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중국연예
- 중화연예
https://hygall.com/587032888
view 5721
2024.03.09 00:53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그 날이 밝았을 때, 여현은 떠들썩한 흥분에 휩싸였다.
일꾼들이 열심히 소문을 퍼나른 덕에, 여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선화루에서 연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파에 기대어 장사하려는 사람, 일찍부터 좋은 자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초저녁이 되기도 전부터 선화루 문간이 북적거렸다. 선화루에서 전날 밤을 보낸 방다병이 조금 질린 얼굴로 인파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나란히 선 적비성 역시, 너무 많은 사람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여현의 절반은 여기 모인 것 같아. 소문이 너무 멀리까지 퍼진 거 아니야?"
"많은 인파가 모인다 해도, 어차피 감시해야 할 곳은 정해져 있다. 다만...쓸데없는 것까지 섞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쓸데없는 것?"
방다병이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적비성이 미간을 펴지 않은 채 대꾸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멍청한 자도 자연히 많아지지. 사건과 무관한 소란이 벌어질 수도 있어."
"음. 술을 파는 자리이니 더욱 그럴 거야.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빨리 정리해야지...아, 저기 사탕 장수가 있네. 있다 사야겠다."
"나 때문이면 괜찮아, 아직 많이 갖고 있어."
불쑥 들려온 말소리에, 방다병이 으악 소리를 삼키며 돌아보았다. 면사를 쓴 무용수 하나가 어느새 방다병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방다병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상대를 훑어보았다. 첫 무대에서도 꽤 화려한 차림이었지만, 오늘은 그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붉은 옷에는 금실과 은실로 가늘지만 정교한 수가 놓여 있었고, 머리장식을 비롯한 장신구들 역시 한층 섬세한 고급품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몸의 어딘가가 반드시 찰랑이며 반짝였다. 이연화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방다병이 물었다.
"이연화, 너 화장한 거야?"
"여랑 낭자가 해준 거야. 전엔 너무 급해서 신경을 못 써줬다며, 날 붙들고 한 시진이나 애썼지 뭐야. 눈이 좀 답답해."
이연화가 눈을 세게 깜박였다. 그 눈가에 얇은 옷감처럼 불그스름한 음영이 져 있었다. 어떤 화장품을 썼는지, 은은히 빛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양새를 살핀 적비성이 코웃음을 치며 건넸다.
"석류 치마는 아무것도 아니었군."
"모르는 소리. 시간이 더 많이 걸려서 그렇지, 이 옷이 백번 나아. 보기보다 가볍거든. 석류 치마는 혼자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고."
이연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쪽 다리를 휙 들어 보였다. 선화루 입구에서 기다리며 기웃거리던 사람들이 괜히 환성을 질렀다. 그편을 향해 한 손을 흔들며, 이연화가 넉살 좋게 외쳤다. "감사합니다. 조금 있다 꼭 보러 오세요!" 꼭 그러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등진 채, 방다병이 얼른 상대를 떠밀었다. "알았으니까 좀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해. 여기 서 있으면 계속 진기한 동물 취급을 받겠어." 무용수가 멀어지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아쉬운 소리를 내며 빨리 들여보내달라 투덜거렸다.
무용단의 마지막 공연을 위한 무대는, 설약의 말대로 널찍한 앞뜰에 휘황하게 차려져 있었다. 원래 선화루 내부에 꽂혔던 금색 꽃들도 모두 밖에 장식되었다. 평소보다 풍성하게 마련된 꽃가지들 덕으로, 선화루 앞마당에는 가을 아닌 봄이 찾아온 듯했다. 군데군데 놓인 등불이 금색 꽃을 그윽하게 빛냈다. 선화루가 꽤 많은 비용을 들여 며칠 동안 준비한 광경이었다. 방다병은 분위기에 취하는 대신,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칼자루를 매만졌다. 안팎으로 선화루를 감시하는 며칠 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으니, 적이 행동하려 든다면 반드시 오늘일 터였다.
손님을 들일 시간이 되자, 지배인이 나와 들뜬 목소리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오늘이 얼마나 좋은 날인지, 여기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행운인지, 선화루에 얼마나 맛있는 술과 미인들이 있는지를 뽐내는 말이었다. 적당히 하란 불평이 나올 즈음이 되어서야, 지배인은 조금 민망한 얼굴로 물러나 큰 소리로 개장을 알렸다. 그와 함께 우르르 쏟아져 들어온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고 떠밀며 앞다투어 좋은 자리를 잡아보려 애썼다. 기루 사람들이 싱글거리며 주문을 받았다. 비록 모두에게 개방되었다 하나, 아무래도 비싼 술과 음식을 청한 사람들이 더 좋은 자리로 안내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밀려들어오기 무섭게, 방다병과 적비성은 훌쩍 날아 선화루의 지붕에 내려앉았다. 선화루의 재화 창고는 본관 뒤편에 있어, 앞뜰에서는 그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지붕에서 사방을 감시하다, 수상한 동태를 발견하면 신호를 주고받기로 했다. 시끌시끌한 광경을 내려다보며, 방다병이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매복이나 감시는 본디 지루함과의 싸움이었다. "오기 전에 술이라도 한 병 챙길걸." 그 중얼거림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다병의 눈앞으로 큰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방다병이 놀라 돌아보았다. 적비성이 방금 마신 술병을 건넨 참이었다.
"어, 고마워."
