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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0 22:26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실례합니다, 공자들."
방다병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문을 열었다. 안에 이미 취한 낯으로 앉았던 세 명의 남자들이 일제히 방다병과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호기심과 약간의 호승심이 배인 눈길이었다. 벌써 미간을 뚫어 죽이고 싶은데. 적비성이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방다병보다 한층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세 공자들은 적비성에게 오래 눈길을 두지 못하고 방다병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이야기는 들었소, 합석하길 원한다 했다고? 어디서 온 누구시오?"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남의 이름부터 물은 것부터가 매우 건방졌다. 물론 방다병도 그 사실을 알 테지만, 청년은 전혀 티나지 않는 얼굴로 공손히 인사했다.
"본 공자는 풍양산장에서 온 구소양이라 합니다. 모친께서는 상단을 운영하시고, 부친께서는 소소하나마 나랏일을 하시지요. 세상에 보고픈 것이 많아 유람하던 중, 여현에 좋은 술과 미인이 많다 하여 잠시 들르게 되었습니다. 공자들께서는 선화루의 큰손이자 단골들이라 들었는데, 분명 풍류를 잘 아시는 대협들이겠지요."
방다병이 술술 건넨 입발린 소리에, 적비성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년을 힐끗 보았다. 항상 시끄럽게 빽빽거리고 순진하게나 구는 줄 알았더니, 강호를 떠도는 사이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쌓은 모양이었다. 방다병의 아첨 아닌 아첨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들 중 가장 작은 체구의 공자가 웃으며 방다병을 향해 손짓했다.
"그래요, 풍양산장의 구 공자였구려. 이리 앉으시오. 나는 월백람이라 하고, 여기는 지엽생, 그리고 이쪽 훤칠한 공자는 신춘광이라 하오. 내 입으로 이리 말하긴 뭣하지만, 우리 셋의 집안이 이 여현에서는 가장 알아준다오."
"아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뭐 첫 만남에 그런 얘기를 하는가. 그, 실례가 안 된다면 이쪽은...?"
유달리 흰 얼굴에 길쭉한 몸을 한 공자가 적비성을 슬쩍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본능적인 눈치는 있는 놈이군. 내심 코웃음을 치는 적비성의 옆에서, 방다병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이 분은 제가 멀리 나간다니 집안에서 어렵게 고용한 호위입니다. 이름은 아비라고 하지요. 강호 경력이 긴 분인데, 검 솜씨는 좋으나 귀가 불편하셔서 뭘 물으셔도 금방 대답하기 어려울 겁니다. 혹시 그에게 궁금한 점이 있다면 제게 물으시지요."
적비성이 미간을 구긴 채 방다병을 일별했다. 방다병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 늘어놓은 논리는 잘 이해하고 있었으나-"아비, 네가 연기에 별로 소질이 없다는 건 잘 알아. 사실 별로 연기하고픈 마음도 없겠지. 하지만 이건 내게 중요한 일이야. 네가 뜻대로 말하기 시작하면 분명 싸움 날 가능성이 높으니, 그냥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림처럼 가만히 있어줘. 내가 그래도 되게끔 역할을 잡아줄게!"-귀머거리 취급을 받는 일에 동의한 기억은 없었다. 적비성과 나란히 앉은 방다병이 눈에 힘을 주었다. 제발 좀 협조해달라는 마음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적비성이 불만스레 고개를 돌렸다. 지엽생이 신기한 동물을 만난 듯 적비성을 기웃거렸다.
"겉으론 멀쩡한데 귀머거리라니...그런데 칼을 잘 쓴다는 것도 신기하군요."
"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여랑과 그 신인은 언제 온답니까?"
신춘광이 말했다. 그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공자님들, 여랑입니다." 여랑의 목소리가 들리자, 세 공자가 반색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적비성은 뚱한 마음으로 술병을 끌어와 잔을 채웠다. 이 상황을 예상했다 하여 덜 불쾌하지는 않았다.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녹의를 입은 여랑과 백의를 걸친 이연화가 있었다. 이연화의 얼굴을 가린 흰색 면사를 보고, 월백람이 놀란 눈으로 가볍게 손가락질을 했다.
"공연이 끝났는데도 면사를 쓴 건가? 보통 술 시중을 들 때에는 면사를 벗고들 왔는데."
"아, 공자님들. 저는 이상화라 합니다. 무용단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으나, 설약 낭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지요. 설약 낭자가 이곳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만나러 왔다가, 무용수들 중 한 명이 발목을 다친 사실을 알고 하루 돕게 되었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떠나려던 참에, 여현의 유명하신 공자님들께서 미천한 재주를 좋게 보아주셨다 하여 감사의 술이라도 한 잔 올리고자 했지요. 제가 얼굴 한편의 흉터 때문에 면사를 벗지 않는데, 혹시 거슬리신다면 물러가겠습니다."
이연화가 물 흐르듯 이야기했다. 저놈의 뱃속에는 거짓말을 자아내는 베틀이라도 있는 것 같군. 적비성이 내심 이죽거렸다. 지엽생이 얼른 한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네. 이쪽에 앉게. 평소 함께 연습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춤을 보이다니, 엄청난 기재로군. 우린 재능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네." 고개를 살짝 숙인 이연화가 여랑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여랑은 피로한 얼굴이었지만, 작은 미소를 띤 채 공자들의 잔을 채워주었다. 자신에게 술을 따라주던 이연화를 유심히 뜯어보다, 월백람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깝게 됐어. 내가 미인은 기가 막히게 판별하거든. 눈과 이마, 면사가 덮인 콧대만 보아도 굉장한 미인인데. 흉터가 심한가? 여현에 내 아는 명의가 몇 있다네. 혹시 내게만 살짝 보여주면-."
월백람이 손을 들어 이연화의 면사를 만지려 들었다. 시선을 내리깐 채 술을 따르다가, 이연화는 잔이 차자마자 상대의 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자연스레 몸을 물렸다. 허공을 움킨 월백람이 조금 머쓱한 얼굴을 했다. 이연화가 은은한 눈웃음을 띠었다.
"좋게 보아주신 점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제 흉터는 이미 깊고 오래되어 소문난 의원들도 지우기 어렵다 했습니다. 면사를 쓴 세월이 길다 보니, 이제는 그리 불편하지도 않답니다."
