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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9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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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 유사 센가물 배경으로 다병 비성 현야에게 사랑받는(?) 이연화가 보고 싶어서 막 나가는 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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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ㅈ 주의, 주화입마된 사파 무순 주의




10편.


적비성은 가부좌를 한 채 호흡을 가다듬어 경맥에 내력이 흐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회음과 상단전까지의 길목에 저릿한 저항이 영 사라지지 않았다. 제 약을 지으러 온 의원의 경맥에 감응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감응해버린 몸은 저를 편하게 할 다른 존재와의 접촉을 바라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원하는게 있으면 거리낌없이 얻고야 마는 적비성이었으나 불필요하게 움직이는 것도 질색이었다. 제 힘으로 진정되지 않는 부분은 남겨두고 의원의 힘을 이용하면 될 일이었다. 적비성은 감았던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다병을 얼르고 달래 방으로 보낸 이연화는 초를 켜고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제 생각이 맞다면 적비성이 찾아올 터였다. 그 자가 어찌 나올지 알 수 없었지만 만에 하나 억지로 경맥을 통하려 한다해도 별 부담은 되지 않을거라 예상했다. 통법을 쓰지 않으면 그만이기도 하지만 변변치 않은 내력에 적맹주가 흥미를 잃을 가능성이 더 컸기 때문이다. 보통의 인간은 제 몸에 요력을 담아보지 않은 이상 타인의 요력을 알아차리지 못하니 3할의 내력만을 감지하고 곧 죽을 몸이라 할 가능성이 컸다. 적맹주는 강한 것 외에는 흥미를 갖지 않는다하니 이연화도 관심 대상에서 벗어날 터였다. 의존하기 싫어하고 자존심이 강한 그의 성격에 거치적거리는 연형제는 필요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적비성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

"적맹주. 아까는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연화의 인사에 적비성은 별말을 하지 않고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그가 가까이 오자 하단전에서 열이 오르고 경맥이 뒤집히는 듯 불편감이 올라왔다. 역류하는 경맥을 가진 이와의 감응은 듣던대로 힘에 부쳤다. 이연화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차를 따르려고 들었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적비성이 망설이지 않고 이연화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이연화의 어깨를 잡아 내력을 불어넣었다. 참으려 했으나 숨이 가빠와 이연화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괴로운 감각이 올라와 절로 눈이 감겼다. 모르는 이가 보면 사내에게 손목을 잡혀 당황하는 여인처럼 보일지 모를 광경이었으나 이연화는 거북한 느낌을 참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적비성의 내력은 방다병의 것과 사뭇 달랐다. 방다병의 내력이 들어올 때는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에 감싸이는 느낌을 받았다. 따뜻한 볕을 쬐고 있을 때처럼 한기가 녹는 감각에 가까워 곧바로 편해졌다. 반면 적비성의 내력은 겨울 바람처럼 차게 시작해서 날카롭게 스며 들었다. 그리고는 급작스레 열풍으로 바뀌어 몸을 헤집듯이 휘돌았다. 그리 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날뛰던 경맥이 안정을 되찾았다.

"또 신세를 지는군요."

이연화가 잡힌 손을 거두려 힘을 주었다. 하지만 적비성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연화가 흘끔 쳐다보자 적비성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 더 힘을 줘도 마찬가지였다.

"적맹주, 차를 따라 드리지요."

그제서야 적비성은 이연화의 손을 놓았다. 잡혔던 손목이 붉었다.

"적맹주는 괜찮습니까?"

차를 앞으로 내밀며 이연화가 물었다. 실은 정말로 궁금했다. 아까부터 그다지 힘든 기색이 보이지 않아 저 혼자 이 난리인가 싶어 독에 당한 약한 몸을 탓해야하나 싶던 차였다. 적비성은 차를 한 잔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방금 접촉으로 가라앉았다."

"내력을 주기만 했는데 안정이 된다니 적맹주의 내공이 대단한가봅니다."

