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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9 21:54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나타난 이들은 구소양과 서호천이었다. 공터에 도착한 두 사람은, 적비성의 모습을 보고 순간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바로 실망하거나 풀이 죽는 대신, 그들은 서로를 가리키며 이연화를 향해 거의 동시에 외쳤다.
"이 문주, 이 녀석이 다른 후보를 공격했습니다!"
이연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두 공자가 서로를 향해 왁왁거리기 전에, 이연화는 한 손을 들어 그들을 막고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동굴 내에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한다고 이야기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 녀석이 다른 후보에게 몰래 독을 쓰는 광경을 봤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 종 공자와 사 가주가 동굴 안에 쓰러져 있습니다. 저는 이 비열한 놈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경공을 펼쳤는데-."
"문주, 이 녀석이 자신의 행동을 덮고자 거짓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런 행동을 한 건 바로 이놈, 서호천입니다."
서호천과 구소양이 버럭버럭 외쳤다. 이연화가 묻기 전, 적비성은 그들을 짜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땅을 한 번 굴렀다. 쿵! 내력이 실린 장중한 진동에, 두 청년의 시선이 적비성을 향해 돌아갔다. 적비성은 수하에게 지시하는 금원맹주의 태도로 물었다.
"쓰러진 사람은 그 둘뿐이냐?"
"아니, 당신은 왜 다짜고짜 하대를...."
"이곳으로 오면서 두 명이 더 쓰러진 걸 봤는데, 구 공자에게 따라잡힐까봐 빠르게 지나쳐 정확한 신원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불쾌감을 표하던 구소양의 옆에서, 서호천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 한 손은 언제라도 쏘아질 수 있도록 구소양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연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런. 두 사람이 동시에 빠르게 지나치면서 보았다면, 반칙을 쓴 이가 한 명이 아니라는 뜻이겠군요."
"어쨌든 이놈은 당장 제압해야 합니다. 이런 중대사에 감히 비겁한 편법을 사용하려 들다니요!"
서호천이 분기탱천한 얼굴로 외쳤다. 구소양 역시 똑같은 표정을 지은 채 얼굴을 붉혔다.
"지금 어디서 망발이야! 편법이라면 제놈이 사용한 것을!"
"자, 자. 범인은 둘째 치고, 일단 쓰러지신 분들의 안위가 걱정입니다. 목적이 이곳에 먼저 도달하는 것뿐이었다면 감히 명문가의 분들께 극독을 쓰진 않았겠으나, 그래도 쓰러지면서 어디를 다치셨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저와 동행하여 그 장소를 알려주시면-."
"쓰러진 사람들은 내가 확인하지. 너-문주는 여기 계시오."
적비성이 무뚝뚝하게 건네며 나섰다. 이연화는 멈칫했지만, 딱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적비성이 차가운 눈으로 두 공자를 바라보았다. 둘 중 누가 적이든, 이연화를 꾀어내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을지 몰랐다. 첩자가 혼절한 척 위장하여 쓰러진 이들 사이에 섞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때마침, 동굴 안으로 성대경과 추영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성대경은 그래도 무가의 사람답게 발이 빨랐지만, 추영인은 그 뒤에서 죽을상을 한 채로 비틀비틀 달려오고 있었다. 그 얼굴이 온통 땀투성이였다. 속도 차이를 보니, 아마 추영인이 운이 좋아 지름길을 택한 듯했다. 공터에 다다르자마자, 성대경이 날카로운 눈으로 구소양을 쏘아보았다.
"문주, 저 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독을 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시험의 결과와 무관하게, 구 공자는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뭐-우린 만나지도 않았잖습니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예? 독이요? 어디서 싸움이 있었습니까?"
구소양이 놀라 외치고, 추영인이 맹하게 물었다. 참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적비성이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발을 굴렀다. 조금 전보다 큰 소리가 공터를 울리자, 이번에는 네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적비성이 공터 밖을 향해 고갯짓했다.
"쓰러진 사람들을 본 자들은 밖으로 나와라. 현장으로 안내해."
"왜 다짜고짜 하대를...우리가 왜 당신 말에 따라야 하오? 당신보다는 신의로 불렸던 문주를 안내하는 것이 맞지요."
성대경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귀찮은데, 한 놈을 반죽음으로 만들면 순순히들 따라 나오지 않을까? 적비성이 그 생각을 당장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주먹에 힘을 주자, 이연화가 급한 소리를 내며 얼른 끼어들었다.
"제 얼굴을 보아서라도 이 사람의 말을 따라 주시지요. 이 사람은 몇 가지 치료술을 아는 데다 기감이 좋으니, 함께 가면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혹시 쓰러진 분들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당장 동굴 밖으로 옮겨 주십시오. 기다리는 이들 중 의원이 있습니다."
