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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4 23:00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눈을 떴을 때, 이연화는 잠시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 문득 의문을 품었다. 침상은 분명 비어 있었는데, 어쩐지 공기가 혼자 있을 때보다 훈훈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방다병은 탁자에 엎어져 잠들어 있었고 적비성은 문간에 기대어 가볍게 졸던 참이었다. 쟤네는 왜 저러고 있지? 이연화가 몸을 일으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기억하기로, 방다병은 혼자 자겠다던 뜻을 충분히 존중하고 방을 비워주었다.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적비성을 못 막아서 이렇게 된 건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연화는 아침의 선뜩한 기운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침의가 온통 젖어 있던 탓이었다.
어제 자기 전에 갈아입었는데, 악몽을 꾸다 젖었나 보군. 이연화가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숨통을 조일 것처럼 생생했던 악몽은, 아침의 빛에 기가 죽은 것처럼 한 꺼풀 멀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몇몇 장면들은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선명했다. 이연화는 바닥에 나란히 놓였던 두 개의 머리를 떠올리고 진저리를 쳤다. 온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 머리들 아래로 금방 몸이 생겼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꿈에서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잠깐. 금방 몸이 생겼기에 망정이지...?
이연화가 우뚝 굳어졌다. 분명 악몽이었는데 갑자기 몸이 왜...생겼지? 심지어 누가 날 안아주고, 뒤에서 내력을 넣어줬던 것 같은데. 악몽이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마무리되지 않았을 터였다. 순서대로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던 이연화가, 이윽고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기억해서는 안 되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탓이었다. 맙소사. 이연화의 입이 망연히 벌어졌다. 두 소매를 붙들고 펑펑 울며 뭐라 떠들었던 순간에 다다르니, 아직 채 깨어나지도 않은 몸으로 확 열기가 돌았다. 불신과 경악에 빠져 입가를 가린 채, 이연화는 어딘가의 절벽으로 몰래 도망쳐 투신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으음, 이연화...깼어?"
방다병이 눈을 비비며 졸린 목소리로 건넸다. 이연화는 절벽으로 헐레벌떡 달려가던 중 덜미를 잡힌 심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음 같아서야 어린아이처럼 이불을 뒤집어쓴 채 이 상황을 도피하고 싶었으나, 방다병도 적비성도 그런 유치한 짓거리를 보아 넘길 사람들이 아니었다(뭣보다 그런 식으로 재차 존엄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이제는 적비성도 깨어나려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연화가 내면에서 줄줄 흐르는 식은땀을 필사적으로 제어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정신 차려, 이연화! 능청스러운 것 하나로 살아남은 지가 몇 년인데, 거짓말 하나 제대로 못 해서야 되겠어? 허세를 부리듯 스스로를 다잡고, 이연화는 겨우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침상에서 못 자게 했다고 불평하는 거야?"
이연화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타박하자, 방다병과 적비성이 잠깐 시선을 교환했다. 이연화는 어쩐지 다시 식은땀이 흐를 듯하다고 생각하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자면서 얼마나 땀을 흘린 거야. 방소보, 나 씻고 온다." 이연화가 짐짓 투덜거리며 소매를 떨쳤다. "괜히 미끄러지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와." 방다병이 잔소리를 건넸다.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어조에, 근시안적인 안도감이 진하게 치밀었다. "버릇없게." 이연화는 괜히 방다병을 흘겨보고는 방을 나섰다.
목욕통 안에서 천천히 몸을 씻으며, 이연화는 어젯밤 문을 잠그지 않았던 스스로를 저주하는 동시에 심악을 원망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밤에 깨어 그런 추태를 부릴지 모른다고 의심했으면서, 왜 아예 방을 떠나 다른 곳에 틀어박히지 않았단 말인가? 조금 피로하고 힘들더라도,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면 못할 일도 아니었는데! 애초부터, 왜 방다병이 순순히 자기 방으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했을까? 전에도 피 한 번 토했더니 걱정된다며 내 방 앞을 밤새 지키다가 갑작스레 희락기를 맞았던 아이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실책이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연화는 깊디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킬수록 머리로 뜨거운 김이 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지."
이연화가 물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못난 꼴을 보이고 그런 말들을 했으니, 아마도 방다병과 적비성은 이것이 안될 일이라는 사실을 예감했을지 몰랐다. 천성이 다정한 방다병이라면 모를까, 특히 적비성은 자신의 나약한 모습에 매우 반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았다. 금원맹주는 '처량하게' 구는 이연화를 언제나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십 년 동안 자존심을 버리고 개처럼 살았다며 그렇게 불평을 해댔는데, 어젯밤에 발광하던 꼴이 어떻게 보였겠어. 이연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대사님, 이런 식으로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따뜻한 물에 턱을 댄 채, 이연화가 한탄하듯 말했다. 자신이 지닌 뿌리 깊은 자괴감이라면 잘 알고 있었으나, 그 자괴감을 현재와 긴밀하게 연결하여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피하며 살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연화가 수면에 비쳐 일렁이는 얼굴을 한심스레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세상을 위하는 초연한 사람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약한 인간인지. 또 아픈 꼴을 당할 것이 두려워 어떤 시작도 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양새가 꼴사나웠으나, 그렇다고 그 두려움을 완벽히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천하제일인이나 정파제일인이라는 수식어 따위가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보다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이연화는 방에 차려진 식사를 발견했다. 방다병과 적비성이 무슨 말을 나누다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이연화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나 몸짓이 오늘 아침부터 묘하게 비슷했다. 방다병이 얼른 의자를 두드렸다. "얼른 와, 어제 저녁부터 제대로 식사도 못했잖아." 이연화는 군말없이 자리에 앉아, 방다병이 덜어주는 음식을 조금씩 먹었다. 사실 정말 배가 고프기는 했다. 묵묵히 젓가락질을 하던 아비가 불쑥 말했다.
