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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6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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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종소리가 무겁게 울려퍼지자 남망기는 붓을 멈추고 흘긋 위무선에게 시선을 던졌다.
한 시진째 위무선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눈을 감은 모습도 더 이상 생소해 보이지 않았다.
삼배를 하고 혼약을 맺은 후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왔는지 위무선은 장난을 치지 않았고 게으름도 피우지 않으며 수련에 임했다.
남망기는 그와 처음 만나 수편을 받아냈을 때 느꼈던 충격을 떠올렸다. 약했던 금단이 하루가 다르게 영글어가며, 이제는 그 끝에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알 것 같았다.
남망기는 망기금을 꺼내어 부드럽게 튕기기 시작했다. 음에 영력을 실어서 수련을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현음이 몇 번 날아들어 몸에 스미자 위무선의 눈꺼풀에 실려 있던 긴장이 한결 풀리는 듯했다.
한참 후 눈을 뜬 위무선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배고파, 남잠.”
내려가는 길에는 때이른 낙엽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열심이지?”
남망기가 의심스러운 말투로 묻자 위무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내가 열심인 게 싫어? 규칙도 어기지 않고 얌전하게 지내니까 기뻐해야지, 함광군.”
“...”
남망기가 빤히 쳐다보자 위무선이 어깨를 으쓱했다.
“운심부지처에 평생을 묶여 있을 순 없잖아.”
그 말에 남망기의 얼굴이 서늘해지며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위무선은 진지하게 맞받아보는 척하다가 이내 더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또 그 얼굴! 남잠, 난 참 못됐어. 그렇게 상처받는 표정을 보면 네가 열 배는 더 좋아지거든!”
남망기가 성큼 걸음을 내딛자 위무선이 얼른 잡아세우며 말했다.
“화내지 마, 남잠.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나 사실 운심부지처를 그렇게 싫어하진 않아. 남잠 너랑 아주 잘 어울리는 곳이니까. 하지만 답답한 것도 사실이거든. 그러니까 얼른 밖으로 나가 여행을 하면서 몇 달, 아니 몇 년은 실컷 놀고 싶어. 너랑 같이 말이야. 어때, 어떻게 생각해? 함께 가 줄 거지?”
남망기는 말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위무선의 답에 굳은 마음은 풀렸지만 대낮부터 낯뜨거운 소리를 들으니 귀에 열이 올랐다.
위무선은 혀를 날름 내밀고는 남망기의 뒤를 쫓았다. 이런 때에도 바르고 곧은 등짝에 매달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꾹 참았다.
금단을 맺은 후 이 곳을 떠날 수 있게 되면, 남망기와 함께 그가 홀로 떠돌아다녔던 자취를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남망기의 아픈 발자취를 하나하나 지워나가고 싶었다. 이미 지난 과거라 해도 분명 괴로웠을 시간이 그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남망기가 말액조차 숨기고 흉시를 찾아 헤매던 시절.
그때까지 위무선은 남망기가 아무리 도와주려 해도 그 손길을 거부했고, 남망기의 선의를 오해하고, 깊은 마음을 차갑게 외면했다. 모순되게도 위무선이 곁에 없던 그 2년은 남망기가 마음껏 그를 위해 살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행복했다는 걸, 위무선은 알지 못할 것이었다.
***
밤 벌레가 고즈넉하게 울기 시작하자 남희신은 주석을 달던 책을 덮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금광요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그의 거처로 가 보니 금광요는 선물받은 향로를 앞에 둔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전에 만났던 어린 남희신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던 금광요는 진짜 남희신을 보고서야 해시가 넘은 것을 깨달았다.
향로에는 봉인 부적이 붙어 있는 상태였다.
“향로를 시험해 보려고?”
남희신은 그렇게 말하자마자 답도 듣지 않고 금광요의 뒤에 앉더니, 손을 뻗어 부적을 떼어버렸다.
당황한 금광요가 몸을 뒤틀며 빠져나가려고 하자 남희신이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쉿. 이대로 함께 들어가자꾸나.”
남희신에게 안긴데다 향로가 너무 가까이 있는 바람에 눈 앞이 어질해지며 강제로 긴장이 풀렸다.
먼저 금광요의 눈이 천천히 감겼고, 남희신이 뒤를 따랐다.
