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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6 23:56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선화루에 발을 들이고 얼마 되지 않아, 이연화는 설약의 환영을 받았다. 설약은 곧 일행을 예인들의 휴게실로 안내하여 차를 내주었다. 안부를 주고받으며 차를 두어 모금 마셨을 때, 설약이 담담히 말했다. 그 얼굴이 한편으로 후련해 보였다.
"저희는 선화루를 떠나려고 합니다."
이연화는 잠깐 놀란 눈으로 설약을 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설약이 긴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서 엄청난 보수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나, 그만큼 심화를 많이 쌓았습니다. 단원 하나를 허망하게 잃어버리기도 했고요.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선화루의 전속 무용단으로 일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고, 이 명성으로 다른 지역에서 공연을 시작하려 합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여랑 낭자도 동의하신 겁니까?"
이연화가 물었다. 자신이 기억하기로, 여랑은 동생의 사건을 아직 놓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단죄가 이루어지기 전에 여현을 떠나려 들지는 않을 터였다. 설약이 고개를 끄덕했다.
"여랑과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여러분이 사건을 해결해 주신다면, 그 즉시 미련 없이 여현을 떠나겠다고요."
"저희도 조사에 진척이 있었습니다. 아직 증좌 확보가 필요한 상황이기는 하나, 그래도 사건의 전말을 대략 짐작하고는 있습니다."
방다병의 말에, 설약이 반색하며 반쯤 일어났다. "정말입니까?" 그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춤출 때와 달리 회색의 수수한 옷을 입은 여랑이었다. "설약 언니, 점원이 또 우릴 붙들고 난리네요. 도무지 밖을 나다닐 수가 없다니까요. 언니가 위약금을 모두 물겠다고 이미 얘기했는데도, 언니를 설득해서 마지막 공연이라도 해달라 난리예요...아니, 선생과 대협들이 와 계셨군요." 피로한 한숨과 함께 투덜거리다 말고, 여랑은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잔뜩 열중한 얼굴의 두 예인에게, 방다병은 상황을 간략히 전해주었다. 아무래도 방운일과 아유는 같은 약에 당한 것으로 보이며, 약의 제작자이자 판매자인 심악은 통행증의 숫자와 대조하여 장부를 적어두었다. 선화루에서도 통행증을 발급할 때 기록을 남기니, 두 장부를 비교한다면 누가 심악에게서 문제의 약을 사갔는지 분명히 밝힐 수 있다. 그를 위해서는 도망친 범죄자들을 잡아야 하는데, 그들은 선화루에 맡겨둔 재물을 찾으러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곳을 방문할 것이다. 오늘 아침 방시문 부부와 방운일에게 설명했던 내용을 그대로 알려주자, 여랑은 분노와 흥분으로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 잘하면 관련자들을 죄다 잡아넣을 수 있겠군요. 그렇게 대단한 재화라면, 분명 선화루의 재물 창고에 있을 겁니다. 지배인이 귀중품을 어디 보관하는지 알고 있으니, 통행증에 관련된 기록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너무 위험을 무릅쓰지는 마시지요. 저희 쪽에도 쓸 만한 인력들이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연화는 슬쩍 적비성을 보았다. 적비성은 팔짱을 낀 채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설약이 미간을 좁혔다.
"저희가 더 도울 만한 일은 없겠습니까?"
"사실,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은 있습니다만...."
이연화가 말끝을 흐리자, 방다병과 적비성이 약간 경계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들과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무엇입니까? 뭐든 말씀해 보시지요."
"그, 선화루에서 요청한다던 마지막 공연 말입니다. 혹시...해주시길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연화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설약과 여랑이 의아한 시선을 교환했다. 설약이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께서 원하신다면야 물론 고려해볼 수 있으나, 저희의 공연이 어떻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주 큰 도움이 되지요. 이왕 하실 마지막 공연이라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부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여현의 누구든, 관람료만 내면 들어와 구경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최대한 커다란 잔치를 만드는 거지요. 수상한 장정들이 인파에 섞여 몰래 들어올 마음을 품을 정도로요."
"덫을 놓자는 말씀이군요."
설약의 눈이 반짝였다. 이연화가 빙그레 웃었다.
"맞습니다. 사람이 많이 들고 나는 자리를 만들어주면, 그들이 분명 움직이려 들 겁니다. 선화루의 재화 창고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보물을 가져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뒤를 밟을 생각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선화루가 개점 이래 만인에게 열린 적은 없습니다만, 한번 지배인에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저희를 이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니, 아마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설약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사람이 설약을 기다리면서 차를 두 잔쯤 비웠을 때, 무용단의 우두머리는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돌아왔다. 여랑이 얼른 물었다.
"언니, 뭐라고 하던가요?"
"아주 반가워하기는 했다. 가능한 한 성대한 잔치를 벌이자는 말에도 동의했고. 장소도 실내가 아니라, 선화루 앞의 트인 공간에 마련하자고 했다. 아무나 지나가다가 들어와서 볼 수 있도록. 이후 우리보다 뛰어난 무용단이 들어올 거라고 허풍으로라도 홍보해달라 하기에, 그러겠다 했지. 거기까진 문제가 안 된다만...저번과 똑같은 공연을 바라더구나."
