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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6 00:04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의원님, 정말 의원님이세요?"
이연화의 '교육'을 맡았던 계양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이연화가 면사 아래에서 빙긋 웃었다.
"물론이지요. 소싯적에 앞으로 뭘 해먹고 살지 몰라, 이것저것 조금씩 배워둔 게 도움이 되네요."
"뭘 해먹고 살지 모른다니요, 의원 일이 지겨워지면 춤을 업으로 하셔도 되겠어요. 어쩜 딱 한 번 보여드린 걸 이렇게 다 기억하세요?"
계양이 진실한 호들갑을 떨며 손 안의 검을 휙휙 휘둘렀다. 비록 이미 앞부분의 동작을 흠 없이 재현하여 설약에게 옷을 갈아입고 나머지 동작을 배워보라 승낙을 받기는 했으나, 꽤 길고 복잡한 후반부까지 단번에 해내리라 짐작하지는 못한 듯했다. 이연화가 손을 내저으며 엄살 피우는 소리를 냈다. "워낙 어려운 춤이라,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얼마나 집중했는지 아십니까?" 손이며 팔목에 달린 황금 장식들이 짤랑거렸다. 아무래도 거슬리는 장신구들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계양이 웃었다.
"그야 어렵긴 하죠, 설약 언니가 이 춤을 고안하느라 얼마나 애썼는데요. 아, 하지만 마지막 가르침은 정말 까다로울걸요. 있다 무대에 나가면, 무대 주변뿐 아니라 선화루 전체에 군데군데 장식된 금색 꽃가지들이 보일 거예요. 칼끝이 바깥을 향하면서 멈출 때, 자신의 방위에 있는 꽃을 향해 바람을 날리시면 돼요. 내력을 아주 살짝만 보내도 되니까, 초반에 너무 소진되지 않도록 조심하시고요. 그럼 꽃들이 봄에 피어난 것처럼 열려 흔들리거든요. 되게 예뻐요. 꽃가지 하나를 드릴 테니 있다 미리 연습해 보세요. "
계양이 약간 흥분한 얼굴로 떠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연화가 한편을 힐끗 보았다. 그곳에는 설약만큼 키가 크지만, 한결 호리호리한 체형의 무희가 앉아 있었다. 그 사람 하나만이 줄곧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고, 그저 거울을 바라보며 칼자루를 쓰다듬던 참이었다. 이연화가 처음 들어왔을 때 구석에서 치장하던 사람이었다. 이연화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저 낭자가 여랑 낭자입니까?"
"맞아요, 우리 중에 제일 춤을 잘 추는 언니예요. 있다 여랑 언니가 천장에 매단 끈을 타고 이런저런 춤을 출 거예요. 여랑 언니를 보려고 일부러 멀리까지 오시는 손님들도 많아요."
"저만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는데, 몸이 조금 안 좋아 보이네요. 치장하여 가리기는 했으나 안색도 매우 창백한 것이, 오래도록 심병을 앓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연화가 걱정스레 소곤거리자, 계양의 얼굴이 흐려졌다. 여랑을 힐끗 본 여자가 소곤거렸다.
"그...얼마 전에, 아유가 죽은 후부터 저렇게 됐어요. 여랑 언니는 아유의 친언니거든요."
"아. 아유 낭자 일이라면 객잔에서 잠깐 이야기를 듣기는 했습니다. 불미스러운 사고를 당해...."
이연화가 삼가는 투로 말을 흐렸다. 계양이 푹 한숨을 쉬었다. "주 공자는 아무 벌도 받지 않았어요. 우리보다 훨씬 있는 집 자식이고, 아유의 증언 외에는 별다른 증좌도 없었다니 그럴 법도 하지만...아무리 그래도, 죽음으로 호소했는데 재심조차 해주지 않은 관아도 너무해요." 말을 맺은 여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연화가 뭐라 더 묻기 전, 설약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가득했다.
"멀리서 계속 지켜봤어요. 재능이 대단하던데요."
"과찬이십니다. 계양 낭자가 잘 가르쳐주신 덕이지요."
"나가기 전에 여기서 한 번 합을 맞춰볼 거예요. 이번 무대만 무사히 넘기면, 당신이 우리에게 묻고 싶은 건 뭐든지 물어도 좋아요. 어떤 질문이든, 아는 한도 내에서는 솔직히 대답해 드리지요."
설약이 의미심장하게 힘주어 맺었다. 이연화가 이 거래를 제안한 시점부터, 설약은 의원의 질문이 퍽 불편한 내용일지 모른다고 짐작한 듯했다. 짧은 감사를 표하고, 이연화는 힐끗 시선을 돌려 여랑을 일별했다. 면사 아래의 표정을 짐작할 수는 없었으나, 여랑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면서도 단호했다. 이연화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손톱 밑에 작은 가시가 들어온 것처럼 찜찜했다.
-
방다병은 이연화를 찾고 있었다.
그저 이연화가 보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아니, 요새 늘 보고 싶긴 했지만. 잠깐, 나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방다병이 고개를 휘휘 가로젓고는 집중하고자 애썼다. 돌아본 시선 끝에는, 한 청년이 뚱한 표정을 한 채 다른 공자 셋과 함께 앉아 있었다. 사람들에 의하면, 그 뚱한 얼굴의 공자가 바로 신춘광이었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했으나, 눈빛이 다소 흐리며 자세가 똑바르지 못해 그리 믿음직한 인상을 주지 않았다. 남자가 한숨을 푹 쉬며 술을 마시자, 옆에 있던 친구가 위로하듯 건넸다.