이연화가 매우 성실하고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성대경과 서호천, 구소양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로를 힐끔거렸으나 이연화의 맑은 눈과 적비성의 험악한 눈에 떠밀리듯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추영인은 헐떡이면서, 막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수련생처럼 퍼질러 앉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적비성은 양을 모는 늑대마냥 세 남자를 먼저 앞장세우고, 이연화에게 낮게 건넸다.
"경계를 늦추지 말고 있어라."
"음. 아비, 무슨 일이 생겨도 너무 화내지 마."
이연화의 말에, 적비성은 코웃음을 쳤다. "화내지 않는다. 불순하게 구는 놈은 죽이거나 패면 될 일이지." 이연화가 한쪽 입매만 살짝 올려 웃었다. 적비성이 훌쩍 사라지기 전, 이연화가 전음으로 건넸다. 나가서 불여우를 찾아. 적비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그 개의 이름이 왜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후보들 중 세 명의 첩자를 가려내는 일이 급했다.
비록 이연화만큼 이 동굴에 익숙하지는 않았으나, 적비성은 예민한 기감과 오감으로 쓰러진 후보들의 위치를 찾아냈다. 길고 복잡한 통로에서, 그들이 먼저 마주친 피해자 둘은 종려명과 사인백이었다. 적비성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종려명의 목덜미에 손을 대 보았다. 숨은 문제 없이 붙어 있었으나, 체내에 미약한 마비독이 돌고 있었다. 내력을 불어넣어 독을 약간 밀어내자, 종려명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그 뒤에서 곧 혼몽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적비성이 물었다.
"누가 이랬지?"
"뒤에서 갑자기...잘 보지 못했습니다...."
종려명이 신음처럼 말했다. 구소양이 그 옆으로 다가와 외쳤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종 공자! 분명 서 공자가 아니었습니까?" 종려명이 모르겠다며 힘없이 고개를 젓는 사이, 적비성은 그 곁에 쓰러졌던 사인백의 상태를 확인했다.
사인백의 독기운도 밀어내기 전, 종려명이 적비성의 손을 잡았다. 적비성이 미간을 좁히고는 돌아보았다. "다...다른 분들은 괜찮으십니까?" 종려명이 타인을 걱정하는 의원처럼 물었다. 그 사이, 그 검지가 느리게 움직여 적비성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 어떤 인물의 성씨였다. '서.' 그 글자를 확인한 순간, 적비성은 등 뒤로 장을 날렸다. 기척 없이 다가오던 인물이 억 소리와 함께 두어 발짝 밀려났다.
서호천이 가슴팍을 움켜쥔 채 적비성을 노려보았다. 그 손에 가느다란 침이 하나 들려 있었다. 퍼뜩 돌아보니, 똑같은 침이 막 구소양의 뒷목에 꽂힌 참이었다. 구소양의 얼굴이 벌게졌다. 청년은 대번에 침을 뽑아내고는, 분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돌려 성대경을 노려보았다. "너, 이놈-." 하지만 구소양은 오래 욕하지 못했다. 청년은 잠시 비틀거리다가, 자리에 풀썩 고꾸라져 의식을 잃었다.
적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차라리 적의 정체가 확실해지니 상쾌할 지경이었다. 전신을 긴장시킨 채, 성대경은 적비성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서호천에게 건넸다.
"다 죽여야 해."
"죽이자고? 이 자나 구씨 놈은 상관없지만, 종려명이나 사인백은 좀...."
서호천이 잠시 주저했다. 성대경이 혀를 차며 서호천을 흘겨보았다.
"네놈이 멍청하게 구씨 놈에게 들킨 순간부터 이미 계획은 틀어졌어. 어찌어찌 나간대도 몸수색을 피할 수 없었을 테고, 그러면 버릴 틈도 없이 마비침이 발각됐겠지. 다 처리해 버리고, 이 수상한 놈이나 여우 탓으로 몰아가야 우리와 가문이 살아."
"여우 탓으로 몰겠다고? 그럼 네놈이 뱀이겠군."
적비성이 서호천을 향해 건넸다. 서호천이 화들짝 적비성을 보았다.
"그걸 어떻게-."
"중요치 않다. 연회 자리에서는 이연화를 정말 우러러보는 것 같았는데, 모두 연기였나?"
"아, 아냐! 연기가 아니니까 이런 일도 하는 거라고."
서호천이 발끈해서 대꾸했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이상이 이야기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이런 계획에 자원했다고? 그야말로 얼척이 없는 소리였다. 그 해괴함을 지적하는 대신, 적비성은 느슨히 뒷짐을 진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덤빌 거라면 빨리 덤벼라. 이런 촌극은 빨리 끝내고 싶으니." 파리에게 말을 걸듯이 건네자, 두 사내의 얼굴이 험해졌다. 성대경이 외쳤다.
"네가 맹용강을 절단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무가의 고수 둘을 앞에 두고 너무 자만하는구나!"
"고수? 세상의 고수가 모두 죽었다더냐."