남희신의 눈앞에 익숙한 운심부지처의 풍경이 펼쳐졌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니 하얀 장포에 삭월을 들고 있어 특이점은 없었다. 그렇지만 전처럼 어려졌는지 어떤지, 그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같이 왔어야 할 금광요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찾을 수가 없어 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남희신은 부드러운 손에 잡힌 채 가만히 웃으며 ‘아요’하고 불렀다.
그러자 맑은 목소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환!”
돌아보니 이번에는 어린 금광요가 눈 앞에 있어 본 남희신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원래 어려보이는 편이긴 하지만 코 앞에 서 있는 그는 진짜로 어린 소년이었다.
고소 남씨의 흰 옷을 입고, 이마에는 단사가 아닌 권운 문양이 수놓아진 말액을 둘렀으며, 손에는 남희신의 남빛 패검을 들고 있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가며 환하게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눈이 부셨다.
금광요가 덥석 남희신의 손을 잡더니 힘을 주어 당겼다.
“어서 가자!”
“가다니, 어디로...?”
“스승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얼른 밖으로 나가야지! 오늘은 손님이 있어서 크게 신경쓰지 않으실 거야. 약속했잖아!”
남희신은 명랑한 손에 이끌려 가며 어쩔 수 없이 발이 빨라졌다.
“아요, 뛰면 안 돼.”
“넌 너무 고리타분해, 아환! 난 걷는 게 싫어! 그리고 잔소리 하는 노인네들도 싫다고!”
실쭉하게 말하는 동안에도 금광요의 볼우물은 시종 양 뺨을 떠나지 않았다. 평소 절제하던 애교는 두 배로 늘어났으며 조심성은 완전히 사라진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남희신의 가슴 속에도 아이들 같은 희열이 끓어올랐다.
금광요는 쏟아지는 햇살과 바람을 가르며 쏜살같이 뛰어내려가더니, 갑자기 멈추었다.
“아니야. 마을에는 안 갈래.”
“갑자기 왜 그래?”
어리둥절해진 남희신이 묻자 금광요는 대답 대신 검을 뽑아서 휙 날아올랐다.
“어디 가, 아요!”
“아환, 따라와! 어서!”
하는 수 없이 남희신이 삭월을 타고 오르자 금광요는 높이높이 하늘로 치솟더니 폭포수 위로 날아갔다.
곧장 그가 커다란 녹색의 못 근처로 뛰어내리자 남희신도 따라서 내려갔다.
“여기가 좋겠어.”
“뭘 하려고? 마을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
“생각해 보니 마을엔 사람이 많아서 싫어.”
“그럼 왜 가자고 했어?”
“과자를 먹고 싶었으니까. 그렇지만 됐어.”
어려진 금광요는 성격뿐 아니라 하는 짓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남희신은 금광요가 어디를 가서 뭘 하든 뒤를 따르면 그만이라 왔다갔다하는 그를 다정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나이가 어려졌더니 고운 얼굴이 둥글어지고 눈도 더 커 보였고, 입술이 도톰하여 사뭇 여자아이처럼 예뻤다. 그런 모습으로 짓궂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니 너무도 귀여워서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휘적휘적 주위를 돌아다니던 금광요가 말액의 끝을 잡아서 손가락에 돌돌 말면서 불렀다.
“아환.”
“응.”
“너 나 좋아하지.”
“물론이지.”
금광요가 사뿐사뿐 걸어와, 함께 어려져도 신장의 차이는 변함없는 남희신을 쳐다보며 애교 있게 웃었다.
“그럼 왜 나한테 아무 것도 안 해?”
아까부터 톡톡 튀는 언행으로 놀라게 하고 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찌를 줄은 몰랐던 남희신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 몰라서...”
“내 생각은 둘째치고 네 생각은 어떤데? 나 예쁘지 않아?”
“예뻐, 예쁘고말고.”
어떻게 예쁘다는 말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정면에서 이렇게 깜찍하게 굴어대니 남희신은 당장이라도 인내심이 끊어질 것 같았다.