"똑같은 공연이라면...그 마지막 한 수를 염두에 두고 얘기하는 거지요?"
여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자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손을 보았다.
"저는 아직 사방의 꽃가지를 단번에 피울 정도의 내력이 없어요. 그렇다고 이 선생을 또 청할 수는 없으니...."
"왜 그럴 수 없습니까? 제가 또 하면 되지요."
이연화가 한 손을 들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양옆에서 눈을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이연화는 일부러 그편을 돌아보지 않고 꿋꿋이 설약을 응시했다. 설약이 여랑과 조금 당혹한 시선을 나누었다. 짙은 눈썹을 찌푸린 채, 설약은 진중하고도 근심스러운 투로 말했다.
"이미 한 번 도움을 받은 처지에 두 번씩이나 신세를 지기도 어렵습니다만, 뭣보다 선생이 또 무대에 서시면 소문이 한층 더 퍼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저희 무용단에는 그 공연을 지속할 방도가 없습니다. 저희는 춤을 연마하는 사람들이지, 무림인이 아니니까요."
"여랑 낭자, 잠시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이연화가 갑자기 한 손을 내밀었다. 여랑은 놀란 눈을 했지만, 곧 선선히 손목을 내주었다. 잠시 그 몸의 내력을 감지하던 이연화가 빙긋 웃었다.
"여랑 낭자도 충분히 마지막 한 수에 닿을 수 있습니다. 내력을 조금만 더 쌓으면 될 텐데, 왼편 폐의 경맥이 살짝 엉켜 있군요. 어릴 때 앓은 병환 때문인 듯한데, 그럼에도 이런 실력을 쌓다니 대단하십니다. 공연이 끝난 다음 그 부분을 풀어드릴 테니, 앞으로 수 달만 노력하면 한 수가 아니라 다섯 수, 열 수도 쓸 수 있을 겁니다. 익힐 만한 심법도 함께 알려드리지요."
몇 사람의 눈이 서로 다른 의미로 커졌다. 여랑의 뺨이 은은히 붉어졌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선생. 의술에 정말로 조예가 있으실 줄 몰랐습니다."
"제가 처음 뵈었을 때, 분명 의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연화가 눈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방다병이 당황한 얼굴로 이연화의 허벅지를 치며 소곤거렸다. "너, 설마...소주쾌를 말하는 건 아니지?" 이연화가 자기도 모르게 방다병을 흘겨보았다. "당연히 아니지. 소주쾌는 원래 깨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제자를 늘릴 마음은 없어." 양주만은 쉽게 알려주고 휙 떠나버릴 만한 심법이 아니었다. 방다병은 무공 수련을 오래 한 데다 소질이 워낙 탁월하여 그림과 글만 보고도 비슷하게 수련했지만, 대부분의 무림인들에게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어쩐지 안심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방다병의 옆에서, 적비성이 코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후 방시문의 저택으로 돌아와, 이연화는 몇 가지 일을 처리했다. 세우단의 문서들을 재차 검토하고, 연회에서 각자 어떤 위치에 포진할 것인지 의논한 다음, 방운일의 한결 건강해진 몸까지 살펴주고 나니 어느새 컴컴한 저녁이 되어 있었다.
거처의 뒤뜰로 나와, 이연화는 며칠 전 선화루에서 추었던 춤을 복기하여 연습하기 시작했다. 설약은 자신들을 무림인으로 칭하지 않았으나, 이연화가 보기에 이 춤에는 분명 무학의 이치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무공 초식처럼 추면 곤란하겠지, 쓸데없는 의심을 사게 될 테니까. 칼끝에서 무림인의 티를 되도록 걷어내야 했다. 방시문에게 빌린 세검을 여러 방식으로 휘둘러보다, 이연화는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을 때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방다병이 대뜸 볼멘소리를 냈다.
"이연화, 네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무슨 소리야, 네 당숙과 사촌의 일인데. 이럴 가치가 없다는 거야?"
이연화가 이상한 눈으로 물었다. 방다병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네가 굳이 또 무대에 설 필요까지 있느냔 말이야."
"모르는 소리 하네, 방 공자. 무대 중앙에서는 공간 전체가 한눈에 잘 보여. 그리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내가 이미 무대에 한 번 서버렸잖아. 사람들을 많이 모으려면 그편이 더 효율적이라는데, 굳이 두 번째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오히려 행운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어."
원치 않는 순간 논파당한 사람답게, 방다병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연화가 어이없게 웃으며 칼을 한 차례 휘둘렀다.
"왜 죽상이야, 방소보. 내가 무대에 서는 게 왜 불만인데?"
"잊었어? 네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을 땐, 웬 변변찮은 놈들이 네게 술 시중을 들라고 불렀잖아."
"이번엔 안 가면 되지. 더 얻을 정보도 없는데, 나라고 그런 사람들한테 술을 따라주고 싶진 않아."
일부러 달래듯이 말했으나, 방다병의 얼굴은 금방 펴지지 않았다. 또 뭐가 문제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방다병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불만스럽게 꿍얼거렸다.
"난 그냥, 널 불순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싫어."