방다병이 술병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투박한 병과 달리, 내용물은 꽤 상품이었다. 한숨을 푹 쉬며, 방다병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는 꿍얼거렸다. 저 아래에서는 선화루의 일꾼들이 마지막으로 무대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연화가 또 무대에 서는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젠 주목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그런 자리를 계속 잘도 만들어내는군."
"어쩌겠어, 주목받을 재주가 너무 많은데. 애초부터 기이한 사건을 해결하러 왔으니, 계속 문제에 휘말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적비성이 빈정거린 말에, 방다병이 한탄하듯 대꾸했다. 사실 앞으로 계속 익숙해져야 할 일이었다. 강호에서의 명성과 직분 때문이든, 때로는 그저 연민이나 의협심 때문이든, 방다병은 자신과 이연화가 늘 억울한 피해자들이 발생하는 곳을 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입으론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연화는 결국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라 타인의 불행을 차갑게 지나치지 못했다. 지붕에 걸터앉은 방다병이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며칠 동안 또 악몽을 꾸진 않았잖아."
적비성이 가벼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모양새가, 그 역시 심정적으로 동감하는 모양이었다.
이연화가 심악의 약 때문에 발작했던 다음날 저녁, 적비성은 아무 말도 없이 쳐들어와 한 팔에 끈을 매었다. 방다병은 이제 약기운이 모두 사라졌으니 괜찮을 것이라 이연화를 안심시키며 역시 익숙하게 끈을 묶었다. 이연화는 팔짱을 낀 채 영 못마땅한 기색을 풍겼으나, 결국 두 사람을 내쫓지 않았다(어쩌면 내쫓아봤자 도로 들어오리라 짐작한 탓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의 가운데에 누운 이연화는 영 불안했는지 오래도록 뒤척였지만, 밤이 깊었을 때 기절하듯 잠들어 아침까지 깨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 밤 틈틈이 깬 사람은 방다병이었다. 이연화가 다시 악몽을 꾸고 괴로워하지 않을까 염려한 탓이었다.
"아비. 혹시...이연화가 그날 밤에 대해서 뭔가 너한테 얘기한 건 없어?"
"있다."
방다병이 삼가는 투로 묻자, 적비성이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술병을 도로 가져갔다.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언제?"
"그 다음날 아침."
"뭐? 그렇게 빨리?"
방다병이 어쩐지 억울한 심정에 휩싸여 외쳤다. 이연화가 자신보다 적비성과 먼저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이 영 떨떠름했다. 청년의 입이 댓발 튀어나오자, 그 꼴을 지켜보던 적비성이 픽 웃었다.
"이연화가 날 꼬마 취급하지 않는 게 싫은가 보군."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리고, 나하고도 분명히 얘기했으니까 뭐...."
방다병이 투덜대듯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술을 한 모금 마신 적비성이 물었다.
"네겐 무슨 얘기를 했지?"
"그냥, 이연화는 자기가 엄청 못난 꼴을 보였으니 내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아."
"멍청한 소리를 했군."
적비성이 어이없게 중얼거렸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연화보다 대마두가 내 마음을 잘 알다니. 괜히 헛기침을 한 번 뱉고, 방다병은 곁눈으로 적비성을 힐끗 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묻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너한테는 뭐라고 했는데?"
"알 만한 얘기야. 왜 진작 죽였어야 할 놈들에게까지 죄책감을 갖는지, 난 절대 이해할 수 없지만."
적비성이 단단히 팔짱을 낀 채 불만스레 읊조렸다. 방다병은 그 말에 일정 부분 공감하면서도-아마 적비성이었다면, 운피구 같은 사람들을 진작에 죽여 없앴을 터였다-이연화가 그런 솔직한 이야기를 스스로 뱉었다는 사실에 약간 뚱해졌다.
이연화는 기본적으로 능청스럽게 굴며 어쩔 수 없을 때까지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려 들지 않았으나, 적비성에게는 가끔씩 대단히 소탈한 태도를 취할 때가 있었다. 적비성과 같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일까? 나보다는 적비성이 더 의지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 걸까? 스스로 떠올린 의문에 괜히 풀이 죽었다가, 방다병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래도 이연화가 편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건 좋은 일이잖아. 친구가 나 하나뿐이라면 그것도 곤란하지 않겠어. 못나게 굴지 마, 방다병.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자 애쓰며, 방다병이 금원맹주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넌 뭐라고 대답했어?"
"설령 내가 잘못된다면 그러지 말라고 했다. 불쾌하니까. 죽는 건 약하거나 방심한 놈 탓인데, 왜 이연화가 자책한단 말이냐."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쓴 미소를 지은 채, 방다병이 상대의 무릎께를 손등으로 툭 쳤다.
"너무 빡빡하게 굴지는 마. 넌 이연화가 너와 함께 있다 잘못되면 자책하지 않겠어?"
"이연화가 나와 함께 있다 왜 잘못되지?"
적비성이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되물었다. 방다병이 어깨를 으쓱했다. "세상 일은 모르는 거잖아. 너나 이상이도 엄청나게 강했지만, 운피구나 각려초 같은 사람들에게 배신당했고.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어?" 미간을 좁힌 채, 적비성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불가능한 상황을 상상하려 애쓰는 듯했다. 그 모습을 향해 피식 웃으며, 방다병은 적비성의 손에서 다시 넘겨받은 술병을 슬쩍 기울였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금원맹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당당히 입을 열었다.