언제나 그의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애무하는 것은, 코 앞에서 귀여운 눈을 마주했다간 참지 못하게 될까봐서였다. 금광요가 손만 닿으면 떨기 시작하는 걸 남희신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소중한 반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남희신은 기다려 줄 생각이었고,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꿈 속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남희신은 이렇게 산드러진 유혹을 더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희신이 대답 대신 손을 내밀자, 금광요는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이미 고삐가 풀려버린 남희신이 쫓아오기 시작하자 그 역시 달려서 도망을 쳤다. 두 사람은 풀밭을 지나고 물가의 바위 몇 개를 뛰어넘으며 아슬아슬하게 술래잡기를 했다. 그러던 중 금광요가 뒤를 돌아보다가 일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에 빠진 금광요를 따라서 남희신도 곧장 뛰어들었다. 헤엄은 잘 치지 못하여 허우적거리면서도 팔을 뻗어 금광요를 붙잡았더니, 별안간 남희신의 목에 덥석 매달리며 입을 맞춰왔다.
금광요는 도리질을 치듯 애교있는 몸짓으로 진하게 입술을 문지른 뒤 온통 물에 젖고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얼굴로 웃었다. 동그랗던 눈매도 촉촉하게 젖어서는 가느다랗게 스러지는 모양이 요염하게 보였다.
“아환.”
남희신이 다시 입을 맞추려 하자 물이 너무 깊어 발이 땅에 닫지 않아 자꾸만 몸이 아래로 잠겼다.
두 사람은 동시에 물 위로 솟구치는 것처럼 몸을 떨며 깨어났다.
금광요가 숨을 몰아쉬며 돌아보자 똑같이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는 현실의 남희신이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후 남희신의 양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금광요는 그만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능하다면 멀리멀리 도망을 치고 싶었지만, 남희신이 가만히 놔줄 리가 없었다.
사정을 봐 주지 않고 곧장 말을 거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자애심이 넘쳤지만, 아무래도 심술이 조금 든 것 같았다.
“아요. 내가 너를 예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느냐?”
금광요가 손으로 가린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형님! 그건,... 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사람이 민망해서 죽을 수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 금광요에게 죽음이 찾아왔어야 했다. 그는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팔을 뻗어 향로를 낚아채었다.
“장서각에 도로 갖다 놓을 겁니다! 지금 당장!”
남희신이 웃으며 향로를 빼앗더니 부적으로 봉하고 나서 말했다.
“네 말대로 재미있었는데 왜 그러느냐?”
아직도 바로 뒤에 앉아 있는 남희신은 금광요가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곧장 넓은 가슴에 안길 정도로 가까웠다.
잔뜩 움츠러들어서 고개를 외로 꼰 금광요에게, 남희신이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요, 내가 너를 안아도 되겠느냐?”
금광요는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도대체 자신은 꿈 속에서 왜 그랬을까? 저 향로는 사람의 꿈과 진심을 보여주는 물건이 아니었던가?
남희신이 끈질기게 답을 기다렸으므로 금광요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조금 전에 들었던 말이 잔잔한 물결처럼 머릿 속에 울려퍼졌다.
-예뻐, 예쁘고말고.
이까지 몰아붙이고도, 싫다고 말하기만 하면 계속 인내해 줄 같은 남희신의 눈빛이 그만 마음속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형님께서... 원하신다면...”
금광요는 간신히 입을 떼었으나 말끝을 흐리며 눈을 피했다. 그러나 남희신은 다시금 상냥하면서도 냉정하게 말했다.
“그건 대답이라고 할 수 없다.”
“형님...!”
“아요, 나는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단다. 단지 네가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하는 것 같아서 기다렸을 뿐이다.”
“...”
“아요. 내가 널 안아도 되겠느냐?”
마침내 금광요는 일신에 닥칠 모든 일을 감수할 각오를 하고 대답했다.
“...예. 형님.”
그러자 시련은 일각도 기다리지 않고 찾아왔다.
남희신이 말했다.
“그러면,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네 손으로 나를 안고 입맞춤해 다오.”
금광요는 입을 벌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 편을 바라보는 남희신의 눈빛은 뜻밖에 기대와 강압감으로 가득했다.
“눈을... 감아 주시면...”
금광요는 우물우물 말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 보니 남희신이 눈을 감고 있었다.
금광요는 그가 갑자기 눈을 뜨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도 그의 어깨에 어색하게 손을 올렸다. 그리고 몸을 숙여 떨리는 입술을 그의 입술에 살짝 갖다대었다.
어린애의 것처럼 가볍고 짧은 접촉에도 남희신은 불평하지 않았고, 다른 행위를 덧붙이지도 않았다.
“돌아가자.”