적비성이 대놓고 비웃었다. 아무래도 약이 올랐는지, 두 청년이 동시에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자세를 보니 서호천은 권법으로, 성대경은 품에 있는 독약이나 암기 따위로 공격하려는 모양이었다. 곧 독탄과 표창, 독사의 머리를 닮은 권이 동시에 밀어닥쳤다. 적비성이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예상보다는 훌륭하고 기민한 협공이었다. 둘이 합쳐서 고수 한 명 정도는 되겠군. 적비성이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상대적으로 운신의 폭이 협소한 지리적 조건을 생각할 때, 웬만한 사람은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나려다 쓰러진 이들에게 발이 걸릴 터였다.
하지만 적비성은 공격을 피할 필요가 없었다. 내력을 끌어올리며 오른손을 내지르자, 폭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강맹한 힘이 뻗어 나갔다. 두 남자는 거인의 철퇴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날아가, 동굴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요란하게 땅바닥을 구른 성대경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비풍...비풍백양!" 성대경이 새파랗게 질려 부르짖었다. 서호천은 입으로 넘어오는 피를 바닥에 뱉고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그 얼굴로 불신과 경악이 서렸다.
"비풍백양이라니...금원맹주?"
"여우는 누구냐?"
적비성이 냉담하게 물었다. "맹주, 맹주가 어째서 여기에...." 성대경이 넋 나간 얼굴로 더듬거렸다. 반사적으로 꼬리를 내리는 꼴을 보니, 아마도 각려초의 끄나풀이었던 듯했다. "그, 금원맹주라고? 저 자가?" 서호천이 당황해 말했다.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시간 낭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흐릿한 잔영이 생길 만큼 빠르게 이동하여, 금원맹주는 양손에 두 청년의 숨통을 틀어쥐었다. 내력을 인정사정없이 불어넣어 강기로 상대의 내부를 휘젓자, 두 개의 입에서 비명과 피가 함께 터졌다. 간단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종류의 고문이었다. 적비성이 창끝처럼 형형한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너희 둘 중, 먼저 대답하는 쪽이 산다. 여우는 누구냐?"
두 사람의 얼굴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번졌다. 설령 나름대로 강한 동기나 신념을 가졌다 해도, 성대경과 서호천은 어쨌든 번듯한 집안에서 받들어지며 자란 젊은 공자들이었다. 그들에겐 아직 생사의 고비를 넘어야만 가질 수 있는 굳은 심지가 없었다. 적비성은 그 나약함에 내심 코웃음을 쳤다. 이런 애송이들을 보고 있으니, 차라리 방다병의 만용 같은 기개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중 성대경이 먼저 입을 열었을 때, 적비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 청년의 혈도를 찍은 다음 사정없이 팽개쳐 놓고, 적비성은 날듯이 땅을 박차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무언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염려하는 결과가 생기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으나, 어쩐지 가슴이 불길하게 두근거렸다.
공터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작은 샘과 흰 나무만이 적막했다. 사람의 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연화." 적비성이 언성을 높여 불렀다. 하지만 주변은 여전히 조용했다. 적비성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 해도, 이연화 정도의 고수가 허를 찔려 끌려갔을 리는 없었다. 본인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고서야-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성이던 발이 우뚝 멎었다.
헤어지기 전, 이연화가 무슨 일이 생겨도 화내지 말라 당부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당시의 금원맹주는 그 '무슨 일'을 일으킬 자가 물론 적이리라 생각했다. 적비성의 턱으로 힘이 들어갔다. 상황이 급해 붙들고 다그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왜 이연화 본인이 '무슨 일'의 주체가 되리라는 짐작은 하지 않았던가? 분명 사고 혹은 사기를 치기 직전의, 그 얄미우면서도 못 미더운 분위기가 희미하게 느껴졌는데. 적의 의도를 보겠답시고 독도 꿀꺽 마셔버렸던 무모한 놈인데! 적비성이 분을 담아 크게 외쳤다. 공터가 은은히 진동할 정도였다.
"이연화!"
-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적비성을 비롯한 네 명이 공터 밖으로 사라졌을 때, 이연화는 친절한 투로 건네며 추영인에게 수통을 건네주었다. 동굴 안의 샘에서 길어올린 물이었다. 후들거리는 팔로 물을 마신 추영인이 힘없이 웃었다. 막 나타났을 때에 비하면, 그 낯빛이 한결 사람처럼 돌아와 있었다.
"하하...보시기에 좀 우습지요? 그래도 후회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우습기는요. 오히려 그리 진심을 다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래도 결국 마지막 후보가 되지는 못했네요."
추영인이 고개를 숙인 채 물통을 만지작거렸다. 잠깐 시무룩하게 웅크렸던 청년은, 곧 손에 들었던 물건을 돌려주었다. 물통을 받은 이연화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아무 말 없이, 이연화는 흰 나무 앞에 선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한 곳의 구멍에서 햇살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경공의 고수라면 벽을 박차 저 구멍까지 오를 만도 했다. 샘 근처에 주저앉았던 추영인이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놀랐습니다. 후보들 중에 그런 수법을 쓰는 자가 있다니...모두 점잖으신 분들처럼 보였는데요."