"상화가 설약 언니를 보러 온 것이 저희에게는 천만다행이었지 뭡니까. 그가 아니었으면 오늘 좋은 무대를 보일 수도 없었을 거예요. 무대를 끝까지 보아주신 공자님들께 재차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와 함께 한 잔 드시지요."
빙긋 미소한 여랑이 잔을 들자, 으쓱한 얼굴의 신춘광이 제법 있어 보이는 말을 하려 애쓰다 건배를 외쳤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잔을 비우는 가운데, 적비성은 이연화의 옆모습을 빤히 보며 술을 훌쩍 마셨다. 자신 쪽을 힐끗 돌아본 이연화가 월백람을 향해 짜증스레 고갯짓했다. 피했으니 됐지? 그 속내를 파악한 적비성이 피식 웃었다.
이후의 술자리는 얼마간 평범하게 흘러갔다. 적비성을 제외한 네 명의 공자들은 빠르게 취해 갔는데, 적비성이 보기에 이는 다분히 방다병의 의도에 따른 일이었다. 인간은 술이 들어가면 무방비하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기 마련이었다. 방다병은 공자들의 주량과 호방함을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술병이 비기 무섭게 점원을 불러 새 술을 갖다달라 했다. 점원 역시 신이 났는지, 점점 귀한 술병들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왔다. 여랑과 이연화도 그런 칭찬에 가세하니, 세 공자들은 점점 취기에 사로잡혀 부주의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오랜만에 아주 기분이 좋아. 여랑도 평소엔 술 한두 잔만 따라주고 쌩 가버리더니, 오늘은 어째 이렇게 사근사근하고 말이지."
신춘광이 여랑을 손짓하며 말했다. 신춘광의 술잔을 꽉 채우던 방다병이 물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으시다니, 최근 무슨 심화가 있으셨나 봅니다."
신춘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이 없다가, 이내 한숨을 탁 쉬고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신춘광이 퍽 심란하게 말했다.
"구 공자, 구 공자는 각인한 상대가 있소?"
"저 말입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은 있지만서도...."
방다병이 말을 흐렸다. 이건 또 뭘 위한 거짓말일까? 적비성이 내심 궁금해하며 술을 마셨다. 신춘광이 푹 한숨을 쉬었다.
"그럼 혼자 속 끓이는 기분이 뭔지 알겠군. 이것 보시오, 구 공자. 원래 음인들은 아무리 뻣뻣하게 굴더라도, 각인하고 나면 양인을 감히 거스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소? 그리고 이리 말하면 자화자찬 같지만, 나는 여현에서 가장 힘 있는 집 자식이란 말이오. 나 정도면 썩 괜찮은 각인 대상인데...참, 왜 그리 고집스럽고 미련하게 구는지."
신춘광이 두서 없이 늘어놓으며 혀를 찼다. 상대의 어리석음을 정말 안타까워하는 듯한 꼴에, 적비성은 별로 숨기지도 않은 경멸의 빛을 띠었다. 자신이 가진 여건에 상대방이 눈길을 주지 않자 대뜸 약을 쓰다니, 보잘것없는 무공 실력을 가진 어중이떠중이들이 고수를 이겨보겠답시고 비열한 독을 동원하는 행태와 비슷했다(방다병이 듣는다면 이게 그렇게 비교할 수 있는 일이냐며 고개를 갸웃했겠지만, 적비성에게는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방다병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공자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음인이 있나 보군요."
"신 공자는 이미 각인한 사람이 있다오. 그게, 불의의 사고 같은 거긴 했지만."
"그러면, 각인을 했는데도 공자를 받아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상대도 퍽 특이하네요. 여현의 신가라면 최고의 혼처일 텐데요."
월백람이 쓴웃음과 함께 건넨 이야기에, 이연화가 짐짓 놀란 눈으로 말했다. 신춘광이 눈을 번쩍이며 무릎을 쳤다.
"그래! 여현에 오래 있지도 않은 자네도 잘 아는데, 그 사람은 어찌 그러는지 참."
"너무 심려치 마세요. 원래 각인 초기의 음인들은 몸이 안 좋기도 하고, 마음도 많이 힘들어진다고 들었습니다. 불의의 각인이었으니 아마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아량을 갖고 기다린다면 점차 마음을 열 것입니다."
이연화가 달래듯이 말하자, 신춘광의 기세가 한풀 수그러졌다. 월백람이 웃으며 거들었다. "그래, 설마 방 공자가 정말 아유처럼 그러기야 하겠나." 생각이라곤 없는 소리에, 여랑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허벅지를 쥔 손아귀로 힘이 들어갔다. 신춘광이 한숨과 함께 방만한 자세로 앉았다. 겉가죽이야 썩 나쁘지 않았으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약자라는 점에서 적비성에겐 어떤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맞아, 기다리면 되겠지. 그 사람이 날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각인하고 함께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정이 들 테지. 아이까지 생기면 더 빨리 적응할 거야. 음인들이 다 그렇지."
"그래도, 마음에 둔 사람과 각인하셨다니 전 공자가 부럽습니다."
방다병이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헛소리를 지껄이던 신춘광이, 술기운으로 느리게 눈을 껌벅이며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오? 그러고 보니, 구 공자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 했었지. 외양도 나쁘지 않고 집안도 괜찮은 듯한데, 뭐가 문제랍니까?" 방다병이 길게 탄식했다.
"모르겠습니다, 제 성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에요."
"구 공자의 성품이 어때서? 그 음인의 눈이 이상한 것이지. 상대는 뭐 얼마나 잘난 음인이기에 그런답니까?"
지엽생이 괜히 큰 소리를 냈다. 그 혀가 살짝 꼬부라져 있었다. 방다병의 귀가 살짝 빨개졌다. "음, 정말 잘난 사람이기는 해요." 방다병이 무안하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정말로 이연화를 떠올렸나 보군. 적비성이 한심스러운 눈으로 그 작태를 지켜보았다. 지엽생이 안쓰럽게 쯧쯧거렸다.
"이루지 못할 마음이란 건 정말 괴롭지. 이봐요, 구 공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한번 귀장에 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귀장이요?"