"그건 이연화와 내가 각자의 진영에서 따로 행동할 때 생긴 일들이었다. 당시에는 서로를 친우라 칭하기도 어려웠어.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 각인을 이어간다면,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함께 있겠지. 반드시 맹 내에 있어야만 처리할 수 있는 일은 몇 되지 않으니."
술에 잠깐 목이 막혀, 방다병은 몇 차례 캑캑거리며 기침을 했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고 고개를 돌리자, 적비성은 평소처럼 무뚝뚝하다 못해 무심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방다병이 마른침을 삼켰다. 얼굴로 후끈 열이 올랐다.
"아비. 넌 이연화가 정말로 너하고...그걸 유지할 거라고 생각해?"
"모른다."
적비성이 칼같이 대답했다. 방다병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런데 왜 엄청나게 확신하는 것처럼 얘기하고 그래."
"하지만 그 성정에, 정말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면 이미 자취를 감췄을 테지."
적비성이 태연히 덧붙인 말에, 방다병은 잠시 오한이 돋아 진저리를 쳤다. 이제는 연화루라는 특징도 없어졌으니, 이연화가 작정하고 숨어버린다면 전보다 훨씬 찾기 어려워질 터였다. 천기당과 금원맹의 인력을 동시에 동원하면 영영 못 찾지야 않겠지만, 사람의 마음을 그런 방법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방다병이 작은 한숨을 쉬며 술병을 바라보았다. 검은 병 안에서 찰랑이는 술을 보니, 문득 이연화의 마음이 떠올랐다. 잘 보이나 싶다가도 그림자 속으로 언뜻 사라지고, 어두운 듯하지만 사실 병 밖으로 따라보면 맑았다.
"함께 서로의 뒤를 봐주는 상황이라면, 셋 중 누가 크게 잘못될 가능성은 희박해. 필요한 경우에는 금원맹과 사고문, 천기당을 동원할 수 있지. 세 사람과 세 세력이 동시에 무너지지 않는 이상, 웬만한 계략이나 습격에 거꾸러질 일은 없다."
적비성이 담담히 늘어놓은 말에, 방다병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상대를 빤히 응시하자, 적비성의 얼굴이 대번에 불쾌해졌다.
"이상하게 보지 마라."
"너는...이중 각인이 지속돼도 상관없는 거야?"
"내가 상관있고 없고가 무슨 소용이지? 내 입장은 확실하니, 그건 이연화가 선택할 일이야."
"그렇다고 해도...말하는 게 꼭...."
방다병이 더듬거리며 이상하게 손짓했다. 말하는 게 꼭, 나를 아주 긴밀하고 사적인 무리의 일원으로 인정해주는 것 같잖아. 그 생각이 드러났는지, 적비성은 한쪽 눈썹을 슬쩍 들고는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그 시선이 불친절하게 방다병을 훑었다.
"착각하지 마라. 널 나와 대등한 존재로 인정한 건 아니야. 다만 너는 이연화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혹 같은 존재이니-."
"사람한테 대고 혹이라니! 이렇게 잘생기고 능력 많은 혹이 어디 있어."
"-그 사실을 받아들인 것뿐이지. 뻔한 약점이 되지 않도록 앞으로 더 정진해라, 방다병."
발끈하는 방다병을 향해, 적비성이 놀리듯이 턱짓하며 비웃었다. "난 부도삼성도 이겼는데, 강호 초출 취급이나 하고 말이야." 방다병이 꿍얼대고 불평하며 흥 소리를 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한 것은 사실이라 대놓고 쏘아붙일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이연화는 괜히 심력을 기울이지 말라 했지만, 만일 정말로 세 명이서 이런 관계를 계속 이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 기묘한 균형을 문제 없이 유지할 수 있을까? 피어오른 의문에, 방다병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연화와 계속 각인을 유지하고 싶다는 열망은 있었지만, 이후의 세세한 생활을 머릿속으로 그려본 적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 관계가 시작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일은 망상에 가까웠다.
독점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면 거짓일 터였다. 그러나 적비성이 자신을 떼어낼 수 없는 혹이라고 말한 것처럼, 방다병 역시 적비성을 배제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두 번째 망천화를 찾아다닐 때 그와 주고받은 쪽지만 수십 통이었다. 방다병은 적비성과 정말 다른 성정의 청년이었지만, 그들은 분명 핵심적인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사실은 방다병도 옛날부터 잘 알았다. 다만, 그 상대에게 벗은 몸까지 내보일 거란 상상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방다병이 적비성을 슬쩍 보았다. 어째 심경이 복잡해진 자신과 달리, 적비성은 여느 때처럼 덤덤하고 단호한 얼굴로 서 있었다. 괜히 머쓱해져 시선을 돌리니, 마침 무대 근처에 악사들이 자리를 잡던 참이었다. 곧 붉은 옷을 차려입은 무용단이 나타나자, 모인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환영했다. 멀리서도 그들이 얼마나 화려하고 반짝이는지 알 수 있었다. 무용수들은 무대에 올라 둥글게 둘러서서는 첫 번째 춤을 시작했다. 워낙 크게 벌여진 판인 만큼, 오늘 준비된 춤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춤은 마치 계곡이나 호수의 정경 같았다. 그들은 나비처럼 가볍게 움직이다가도, 어느 순간 바위처럼 내려앉았다. 뛰어오를 때에는 마치 무게가 없는 깃털을 연상시켰는데, 바닥에서는 느리게 흐르는 물살이 떠오를 만큼 진중했다. 그 동작이 어찌나 일사불란한지, 방다병은 아름답고 정교한 기관을 마주한 천기당원처럼 잠시 넋을 잃었다. 사람들은 산들바람 같은 검풍에 꽃이 벌어질 때마다 매우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이연화는 무용단에 감쪽같이 섞여 어우러졌지만, 방다병의 눈은 시종일관 이연화를 놓치지 않았다. 세상 사람 모두가 우러러볼 실력을 갖춘 천하제일인은, 면사를 쓴 채 아무렇지도 않게 춤사위를 선보이고 있었다.