"참, 자네도 고생이야. 방 공자는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군. 이미 생긴 각인인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거부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내 말이. 서신도 몇 차례 보내고, 사람을 보내 설득도 해보았는데 아직까지 영 소식이 없어."
신춘광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 투덜거렸다. 마치 자신이 퍽 불필요한 불편을 겪고 있다 말하는 듯한 태도에,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가능하면 신춘광의 대화를 함께 엿듣고 접근 방식을 논의하기 위해 이연화를 재차 눈으로 찾았으나, 상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모여 앉은 공자들 중 하나가 신춘광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방 공자가 겉으론 여려 보여도 은근히 고집 있는 성격이긴 하지. 좀 기다려 봐, 오히려 그런 점이 더 좋다고 했었잖아."
"그야 그렇지만...."
신춘광이 말을 흐렸다.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남자는 친구에게 몸을 기울여 귓속말을 건넸다. 방다병이 미간을 찌푸렸다. 워낙 소란한 기루 안이라, 그 작은 목소리를 정확히 판별하기가 어려웠다. 신춘광의 친구가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효능은 늘 확실했잖아."
"하지만 결과가 이상하잖아. 전에 주씨네 아들 때도 그렇고-."
"쉿, 쉿. 그 이야기는 춤 구경이 끝난 다음에 안에서 하자고."
친구가 입술 앞에 손가락을 펴 대면서 별실 쪽을 고갯짓했다. 주씨네 아들? 눈썹을 찌푸리는 방다병의 앞으로, 선화루의 점원이 총총 다가와 장삿속 가득한 미소를 띤 채 건넸다.
"처음 뵙는 공자님인데, 한눈에도 귀한 댁 공자님인 것을 알겠습니다. 어찌 혼자 앉아 계십니까? 선화루에는 최상급 음인들밖에 없답니다, 원하신다면 취미를 맞추어 아이를 붙여드릴 수도 있어요. 어떤 취향이신지 말씀만 해주시면-."
"그럴 생각 없소."
방다병이 딱 잘랐다. 설령 신춘광에게 집중하는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기루에서 잘 알지 못하는 음인과 함께 술을 마실 마음은 없었다. 그런 경험은 옥루춘에게 불려갔던 때로 충분했으며, 결코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점원이 잠시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뭣하러 선화루에 오는지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방다병이 얼른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난 각인한 음인이 있소. 이곳의 공연 수준이 높다기에 보러 왔을 뿐이지."
"아아, 그러셨군요. 공자와 각인한 음인은 참 행복하겠습니다."
찰나 동안 '각인한 음인이 있는 게 무슨 상관이지?' 하는 표정을 지었던 남자가, 이내 눈웃음을 지으며 아부하듯 말했다. 이연화가 지금 나와 각인해서 행복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청년이 잠시 시무룩한 심정을 추스르는 사이, 점원은 무대를 가리키고는 양손을 가볍게 마주잡았다.
"공자. 그러면 더 좋은 곳에서 공연을 보시는 건 어떨지요? 오늘은 선화루가 자랑하는 무용수들이 공연하는 날인데 말입니다. 지금 드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술이지만, 한층 귀한 분을 위한 술과 함께하신다면 공연이 더 특별해질 겁니다. 어떻습니까? 의향이 있으시다면 자리를 알아봐 드리지요."
비싼 술을 마시면 좋은 자리를 내주겠다는 거로군. 방다병이 내심 코웃음을 쳤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고 말하려다, 방다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신춘광과 그 친구들이 무대에 가까운 쪽으로 자리를 옮기려던 참이었다. "좋아요, 뭐든 알아서 주시오." 방다병이 얼른 말하자, 점원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는 호들갑스럽게 방다병을 인도했다. 최대한 신춘광과 가까운 자리를 골라 앉자, 무대 위의 천장에 고정되어 늘어진 고리가 보였다. 얇고 반짝이는 천을 몇 겹씩 포개어 만든, 아름다운 끈으로 된 고리였다. 점원이 비취색 술병을 방다병의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오늘 아주 운이 좋으십니다. 있다 여랑이 저 끈을 타고 춤을 출 텐데, 그 모습이 마치 구름을 타고 노는 신선이나 선녀 같지요."
"끈이 하늘거리는 게 그리 튼튼해 보이지 않는데, 사람의 몸을 잘 지탱합니까?"
"에이, 공자. 저 끈은 겉보기에나 저렇지, 이역만리에서 수입한 천을 가지고 대희국 장인들이 요술을 부린 옷감입니다. 웬만한 창칼로 뚫거나 베어내지 못할 만큼 단단하고 질겨서, 사람 열의 무게도 너끈히 지탱할 수 있지요."
점원이 웃으며 설명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 일단의 무용수들이 무대로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붉고 얇은 옷을 겹겹이 차려입어, 마치 몸 주변에 붉은빛 물결이나 불길이 흐르는 듯했다. 사람들이 큰 소리로 반기며 환호했다. 방다병은 그편을 바라보면서도 신춘광 쪽에 귀를 열어두었다. 자신의 목적은 조사였지, 공연 관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 기이한 광경을 본 순간, 방다병은 본래의 목적을 잠시나마 까맣게 잊어버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용수들은 모두 칼을 지니고 있었다. 검무야 흔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무용수들이 칼을 뽑은 다음 시작 자세를 취하기 전까지의 공백이었다. 무대에 별 문제가 없단 사실을 확인하는 짧은 시간 동안, 무용수들은 각자 편안한 방식으로 칼을 들었다. 그리고 개중 단 한 사람이, 칼을 등 뒤편으로 올려 든 채 서 있었다. 방다병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했다. 설마, 아닐 거야. 그래, 세상에 같은 습관을 가진 사람이 어디 하나뿐이겠어? 방다병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붉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무용수는, 무대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방다병과 눈이 마주쳤다.