이연화는 내심 안심이 되었다. 최소한 칼 들고 내력을 내놓으라 달려들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 적어도 적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까지 이연화는 그리 생각했다. 벌떡 일어선 적비성은 등에서 장도를 꺼내 순식간에 이연화의 목에 들이댔다. 제 눈 앞에서 서슬 퍼렇게 빛나는 장도를 본 이연화는 차분하게 적비성을 올려다 보았다. 둘의 시선이 얽혔다.

"어떻게 요력을 갖고 있지?"

왜가 아니라 어떻게라 묻는 것도 그다웠다. 그보다 이 자가 어떻게 알아차렸단 말인가. 적가네에서 살수 아이들에게 요력을 주입하려던 시도는 당연히 죄다 실패로 돌아갔을텐데. 적비성은 요력을 몸에 담은 적이 있었다는 것이군. 이연화는 눈 앞의 남자의 강인함에 새삼 감탄했다.

"정체를 밝혀라."

이연화는 잠시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고민했다. 천마왕과 싸우고 기절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벽차지독에 요력이 들어찬 몸이 되었다고 말한들 믿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70년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상이가 자신이라고는 더욱 말할 수 없었다. 이연화는 한숨을 쉬고 눈을 내리깔았다.

"적맹주를 속일 수가 없겠군요. 이래서 여기에 와야하나 망설였습니다. 간곡히 부탁을 받아 오긴 했는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는군요. 얘기할 터이니 이건 치워주시지요."

적비성이 장도를 거두었으나 등 뒤로 돌려보내지 않고 제 옆에 기대어 놓았다.

"적맹주, 제가 요마라면 적맹주와 연형제가 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내력을 받고 회복할 수도 없겠지요. 저는 틀림없이 인간입니다. 다만..."

이연화는 적비성의 눈빛이 저를 뚫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순간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요마라며 사냥해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과연 금원맹의 맹주는 소문대로 요마 사냥꾼이었다.

"중원에서 약초를 캐다가 요마에 당한 적이 있습니다. 적맹주의 약에도 그 약초가 들어가지요. 중원 초입에는 없고 제법 깊은 습지에 자라다보니 사람과 분간이 되지 않는 요마도 종종 나타나는데 옛적의 저는 뭣도 몰라 무방비한 상태였습니다."

이연화는 머리 속에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약초 가방을 허리에 두르고 호미를 손에 쥔 자신을 그려내었다. 파도가 올 줄 모르고 썰물에 젖은 모래 바닥에 박힌 조개를 주우러 가는 어린아이를 떠올리려 애쓰며 이연화는 과장되게 인상을 썼다.

"처음에는 저처럼 약초를 캐는 의원인 줄 알고 반가웠지요. 사람이 있으니 덜 무섭기도 하고요. 그런데 얼굴을 보니 저와 똑같았어요. 소름이 돋아 주저 앉은 저는 그 놈이 다가와도 꼼짝도 할 수가 없었지요. 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니 몸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내력 반이 없어지고 온몸이 따끔거려 견딜 수가 없었어요. 피를 몇 번을 토했는지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가 흘러 곧 죽겠구나 했지요."

적비성은 이연화의 말에 굳었던 표정을 미세하게 풀었다. 그의 묘사는 자신도 잘 아는 것이라 거짓인 것 같지가 않았다. 피를 온몸으로 쏟으며 죽어갔던 적가네의 어린 소년들이 머리 속을 스쳤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근처에 법사가 지나가다 저를 발견했어요. 요력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손을 쓸 수가 없었겠죠. 그 자가 어차피 죽을텐데 도박을 해보겠냐 했어요. 요마가 벽차지독을 써서 요력을 넣은 것 같은데 요력이 강해 곧 이기지 못할거라고요. 벽차지독을 조금 더 쓰면 요력을 받아들여 살거나 독에 눌려 죽을텐데 어찌 하겠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독을 썼고, 이렇게 살아 남은 것입니다. 때때로 발작을 하고 내력은 3할이 남아 형편없어 연형제가 될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내력이 온전하다 해도 무공이나 비술에 문외한이니 천기당의 저 젊은이에게도 미안한 일이고요."

