 자신의 몸에 닿으리란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등 뒤에서 강력한 내력의 발출이 느껴졌다. 강한 힘에 휘말린 무기들이 맥없이 밀려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땅을 박차려던 무인 몇이 흠칫 멈추었다. 잘못 도약했다간 저 무기들처럼 추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듯했다. 지붕에 내려앉아, 방다병은 참지 못하고 이연화를 한 번 돌아보았다. 태평하게도, 이연화는 방다병을 향해 손을 한 차례 흔들고는 어서 가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꾸물거리지 마." 적비성이 그 어깨를 잡아끌었다. 방다병이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이대로 가도 괜찮겠어?"
"이연화가 세검을 꺼냈을 때, 아무도 경계하지 않았어. 절세 고수가 없다는 뜻이다."
적비성이 비뚜름한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저놈들은 이연화의 상대가 못 돼. 일각이면 끝날 거다." 방다병이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숨을 삼켰다. 물론 자신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이연화를 혼자 남겨두는 일이 썩 편안하지는 않았다. 이연화는 이제 왼손으로 슬쩍 뒷짐을 진 채, 자신을 노려보는 적들에게 태연히 건네던 참이었다.
"선화루에서 다 못 추고 온 춤이 있었는데, 여기서 이으면 되겠네요."
"방다병, 남겠다면 알아서 해라. 나는 먼저 간다."
짜증스레 말한 적비성이 몸을 날렸다. 혀를 차며 두 방향을 번갈아 보다, 방다병은 결국 적비성과 같은 쪽으로 날아올랐다. 다치면 안 돼, 이연화. 전음으로 건네자, 한숨과 웃음을 동시에 품은 말이 돌아왔다. 너나 조심해, 방소보. 방다병이 한쪽 입매를 잠깐 올렸다.
https://hygall.com/587272085
[Code: 4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