머쓱하게 눈가를 만지며 시선을 피하는 반응에, 방다병은 그만 입을 떡 벌렸다. 네가 왜 거기 있어! 왜 그런 차림이야?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고함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으나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경악하다 못해 불행해진 방다병을 내버려두고, 무용수들은 원을 만들며 준비 자세를 취했다. 무대 근처에 자리잡은 악공들 중 하나가 현을 퉁기자, 원 가운데에서 피어오르는 꽃처럼 한 무희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그 무용수는 빛나는 고리를 잡고 천천히 몸을 끌어올려, 마치 구름을 잡은 신선처럼 그 위에 똑바로 섰다. 몇몇 이가 여랑의 이름을 불렀다.
여랑이 끈 위에서 춤추며 칼을 내지르거나, 아슬아슬한 자세로 끈에 걸쳐질 때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신 쪽의 꽃을 피워달라며 난리였다. 방다병은 그제야 기루 곳곳에 화려하게 장식된 금빛 꽃가지의 쓰임새를 알았다. 무용수들이 한 방향을 바라보며 멋드러진 자세를 취하면, 그 칼끝이 향한 꽃송이가 봄을 맞은 것처럼 살짝살짝 열렸다가 닫혔다. 방다병의 눈이 새삼스러워졌다. 비록 무공보다는 기예에 가까웠으나, 내력을 쓸 줄 아는 무용단은 방다병도 처음 보는 탓이었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여랑에게 쏠려 있었으나, 방다병은 처음부터 줄곧 한 사람밖에 바라보지 못했다. 긴 머리칼과 붉은 옷이 너풀거렸고, 금빛 장식이 어지럽게 반짝였다. 아무리 춤을 위해 만들어진 세검이라 해도, 그 손에 들린 순간 천하의 명검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움직임은 참으로 깔끔하고도 담백하여, 춤임에도 마치 절세 무공의 일면을 엿보는 듯했다. 방다병의 눈에는 가장 빛나면서도 아름다운 춤사위였다. 내 각인 상대라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아니면 그가 이연화이기 때문에? 붉은 끈을 칼에 매고 지붕 위에서 춤을 출 때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어쩐지 초조해진 방다병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연화는 저기서 뭐 하는 거냐?"
옆자리에서 난데없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을 때, 방다병은 악 소리를 삼키며 돌아보았다. 어느새 방다병의 곁에 앉은 적비성이, 팔짱을 낀 채 무대를 쏘아보고 있었다. 방다병은 상대의 불쾌한 표정에 매우 전적으로 공감하며 투덜거렸다.
"내가 어떻게 알아? 신춘광을 감시하는데 갑자기 저기서 나타나지 않겠어."
"하루라도 허튼짓을 안 하면 어디에 가시가 돋나 보군. 혼자 돌아다니게 두질 말았어야 했는데."
"내 말이. 다음부턴 그냥 옆에 붙어 다녀야겠어. 물론 이연화는 강하지만 말이야, 내 말은-."
"이건 그것과 다른 문제야. 뭣하러 담글 필요 없는 똥통에 발을 담그지?"
'똥통'이라는 말을 하며, 적비성은 경멸스러운 눈으로 기루 안의 사람들을 쭉 훑어보았다. 방다병이 격하게 끄덕였다. 드물게도, 타인을 싸잡아 폄하하는 모양새를 타박하고픈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맞아, 이연화는 너무 조심성이 없다니까." 어쩐지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으로 맞장구를 치자, 적비성이 이상한 표정을 지은 채 방다병을 힐끗 보았다. "뭐야, 왜 그래?" 방다병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물었다. 적비성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너 같은 애송이와 의견이 일치하는 게 별로 달갑진 않다."
"나도 마찬가지거든! 너 같은 대마두와 의견이 똑같은 게 좋을 줄 알아?"
방다병이 발끈해 받았다. 그때 주변 사람들이 탄성을 올렸다. 여랑이 끈으로 된 고리에 다리를 건 채 거꾸로 매달려 아름다운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도 저 자리가 아닌 게 어디야." 방다병이 스스로를 억지로 안심시키듯 중얼거렸다. 여랑의 위치에 이연화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니 괜시리 소름이 끼쳤다. 가짜 혼사를 치르면서 이런 상황에는 꽤 면역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장소가 너무 좋지 않았다. 이곳을 채운 이들의 반절 이상은, 아마도 바르지 못한 마음을 가진 망나니들일 터였다.
"지금 멈췄던 무용수 봤지? 여랑 말고, 저기 아래쪽에 말이야. 저런 애가 있었나?"
"아니, 나는 처음 보는데...잘 추네. 아유의 후임인가? 미인일 것 같지 않아?"