"음. 저도 조금 의외였습니다. 그분들도 그렇고, 추 공자에 대해서도요."
"저요? 무엇이 말입니까?"
추영인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연화가 어깨너머를 슬쩍 돌아보며 건넸다.
"백천원의 증거 보관실은, 감옥만큼은 아니나 꽤 잘 지켜지는 곳이지요. 밤에 경보를 울리지 않고 들어갔다 나오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여야 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추 공자의 손에 닿았을 때-아, 물론 이상한 의미는 아닙니다. 저는 그때 공자가 주신 이화 옥패를 받던 중이었으니까요. 어쨌든, 그때의 추 공자는 무공이라곤 전혀 모르는 서생이셨지요. 그런데 그제 밤에는 위험한 밤 나들이를 성공적으로 다녀오셨나 봅니다."
이연화가 추영인의 손을 힐끔 보았다. 그 손바닥에는, 조금 흐릿하지만 분명 검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움찔한 추영인의 낯이 벌게졌다.
"아, 그게, 저, 부끄럽습니다...그저 운이 좋아 들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때 마침 다른 침입자가 있어, 지키던 이들이 그 뒤를 따라갔거든요. 저는 그 틈을 타서 잠깐...들어갔다 나왔습니다. 하, 하지만 그 안에는 이미 아무 내용도 없었어요. 제 답은 순전한 제 생각이었습니다."
추영인이 얼른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연화가 다소 극적인 오,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거기 가셨던 분이 하나는 아니니까요." 그리 심각하지 않은 태도로, 이연화는 몸을 돌려 추영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가 이화 옥패를 받을 수는 없지요. 공자가 그때 제게 주신 것은 연화 옥패였으니까요."
추영인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줄곧 쩔쩔매던 남자는, 순간 표정을 잃은 사람처럼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이연화가 빙그레 웃었다.
"옛이야기에 이르길, 여우는 둔갑을 잘한다지요? 진짜 추 공자는 어디에 두고 오셨습니까?"
상대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추영인의 얼굴을 한 남자는, 이연화 너머의 입구를 힐끗 보았다. 누군가가 나타날 상황을 경계하는 듯했다.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상대에게 등을 보였다. 언뜻 보면 고수의 오만함이라고 비칠 법한 행동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당신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언제부터 알았지?"
추영인의 목소리가 아닌, 낮고 걸걸한 음성이었다.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확신은 지금 얻었지요." 상대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한발 늦었소, 이 문주. 당신은 이미 중독된 상태야."
알고 있어. 네가 돌려준 물통에 독이 묻어 있었으니까. 이연화는 내심 심드렁하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홱 고개를 돌려 추영인을 바라보며 놀라고 당혹한 연기를 실감나게 펼쳤다. 십 년을 떠돌면서 톡톡히 계발한 능력이었다. 미간을 좁히고 스스로의 혈도를 짚기 전, 상대가 예상보다 더 빠른 경공을 펼쳐 다가왔다. 이연화가 매우 분한 표정을 지으며 두어 발짝 물러났다. 상대가 피식 웃었다.
"물론 양주만이라면 뭐든 해독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그럴 여유를 주겠소? 내 정체를 알아냈다는 사실에 방심했군."
방심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었으나, 이연화는 어쨌든 중독된 사람의 모범적인 태도를 취했다. 연회장에서 피를 뱉었을 때처럼 독이 몸을 돌도록 내버려두니, 곧 수마가 밀려오며 몸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그래도, 출수 한 번 하지 않으면 의심을 받겠지? 비틀거리다 흰 나무를 짚은 이연화가, 상대를 노려보며 발로 땅의 돌 조각을 힘껏 튕겼다. 오히려 여우 본인이 잠깐 방심했던지, 남자가 놀란 소리를 내며 고개를 틀었다. 그 뺨으로 긴 생채기가 나면서, 인피면구의 일부가 찢어져 너덜거렸다. 앗, 다행이다. 잘못하면 미간에 꽂아 죽일 뻔했네. 적이 듣는다면 그 뻔뻔함에 넋이 나갈 생각을 하면서, 이연화는 천천히 자리에 쓰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이연화를 어깨에 둘러 멨다. 몸으로 느껴지는 격한 반동을 보니, 아마도 동굴 벽을 디디며 곧장 바깥을 향하는 모양이었다.
음, 미안해. 어쨌든, 큰 미끼를 내던져야 정말 위험한 짐승을 꾀어낼 수 있지 않겠어? 이번엔 몇 년씩 고생하기보다, 며칠 정도 고생한 다음 끝내고 싶거든...그런데 내가 지금 속으로 방다병한테 말하는 거야, 적비성한테 말하는 거야? 이연화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어느 쪽이든, 다시 만났을 때 그리 고운 얼굴을 하고 있을 듯하지는 않았다. 이연화는 그때를 위한 변명을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나타난 이들은 구소양과 서호천이었다. 공터에 도착한 두 사람은, 적비성의 모습을 보고 순간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바로 실망하거나 풀이 죽는 대신, 그들은 서로를 가리키며 이연화를 향해 거의 동시에 외쳤다.