이연화는 가상의 법사가 가상의 자신을 구해준 장면을 대충 마무리 지었다. 적비성의 표정을 보니 얼추 납득을 한 모양이었다. 이연화는 목이 타 차를 마셨다. 이제 한 고비 넘긴 것이려나.

"너와 경맥을 통하면 어떻게 되지?"

덤덤하게 물어오는 적비성에 이연화는 마시던 차에 급히 사레가 들러 쿨럭댔다. 실컷 본인이 얼마나 연형제로서 무용한 처지인지 상상력을 동원해 설명했더니 보람 없는 소리나 해대다니. 적비성은 뭐 어떠냐는 식으로 이연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크흠. 요력에 경맥이 흐트러질테지요. 천기당의 제 연형제에게도 다른 이를 찾아보라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생각에 잠긴 듯한 적비성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까 두려워진 이연화가 재빨리 뒷말을 붙였다.

"적맹주는 연형제가 없어도 비술을 쓸 수 있으니 저는 경맥만 뒤흔들 뿐 도움이 되지 않을겁니다. 날이 밝는대로 저희는 떠날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약을 지을 다른 의원을 소개해드리지요."

이연화는 그가 역행하는 경맥을 가진 연형제 앞에서도 내력을 운용해 진정시킬 수 있는 내공의 소유자인 것을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경맥 통법을 하자고 조르는 이는 방다병 하나로 충분했다. 적비성은 별다른 말을 얹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때, 들창이 끽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봄에 어울리지 않는 스산한 바람이 들이쳤다. 가벼이 흔들리던 창은 점점 발작이라도 하듯 소름 돋는 삐걱 소리를 내며 떨어댔다. 적비성과 이연화는 선득한 기운에 어깨를 굳혔다. 들창 가까이에 있던 초가 바람이 내는 쇳소리와 함께 모조리 꺼져 방이 순식간에 어둑해졌다.

"이연화!"

방다병이 문을 열고 들이 닥쳤다. 적비성이 있는 것을 본 방다병의 얼굴이 굳었다. 잽싸게 이연화의 팔을 잡아 제 뒤로 보낸 방다병은 적비성을 무섭게 노려보고는 곧 눈빛을 바꿔 제 연형제를 구석구석 살폈다.

"괜찮아?"

"아무 일 없어. 걱정하는 버릇 좀 버려, 방소보. 그나저나 지금 무슨 일이야?"

"바람이 심상찮아. 들창이 열리자마자 이리로 왔어."

"예사 바람이 아니다."

적비성이 장도를 말아쥐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도 곧 뒤따라 나갔다. 자연의 바람이 아닌 것이 분명한 스산한 바람이 불어 세 사람의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휘날렸다. 거세지는 바람 사이에 검은 그림자가 언뜻 나타났다. 적비성과 방다병이 동시에 칼을 뽑아 들었다.

검은 그림자는 눈에 담지 못할 속도로 뱀같은 쇳소리를 내며 바람을 타고 이동했다. 검은 머리카락 뭉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괴이한 터럭이 오가는 방향을 가늠하느라 금원맹의 천사들이 우왕좌왕했다. 바람은 회오리처럼 모여들어 건물 사이를 지나가며 흙먼지를 날렸다.
적비성이 팔을 들어 검은 회오리로 장을 날렸다. 회오리가 순간 흩어지며 주변 담장의 기와들을 날려버렸다. 비풍백양이었다. 회오리는 순식간에 다시 모여 도망치는가 싶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적비성에게 돌진해왔다. 회오리에서 여자의 머리카락같은 검고 긴 물체가 촉수처럼 튀어나와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머리카락이 단번에 적비성의 다리를 뚫고 흩어졌다.