방다병이 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그러나 지엽생이 더 말하기 전, 신춘광이 혀를 차며 지엽생의 팔을 툭 쳤다. 지엽생은 취한 얼굴로도 조금 멈칫하더니, 이내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방다병의 잔을 채웠다. "아니, 뭐 그런 게 있다고 들은 것도 같아서. 자, 구 공자. 술 받으시오." 적비성이 이연화와 짧은 시선을 교환했다. 쉬이 흘려보낼 수 없을 만큼 분명한 단서가 나온 참이었다. 이연화가 짐짓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장 말입니까? 저도 이야기만 들었는데, 여현에도 있었군요."
"귀장을 아나?"
월백람의 눈이 커졌다. 신춘광 역시 술이 약간 깨는 듯한 얼굴로 이연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연화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저도 들어보기만 했는지라,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귀장은 아주 부유하고 특별한 분들만이 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공자님들은 혹시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맑은 눈동자는 아주 천진한 호기심으로 반짝였으나, 적비성은 그 눈동자가 상대를 유혹하고자 내민 낚시 찌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어렵게 청한 예인이 나타낸 관심에, 세 공자가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그렇다고 봐야지."
월백람이 어색하게 더듬거렸다. 이연화가 반색하며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앉았다. "정말입니까? 어떤 곳인지요?" 월백람의 얼굴이 느슨해졌다. 이연화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던 남자는, 풀어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거기엔 없는 물건이 없지. 원하는 거라면 다 이룰 수 있고 말이야. 뭐가 필요한지 말만 하면 돼. 어때, 내가 자네를 함께 데리고 가줄까? 그럼 자네 얼굴의 흉도 고칠 수 있을지 모르는데."
과시하듯 말한 월백람이 다시 손을 들었다. 그 부주의한 손길이 면사를 스치기 전, 이연화는 전처럼 자연스러운 몸놀림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잡히지 않는 산들바람 같은 동작이었다. 멍청히 눈을 끔벅인 월백람이 다시 팔을 들기 전, 여랑이 양손을 딱 마주치곤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저도 소문만 들었는데, 역시 공자님들은 알고 계셨군요. 그 견문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거기 가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고요? 제가 바라는 것도 말입니까?"
방다병이 미끼에 걸린 물고기처럼 절박하게 물었다. 신춘광이 피식 웃으며 그 어깨를 툭 때렸다.
"얼마 전의 날 보는 것 같군. 그래, 그 음인 때문에 퍽 속을 썩이나 보오? 공자를 영영 그런 눈으로 봐주지 않을 사람인가?"
"그건...그럴지도 몰라요. 그 사람 눈에, 저는 별것 아닌 어린애로밖에 안 보이겠지요."
방다병이 시무룩하게 웅얼거리곤 술을 마셨다. 진실이 절묘히 섞인 말에, 이연화의 어깨가 움찔했다. 면사 위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적비성이 내심 코웃음을 치며 술병을 기울였다. 신춘광이 에이 소리와 함께 방다병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내가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소. 콧대 높은 음인들이 다 그렇지.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기 일쑤요. 자존심이 상하지만, 뭐 어쩌겠소? 먼저 마음을 둔 사람이 애쓸 수밖에."
"공자는 어떻게 애를 쓰셨습니까? 공자에게 누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 무슨 단서라도 좀 주시지요."
방다병이 호소하듯 조르자, 신춘광은 딱한 눈으로 방다병을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입맛을 다셨다.
"원래 이래서는 안 되는데...공자가 나와 잘 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이니 살짝 알려주리다. 여현에서는 이레에 한번씩 귀장이란 게 열리오. 여기 월 형이 얘기한 것처럼, 거기선 못 구할 게 없지. 하지만 거기 입장하려면 통행증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까진 내가 돕기 어렵겠소. 선화루를 통해야 한다고만 가르쳐줄 테니, 나머진 공자가 알아서 노력해 보시오."
신춘광이 호방하게 선심을 쓴 척 맺으며 손짓했다. 신춘광이 통행증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그 옆에 앉았던 지엽생이 허리춤을 슥 만졌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인 듯했지만, 적비성도 이연화도 그 동작을 놓치지 않았다. 이연화가 여랑을 향해 작게 눈짓하자, 여랑이 고개를 끄덕했다. 친절한 태도로 지엽생의 술잔을 채워주다, 여랑은 실수인 척 그 옷자락에 술을 부어버렸다. 지엽생이 화들짝 놀란 소리를 내자, 신춘광을 비롯한 공자들이 순간 그편을 돌아보았다. 여랑이 당황한 얼굴로 얼른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그만 실수했습니다. 귀한 술을 쏟았으니 벌해 주세요."
"이런, 옷이 젖으셨네요. 술 빛깔이 투명하여 다행입니다."
이연화가 미간을 살짝 좁히고는, 흰 소매로 지엽생의 앞섶을 닦아주었다. 다른편 손이 그 허리춤을 향했다. "아, 고맙네. 괜찮으니 자네 옷을 더 적시지 말게." 뺨을 살짝 붉히며 점잖은 척 얘기한 지엽생이, 이연화의 팔을 잡아 만류하려 들었다. 절도에 성공한 이연화가 얼른 몸을 물렸지만, 이미 상대의 손끝이 팔목을 스친 후였다. 이연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적비성은 조금 신나기까지 한 심정으로 가만히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그 손목에 닿은 손가락의 개수였다. 이연화가 약간 경직된 미소를 띠었다.
"제 볼품없는 옷가지까지 마음 써 주시다니, 정말 도량이 넓으십니다. 그 도량으로 부디 여랑 낭자의 실수도 너그러이 보아 주시지요."
"물론이지. 귀한 술이라고 해봐야 뭐 얼마나 한다고."