"음, 너 공개 혼사 때부터 그러긴 했지. 그래도 그땐 잘 참고 넘기더니, 왜 새삼스레-."
"그때도 엄청 싫었어, 그냥 대의가 있으니 억지로 참은 거지.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우리 상황이 좀 변했잖아."
모호하고도 민망한 손짓을 휙휙 하다, 방다병은 곧 헛기침과 함께 시선을 피했다. 그 귀와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연화의 한쪽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방다병은 지금 각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 상황이 퍽 많이 변하기는 했지. 하지만-이연화가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가만히 팔짱을 끼었다. 아무리 자세히 관찰해도, 청년의 태도는 자신의 마음을 처음 고백했던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각인 자체를 고민하는 기색도 딱히 없었고, 하다못해 생각이 한층 많아진 분위기를 띠고 있지도 않았다. 미간을 슬쩍 좁힌 채 빤히 보자, 방다병이 제발 저린 사람처럼 더듬거렸다.
"왜, 왜 그렇게 봐?"
"방소보. 넌 정말 그걸 계속하고 싶어? 아직도?"
이연화가 의혹 어린 얼굴로 묻자, 방다병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직설적인 질문에 퍽 부끄러워진 모양이었다.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청년은 잔뜩 익은 복숭아처럼 변한 채 고개를 끄덕했다. "응." 이연화의 미간 골이 조금 더 깊어졌다. 상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왜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난 각인하기에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너도 잘 알잖아."
"네가 그날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고 있어. 하지만...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방다병의 얼굴은 터질 듯 상기되어 있었지만, 그 목소리와 눈동자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이연화는 불가해하다 못해 심란한 심정에 사로잡혀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째야 하나. 고개를 돌린 채 고민하다, 이연화는 가만히 턱에 힘을 주었다. 방다병은 조금 쭈뼛거리며 이연화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지나치게 길어진 정적 끝에, 이연화는 결국 방다병을 돌아보며 참지 못하고 말했다.
"너, 어제 새벽에 날 봤잖아."
방다병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이연화가 먼저 그 일을 꺼내리라고 짐작하지 못한 듯했다. 이연화는 일부러 딱한 아이를 앞에 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방다병을 비스듬히 응시하며 팔짱을 끼었다. 차가울 만큼 무심하고 태연한 말이 흘러나왔다.
"방다병. 난 속이 썩은 인간이야. 안에 누굴 들일 만한 여유가 없다고. 친구도 거의 못 만드는데, 각인 같은 걸 시작할 마음을 어찌 품겠어? 나도 이래저래 생각하고는 있지만 결국엔 안 될 가능성이 높은 일이니까, 너도 너무 심력을 기울이지 마."
방다병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이연화는 무언가를 단단히 그르친 듯한 두려움과, 미루던 말을 결국 꺼냈다는 후련함을 동시에 느끼며 가만히 방다병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말이 칼날처럼 날아가 박힌 듯해, 가슴 한편이 슬쩍 조여들며 초조해졌다. 이연화는 정말로 눈앞의 청년이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았다(방다병이 그 사실을 얼마나 믿을지는 알 수 없었다). 방다병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발치를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던 청년은, 이내 시선을 들고 천천히 말했다.
"이연화. 내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네 심마를 모두 없앨 수 없단 걸 알아. 얼마든지 과거의 너를 옹호하거나 변호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네 마음의 응어리가 모두 풀리진 않을 테니까.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심마인 거겠지."
그 목소리에 배인 깊은 존중과 헤아림에, 이연화는 그만 쓴웃음을 엷게 띠었다. 자신의 정체를 모르던 방다병이 이상이의 좋은 면을 끌어올릴 때마다, 이연화는 진실한 온기와 고마움을 느꼈으나 자책감에서 완벽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연화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방다병이 차분히 이었다. 이연화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적비성과 다른 의미로, 방다병은 늘 상대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이야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심마가 없고, 각인하기에 좋은 사람을 바라는 게 아니야. 난 그냥 네가...지금의 이연화가 좋아."
방다병이 담담히 맺었다. 이연화의 눈동자가 일순 거세게 일렁였다. 그러고 보면, 방다병은 이상이 아닌 이연화에게 들러붙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이연화가 타인과 이어지지 않으려 노력한 탓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연화는 이상이에 비해 별볼일 없는 자였다. 예전처럼 패기 넘치지도 않고, 자신감으로 빛나지도 않으며,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지도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연화보다 이상이에 열광했다. 하지만 대체 어째서인지, 방다병은 이연화를 늘 새끼오리처럼 졸졸 쫓아다니며 돌아봐달라 성화였다.
왜일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방금 했던 말처럼, 이연화는 곪아버린 속내를 잘 감춘 채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겉으로는 늘 여유롭고 요령 좋은 척 굴지만, 사람이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거짓말쟁이에 겁쟁이가 되는 실속 없는 사람. 친구로서도 그리 좋지는 못했고, 각인 상대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방다병은 어째서 저렇게 확신에 찬 얼굴로, 이토록 해괴한 고백을 하고 있는 걸까? 목구멍이 살짝 답답해졌다. 이연화의 복잡한 눈빛 앞에서, 방다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 마음을 꼭 돌려달라는 뜻은 아니야. 어떻게 이런 일을 강요할 수 있겠어? 전에도 말했지만, 나와 각인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차피 각인하든 안 하든, 내가 너와 계속 함께 다닐 건 분명하니까."