"무생벽과 문걸은 잡지 못했다."
"뭐어? 그렇게 빨리 도망쳤다고? 너보다 경공이 뛰어났단 말이야?"
방다병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 말을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들였는지, 적비성이 신경질적인 눈으로 방다병을 노려보았다.
"그놈들이 본부에 불을 지르고 도망갔어. 그곳엔 옥에 갇힌 사람들도 있었다."
"아, 그럼 어쩔 수 없지...그런데, 네가 억울한 사람들을 풀어주느라 추적을 마다했단 말이야? 놀랍네. 역시 천성이 나쁘진 않구나."
방다병이 벙긋 웃으며 칭찬하듯이 덧붙였다. 그 말에, 적비성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한 모욕을 받은 사람처럼 미간을 구겼다. "쓸데없이 건방진 소리 하지 마라." 방다병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왜 좋은 말을 해줘도 난리야? 인간의 도리를 아는 사람이란 말이 뭐 잘못됐어?" 적비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젓가락을 쥐었던 손으로 힘이 들어가자, 방다병 역시 방어적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평소처럼 투닥거리던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연화가, 한숨과 함께 방다병의 어깨를 손등으로 탁 쳤다.
"됐어, 그만해. 어린애들처럼 뭐하는 짓이야? 잘했어, 아비."
툭 건네자, 적비성은 별다른 말 없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었다. 방다병이 혀를 차며 손가락질했다.
"너, 이연화가 칭찬하는 건 왜 아무 말도 없어?"
"이연화는 너처럼 불순한 표정을 짓지 않았어."
"내가 무슨-웃는 얼굴이 뭐가 나빠! 너, 그렇게 살다간 불필요한 원수까지 수두룩하게 만들 거야. 틈틈이 절에 가서 불공 좀 드리고-."
"평화롭게 밥 좀 먹자, 방소보. 아비, 그래서 거기선 뭘 찾아냈어?"
방다병에게 핀잔을 준 이연화가 물었다. 적비성은 본부에서 수거한 정보들을 짤막하게 정리해 알려주었다. 그 계기는 알 수 없으나, 심악은 언젠가부터 세우단이라는 조직의 협력을 받아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심악이나 세우단원이 비적단 혹은 주루 등에 약을 팔면, 그 수익을 서로 나누어 갖는 구조였다. 약마의 비급을 훔친 후로는 심악의 연구에 비약적인 발전이 생겨, 여현의 물밑 시장에서 꽤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약의 효능으로 행복에 절어 살고 싶은 사람들과, 약의 강제력으로 타인을 휘두르길 원하는 사람들이 주된 고객이었다.
여현에서 수익을 올리기 가장 좋은 무대였기에, 세우단은 선화루에 여러모로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선화루에는 저렴한 가격으로 약을 넘겼고, 미처 물량을 맞추지 못해 선화루가 다른 비적단과 거래해야 할 때에는 그 차액을 일부러 내주기까지 했다. 선화루는 그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세우단의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부유한 이들을 귀장으로 끌어들일 뿐 아니라, 세우단의 자금을 보관해주는 금고 역할까지 도맡았다. 세우단이 요 몇 달 동안 벌어들인 금액을 듣고, 방다병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무슨 약을 그렇게 많이 팔아댄 거야? 세우단이 언제 어떻게 생긴 조직인지는 몰라도, 웬만한 거상만큼 돈을 쓸어 담았네."
"금원맹이 바짝 추격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곧 여현을 떠날 수도 있겠어."
이연화가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고개를 끄덕한 적비성이 품을 뒤져, 타다 만 종이쪽을 몇 장 꺼냈다.
"그리고, 불탄 본부에서 다른 조직과 관련된 문서들이 몇 개 나왔다. 무안의 말에 따르면, 과거에 모두 사라진 조직들이라더군."
"이미 사라진 조직들? 줘 봐."
방다병이 얼른 건네받았다. 이연화 역시 집중하는 눈으로 문서를 훑었다. 거래 내역을 기록한 장부 따위가 대부분이었는데, 장부에 찍힌 인장을 보니 길게는 7년 전, 짧게는 1년 전까지 존재했던 범죄 조직들의 표식이었다.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호를 떠돌며 소문에 한창 예민해져 있던 시점이라, 그 이름들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방다병이 눈썹을 찌푸렸다.