지엽생이 허세를 부리며 쏟아진 술병을 발로 툭 건드렸다. 여랑이 감사를 표하며 몸을 일으킨 사이, 억울한 얼굴로 지켜보던 월백람이 뒤편에서 이연화의 소매를 불쑥 잡아당겼다. "참, 자넨 내게 손끝 하나도 안 대주더니. 나도 술로 옷을 적셔야 봐줄 텐가?" 이연화의 동공이 다시 흔들렸다. -아비, 이건 옷에 닿은 거니까 아니야. 소매를 빼낸 이연화가 급히 건넸다. 전음으로 전달되기엔 퍽 하찮은 내용에, 적비성이 약을 올리듯 대꾸했다. -두 놈을 더해서, 총 손가락 다섯 개다. -아, 좀! 이연화가 대놓고 신경질을 냈다. 폭행의 구실을 얻은 적비성이 어쩐지 상쾌한 기분으로 술을 마시는 사이, 여랑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공자님들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오늘 운이 좋네요."
"우리가 운이 좋은 날이지, 귀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과 이리 술도 마시고. 그래, 구 공자. 원하는 바를 꼭 이루시길 빌겠소. 한 번뿐인 생인데, 바라는 대로 살아야지."
"감사합니다, 신 공자."
옛이야기 속의 영웅을 따라하듯 잔을 드는 신춘광을 향해, 방다병이 꽤 진실해 보이는 미소를 억지로 띠고는 인사했다. 적비성은 하룻강아지가 이제 일반적인 강아지 정도는 된 듯하다 생각하며 눈썹을 까딱했다.
술자리는 세 공자가 거의 기절하듯 취한 후에 마무리되었다. 방다병을 비롯한 네 사람 역시, 밤이 꽤 깊어서야 그들과 함께 선화루 밖으로 나왔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마신 탓에, 세 공자는 밖에서 대기하던 마차에 가까스로 올라 선화루를 떠났다. 멀어지는 마차들을 지켜보던 이연화가 여랑을 돌아보았다.
"애쓰셨습니다, 낭자. 저희는 이제 귀장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조사에 진척이 있으면 알려드리겠으니, 부디 몸을 보전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저도 뭔가 알아내면 말씀드릴 테니, 선화루에 오시면 절 찾아주십시오."
고개 숙여 인사한 여랑이 발길을 돌렸다. 여자가 선화루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마자, 방다병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온몸을 탈탈 털어댔다. 피부를 뒤덮은 벌레 떼를 떨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연화가 해괴한 눈으로 물었다. "왜 그래?" 방다병이 오수를 뒤집어쓴 개처럼 부르르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얼굴이 생리적인 혐오감으로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너무 싫었어. 냄새도 싫고, 하는 소리들은 더 싫고! 운일이가 그리도 경멸했던 이유를 알겠네. 아주 꼴불견들이야. 자기들이 무슨 여현의 황제라도 되는 것처럼 굴잖아.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그저 얕은 허세와 욕심만 가득해.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라지만, 저딴 개소리에 몇 시진씩 장단을 맞춰주자니 두드러기가 돋을 것 같았다고. 이연화, 너도 이리 와!"
드디어 자유롭게 불평하던 바른 공자님은, 이연화를 덥석 끌어당겨 그 몸을 이불 털듯이 팡팡 두드렸다. 술자리의 흔적을 죄다 날려버리려는 듯한 손길이었다. 방다병에게 붙잡혀 약간 불만족스럽게 흔들리면서도, 이연화는 자신의 소매를 뒤져 작은 패 하나를 꺼냈다. 지엽생에게서 훔쳐낸, 귀(鬼)라는 글자가 붉게 새겨진 목패였다. 적비성이 그 패를 유심히 살폈다.
"이게 귀장의 통행증인가?"
"그런 것 같아. 귀장에 대해 아는 척 떠봤는데 술술 불더군. 넌 들어본 적 있어?"
"들은 적은 없다만, 불법적인 물건을 판매하는 암시장이야 어디에나 있다. 이곳에선 귀장이라고 불리나 보지."
"네가 만나본 점원에게서 들은 건 없어? 비적단과 거래했다는 사람 말이야."
"자신은 물건을 받아 값을 치르고 지배인에게 전달할 뿐,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고 하더군."
적비성이 팔짱을 낀 채 이야기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지배인을 매달아 심문하고 싶었으나, 큰 기루의 지배인처럼 눈에 띄는 사람을 무작정 두들겼다간 배후가 구멍 속으로 숨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방다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장과 선화루에 무슨 접점이 있는 거지? 선화루에서 통행증을 준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해. 여기서 매입한 약이 귀장으로 흘러드는 건가?"
"귀장에 가보면 알겠지. 아비, 혹시 그 점원이 평소에 무슨 약을 샀는지는 알아?"
이연화가 물었다. 적비성이 선화루 쪽을 까딱 고갯짓했다.
"그놈은 몰랐지만, 지배인에게 장부가 있다고 들었어. 기루가 문을 닫으면, 무안이 잠입해 장부를 확인할 거다."
"음, 좋네. 이 통행증은 모양을 똑같이 그려놓고, 내일 선화루에 분실물로 돌려주자. 여기 귀퉁이에 작은 번호가 새겨진 걸 보니, 본인 이외의 사람이 이용하긴 어려울 거야. 귀장에 대해 소문내지 않는 대신, 귀장의 통행증을 달라고 하면 되겠어."
이연화가 나무 패를 뒤집어보고는 술술 말했다. 고개를 끄덕한 방다병이, 푹 한숨을 쉬며 신음처럼 꿍얼거렸다. "그 멍청이들 때문에 너무 많이 마셨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모습이 퍽 피로해 보였다. 그 뺨이 채 사라지지 않은 취기로 불그스름했다. "가서 쉬어, 방소보. 오늘 아주 형탐스러웠어." 이연화가 방다병의 등을 토닥이며 건넸다. 적비성이 그들을 향해 간결히 말했다.
"그럼 난 먼저 가보겠다. 있다 들르지."
"어디 가는데? 시간도 늦었잖아."
방다병이 물었다. 한쪽 입매를 슬쩍 올리고, 적비성은 이연화를 향해 빈정대듯 대꾸했다.
"자를 손가락이 있다."
"너!"
이연화가 발끈한 얼굴로 삿대질을 했다. 얄미운 냉소를 거두지 않은 채, 적비성은 땅을 박차 날아올랐다. 자칫하다간 오늘 밤 함께 자지 않겠다고 뻗댈 수도 있으니, 자르는 대신 부러뜨리는 정도로 봐줘야겠군. 자신답지 않게 참 관대한 처사라고 생각하며, 금원맹주는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실례합니다, 공자들."