신춘광과 그 일당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을 때, 방다병은 그만 손에 들었던 술잔을 놓칠 뻔했다. 제발, 이연화. 좀 평범하게 보이면 안 되겠어? 저런 놈들이 너에 대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싶진 않단 말이야. 피눈물을 흘리듯 생각하며, 방다병은 가득 채운 술잔을 훌쩍 비워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천하제일인이 되는 일에 비하면, 처음 보는 춤을 완벽하게 익히는 일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명필은 획 하나만 긋더라도 티가 나는 법이었으니, 사람들이 그의 비범함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쩌겠어, 이연화는 너무 잘난 사람인걸. 방다병이 턱을 괴었다. 이연화든 이상이든, 한 곳에 멈추어 있으면 결국은 누군가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연화를 찬양하거나 존중하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관심 속에는 늘 음험한 악의와 욕망이 함께하여, 여차하는 순간 이연화를 깊은 구덩이 안으로 끌어내리려 들었다. 역시 내가 더 강해져야겠어. 방다병이 속으로 결심했다. 만인책의 순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언젠가는 적비성이나 이연화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면, 이연화가 언젠가 또 위험한 불구덩이로 뛰어들더라도 더 든든하게 그 등을 지킬 수 있을 터였다.
비록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 한숨을 삼키며, 방다병은 착잡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홀린 듯 무대를 지켜보았다. 이연화를 비롯한 무용수들은 절도 있게 뛰어오르거나, 앉거나 휘돌면서 미려한 동선을 그려냈다. 여러 자루의 검이 홱홱 파공음을 낼 때마다, 기루를 장식한 금색 꽃들이 파르르 피었다가 닫혔다. 점점 빨라지는 음악도 흥겹지만 경박하거나 과하지 않아, 무대는 참으로 신비롭게 들뜨면서도 황홀했다. 사람들이 연신 환성을 질렀다.
다른 이들처럼 공연에 집중하다가, 방다병은 순간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눈을 깜박였다. 음악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참이었고, 무용수들도 한층 현란하게 움직이는 참이었다. 위화감의 진원지를 찾던 방다병의 시선이 한 점에 집중되었다. 그 끝에는 여랑이 있었다. 지금까지와 비슷하게 유려하면서도 쾌속한 동작을 선보이고 있었으나, 여랑의 집중도는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어깨가 지나치게 들먹이고 있었다. 단지 공연 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얕고 빠른 숨이었다.
"여랑 낭자가...무슨 짓을 하려는 참인가?"
방다병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음악의 박자는 계속 빨라졌고, 무용수들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사람들은 멋진 마지막을 기대하며 박수를 치거나 환호했다. 하지만 방다병의 시선은 여랑의 모습에 꽂혀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금방이라도 무슨 사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음악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여랑은 눈을 질끈 감으며 도약해 칼을 들었다. 그 칼끝이 향하는 지점을 직감한 방다병의 입이 딱 벌어졌다. 여랑은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목숨을 끊으려는 참이었다.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방다병이 자리를 박차고 날아들기 전, 이연화가 움직였다.
여랑과 같은 높이로 단숨에 훌쩍 뛰어올라, 이연화는 검을 쥔 여랑의 팔목을 부드럽게 잡아 위로 밀었다.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마치 미리 합의된 듯 매끄러운 동작이었다. 두 사람의 몸이 춤의 일부처럼 허공에서 휘돌았다. 붉게 넘실대는 옷자락이 사람들의 눈을 현혹한 사이, 이연화의 검이 희뜩 빛을 발하며 큰 원을 그렸다. 고수가 아니라면 제대로 볼 수도 없을 만큼 강하고 빠른 검격에, 여랑의 몸을 지탱하던 고리가 허상처럼 끊어졌다. 반짝이는 천이 너울거리며 넓게 펼쳐져, 땅에 내려서는 이연화와 여랑을 휘감아 덮었다. 두 무용수의 몸이 그 천에 완전히 가려졌을 때, 이연화의 검격에서 터진 검풍이 한 발짝 늦게 기루 안을 휩쓸었다. 방다병이 얼굴로 작은 바람을 느낀 순간, 기루 안의 모든 꽃가지가 일제히 터지듯 피었다.
음악이 뚝 끝나고, 장내가 잠시 고요해졌다. 무용단의 공연을 여러 번 보았던 사람들도, 이런 광경은 처음인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연화와 여랑을 제외한 무용수들은, 공연을 시작할 때처럼 원을 그리고 섰다. 조금 당혹한 눈치였지만, 그들은 몸에 익은 대로 천연덕스럽게 마지막 자세를 취하며 춤을 마무리했다. 잠시 후 꽃송이들이 다시 닫힌 후에야, 사람들은 높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정신없이 훌륭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마지막 동작을 보았소? 누가 한 거지? 여랑이었나? 아니면 그 새로 온 사람이었나?"
"누구였든 굉장히 훌륭했소! 마치 신선끼리 재회하는 듯한 마지막이었어."
"마지막엔 정말...선경에 있는 꽃밭을 보고 온 듯했네. 황궁 근처에서도 이런 구경을 한 기억은 없는데."
"아유 일로 걱정했는데, 이런 수를 준비하고 있었군. 역시 설약 낭자는 대단해."
물론 방다병은 전혀 환호할 수 없었다. 손바닥이 살짝 축축해져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방다병은 천 아래에서 겨우 모습을 드러낸 여랑과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천 아래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여랑은 붉어진 눈으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는 다른 무용수들에 앞장서서 무대를 빠져나갔다. 방다병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비성 역시 굳은 얼굴로 함께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의원님, 정말 의원님이세요?"