"모두 백천원에서 소탕했던 조직들이야. 죄명은 불법적인 장물이나 약물을 판매한 거였고. 왜 거기 이런 게 있었지? 옛 조직들의 잔당이 모여서 세우단을 만든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활동 지역이 너무 달라. 뭔가 더 공통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연화가 가만히 관자놀이를 짚었다. 잠시 기억을 되돌리다, 이연화는 곧 방다병을 돌아보며 말했다.
"부단주."
"뭐?"
"이 조직들 전부, 부단주가 안 잡혔어. 단주와 단원들은 대부분 체포되었는데, 부단주는 돈을 들고 혼자 도망쳤지."
방다병의 눈이 커졌다. 청년은 손에 들린 쪽지들을 재차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체포된 단주들이 입을 모아 말하길, 조직의 실세는 부단주였다고 했어. 그가 먼저 접근해서 돈을 벌자는 제안을 했다고."
"음. 우리가 만난 누가 떠오르네. 그 자라면 그런 짓을 할 만하지."
이연화가 슬쩍 한쪽 입매를 올리며 말했다. 삿갓 쓴 남자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꽤 높은 무공 실력을 지녔음에도, 명예나 강함보다는 묘하게 이득에 집착하던 사내였다. "그럼...혹시 너와 싸웠던 그 문걸이란 사람이, 백천원의 소탕을 늘 빠져나갔던 부단주란 거야?" 방다병이 묻자,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에게 거리낌없이 알려주었던 문걸이라는 이름도 그저 가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확률은 높아 보여. 일단은 도망친 세우단과 심악을 찾아야 하니, 선화루에 가 보자."
"선화루에?"
"선화루가 세우단의 금고 역할도 겸한다고 했지. 그럼 분명히 재물을 가지러 오는 사람이 있을 거야. 이 정도 규모의 재화는 절대 한 사람이 몰래 나를 수 없어. 한 무리의 장정이 필요해."
"일리 있는 말이긴 한데, 그놈들이 새벽에 이미 다녀갔으면 어쩌지?"
"무안이 사람 몇을 시켜 흔적을 계속 쫓고 있다. 아직도 깊은 산중에서 이동하는 듯하다고 하더군.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서겠지."
"음, 잘됐네. 그렇다면 분명 틈을 봐서 선화루에 올 텐데...아, 차라리 귀빈들이 편히 오도록 길을 깔아줄까? 가서 한번 얘기해 봐야겠어."
이연화가 슬몃 미소를 띤 얼굴로 덧붙이자, 방다병이 반쯤 뜬 눈으로 이연화를 노려보았다. "이연화, 너 그런 표정 짓지 마." 이연화가 과히 결백한 표정을 짓고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내가 뭘? 전혀 위험하지 않은 일이니, 걱정 마." 방다병이 불신의 흥 소리를 냈다. 덜어놓은 음식을 빠른 속도로 먹어치우고, 청년은 세수한 다음 선화루에 갈 채비를 하겠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이연화가 내심 쓴웃음을 띠었다. 부스스한 머리와 퀭한 눈을 보니, 방다병 역시 평화로운 밤을 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적비성은 방다병에 비해 평소처럼 멀끔해 보였다. 남은 음식을 남기지 않고 모두 먹은 남자는, 차를 반쯤 마시더니 잠시 할 말을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앗, 불안한데. 이연화가 눈을 살짝 굴리며 심적 방어벽을 세웠다. 적비성이 마지막으로 이런 분위기를 띠었을 때는, 이연화와 각인을 유지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한 날이었다. 혹시 오늘은 그 반대려나? 이연화가 눈을 반대편으로 살짝 굴렸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부터는 같이 자자고 오지 않게 되려나? 이연화가 복잡한 물음표에 잠깐 사로잡힌 사이, 적비성은 예상 밖의 말을 툭 던졌다.
"다시 문걸과 만나게 된다면, 넌 나서지 마라."
이연화가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적비성은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찻잔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 왜?"
"몰라서 묻는 거냐?"
적비성이 시선을 들었다. 쏘는 듯한 눈빛이었다. 눈가를 살짝 만진 이연화가 이내 태연하게 손을 내저었다.
"내가 침에 스쳤던 일로 그러는 거야? 걱정 마, 다시 만나면 절대 방심 안 해. 그리고 말했잖아, 그자가 쓰는 건 맹독이 아니라고."
"벽차지독만 아니었다면, 차라리 맹독인 편이 나았을 거다."
적비성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차를 마시는 남자를 향해, 이연화가 괴이한 표정을 짓고는 일부러 농담처럼 건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피 토하는 걸 보는 게 나았겠다는 뜻이야? 이상한 취향이네, 적 맹주."
"네가 눈물보다는 피를 흘리는 게 덜 불편했을 거란 뜻이다. 맹독은 내가 해독해주면 그만이니까."
불성실한 태도가 영 거슬렸는지, 적비성이 찻잔을 탁 내려놓으며 쏘아붙였다. 그 미간이 전에 없이 좁혀져 있었다. 이연화는 그만 말을 금지당한 사람처럼 입을 닫았다. 모르는 척 연기해야 하는 시점인지 고민하는 찰나, 적비성이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 "애송이도 없으니, 기억 못하는 척할 필요 없다." 애송이가 없으면 뭐가 달라지냐고 말하려다, 이연화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사실 방다병이 없으면 사정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다.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차 순수하게 일렁이는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보다, 적비성의 무심하고도 짜증스러운 눈동자를 마주하는 편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수월했다. 이연화가 짐짓 민망하게 뺨을 긁적였다.