"이 문주, 이 녀석이 다른 후보를 공격했습니다!"
이연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두 공자가 서로를 향해 왁왁거리기 전에, 이연화는 한 손을 들어 그들을 막고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동굴 내에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한다고 이야기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 녀석이 다른 후보에게 몰래 독을 쓰는 광경을 봤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 종 공자와 사 가주가 동굴 안에 쓰러져 있습니다. 저는 이 비열한 놈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경공을 펼쳤는데-."
"문주, 이 녀석이 자신의 행동을 덮고자 거짓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런 행동을 한 건 바로 이놈, 서호천입니다."
서호천과 구소양이 버럭버럭 외쳤다. 이연화가 묻기 전, 적비성은 그들을 짜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땅을 한 번 굴렀다. 쿵! 내력이 실린 장중한 진동에, 두 청년의 시선이 적비성을 향해 돌아갔다. 적비성은 수하에게 지시하는 금원맹주의 태도로 물었다.
"쓰러진 사람은 그 둘뿐이냐?"
"아니, 당신은 왜 다짜고짜 하대를...."
"이곳으로 오면서 두 명이 더 쓰러진 걸 봤는데, 구 공자에게 따라잡힐까봐 빠르게 지나쳐 정확한 신원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불쾌감을 표하던 구소양의 옆에서, 서호천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 한 손은 언제라도 쏘아질 수 있도록 구소양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연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런. 두 사람이 동시에 빠르게 지나치면서 보았다면, 반칙을 쓴 이가 한 명이 아니라는 뜻이겠군요."
"어쨌든 이놈은 당장 제압해야 합니다. 이런 중대사에 감히 비겁한 편법을 사용하려 들다니요!"
서호천이 분기탱천한 얼굴로 외쳤다. 구소양 역시 똑같은 표정을 지은 채 얼굴을 붉혔다.
"지금 어디서 망발이야! 편법이라면 제놈이 사용한 것을!"
"자, 자. 범인은 둘째 치고, 일단 쓰러지신 분들의 안위가 걱정입니다. 목적이 이곳에 먼저 도달하는 것뿐이었다면 감히 명문가의 분들께 극독을 쓰진 않았겠으나, 그래도 쓰러지면서 어디를 다치셨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저와 동행하여 그 장소를 알려주시면-."
"쓰러진 사람들은 내가 확인하지. 너-문주는 여기 계시오."
적비성이 무뚝뚝하게 건네며 나섰다. 이연화는 멈칫했지만, 딱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적비성이 차가운 눈으로 두 공자를 바라보았다. 둘 중 누가 적이든, 이연화를 꾀어내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을지 몰랐다. 첩자가 혼절한 척 위장하여 쓰러진 이들 사이에 섞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때마침, 동굴 안으로 성대경과 추영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성대경은 그래도 무가의 사람답게 발이 빨랐지만, 추영인은 그 뒤에서 죽을상을 한 채로 비틀비틀 달려오고 있었다. 그 얼굴이 온통 땀투성이였다. 속도 차이를 보니, 아마 추영인이 운이 좋아 지름길을 택한 듯했다. 공터에 다다르자마자, 성대경이 날카로운 눈으로 구소양을 쏘아보았다.
"문주, 저 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독을 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시험의 결과와 무관하게, 구 공자는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뭐-우린 만나지도 않았잖습니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예? 독이요? 어디서 싸움이 있었습니까?"
구소양이 놀라 외치고, 추영인이 맹하게 물었다. 참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적비성이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발을 굴렀다. 조금 전보다 큰 소리가 공터를 울리자, 이번에는 네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적비성이 공터 밖을 향해 고갯짓했다.
"쓰러진 사람들을 본 자들은 밖으로 나와라. 현장으로 안내해."
"왜 다짜고짜 하대를...우리가 왜 당신 말에 따라야 하오? 당신보다는 신의로 불렸던 문주를 안내하는 것이 맞지요."
성대경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귀찮은데, 한 놈을 반죽음으로 만들면 순순히들 따라 나오지 않을까? 적비성이 그 생각을 당장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주먹에 힘을 주자, 이연화가 급한 소리를 내며 얼른 끼어들었다.
"제 얼굴을 보아서라도 이 사람의 말을 따라 주시지요. 이 사람은 몇 가지 치료술을 아는 데다 기감이 좋으니, 함께 가면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혹시 쓰러진 분들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당장 동굴 밖으로 옮겨 주십시오. 기다리는 이들 중 의원이 있습니다."