방다병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문을 열었다. 안에 이미 취한 낯으로 앉았던 세 명의 남자들이 일제히 방다병과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호기심과 약간의 호승심이 배인 눈길이었다. 벌써 미간을 뚫어 죽이고 싶은데. 적비성이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방다병보다 한층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세 공자들은 적비성에게 오래 눈길을 두지 못하고 방다병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이야기는 들었소, 합석하길 원한다 했다고? 어디서 온 누구시오?"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남의 이름부터 물은 것부터가 매우 건방졌다. 물론 방다병도 그 사실을 알 테지만, 청년은 전혀 티나지 않는 얼굴로 공손히 인사했다.
"본 공자는 풍양산장에서 온 구소양이라 합니다. 모친께서는 상단을 운영하시고, 부친께서는 소소하나마 나랏일을 하시지요. 세상에 보고픈 것이 많아 유람하던 중, 여현에 좋은 술과 미인이 많다 하여 잠시 들르게 되었습니다. 공자들께서는 선화루의 큰손이자 단골들이라 들었는데, 분명 풍류를 잘 아시는 대협들이겠지요."
방다병이 술술 건넨 입발린 소리에, 적비성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년을 힐끗 보았다. 항상 시끄럽게 빽빽거리고 순진하게나 구는 줄 알았더니, 강호를 떠도는 사이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쌓은 모양이었다. 방다병의 아첨 아닌 아첨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들 중 가장 작은 체구의 공자가 웃으며 방다병을 향해 손짓했다.
"그래요, 풍양산장의 구 공자였구려. 이리 앉으시오. 나는 월백람이라 하고, 여기는 지엽생, 그리고 이쪽 훤칠한 공자는 신춘광이라 하오. 내 입으로 이리 말하긴 뭣하지만, 우리 셋의 집안이 이 여현에서는 가장 알아준다오."
"아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뭐 첫 만남에 그런 얘기를 하는가. 그, 실례가 안 된다면 이쪽은...?"
유달리 흰 얼굴에 길쭉한 몸을 한 공자가 적비성을 슬쩍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본능적인 눈치는 있는 놈이군. 내심 코웃음을 치는 적비성의 옆에서, 방다병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이 분은 제가 멀리 나간다니 집안에서 어렵게 고용한 호위입니다. 이름은 아비라고 하지요. 강호 경력이 긴 분인데, 검 솜씨는 좋으나 귀가 불편하셔서 뭘 물으셔도 금방 대답하기 어려울 겁니다. 혹시 그에게 궁금한 점이 있다면 제게 물으시지요."
적비성이 미간을 구긴 채 방다병을 일별했다. 방다병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 늘어놓은 논리는 잘 이해하고 있었으나-"아비, 네가 연기에 별로 소질이 없다는 건 잘 알아. 사실 별로 연기하고픈 마음도 없겠지. 하지만 이건 내게 중요한 일이야. 네가 뜻대로 말하기 시작하면 분명 싸움 날 가능성이 높으니, 그냥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림처럼 가만히 있어줘. 내가 그래도 되게끔 역할을 잡아줄게!"-귀머거리 취급을 받는 일에 동의한 기억은 없었다. 적비성과 나란히 앉은 방다병이 눈에 힘을 주었다. 제발 좀 협조해달라는 마음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적비성이 불만스레 고개를 돌렸다. 지엽생이 신기한 동물을 만난 듯 적비성을 기웃거렸다.
"겉으론 멀쩡한데 귀머거리라니...그런데 칼을 잘 쓴다는 것도 신기하군요."
"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여랑과 그 신인은 언제 온답니까?"
신춘광이 말했다. 그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공자님들, 여랑입니다." 여랑의 목소리가 들리자, 세 공자가 반색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적비성은 뚱한 마음으로 술병을 끌어와 잔을 채웠다. 이 상황을 예상했다 하여 덜 불쾌하지는 않았다.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녹의를 입은 여랑과 백의를 걸친 이연화가 있었다. 이연화의 얼굴을 가린 흰색 면사를 보고, 월백람이 놀란 눈으로 가볍게 손가락질을 했다.
"공연이 끝났는데도 면사를 쓴 건가? 보통 술 시중을 들 때에는 면사를 벗고들 왔는데."
"아, 공자님들. 저는 이상화라 합니다. 무용단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으나, 설약 낭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지요. 설약 낭자가 이곳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만나러 왔다가, 무용수들 중 한 명이 발목을 다친 사실을 알고 하루 돕게 되었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떠나려던 참에, 여현의 유명하신 공자님들께서 미천한 재주를 좋게 보아주셨다 하여 감사의 술이라도 한 잔 올리고자 했지요. 제가 얼굴 한편의 흉터 때문에 면사를 벗지 않는데, 혹시 거슬리신다면 물러가겠습니다."
이연화가 물 흐르듯 이야기했다. 저놈의 뱃속에는 거짓말을 자아내는 베틀이라도 있는 것 같군. 적비성이 내심 이죽거렸다. 지엽생이 얼른 한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네. 이쪽에 앉게. 평소 함께 연습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춤을 보이다니, 엄청난 기재로군. 우린 재능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네." 고개를 살짝 숙인 이연화가 여랑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여랑은 피로한 얼굴이었지만, 작은 미소를 띤 채 공자들의 잔을 채워주었다. 자신에게 술을 따라주던 이연화를 유심히 뜯어보다, 월백람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깝게 됐어. 내가 미인은 기가 막히게 판별하거든. 눈과 이마, 면사가 덮인 콧대만 보아도 굉장한 미인인데. 흉터가 심한가? 여현에 내 아는 명의가 몇 있다네. 혹시 내게만 살짝 보여주면-."
월백람이 손을 들어 이연화의 면사를 만지려 들었다. 시선을 내리깐 채 술을 따르다가, 이연화는 잔이 차자마자 상대의 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자연스레 몸을 물렸다. 허공을 움킨 월백람이 조금 머쓱한 얼굴을 했다. 이연화가 은은한 눈웃음을 띠었다.
"좋게 보아주신 점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제 흉터는 이미 깊고 오래되어 소문난 의원들도 지우기 어렵다 했습니다. 면사를 쓴 세월이 길다 보니, 이제는 그리 불편하지도 않답니다."