"음, 미안. 별로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겠지."
"아니었지."
적비성이 짧게 대꾸하고는 빈 찻잔을 채웠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거 어색하네. 이연화는 쓰다듬을 불여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짧게 손짓했다. 적비성은 그 손짓에 따라 찻주전자를 넘겨주는 대신, 이연화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입안을 축인 이연화가 최대한 가볍게 말했다.
"어제 약 때문에 무슨 헛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그냥 못 볼 꼴 봤다 생각하고 잊어버려. 불편하면 이제부터라도 따로 자든가."
"왜 함께 자는 문제가 지금 나오는 거냐?"
적비성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연화가 픽 웃었다.
"넌 항상 내가 약점 없는 정파제일인이길 원했잖아. 그런 꼴이 가당키나 했겠어."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군. 난 네가 정파제일인이길 원한 적이 없다. 만인책이 뭐라 하든 넌 실제로 정파제일인이니까. 내가 바랐던 건, 네 원기가 쓸데없이 낭비되지 않는 거였어."
적비성이 팔짱을 낀 채 대꾸했다. 이연화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상대를 빤히 응시하던 금원맹주가, 이내 한쪽 입매를 올려 냉소했다.
"이연화. 네 주변 사람들은 다 자기 의지도 없는 천치들뿐이었나?"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 스승이나 불피백석, 선고도를 비롯한 사고문 사람들이 모두 생각 없이 네 말만 듣는 꼭두각시였느냔 말이야."
당연히 그렇진 않았지, 우리는 마교가 아니었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도발 같은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꾸하려다, 이연화는 상대의 논리를 직감하고 미간을 좁혔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모두 알아서 제 삶을 살았을 뿐이다. 네가 책임감으로 괴로워하며 기운을 소모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야." 금원맹주가 아무렇지 않게 읊었다. 이연화의 눈썹이 움찔했다. 자신의 심마를 허상 취급하는 상대에게 반사적인 거부감이 치밀었다. 종전보다 훨씬 날선 눈으로, 이연화가 천천히 말했다.
"당시에는 내가 문주였어, 적 맹주. 당연히 내 선택을 돌아볼 수밖에 없지."
"네가 선택한 것처럼, 네 주변 사람들도 나름의 선택을 한 거다. 나중에 말을 바꿔 남 탓하는 놈이 소인배인 것이지."
적비성이 아주 단순한 진리를 설파하듯 당당하게 말했다. 이연화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얼키고설켰던 매듭을 썩둑 잘라버리는 듯한 태도에 금방 동조할 수가 없었다. 십 년 동안 단단히 끌어안았던 응어리가 반사적으로 꿈틀거렸다. 찻잔을 매만지다가, 이연화는 찻물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 없어. 난 너와 달라." 적비성이 메마른 웃음을 픽 뱉었다.
"네가 나와 다르다는 건 잘 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그렇게 말하고, 적비성은 찻잔을 쭉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연화가 묘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할 말만 딱 마치고 일어서는 모양새에 차마 배려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는 없었지만, 그 담백하다 못해 무심한 언행이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문을 밀어 열려다, 적비성이 문득 이연화를 돌아보았다. 그 눈썹이 잔뜩 치켜올라가 있었다.
"이연화. 만에 하나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네 탓으로 치부하지 마라. 모욕적이다."
적비성이 정말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살짝 커진 눈을 깜박이며 그 모습을 응시하다, 이연화는 그만 바람 빠지는 듯한 헛웃음을 뱉었다.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적비성이 떨떠름한 얼굴로 툭 던졌다. "물러터진 위로를 원한다면 차라리 방다병에게 말해. 난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으니." 설마 방금 전까지 네가 하던 게 위로였냐고 놀리듯 건네려다, 이연화는 그 말을 삼키고 쓴웃음을 지었다. 적가에서 살수로 자라, 마교를 평정하고 금원맹을 세운 사람에게 바랄 게 따로 있지. 대신 이연화는 그 무뚝뚝한 모습을 향해 물었다.
"아비. 넌 정말 후회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그 말에, 적비성은 정말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잠시 말이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금원맹주는 솔직하게 말했다.
"배신자들을 미리 색출해서 제거하지 못한 일은 후회한 적이 있다. 특히 각려초에게 잡혔을 때 그랬지. 하지만 그런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몸이 멀쩡하다면 그냥 무공 수련이나 더 하는 편이 나아."
참지 못하고, 이연화는 고개를 돌리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 맹렬할 만큼 직선적인 성품이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거푸 마주하니 어쩐지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이연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너만큼 뻔뻔하면, 심악 선생의 약도 소용이 없을 것 같네."
