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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8 22:02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시문이 사는 여현은, 그리 크지 않지만 주변과의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었다. 대도시 사이에 절묘히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여현에는 매일 다양한 지역의 상인과 표국 사람들이 머물다 떠났다. 주변의 산세와 계곡도 아기자기하지만 아름다운 편이라, 자연히 숙박업과 요식업 등이 융성했다. 예상보다 더욱 번화한 거리를 지나, 두 사람은 방시문의 집을 찾았다. 학당을 운영하는 중년인의 집은 저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담히 지어져 있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소박하다 해도 명문가의 핏줄과 표국의 소유자가 기거하는 저택이었기에, 그 만듦새와 완성도는 매우 빼어났다.
"다병아, 이렇게 와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이 문주까지 함께 오시다니, 체면을 누르고 부탁한 일이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방시문은 안 그래도 빼빼 마른 체형에, 근래의 근심으로 얼굴빛까지 어두워져 있어 극히 초췌해 보였다. 예의바른 미소를 띤 채, 방다병은 방시문의 팔을 잡아 숙였던 고개를 들도록 했다.
"아닙니다, 혈연을 돕는 일인 데다 억울한 사람들까지 얽힌 사건이니 당연히 와야지요."
"물론입니다, 방 어르신. 또한 자녀의 생명보다 중요한 체면이랄 것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디 어려워 마시고, 힘드시겠지만 그간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시지요. 아무리 자세히 적으셨다 해도 결국은 서신이라,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것만은 못합니다."
이연화가 단정히 말했다. 방시문은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 풀썩 앉아, 두 사람이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를 한층 소상히 전해주었다. 중년인의 말을 귀담아 들은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건넸다.
"그러면, 방 공자와 신 공자는 평소 그렇게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거로군요."
"내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신 공자가 우리 아이를 좋게 보고 초대를 한 적은 있었지요. 하지만 운일이는 그 초대에 거의 응하지 않았어요. 신 공자는 평소 떠들썩하고 호방하게 노는 일을 즐겼지만, 운일이는 방에서 시서화를 하거나 책을 읽는 게 낙이었으니까요."
"그 둘은 어찌 알게 된 것입니까? 성미가 그토록 다르다면 별로 접점이 없을 듯한데요."
방다병이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방시문이 습관처럼 재차 한숨을 쉬었다.
"일 년쯤 전이었을 거다. 너도 봤겠지만, 이곳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지. 한번은 아주 유명한 악단이 들른 적이 있었어. 운일이는 음률에도 관심이 많은 터라, 그 악단을 구경하러 갔지. 공연을 하던 객잔에서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신 공자와 같이 앉았던 것으로 안다."
"하면, 마지막 유람은 어쩌다 단둘이 가게 된 것인지 혹시 아십니까?"
"운일이는...자진하려 든 이후로, 말을 길게 하지 않습니다. 원래도 말수가 별로 없는 아이였는데. 하지만 유람을 가기 전, 초대를 거푸 거절하기 미안하니 이번엔 신 공자의 뜻에 따라주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계곡으로 단둘이 유람을 가다니, 퍽 절친한 사이에나 있을 법한 일이지 않습니까? 조금 걱정이 되어서 몸종을 딸려 보냈는데, 글쎄 이놈이 계곡에서 실족하는 바람에 먼저 되돌아왔지 뭡니까."
방시문이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찼다. 이연화가 잠시 방다병과 시선을 나누었다. 고개를 끄덕한 방다병이 물었다.
"저희가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되겠습니까? 지금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인가요?"
"의원이 천만다행으로 몸에는 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각인통이 심할 뿐이지. 깨어 있다면 말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거야."
중년인이 잿빛에 가까운 안색을 띠고는 말했다. 방다병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각인통이요?"
"그래. 단 한 번이었는데 왜 그렇게 후유증이 심한지...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식사도 잘 못 한다. 두통이 극심한 데다, 가끔씩 열이 치솟기도 해. 오죽하면 운봉 의원이 신 공자를 불러 도움을 받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단다. 부인이 그 얼굴을 후려쳤지."
방시문이 십 년쯤 나이를 먹은 듯한 얼굴로 회상했다. 이연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각인통은 각인 상대가 곁에 없을 때 경험하는 신체적 통증으로, 각인 기간과 관계없이 종종 나타나곤 했다. 보통은 경한 수준이었지만, 아주 드물게 목숨까지 위협받는 사람도 있었다. 이연화가 천천히 말했다.
"공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신중하게 접근해야겠군요.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방시문의 눈으로 물기가 감돌았다. 두 사람이 중년인의 인도를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방 어르신을 공격적으로 부르는 외침이었다. 화들짝 놀랐던 방시문은, 곧 노하고도 초조한 얼굴로 발길을 재촉해 응접실을 나섰다. 이연화는 미리 준비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방시문의 뒤를 따랐다.
한 남자가 하인의 저지를 받으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걸친 옷가지가 썩 화려했다. "신씨 가문의 심부름꾼이오." 방시문이 방다병과 이연화를 향해 낮게 건넸다. 이연화가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심부름꾼마저 저렇게 입힌 것을 보니, 두 가지 사실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신씨 집안은 매우 부유하며 과시하길 좋아하고, 또한 그 특성을 십분 활용해 방씨 집안에 분명한 압박을 행사하고자 하는 참이었다. 방시문을 발견한 남자가 대뜸 미간을 찌푸리고는 날카롭게 말했다.
"방 어르신, 대체 언제쯤 확답을 주실 예정입니까?"
"이보시오, 전에도 말했지만 운일이의 건강이 좋지 않소. 혼사에 대한 일은 천천히 논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서로 솔직해지지요, 방 어르신. 이것은 방 공자의 건강 문제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방 공자가 자진하려 들었다는 소문이 여현에 파다한데, 이런 때에는 오히려 빠르게 혼사를 진행해야 더 이상의 구설수를 막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방 공자도 각인통이 심해 고생이라던데, 이젠 결단을 내리시지요. 신씨 집안의 어른들도 상당히 심기가 불편하십니다. 방 공자의 난데없는 희락기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신 공자 쪽인데,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 계속 누를 끼치다니요."