그렇게 말한 그가 금광요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종소리가 무겁게 울려퍼지자 남망기는 붓을 멈추고 흘긋 위무선에게 시선을 던졌다.
한 시진째 위무선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눈을 감은 모습도 더 이상 생소해 보이지 않았다.
삼배를 하고 혼약을 맺은 후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왔는지 위무선은 장난을 치지 않았고 게으름도 피우지 않으며 수련에 임했다.
남망기는 그와 처음 만나 수편을 받아냈을 때 느꼈던 충격을 떠올렸다. 약했던 금단이 하루가 다르게 영글어가며, 이제는 그 끝에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알 것 같았다.
남망기는 망기금을 꺼내어 부드럽게 튕기기 시작했다. 음에 영력을 실어서 수련을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현음이 몇 번 날아들어 몸에 스미자 위무선의 눈꺼풀에 실려 있던 긴장이 한결 풀리는 듯했다.
한참 후 눈을 뜬 위무선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배고파, 남잠.”
내려가는 길에는 때이른 낙엽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열심이지?”
남망기가 의심스러운 말투로 묻자 위무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내가 열심인 게 싫어? 규칙도 어기지 않고 얌전하게 지내니까 기뻐해야지, 함광군.”
“...”
남망기가 빤히 쳐다보자 위무선이 어깨를 으쓱했다.
“운심부지처에 평생을 묶여 있을 순 없잖아.”
그 말에 남망기의 얼굴이 서늘해지며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위무선은 진지하게 맞받아보는 척하다가 이내 더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또 그 얼굴! 남잠, 난 참 못됐어. 그렇게 상처받는 표정을 보면 네가 열 배는 더 좋아지거든!”
남망기가 성큼 걸음을 내딛자 위무선이 얼른 잡아세우며 말했다.
“화내지 마, 남잠.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나 사실 운심부지처를 그렇게 싫어하진 않아. 남잠 너랑 아주 잘 어울리는 곳이니까. 하지만 답답한 것도 사실이거든. 그러니까 얼른 밖으로 나가 여행을 하면서 몇 달, 아니 몇 년은 실컷 놀고 싶어. 너랑 같이 말이야. 어때, 어떻게 생각해? 함께 가 줄 거지?”
남망기는 말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위무선의 답에 굳은 마음은 풀렸지만 대낮부터 낯뜨거운 소리를 들으니 귀에 열이 올랐다.
위무선은 혀를 날름 내밀고는 남망기의 뒤를 쫓았다. 이런 때에도 바르고 곧은 등짝에 매달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꾹 참았다.
금단을 맺은 후 이 곳을 떠날 수 있게 되면, 남망기와 함께 그가 홀로 떠돌아다녔던 자취를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남망기의 아픈 발자취를 하나하나 지워나가고 싶었다. 이미 지난 과거라 해도 분명 괴로웠을 시간이 그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남망기가 말액조차 숨기고 흉시를 찾아 헤매던 시절.
그때까지 위무선은 남망기가 아무리 도와주려 해도 그 손길을 거부했고, 남망기의 선의를 오해하고, 깊은 마음을 차갑게 외면했다. 모순되게도 위무선이 곁에 없던 그 2년은 남망기가 마음껏 그를 위해 살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행복했다는 걸, 위무선은 알지 못할 것이었다.
***
밤 벌레가 고즈넉하게 울기 시작하자 남희신은 주석을 달던 책을 덮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금광요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그의 거처로 가 보니 금광요는 선물받은 향로를 앞에 둔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전에 만났던 어린 남희신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던 금광요는 진짜 남희신을 보고서야 해시가 넘은 것을 깨달았다.
향로에는 봉인 부적이 붙어 있는 상태였다.
“향로를 시험해 보려고?”
남희신은 그렇게 말하자마자 답도 듣지 않고 금광요의 뒤에 앉더니, 손을 뻗어 부적을 떼어버렸다.
당황한 금광요가 몸을 뒤틀며 빠져나가려고 하자 남희신이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쉿. 이대로 함께 들어가자꾸나.”
남희신에게 안긴데다 향로가 너무 가까이 있는 바람에 눈 앞이 어질해지며 강제로 긴장이 풀렸다.
먼저 금광요의 눈이 천천히 감겼고, 남희신이 뒤를 따랐다.