"그러니 문걸은 내게 맡기란 거다."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투로 이야기하고, 적비성은 방을 나갔다. 이연화는 열린 문을 한동안 바라보다, 이윽고 피식 웃으며 찻잔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았다. 목욕물에 비치던 얼굴보다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눈을 떴을 때, 이연화는 잠시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 문득 의문을 품었다. 침상은 분명 비어 있었는데, 어쩐지 공기가 혼자 있을 때보다 훈훈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방다병은 탁자에 엎어져 잠들어 있었고 적비성은 문간에 기대어 가볍게 졸던 참이었다. 쟤네는 왜 저러고 있지? 이연화가 몸을 일으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기억하기로, 방다병은 혼자 자겠다던 뜻을 충분히 존중하고 방을 비워주었다.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적비성을 못 막아서 이렇게 된 건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연화는 아침의 선뜩한 기운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침의가 온통 젖어 있던 탓이었다.
어제 자기 전에 갈아입었는데, 악몽을 꾸다 젖었나 보군. 이연화가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숨통을 조일 것처럼 생생했던 악몽은, 아침의 빛에 기가 죽은 것처럼 한 꺼풀 멀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몇몇 장면들은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선명했다. 이연화는 바닥에 나란히 놓였던 두 개의 머리를 떠올리고 진저리를 쳤다. 온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 머리들 아래로 금방 몸이 생겼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꿈에서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잠깐. 금방 몸이 생겼기에 망정이지...?
이연화가 우뚝 굳어졌다. 분명 악몽이었는데 갑자기 몸이 왜...생겼지? 심지어 누가 날 안아주고, 뒤에서 내력을 넣어줬던 것 같은데. 악몽이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마무리되지 않았을 터였다. 순서대로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던 이연화가, 이윽고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기억해서는 안 되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탓이었다. 맙소사. 이연화의 입이 망연히 벌어졌다. 두 소매를 붙들고 펑펑 울며 뭐라 떠들었던 순간에 다다르니, 아직 채 깨어나지도 않은 몸으로 확 열기가 돌았다. 불신과 경악에 빠져 입가를 가린 채, 이연화는 어딘가의 절벽으로 몰래 도망쳐 투신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으음, 이연화...깼어?"
방다병이 눈을 비비며 졸린 목소리로 건넸다. 이연화는 절벽으로 헐레벌떡 달려가던 중 덜미를 잡힌 심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음 같아서야 어린아이처럼 이불을 뒤집어쓴 채 이 상황을 도피하고 싶었으나, 방다병도 적비성도 그런 유치한 짓거리를 보아 넘길 사람들이 아니었다(뭣보다 그런 식으로 재차 존엄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이제는 적비성도 깨어나려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연화가 내면에서 줄줄 흐르는 식은땀을 필사적으로 제어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정신 차려, 이연화! 능청스러운 것 하나로 살아남은 지가 몇 년인데, 거짓말 하나 제대로 못 해서야 되겠어? 허세를 부리듯 스스로를 다잡고, 이연화는 겨우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침상에서 못 자게 했다고 불평하는 거야?"
이연화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타박하자, 방다병과 적비성이 잠깐 시선을 교환했다. 이연화는 어쩐지 다시 식은땀이 흐를 듯하다고 생각하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자면서 얼마나 땀을 흘린 거야. 방소보, 나 씻고 온다." 이연화가 짐짓 투덜거리며 소매를 떨쳤다. "괜히 미끄러지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와." 방다병이 잔소리를 건넸다.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어조에, 근시안적인 안도감이 진하게 치밀었다. "버릇없게." 이연화는 괜히 방다병을 흘겨보고는 방을 나섰다.
목욕통 안에서 천천히 몸을 씻으며, 이연화는 어젯밤 문을 잠그지 않았던 스스로를 저주하는 동시에 심악을 원망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밤에 깨어 그런 추태를 부릴지 모른다고 의심했으면서, 왜 아예 방을 떠나 다른 곳에 틀어박히지 않았단 말인가? 조금 피로하고 힘들더라도,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면 못할 일도 아니었는데! 애초부터, 왜 방다병이 순순히 자기 방으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했을까? 전에도 피 한 번 토했더니 걱정된다며 내 방 앞을 밤새 지키다가 갑작스레 희락기를 맞았던 아이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실책이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연화는 깊디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킬수록 머리로 뜨거운 김이 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지."
이연화가 물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못난 꼴을 보이고 그런 말들을 했으니, 아마도 방다병과 적비성은 이것이 안될 일이라는 사실을 예감했을지 몰랐다. 천성이 다정한 방다병이라면 모를까, 특히 적비성은 자신의 나약한 모습에 매우 반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았다. 금원맹주는 '처량하게' 구는 이연화를 언제나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십 년 동안 자존심을 버리고 개처럼 살았다며 그렇게 불평을 해댔는데, 어젯밤에 발광하던 꼴이 어떻게 보였겠어. 이연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대사님, 이런 식으로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따뜻한 물에 턱을 댄 채, 이연화가 한탄하듯 말했다. 자신이 지닌 뿌리 깊은 자괴감이라면 잘 알고 있었으나, 그 자괴감을 현재와 긴밀하게 연결하여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피하며 살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연화가 수면에 비쳐 일렁이는 얼굴을 한심스레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세상을 위하는 초연한 사람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약한 인간인지. 또 아픈 꼴을 당할 것이 두려워 어떤 시작도 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양새가 꼴사나웠으나, 그렇다고 그 두려움을 완벽히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천하제일인이나 정파제일인이라는 수식어 따위가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보다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이연화는 방에 차려진 식사를 발견했다. 방다병과 적비성이 무슨 말을 나누다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이연화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나 몸짓이 오늘 아침부터 묘하게 비슷했다. 방다병이 얼른 의자를 두드렸다. "얼른 와, 어제 저녁부터 제대로 식사도 못했잖아." 이연화는 군말없이 자리에 앉아, 방다병이 덜어주는 음식을 조금씩 먹었다. 사실 정말 배가 고프기는 했다. 묵묵히 젓가락질을 하던 아비가 불쑥 말했다.