잠깐의 휴식 뒤에 시작된 두 번째 춤은 첫 번째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띠었다. 훨씬 경쾌하고 빠른 곡조에, 무용수들의 칼과 몸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빛나는 옷과 장신구들 때문에, 무용단은 금분을 잔뜩 흩날리는 꽃나무처럼 빛을 발했다. 칼이 희뜩희뜩 움직일 때에는 한 무리의 철새들이 비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눈이 정신없이 그 궤적을 따라갔다. 무용수들이 짝지은 동료의 칼 위로 올라가 좁은 면적을 디디며 빠르게 휘도는 묘기를 보였을 때에는, 입을 함박 벌린 채 정신없이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이미 대부분의 관객 앞에는 다 비운 술병과 접시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흥이 올라 계속 주문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무림인 티를 다 벗지는 못했군."
두 번째 춤이 열렬한 환호와 함께 끝났을 때, 적비성이 한쪽 입매를 슬쩍 올린 채 중얼거렸다. 방다병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어떻게 알아? 저들과 움직임이 다르지 않은데."
"움직임은 같아도, 목적이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검객의 궁극적인 도의는 미가 아니니."
적비성이 읊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방다병이 고개를 갸웃하며 무대를 향했다. 적비성이 피식 웃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더 정진해라."
"너 진짜! 나 정도면-뭐야?"
발끈해서 받아치다가, 방다병은 이상한 광경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관객석과 무용단 사이에서 소요가 벌어지고 있었다. 몇 사람이 소리높여 무용수들에게 무슨 대답을 내놓으라 외치던 참이었다. 그 내용에 귀를 기울인 방다병의 얼굴이 곧 사정없이 우그러졌다.
말인즉슨, 그들은 무대가 모두 끝난 뒤 누구를 개인실로 불러 술 시중을 들게 할지 나름의 물밑 경합을 벌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워낙 모인 사람이 많다 보니, 자존심이 높으면서 동시에 돈도 많은 자들이 수두룩했다. 자신들끼리 담판을 짓지 못하자 말싸움이 붙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제 단원들에게 있다 누구의 술 시중을 더 들고 싶은지 선택해달라 난리였다. 꽤 여러 사람이 휘말린 상황이었으나,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선화루는 말리는 척 오히려 경쟁을 부추기며 더 높은 값을 치르는 사람이 나오도록 유도하는 참이었고, 다른 관객들 역시 싸움의 기세에 밀리거나 구경에 한눈이 팔려 끼어들지 않았다.
"아직 공연이 끝나기도 전인데, 이런 소란은 멈춰 주시지요. 또한 저희는 예인이며 술 시중이 본업은 아니므로, 그런 일은 공연을 마친 후 단원들의 상태에 따라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리 다투신다 하여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설약이 나서 딱딱한 투로 이야기했다. "기예를 팔든 술 시중을 하든 결국은 장사치인데, 꽤 고결한 척이로군." 누군가가 큰 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장사치가 장사를 포기하는 걸 원하시나 보군요." 설약이 차갑게 받아치자, 지켜보던 이들 중 누군가가 그제야 만류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렵게 들어온 만큼, 무용단의 공연을 놓치고 싶은 관객은 없었다. 그러나 먼저 소란을 만든 자들도 그에 지지 않고 언성을 높이며 얼굴을 붉혔다. 여러 사람이 난처하게 쩔쩔매는 가운데, 이연화가 심드렁한 손짓으로 눈가를 살짝 만졌다.
"죽일까?"
적비성이 툭 뱉었다. 방다병이 기겁해 돌아보았다. 금원맹주는 상대에게 딱히 원한을 품은 듯하지도 않았다. 힘차게 날지도 못하고 빌빌거리는 벌레들을 귀찮게 여기는 시선에, 방다병이 얼른 외쳤다.
"아니, 죽이면 안 되지!"
"어째서? 죽이면 더 큰 소동이 벌어질 테고, 그 틈을 타서 적이 행동할지도 모른다."
적비성이 썩 합리적인 일이라는 투로 늘어놓았다. 방다병은 아주 잠깐 휘말릴 뻔한 자신의 일부를 채찍질하며 깊이 심호흡했다. 그래, 천성이 악하지 않다 해도 눈앞에 있는 사람은 살수로 자란 마교의 대마두다. 약하거나 비겁한 인간들은 버러지로밖에 보지 않으니, 군자의 도리 따위를 말해봐야 먹히지 않아! 과거의 경험을 돌이키며 잠시 고민하다, 방다병은 비장한 얼굴로 던졌다.
"이연화가 싫어할 거야."
유치할 만큼 원초적이었으나, 분명 효과적인 말이었다. 적비성은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금원맹주가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말할 건데? 난 거짓말을 멀리하며 자란 군자라고." 방다병이 부릅뜬 눈에 힘을 주며 냉큼 대꾸했다. 적비성은 방다병의 목을 조르고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혀를 차며 팔짱을 끼었다.