남희신의 눈앞에 익숙한 운심부지처의 풍경이 펼쳐졌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니 하얀 장포에 삭월을 들고 있어 특이점은 없었다. 그렇지만 전처럼 어려졌는지 어떤지, 그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같이 왔어야 할 금광요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찾을 수가 없어 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남희신은 부드러운 손에 잡힌 채 가만히 웃으며 ‘아요’하고 불렀다.
그러자 맑은 목소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환!”
돌아보니 이번에는 어린 금광요가 눈 앞에 있어 본 남희신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원래 어려보이는 편이긴 하지만 코 앞에 서 있는 그는 진짜로 어린 소년이었다.
고소 남씨의 흰 옷을 입고, 이마에는 단사가 아닌 권운 문양이 수놓아진 말액을 둘렀으며, 손에는 남희신의 남빛 패검을 들고 있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가며 환하게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눈이 부셨다.
금광요가 덥석 남희신의 손을 잡더니 힘을 주어 당겼다.
“어서 가자!”
“가다니, 어디로...?”
“스승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얼른 밖으로 나가야지! 오늘은 손님이 있어서 크게 신경쓰지 않으실 거야. 약속했잖아!”
남희신은 명랑한 손에 이끌려 가며 어쩔 수 없이 발이 빨라졌다.
“아요, 뛰면 안 돼.”
“넌 너무 고리타분해, 아환! 난 걷는 게 싫어! 그리고 잔소리 하는 노인네들도 싫다고!”
실쭉하게 말하는 동안에도 금광요의 볼우물은 시종 양 뺨을 떠나지 않았다. 평소 절제하던 애교는 두 배로 늘어났으며 조심성은 완전히 사라진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남희신의 가슴 속에도 아이들 같은 희열이 끓어올랐다.
금광요는 쏟아지는 햇살과 바람을 가르며 쏜살같이 뛰어내려가더니, 갑자기 멈추었다.
“아니야. 마을에는 안 갈래.”
“갑자기 왜 그래?”
어리둥절해진 남희신이 묻자 금광요는 대답 대신 검을 뽑아서 휙 날아올랐다.
“어디 가, 아요!”
“아환, 따라와! 어서!”
하는 수 없이 남희신이 삭월을 타고 오르자 금광요는 높이높이 하늘로 치솟더니 폭포수 위로 날아갔다.
곧장 그가 커다란 녹색의 못 근처로 뛰어내리자 남희신도 따라서 내려갔다.
“여기가 좋겠어.”
“뭘 하려고? 마을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
“생각해 보니 마을엔 사람이 많아서 싫어.”
“그럼 왜 가자고 했어?”
“과자를 먹고 싶었으니까. 그렇지만 됐어.”
어려진 금광요는 성격뿐 아니라 하는 짓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남희신은 금광요가 어디를 가서 뭘 하든 뒤를 따르면 그만이라 왔다갔다하는 그를 다정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나이가 어려졌더니 고운 얼굴이 둥글어지고 눈도 더 커 보였고, 입술이 도톰하여 사뭇 여자아이처럼 예뻤다. 그런 모습으로 짓궂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니 너무도 귀여워서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휘적휘적 주위를 돌아다니던 금광요가 말액의 끝을 잡아서 손가락에 돌돌 말면서 불렀다.
“아환.”
“응.”
“너 나 좋아하지.”
“물론이지.”
금광요가 사뿐사뿐 걸어와, 함께 어려져도 신장의 차이는 변함없는 남희신을 쳐다보며 애교 있게 웃었다.
“그럼 왜 나한테 아무 것도 안 해?”
아까부터 톡톡 튀는 언행으로 놀라게 하고 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찌를 줄은 몰랐던 남희신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 몰라서...”
“내 생각은 둘째치고 네 생각은 어떤데? 나 예쁘지 않아?”
“예뻐, 예쁘고말고.”
어떻게 예쁘다는 말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정면에서 이렇게 깜찍하게 굴어대니 남희신은 당장이라도 인내심이 끊어질 것 같았다.