소리 없이 잇새로 내어 삼키는 신음과 함께 적비성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쓰러졌다. 나머지 머리카락들이 저마다 흩어진 금원맹의 천사들의 팔이며 다리를 꿰뚫었다. 사방에서 비명과 함께 얇은 선혈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방다병은 이아검을 들고 머리카락을 막아내며 이연화를 지키기 바빴다. 이연화는 당장이라도 소사검을 빼들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했다. 손끝에 붉은 불꽃을 올렸던 이연화는 이 상황에서 요마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적비성 뿐인 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그에게 가 등에 내력을 불어 넣었다.
내력을 받은 적비성이 눈썹을 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부드럽게 밀고 들어오지만 단단하게 몸 안에 휘어감기는 것이 유연한 대나무를 연상케했다. 경맥에 기운이 돌며 내력이 증폭되듯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낀 적비성은 드물게도 놀란 얼굴을 하고 제 연형제를 쳐다보았다. 이렇게나 강력할 줄은 몰랐다. 이연화는 적비성을 흘끔 보고 입모양으로 요력때문이라고 얼버무렸다. 어쨌거나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내력을 받아 공력이 배가된 적비성이 손 끝에 보라색 불길을 피워 올려 글자를 그려냈다. 이를 장도에 날리자 검날이 부르르 떨며 청자색으로 빛났다. 적비성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은 머리카락을 갈랐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리며 회오리 바람이 멈추었다. 바닥으로 두 동강이 난 머리카락이 툭 떨어졌다.

"사람 머리카락이야."

방다병이 내려다보고 말했다. 다른 요마가 머리카락으로 술수를 부린 것이 분명했다. 본체가 따로 있을 터였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했다는 표정으로 눈을 마주쳤다.
적비성이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마당 뒷켠에서 덜커덩 소리가 나고 주변이 소란해졌다. 도착하니 이미 금원맹 서고의 두터운 문짝이 너덜하게 뜯겨 나가고 심한 공격을 받은 천사 둘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매,맹주. 요마가 보물실에서 뭔가를 가져갔습니다."

이연화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적비성은 서둘러 서고 지하로 갔고 이연화와 방다병이 뒤를 따랐다. 보물실은 강도라도 든 듯 온통 뒤집혀 있었다. 깨어진 항아리와 찢긴 족자를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뚜껑이 부서진 상자가 보였다. 상자 안에 붉은 비단천만 황망히 남은 것을 보고 이연화는 사라진 물건이 결계 보옥임을 알았다.

"방금 그 소동은 우리의 주의를 다른데로 돌리려는 술책이었군요."

"천마왕이 움직였군."

적비성의 말에 방다병이 눈을 크게 떴다.

"천마왕? 그 자는 칠곡산 결계에 갇혀 있잖아?"

"방다병,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천기당에도 요마가 들었잖아. 칠곡산 결계에 쓰인 물건을 여러 문파가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고 들었어. 천마왕은 결계를 파괴하려고 물건을 찾으려는 모양이야."

"보옥이다. 네가 천기당 소당주라면 보옥을 알고 있겠지."

"보옥...맞아. 어머니도 요마가 든 후 바로 보옥을 확인하러 가셨어. 다행히 무사했지만."

천기당의 보옥은 무사했다. 하지만 금원맹이 갖고 있던 보옥은 천마왕의 수중에 떨어질 터였다.

"천마왕이 결계를 깰 생각이다."

70여년간 칠곡산의 결계는 조용하니 그 어떤 이상한 조짐도 없었다. 천마왕에 무서워 떨던 사람들도 점차 옛 사람이 되거나 세상을 떠났다. 목숨을 바쳐 결계를 친 이상이만이 전설로 회자될 뿐이었다. 방다병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쉽게 뺏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왜 이제 와서?"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연화 역시 천마왕의 의중을 가늠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현야가 결계를 깨고 세상에 나오려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적비성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금원맹에서 보옥을 되찾을 것이다. 이연화는 나와 함께 간다."

이연화와 방다병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미쳤어? 이연화가 널 왜 따라가!"

방다병이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냈다. 이연화는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짚었다. 멋대로 밀고 들어오기는 두 사람이 다르지 않았으나 제 의지가 서면 주위를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비성이 더 강적이었다. 적비성은 방다병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했다.