남자가 혀를 차며 방시문을 훑어보았다. 방시문이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다. 발끈한 방다병이 대번에 나섰다.
"설령 방 공자가 난데없는 희락기를 맞아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해도, 법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비약을 들고 다닙니다. 심한 희락기를 맞은 방 공자가 약을 찾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았던 신 공자는 대체 뭡니까? 순간적으로 절제력을 잃고 이성적인 판단을 못한 사람은 신 공자인데, 마치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처럼 이야기하면 곤란하지요!"
청년이 따박따박 따지고 들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느다란 수염을 바르르 떨면서, 남자는 오른손을 들어 방다병을 삿대질했다.
"이 무슨, 이 무슨 무례한...! 방 어르신, 이 앞뒤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는 대체 누굽니까? 설마 새로운 혼사 상대로 데려온 거라면-."
"아니오! 이 아이는 내 친척 아이요, 다른 도시로 가던 중에 잠깐 머무는 청년일 뿐이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만히 있어라."
"혼사를 논하러 오신 분치고는 상당히 화가 나 보이십니다. 세간을 잠잠하게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하셨는데, 이렇게 큰 소리를 치시면 오히려 사람들의 이목이 더 집중되지 않겠습니까? 보세요, 다른 이들이 벌써 구경하러 오지 않았습니까."
이연화가 달래는 것인지 타박하는 것인지 모를 어조로 이야기하며 문 밖을 슥 손짓했다. 이연화의 말대로, 방시문의 집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기웃거리고 있었다. 남자가 불쾌한 눈으로 이연화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또 누구요?"
"아, 저는 의원입니다."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한 손을 슬쩍 들었다. 방다병과 방시문이 눈썹을 올리고는 이연화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의원? 운봉 의원도 상당한 명의이거늘, 왜 이런 수상한 의원을...."
"별로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매우 중대한 사안인 만큼, 여러 의원의 의견을 구하고 싶은 마음도 당연하지요. 또한 선생이 말씀하셨다시피, 누구든 소문이 도는 일은 피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방 공자의 각인통에 대해 아시는 걸 보니, 그 운봉이라는 사람에게 모종의 대가를 지불하셨나 보지요. 이 몸은 다행히 금전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 병자의 곤란한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기본적인 미덕쯤은 지킬 수 있답니다."
이연화가 입꼬리를 얄밉게 올린 채 맺었다. 어조야 정중했으나 듣는 쪽의 기분이 좋을 리야 없었다. 남자의 낯빛이 은은히 붉어졌다. 이연화는 난감한 상황을 애석해하는 얼굴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 어르신의 말씀처럼, 운일 공자의 건강이 좋지 못합니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혼사를 논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 방 공자에게 과한 심화를 더해주면, 혼례복을 걸치기도 전에 그 숨이 다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과연 신씨 집안의 태도에 대해 대체 무슨 소문이 돌겠습니까? 선생의 건강한 목청 덕분에 이렇게 구경꾼들도 몰린 판에요."
"이, 이...."
남자가 해석하기 어려운 소리를 흘리며 이연화를 가리켰다. 이연화가 과히 삼가는 표정을 지으며 가슴에 한 손을 얹었다. "아, 물론 그만큼 예와 도를 모르시는 분들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명문세가의 덕 있으신 분들께 어찌 그런 생각을 품겠습니까. 다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에게도 좋지 못할 오해가 불거지리라는 염려일 뿐이지요. 부디 병자를 압박하지 마시고, 공자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좀 두시지요." 과히 틀린 구석이 없는 말이라, 몇몇 구경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검붉은 낯으로 푸들거리며 분을 참던 남자는, 곧 홱 시선을 돌려 방시문을 노려보았다.
"설령 말미를 준다 해도, 그리 오래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곧 다시 찾아뵙지요. 그땐 긍정적인 답을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씹어 뱉듯이 말하고, 남자는 홱 발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일부러 하인의 몸을 치고 지나가는 행태가 꼴사나웠다. 방시문이 떨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믿긴 뭘 믿어? 태도가 아주 오만하기 짝이 없네요." 방다병이 투덜거렸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꽤 대단한 뒷배를 타고난 사람답지 않게, 청년은 전부터 자신의 배경만 믿고 날뛰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다. 방시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지역에서는 가장 힘이 큰 집안이다. 관리들도 저 손아귀에 휘둘릴 때가 많다 하니, 고압적으로 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심려가 많으셨겠습니다. 방금 전의 소동을 운일 공자가 듣지 않았다면 좋겠는데요."
이연화가 걱정스레 말하며 안쪽을 힐끔 보았다. 아주 먼 거리였지만, 고수의 청각에 도기 깨지는 소리가 감지된 탓이었다.
이연화와 방다병이 처소에 들어섰을 때, 방 공자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으로 깨진 찻잔을 치우고 있었다. 낯빛이 파리하고 입술이 부르터, 언뜻 보아도 중병에 걸린 환자 같았다. 방다병보다 앳된 모습이었으나 청년의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눈매가 깊고 용모가 단정하여, 건강할 때에는 이목을 끄는 옥면이었을 터였다. 방다병이 얼른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방운일을 만류했다.
"왜 몸도 성치 않은데 직접 치우고 그래? 사람을 부르지."
"형님. 저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더 누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방운일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연화가 그 팔을 잡아 일으키며 건넸다.
"공자가 이러다가 손을 다치면, 보는 사람들이 더 속상할 겁니다. 앉으시지요, 이런 일은 다병 공자가 세심하게 잘 합니다. 도련님으로 자라 평소에 잘 안 움직여서 그렇지, 집안일을 하려 마음먹으면 꽤 철저하답니다."
이연화가 가벼운 농담처럼 건네며 방운일을 앉혔다. 새로 내오도록 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방운일은 침상 한편에 기대 겨우 입을 열었다.