방다병이 쓸데없는 소리 말고 현실적인 방법을 생각해보자 말하기 전,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그 날이 밝았을 때, 여현은 떠들썩한 흥분에 휩싸였다.
일꾼들이 열심히 소문을 퍼나른 덕에, 여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선화루에서 연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파에 기대어 장사하려는 사람, 일찍부터 좋은 자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초저녁이 되기도 전부터 선화루 문간이 북적거렸다. 선화루에서 전날 밤을 보낸 방다병이 조금 질린 얼굴로 인파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나란히 선 적비성 역시, 너무 많은 사람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여현의 절반은 여기 모인 것 같아. 소문이 너무 멀리까지 퍼진 거 아니야?"
"많은 인파가 모인다 해도, 어차피 감시해야 할 곳은 정해져 있다. 다만...쓸데없는 것까지 섞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쓸데없는 것?"
방다병이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적비성이 미간을 펴지 않은 채 대꾸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멍청한 자도 자연히 많아지지. 사건과 무관한 소란이 벌어질 수도 있어."
"음. 술을 파는 자리이니 더욱 그럴 거야.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빨리 정리해야지...아, 저기 사탕 장수가 있네. 있다 사야겠다."
"나 때문이면 괜찮아, 아직 많이 갖고 있어."
불쑥 들려온 말소리에, 방다병이 으악 소리를 삼키며 돌아보았다. 면사를 쓴 무용수 하나가 어느새 방다병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방다병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상대를 훑어보았다. 첫 무대에서도 꽤 화려한 차림이었지만, 오늘은 그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붉은 옷에는 금실과 은실로 가늘지만 정교한 수가 놓여 있었고, 머리장식을 비롯한 장신구들 역시 한층 섬세한 고급품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몸의 어딘가가 반드시 찰랑이며 반짝였다. 이연화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방다병이 물었다.
"이연화, 너 화장한 거야?"
"여랑 낭자가 해준 거야. 전엔 너무 급해서 신경을 못 써줬다며, 날 붙들고 한 시진이나 애썼지 뭐야. 눈이 좀 답답해."
이연화가 눈을 세게 깜박였다. 그 눈가에 얇은 옷감처럼 불그스름한 음영이 져 있었다. 어떤 화장품을 썼는지, 은은히 빛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양새를 살핀 적비성이 코웃음을 치며 건넸다.
"석류 치마는 아무것도 아니었군."
"모르는 소리. 시간이 더 많이 걸려서 그렇지, 이 옷이 백번 나아. 보기보다 가볍거든. 석류 치마는 혼자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고."
이연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쪽 다리를 휙 들어 보였다. 선화루 입구에서 기다리며 기웃거리던 사람들이 괜히 환성을 질렀다. 그편을 향해 한 손을 흔들며, 이연화가 넉살 좋게 외쳤다. "감사합니다. 조금 있다 꼭 보러 오세요!" 꼭 그러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등진 채, 방다병이 얼른 상대를 떠밀었다. "알았으니까 좀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해. 여기 서 있으면 계속 진기한 동물 취급을 받겠어." 무용수가 멀어지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아쉬운 소리를 내며 빨리 들여보내달라 투덜거렸다.
무용단의 마지막 공연을 위한 무대는, 설약의 말대로 널찍한 앞뜰에 휘황하게 차려져 있었다. 원래 선화루 내부에 꽂혔던 금색 꽃들도 모두 밖에 장식되었다. 평소보다 풍성하게 마련된 꽃가지들 덕으로, 선화루 앞마당에는 가을 아닌 봄이 찾아온 듯했다. 군데군데 놓인 등불이 금색 꽃을 그윽하게 빛냈다. 선화루가 꽤 많은 비용을 들여 며칠 동안 준비한 광경이었다. 방다병은 분위기에 취하는 대신,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칼자루를 매만졌다. 안팎으로 선화루를 감시하는 며칠 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으니, 적이 행동하려 든다면 반드시 오늘일 터였다.
손님을 들일 시간이 되자, 지배인이 나와 들뜬 목소리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오늘이 얼마나 좋은 날인지, 여기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행운인지, 선화루에 얼마나 맛있는 술과 미인들이 있는지를 뽐내는 말이었다. 적당히 하란 불평이 나올 즈음이 되어서야, 지배인은 조금 민망한 얼굴로 물러나 큰 소리로 개장을 알렸다. 그와 함께 우르르 쏟아져 들어온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고 떠밀며 앞다투어 좋은 자리를 잡아보려 애썼다. 기루 사람들이 싱글거리며 주문을 받았다. 비록 모두에게 개방되었다 하나, 아무래도 비싼 술과 음식을 청한 사람들이 더 좋은 자리로 안내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밀려들어오기 무섭게, 방다병과 적비성은 훌쩍 날아 선화루의 지붕에 내려앉았다. 선화루의 재화 창고는 본관 뒤편에 있어, 앞뜰에서는 그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지붕에서 사방을 감시하다, 수상한 동태를 발견하면 신호를 주고받기로 했다. 시끌시끌한 광경을 내려다보며, 방다병이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매복이나 감시는 본디 지루함과의 싸움이었다. "오기 전에 술이라도 한 병 챙길걸." 그 중얼거림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다병의 눈앞으로 큰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방다병이 놀라 돌아보았다. 적비성이 방금 마신 술병을 건넨 참이었다.
"어, 고마워."