응? 방다병이 자연스레 덧붙인 뒷말에, 이연화의 눈이 커졌다. 적비성의 말이 머리 한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녀석이 네게 집중하는 정도는 정상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양인일 때에도 음인일 때에도 방다병은 늘 내게 붙어 있었지. 몇 번이나 떨치고 가버렸는데, 결국엔 항상 어딘가에서 만나버렸고. 결국은 못 떼어낼 것 같아서 함께 다니자고 결심했었고...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어쩐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잠깐, 그럼 각인하지 않는 데에 큰 의미가 있나? 말하는 기세를 보니, 어차피 이 녀석은 일생 나한테서 안 떨어지려는 것 같은데? 어찌저찌 억지로 혼인을 시켜놔도, 집구석엔 안 들어가고 내 옆에만 붙어 있으려 들면 어쩌지? 그게 하 당주에게 더 못할 짓인가? 잠깐, 이연화. 지금 무슨 해괴한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아무리 그래도 친구와 각인은 엄연히 다르지. 머릿속을 혼란스레 맴돌던 이연화가 스스로를 다잡았다. 생각할수록 상식이 얼크러지는 기분이었다. 동그란 눈을 빛내며 선 방다병을 향해, 이연화가 허무한 웃음을 흘렸다.
"그거 아주 협박처럼 들리네, 방소보."
"너도 알고 있던 일이잖아. 모르던 것처럼 굴지 마."
흥 소리를 내며 도련님처럼 한 마디 던진 방다병이 발길을 돌렸다. 제 방으로 가려나 싶어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청년은 두어 발짝 걷다 말고 다시 몸을 틀어 이연화에게 다가왔다.
"이연화. 어제는 날 걱정하느라 문걸에게 틈을 보인 거지?"
그 질문에, 이연화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사실이었으나 방다병이 알아차릴 것이라 예상하지는 못한 탓이었다. 방다병이 엷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네가 무슨 약에 당했는지 알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 나와 숲에서 재회했을 때에도, 어제 새벽에도 마치 내가 죽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굴었지. 안 그런 척하면서, 넌 내 안위를 엄청 신경 쓰잖아." 딱히 비밀도 아니었으나, 이연화는 어쩐지 머쓱한 기분에 입맛을 다셨다.
"그걸 몰랐어? 벽중계 때에도 널 걱정해서 그랬다고 말했잖아."
일부러 타박하듯이 퉁명스레 대꾸하자, 방다병이 살짝 웃었다.
"이연화. 넌 네 마음에 여유가 없다고 했지만, 사실 이미 날 마음에 들여준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았다면, 나 때문에 적을 눈앞에 두고 방심할 정도로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연화의 눈썹이 움찔했다. 자신이 방다병을 아낀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만 그 깊이를 자세히 가늠해보려 애쓴 적이 없을 따름이었다. 방다병이 오른손을 들어 이연화의 팔을 잡았다. 그 얼굴은 꽤나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 이연화는 현재의 방다병이 처음 만났던 꼬마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새삼스레 실감했다.
"나와 각인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아. 각인하지 않더라도, 나는 네가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만든 친구잖아. 내겐 충분히 특별한 일이야."
단어 하나하나에서 진심이 배어나왔다. 상대를 직시하는 눈동자가 호수처럼 맑았다. 이연화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방다병을 마주보았다. 이런 신실한 이야기에 돌려줄 만한 말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방다병에게 잡힌 팔에서부터 편안한 온기가 번졌다. 그러고 보니,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이 손이 나를 달랬지. 이연화가 그 손을 보며 문득 회상했다. 온통 민망한 기억이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시선을 내리깐 채 침묵하다, 이연화는 이내 살짝 비뚤어진 미소를 엷게 띠었다. 부드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정말 많이 컸네, 방소보. 내 말문을 이렇게 막을 줄도 알고."
방다병이 싱긋 웃었다. 평소처럼 유쾌한 허세가 아닌, 즐거운 기쁨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이내 묘한 초조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상기된 낯으로 무슨 말을 건네려 입술을 달싹이다, 방다병은 이연화의 팔을 놓고 홱 등을 돌렸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이연화가 조금 놀라 물었다. 이연화를 차마 돌아보지 못한 채, 방다병은 양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웅얼거렸다. "정말 나랑 각인 안 해도 되지만, 하지만...." 말의 뒷부분이 잘 들리지 않았다. "뭐? 똑바로 얘기해." 이연화가 타박하듯이 건네며 한 발짝 다가서자, 방다병은 뒷목과 귀를 새빨갛게 붉힌 채 툭 뱉었다.
"하지만, 적비성하고만은 안 돼."