"며칠 전부터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형님과 문주께서 곧 오실 거라고요. 제 상태가 이러하여, 바른 자세로 맞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공자가 말을 하실 수 있어 그저 다행이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연화가 진맥을 하듯이 한쪽 손목을 잡고는 물었다. 엉망이 된 몸으로 양주만의 내력을 조금 불어넣어 주자, 방운일의 얼굴로 그제야 편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후 방운일이 한 말은 방시문에게 들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 공자가 자꾸 만나자 청하는 일은 알고 있었으나 거의 응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연달아 거절하기가 어려워, 하루 어울려줄 마음을 품었을 뿐이다. 갑작스레 격한 희락기를 맞은 자신을 보고, 신 공자는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평소 주기가 정확했는데 그날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당시 자신이 먹고 마신 것은 모두 신 공자도 함께 나누었다.
"양인에게 듣는 약과 음인에게 듣는 약이 다르니, 네가 영향을 받았더라도 신 공자는 그렇지 않았을 수 있지."
방다병이 한탄하듯 말했다. 방운일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가 멍청했습니다. 설마 신 공자가 그렇게까지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제가 너무 부주의했어요. 몸종이 다쳤을 때 돌아왔어야 했는데...."
"아니야. 어찌 명문세가의 자제가 그런 비열한 수를 쓸 거라고 예측했겠어? 네 마음이 그 자처럼 흉악하지 않으니, 그 속내를 간파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지. 피해를 당한 일로 자책해선 안 돼. 억울한 부분이 있다면 나와 이연화가 최선을 다해 해결할 테니, 부디 회복에만 신경 쓰도록 해."
방다병이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가만히 턱을 매만지던 이연화가 말했다.
"신 공자를 정말 싫어하시나 봅니다."
"저는 그 사람을 친구로도 고려해본 적이 없습니다."
방운일이 딱 잘랐다. 생리적인 혐오감이 그 얼굴과 태도에 선연했다. 이연화가 이어 물었다.
"방 공자가 본 신 공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태도가 경박하고 군자의 도에 무지하며, 지식을 뽐낼 때가 아니면 시서화에 관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충동적이고 목소리가 큰 데다, 과시적이며 인정받길 좋아하지요. 하루가 멀다 하고 이 지역의 기루며 도박장을 드나드는데, 그 사실을 저자에서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때문에 나이가 찼는데도 제대로 혼담이 오고간 적이 없지요."
방운일이 경멸스러운 투로 설명했다. 못 미더운 한량에 건달, 비단을 두른 돼지와 비슷했다는 뜻이로군. 이연화가 그 가차없는 말을 정리했다. 말할 힘이 부족했는지, 방운일은 고개를 숙이며 꺼져드는 목소리로 호소했다.
"부디...형님과 문주께 부탁드립니다. 제 목숨이야 별로 중하지 않습니다. 구설수에 올라 혼사가 막히는 것도 전혀 두렵지 않아요. 다만 진상을 밝혀서, 이 무도한 강압을 멈춰주시고 저희 부모님의 심려를 덜어주십시오."
"온힘을 다할 것입니다. 공자, 혹시 계곡에서 술과 음식을 나눌 때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상대를 안심시킨 이연화가 물었다. 방운일이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좁혔다.
"글쎄요, 맛도 냄새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는데...아, 그때 잠깐 배꽃 향기를 진하게 느낀 순간이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배꽃이 아주 많이 피었던 장소라, 크게 이상하다고 여기진 않았습니다."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자는 곧 방 공자의 회복을 빌며, 더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알려줄 것을 당부했다. 방운일의 처소를 나오며, 방다병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퍽 심각했다.
"몸이 좋지 않다 뿐이지, 증언에 힘이 있어. 억울한 감정을 지어내는 것 같지도 않아. 더 조사해 보겠지만, 아무래도 정말 함정에 빠진 모양인데. 어디까지 연루된 일일까? 신 공자 하나인가? 아니면 모자란 자식의 혼처를 찾기 위해 그 집안 어른들까지 가담한 일일까?"
"아직은 알 수 없지. 방 어르신이 처음 보낸 서신에서는, 분명 이런 일이 몇 건 더 있다고 했었지?"
"맞아. 대체 무슨 일이지? 이 지역에서만 갑자기 법도가 실종되었을 리는 없잖아."
방다병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연화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일이든 원인 없이 벌어지지는 않는 법이었다. 괴상한 현상이 생겼다면, 그에 걸맞는 괴상한 조건이 존재할 터였다. 다만 지금은 추론의 근거가 부족했다.
"글쎄, 더 알아봐야지.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도 정보를 좀 모으는 편이 낫겠어."
"좋아, 그럼 큰 객잔이지. 그런 데는 내가 냄새만 맡아도 알아, 이 대협만 따라오라고."
방다병이 냉큼 앞장섰다. 이연화는 네가 무슨 대협이냐고 놀리려다가, 그만 웃음을 참고 그 뒤를 따랐다.
창화객잔이라는 간판이 붙은 곳에 들어가, 방다병과 이연화는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때로 술을 사며 이야기를 청했다. 이연화는 매우 관심 있게 맞장구를 치며, 여러 사람들에게 들은 소문을 정돈했다. 일단 지역에서 비슷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는 방시문의 말은 사실이었다. 권세 있는 집이 연루되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소문의 정도가 다를 뿐이었다. 피해자의 신분 또한 다양했다. 개중 한둘은 정말 약을 먹고 목숨을 끊기도 했다. 다만 자진한 피해자가 기루에서 일하던 무희였는지라 크게 공론화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신 공자, 신춘광에 대한 평은 방운일의 이야기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방 공자가 억울하다던데, 설마 신 공자가 그런 일까지 주도적으로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소 충동적이긴 해도 그렇게까지 막 나갈 사람은 아니다' 정도의 회의론을 펼쳤다(방다병은 입을 비쭉하며, 다른 이의 밑바닥을 지인도 아닌 자들이 어찌 알겠느냐 투덜거렸다). 어딜 가면 신 공자를 만날 수 있겠는지 물은 일행에게, 까무잡잡한 얼굴의 남자가 웃으며 바로 대꾸했다.