방다병이 술병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투박한 병과 달리, 내용물은 꽤 상품이었다. 한숨을 푹 쉬며, 방다병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는 꿍얼거렸다. 저 아래에서는 선화루의 일꾼들이 마지막으로 무대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연화가 또 무대에 서는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젠 주목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그런 자리를 계속 잘도 만들어내는군."
"어쩌겠어, 주목받을 재주가 너무 많은데. 애초부터 기이한 사건을 해결하러 왔으니, 계속 문제에 휘말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적비성이 빈정거린 말에, 방다병이 한탄하듯 대꾸했다. 사실 앞으로 계속 익숙해져야 할 일이었다. 강호에서의 명성과 직분 때문이든, 때로는 그저 연민이나 의협심 때문이든, 방다병은 자신과 이연화가 늘 억울한 피해자들이 발생하는 곳을 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입으론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연화는 결국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라 타인의 불행을 차갑게 지나치지 못했다. 지붕에 걸터앉은 방다병이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며칠 동안 또 악몽을 꾸진 않았잖아."
적비성이 가벼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모양새가, 그 역시 심정적으로 동감하는 모양이었다.
이연화가 심악의 약 때문에 발작했던 다음날 저녁, 적비성은 아무 말도 없이 쳐들어와 한 팔에 끈을 매었다. 방다병은 이제 약기운이 모두 사라졌으니 괜찮을 것이라 이연화를 안심시키며 역시 익숙하게 끈을 묶었다. 이연화는 팔짱을 낀 채 영 못마땅한 기색을 풍겼으나, 결국 두 사람을 내쫓지 않았다(어쩌면 내쫓아봤자 도로 들어오리라 짐작한 탓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의 가운데에 누운 이연화는 영 불안했는지 오래도록 뒤척였지만, 밤이 깊었을 때 기절하듯 잠들어 아침까지 깨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 밤 틈틈이 깬 사람은 방다병이었다. 이연화가 다시 악몽을 꾸고 괴로워하지 않을까 염려한 탓이었다.
"아비. 혹시...이연화가 그날 밤에 대해서 뭔가 너한테 얘기한 건 없어?"
"있다."
방다병이 삼가는 투로 묻자, 적비성이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술병을 도로 가져갔다.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언제?"
"그 다음날 아침."
"뭐? 그렇게 빨리?"
방다병이 어쩐지 억울한 심정에 휩싸여 외쳤다. 이연화가 자신보다 적비성과 먼저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이 영 떨떠름했다. 청년의 입이 댓발 튀어나오자, 그 꼴을 지켜보던 적비성이 픽 웃었다.
"이연화가 날 꼬마 취급하지 않는 게 싫은가 보군."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리고, 나하고도 분명히 얘기했으니까 뭐...."
방다병이 투덜대듯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술을 한 모금 마신 적비성이 물었다.
"네겐 무슨 얘기를 했지?"
"그냥, 이연화는 자기가 엄청 못난 꼴을 보였으니 내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아."
"멍청한 소리를 했군."
적비성이 어이없게 중얼거렸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연화보다 대마두가 내 마음을 잘 알다니. 괜히 헛기침을 한 번 뱉고, 방다병은 곁눈으로 적비성을 힐끗 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묻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너한테는 뭐라고 했는데?"
"알 만한 얘기야. 왜 진작 죽였어야 할 놈들에게까지 죄책감을 갖는지, 난 절대 이해할 수 없지만."
적비성이 단단히 팔짱을 낀 채 불만스레 읊조렸다. 방다병은 그 말에 일정 부분 공감하면서도-아마 적비성이었다면, 운피구 같은 사람들을 진작에 죽여 없앴을 터였다-이연화가 그런 솔직한 이야기를 스스로 뱉었다는 사실에 약간 뚱해졌다.
이연화는 기본적으로 능청스럽게 굴며 어쩔 수 없을 때까지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려 들지 않았으나, 적비성에게는 가끔씩 대단히 소탈한 태도를 취할 때가 있었다. 적비성과 같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일까? 나보다는 적비성이 더 의지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 걸까? 스스로 떠올린 의문에 괜히 풀이 죽었다가, 방다병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래도 이연화가 편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건 좋은 일이잖아. 친구가 나 하나뿐이라면 그것도 곤란하지 않겠어. 못나게 굴지 마, 방다병.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자 애쓰며, 방다병이 금원맹주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넌 뭐라고 대답했어?"
"설령 내가 잘못된다면 그러지 말라고 했다. 불쾌하니까. 죽는 건 약하거나 방심한 놈 탓인데, 왜 이연화가 자책한단 말이냐."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쓴 미소를 지은 채, 방다병이 상대의 무릎께를 손등으로 툭 쳤다.
"너무 빡빡하게 굴지는 마. 넌 이연화가 너와 함께 있다 잘못되면 자책하지 않겠어?"
"이연화가 나와 함께 있다 왜 잘못되지?"
적비성이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되물었다. 방다병이 어깨를 으쓱했다. "세상 일은 모르는 거잖아. 너나 이상이도 엄청나게 강했지만, 운피구나 각려초 같은 사람들에게 배신당했고.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어?" 미간을 좁힌 채, 적비성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불가능한 상황을 상상하려 애쓰는 듯했다. 그 모습을 향해 피식 웃으며, 방다병은 적비성의 손에서 다시 넘겨받은 술병을 슬쩍 기울였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금원맹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당당히 입을 열었다.
"그건 이연화와 내가 각자의 진영에서 따로 행동할 때 생긴 일들이었다. 당시에는 서로를 친우라 칭하기도 어려웠어.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 각인을 이어간다면,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함께 있겠지. 반드시 맹 내에 있어야만 처리할 수 있는 일은 몇 되지 않으니."