그 말을 던져놓고, 청년은 상대의 반응을 염려하는 사람처럼 휙 날듯이 자리를 박차 사라져버렸다.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방다병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다, 이연화는 곧 맥빠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옛날보다 훨씬 많이 성장했다 해도, 저 솔직하고 다정한 공자에게는 어쩔 수 없이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선화루에 발을 들이고 얼마 되지 않아, 이연화는 설약의 환영을 받았다. 설약은 곧 일행을 예인들의 휴게실로 안내하여 차를 내주었다. 안부를 주고받으며 차를 두어 모금 마셨을 때, 설약이 담담히 말했다. 그 얼굴이 한편으로 후련해 보였다.
"저희는 선화루를 떠나려고 합니다."
이연화는 잠깐 놀란 눈으로 설약을 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설약이 긴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서 엄청난 보수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나, 그만큼 심화를 많이 쌓았습니다. 단원 하나를 허망하게 잃어버리기도 했고요.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선화루의 전속 무용단으로 일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고, 이 명성으로 다른 지역에서 공연을 시작하려 합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여랑 낭자도 동의하신 겁니까?"
이연화가 물었다. 자신이 기억하기로, 여랑은 동생의 사건을 아직 놓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단죄가 이루어지기 전에 여현을 떠나려 들지는 않을 터였다. 설약이 고개를 끄덕했다.
"여랑과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여러분이 사건을 해결해 주신다면, 그 즉시 미련 없이 여현을 떠나겠다고요."
"저희도 조사에 진척이 있었습니다. 아직 증좌 확보가 필요한 상황이기는 하나, 그래도 사건의 전말을 대략 짐작하고는 있습니다."
방다병의 말에, 설약이 반색하며 반쯤 일어났다. "정말입니까?" 그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춤출 때와 달리 회색의 수수한 옷을 입은 여랑이었다. "설약 언니, 점원이 또 우릴 붙들고 난리네요. 도무지 밖을 나다닐 수가 없다니까요. 언니가 위약금을 모두 물겠다고 이미 얘기했는데도, 언니를 설득해서 마지막 공연이라도 해달라 난리예요...아니, 선생과 대협들이 와 계셨군요." 피로한 한숨과 함께 투덜거리다 말고, 여랑은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잔뜩 열중한 얼굴의 두 예인에게, 방다병은 상황을 간략히 전해주었다. 아무래도 방운일과 아유는 같은 약에 당한 것으로 보이며, 약의 제작자이자 판매자인 심악은 통행증의 숫자와 대조하여 장부를 적어두었다. 선화루에서도 통행증을 발급할 때 기록을 남기니, 두 장부를 비교한다면 누가 심악에게서 문제의 약을 사갔는지 분명히 밝힐 수 있다. 그를 위해서는 도망친 범죄자들을 잡아야 하는데, 그들은 선화루에 맡겨둔 재물을 찾으러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곳을 방문할 것이다. 오늘 아침 방시문 부부와 방운일에게 설명했던 내용을 그대로 알려주자, 여랑은 분노와 흥분으로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 잘하면 관련자들을 죄다 잡아넣을 수 있겠군요. 그렇게 대단한 재화라면, 분명 선화루의 재물 창고에 있을 겁니다. 지배인이 귀중품을 어디 보관하는지 알고 있으니, 통행증에 관련된 기록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너무 위험을 무릅쓰지는 마시지요. 저희 쪽에도 쓸 만한 인력들이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연화는 슬쩍 적비성을 보았다. 적비성은 팔짱을 낀 채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설약이 미간을 좁혔다.
"저희가 더 도울 만한 일은 없겠습니까?"
"사실,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은 있습니다만...."
이연화가 말끝을 흐리자, 방다병과 적비성이 약간 경계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들과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무엇입니까? 뭐든 말씀해 보시지요."
"그, 선화루에서 요청한다던 마지막 공연 말입니다. 혹시...해주시길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연화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설약과 여랑이 의아한 시선을 교환했다. 설약이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께서 원하신다면야 물론 고려해볼 수 있으나, 저희의 공연이 어떻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주 큰 도움이 되지요. 이왕 하실 마지막 공연이라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부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여현의 누구든, 관람료만 내면 들어와 구경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최대한 커다란 잔치를 만드는 거지요. 수상한 장정들이 인파에 섞여 몰래 들어올 마음을 품을 정도로요."
"덫을 놓자는 말씀이군요."
설약의 눈이 반짝였다. 이연화가 빙그레 웃었다.
"맞습니다. 사람이 많이 들고 나는 자리를 만들어주면, 그들이 분명 움직이려 들 겁니다. 선화루의 재화 창고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보물을 가져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뒤를 밟을 생각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선화루가 개점 이래 만인에게 열린 적은 없습니다만, 한번 지배인에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저희를 이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니, 아마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설약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사람이 설약을 기다리면서 차를 두 잔쯤 비웠을 때, 무용단의 우두머리는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돌아왔다. 여랑이 얼른 물었다.
"언니, 뭐라고 하던가요?"
"아주 반가워하기는 했다. 가능한 한 성대한 잔치를 벌이자는 말에도 동의했고. 장소도 실내가 아니라, 선화루 앞의 트인 공간에 마련하자고 했다. 아무나 지나가다가 들어와서 볼 수 있도록. 이후 우리보다 뛰어난 무용단이 들어올 거라고 허풍으로라도 홍보해달라 하기에, 그러겠다 했지. 거기까진 문제가 안 된다만...저번과 똑같은 공연을 바라더구나."