"무생벽과 문걸은 잡지 못했다."
"뭐어? 그렇게 빨리 도망쳤다고? 너보다 경공이 뛰어났단 말이야?"
방다병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 말을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들였는지, 적비성이 신경질적인 눈으로 방다병을 노려보았다.
"그놈들이 본부에 불을 지르고 도망갔어. 그곳엔 옥에 갇힌 사람들도 있었다."
"아, 그럼 어쩔 수 없지...그런데, 네가 억울한 사람들을 풀어주느라 추적을 마다했단 말이야? 놀랍네. 역시 천성이 나쁘진 않구나."
방다병이 벙긋 웃으며 칭찬하듯이 덧붙였다. 그 말에, 적비성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한 모욕을 받은 사람처럼 미간을 구겼다. "쓸데없이 건방진 소리 하지 마라." 방다병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왜 좋은 말을 해줘도 난리야? 인간의 도리를 아는 사람이란 말이 뭐 잘못됐어?" 적비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젓가락을 쥐었던 손으로 힘이 들어가자, 방다병 역시 방어적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평소처럼 투닥거리던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연화가, 한숨과 함께 방다병의 어깨를 손등으로 탁 쳤다.
"됐어, 그만해. 어린애들처럼 뭐하는 짓이야? 잘했어, 아비."
툭 건네자, 적비성은 별다른 말 없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었다. 방다병이 혀를 차며 손가락질했다.
"너, 이연화가 칭찬하는 건 왜 아무 말도 없어?"
"이연화는 너처럼 불순한 표정을 짓지 않았어."
"내가 무슨-웃는 얼굴이 뭐가 나빠! 너, 그렇게 살다간 불필요한 원수까지 수두룩하게 만들 거야. 틈틈이 절에 가서 불공 좀 드리고-."
"평화롭게 밥 좀 먹자, 방소보. 아비, 그래서 거기선 뭘 찾아냈어?"
방다병에게 핀잔을 준 이연화가 물었다. 적비성은 본부에서 수거한 정보들을 짤막하게 정리해 알려주었다. 그 계기는 알 수 없으나, 심악은 언젠가부터 세우단이라는 조직의 협력을 받아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심악이나 세우단원이 비적단 혹은 주루 등에 약을 팔면, 그 수익을 서로 나누어 갖는 구조였다. 약마의 비급을 훔친 후로는 심악의 연구에 비약적인 발전이 생겨, 여현의 물밑 시장에서 꽤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약의 효능으로 행복에 절어 살고 싶은 사람들과, 약의 강제력으로 타인을 휘두르길 원하는 사람들이 주된 고객이었다.
여현에서 수익을 올리기 가장 좋은 무대였기에, 세우단은 선화루에 여러모로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선화루에는 저렴한 가격으로 약을 넘겼고, 미처 물량을 맞추지 못해 선화루가 다른 비적단과 거래해야 할 때에는 그 차액을 일부러 내주기까지 했다. 선화루는 그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세우단의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부유한 이들을 귀장으로 끌어들일 뿐 아니라, 세우단의 자금을 보관해주는 금고 역할까지 도맡았다. 세우단이 요 몇 달 동안 벌어들인 금액을 듣고, 방다병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무슨 약을 그렇게 많이 팔아댄 거야? 세우단이 언제 어떻게 생긴 조직인지는 몰라도, 웬만한 거상만큼 돈을 쓸어 담았네."
"금원맹이 바짝 추격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곧 여현을 떠날 수도 있겠어."
이연화가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고개를 끄덕한 적비성이 품을 뒤져, 타다 만 종이쪽을 몇 장 꺼냈다.
"그리고, 불탄 본부에서 다른 조직과 관련된 문서들이 몇 개 나왔다. 무안의 말에 따르면, 과거에 모두 사라진 조직들이라더군."
"이미 사라진 조직들? 줘 봐."
방다병이 얼른 건네받았다. 이연화 역시 집중하는 눈으로 문서를 훑었다. 거래 내역을 기록한 장부 따위가 대부분이었는데, 장부에 찍힌 인장을 보니 길게는 7년 전, 짧게는 1년 전까지 존재했던 범죄 조직들의 표식이었다.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호를 떠돌며 소문에 한창 예민해져 있던 시점이라, 그 이름들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방다병이 눈썹을 찌푸렸다.