이연화의 '교육'을 맡았던 계양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이연화가 면사 아래에서 빙긋 웃었다.
"물론이지요. 소싯적에 앞으로 뭘 해먹고 살지 몰라, 이것저것 조금씩 배워둔 게 도움이 되네요."
"뭘 해먹고 살지 모른다니요, 의원 일이 지겨워지면 춤을 업으로 하셔도 되겠어요. 어쩜 딱 한 번 보여드린 걸 이렇게 다 기억하세요?"
계양이 진실한 호들갑을 떨며 손 안의 검을 휙휙 휘둘렀다. 비록 이미 앞부분의 동작을 흠 없이 재현하여 설약에게 옷을 갈아입고 나머지 동작을 배워보라 승낙을 받기는 했으나, 꽤 길고 복잡한 후반부까지 단번에 해내리라 짐작하지는 못한 듯했다. 이연화가 손을 내저으며 엄살 피우는 소리를 냈다. "워낙 어려운 춤이라,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얼마나 집중했는지 아십니까?" 손이며 팔목에 달린 황금 장식들이 짤랑거렸다. 아무래도 거슬리는 장신구들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계양이 웃었다.
"그야 어렵긴 하죠, 설약 언니가 이 춤을 고안하느라 얼마나 애썼는데요. 아, 하지만 마지막 가르침은 정말 까다로울걸요. 있다 무대에 나가면, 무대 주변뿐 아니라 선화루 전체에 군데군데 장식된 금색 꽃가지들이 보일 거예요. 칼끝이 바깥을 향하면서 멈출 때, 자신의 방위에 있는 꽃을 향해 바람을 날리시면 돼요. 내력을 아주 살짝만 보내도 되니까, 초반에 너무 소진되지 않도록 조심하시고요. 그럼 꽃들이 봄에 피어난 것처럼 열려 흔들리거든요. 되게 예뻐요. 꽃가지 하나를 드릴 테니 있다 미리 연습해 보세요. "
계양이 약간 흥분한 얼굴로 떠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연화가 한편을 힐끗 보았다. 그곳에는 설약만큼 키가 크지만, 한결 호리호리한 체형의 무희가 앉아 있었다. 그 사람 하나만이 줄곧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고, 그저 거울을 바라보며 칼자루를 쓰다듬던 참이었다. 이연화가 처음 들어왔을 때 구석에서 치장하던 사람이었다. 이연화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저 낭자가 여랑 낭자입니까?"
"맞아요, 우리 중에 제일 춤을 잘 추는 언니예요. 있다 여랑 언니가 천장에 매단 끈을 타고 이런저런 춤을 출 거예요. 여랑 언니를 보려고 일부러 멀리까지 오시는 손님들도 많아요."
"저만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는데, 몸이 조금 안 좋아 보이네요. 치장하여 가리기는 했으나 안색도 매우 창백한 것이, 오래도록 심병을 앓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연화가 걱정스레 소곤거리자, 계양의 얼굴이 흐려졌다. 여랑을 힐끗 본 여자가 소곤거렸다.
"그...얼마 전에, 아유가 죽은 후부터 저렇게 됐어요. 여랑 언니는 아유의 친언니거든요."
"아. 아유 낭자 일이라면 객잔에서 잠깐 이야기를 듣기는 했습니다. 불미스러운 사고를 당해...."
이연화가 삼가는 투로 말을 흐렸다. 계양이 푹 한숨을 쉬었다. "주 공자는 아무 벌도 받지 않았어요. 우리보다 훨씬 있는 집 자식이고, 아유의 증언 외에는 별다른 증좌도 없었다니 그럴 법도 하지만...아무리 그래도, 죽음으로 호소했는데 재심조차 해주지 않은 관아도 너무해요." 말을 맺은 여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연화가 뭐라 더 묻기 전, 설약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가득했다.
"멀리서 계속 지켜봤어요. 재능이 대단하던데요."
"과찬이십니다. 계양 낭자가 잘 가르쳐주신 덕이지요."
"나가기 전에 여기서 한 번 합을 맞춰볼 거예요. 이번 무대만 무사히 넘기면, 당신이 우리에게 묻고 싶은 건 뭐든지 물어도 좋아요. 어떤 질문이든, 아는 한도 내에서는 솔직히 대답해 드리지요."
설약이 의미심장하게 힘주어 맺었다. 이연화가 이 거래를 제안한 시점부터, 설약은 의원의 질문이 퍽 불편한 내용일지 모른다고 짐작한 듯했다. 짧은 감사를 표하고, 이연화는 힐끗 시선을 돌려 여랑을 일별했다. 면사 아래의 표정을 짐작할 수는 없었으나, 여랑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면서도 단호했다. 이연화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손톱 밑에 작은 가시가 들어온 것처럼 찜찜했다.
-
방다병은 이연화를 찾고 있었다.
그저 이연화가 보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아니, 요새 늘 보고 싶긴 했지만. 잠깐, 나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방다병이 고개를 휘휘 가로젓고는 집중하고자 애썼다. 돌아본 시선 끝에는, 한 청년이 뚱한 표정을 한 채 다른 공자 셋과 함께 앉아 있었다. 사람들에 의하면, 그 뚱한 얼굴의 공자가 바로 신춘광이었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했으나, 눈빛이 다소 흐리며 자세가 똑바르지 못해 그리 믿음직한 인상을 주지 않았다. 남자가 한숨을 푹 쉬며 술을 마시자, 옆에 있던 친구가 위로하듯 건넸다.