"똑같은 공연이라면...그 마지막 한 수를 염두에 두고 얘기하는 거지요?"
여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자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손을 보았다.
"저는 아직 사방의 꽃가지를 단번에 피울 정도의 내력이 없어요. 그렇다고 이 선생을 또 청할 수는 없으니...."
"왜 그럴 수 없습니까? 제가 또 하면 되지요."
이연화가 한 손을 들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양옆에서 눈을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이연화는 일부러 그편을 돌아보지 않고 꿋꿋이 설약을 응시했다. 설약이 여랑과 조금 당혹한 시선을 나누었다. 짙은 눈썹을 찌푸린 채, 설약은 진중하고도 근심스러운 투로 말했다.
"이미 한 번 도움을 받은 처지에 두 번씩이나 신세를 지기도 어렵습니다만, 뭣보다 선생이 또 무대에 서시면 소문이 한층 더 퍼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저희 무용단에는 그 공연을 지속할 방도가 없습니다. 저희는 춤을 연마하는 사람들이지, 무림인이 아니니까요."
"여랑 낭자, 잠시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이연화가 갑자기 한 손을 내밀었다. 여랑은 놀란 눈을 했지만, 곧 선선히 손목을 내주었다. 잠시 그 몸의 내력을 감지하던 이연화가 빙긋 웃었다.
"여랑 낭자도 충분히 마지막 한 수에 닿을 수 있습니다. 내력을 조금만 더 쌓으면 될 텐데, 왼편 폐의 경맥이 살짝 엉켜 있군요. 어릴 때 앓은 병환 때문인 듯한데, 그럼에도 이런 실력을 쌓다니 대단하십니다. 공연이 끝난 다음 그 부분을 풀어드릴 테니, 앞으로 수 달만 노력하면 한 수가 아니라 다섯 수, 열 수도 쓸 수 있을 겁니다. 익힐 만한 심법도 함께 알려드리지요."
몇 사람의 눈이 서로 다른 의미로 커졌다. 여랑의 뺨이 은은히 붉어졌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선생. 의술에 정말로 조예가 있으실 줄 몰랐습니다."
"제가 처음 뵈었을 때, 분명 의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연화가 눈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방다병이 당황한 얼굴로 이연화의 허벅지를 치며 소곤거렸다. "너, 설마...소주쾌를 말하는 건 아니지?" 이연화가 자기도 모르게 방다병을 흘겨보았다. "당연히 아니지. 소주쾌는 원래 깨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제자를 늘릴 마음은 없어." 양주만은 쉽게 알려주고 휙 떠나버릴 만한 심법이 아니었다. 방다병은 무공 수련을 오래 한 데다 소질이 워낙 탁월하여 그림과 글만 보고도 비슷하게 수련했지만, 대부분의 무림인들에게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어쩐지 안심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방다병의 옆에서, 적비성이 코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후 방시문의 저택으로 돌아와, 이연화는 몇 가지 일을 처리했다. 세우단의 문서들을 재차 검토하고, 연회에서 각자 어떤 위치에 포진할 것인지 의논한 다음, 방운일의 한결 건강해진 몸까지 살펴주고 나니 어느새 컴컴한 저녁이 되어 있었다.
거처의 뒤뜰로 나와, 이연화는 며칠 전 선화루에서 추었던 춤을 복기하여 연습하기 시작했다. 설약은 자신들을 무림인으로 칭하지 않았으나, 이연화가 보기에 이 춤에는 분명 무학의 이치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무공 초식처럼 추면 곤란하겠지, 쓸데없는 의심을 사게 될 테니까. 칼끝에서 무림인의 티를 되도록 걷어내야 했다. 방시문에게 빌린 세검을 여러 방식으로 휘둘러보다, 이연화는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을 때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방다병이 대뜸 볼멘소리를 냈다.
"이연화, 네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무슨 소리야, 네 당숙과 사촌의 일인데. 이럴 가치가 없다는 거야?"
이연화가 이상한 눈으로 물었다. 방다병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네가 굳이 또 무대에 설 필요까지 있느냔 말이야."
"모르는 소리 하네, 방 공자. 무대 중앙에서는 공간 전체가 한눈에 잘 보여. 그리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내가 이미 무대에 한 번 서버렸잖아. 사람들을 많이 모으려면 그편이 더 효율적이라는데, 굳이 두 번째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오히려 행운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어."
원치 않는 순간 논파당한 사람답게, 방다병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연화가 어이없게 웃으며 칼을 한 차례 휘둘렀다.
"왜 죽상이야, 방소보. 내가 무대에 서는 게 왜 불만인데?"
"잊었어? 네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을 땐, 웬 변변찮은 놈들이 네게 술 시중을 들라고 불렀잖아."
"이번엔 안 가면 되지. 더 얻을 정보도 없는데, 나라고 그런 사람들한테 술을 따라주고 싶진 않아."
일부러 달래듯이 말했으나, 방다병의 얼굴은 금방 펴지지 않았다. 또 뭐가 문제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방다병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불만스럽게 꿍얼거렸다.
"난 그냥, 널 불순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싫어."