술에 잠깐 목이 막혀, 방다병은 몇 차례 캑캑거리며 기침을 했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고 고개를 돌리자, 적비성은 평소처럼 무뚝뚝하다 못해 무심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방다병이 마른침을 삼켰다. 얼굴로 후끈 열이 올랐다.
"아비. 넌 이연화가 정말로 너하고...그걸 유지할 거라고 생각해?"
"모른다."
적비성이 칼같이 대답했다. 방다병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런데 왜 엄청나게 확신하는 것처럼 얘기하고 그래."
"하지만 그 성정에, 정말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면 이미 자취를 감췄을 테지."
적비성이 태연히 덧붙인 말에, 방다병은 잠시 오한이 돋아 진저리를 쳤다. 이제는 연화루라는 특징도 없어졌으니, 이연화가 작정하고 숨어버린다면 전보다 훨씬 찾기 어려워질 터였다. 천기당과 금원맹의 인력을 동시에 동원하면 영영 못 찾지야 않겠지만, 사람의 마음을 그런 방법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방다병이 작은 한숨을 쉬며 술병을 바라보았다. 검은 병 안에서 찰랑이는 술을 보니, 문득 이연화의 마음이 떠올랐다. 잘 보이나 싶다가도 그림자 속으로 언뜻 사라지고, 어두운 듯하지만 사실 병 밖으로 따라보면 맑았다.
"함께 서로의 뒤를 봐주는 상황이라면, 셋 중 누가 크게 잘못될 가능성은 희박해. 필요한 경우에는 금원맹과 사고문, 천기당을 동원할 수 있지. 세 사람과 세 세력이 동시에 무너지지 않는 이상, 웬만한 계략이나 습격에 거꾸러질 일은 없다."
적비성이 담담히 늘어놓은 말에, 방다병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상대를 빤히 응시하자, 적비성의 얼굴이 대번에 불쾌해졌다.
"이상하게 보지 마라."
"너는...이중 각인이 지속돼도 상관없는 거야?"
"내가 상관있고 없고가 무슨 소용이지? 내 입장은 확실하니, 그건 이연화가 선택할 일이야."
"그렇다고 해도...말하는 게 꼭...."
방다병이 더듬거리며 이상하게 손짓했다. 말하는 게 꼭, 나를 아주 긴밀하고 사적인 무리의 일원으로 인정해주는 것 같잖아. 그 생각이 드러났는지, 적비성은 한쪽 눈썹을 슬쩍 들고는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그 시선이 불친절하게 방다병을 훑었다.
"착각하지 마라. 널 나와 대등한 존재로 인정한 건 아니야. 다만 너는 이연화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혹 같은 존재이니-."
"사람한테 대고 혹이라니! 이렇게 잘생기고 능력 많은 혹이 어디 있어."
"-그 사실을 받아들인 것뿐이지. 뻔한 약점이 되지 않도록 앞으로 더 정진해라, 방다병."
발끈하는 방다병을 향해, 적비성이 놀리듯이 턱짓하며 비웃었다. "난 부도삼성도 이겼는데, 강호 초출 취급이나 하고 말이야." 방다병이 꿍얼대고 불평하며 흥 소리를 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한 것은 사실이라 대놓고 쏘아붙일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이연화는 괜히 심력을 기울이지 말라 했지만, 만일 정말로 세 명이서 이런 관계를 계속 이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 기묘한 균형을 문제 없이 유지할 수 있을까? 피어오른 의문에, 방다병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연화와 계속 각인을 유지하고 싶다는 열망은 있었지만, 이후의 세세한 생활을 머릿속으로 그려본 적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 관계가 시작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일은 망상에 가까웠다.
독점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면 거짓일 터였다. 그러나 적비성이 자신을 떼어낼 수 없는 혹이라고 말한 것처럼, 방다병 역시 적비성을 배제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두 번째 망천화를 찾아다닐 때 그와 주고받은 쪽지만 수십 통이었다. 방다병은 적비성과 정말 다른 성정의 청년이었지만, 그들은 분명 핵심적인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사실은 방다병도 옛날부터 잘 알았다. 다만, 그 상대에게 벗은 몸까지 내보일 거란 상상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방다병이 적비성을 슬쩍 보았다. 어째 심경이 복잡해진 자신과 달리, 적비성은 여느 때처럼 덤덤하고 단호한 얼굴로 서 있었다. 괜히 머쓱해져 시선을 돌리니, 마침 무대 근처에 악사들이 자리를 잡던 참이었다. 곧 붉은 옷을 차려입은 무용단이 나타나자, 모인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환영했다. 멀리서도 그들이 얼마나 화려하고 반짝이는지 알 수 있었다. 무용수들은 무대에 올라 둥글게 둘러서서는 첫 번째 춤을 시작했다. 워낙 크게 벌여진 판인 만큼, 오늘 준비된 춤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춤은 마치 계곡이나 호수의 정경 같았다. 그들은 나비처럼 가볍게 움직이다가도, 어느 순간 바위처럼 내려앉았다. 뛰어오를 때에는 마치 무게가 없는 깃털을 연상시켰는데, 바닥에서는 느리게 흐르는 물살이 떠오를 만큼 진중했다. 그 동작이 어찌나 일사불란한지, 방다병은 아름답고 정교한 기관을 마주한 천기당원처럼 잠시 넋을 잃었다. 사람들은 산들바람 같은 검풍에 꽃이 벌어질 때마다 매우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이연화는 무용단에 감쪽같이 섞여 어우러졌지만, 방다병의 눈은 시종일관 이연화를 놓치지 않았다. 세상 사람 모두가 우러러볼 실력을 갖춘 천하제일인은, 면사를 쓴 채 아무렇지도 않게 춤사위를 선보이고 있었다.