"모두 백천원에서 소탕했던 조직들이야. 죄명은 불법적인 장물이나 약물을 판매한 거였고. 왜 거기 이런 게 있었지? 옛 조직들의 잔당이 모여서 세우단을 만든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활동 지역이 너무 달라. 뭔가 더 공통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연화가 가만히 관자놀이를 짚었다. 잠시 기억을 되돌리다, 이연화는 곧 방다병을 돌아보며 말했다.
"부단주."
"뭐?"
"이 조직들 전부, 부단주가 안 잡혔어. 단주와 단원들은 대부분 체포되었는데, 부단주는 돈을 들고 혼자 도망쳤지."
방다병의 눈이 커졌다. 청년은 손에 들린 쪽지들을 재차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체포된 단주들이 입을 모아 말하길, 조직의 실세는 부단주였다고 했어. 그가 먼저 접근해서 돈을 벌자는 제안을 했다고."
"음. 우리가 만난 누가 떠오르네. 그 자라면 그런 짓을 할 만하지."
이연화가 슬쩍 한쪽 입매를 올리며 말했다. 삿갓 쓴 남자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꽤 높은 무공 실력을 지녔음에도, 명예나 강함보다는 묘하게 이득에 집착하던 사내였다. "그럼...혹시 너와 싸웠던 그 문걸이란 사람이, 백천원의 소탕을 늘 빠져나갔던 부단주란 거야?" 방다병이 묻자,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에게 거리낌없이 알려주었던 문걸이라는 이름도 그저 가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확률은 높아 보여. 일단은 도망친 세우단과 심악을 찾아야 하니, 선화루에 가 보자."
"선화루에?"
"선화루가 세우단의 금고 역할도 겸한다고 했지. 그럼 분명히 재물을 가지러 오는 사람이 있을 거야. 이 정도 규모의 재화는 절대 한 사람이 몰래 나를 수 없어. 한 무리의 장정이 필요해."
"일리 있는 말이긴 한데, 그놈들이 새벽에 이미 다녀갔으면 어쩌지?"
"무안이 사람 몇을 시켜 흔적을 계속 쫓고 있다. 아직도 깊은 산중에서 이동하는 듯하다고 하더군.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서겠지."
"음, 잘됐네. 그렇다면 분명 틈을 봐서 선화루에 올 텐데...아, 차라리 귀빈들이 편히 오도록 길을 깔아줄까? 가서 한번 얘기해 봐야겠어."
이연화가 슬몃 미소를 띤 얼굴로 덧붙이자, 방다병이 반쯤 뜬 눈으로 이연화를 노려보았다. "이연화, 너 그런 표정 짓지 마." 이연화가 과히 결백한 표정을 짓고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내가 뭘? 전혀 위험하지 않은 일이니, 걱정 마." 방다병이 불신의 흥 소리를 냈다. 덜어놓은 음식을 빠른 속도로 먹어치우고, 청년은 세수한 다음 선화루에 갈 채비를 하겠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이연화가 내심 쓴웃음을 띠었다. 부스스한 머리와 퀭한 눈을 보니, 방다병 역시 평화로운 밤을 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적비성은 방다병에 비해 평소처럼 멀끔해 보였다. 남은 음식을 남기지 않고 모두 먹은 남자는, 차를 반쯤 마시더니 잠시 할 말을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앗, 불안한데. 이연화가 눈을 살짝 굴리며 심적 방어벽을 세웠다. 적비성이 마지막으로 이런 분위기를 띠었을 때는, 이연화와 각인을 유지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한 날이었다. 혹시 오늘은 그 반대려나? 이연화가 눈을 반대편으로 살짝 굴렸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부터는 같이 자자고 오지 않게 되려나? 이연화가 복잡한 물음표에 잠깐 사로잡힌 사이, 적비성은 예상 밖의 말을 툭 던졌다.
"다시 문걸과 만나게 된다면, 넌 나서지 마라."
이연화가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적비성은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찻잔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 왜?"
"몰라서 묻는 거냐?"
적비성이 시선을 들었다. 쏘는 듯한 눈빛이었다. 눈가를 살짝 만진 이연화가 이내 태연하게 손을 내저었다.
"내가 침에 스쳤던 일로 그러는 거야? 걱정 마, 다시 만나면 절대 방심 안 해. 그리고 말했잖아, 그자가 쓰는 건 맹독이 아니라고."
"벽차지독만 아니었다면, 차라리 맹독인 편이 나았을 거다."
적비성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차를 마시는 남자를 향해, 이연화가 괴이한 표정을 짓고는 일부러 농담처럼 건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피 토하는 걸 보는 게 나았겠다는 뜻이야? 이상한 취향이네, 적 맹주."
"네가 눈물보다는 피를 흘리는 게 덜 불편했을 거란 뜻이다. 맹독은 내가 해독해주면 그만이니까."
불성실한 태도가 영 거슬렸는지, 적비성이 찻잔을 탁 내려놓으며 쏘아붙였다. 그 미간이 전에 없이 좁혀져 있었다. 이연화는 그만 말을 금지당한 사람처럼 입을 닫았다. 모르는 척 연기해야 하는 시점인지 고민하는 찰나, 적비성이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 "애송이도 없으니, 기억 못하는 척할 필요 없다." 애송이가 없으면 뭐가 달라지냐고 말하려다, 이연화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사실 방다병이 없으면 사정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다.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차 순수하게 일렁이는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보다, 적비성의 무심하고도 짜증스러운 눈동자를 마주하는 편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수월했다. 이연화가 짐짓 민망하게 뺨을 긁적였다.