"참, 자네도 고생이야. 방 공자는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군. 이미 생긴 각인인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거부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내 말이. 서신도 몇 차례 보내고, 사람을 보내 설득도 해보았는데 아직까지 영 소식이 없어."
신춘광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 투덜거렸다. 마치 자신이 퍽 불필요한 불편을 겪고 있다 말하는 듯한 태도에,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가능하면 신춘광의 대화를 함께 엿듣고 접근 방식을 논의하기 위해 이연화를 재차 눈으로 찾았으나, 상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모여 앉은 공자들 중 하나가 신춘광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방 공자가 겉으론 여려 보여도 은근히 고집 있는 성격이긴 하지. 좀 기다려 봐, 오히려 그런 점이 더 좋다고 했었잖아."
"그야 그렇지만...."
신춘광이 말을 흐렸다.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남자는 친구에게 몸을 기울여 귓속말을 건넸다. 방다병이 미간을 찌푸렸다. 워낙 소란한 기루 안이라, 그 작은 목소리를 정확히 판별하기가 어려웠다. 신춘광의 친구가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효능은 늘 확실했잖아."
"하지만 결과가 이상하잖아. 전에 주씨네 아들 때도 그렇고-."
"쉿, 쉿. 그 이야기는 춤 구경이 끝난 다음에 안에서 하자고."
친구가 입술 앞에 손가락을 펴 대면서 별실 쪽을 고갯짓했다. 주씨네 아들? 눈썹을 찌푸리는 방다병의 앞으로, 선화루의 점원이 총총 다가와 장삿속 가득한 미소를 띤 채 건넸다.
"처음 뵙는 공자님인데, 한눈에도 귀한 댁 공자님인 것을 알겠습니다. 어찌 혼자 앉아 계십니까? 선화루에는 최상급 음인들밖에 없답니다, 원하신다면 취미를 맞추어 아이를 붙여드릴 수도 있어요. 어떤 취향이신지 말씀만 해주시면-."
"그럴 생각 없소."
방다병이 딱 잘랐다. 설령 신춘광에게 집중하는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기루에서 잘 알지 못하는 음인과 함께 술을 마실 마음은 없었다. 그런 경험은 옥루춘에게 불려갔던 때로 충분했으며, 결코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점원이 잠시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뭣하러 선화루에 오는지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방다병이 얼른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난 각인한 음인이 있소. 이곳의 공연 수준이 높다기에 보러 왔을 뿐이지."
"아아, 그러셨군요. 공자와 각인한 음인은 참 행복하겠습니다."
찰나 동안 '각인한 음인이 있는 게 무슨 상관이지?' 하는 표정을 지었던 남자가, 이내 눈웃음을 지으며 아부하듯 말했다. 이연화가 지금 나와 각인해서 행복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청년이 잠시 시무룩한 심정을 추스르는 사이, 점원은 무대를 가리키고는 양손을 가볍게 마주잡았다.
"공자. 그러면 더 좋은 곳에서 공연을 보시는 건 어떨지요? 오늘은 선화루가 자랑하는 무용수들이 공연하는 날인데 말입니다. 지금 드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술이지만, 한층 귀한 분을 위한 술과 함께하신다면 공연이 더 특별해질 겁니다. 어떻습니까? 의향이 있으시다면 자리를 알아봐 드리지요."
비싼 술을 마시면 좋은 자리를 내주겠다는 거로군. 방다병이 내심 코웃음을 쳤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고 말하려다, 방다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신춘광과 그 친구들이 무대에 가까운 쪽으로 자리를 옮기려던 참이었다. "좋아요, 뭐든 알아서 주시오." 방다병이 얼른 말하자, 점원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는 호들갑스럽게 방다병을 인도했다. 최대한 신춘광과 가까운 자리를 골라 앉자, 무대 위의 천장에 고정되어 늘어진 고리가 보였다. 얇고 반짝이는 천을 몇 겹씩 포개어 만든, 아름다운 끈으로 된 고리였다. 점원이 비취색 술병을 방다병의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오늘 아주 운이 좋으십니다. 있다 여랑이 저 끈을 타고 춤을 출 텐데, 그 모습이 마치 구름을 타고 노는 신선이나 선녀 같지요."
"끈이 하늘거리는 게 그리 튼튼해 보이지 않는데, 사람의 몸을 잘 지탱합니까?"
"에이, 공자. 저 끈은 겉보기에나 저렇지, 이역만리에서 수입한 천을 가지고 대희국 장인들이 요술을 부린 옷감입니다. 웬만한 창칼로 뚫거나 베어내지 못할 만큼 단단하고 질겨서, 사람 열의 무게도 너끈히 지탱할 수 있지요."
점원이 웃으며 설명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 일단의 무용수들이 무대로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붉고 얇은 옷을 겹겹이 차려입어, 마치 몸 주변에 붉은빛 물결이나 불길이 흐르는 듯했다. 사람들이 큰 소리로 반기며 환호했다. 방다병은 그편을 바라보면서도 신춘광 쪽에 귀를 열어두었다. 자신의 목적은 조사였지, 공연 관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 기이한 광경을 본 순간, 방다병은 본래의 목적을 잠시나마 까맣게 잊어버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용수들은 모두 칼을 지니고 있었다. 검무야 흔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무용수들이 칼을 뽑은 다음 시작 자세를 취하기 전까지의 공백이었다. 무대에 별 문제가 없단 사실을 확인하는 짧은 시간 동안, 무용수들은 각자 편안한 방식으로 칼을 들었다. 그리고 개중 단 한 사람이, 칼을 등 뒤편으로 올려 든 채 서 있었다. 방다병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했다. 설마, 아닐 거야. 그래, 세상에 같은 습관을 가진 사람이 어디 하나뿐이겠어? 방다병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붉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무용수는, 무대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방다병과 눈이 마주쳤다.
