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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3 12:11
구름 한 점 없이 시리게 맑은 날.
수확에 한창이던 농부들이 한 번씩 하늘을 올려다보다 매처럼 날아가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남희신은 난릉을 떠난지 한참이 지나도록 말이 없었다.
본디 나서는 성격이 아닌 금광요는 사람 좋은 남희신이 입을 다물어버리자 더욱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난릉성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괜찮지 않다! 어떻게 괜찮을 수 있단 말이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마자 호되게 얻어맞은 금광요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러버리고 이를 악무는 남희신 본인의 놀라움이 더 컸다.
여태껏 살아오며 그런 식으로 화를 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분노를 느껴본 적이나 있었을지.
그런데...
며칠 전.
남희신은 운심부지처를 떠나 짧은 여행길에 올랐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숙부가 친우에게 빌려준 중요한 서적을 회수했고, 몇 군데의 가문을 방문하고, 마지막에는 난릉에 들러보기로 마음먹었다. 의형제를 맺은지 꽤 되었지만 각자 다른 가문에 몸담고 있으니 명목있는 자리가 아니면 좀체 볼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금광요는 한결같았다. 잡다한 일까지 처리하느라 무척 바빠 보였지만 그다워 보인다고나 할까. 바쁜 중에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남희신을 접대하는 모습이 성실해 보이는 한편 수완도 좋은 느낌이었다.
그는 생기 있어 보이는 금광요가 자리를 잘 잡은 듯하여 만족스러웠다.
금광요는 당일 왔다 떠나려는 남희신을 붙잡았고, 그도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금광요는 정성을 다해 그를 대접했다.
의제를 보고 있자면 누군가 농담삼아 ‘애교 있는 사내’라고 불렀던 말이 떠올랐다. 보비위를 하되 기품을 잃지 않을 정도이고, 박식하고 재치있어 말도 잘했다. 그런 금광요에게 이끌리다 보니, 어느덧 편한 장소도 아닌 금린대에서 며칠이나 머무르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남희신은 지금도 어떤 일이 원인이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평온한 그의 마음에 불을 낸 것은 바로 금가 사람들의 ‘태도’였다.
남희신은 원예에 취미가 있어 혼자 있는 시간에는 곧잘 금린대의 정원을 거닐며 고소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희귀한 화초목들을 구경했다. 그 날도 생소한 꽃송이를 들여다보던 중에, 돌연 왁자지껄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장 다른 가문의 일을 엿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남희신은 몸을 돌리려 했다. 그 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와 귓전에 들이박히며 그의 발목을 잡았다.
“빌어먹을! 네놈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닌지 어떻게 알지?!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본래부터 성질머리가 나쁜 금자훈이었지만 공식석상이 아니라 그런지 말투가 더 거칠었다. 하지만 그의 성질이야 선문 세가 사람들이 다 아는 바, 그의 말 뒤에 금광요의 목소리가 따라오지 않았다면 남희신은 그대로 돌아가버렸을지도 몰랐다.
곧바로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남희신의 발걸음을 완전히 멈춰세웠다.
“자훈, 내가 유시에 떠났다니까. 의심스러우면 아승에게 물어봐.”
금광요에게 지목을 당한 사내는 그러나 금자훈이 무섭게 노려보자 눈을 피하며 머뭇거렸다. 그순간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쨍하니 울려퍼졌다.
금부인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불쑥 금부인이 등장하자 금광요는 변명조차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금광요의 머리를 찔러댈 듯 손가락질을 하며 마구 울분을 토해내었다.
“내가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느냐? 너 말해보렴! 너는 분명히 다 알고 있었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금자훈이 연달아 험한 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남희신은 너무 놀라는 바람에 뻣뻣하게 선 채로 정원 너머를 바라보았다. 깨끗한 두 귀로 일찌기 들어보지 못한 욕설들은 다소곳이 선 금광요가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남희신을 때리고 저미는 듯 가슴이 선뜩했다. 두 사람이 금광요를 가운데 두고 인정사정없이 퍼붓는 모습이란 마치 거적때기에 말아두고 몰매를 때리는 것과도 같았다.
남희신은 지금껏 청담성회나 사냥터에서 금광요가 거친 소리를 듣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렇지만 가주부터가 손님 앞에서도 성이 나면 발로 상을 차 던지는 금광선이었으니, 금가 사람들이 그러려니 하고 넘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나마 타인의 앞에서 갖췄던 겉치레의 예의조차 없었고, 금부인은 마치 악귀가 원수라도 갚는 듯한 무시무시한 형상이었다.
기가 막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희신의 예민한 눈에, 더 멀리 노란 그림자 하나가 어물쩍거리다 건물 뒤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모양의 관을 보아하니 금광선이 틀림없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땅을 박차듯이 튀어나간 남희신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인파를 뚫고 들어가자 그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란 하인들이 바깥에서부터 길을 열어주었다.
귀신같은 얼굴로 욕을 퍼붓던 금부인은 남희신을 보자마자 재깍 멈추었다. 뒤이어 금자훈이 입을 다물었고 수근거리던 다른 사람들의 소란까지 일시에 잦아들었다.
어수선한 정적이 깔린 가운데, 남희신은 먼저 금부인에게 단정한 예를 갖추었다.
“택무군.”
그나마 여자인 금부인 쪽이 감정전환이 빨라서, 얼른 목청을 사그라뜨리며 놀라울 정도로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오신 줄 알았으나 미처 인사도 드리지 못했군요. 광요가 미리 알리지 않는 바람에...”