"그야 선화루지요."
"선화루요?"
"선화루를 모르는 걸 보니, 여기 처음 왔거나 오랜만에 오시나 봅니다. 선화루는 반 년쯤 전부터 문을 연 기루인데, 솜씨 좋은 악인이며 무희들이 많고 음식도 끝내준대요. 게다가 지인을 통해야 출입할 수 있어서, 돈깨나 있는 사람들 사이에 엄청 인기가 많지요. 최근에 좀...안 좋은 일이 있긴 했어도, 손님은 전혀 안 떨어졌어요. 하지만 댁들은 거기 들어가기 어려울 테니, 그 안에서 만나긴 좀 힘들겠네요. 한번 신 공자가 선화루에 들고 날 때를 노려 보세요."
방다병을 향해, 남자가 친절하게 덧붙였다. "우리가 왜 거기 들어가기 어려울...." 조금 억울하게 중얼거리며, 방 공자는 자신의 꼴이 초라한지 돌아보는 눈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감사를 표하는 이연화에게, 남자가 눈을 빛내며 이었다.
"그것도 그건데, 최근에 금원맹주 이야기는 들으셨소?"
"금원맹주요?"
방다병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연화도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 주의가 기뻤는지, 남자는 목소리를 낮추어 이었다.
"글쎄, 한동안 조용했던 금원맹주가 이 근처에서 목격되었답니다. 얼굴이야 가렸다지만 그 고강한 무공이 어디 감춰지겠소? 비적단 하나를 박살냈다던데, 소문에는 뭘 찾고 있었대요."
"금원맹주가...비적단을 박살내요?"
이연화가 괴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평소의 적비성은 비적단 따위에 관심이나 주의를 두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놈들이 먼저 죽을 자리를 찾아 적비성을 건드린 게 아닐까?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인 줄 알고 털어먹으려 했다든가? 타당한 의심을 하는 이연화의 앞에서, 남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듣기로는 한 식경도 안 걸렸다는데, 꽤 규모가 있던 비적단이었거든. 그래서 여길 오가는 표국 사람들이 아주 반겼지 뭡니까. 설마, 금원맹주가 이상이를 도와 역도들을 막은 후로 개과천선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요?"
"그건 정말 아니겠죠. 그 성질머리에 무슨...."
방다병이 음식을 잘못 씹은 듯한 표정을 짓고는 반사적으로 받았다. 남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오. 금원맹주와 잘 아는 사이라도 됩니까?"
"설마요. 금원맹주는 워낙 유명인사라, 여기저기서 이야기 들을 일이 많지 않았겠습니까."
이연화가 얼른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방다병에 매우 동의하고 있었다.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과 협객이 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존재했다. 협객이 된 적비성이라니, 꿈에서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일지 추측하던 이연화의 앞으로, 누군가가 턱 짐을 내려놓았다. 퍼뜩 돌아본 방다병이 꽥 소리를 질렀다. "아비!" 소문의 주인공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가벼운 인사나 한 마디 말도 없이, 적비성은 방다병의 옆에 자리를 잡고는 음식을 주문했다. 방다병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댔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어디 있다가 지금 나타난 거야? 그것보다, 조금 전 들은 이야기가 진짜야?"
"시끄러워."
적비성이 대뜸 이야기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까지 살짝 옆으로 물리는 것이,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방다병이 마주 미간을 좁히고는 삿대질을 했다.
"뭐야, 오랜만에 만나서 이 정도는 물어볼 수 있잖아. 그렇게 크게 말한 것도 아니라고. 그래도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빡빡하게-."
"머리 아프니까 귓전에서 떠들지 말라고."
적비성이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방다병과 이연화가 의아한 시선을 교환했다. 평소에도 적비성이 방다병의 수다스러운 부분을 썩 좋아하지 않긴 했지만, 이 정도로 날카롭게 반응한 적은 없었다. 이연화가 상대를 떠보듯이 물었다.
"어...아비. 진짜 머리가 아파?"
별다른 대답은 없었지만, 그 무반응은 오히려 좋은 답이 되었다. 이연화의 눈썹이 이상한 모양을 만들었다. 적비성 정도의 무인이 일반적인 두통 따위로 괴로워할 리는 없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다, 이연화는 문득 머릿속으로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방시문의 말과 방운일의 모습이 갑작스레 뇌리를 스친 탓이었다. 두통이 극심한 데다, 가끔씩 열이 치솟기도 해. 설마, 내가 들었던 그건 아니겠지. 이연화가 뺨을 긁적였다. 적비성은 묘한 억하심정이 배인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을 잠시 돌렸다가, 이연화는 뱀굴에 억지로 손을 넣는 사람처럼 물었다.
"그...나 때문이야?"
적비성이 한숨과 함께 눈을 굴렸다. 하지만 부정의 말은 없었다. 이연화와 적비성을 휙휙 번갈아 보던 방다병의 눈동자가 한층 커졌다.
"뭐? 아비, 너 각인통이 그렇게 심해?"
"시끄러워."
적비성이 이를 악문 채 위협하듯 말했다. 방다병은 드물게도 적비성의 말을 따라 입을 다물었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적비성이 이연화를 향해 작게 턱짓하며 건넨 말에 금방 날아가 버렸다.
"오늘은 너와 함께 자야겠다, 이연화."