머쓱하게 눈가를 만지며 시선을 피하는 반응에, 방다병은 그만 입을 떡 벌렸다. 네가 왜 거기 있어! 왜 그런 차림이야?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고함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으나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경악하다 못해 불행해진 방다병을 내버려두고, 무용수들은 원을 만들며 준비 자세를 취했다. 무대 근처에 자리잡은 악공들 중 하나가 현을 퉁기자, 원 가운데에서 피어오르는 꽃처럼 한 무희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그 무용수는 빛나는 고리를 잡고 천천히 몸을 끌어올려, 마치 구름을 잡은 신선처럼 그 위에 똑바로 섰다. 몇몇 이가 여랑의 이름을 불렀다.
여랑이 끈 위에서 춤추며 칼을 내지르거나, 아슬아슬한 자세로 끈에 걸쳐질 때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신 쪽의 꽃을 피워달라며 난리였다. 방다병은 그제야 기루 곳곳에 화려하게 장식된 금빛 꽃가지의 쓰임새를 알았다. 무용수들이 한 방향을 바라보며 멋드러진 자세를 취하면, 그 칼끝이 향한 꽃송이가 봄을 맞은 것처럼 살짝살짝 열렸다가 닫혔다. 방다병의 눈이 새삼스러워졌다. 비록 무공보다는 기예에 가까웠으나, 내력을 쓸 줄 아는 무용단은 방다병도 처음 보는 탓이었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여랑에게 쏠려 있었으나, 방다병은 처음부터 줄곧 한 사람밖에 바라보지 못했다. 긴 머리칼과 붉은 옷이 너풀거렸고, 금빛 장식이 어지럽게 반짝였다. 아무리 춤을 위해 만들어진 세검이라 해도, 그 손에 들린 순간 천하의 명검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움직임은 참으로 깔끔하고도 담백하여, 춤임에도 마치 절세 무공의 일면을 엿보는 듯했다. 방다병의 눈에는 가장 빛나면서도 아름다운 춤사위였다. 내 각인 상대라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아니면 그가 이연화이기 때문에? 붉은 끈을 칼에 매고 지붕 위에서 춤을 출 때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어쩐지 초조해진 방다병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연화는 저기서 뭐 하는 거냐?"
옆자리에서 난데없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을 때, 방다병은 악 소리를 삼키며 돌아보았다. 어느새 방다병의 곁에 앉은 적비성이, 팔짱을 낀 채 무대를 쏘아보고 있었다. 방다병은 상대의 불쾌한 표정에 매우 전적으로 공감하며 투덜거렸다.
"내가 어떻게 알아? 신춘광을 감시하는데 갑자기 저기서 나타나지 않겠어."
"하루라도 허튼짓을 안 하면 어디에 가시가 돋나 보군. 혼자 돌아다니게 두질 말았어야 했는데."
"내 말이. 다음부턴 그냥 옆에 붙어 다녀야겠어. 물론 이연화는 강하지만 말이야, 내 말은-."
"이건 그것과 다른 문제야. 뭣하러 담글 필요 없는 똥통에 발을 담그지?"
'똥통'이라는 말을 하며, 적비성은 경멸스러운 눈으로 기루 안의 사람들을 쭉 훑어보았다. 방다병이 격하게 끄덕였다. 드물게도, 타인을 싸잡아 폄하하는 모양새를 타박하고픈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맞아, 이연화는 너무 조심성이 없다니까." 어쩐지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으로 맞장구를 치자, 적비성이 이상한 표정을 지은 채 방다병을 힐끗 보았다. "뭐야, 왜 그래?" 방다병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물었다. 적비성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너 같은 애송이와 의견이 일치하는 게 별로 달갑진 않다."
"나도 마찬가지거든! 너 같은 대마두와 의견이 똑같은 게 좋을 줄 알아?"
방다병이 발끈해 받았다. 그때 주변 사람들이 탄성을 올렸다. 여랑이 끈으로 된 고리에 다리를 건 채 거꾸로 매달려 아름다운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도 저 자리가 아닌 게 어디야." 방다병이 스스로를 억지로 안심시키듯 중얼거렸다. 여랑의 위치에 이연화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니 괜시리 소름이 끼쳤다. 가짜 혼사를 치르면서 이런 상황에는 꽤 면역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장소가 너무 좋지 않았다. 이곳을 채운 이들의 반절 이상은, 아마도 바르지 못한 마음을 가진 망나니들일 터였다.
"지금 멈췄던 무용수 봤지? 여랑 말고, 저기 아래쪽에 말이야. 저런 애가 있었나?"
"아니, 나는 처음 보는데...잘 추네. 아유의 후임인가? 미인일 것 같지 않아?"