이연화가 매우 성실하고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성대경과 서호천, 구소양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로를 힐끔거렸으나 이연화의 맑은 눈과 적비성의 험악한 눈에 떠밀리듯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추영인은 헐떡이면서, 막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수련생처럼 퍼질러 앉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적비성은 양을 모는 늑대마냥 세 남자를 먼저 앞장세우고, 이연화에게 낮게 건넸다.
"경계를 늦추지 말고 있어라."
"음. 아비, 무슨 일이 생겨도 너무 화내지 마."
이연화의 말에, 적비성은 코웃음을 쳤다. "화내지 않는다. 불순하게 구는 놈은 죽이거나 패면 될 일이지." 이연화가 한쪽 입매만 살짝 올려 웃었다. 적비성이 훌쩍 사라지기 전, 이연화가 전음으로 건넸다. 나가서 불여우를 찾아. 적비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그 개의 이름이 왜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후보들 중 세 명의 첩자를 가려내는 일이 급했다.
비록 이연화만큼 이 동굴에 익숙하지는 않았으나, 적비성은 예민한 기감과 오감으로 쓰러진 후보들의 위치를 찾아냈다. 길고 복잡한 통로에서, 그들이 먼저 마주친 피해자 둘은 종려명과 사인백이었다. 적비성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종려명의 목덜미에 손을 대 보았다. 숨은 문제 없이 붙어 있었으나, 체내에 미약한 마비독이 돌고 있었다. 내력을 불어넣어 독을 약간 밀어내자, 종려명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그 뒤에서 곧 혼몽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적비성이 물었다.
"누가 이랬지?"
"뒤에서 갑자기...잘 보지 못했습니다...."
종려명이 신음처럼 말했다. 구소양이 그 옆으로 다가와 외쳤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종 공자! 분명 서 공자가 아니었습니까?" 종려명이 모르겠다며 힘없이 고개를 젓는 사이, 적비성은 그 곁에 쓰러졌던 사인백의 상태를 확인했다.
사인백의 독기운도 밀어내기 전, 종려명이 적비성의 손을 잡았다. 적비성이 미간을 좁히고는 돌아보았다. "다...다른 분들은 괜찮으십니까?" 종려명이 타인을 걱정하는 의원처럼 물었다. 그 사이, 그 검지가 느리게 움직여 적비성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 어떤 인물의 성씨였다. '서.' 그 글자를 확인한 순간, 적비성은 등 뒤로 장을 날렸다. 기척 없이 다가오던 인물이 억 소리와 함께 두어 발짝 밀려났다.
서호천이 가슴팍을 움켜쥔 채 적비성을 노려보았다. 그 손에 가느다란 침이 하나 들려 있었다. 퍼뜩 돌아보니, 똑같은 침이 막 구소양의 뒷목에 꽂힌 참이었다. 구소양의 얼굴이 벌게졌다. 청년은 대번에 침을 뽑아내고는, 분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돌려 성대경을 노려보았다. "너, 이놈-." 하지만 구소양은 오래 욕하지 못했다. 청년은 잠시 비틀거리다가, 자리에 풀썩 고꾸라져 의식을 잃었다.
적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차라리 적의 정체가 확실해지니 상쾌할 지경이었다. 전신을 긴장시킨 채, 성대경은 적비성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서호천에게 건넸다.
"다 죽여야 해."
"죽이자고? 이 자나 구씨 놈은 상관없지만, 종려명이나 사인백은 좀...."
서호천이 잠시 주저했다. 성대경이 혀를 차며 서호천을 흘겨보았다.
"네놈이 멍청하게 구씨 놈에게 들킨 순간부터 이미 계획은 틀어졌어. 어찌어찌 나간대도 몸수색을 피할 수 없었을 테고, 그러면 버릴 틈도 없이 마비침이 발각됐겠지. 다 처리해 버리고, 이 수상한 놈이나 여우 탓으로 몰아가야 우리와 가문이 살아."
"여우 탓으로 몰겠다고? 그럼 네놈이 뱀이겠군."
적비성이 서호천을 향해 건넸다. 서호천이 화들짝 적비성을 보았다.
"그걸 어떻게-."
"중요치 않다. 연회 자리에서는 이연화를 정말 우러러보는 것 같았는데, 모두 연기였나?"
"아, 아냐! 연기가 아니니까 이런 일도 하는 거라고."
서호천이 발끈해서 대꾸했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이상이 이야기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이런 계획에 자원했다고? 그야말로 얼척이 없는 소리였다. 그 해괴함을 지적하는 대신, 적비성은 느슨히 뒷짐을 진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덤빌 거라면 빨리 덤벼라. 이런 촌극은 빨리 끝내고 싶으니." 파리에게 말을 걸듯이 건네자, 두 사내의 얼굴이 험해졌다. 성대경이 외쳤다.
"네가 맹용강을 절단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무가의 고수 둘을 앞에 두고 너무 자만하는구나!"
"고수? 세상의 고수가 모두 죽었다더냐."