"음, 너 공개 혼사 때부터 그러긴 했지. 그래도 그땐 잘 참고 넘기더니, 왜 새삼스레-."
"그때도 엄청 싫었어, 그냥 대의가 있으니 억지로 참은 거지.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우리 상황이 좀 변했잖아."
모호하고도 민망한 손짓을 휙휙 하다, 방다병은 곧 헛기침과 함께 시선을 피했다. 그 귀와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연화의 한쪽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방다병은 지금 각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 상황이 퍽 많이 변하기는 했지. 하지만-이연화가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가만히 팔짱을 끼었다. 아무리 자세히 관찰해도, 청년의 태도는 자신의 마음을 처음 고백했던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각인 자체를 고민하는 기색도 딱히 없었고, 하다못해 생각이 한층 많아진 분위기를 띠고 있지도 않았다. 미간을 슬쩍 좁힌 채 빤히 보자, 방다병이 제발 저린 사람처럼 더듬거렸다.
"왜, 왜 그렇게 봐?"
"방소보. 넌 정말 그걸 계속하고 싶어? 아직도?"
이연화가 의혹 어린 얼굴로 묻자, 방다병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직설적인 질문에 퍽 부끄러워진 모양이었다.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청년은 잔뜩 익은 복숭아처럼 변한 채 고개를 끄덕했다. "응." 이연화의 미간 골이 조금 더 깊어졌다. 상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왜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난 각인하기에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너도 잘 알잖아."
"네가 그날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고 있어. 하지만...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방다병의 얼굴은 터질 듯 상기되어 있었지만, 그 목소리와 눈동자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이연화는 불가해하다 못해 심란한 심정에 사로잡혀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째야 하나. 고개를 돌린 채 고민하다, 이연화는 가만히 턱에 힘을 주었다. 방다병은 조금 쭈뼛거리며 이연화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지나치게 길어진 정적 끝에, 이연화는 결국 방다병을 돌아보며 참지 못하고 말했다.
"너, 어제 새벽에 날 봤잖아."
방다병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이연화가 먼저 그 일을 꺼내리라고 짐작하지 못한 듯했다. 이연화는 일부러 딱한 아이를 앞에 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방다병을 비스듬히 응시하며 팔짱을 끼었다. 차가울 만큼 무심하고 태연한 말이 흘러나왔다.
"방다병. 난 속이 썩은 인간이야. 안에 누굴 들일 만한 여유가 없다고. 친구도 거의 못 만드는데, 각인 같은 걸 시작할 마음을 어찌 품겠어? 나도 이래저래 생각하고는 있지만 결국엔 안 될 가능성이 높은 일이니까, 너도 너무 심력을 기울이지 마."
방다병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이연화는 무언가를 단단히 그르친 듯한 두려움과, 미루던 말을 결국 꺼냈다는 후련함을 동시에 느끼며 가만히 방다병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말이 칼날처럼 날아가 박힌 듯해, 가슴 한편이 슬쩍 조여들며 초조해졌다. 이연화는 정말로 눈앞의 청년이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았다(방다병이 그 사실을 얼마나 믿을지는 알 수 없었다). 방다병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발치를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던 청년은, 이내 시선을 들고 천천히 말했다.
"이연화. 내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네 심마를 모두 없앨 수 없단 걸 알아. 얼마든지 과거의 너를 옹호하거나 변호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네 마음의 응어리가 모두 풀리진 않을 테니까.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심마인 거겠지."
그 목소리에 배인 깊은 존중과 헤아림에, 이연화는 그만 쓴웃음을 엷게 띠었다. 자신의 정체를 모르던 방다병이 이상이의 좋은 면을 끌어올릴 때마다, 이연화는 진실한 온기와 고마움을 느꼈으나 자책감에서 완벽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연화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방다병이 차분히 이었다. 이연화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적비성과 다른 의미로, 방다병은 늘 상대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이야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심마가 없고, 각인하기에 좋은 사람을 바라는 게 아니야. 난 그냥 네가...지금의 이연화가 좋아."
방다병이 담담히 맺었다. 이연화의 눈동자가 일순 거세게 일렁였다. 그러고 보면, 방다병은 이상이 아닌 이연화에게 들러붙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이연화가 타인과 이어지지 않으려 노력한 탓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연화는 이상이에 비해 별볼일 없는 자였다. 예전처럼 패기 넘치지도 않고, 자신감으로 빛나지도 않으며,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지도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연화보다 이상이에 열광했다. 하지만 대체 어째서인지, 방다병은 이연화를 늘 새끼오리처럼 졸졸 쫓아다니며 돌아봐달라 성화였다.
왜일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방금 했던 말처럼, 이연화는 곪아버린 속내를 잘 감춘 채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겉으로는 늘 여유롭고 요령 좋은 척 굴지만, 사람이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거짓말쟁이에 겁쟁이가 되는 실속 없는 사람. 친구로서도 그리 좋지는 못했고, 각인 상대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방다병은 어째서 저렇게 확신에 찬 얼굴로, 이토록 해괴한 고백을 하고 있는 걸까? 목구멍이 살짝 답답해졌다. 이연화의 복잡한 눈빛 앞에서, 방다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 마음을 꼭 돌려달라는 뜻은 아니야. 어떻게 이런 일을 강요할 수 있겠어? 전에도 말했지만, 나와 각인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차피 각인하든 안 하든, 내가 너와 계속 함께 다닐 건 분명하니까."