언제나 그의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애무하는 것은, 코 앞에서 귀여운 눈을 마주했다간 참지 못하게 될까봐서였다. 금광요가 손만 닿으면 떨기 시작하는 걸 남희신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소중한 반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남희신은 기다려 줄 생각이었고,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꿈 속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남희신은 이렇게 산드러진 유혹을 더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희신이 대답 대신 손을 내밀자, 금광요는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이미 고삐가 풀려버린 남희신이 쫓아오기 시작하자 그 역시 달려서 도망을 쳤다. 두 사람은 풀밭을 지나고 물가의 바위 몇 개를 뛰어넘으며 아슬아슬하게 술래잡기를 했다. 그러던 중 금광요가 뒤를 돌아보다가 일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에 빠진 금광요를 따라서 남희신도 곧장 뛰어들었다. 헤엄은 잘 치지 못하여 허우적거리면서도 팔을 뻗어 금광요를 붙잡았더니, 별안간 남희신의 목에 덥석 매달리며 입을 맞춰왔다.
금광요는 도리질을 치듯 애교있는 몸짓으로 진하게 입술을 문지른 뒤 온통 물에 젖고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얼굴로 웃었다. 동그랗던 눈매도 촉촉하게 젖어서는 가느다랗게 스러지는 모양이 요염하게 보였다.
“아환.”
남희신이 다시 입을 맞추려 하자 물이 너무 깊어 발이 땅에 닫지 않아 자꾸만 몸이 아래로 잠겼다.
두 사람은 동시에 물 위로 솟구치는 것처럼 몸을 떨며 깨어났다.
금광요가 숨을 몰아쉬며 돌아보자 똑같이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는 현실의 남희신이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후 남희신의 양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금광요는 그만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능하다면 멀리멀리 도망을 치고 싶었지만, 남희신이 가만히 놔줄 리가 없었다.
사정을 봐 주지 않고 곧장 말을 거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자애심이 넘쳤지만, 아무래도 심술이 조금 든 것 같았다.
“아요. 내가 너를 예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느냐?”
금광요가 손으로 가린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형님! 그건,... 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사람이 민망해서 죽을 수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 금광요에게 죽음이 찾아왔어야 했다. 그는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팔을 뻗어 향로를 낚아채었다.
“장서각에 도로 갖다 놓을 겁니다! 지금 당장!”
남희신이 웃으며 향로를 빼앗더니 부적으로 봉하고 나서 말했다.
“네 말대로 재미있었는데 왜 그러느냐?”
아직도 바로 뒤에 앉아 있는 남희신은 금광요가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곧장 넓은 가슴에 안길 정도로 가까웠다.
잔뜩 움츠러들어서 고개를 외로 꼰 금광요에게, 남희신이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요, 내가 너를 안아도 되겠느냐?”
금광요는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도대체 자신은 꿈 속에서 왜 그랬을까? 저 향로는 사람의 꿈과 진심을 보여주는 물건이 아니었던가?
남희신이 끈질기게 답을 기다렸으므로 금광요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조금 전에 들었던 말이 잔잔한 물결처럼 머릿 속에 울려퍼졌다.
-예뻐, 예쁘고말고.
이까지 몰아붙이고도, 싫다고 말하기만 하면 계속 인내해 줄 같은 남희신의 눈빛이 그만 마음속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형님께서... 원하신다면...”
금광요는 간신히 입을 떼었으나 말끝을 흐리며 눈을 피했다. 그러나 남희신은 다시금 상냥하면서도 냉정하게 말했다.
“그건 대답이라고 할 수 없다.”
“형님...!”
“아요, 나는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단다. 단지 네가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하는 것 같아서 기다렸을 뿐이다.”
“...”
“아요. 내가 널 안아도 되겠느냐?”
마침내 금광요는 일신에 닥칠 모든 일을 감수할 각오를 하고 대답했다.
“...예. 형님.”
그러자 시련은 일각도 기다리지 않고 찾아왔다.
남희신이 말했다.
“그러면,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네 손으로 나를 안고 입맞춤해 다오.”
금광요는 입을 벌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 편을 바라보는 남희신의 눈빛은 뜻밖에 기대와 강압감으로 가득했다.
“눈을... 감아 주시면...”
금광요는 우물우물 말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 보니 남희신이 눈을 감고 있었다.
금광요는 그가 갑자기 눈을 뜨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도 그의 어깨에 어색하게 손을 올렸다. 그리고 몸을 숙여 떨리는 입술을 그의 입술에 살짝 갖다대었다.
어린애의 것처럼 가볍고 짧은 접촉에도 남희신은 불평하지 않았고, 다른 행위를 덧붙이지도 않았다.
“돌아가자.”
그렇게 말한 그가 금광요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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