이연화는 눈썹을 높이 올렸고, 방다병은 조건반사적으로 외쳤다. "뭐? 안 돼!" 적비성이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그걸 정하는 건 네가 아니야." 그렇지, 그걸 정하는 건 방다병이 아니지...그러면 굳이 방다병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지 않아도 되잖아,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연화는 상대의 멱살을 잡아 그렇게 건네고픈 마음을 꾹 억누르며 눈을 감았다. 갑자기 매우 피로해졌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시문이 사는 여현은, 그리 크지 않지만 주변과의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었다. 대도시 사이에 절묘히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여현에는 매일 다양한 지역의 상인과 표국 사람들이 머물다 떠났다. 주변의 산세와 계곡도 아기자기하지만 아름다운 편이라, 자연히 숙박업과 요식업 등이 융성했다. 예상보다 더욱 번화한 거리를 지나, 두 사람은 방시문의 집을 찾았다. 학당을 운영하는 중년인의 집은 저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담히 지어져 있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소박하다 해도 명문가의 핏줄과 표국의 소유자가 기거하는 저택이었기에, 그 만듦새와 완성도는 매우 빼어났다.
"다병아, 이렇게 와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이 문주까지 함께 오시다니, 체면을 누르고 부탁한 일이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방시문은 안 그래도 빼빼 마른 체형에, 근래의 근심으로 얼굴빛까지 어두워져 있어 극히 초췌해 보였다. 예의바른 미소를 띤 채, 방다병은 방시문의 팔을 잡아 숙였던 고개를 들도록 했다.
"아닙니다, 혈연을 돕는 일인 데다 억울한 사람들까지 얽힌 사건이니 당연히 와야지요."
"물론입니다, 방 어르신. 또한 자녀의 생명보다 중요한 체면이랄 것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디 어려워 마시고, 힘드시겠지만 그간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시지요. 아무리 자세히 적으셨다 해도 결국은 서신이라,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것만은 못합니다."
이연화가 단정히 말했다. 방시문은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 풀썩 앉아, 두 사람이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를 한층 소상히 전해주었다. 중년인의 말을 귀담아 들은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건넸다.
"그러면, 방 공자와 신 공자는 평소 그렇게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거로군요."
"내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신 공자가 우리 아이를 좋게 보고 초대를 한 적은 있었지요. 하지만 운일이는 그 초대에 거의 응하지 않았어요. 신 공자는 평소 떠들썩하고 호방하게 노는 일을 즐겼지만, 운일이는 방에서 시서화를 하거나 책을 읽는 게 낙이었으니까요."
"그 둘은 어찌 알게 된 것입니까? 성미가 그토록 다르다면 별로 접점이 없을 듯한데요."
방다병이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방시문이 습관처럼 재차 한숨을 쉬었다.
"일 년쯤 전이었을 거다. 너도 봤겠지만, 이곳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지. 한번은 아주 유명한 악단이 들른 적이 있었어. 운일이는 음률에도 관심이 많은 터라, 그 악단을 구경하러 갔지. 공연을 하던 객잔에서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신 공자와 같이 앉았던 것으로 안다."
"하면, 마지막 유람은 어쩌다 단둘이 가게 된 것인지 혹시 아십니까?"
"운일이는...자진하려 든 이후로, 말을 길게 하지 않습니다. 원래도 말수가 별로 없는 아이였는데. 하지만 유람을 가기 전, 초대를 거푸 거절하기 미안하니 이번엔 신 공자의 뜻에 따라주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계곡으로 단둘이 유람을 가다니, 퍽 절친한 사이에나 있을 법한 일이지 않습니까? 조금 걱정이 되어서 몸종을 딸려 보냈는데, 글쎄 이놈이 계곡에서 실족하는 바람에 먼저 되돌아왔지 뭡니까."
방시문이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찼다. 이연화가 잠시 방다병과 시선을 나누었다. 고개를 끄덕한 방다병이 물었다.
"저희가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되겠습니까? 지금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인가요?"
"의원이 천만다행으로 몸에는 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각인통이 심할 뿐이지. 깨어 있다면 말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거야."
중년인이 잿빛에 가까운 안색을 띠고는 말했다. 방다병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각인통이요?"
"그래. 단 한 번이었는데 왜 그렇게 후유증이 심한지...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식사도 잘 못 한다. 두통이 극심한 데다, 가끔씩 열이 치솟기도 해. 오죽하면 운봉 의원이 신 공자를 불러 도움을 받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단다. 부인이 그 얼굴을 후려쳤지."
방시문이 십 년쯤 나이를 먹은 듯한 얼굴로 회상했다. 이연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각인통은 각인 상대가 곁에 없을 때 경험하는 신체적 통증으로, 각인 기간과 관계없이 종종 나타나곤 했다. 보통은 경한 수준이었지만, 아주 드물게 목숨까지 위협받는 사람도 있었다. 이연화가 천천히 말했다.
"공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신중하게 접근해야겠군요.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방시문의 눈으로 물기가 감돌았다. 두 사람이 중년인의 인도를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방 어르신을 공격적으로 부르는 외침이었다. 화들짝 놀랐던 방시문은, 곧 노하고도 초조한 얼굴로 발길을 재촉해 응접실을 나섰다. 이연화는 미리 준비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방시문의 뒤를 따랐다.
한 남자가 하인의 저지를 받으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걸친 옷가지가 썩 화려했다. "신씨 가문의 심부름꾼이오." 방시문이 방다병과 이연화를 향해 낮게 건넸다. 이연화가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심부름꾼마저 저렇게 입힌 것을 보니, 두 가지 사실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신씨 집안은 매우 부유하며 과시하길 좋아하고, 또한 그 특성을 십분 활용해 방씨 집안에 분명한 압박을 행사하고자 하는 참이었다. 방시문을 발견한 남자가 대뜸 미간을 찌푸리고는 날카롭게 말했다.
"방 어르신, 대체 언제쯤 확답을 주실 예정입니까?"
"이보시오, 전에도 말했지만 운일이의 건강이 좋지 않소. 혼사에 대한 일은 천천히 논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서로 솔직해지지요, 방 어르신. 이것은 방 공자의 건강 문제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방 공자가 자진하려 들었다는 소문이 여현에 파다한데, 이런 때에는 오히려 빠르게 혼사를 진행해야 더 이상의 구설수를 막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방 공자도 각인통이 심해 고생이라던데, 이젠 결단을 내리시지요. 신씨 집안의 어른들도 상당히 심기가 불편하십니다. 방 공자의 난데없는 희락기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신 공자 쪽인데,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 계속 누를 끼치다니요."