적비성이 대놓고 비웃었다. 아무래도 약이 올랐는지, 두 청년이 동시에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자세를 보니 서호천은 권법으로, 성대경은 품에 있는 독약이나 암기 따위로 공격하려는 모양이었다. 곧 독탄과 표창, 독사의 머리를 닮은 권이 동시에 밀어닥쳤다. 적비성이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예상보다는 훌륭하고 기민한 협공이었다. 둘이 합쳐서 고수 한 명 정도는 되겠군. 적비성이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상대적으로 운신의 폭이 협소한 지리적 조건을 생각할 때, 웬만한 사람은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나려다 쓰러진 이들에게 발이 걸릴 터였다.
하지만 적비성은 공격을 피할 필요가 없었다. 내력을 끌어올리며 오른손을 내지르자, 폭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강맹한 힘이 뻗어 나갔다. 두 남자는 거인의 철퇴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날아가, 동굴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요란하게 땅바닥을 구른 성대경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비풍...비풍백양!" 성대경이 새파랗게 질려 부르짖었다. 서호천은 입으로 넘어오는 피를 바닥에 뱉고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그 얼굴로 불신과 경악이 서렸다.
"비풍백양이라니...금원맹주?"
"여우는 누구냐?"
적비성이 냉담하게 물었다. "맹주, 맹주가 어째서 여기에...." 성대경이 넋 나간 얼굴로 더듬거렸다. 반사적으로 꼬리를 내리는 꼴을 보니, 아마도 각려초의 끄나풀이었던 듯했다. "그, 금원맹주라고? 저 자가?" 서호천이 당황해 말했다.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시간 낭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흐릿한 잔영이 생길 만큼 빠르게 이동하여, 금원맹주는 양손에 두 청년의 숨통을 틀어쥐었다. 내력을 인정사정없이 불어넣어 강기로 상대의 내부를 휘젓자, 두 개의 입에서 비명과 피가 함께 터졌다. 간단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종류의 고문이었다. 적비성이 창끝처럼 형형한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너희 둘 중, 먼저 대답하는 쪽이 산다. 여우는 누구냐?"
두 사람의 얼굴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번졌다. 설령 나름대로 강한 동기나 신념을 가졌다 해도, 성대경과 서호천은 어쨌든 번듯한 집안에서 받들어지며 자란 젊은 공자들이었다. 그들에겐 아직 생사의 고비를 넘어야만 가질 수 있는 굳은 심지가 없었다. 적비성은 그 나약함에 내심 코웃음을 쳤다. 이런 애송이들을 보고 있으니, 차라리 방다병의 만용 같은 기개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중 성대경이 먼저 입을 열었을 때, 적비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 청년의 혈도를 찍은 다음 사정없이 팽개쳐 놓고, 적비성은 날듯이 땅을 박차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무언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염려하는 결과가 생기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으나, 어쩐지 가슴이 불길하게 두근거렸다.
공터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작은 샘과 흰 나무만이 적막했다. 사람의 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연화." 적비성이 언성을 높여 불렀다. 하지만 주변은 여전히 조용했다. 적비성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 해도, 이연화 정도의 고수가 허를 찔려 끌려갔을 리는 없었다. 본인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고서야-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성이던 발이 우뚝 멎었다.
헤어지기 전, 이연화가 무슨 일이 생겨도 화내지 말라 당부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당시의 금원맹주는 그 '무슨 일'을 일으킬 자가 물론 적이리라 생각했다. 적비성의 턱으로 힘이 들어갔다. 상황이 급해 붙들고 다그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왜 이연화 본인이 '무슨 일'의 주체가 되리라는 짐작은 하지 않았던가? 분명 사고 혹은 사기를 치기 직전의, 그 얄미우면서도 못 미더운 분위기가 희미하게 느껴졌는데. 적의 의도를 보겠답시고 독도 꿀꺽 마셔버렸던 무모한 놈인데! 적비성이 분을 담아 크게 외쳤다. 공터가 은은히 진동할 정도였다.
"이연화!"
-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적비성을 비롯한 네 명이 공터 밖으로 사라졌을 때, 이연화는 친절한 투로 건네며 추영인에게 수통을 건네주었다. 동굴 안의 샘에서 길어올린 물이었다. 후들거리는 팔로 물을 마신 추영인이 힘없이 웃었다. 막 나타났을 때에 비하면, 그 낯빛이 한결 사람처럼 돌아와 있었다.
"하하...보시기에 좀 우습지요? 그래도 후회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우습기는요. 오히려 그리 진심을 다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래도 결국 마지막 후보가 되지는 못했네요."
추영인이 고개를 숙인 채 물통을 만지작거렸다. 잠깐 시무룩하게 웅크렸던 청년은, 곧 손에 들었던 물건을 돌려주었다. 물통을 받은 이연화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아무 말 없이, 이연화는 흰 나무 앞에 선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한 곳의 구멍에서 햇살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경공의 고수라면 벽을 박차 저 구멍까지 오를 만도 했다. 샘 근처에 주저앉았던 추영인이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놀랐습니다. 후보들 중에 그런 수법을 쓰는 자가 있다니...모두 점잖으신 분들처럼 보였는데요."