"음, 미안. 별로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겠지."
"아니었지."
적비성이 짧게 대꾸하고는 빈 찻잔을 채웠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거 어색하네. 이연화는 쓰다듬을 불여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짧게 손짓했다. 적비성은 그 손짓에 따라 찻주전자를 넘겨주는 대신, 이연화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입안을 축인 이연화가 최대한 가볍게 말했다.
"어제 약 때문에 무슨 헛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그냥 못 볼 꼴 봤다 생각하고 잊어버려. 불편하면 이제부터라도 따로 자든가."
"왜 함께 자는 문제가 지금 나오는 거냐?"
적비성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연화가 픽 웃었다.
"넌 항상 내가 약점 없는 정파제일인이길 원했잖아. 그런 꼴이 가당키나 했겠어."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군. 난 네가 정파제일인이길 원한 적이 없다. 만인책이 뭐라 하든 넌 실제로 정파제일인이니까. 내가 바랐던 건, 네 원기가 쓸데없이 낭비되지 않는 거였어."
적비성이 팔짱을 낀 채 대꾸했다. 이연화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상대를 빤히 응시하던 금원맹주가, 이내 한쪽 입매를 올려 냉소했다.
"이연화. 네 주변 사람들은 다 자기 의지도 없는 천치들뿐이었나?"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 스승이나 불피백석, 선고도를 비롯한 사고문 사람들이 모두 생각 없이 네 말만 듣는 꼭두각시였느냔 말이야."
당연히 그렇진 않았지, 우리는 마교가 아니었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도발 같은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꾸하려다, 이연화는 상대의 논리를 직감하고 미간을 좁혔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모두 알아서 제 삶을 살았을 뿐이다. 네가 책임감으로 괴로워하며 기운을 소모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야." 금원맹주가 아무렇지 않게 읊었다. 이연화의 눈썹이 움찔했다. 자신의 심마를 허상 취급하는 상대에게 반사적인 거부감이 치밀었다. 종전보다 훨씬 날선 눈으로, 이연화가 천천히 말했다.
"당시에는 내가 문주였어, 적 맹주. 당연히 내 선택을 돌아볼 수밖에 없지."
"네가 선택한 것처럼, 네 주변 사람들도 나름의 선택을 한 거다. 나중에 말을 바꿔 남 탓하는 놈이 소인배인 것이지."
적비성이 아주 단순한 진리를 설파하듯 당당하게 말했다. 이연화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얼키고설켰던 매듭을 썩둑 잘라버리는 듯한 태도에 금방 동조할 수가 없었다. 십 년 동안 단단히 끌어안았던 응어리가 반사적으로 꿈틀거렸다. 찻잔을 매만지다가, 이연화는 찻물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 없어. 난 너와 달라." 적비성이 메마른 웃음을 픽 뱉었다.
"네가 나와 다르다는 건 잘 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그렇게 말하고, 적비성은 찻잔을 쭉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연화가 묘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할 말만 딱 마치고 일어서는 모양새에 차마 배려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는 없었지만, 그 담백하다 못해 무심한 언행이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문을 밀어 열려다, 적비성이 문득 이연화를 돌아보았다. 그 눈썹이 잔뜩 치켜올라가 있었다.
"이연화. 만에 하나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네 탓으로 치부하지 마라. 모욕적이다."
적비성이 정말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살짝 커진 눈을 깜박이며 그 모습을 응시하다, 이연화는 그만 바람 빠지는 듯한 헛웃음을 뱉었다.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적비성이 떨떠름한 얼굴로 툭 던졌다. "물러터진 위로를 원한다면 차라리 방다병에게 말해. 난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으니." 설마 방금 전까지 네가 하던 게 위로였냐고 놀리듯 건네려다, 이연화는 그 말을 삼키고 쓴웃음을 지었다. 적가에서 살수로 자라, 마교를 평정하고 금원맹을 세운 사람에게 바랄 게 따로 있지. 대신 이연화는 그 무뚝뚝한 모습을 향해 물었다.
"아비. 넌 정말 후회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그 말에, 적비성은 정말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잠시 말이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금원맹주는 솔직하게 말했다.
"배신자들을 미리 색출해서 제거하지 못한 일은 후회한 적이 있다. 특히 각려초에게 잡혔을 때 그랬지. 하지만 그런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몸이 멀쩡하다면 그냥 무공 수련이나 더 하는 편이 나아."
참지 못하고, 이연화는 고개를 돌리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 맹렬할 만큼 직선적인 성품이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거푸 마주하니 어쩐지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이연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너만큼 뻔뻔하면, 심악 선생의 약도 소용이 없을 것 같네."
"그러니 문걸은 내게 맡기란 거다."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투로 이야기하고, 적비성은 방을 나갔다. 이연화는 열린 문을 한동안 바라보다, 이윽고 피식 웃으며 찻잔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았다. 목욕물에 비치던 얼굴보다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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