"상화가 설약 언니를 보러 온 것이 저희에게는 천만다행이었지 뭡니까. 그가 아니었으면 오늘 좋은 무대를 보일 수도 없었을 거예요. 무대를 끝까지 보아주신 공자님들께 재차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와 함께 한 잔 드시지요."
빙긋 미소한 여랑이 잔을 들자, 으쓱한 얼굴의 신춘광이 제법 있어 보이는 말을 하려 애쓰다 건배를 외쳤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잔을 비우는 가운데, 적비성은 이연화의 옆모습을 빤히 보며 술을 훌쩍 마셨다. 자신 쪽을 힐끗 돌아본 이연화가 월백람을 향해 짜증스레 고갯짓했다. 피했으니 됐지? 그 속내를 파악한 적비성이 피식 웃었다.
이후의 술자리는 얼마간 평범하게 흘러갔다. 적비성을 제외한 네 명의 공자들은 빠르게 취해 갔는데, 적비성이 보기에 이는 다분히 방다병의 의도에 따른 일이었다. 인간은 술이 들어가면 무방비하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기 마련이었다. 방다병은 공자들의 주량과 호방함을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술병이 비기 무섭게 점원을 불러 새 술을 갖다달라 했다. 점원 역시 신이 났는지, 점점 귀한 술병들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왔다. 여랑과 이연화도 그런 칭찬에 가세하니, 세 공자들은 점점 취기에 사로잡혀 부주의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오랜만에 아주 기분이 좋아. 여랑도 평소엔 술 한두 잔만 따라주고 쌩 가버리더니, 오늘은 어째 이렇게 사근사근하고 말이지."
신춘광이 여랑을 손짓하며 말했다. 신춘광의 술잔을 꽉 채우던 방다병이 물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으시다니, 최근 무슨 심화가 있으셨나 봅니다."
신춘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이 없다가, 이내 한숨을 탁 쉬고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신춘광이 퍽 심란하게 말했다.
"구 공자, 구 공자는 각인한 상대가 있소?"
"저 말입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은 있지만서도...."
방다병이 말을 흐렸다. 이건 또 뭘 위한 거짓말일까? 적비성이 내심 궁금해하며 술을 마셨다. 신춘광이 푹 한숨을 쉬었다.
"그럼 혼자 속 끓이는 기분이 뭔지 알겠군. 이것 보시오, 구 공자. 원래 음인들은 아무리 뻣뻣하게 굴더라도, 각인하고 나면 양인을 감히 거스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소? 그리고 이리 말하면 자화자찬 같지만, 나는 여현에서 가장 힘 있는 집 자식이란 말이오. 나 정도면 썩 괜찮은 각인 대상인데...참, 왜 그리 고집스럽고 미련하게 구는지."
신춘광이 두서 없이 늘어놓으며 혀를 찼다. 상대의 어리석음을 정말 안타까워하는 듯한 꼴에, 적비성은 별로 숨기지도 않은 경멸의 빛을 띠었다. 자신이 가진 여건에 상대방이 눈길을 주지 않자 대뜸 약을 쓰다니, 보잘것없는 무공 실력을 가진 어중이떠중이들이 고수를 이겨보겠답시고 비열한 독을 동원하는 행태와 비슷했다(방다병이 듣는다면 이게 그렇게 비교할 수 있는 일이냐며 고개를 갸웃했겠지만, 적비성에게는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방다병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공자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음인이 있나 보군요."
"신 공자는 이미 각인한 사람이 있다오. 그게, 불의의 사고 같은 거긴 했지만."
"그러면, 각인을 했는데도 공자를 받아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상대도 퍽 특이하네요. 여현의 신가라면 최고의 혼처일 텐데요."
월백람이 쓴웃음과 함께 건넨 이야기에, 이연화가 짐짓 놀란 눈으로 말했다. 신춘광이 눈을 번쩍이며 무릎을 쳤다.
"그래! 여현에 오래 있지도 않은 자네도 잘 아는데, 그 사람은 어찌 그러는지 참."
"너무 심려치 마세요. 원래 각인 초기의 음인들은 몸이 안 좋기도 하고, 마음도 많이 힘들어진다고 들었습니다. 불의의 각인이었으니 아마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아량을 갖고 기다린다면 점차 마음을 열 것입니다."
이연화가 달래듯이 말하자, 신춘광의 기세가 한풀 수그러졌다. 월백람이 웃으며 거들었다. "그래, 설마 방 공자가 정말 아유처럼 그러기야 하겠나." 생각이라곤 없는 소리에, 여랑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허벅지를 쥔 손아귀로 힘이 들어갔다. 신춘광이 한숨과 함께 방만한 자세로 앉았다. 겉가죽이야 썩 나쁘지 않았으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약자라는 점에서 적비성에겐 어떤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맞아, 기다리면 되겠지. 그 사람이 날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각인하고 함께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정이 들 테지. 아이까지 생기면 더 빨리 적응할 거야. 음인들이 다 그렇지."
"그래도, 마음에 둔 사람과 각인하셨다니 전 공자가 부럽습니다."
방다병이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헛소리를 지껄이던 신춘광이, 술기운으로 느리게 눈을 껌벅이며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오? 그러고 보니, 구 공자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 했었지. 외양도 나쁘지 않고 집안도 괜찮은 듯한데, 뭐가 문제랍니까?" 방다병이 길게 탄식했다.
"모르겠습니다, 제 성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에요."
"구 공자의 성품이 어때서? 그 음인의 눈이 이상한 것이지. 상대는 뭐 얼마나 잘난 음인이기에 그런답니까?"
지엽생이 괜히 큰 소리를 냈다. 그 혀가 살짝 꼬부라져 있었다. 방다병의 귀가 살짝 빨개졌다. "음, 정말 잘난 사람이기는 해요." 방다병이 무안하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정말로 이연화를 떠올렸나 보군. 적비성이 한심스러운 눈으로 그 작태를 지켜보았다. 지엽생이 안쓰럽게 쯧쯧거렸다.
"이루지 못할 마음이란 건 정말 괴롭지. 이봐요, 구 공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한번 귀장에 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귀장이요?"