슬쩍 끼워 넣는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진작부터 남희신이 온 것을 알았지만, 금광요의 손님으로 온 것이 못마땅하여 모른체한 것이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먼저 찾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사적인 방문이라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무슨 말씀을...! 택무군의 방문을 어찌 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언제까지라도 편히 머무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금부인으로서는 금광요가 생판 남이거나, 혹은 하인이었다 해도 체면을 구긴 꼴이었다. 더불어 평소처럼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어딘지 딱딱해 보이는 남희신의 눈빛이 거북하게 느껴지자 얼른 빠져나가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녀가 쌩하니 사라져버린 후에는 분통을 다 터뜨리지 못한 금자훈도 별 수가 없어 억지로 등을 돌리는데 찬바람이 쌩쌩 이는 것 같았다.
하인들마저도 눈치를 보며 흩어지고 난 뒤에는 남희신과 금광요 두 사람만 남았다.
“부끄러운 꼴을 보여 드렸네요.”
가슴 속에서 요동을 치는 미지의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던 남희신은 그 말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무척 충격을 받았다.
금광요의 얼굴은 바로 오늘 아침 문안을 왔던 때와 꼭같이 평온해 보였다.
“아요, 너는...!”
“신경쓰지 마세요, 형님. 다들 다혈질이라 심하게 화를 내다가도 금방 풀어지곤 합니다.”
이제 그들의 폭력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덮으려는 금광요의 태도에 남희신은 세 번째로 충격을 받았다.
고상하고 엄격한 운심부지처에서 자랐어도 세상에 오가는 욕심과 폭력을 모르지는 않았다. 또한 정을 지닌 사람들 간의 충돌과,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 못할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았다.
대체 이럴 수는 없는 법이라고, 머릿속에서는 계속 그 말만이 멍해질 정도로 덧그려졌다.
“금종주는 어디 계시지?”
“네?”
“금종주를 뵈어야겠다. 안내해 다오.”
남희신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금광요는 드물게 딱딱해진 그의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와 함께 금광선을 찾았다.
금광선은 조금 전의 소란통에서 남희신을 보지 못했는지 넉살 좋게 맞아들였다. 흔한 인사치레가 오간 후 남희신이 곧장 부탁이 있다는 말을 꺼내었다.
“호오, 남종주 당신이 우리 가문에 부탁이라? 대체 무슨 일인가?”
“다름이 아니라 광요를 잠시 데려갔으면 합니다. 명색이 형제인데 경황이 없어 여태 숙부님께 인사를 드리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바쁜 때에 자리를 비우는 게 아닌지 저어합니다만...”
그러나 금광선은 무척 반색을 하면서 허락해주었다. 물론 빚이라도 지우는 것처럼 생색을 내는 것도 잊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기쁘게만 보이는 태도를 보고 남희신은 네 번째로 불쾌해졌다.
그래도 그 때까지는 간신히 참고 있던 것을, 끝내는 금광요 본인이 촉발시켜버리고 말았다.
사일지정이 도래하기 전, 남희신과 금광요는 별다른 접점이 없음에도 묘하게 돈독한 관계였다.
남희신은 첫 만남부터 금광요에게 호감을 가졌고, 그의 장점들을 높이 샀기에 존중으로 대했다. 그것만도 이미 보통 이상의 사이였던 것이 우연찮게 목숨 빚을 지며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으며, 현재는 의형제까지 맺은 상태였다.
금광요라면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실수를 했다 쳐도 고의가 아니었을 거라 믿었다. 그가 아무리 천출이라 해도 가족으로 받아들인 이상 그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남희신은 충격적인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양 이빨과 입술을 꽉 다물었다. 무엇보다도 난생 처음 겪어보는 커다란 분노가 그를 당혹케 했다.
금광요는 남희신이 소리를 지른 후 그의 얼굴을 보고서야 그가 심하게 화가 났으며, 감정을 다스릴 방법을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엇이 그토록 남희신을 화나게 만든 건지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바쁘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떠나버리면 어찌 될 것인지, 그 뒷처리는 다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숨통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금광요는 부친이 체면도 아닌 순전한 이득 때문에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금광요는 기산 온씨를 무너뜨리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으니, 그를 받아들이면 사일지정 때 수상했던 난릉 금씨의 태도를 만회할 뿐 아니라 그의 공적까지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그까지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금광선은 금광요를 싫어했고, 그런 속내를 숨기지도 않았다. 그의 불친절한 물결이 아래로 들이쳐 내려 금부인을 위시하여 줄줄이 아랫식구들, 심지어 하인들까지도 금광요를 무시하도록 만들었다. 금광선이 겉치레뿐인 예의만 갖추어 주었어도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대외적인 자리에서도 스스로의 검은 속을 숨기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집 안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금광요는 당장이라도 돌아가야 했다. 드디어 금린대에 입성했으니, 부지런히 공든 석탑을 쌓고 금광선의 비위를 맞추어 진짜 아들로 인정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밤잠도 설쳐 가며 얼마나 애를 쓰고 있었는데, 며칠이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남희신이 그답지 않게 억지를 쓰고 화를 내자 수단이 좋은 금광요도 난처해졌다. 아무래도 며칠은 운심부지처에 머무르며 그의 마음이 풀어지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현재 남희신의 속은 금광요가 짐작도 하지 못할 정도로 비틀린 상태였다. 금광요를 이끌고 금린대를 빠져나오는 그는 마치 늑대의 굴 속에서 어린 양을 건져내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런 류의 증오심이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고 사라질 리 없다. 저런 험한 곳에 금광요를 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가능하면 다시는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나중 일이야 어떻게 되든, 울분이 치밀어올라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게 된 남희신의 현 심정은 그러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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