"음. 저도 조금 의외였습니다. 그분들도 그렇고, 추 공자에 대해서도요."
"저요? 무엇이 말입니까?"
추영인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연화가 어깨너머를 슬쩍 돌아보며 건넸다.
"백천원의 증거 보관실은, 감옥만큼은 아니나 꽤 잘 지켜지는 곳이지요. 밤에 경보를 울리지 않고 들어갔다 나오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여야 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추 공자의 손에 닿았을 때-아, 물론 이상한 의미는 아닙니다. 저는 그때 공자가 주신 이화 옥패를 받던 중이었으니까요. 어쨌든, 그때의 추 공자는 무공이라곤 전혀 모르는 서생이셨지요. 그런데 그제 밤에는 위험한 밤 나들이를 성공적으로 다녀오셨나 봅니다."
이연화가 추영인의 손을 힐끔 보았다. 그 손바닥에는, 조금 흐릿하지만 분명 검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움찔한 추영인의 낯이 벌게졌다.
"아, 그게, 저, 부끄럽습니다...그저 운이 좋아 들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때 마침 다른 침입자가 있어, 지키던 이들이 그 뒤를 따라갔거든요. 저는 그 틈을 타서 잠깐...들어갔다 나왔습니다. 하, 하지만 그 안에는 이미 아무 내용도 없었어요. 제 답은 순전한 제 생각이었습니다."
추영인이 얼른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연화가 다소 극적인 오,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거기 가셨던 분이 하나는 아니니까요." 그리 심각하지 않은 태도로, 이연화는 몸을 돌려 추영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가 이화 옥패를 받을 수는 없지요. 공자가 그때 제게 주신 것은 연화 옥패였으니까요."
추영인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줄곧 쩔쩔매던 남자는, 순간 표정을 잃은 사람처럼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이연화가 빙그레 웃었다.
"옛이야기에 이르길, 여우는 둔갑을 잘한다지요? 진짜 추 공자는 어디에 두고 오셨습니까?"
상대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추영인의 얼굴을 한 남자는, 이연화 너머의 입구를 힐끗 보았다. 누군가가 나타날 상황을 경계하는 듯했다.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상대에게 등을 보였다. 언뜻 보면 고수의 오만함이라고 비칠 법한 행동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당신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언제부터 알았지?"
추영인의 목소리가 아닌, 낮고 걸걸한 음성이었다.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확신은 지금 얻었지요." 상대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한발 늦었소, 이 문주. 당신은 이미 중독된 상태야."
알고 있어. 네가 돌려준 물통에 독이 묻어 있었으니까. 이연화는 내심 심드렁하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홱 고개를 돌려 추영인을 바라보며 놀라고 당혹한 연기를 실감나게 펼쳤다. 십 년을 떠돌면서 톡톡히 계발한 능력이었다. 미간을 좁히고 스스로의 혈도를 짚기 전, 상대가 예상보다 더 빠른 경공을 펼쳐 다가왔다. 이연화가 매우 분한 표정을 지으며 두어 발짝 물러났다. 상대가 피식 웃었다.
"물론 양주만이라면 뭐든 해독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그럴 여유를 주겠소? 내 정체를 알아냈다는 사실에 방심했군."
방심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었으나, 이연화는 어쨌든 중독된 사람의 모범적인 태도를 취했다. 연회장에서 피를 뱉었을 때처럼 독이 몸을 돌도록 내버려두니, 곧 수마가 밀려오며 몸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그래도, 출수 한 번 하지 않으면 의심을 받겠지? 비틀거리다 흰 나무를 짚은 이연화가, 상대를 노려보며 발로 땅의 돌 조각을 힘껏 튕겼다. 오히려 여우 본인이 잠깐 방심했던지, 남자가 놀란 소리를 내며 고개를 틀었다. 그 뺨으로 긴 생채기가 나면서, 인피면구의 일부가 찢어져 너덜거렸다. 앗, 다행이다. 잘못하면 미간에 꽂아 죽일 뻔했네. 적이 듣는다면 그 뻔뻔함에 넋이 나갈 생각을 하면서, 이연화는 천천히 자리에 쓰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이연화를 어깨에 둘러 멨다. 몸으로 느껴지는 격한 반동을 보니, 아마도 동굴 벽을 디디며 곧장 바깥을 향하는 모양이었다.
음, 미안해. 어쨌든, 큰 미끼를 내던져야 정말 위험한 짐승을 꾀어낼 수 있지 않겠어? 이번엔 몇 년씩 고생하기보다, 며칠 정도 고생한 다음 끝내고 싶거든...그런데 내가 지금 속으로 방다병한테 말하는 거야, 적비성한테 말하는 거야? 이연화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어느 쪽이든, 다시 만났을 때 그리 고운 얼굴을 하고 있을 듯하지는 않았다. 이연화는 그때를 위한 변명을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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