방다병이 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그러나 지엽생이 더 말하기 전, 신춘광이 혀를 차며 지엽생의 팔을 툭 쳤다. 지엽생은 취한 얼굴로도 조금 멈칫하더니, 이내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방다병의 잔을 채웠다. "아니, 뭐 그런 게 있다고 들은 것도 같아서. 자, 구 공자. 술 받으시오." 적비성이 이연화와 짧은 시선을 교환했다. 쉬이 흘려보낼 수 없을 만큼 분명한 단서가 나온 참이었다. 이연화가 짐짓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장 말입니까? 저도 이야기만 들었는데, 여현에도 있었군요."
"귀장을 아나?"
월백람의 눈이 커졌다. 신춘광 역시 술이 약간 깨는 듯한 얼굴로 이연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연화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저도 들어보기만 했는지라,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귀장은 아주 부유하고 특별한 분들만이 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공자님들은 혹시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맑은 눈동자는 아주 천진한 호기심으로 반짝였으나, 적비성은 그 눈동자가 상대를 유혹하고자 내민 낚시 찌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어렵게 청한 예인이 나타낸 관심에, 세 공자가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그렇다고 봐야지."
월백람이 어색하게 더듬거렸다. 이연화가 반색하며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앉았다. "정말입니까? 어떤 곳인지요?" 월백람의 얼굴이 느슨해졌다. 이연화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던 남자는, 풀어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거기엔 없는 물건이 없지. 원하는 거라면 다 이룰 수 있고 말이야. 뭐가 필요한지 말만 하면 돼. 어때, 내가 자네를 함께 데리고 가줄까? 그럼 자네 얼굴의 흉도 고칠 수 있을지 모르는데."
과시하듯 말한 월백람이 다시 손을 들었다. 그 부주의한 손길이 면사를 스치기 전, 이연화는 전처럼 자연스러운 몸놀림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잡히지 않는 산들바람 같은 동작이었다. 멍청히 눈을 끔벅인 월백람이 다시 팔을 들기 전, 여랑이 양손을 딱 마주치곤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저도 소문만 들었는데, 역시 공자님들은 알고 계셨군요. 그 견문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거기 가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고요? 제가 바라는 것도 말입니까?"
방다병이 미끼에 걸린 물고기처럼 절박하게 물었다. 신춘광이 피식 웃으며 그 어깨를 툭 때렸다.
"얼마 전의 날 보는 것 같군. 그래, 그 음인 때문에 퍽 속을 썩이나 보오? 공자를 영영 그런 눈으로 봐주지 않을 사람인가?"
"그건...그럴지도 몰라요. 그 사람 눈에, 저는 별것 아닌 어린애로밖에 안 보이겠지요."
방다병이 시무룩하게 웅얼거리곤 술을 마셨다. 진실이 절묘히 섞인 말에, 이연화의 어깨가 움찔했다. 면사 위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적비성이 내심 코웃음을 치며 술병을 기울였다. 신춘광이 에이 소리와 함께 방다병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내가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소. 콧대 높은 음인들이 다 그렇지.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기 일쑤요. 자존심이 상하지만, 뭐 어쩌겠소? 먼저 마음을 둔 사람이 애쓸 수밖에."
"공자는 어떻게 애를 쓰셨습니까? 공자에게 누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 무슨 단서라도 좀 주시지요."
방다병이 호소하듯 조르자, 신춘광은 딱한 눈으로 방다병을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입맛을 다셨다.
"원래 이래서는 안 되는데...공자가 나와 잘 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이니 살짝 알려주리다. 여현에서는 이레에 한번씩 귀장이란 게 열리오. 여기 월 형이 얘기한 것처럼, 거기선 못 구할 게 없지. 하지만 거기 입장하려면 통행증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까진 내가 돕기 어렵겠소. 선화루를 통해야 한다고만 가르쳐줄 테니, 나머진 공자가 알아서 노력해 보시오."
신춘광이 호방하게 선심을 쓴 척 맺으며 손짓했다. 신춘광이 통행증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그 옆에 앉았던 지엽생이 허리춤을 슥 만졌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인 듯했지만, 적비성도 이연화도 그 동작을 놓치지 않았다. 이연화가 여랑을 향해 작게 눈짓하자, 여랑이 고개를 끄덕했다. 친절한 태도로 지엽생의 술잔을 채워주다, 여랑은 실수인 척 그 옷자락에 술을 부어버렸다. 지엽생이 화들짝 놀란 소리를 내자, 신춘광을 비롯한 공자들이 순간 그편을 돌아보았다. 여랑이 당황한 얼굴로 얼른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그만 실수했습니다. 귀한 술을 쏟았으니 벌해 주세요."
"이런, 옷이 젖으셨네요. 술 빛깔이 투명하여 다행입니다."
이연화가 미간을 살짝 좁히고는, 흰 소매로 지엽생의 앞섶을 닦아주었다. 다른편 손이 그 허리춤을 향했다. "아, 고맙네. 괜찮으니 자네 옷을 더 적시지 말게." 뺨을 살짝 붉히며 점잖은 척 얘기한 지엽생이, 이연화의 팔을 잡아 만류하려 들었다. 절도에 성공한 이연화가 얼른 몸을 물렸지만, 이미 상대의 손끝이 팔목을 스친 후였다. 이연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적비성은 조금 신나기까지 한 심정으로 가만히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그 손목에 닿은 손가락의 개수였다. 이연화가 약간 경직된 미소를 띠었다.
"제 볼품없는 옷가지까지 마음 써 주시다니, 정말 도량이 넓으십니다. 그 도량으로 부디 여랑 낭자의 실수도 너그러이 보아 주시지요."
"물론이지. 귀한 술이라고 해봐야 뭐 얼마나 한다고."