응? 방다병이 자연스레 덧붙인 뒷말에, 이연화의 눈이 커졌다. 적비성의 말이 머리 한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녀석이 네게 집중하는 정도는 정상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양인일 때에도 음인일 때에도 방다병은 늘 내게 붙어 있었지. 몇 번이나 떨치고 가버렸는데, 결국엔 항상 어딘가에서 만나버렸고. 결국은 못 떼어낼 것 같아서 함께 다니자고 결심했었고...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어쩐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잠깐, 그럼 각인하지 않는 데에 큰 의미가 있나? 말하는 기세를 보니, 어차피 이 녀석은 일생 나한테서 안 떨어지려는 것 같은데? 어찌저찌 억지로 혼인을 시켜놔도, 집구석엔 안 들어가고 내 옆에만 붙어 있으려 들면 어쩌지? 그게 하 당주에게 더 못할 짓인가? 잠깐, 이연화. 지금 무슨 해괴한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아무리 그래도 친구와 각인은 엄연히 다르지. 머릿속을 혼란스레 맴돌던 이연화가 스스로를 다잡았다. 생각할수록 상식이 얼크러지는 기분이었다. 동그란 눈을 빛내며 선 방다병을 향해, 이연화가 허무한 웃음을 흘렸다.
"그거 아주 협박처럼 들리네, 방소보."
"너도 알고 있던 일이잖아. 모르던 것처럼 굴지 마."
흥 소리를 내며 도련님처럼 한 마디 던진 방다병이 발길을 돌렸다. 제 방으로 가려나 싶어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청년은 두어 발짝 걷다 말고 다시 몸을 틀어 이연화에게 다가왔다.
"이연화. 어제는 날 걱정하느라 문걸에게 틈을 보인 거지?"
그 질문에, 이연화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사실이었으나 방다병이 알아차릴 것이라 예상하지는 못한 탓이었다. 방다병이 엷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네가 무슨 약에 당했는지 알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 나와 숲에서 재회했을 때에도, 어제 새벽에도 마치 내가 죽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굴었지. 안 그런 척하면서, 넌 내 안위를 엄청 신경 쓰잖아." 딱히 비밀도 아니었으나, 이연화는 어쩐지 머쓱한 기분에 입맛을 다셨다.
"그걸 몰랐어? 벽중계 때에도 널 걱정해서 그랬다고 말했잖아."
일부러 타박하듯이 퉁명스레 대꾸하자, 방다병이 살짝 웃었다.
"이연화. 넌 네 마음에 여유가 없다고 했지만, 사실 이미 날 마음에 들여준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았다면, 나 때문에 적을 눈앞에 두고 방심할 정도로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연화의 눈썹이 움찔했다. 자신이 방다병을 아낀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만 그 깊이를 자세히 가늠해보려 애쓴 적이 없을 따름이었다. 방다병이 오른손을 들어 이연화의 팔을 잡았다. 그 얼굴은 꽤나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 이연화는 현재의 방다병이 처음 만났던 꼬마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새삼스레 실감했다.
"나와 각인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아. 각인하지 않더라도, 나는 네가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만든 친구잖아. 내겐 충분히 특별한 일이야."
단어 하나하나에서 진심이 배어나왔다. 상대를 직시하는 눈동자가 호수처럼 맑았다. 이연화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방다병을 마주보았다. 이런 신실한 이야기에 돌려줄 만한 말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방다병에게 잡힌 팔에서부터 편안한 온기가 번졌다. 그러고 보니,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이 손이 나를 달랬지. 이연화가 그 손을 보며 문득 회상했다. 온통 민망한 기억이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시선을 내리깐 채 침묵하다, 이연화는 이내 살짝 비뚤어진 미소를 엷게 띠었다. 부드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정말 많이 컸네, 방소보. 내 말문을 이렇게 막을 줄도 알고."
방다병이 싱긋 웃었다. 평소처럼 유쾌한 허세가 아닌, 즐거운 기쁨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이내 묘한 초조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상기된 낯으로 무슨 말을 건네려 입술을 달싹이다, 방다병은 이연화의 팔을 놓고 홱 등을 돌렸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이연화가 조금 놀라 물었다. 이연화를 차마 돌아보지 못한 채, 방다병은 양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웅얼거렸다. "정말 나랑 각인 안 해도 되지만, 하지만...." 말의 뒷부분이 잘 들리지 않았다. "뭐? 똑바로 얘기해." 이연화가 타박하듯이 건네며 한 발짝 다가서자, 방다병은 뒷목과 귀를 새빨갛게 붉힌 채 툭 뱉었다.
"하지만, 적비성하고만은 안 돼."
그 말을 던져놓고, 청년은 상대의 반응을 염려하는 사람처럼 휙 날듯이 자리를 박차 사라져버렸다.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방다병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다, 이연화는 곧 맥빠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옛날보다 훨씬 많이 성장했다 해도, 저 솔직하고 다정한 공자에게는 어쩔 수 없이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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