남자가 혀를 차며 방시문을 훑어보았다. 방시문이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다. 발끈한 방다병이 대번에 나섰다.
"설령 방 공자가 난데없는 희락기를 맞아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해도, 법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비약을 들고 다닙니다. 심한 희락기를 맞은 방 공자가 약을 찾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았던 신 공자는 대체 뭡니까? 순간적으로 절제력을 잃고 이성적인 판단을 못한 사람은 신 공자인데, 마치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처럼 이야기하면 곤란하지요!"
청년이 따박따박 따지고 들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느다란 수염을 바르르 떨면서, 남자는 오른손을 들어 방다병을 삿대질했다.
"이 무슨, 이 무슨 무례한...! 방 어르신, 이 앞뒤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는 대체 누굽니까? 설마 새로운 혼사 상대로 데려온 거라면-."
"아니오! 이 아이는 내 친척 아이요, 다른 도시로 가던 중에 잠깐 머무는 청년일 뿐이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만히 있어라."
"혼사를 논하러 오신 분치고는 상당히 화가 나 보이십니다. 세간을 잠잠하게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하셨는데, 이렇게 큰 소리를 치시면 오히려 사람들의 이목이 더 집중되지 않겠습니까? 보세요, 다른 이들이 벌써 구경하러 오지 않았습니까."
이연화가 달래는 것인지 타박하는 것인지 모를 어조로 이야기하며 문 밖을 슥 손짓했다. 이연화의 말대로, 방시문의 집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기웃거리고 있었다. 남자가 불쾌한 눈으로 이연화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또 누구요?"
"아, 저는 의원입니다."
이연화가 빙긋 웃으며 한 손을 슬쩍 들었다. 방다병과 방시문이 눈썹을 올리고는 이연화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의원? 운봉 의원도 상당한 명의이거늘, 왜 이런 수상한 의원을...."
"별로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매우 중대한 사안인 만큼, 여러 의원의 의견을 구하고 싶은 마음도 당연하지요. 또한 선생이 말씀하셨다시피, 누구든 소문이 도는 일은 피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방 공자의 각인통에 대해 아시는 걸 보니, 그 운봉이라는 사람에게 모종의 대가를 지불하셨나 보지요. 이 몸은 다행히 금전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 병자의 곤란한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기본적인 미덕쯤은 지킬 수 있답니다."
이연화가 입꼬리를 얄밉게 올린 채 맺었다. 어조야 정중했으나 듣는 쪽의 기분이 좋을 리야 없었다. 남자의 낯빛이 은은히 붉어졌다. 이연화는 난감한 상황을 애석해하는 얼굴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 어르신의 말씀처럼, 운일 공자의 건강이 좋지 못합니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혼사를 논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 방 공자에게 과한 심화를 더해주면, 혼례복을 걸치기도 전에 그 숨이 다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과연 신씨 집안의 태도에 대해 대체 무슨 소문이 돌겠습니까? 선생의 건강한 목청 덕분에 이렇게 구경꾼들도 몰린 판에요."
"이, 이...."
남자가 해석하기 어려운 소리를 흘리며 이연화를 가리켰다. 이연화가 과히 삼가는 표정을 지으며 가슴에 한 손을 얹었다. "아, 물론 그만큼 예와 도를 모르시는 분들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명문세가의 덕 있으신 분들께 어찌 그런 생각을 품겠습니까. 다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에게도 좋지 못할 오해가 불거지리라는 염려일 뿐이지요. 부디 병자를 압박하지 마시고, 공자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좀 두시지요." 과히 틀린 구석이 없는 말이라, 몇몇 구경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검붉은 낯으로 푸들거리며 분을 참던 남자는, 곧 홱 시선을 돌려 방시문을 노려보았다.
"설령 말미를 준다 해도, 그리 오래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곧 다시 찾아뵙지요. 그땐 긍정적인 답을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씹어 뱉듯이 말하고, 남자는 홱 발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일부러 하인의 몸을 치고 지나가는 행태가 꼴사나웠다. 방시문이 떨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믿긴 뭘 믿어? 태도가 아주 오만하기 짝이 없네요." 방다병이 투덜거렸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꽤 대단한 뒷배를 타고난 사람답지 않게, 청년은 전부터 자신의 배경만 믿고 날뛰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다. 방시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지역에서는 가장 힘이 큰 집안이다. 관리들도 저 손아귀에 휘둘릴 때가 많다 하니, 고압적으로 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심려가 많으셨겠습니다. 방금 전의 소동을 운일 공자가 듣지 않았다면 좋겠는데요."
이연화가 걱정스레 말하며 안쪽을 힐끔 보았다. 아주 먼 거리였지만, 고수의 청각에 도기 깨지는 소리가 감지된 탓이었다.
이연화와 방다병이 처소에 들어섰을 때, 방 공자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으로 깨진 찻잔을 치우고 있었다. 낯빛이 파리하고 입술이 부르터, 언뜻 보아도 중병에 걸린 환자 같았다. 방다병보다 앳된 모습이었으나 청년의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눈매가 깊고 용모가 단정하여, 건강할 때에는 이목을 끄는 옥면이었을 터였다. 방다병이 얼른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방운일을 만류했다.
"왜 몸도 성치 않은데 직접 치우고 그래? 사람을 부르지."
"형님. 저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더 누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방운일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연화가 그 팔을 잡아 일으키며 건넸다.
"공자가 이러다가 손을 다치면, 보는 사람들이 더 속상할 겁니다. 앉으시지요, 이런 일은 다병 공자가 세심하게 잘 합니다. 도련님으로 자라 평소에 잘 안 움직여서 그렇지, 집안일을 하려 마음먹으면 꽤 철저하답니다."
이연화가 가벼운 농담처럼 건네며 방운일을 앉혔다. 새로 내오도록 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방운일은 침상 한편에 기대 겨우 입을 열었다.