지엽생이 허세를 부리며 쏟아진 술병을 발로 툭 건드렸다. 여랑이 감사를 표하며 몸을 일으킨 사이, 억울한 얼굴로 지켜보던 월백람이 뒤편에서 이연화의 소매를 불쑥 잡아당겼다. "참, 자넨 내게 손끝 하나도 안 대주더니. 나도 술로 옷을 적셔야 봐줄 텐가?" 이연화의 동공이 다시 흔들렸다. -아비, 이건 옷에 닿은 거니까 아니야. 소매를 빼낸 이연화가 급히 건넸다. 전음으로 전달되기엔 퍽 하찮은 내용에, 적비성이 약을 올리듯 대꾸했다. -두 놈을 더해서, 총 손가락 다섯 개다. -아, 좀! 이연화가 대놓고 신경질을 냈다. 폭행의 구실을 얻은 적비성이 어쩐지 상쾌한 기분으로 술을 마시는 사이, 여랑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공자님들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오늘 운이 좋네요."
"우리가 운이 좋은 날이지, 귀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과 이리 술도 마시고. 그래, 구 공자. 원하는 바를 꼭 이루시길 빌겠소. 한 번뿐인 생인데, 바라는 대로 살아야지."
"감사합니다, 신 공자."
옛이야기 속의 영웅을 따라하듯 잔을 드는 신춘광을 향해, 방다병이 꽤 진실해 보이는 미소를 억지로 띠고는 인사했다. 적비성은 하룻강아지가 이제 일반적인 강아지 정도는 된 듯하다 생각하며 눈썹을 까딱했다.
술자리는 세 공자가 거의 기절하듯 취한 후에 마무리되었다. 방다병을 비롯한 네 사람 역시, 밤이 꽤 깊어서야 그들과 함께 선화루 밖으로 나왔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마신 탓에, 세 공자는 밖에서 대기하던 마차에 가까스로 올라 선화루를 떠났다. 멀어지는 마차들을 지켜보던 이연화가 여랑을 돌아보았다.
"애쓰셨습니다, 낭자. 저희는 이제 귀장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조사에 진척이 있으면 알려드리겠으니, 부디 몸을 보전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저도 뭔가 알아내면 말씀드릴 테니, 선화루에 오시면 절 찾아주십시오."
고개 숙여 인사한 여랑이 발길을 돌렸다. 여자가 선화루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마자, 방다병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온몸을 탈탈 털어댔다. 피부를 뒤덮은 벌레 떼를 떨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연화가 해괴한 눈으로 물었다. "왜 그래?" 방다병이 오수를 뒤집어쓴 개처럼 부르르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얼굴이 생리적인 혐오감으로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너무 싫었어. 냄새도 싫고, 하는 소리들은 더 싫고! 운일이가 그리도 경멸했던 이유를 알겠네. 아주 꼴불견들이야. 자기들이 무슨 여현의 황제라도 되는 것처럼 굴잖아.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그저 얕은 허세와 욕심만 가득해.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라지만, 저딴 개소리에 몇 시진씩 장단을 맞춰주자니 두드러기가 돋을 것 같았다고. 이연화, 너도 이리 와!"
드디어 자유롭게 불평하던 바른 공자님은, 이연화를 덥석 끌어당겨 그 몸을 이불 털듯이 팡팡 두드렸다. 술자리의 흔적을 죄다 날려버리려는 듯한 손길이었다. 방다병에게 붙잡혀 약간 불만족스럽게 흔들리면서도, 이연화는 자신의 소매를 뒤져 작은 패 하나를 꺼냈다. 지엽생에게서 훔쳐낸, 귀(鬼)라는 글자가 붉게 새겨진 목패였다. 적비성이 그 패를 유심히 살폈다.
"이게 귀장의 통행증인가?"
"그런 것 같아. 귀장에 대해 아는 척 떠봤는데 술술 불더군. 넌 들어본 적 있어?"
"들은 적은 없다만, 불법적인 물건을 판매하는 암시장이야 어디에나 있다. 이곳에선 귀장이라고 불리나 보지."
"네가 만나본 점원에게서 들은 건 없어? 비적단과 거래했다는 사람 말이야."
"자신은 물건을 받아 값을 치르고 지배인에게 전달할 뿐,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고 하더군."
적비성이 팔짱을 낀 채 이야기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지배인을 매달아 심문하고 싶었으나, 큰 기루의 지배인처럼 눈에 띄는 사람을 무작정 두들겼다간 배후가 구멍 속으로 숨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방다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장과 선화루에 무슨 접점이 있는 거지? 선화루에서 통행증을 준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해. 여기서 매입한 약이 귀장으로 흘러드는 건가?"
"귀장에 가보면 알겠지. 아비, 혹시 그 점원이 평소에 무슨 약을 샀는지는 알아?"
이연화가 물었다. 적비성이 선화루 쪽을 까딱 고갯짓했다.
"그놈은 몰랐지만, 지배인에게 장부가 있다고 들었어. 기루가 문을 닫으면, 무안이 잠입해 장부를 확인할 거다."
"음, 좋네. 이 통행증은 모양을 똑같이 그려놓고, 내일 선화루에 분실물로 돌려주자. 여기 귀퉁이에 작은 번호가 새겨진 걸 보니, 본인 이외의 사람이 이용하긴 어려울 거야. 귀장에 대해 소문내지 않는 대신, 귀장의 통행증을 달라고 하면 되겠어."
이연화가 나무 패를 뒤집어보고는 술술 말했다. 고개를 끄덕한 방다병이, 푹 한숨을 쉬며 신음처럼 꿍얼거렸다. "그 멍청이들 때문에 너무 많이 마셨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모습이 퍽 피로해 보였다. 그 뺨이 채 사라지지 않은 취기로 불그스름했다. "가서 쉬어, 방소보. 오늘 아주 형탐스러웠어." 이연화가 방다병의 등을 토닥이며 건넸다. 적비성이 그들을 향해 간결히 말했다.
"그럼 난 먼저 가보겠다. 있다 들르지."
"어디 가는데? 시간도 늦었잖아."
방다병이 물었다. 한쪽 입매를 슬쩍 올리고, 적비성은 이연화를 향해 빈정대듯 대꾸했다.
"자를 손가락이 있다."
"너!"
이연화가 발끈한 얼굴로 삿대질을 했다. 얄미운 냉소를 거두지 않은 채, 적비성은 땅을 박차 날아올랐다. 자칫하다간 오늘 밤 함께 자지 않겠다고 뻗댈 수도 있으니, 자르는 대신 부러뜨리는 정도로 봐줘야겠군. 자신답지 않게 참 관대한 처사라고 생각하며, 금원맹주는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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