잠깐의 휴식 뒤에 시작된 두 번째 춤은 첫 번째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띠었다. 훨씬 경쾌하고 빠른 곡조에, 무용수들의 칼과 몸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빛나는 옷과 장신구들 때문에, 무용단은 금분을 잔뜩 흩날리는 꽃나무처럼 빛을 발했다. 칼이 희뜩희뜩 움직일 때에는 한 무리의 철새들이 비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눈이 정신없이 그 궤적을 따라갔다. 무용수들이 짝지은 동료의 칼 위로 올라가 좁은 면적을 디디며 빠르게 휘도는 묘기를 보였을 때에는, 입을 함박 벌린 채 정신없이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이미 대부분의 관객 앞에는 다 비운 술병과 접시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흥이 올라 계속 주문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무림인 티를 다 벗지는 못했군."
두 번째 춤이 열렬한 환호와 함께 끝났을 때, 적비성이 한쪽 입매를 슬쩍 올린 채 중얼거렸다. 방다병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어떻게 알아? 저들과 움직임이 다르지 않은데."
"움직임은 같아도, 목적이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검객의 궁극적인 도의는 미가 아니니."
적비성이 읊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방다병이 고개를 갸웃하며 무대를 향했다. 적비성이 피식 웃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더 정진해라."
"너 진짜! 나 정도면-뭐야?"
발끈해서 받아치다가, 방다병은 이상한 광경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관객석과 무용단 사이에서 소요가 벌어지고 있었다. 몇 사람이 소리높여 무용수들에게 무슨 대답을 내놓으라 외치던 참이었다. 그 내용에 귀를 기울인 방다병의 얼굴이 곧 사정없이 우그러졌다.
말인즉슨, 그들은 무대가 모두 끝난 뒤 누구를 개인실로 불러 술 시중을 들게 할지 나름의 물밑 경합을 벌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워낙 모인 사람이 많다 보니, 자존심이 높으면서 동시에 돈도 많은 자들이 수두룩했다. 자신들끼리 담판을 짓지 못하자 말싸움이 붙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제 단원들에게 있다 누구의 술 시중을 더 들고 싶은지 선택해달라 난리였다. 꽤 여러 사람이 휘말린 상황이었으나,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선화루는 말리는 척 오히려 경쟁을 부추기며 더 높은 값을 치르는 사람이 나오도록 유도하는 참이었고, 다른 관객들 역시 싸움의 기세에 밀리거나 구경에 한눈이 팔려 끼어들지 않았다.
"아직 공연이 끝나기도 전인데, 이런 소란은 멈춰 주시지요. 또한 저희는 예인이며 술 시중이 본업은 아니므로, 그런 일은 공연을 마친 후 단원들의 상태에 따라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리 다투신다 하여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설약이 나서 딱딱한 투로 이야기했다. "기예를 팔든 술 시중을 하든 결국은 장사치인데, 꽤 고결한 척이로군." 누군가가 큰 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장사치가 장사를 포기하는 걸 원하시나 보군요." 설약이 차갑게 받아치자, 지켜보던 이들 중 누군가가 그제야 만류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렵게 들어온 만큼, 무용단의 공연을 놓치고 싶은 관객은 없었다. 그러나 먼저 소란을 만든 자들도 그에 지지 않고 언성을 높이며 얼굴을 붉혔다. 여러 사람이 난처하게 쩔쩔매는 가운데, 이연화가 심드렁한 손짓으로 눈가를 살짝 만졌다.
"죽일까?"
적비성이 툭 뱉었다. 방다병이 기겁해 돌아보았다. 금원맹주는 상대에게 딱히 원한을 품은 듯하지도 않았다. 힘차게 날지도 못하고 빌빌거리는 벌레들을 귀찮게 여기는 시선에, 방다병이 얼른 외쳤다.
"아니, 죽이면 안 되지!"
"어째서? 죽이면 더 큰 소동이 벌어질 테고, 그 틈을 타서 적이 행동할지도 모른다."
적비성이 썩 합리적인 일이라는 투로 늘어놓았다. 방다병은 아주 잠깐 휘말릴 뻔한 자신의 일부를 채찍질하며 깊이 심호흡했다. 그래, 천성이 악하지 않다 해도 눈앞에 있는 사람은 살수로 자란 마교의 대마두다. 약하거나 비겁한 인간들은 버러지로밖에 보지 않으니, 군자의 도리 따위를 말해봐야 먹히지 않아! 과거의 경험을 돌이키며 잠시 고민하다, 방다병은 비장한 얼굴로 던졌다.
"이연화가 싫어할 거야."
유치할 만큼 원초적이었으나, 분명 효과적인 말이었다. 적비성은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금원맹주가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말할 건데? 난 거짓말을 멀리하며 자란 군자라고." 방다병이 부릅뜬 눈에 힘을 주며 냉큼 대꾸했다. 적비성은 방다병의 목을 조르고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혀를 차며 팔짱을 끼었다.
방다병이 쓸데없는 소리 말고 현실적인 방법을 생각해보자 말하기 전,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https://hygall.com/587032888
[Code: b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