"며칠 전부터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형님과 문주께서 곧 오실 거라고요. 제 상태가 이러하여, 바른 자세로 맞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공자가 말을 하실 수 있어 그저 다행이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연화가 진맥을 하듯이 한쪽 손목을 잡고는 물었다. 엉망이 된 몸으로 양주만의 내력을 조금 불어넣어 주자, 방운일의 얼굴로 그제야 편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후 방운일이 한 말은 방시문에게 들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 공자가 자꾸 만나자 청하는 일은 알고 있었으나 거의 응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연달아 거절하기가 어려워, 하루 어울려줄 마음을 품었을 뿐이다. 갑작스레 격한 희락기를 맞은 자신을 보고, 신 공자는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평소 주기가 정확했는데 그날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당시 자신이 먹고 마신 것은 모두 신 공자도 함께 나누었다.
"양인에게 듣는 약과 음인에게 듣는 약이 다르니, 네가 영향을 받았더라도 신 공자는 그렇지 않았을 수 있지."
방다병이 한탄하듯 말했다. 방운일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가 멍청했습니다. 설마 신 공자가 그렇게까지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제가 너무 부주의했어요. 몸종이 다쳤을 때 돌아왔어야 했는데...."
"아니야. 어찌 명문세가의 자제가 그런 비열한 수를 쓸 거라고 예측했겠어? 네 마음이 그 자처럼 흉악하지 않으니, 그 속내를 간파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지. 피해를 당한 일로 자책해선 안 돼. 억울한 부분이 있다면 나와 이연화가 최선을 다해 해결할 테니, 부디 회복에만 신경 쓰도록 해."
방다병이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가만히 턱을 매만지던 이연화가 말했다.
"신 공자를 정말 싫어하시나 봅니다."
"저는 그 사람을 친구로도 고려해본 적이 없습니다."
방운일이 딱 잘랐다. 생리적인 혐오감이 그 얼굴과 태도에 선연했다. 이연화가 이어 물었다.
"방 공자가 본 신 공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태도가 경박하고 군자의 도에 무지하며, 지식을 뽐낼 때가 아니면 시서화에 관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충동적이고 목소리가 큰 데다, 과시적이며 인정받길 좋아하지요. 하루가 멀다 하고 이 지역의 기루며 도박장을 드나드는데, 그 사실을 저자에서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때문에 나이가 찼는데도 제대로 혼담이 오고간 적이 없지요."
방운일이 경멸스러운 투로 설명했다. 못 미더운 한량에 건달, 비단을 두른 돼지와 비슷했다는 뜻이로군. 이연화가 그 가차없는 말을 정리했다. 말할 힘이 부족했는지, 방운일은 고개를 숙이며 꺼져드는 목소리로 호소했다.
"부디...형님과 문주께 부탁드립니다. 제 목숨이야 별로 중하지 않습니다. 구설수에 올라 혼사가 막히는 것도 전혀 두렵지 않아요. 다만 진상을 밝혀서, 이 무도한 강압을 멈춰주시고 저희 부모님의 심려를 덜어주십시오."
"온힘을 다할 것입니다. 공자, 혹시 계곡에서 술과 음식을 나눌 때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상대를 안심시킨 이연화가 물었다. 방운일이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좁혔다.
"글쎄요, 맛도 냄새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는데...아, 그때 잠깐 배꽃 향기를 진하게 느낀 순간이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배꽃이 아주 많이 피었던 장소라, 크게 이상하다고 여기진 않았습니다."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자는 곧 방 공자의 회복을 빌며, 더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알려줄 것을 당부했다. 방운일의 처소를 나오며, 방다병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퍽 심각했다.
"몸이 좋지 않다 뿐이지, 증언에 힘이 있어. 억울한 감정을 지어내는 것 같지도 않아. 더 조사해 보겠지만, 아무래도 정말 함정에 빠진 모양인데. 어디까지 연루된 일일까? 신 공자 하나인가? 아니면 모자란 자식의 혼처를 찾기 위해 그 집안 어른들까지 가담한 일일까?"
"아직은 알 수 없지. 방 어르신이 처음 보낸 서신에서는, 분명 이런 일이 몇 건 더 있다고 했었지?"
"맞아. 대체 무슨 일이지? 이 지역에서만 갑자기 법도가 실종되었을 리는 없잖아."
방다병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연화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일이든 원인 없이 벌어지지는 않는 법이었다. 괴상한 현상이 생겼다면, 그에 걸맞는 괴상한 조건이 존재할 터였다. 다만 지금은 추론의 근거가 부족했다.
"글쎄, 더 알아봐야지.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도 정보를 좀 모으는 편이 낫겠어."
"좋아, 그럼 큰 객잔이지. 그런 데는 내가 냄새만 맡아도 알아, 이 대협만 따라오라고."
방다병이 냉큼 앞장섰다. 이연화는 네가 무슨 대협이냐고 놀리려다가, 그만 웃음을 참고 그 뒤를 따랐다.
창화객잔이라는 간판이 붙은 곳에 들어가, 방다병과 이연화는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때로 술을 사며 이야기를 청했다. 이연화는 매우 관심 있게 맞장구를 치며, 여러 사람들에게 들은 소문을 정돈했다. 일단 지역에서 비슷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는 방시문의 말은 사실이었다. 권세 있는 집이 연루되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소문의 정도가 다를 뿐이었다. 피해자의 신분 또한 다양했다. 개중 한둘은 정말 약을 먹고 목숨을 끊기도 했다. 다만 자진한 피해자가 기루에서 일하던 무희였는지라 크게 공론화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신 공자, 신춘광에 대한 평은 방운일의 이야기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방 공자가 억울하다던데, 설마 신 공자가 그런 일까지 주도적으로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소 충동적이긴 해도 그렇게까지 막 나갈 사람은 아니다' 정도의 회의론을 펼쳤다(방다병은 입을 비쭉하며, 다른 이의 밑바닥을 지인도 아닌 자들이 어찌 알겠느냐 투덜거렸다). 어딜 가면 신 공자를 만날 수 있겠는지 물은 일행에게, 까무잡잡한 얼굴의 남자가 웃으며 바로 대꾸했다.