신춘광과 그 일당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을 때, 방다병은 그만 손에 들었던 술잔을 놓칠 뻔했다. 제발, 이연화. 좀 평범하게 보이면 안 되겠어? 저런 놈들이 너에 대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싶진 않단 말이야. 피눈물을 흘리듯 생각하며, 방다병은 가득 채운 술잔을 훌쩍 비워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천하제일인이 되는 일에 비하면, 처음 보는 춤을 완벽하게 익히는 일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명필은 획 하나만 긋더라도 티가 나는 법이었으니, 사람들이 그의 비범함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쩌겠어, 이연화는 너무 잘난 사람인걸. 방다병이 턱을 괴었다. 이연화든 이상이든, 한 곳에 멈추어 있으면 결국은 누군가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연화를 찬양하거나 존중하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관심 속에는 늘 음험한 악의와 욕망이 함께하여, 여차하는 순간 이연화를 깊은 구덩이 안으로 끌어내리려 들었다. 역시 내가 더 강해져야겠어. 방다병이 속으로 결심했다. 만인책의 순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언젠가는 적비성이나 이연화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면, 이연화가 언젠가 또 위험한 불구덩이로 뛰어들더라도 더 든든하게 그 등을 지킬 수 있을 터였다.
비록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 한숨을 삼키며, 방다병은 착잡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홀린 듯 무대를 지켜보았다. 이연화를 비롯한 무용수들은 절도 있게 뛰어오르거나, 앉거나 휘돌면서 미려한 동선을 그려냈다. 여러 자루의 검이 홱홱 파공음을 낼 때마다, 기루를 장식한 금색 꽃들이 파르르 피었다가 닫혔다. 점점 빨라지는 음악도 흥겹지만 경박하거나 과하지 않아, 무대는 참으로 신비롭게 들뜨면서도 황홀했다. 사람들이 연신 환성을 질렀다.
다른 이들처럼 공연에 집중하다가, 방다병은 순간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눈을 깜박였다. 음악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참이었고, 무용수들도 한층 현란하게 움직이는 참이었다. 위화감의 진원지를 찾던 방다병의 시선이 한 점에 집중되었다. 그 끝에는 여랑이 있었다. 지금까지와 비슷하게 유려하면서도 쾌속한 동작을 선보이고 있었으나, 여랑의 집중도는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어깨가 지나치게 들먹이고 있었다. 단지 공연 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얕고 빠른 숨이었다.
"여랑 낭자가...무슨 짓을 하려는 참인가?"
방다병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음악의 박자는 계속 빨라졌고, 무용수들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사람들은 멋진 마지막을 기대하며 박수를 치거나 환호했다. 하지만 방다병의 시선은 여랑의 모습에 꽂혀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금방이라도 무슨 사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음악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여랑은 눈을 질끈 감으며 도약해 칼을 들었다. 그 칼끝이 향하는 지점을 직감한 방다병의 입이 딱 벌어졌다. 여랑은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목숨을 끊으려는 참이었다.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방다병이 자리를 박차고 날아들기 전, 이연화가 움직였다.
여랑과 같은 높이로 단숨에 훌쩍 뛰어올라, 이연화는 검을 쥔 여랑의 팔목을 부드럽게 잡아 위로 밀었다.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마치 미리 합의된 듯 매끄러운 동작이었다. 두 사람의 몸이 춤의 일부처럼 허공에서 휘돌았다. 붉게 넘실대는 옷자락이 사람들의 눈을 현혹한 사이, 이연화의 검이 희뜩 빛을 발하며 큰 원을 그렸다. 고수가 아니라면 제대로 볼 수도 없을 만큼 강하고 빠른 검격에, 여랑의 몸을 지탱하던 고리가 허상처럼 끊어졌다. 반짝이는 천이 너울거리며 넓게 펼쳐져, 땅에 내려서는 이연화와 여랑을 휘감아 덮었다. 두 무용수의 몸이 그 천에 완전히 가려졌을 때, 이연화의 검격에서 터진 검풍이 한 발짝 늦게 기루 안을 휩쓸었다. 방다병이 얼굴로 작은 바람을 느낀 순간, 기루 안의 모든 꽃가지가 일제히 터지듯 피었다.
음악이 뚝 끝나고, 장내가 잠시 고요해졌다. 무용단의 공연을 여러 번 보았던 사람들도, 이런 광경은 처음인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연화와 여랑을 제외한 무용수들은, 공연을 시작할 때처럼 원을 그리고 섰다. 조금 당혹한 눈치였지만, 그들은 몸에 익은 대로 천연덕스럽게 마지막 자세를 취하며 춤을 마무리했다. 잠시 후 꽃송이들이 다시 닫힌 후에야, 사람들은 높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정신없이 훌륭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마지막 동작을 보았소? 누가 한 거지? 여랑이었나? 아니면 그 새로 온 사람이었나?"
"누구였든 굉장히 훌륭했소! 마치 신선끼리 재회하는 듯한 마지막이었어."
"마지막엔 정말...선경에 있는 꽃밭을 보고 온 듯했네. 황궁 근처에서도 이런 구경을 한 기억은 없는데."
"아유 일로 걱정했는데, 이런 수를 준비하고 있었군. 역시 설약 낭자는 대단해."
물론 방다병은 전혀 환호할 수 없었다. 손바닥이 살짝 축축해져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방다병은 천 아래에서 겨우 모습을 드러낸 여랑과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천 아래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여랑은 붉어진 눈으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는 다른 무용수들에 앞장서서 무대를 빠져나갔다. 방다병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비성 역시 굳은 얼굴로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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