"이연화의 내력만으로도 공력이 갑절이 된다. 천마왕에 대항할 사람이 대희국에 몇이나 되지?"

방다병의 말문이 막혔다. 적비성은 경맥을 통하지 않고도 내력만으로도 공격력이 배가되는 유형이었다. 천마왕이 보옥을 노리는 지금 이쪽의 전력을 될 수 있는한 강화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타당했다. 반면 방다병과 이연화는 이와는 다른 식으로 융화되는 모양이었다. 이연화의 내력은 방다병의 감각을 열고 치유력을 극강으로 끌어올리는데에 일조했다. 경맥을 통한다면 내상을 나누거나 비술에 영향을 줄지 몰랐다. 지금 상황에서는 방다병이 이연화와 경맥 통법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내력만으로 공력을 끌어올리는 적비성에게 힘을 싣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무슨 연유인지 적비성은 이연화와 경맥을 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하고도 버티는 강인함 또한 갖고 있었다. 방다병은 패배감에 이를 악물었다.

"정인 놀음을 할거라면 맘대로 해라. 나는 이연화의 내력만 있으면 되니까."

적비성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떴다. 이연화는 저 냉철한 자의 눈에도 방다병의 처세가 정인 놀음으로 보였나 싶어 착잡해졌다. 어차피 천마왕이 얽혀 있는 한 이연화는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얽매이는 몸이 되는 것은 원치 않지만 불가피한 일일지도 몰랐다.

"내력을 줬어?"

방다병의 얼굴을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방다병 자신도 애같이 구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지만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이연화를 채가는 것 같아 속에 천불이 났다. 대의를 위해 힘을 보태도 모자라는, 천기당의 차기 당주이자 천사이거늘 이 상황에서 이연화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가장 크다는 것이 스스로도 못내 충격이었다.

"저 자에게 내력을 줬냐고."

"아까 다쳤을 때."

이연화는 일부러 방다병에게 옆모습을 보이고 섰다. 저때문에 펄펄 뛰는 모습을 보기가 민망하기도 하여 딴청을 피우기 위해서였다. 오른뺨이 뚫릴 것만 같은 눈길을 느끼며 이연화가 마지못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보란듯이 살짝 흔들었다.

"손으로만 줬어."

어쩌다 이런 해명을 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는지. 이연화는 작게 한숨을 쉬고 손을 털었다. 곁눈질을 하니 방다병이 무섭게 굳었던 표정을 조금 풀고 민망한 듯 눈을 내리 깔고 있었다. 저도 속이 편치 않은게지. 이연화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천기당의 전도유망한 방공자가 자신에게 품은 마음이 연형제를 아끼는 마음을 넘어선 갈애에 가깝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연화로서는 퍽이나 곤란했지만 당장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여인들처럼 이러쿵저러쿵 섬세하다 못해 말장난같은 감정놀음에 시간을 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앞일을 선택 해야했다. 이연화가 입을 열려는데 방다병이 선수를 쳤다.

"나도 같이 가겠어. 천기당 소당주로서 응당 가야하고, 또 너를 저 자와 가게 둘 수 없어."

방다병이 간절한 표정을 하고 이연화의 어깨를 잡았다.

"부탁이야, 이연화. 나는 적비성처럼 내력만으로 안돼. 나와 경맥을 공유해줘. 그러면 천사로 싸울 수도 있고 널 지킬 수도 있어. 내가 천마왕을 막을 수 있게 도와줘."

방다병은 진지했다. 이연화도 방다병이 옳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문제는 제 몸에 흐르는 요력이었다. 요력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고 경맥을 통하려면 가능성이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그렇다면 방다병, 조건이 있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다병이 답했다.

"뭐든 다 할게."

적어도 듣고 말하기라도 해라. 이연화는 속으로 기가 차서 방다병의 등짝을 칠 뻔 하려는걸 참았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방다병은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개처럼 조용히 이연화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나를 위해 내공심법을 익혀줘."

방다병은 이연화의 눈을 들여다본 채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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