"그야 선화루지요."
"선화루요?"
"선화루를 모르는 걸 보니, 여기 처음 왔거나 오랜만에 오시나 봅니다. 선화루는 반 년쯤 전부터 문을 연 기루인데, 솜씨 좋은 악인이며 무희들이 많고 음식도 끝내준대요. 게다가 지인을 통해야 출입할 수 있어서, 돈깨나 있는 사람들 사이에 엄청 인기가 많지요. 최근에 좀...안 좋은 일이 있긴 했어도, 손님은 전혀 안 떨어졌어요. 하지만 댁들은 거기 들어가기 어려울 테니, 그 안에서 만나긴 좀 힘들겠네요. 한번 신 공자가 선화루에 들고 날 때를 노려 보세요."
방다병을 향해, 남자가 친절하게 덧붙였다. "우리가 왜 거기 들어가기 어려울...." 조금 억울하게 중얼거리며, 방 공자는 자신의 꼴이 초라한지 돌아보는 눈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감사를 표하는 이연화에게, 남자가 눈을 빛내며 이었다.
"그것도 그건데, 최근에 금원맹주 이야기는 들으셨소?"
"금원맹주요?"
방다병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연화도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 주의가 기뻤는지, 남자는 목소리를 낮추어 이었다.
"글쎄, 한동안 조용했던 금원맹주가 이 근처에서 목격되었답니다. 얼굴이야 가렸다지만 그 고강한 무공이 어디 감춰지겠소? 비적단 하나를 박살냈다던데, 소문에는 뭘 찾고 있었대요."
"금원맹주가...비적단을 박살내요?"
이연화가 괴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평소의 적비성은 비적단 따위에 관심이나 주의를 두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놈들이 먼저 죽을 자리를 찾아 적비성을 건드린 게 아닐까?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인 줄 알고 털어먹으려 했다든가? 타당한 의심을 하는 이연화의 앞에서, 남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듣기로는 한 식경도 안 걸렸다는데, 꽤 규모가 있던 비적단이었거든. 그래서 여길 오가는 표국 사람들이 아주 반겼지 뭡니까. 설마, 금원맹주가 이상이를 도와 역도들을 막은 후로 개과천선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요?"
"그건 정말 아니겠죠. 그 성질머리에 무슨...."
방다병이 음식을 잘못 씹은 듯한 표정을 짓고는 반사적으로 받았다. 남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오. 금원맹주와 잘 아는 사이라도 됩니까?"
"설마요. 금원맹주는 워낙 유명인사라, 여기저기서 이야기 들을 일이 많지 않았겠습니까."
이연화가 얼른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방다병에 매우 동의하고 있었다.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과 협객이 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존재했다. 협객이 된 적비성이라니, 꿈에서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일지 추측하던 이연화의 앞으로, 누군가가 턱 짐을 내려놓았다. 퍼뜩 돌아본 방다병이 꽥 소리를 질렀다. "아비!" 소문의 주인공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가벼운 인사나 한 마디 말도 없이, 적비성은 방다병의 옆에 자리를 잡고는 음식을 주문했다. 방다병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댔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어디 있다가 지금 나타난 거야? 그것보다, 조금 전 들은 이야기가 진짜야?"
"시끄러워."
적비성이 대뜸 이야기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까지 살짝 옆으로 물리는 것이,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방다병이 마주 미간을 좁히고는 삿대질을 했다.
"뭐야, 오랜만에 만나서 이 정도는 물어볼 수 있잖아. 그렇게 크게 말한 것도 아니라고. 그래도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빡빡하게-."
"머리 아프니까 귓전에서 떠들지 말라고."
적비성이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방다병과 이연화가 의아한 시선을 교환했다. 평소에도 적비성이 방다병의 수다스러운 부분을 썩 좋아하지 않긴 했지만, 이 정도로 날카롭게 반응한 적은 없었다. 이연화가 상대를 떠보듯이 물었다.
"어...아비. 진짜 머리가 아파?"
별다른 대답은 없었지만, 그 무반응은 오히려 좋은 답이 되었다. 이연화의 눈썹이 이상한 모양을 만들었다. 적비성 정도의 무인이 일반적인 두통 따위로 괴로워할 리는 없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다, 이연화는 문득 머릿속으로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방시문의 말과 방운일의 모습이 갑작스레 뇌리를 스친 탓이었다. 두통이 극심한 데다, 가끔씩 열이 치솟기도 해. 설마, 내가 들었던 그건 아니겠지. 이연화가 뺨을 긁적였다. 적비성은 묘한 억하심정이 배인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을 잠시 돌렸다가, 이연화는 뱀굴에 억지로 손을 넣는 사람처럼 물었다.
"그...나 때문이야?"
적비성이 한숨과 함께 눈을 굴렸다. 하지만 부정의 말은 없었다. 이연화와 적비성을 휙휙 번갈아 보던 방다병의 눈동자가 한층 커졌다.
"뭐? 아비, 너 각인통이 그렇게 심해?"
"시끄러워."
적비성이 이를 악문 채 위협하듯 말했다. 방다병은 드물게도 적비성의 말을 따라 입을 다물었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적비성이 이연화를 향해 작게 턱짓하며 건넨 말에 금방 날아가 버렸다.
"오늘은 너와 함께 자야겠다, 이연화."
이연화는 눈썹을 높이 올렸고, 방다병은 조건반사적으로 외쳤다. "뭐? 안 돼!" 적비성이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그걸 정하는 건 네가 아니야." 그렇지, 그걸 정하는 건 방다병이 아니지...그러면 굳이 방다병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지 않아도 되잖아,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연화는 상대의 멱살을 잡아 그렇게 건네고픈 마음을 꾹 억누르며 눈을 감았다. 갑자기 매우 피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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